2019년 4월 22일 월요일

윤호진 박사의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에 대한 답변

네이버, 다음, 구글 검색에서 윤호진 박사로 검색하면 필자의 답변 글이 나옵니다ㅡ검색어 <윤호진 박사>




윤호진 박사의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
에 대한 필자의 답변입니다 
(여기에 관심을 두는 까닭은 불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에 참고가 될까 하는 오직 그 이유뿐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라는 문제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글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백프로 동감. 기독교와 불교의 올바른 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두 종교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럴 수 없는 벽을 서로가 확실하게 아는 일일 것ㅡ필자도 그것이 무엇인가 매우 기대됨. 불교는 교리적으로 <절대자(神)>의 존재를 받아 들일 수 없다ㅡ그 이유를 매우 흥미 있게 들어볼 것이다이 글은 토론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ㅡ필자는 토론을 선호한다. 단지 불교인이 기독교와 접하면서(특히 성경이나 신학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을 그대로 말해보고자 한다ㅡ단 여기서 성경 위주로 해야지 "신학서적"은 제외시켜야 끝없는 방황,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미로를 벗어날 수 있다. 가능한 대로 솔직하게 쓰려고 한다ㅡ대환영이다. 불교인이 기독교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ㅡ매우 듣고 싶다. 이러한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 매우 소중한 자료 그리고 기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이 불교와 친숙해 있는데 그들에게 구원의 희소식을 전하려 할 때 저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점이 심이 궁금했는데ㅡ. 불교인이 보는 각도에서 성경을 음미하는 의미는 자못 크고 소중하다. 


신의 창조문제

이 <창조> 항목을 전체로 살펴보았는데 구약을 중심으로 한 소견인 바, 성경이 신약경과 구약경으로 되어 있듯이 둘을 조화시켜 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창조주의 특성이 양면으로 되어 있어 창조주를 이해하려면 이 둘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 고로 한 쪽만 보면 섣불리 결론을 내리게 되고 서투른 판단을 유발시켜 이것이 전제가 됨으로 해서 차후의 판단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접근임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그러면 세부적으로 들어가보겠다. 

그 전에 먼저 우리의 기본 입장부터 밝히겠다. 창조는 실제 사실이고 창조주는 실존하신다. 그 증거를 댈 수 있느냐 하실 터인데 바로 3운법칙으로서 모든 인간의 생애를 자로 재듯이 규격화하여 꼭 3가지로 철통같이 마름질하고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다. 1972년에 발견되어 아직 널리 홍보되지 못한 탓에 대중적 인지도가 제로에 가깝지만 이 블로그 카테고리에서 "3운법칙"을 찾아 클릭해 들어가면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일찍부터 말해 오기를, "일사불란 질서 정연한 자연법칙이 창조신의 작품이라는 증거라 주장하는데 그래 좋다, 그러면 인간을 그와 같이 철두철미하게 관장하는 것이 그 무엇이 있는가 묻고 싶다. 없지 않은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런 소위 신의 통제 아래 놓여 있지 않는데 어떻게 자연법칙만 가지고서 창조 운운 하겠는가. 인간을 그와 같이 옥죄고 있다는 증거를 대보라" 하며 아주 의기양양하게 도전, 도발해 왔는데 이제 보기 좋게 그 증거가 혜성 같이 나타난 것이다. 

카테고리를 찾아보면 대충 내용을 알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되풀이하지 않겠다. 이와 같이 인간을 철통 같이 규제하고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인간 외의 인간을 초월한 힘에 의한 것이다. 그 증명이다. 고로 토론장을 여기가 아닌 "3운법칙" 영역 또는 분야로 옮겨 이야기를 진행함이 이치적으로 적합하다. 왜냐면 창조신의 존재 여부를 처음부터 따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한 것이다. 이 3운법칙으로써 창조신의 실재가 확정되면 이야기 방향이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가장 일차적으로 3운법칙을 취급해보라. 여기서 대세는 이미 판가름난다. 이 3운법칙 하나로 이미 천하평정이 된 것이다. 불교는 창조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사고방식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그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으니 이제는 그 자취나마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왕 말이 났으니 다음의 소견에 대해 답을 달아보자. 

불교인에게 신과 인간의 창조 문제에 대해 말하라 한다면,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할 것이다. 이미 위에서 밝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불교인에게는 신의 존재 여부는 아예 문제 제기도 안된다. 때문에 창조문제 역시 그렇다. 역시 이미 밝혔다.

이같은 입장의 불교인이 구약성서 창세기를 읽으면 그들에게 진지한 것으로 나타날 리 없다. 일종의 신화, 동화 같은 것이다. 천만에. 이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세계관이 판이. 불교의 우주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지구는 우주 중심도 아닐뿐더러 셀 수도 없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 가운데 하나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태양계(지구가 아니고)같은 것이 1000개 모여 있는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 이 소천세계가 1000개 모이면 중천세계(中千世界), 중천세계 1000개 모이면 대천세계(大千世界). 대천세계는 우리 태양계 같은 것이 10억개 모인 것. 우주에는 이같은 대천세계가 역시 무수히 존재. 이 세계들은 어떤 에너지(業力)에 의해 형성되었다가(成), 그런 상태로 유지되다가(住), 그리고 파괴되어(壞), 원자상태로 분해된다(空). 이같은 성, 주, 괴, 공의 운동은 끝없는 시간에 걸쳐 되풀이된다.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이 우주적 흐름속에서 생(生), 멸(滅)을 되풀이하며 존재한다. 
이같은 우주관의 불교인에게 구약에서 말하는 바 세계 창조의 이야기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불교인은 기독교인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우주의 광대무변 광활함은 불경이 말하지 않아도 상식화되어 있다. 단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는데 성경은 이 지구가 우주 중심에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왜 인간의 생각으로 이렇궁저렇궁 하는가. 성경은 오히려 지구 주변에 우주가 부채꼴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고 설명한다. 어디에 그렇게 언급되어 있는가 밝히기 위해 해당 성경 장절을 인용하니까 이해해주기 바란다. 이 지구를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표현하신 데가 이사야 66:1/마태복음 5:35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서신 데가 중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니까 또 그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인간적인 표현을 하셔서 지구를 딛고 서시니 그 모든 우주가 하나님의 한 아름 안에 든다고 표현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을 인간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차원이 전연 다르니까ㅡ표현만이 그렇게 되는 것이니 우리는 미루어 참작하고 판단할 뿐이다. 성경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비판하려면 속속들이 살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상대쪽보다 더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 아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상식임을 충고하고 싶다. 섣불리 비판부터 하다가 망신만 당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불교인은 창세기 포함 구약을 읽으며 신의 인간 창조와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심한 반발을 느끼는 바 신의 전지전능(全知全能)도, 신의 사랑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의 무지(無知), 무능(無能), 무자비(無慈悲), 독선(獨善) 같은 것만 본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부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이 저지른 그 한번의 잘못으로 인해 신 자신은 물론 인간들도 한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신은 처음 인간을 만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같은 아담과 이브에게 <먹으면 반드시 죽을> 그 위험한 선악과 나무(그것이 상징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를 그들 곁에 심어둘 이유가 무엇인가. 신이 진정으로 그 자식과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장래를 생각했다면 그런 나무는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었다. 또 그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였다면 일이 잘못되고 난 뒤가 아닌, 미리 아담과 이브가 그 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무슨 장치를 설치해야 했다. 또 설사 그들이 신의 뜻에 반해 그 과일을 따 먹었다 해도 신이 그들의 자애로운 부모 같은 입장이라면 <옳고 그름>(선악)조차 모르는 상태의 아담과 이브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벌을 줄 수 없었으리라. 단 한번의 회개 기회도 주지 않았고 그 잘못에 대해 그 일과는 관계도 없는 그들의 후손에게까지 영원한 벌을 내린 처사는 도저히 납득 불가다. 더욱 더한 것은 신 자신은 보호자로서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곁에 위험한 농약 병을 두었다가 아기가 그 농약을 마시고 탈이 났을 경우 어린애를 벌 주지 않는다. 그 대신 농약 병을 아기 곁에 둔 자신의 부주의에 대해 자책감을 느낀다. 선악과 나무와 아담 부부 관련 지적인데,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여기서의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의 올바은 이해다. 영어로는 good, evil인데 총체적으로 (내게) 좋다, 나쁘다의 개념이지 특정해서 도덕적 차원에서의 선과 악이 아님을 알아야. 단지 옳다 그르다와 관계된 것이면 "먹으면 죽으니 먹지 말라"는 경고는 불가하다. 옳고 그름을 알기 때문에 즉 시키는 대로 함이 옳고 하지 않음이 그르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경고를 주신 것이다. 또 하나는, 선악과 나무의 성격에 대해서다. 에덴 동산 창설이 먼저이고 창설된 후에 아담이 들어가게 된다. 비판자의 조급함에서 오는 일종의 경솔함이 엿보인다.

먹으면 필히 죽게 되니 사전 경고를 주신 것이므로 여기서 "회개", "형벌" 따위가 적용될 수 없다. <먹었으니까 죽는다>는 당연 결과만 논해져야 한다. 또 먹어서는 안될 것을 먹게 된 동기가 같은 피조물인 "뱀"의 충동질에 의해 그 말을 하나님의 경고보다 더 우선시했다 즉 그 거짓말대로 하나님이 거짓말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먹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오' 수준이 아니라 '반역' 레벨이다. 비판자가 잘못 본 것이다. 그래서 "조급성"을 지적했다. 이는 비판자가 엄정한 객관적 입장 고수를 견지하려 노력하지 않고 사사로운 개인적 판단의 잣대에 처음부터 좌우되어여 거기 꿰어 맞추는 식의 안목으로 나갔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정도면 초중생 정도의 안목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에 불과하다. 개인 감정을 노출시킬 생각은 없고 비판자로서의 최소한의 기본을 논한 것이다.

에덴동산 이후의 일들도 비슷하다. 신이 미리부터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할 줄 몰랐다고 한다면 신은 전지한 존재라 할 수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거나 전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을 읽으면서 불교인이 받는 인상은, 기독교인은 그들의 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전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전능) 존재이기를 바라지만, 실제 그들이 모시고 있는 신은 그렇지 못한 것같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 자기의 창조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었고, 그 후에도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같다. 신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신은 인간 창조 후 곧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라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간들을 홍수로 모조리 쓸어버리거나, 유황불로 태워버리거나, 또는 여러가지 언어를 사용하게 만들어 혼란에 빠지게 한다. 구약에서는 신이 그 피조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싸움을 하느라 고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을 읽으면, 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신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 사랑등의 감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은, 앞뒤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편애, 자기 일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가차없이 벌을 주는 무자비, 독재적이고 폭군적이고, 옹고집 노인의 모습이다. 불교인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하는 것은 구약의 그 내용보다도,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신상(神像)으로부터, 어떻게 <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모두에서도 밝혔지만 창조자 하나님 성품의 양면성을 이해함이 여기서 필수다. 한국 개신교 대교단 중 하나인 모교파 중진이었던 한 신학자도 과거 같은 내용의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도저히 조화시켜 이해할 재간이 없노라고. 이 사람은 소위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면서 이런 소리를 했으니 성경 관련해서는 더 무식무지하다. 왜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함과 동시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시라 한 대목을 간과한 무지이다. 신학자라면 아무리 성경을 경시한다 해도 기본으로 알아두어야 할 구절이다. 때문에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인자"와 "위엄"(롬 11:22)을 제대로 인식했던 교회였기에 교회 운영의 양대 지주가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행 9:31)였다. 

오늘날 교회가 "배도"(살후 2:3)로 치달은 원인 중 하나가 후자만 강조하고 전자를 무단으로 생략한데 있다. 누구 명령으로 그렇게 하는가. 자아중심 곧 죄에게 스스로 굴복한 것이다. 당시 아담이 사탄(용)에게 스스로 굴종하여 따른 것처럼. 신학자라면 아무리 성경을 경시한다 해도 이런 사실은 기본으로 알아두었어야 할 일이다.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엄엄하시기 이를데 없으신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신약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란 사실이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형상"(고후 4:4/골 1:15)으로서 항상 "하나"(요 10:30)로 계시니까. 

이러한 성질이 전혀 별개 즉 정반대인 것끼리 하나로서의 짝을 이룬다는 특이 사항은 오늘날 현대물리학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른바 양자역학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현상이다.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가 이를 대변한다. 이 역시 이 블로그 카테고리 3위1체의 법칙 또는 양자역학 등에서 참고하실 수 있다. 전술했다시피 현재의 인간고는 아담 부부의 범죄에서 비롯되는 죽음과 썩음에서 유래되어 앓고 있는 중증의 후유증이다. 이러한 인생들에 대한 업보는 기본적으로 창조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뿐이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진노와 저주도 형벌 차원이라기보다 인과응보 즉 업보다.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진노와 저주뿐일 수밖에 없음에도 창조자의 또다른 성품이 사랑이시기에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사랑이 부각되는 것이다. 

고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그 신학대학 모교수처럼 무식한 변론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그런 가혹한 무자비냐 하는 것인데, 잘못 짚은 것이다. 가혹할 수밖에 없는 현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마는 (비판자가 창조자의 어버이 위치를 강조했듯이)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올바로 짚어가야 하는 것이다. 말이야 비슷하지만 의미상으로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여기서도 역지사지가 통한다. 내가 만일 창조자 하나님의 위치에 있다고 가정해보라. 반역질하는 것 그냥 귀찮다 하고 쓸어버려 쓰레기통에 집어 넣으면 된다는 충동에 휩싸일 수 있지만, 그러나 측은지심이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경우 그 사랑은 놀랍게도 당신 자신을 우리의 죽음과 함께 하시어 죽음에 내던지시는 일까지 감행하시기에 이른다. 이것은 "구세주 예수" 편에서 본격적으로 논하게 될 것이다.

죄를 지은 죄인이 그 죄에 상당한 벌을 받으면서, "억울하다", "날 이렇게 처분하니 너무 무자비해요" 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형벌감밖에 안되는 죄인이요 수형/受刑 중의 위치인 것이다. 때문에 당시 유대인을 붙잡아 죽여 그 피를 로마 총독의 제물에 섞은 사실을 누가 예수님께 고하면서 억울하다, 로마인의 행패에 분노한다 식으로 생각하는데 대하여 오직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 하신 것이다. 지금 비판자와 같은 관점이라면 비정하기 이를데 없는 말씀 같지만 그러나 사실상 진실 그대로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모든 인간고가 아담의 범죄, 우리들 자신의 범죄의 결과임을 자각함이 구원에 이르는 첫 단계, 첫 걸음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는 철도의 레일과 같은 필요불가결한 평행선인 것이다. 

성경도 하나님의 "약하심"과 "지혜롭지 못하심"을 가정/假定적으로나마 입에 올리고 있다(고전 1:25). 그만큼 진폭이 크다는 것이고 여유만만하다는 것이다. 비판자는 지금 성경이 인간이 지어낸 것이라늕 전제하에 자기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거짓말하는 자는 감히 이런 대목을 죽어도 끼워넣을 수 없다는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이 되셨다는 등의 표현(창 6:6). 비록 진실이라 할지라도 취사선택하기 때문에 창조자 하나님의 약하심 또는 미련하심을 굳이 삽임해 넣을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바로 이러한 점을 고려하시어(성경의 진실성) 이런 대목을 삽입해 넣도록 조처하셨다고도 보는 것이다.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을 같은 차원에서 놓고 보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이 다 고분고분 순종하는 자이기를 바라셨다는 것과 일부는 그럴지라도 대체적으로 자기 이성을 따라 불의, 불법은 행하지 않을 것으로 아셨는데 너무나 예상 밖으로 거의 전체가 부패해 갔을 때가 같을 수 는 없다. 그리고 인간이 로봇처럼 모두 일률적으로 행동을 같이 하는 것과 사랑의 자유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같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는 미리 아시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어느 정도"라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대충 어리잡을 수도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사실상 없는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기록한 당시 상황과 그 이전 사정의 차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오늘날(교회 초창기와는 달리) 기독교 신학자들까지도 인식하지 못했던 점이다. 무엇이냐 하면 아담은 처음 에덴 동산에 들어온 후로부터 범죄하기까지에는 현재의 인간과 같은 자연계 육체가 아니라 소위 "천사"들과 같은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었는데 "죽음"의 경고를 무시하고 "죽은"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자연계 육신의 썩음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고로 양쪽의 사정이 전혀 다른 것에 유의해야. 성경 기록은 범죄 이후의 형편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범죄 이후 "죽음"과 "죄"(자연계 육체의 본능적이고 자아중심적 사고방식)에 이른 일반적 상황이 너무나 심각했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이시라 해도 무방하다. 역시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대한 한계인데 그런 것은 우리가 알 것도 없고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우리 사정이 한가하지도 않다. 

고로 범죄 전 아담처럼 유유자적하게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는 것과 악한 영물들의 초능력으로 완전히 찌들어진 채 그 지배를 받으며 구차하게 삶을 영위해가는 인생들의 인식과 의식이 결코 같을 수가 없고 후자가 정상적일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장차 나타나실 "마지막 아담"이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밝혀 가르쳐주시기까지 사전/事前 교육 차원에서 법질서의 위중함을 본으로 보이신 것이 비판자의 눈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 나타나 "무자비"로 오해된 것이고 그대신 생명의 법질서를 따름이 행복한 결과를 거둔다는 뜻으로 은혜를 베푸심이 비판자의 눈에는 "편애"로 보여진 것뿐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의 인식이 초대교회와 그 이후가 현저히 다른 이유 역시 아담 범죄의 결과이다. 아담을 충동하여 범죄하게 만들어 죽게 한 장본인인 "뱀"이라는 영물/靈物이 아담 대신 이 인간 세상을 지배하게 된 비극적 사실이니, 이 악마(사탄)가 인간 세계를 좌우지하고 있는 고로 올바른 성경 해석의 통로를 아주 협소하게 만드는 농간질을 해왔기 때문이다. 악령 단독으로 자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앞에서도 밝혔듯이 인간의 반역적 행위와 결탁한 결말이니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다. 이런 악령들의 방해 공작은 기독교 신학자들까지도 인식 내지 의식하지 못하는 정도다. 일관되게 집요한 악령들의 활동상만 피부로 와 닿아 느낄 뿐이다. 

구세주로서의 예수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불교인에게는, 그 창조자가 보냈다는 구세주도 받아 들일 수 없는 존재다. 불교인에게는 예수는 붇다나, 공자, 소크라테스와 꼭 같은 한 사람의 인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불교인에게는, <예수는 신이 보낸 메시야든가, 십자가에 못박힌 뒤 3일후에 부활했든가 등 문제는 처음부터 아예 문제 제기조차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모든 활동, 그것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황당무계>한 일에 그렇게 진지하게 매달리고 있는 기독교인을 이해할 수 없어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좋은 소식도 그 희소식을 믿고 수용하지 않으면 쇠귀에 경 읽기다. 성경도 억지로 믿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만 열려지는 성경의 진리다.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열려지지 않음은 주어본댔자 개 돼지에게 준 것밖에 더 되지 않는 까닭(막 7:6). 그래서 주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알고자 하는 자라면 알아야 하는 것은 창조자 하나님이 존재하시느냐 않느냐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위에서 밝힌 대로 이 세상 신/神 악령의 존재 곧 이 세상 지배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창조자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말씀에 불복하면 즉각 지체 없이 이 악령의 지배 아래 든다는 현실이다. 절대로 홀로 있지 않음을 단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거의 모두가 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기독교인도 이 사실을 제대로 의식하는 자 많지 않다. 이것부터 모든 인간에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이 사실도 믿지 않으면 그뿐이다. 수용소에 끌려 와 있는 자는 아무런 자유가 없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생은 이 악령의 수용소에 인질처럼 붙들려 있건만 이렇게 붙들려 있는 사실조차 모르니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아담 범죄의 무서운 결과다.

불교인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자신만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을 수 없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소개하는 당시에도 그를 신이 보낸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라 있었다. 소수였을 뿐이다. 항상 이런 소수뿐임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모쪼록 그 "소수"에 들라는 것이다(눅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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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예수를 <무염잉태(無染孕胎)>했다는 예수의 어머니와 그의 친 형제들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다. 예수가 고향에서 가르치자 그들은 <그 분(예수)이 정신이 나갔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까지 했음을 본다. 형제들이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믿었고 모친은 처음부터 믿었다. 믿지 않고는 메시야를 잉태할 수 없는 것이다. 졸속으로 읽지 말고 꼼꼼히 읽으라. 예수와 오랜동안 함께 살았던 고향 사람들도 그를 <고작 장인(목수)>정도로 보았을 뿐 구세주와 같은 특별한 존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성경은 원래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으니 더욱 그러하다.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이 보낼 그들의 메시아를 기다려 온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배척하게 된 것은 위풍당당 만국을 호령하는 메시야의 모습만 상상했기 때문이다. 메시야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오시므로 아담은 범죄 전 모습과 범죄 후 모습으로서의 양면성을 갖추는 것이라 범죄 후 아담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유대인이 구약시대의 모든 사전/事前 교육에도 불구하고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이는 자아중심의 욕망에만 급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에게서 진정으로 구세주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무리 완고하고 사악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를 그렇게까지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죽였던 것은 예수가 <사기꾼>으로서 그들의 신을 모독한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사기꾼을 처단하는 것이 신을 더 잘 섬기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비판자가 비판 전에 좀 더 성실하게 알아보고 비판하겠다는 최소한의 열의조차 없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니 겉돌기만 하다가 피상적 관찰로 그쳐버리는 수가 허다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알아보고 자기에게 감히 손을 못대는 일이나 벌어지지 않을까 저어하시는 심정이셨기에 기적 등으로 인하여 많은 소문이 퍼지는 것을 경계하실 정도이셨다.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시지 않으면 인류 구원은 불발로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접 선택해서, 모든 것을 보여주고 가르쳤던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조차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몇은 그를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면, 어떤 제자는 부활한 예수가 눈 앞에 나타났는데도 믿지 못해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를 확인까지 해야 했다. 처음부터 신중함이 결여되어 초중등생 정도의 비판 수준이라고 했지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기에만 급급한가.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만 제외하고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있었다(마 16:16). 이런 식이면 비판자이 품격 심지어 인격마저 떨어뜨리는 불상사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의 처형 앞에서 보인 제자들의 비겁함과, <빈 무덤>앞에서 보인 그들의 반응에서도 그들이 예수의 존재를 얼마나 믿지 못했던가 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메시야로 믿고 있는 것과 비상 사태를 당해서 당당해지는 것과는 별개다. 당시는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이라 사정이 매우 달랐다. 그러나 제자들의 믿음은 변치 않았다. 

제자들은 차치하고라도 당사자 예수 자신조차도 자신을 메시아라고 믿고 있었던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모든 인류를 구한다는 크나큰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견된 예수가, 그리고 죽으면 삼일 후에 부활되어 하나님 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예수가, 죽음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겁을 내고, 고통스러워 하고, 또한 절망했을까. 제자들에게 <내 영혼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하기도 하고ㅡ, 이런 생각들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비록 사람이 되셨지만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죄인으로서의 멸망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끔찍스러운 일인지 그 분만큼 실감할 수 있는 인간이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인간은 아직 아무도 그런 비극적 참상을 겪어본 자가 없다. 따라서 "죽음"의 실상을 아무도 모른다. 마지막 심판 후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지만. 그 때 당시의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할 자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참고하시도록. 비판자야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부터 부정하니까 그렇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다. 

초점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죽음 앞에서 예수가 보인 모습은, 인류역사상 보통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이나 사상 또는 신의 등 이유로 죽게 되었을 때 보여주는 그 떳떳한 모습과 비교가 된다. 우리들 가까이에서 예를 들면, 사육신의 한사람인 성삼문, 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안중근의사, 사상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수 많은 사람들, 그들은 죽은 뒤 부활이나 천당에서의 영생과 같은 약속이 없었는데도 예수만큼 큰 고통과 고문을 견디면서 떳떳이 죽음 앞에 섰다. 앞의 것과 똑같은 논평이다.  

비판자는 지금까지 "불교인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은 구약의 그 내용보다, 기독교인들이...이와 같은... 어떻게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진지하게 매달리고 있는 기독교인을 이해할 수 없어하기까지 한다"는 식의 말을 연거푸 하고 있는데 논리 정연하게 말하지 못할 때는 폭언, 폭력이 튀어나오는 것과 똑같다. 우리는 똑똑해서 창조신 따위를 믿지 않는데 너희는 어찌 그 모양이냐 하는 투다. 2015년 통계로 무신론의 불교 인구 겨우 5억, 나머지 51억 종교 인구가 모두 유신론으로 10배 넘는 압도적인 숫자가 창조를 믿으니 왜 우리는 창조를 믿지 않는가 하는 논리적 근거부터 대야 이 경우 마땅한 것이다. 비판자의 수준이 겨우 이것인가.

불교인에게는 예수의 죽음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감히 말한다면 오히려 평범하고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앞의 지적에 이어 말하지만, 창조주께서 우리 위해 사람이 되어주셨고 우리 위하여 친히 희생제물이 되어주셨는데 어찌 감동스럽지 않으랴.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때라 이 세상신/神 자체가 창조주로 가장하는 때이니 감히 충고하거니와 불교도들은 그 무신론 아니, 그 불교의 미망 속으로부터 하루빨리 탈출하는 것이 시대에 부응함인 줄 알라.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그 피흘림을 기독교인들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죽음은 예수 자신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타의에 의한 것같이 보인다. 예수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신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배우>, 또는 <심부름꾼>에 불과했다면 예수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는가. 배우로서, 또는 심부름꾼으로서는, 아무리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잘 수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자 또는 심부름꾼으로서만의 공로뿐일 것이다. 잠깐, 그 지적 역시 틀렸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나서 "기독교 운운" 하라. 그런 기본도 갖출 수 없는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림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버린다"(요 10:17,18)는 대목은 살펴보기나 했나? 이런 기본 교양도 갖춤이 없이 감히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라는 거창한 제호를 달았던가? 고로 이 자리에서 필자는 "불교인이 보는 기독교"라는 팜플렛이 "쓰레기"임을 만천하에 선언한다. 비판자가 말하는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주제넘게 "기독교"를 입에 담고 있다고 모든 독자의 양심에다 고발하는 바이다.

아니면 예수의 위대성이 그의 가르침의 내용에 있다는 것인가, 짧은 기간의 그의 활동에 있다는 것인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서 <구원>에 대한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인에게는 신을 통한 구원의 가르침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 그의 위대성을 그가 행한 활동에서 보아야 한다면, 예수가 인류 역사상 위대한 종교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도 특출한 종교적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정중히 권고하거니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교인이라고 무슨 자랑처럼 말하지 말고, 이제는 창조를 믿으시라.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 불교인에게는 예수의 모습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존재처럼 나타나지를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그에게서 거의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볼 수가 없다. 예수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우주를 만든 창조주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상에 파견한 구세주라는 말은 불교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인에게 무엇보다도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의 그 불투명한 예수라는 인물과,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같은 <황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구세주의 상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비판자의 표현대로 "그렇게도 확고부동한 구세주"관을 가지고 있는 까닭을 설명하겠다.

예수님께서 "내가 내 목숨을 <스스로> 버린다" 하신 것은 순수히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아시다시피 자유 의지가 핵심이다. 강제, 간섭을 일절 배제, 배격하는 것이 "사랑"이다.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자진자발성이다. 이 사랑의 세계에서는 강제, 간섭이란 것이 일절 통하지 않는다. 인간을 다루시는 창조주의 모든 일에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도 해당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그런데 이 자유 의지를 선용하지 않고 악용하는 일부 피조물이 생겨났다. 그 중 선두에 서 있던 자가 아담의 살해자인 사탄(그래서 "인간의 원수"라는 뜻의 그의 별칭)이다. 아담은 하극상의 이 아랫것의 말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고 따른 결과가 되어 그 부산물로 이 사탄의 예하/隸下에 들어가게(만물의 머리가 되시는 창조주의 경고 말씀보다 수하/手下인 자의 거짓말을 오히려 따르고 복종하는 셈이 되었으니까) 되어 오늘날까지 사탄이 아담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여 이 세상 지배자(왕 그리고 신/神) 노릇함으로써 철권 통치의 독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스스로 벌어들인 죄과의 결말이니까 이 상태는 그대로 고착화되니 인간(아담)에게는 말하자면 크나큰 불운이나 자기가 자초한 것이므로 감수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조주께서도 이런 사탄의 사악함을 응징할 경우 아담의 죄악도 같은 처벌 대상이기에 어느 쪽도 편드실 수 없는 상황. 그래서 하나님의 엄정 잣대로는 쌍벌주의로 둘 다 처벌하시면 아담 이후 모든 인생들도 함께 멸망이니 차마 그렇게는 못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어 이 구원의 조건에 부응하는 자를 구출하신 다음에 처벌은 처벌대로 집행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조건에 부응한다는 것은 아담처럼 죄를 짓지 않을 자에 한하는 구원이란 뜻이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하여 "회개하라"는 명령이시니 구원의 선결 요건, 전제 조건이다.) 아담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 없어졌지만 아담의 죄에 휘말려 아담의 죄에 해당되지 않는 그 후대들까지 억울하게 멸망당해서는 안되기에 그래서 구출의 손을 쓰시게 됨은 당연지사. 또 유의할 것은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을 자초하기 전 막지 않으신 것은, 앞에서 지적했듯 모든 것은 사랑으로 좌우되는 것이어서 이미 아담이 자기 자유 의지로 사랑(자발성의 순종)을 버려 자기 마음대로 벋나가버린 것이므로 강제, 간섭하실 수 없기 때문. 또 먹기만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선악(자연계 동식물의 종족 보존을 위한 선악 인식의 본능적 기능의 장치를 의미하는 것)과 나무 열매이므로 일단 먹어버린 이상 죽음(선악과 나무의 성격에 부합하게 자연계 몸이 되어버림이 인간에게는 "죽음")은 필연. 하나님께서도 한 번 정하신 이상 이 기정 사실을 번복시킨다는 것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고로 오직 남은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뿐이다. 

이 구원은 어디까지나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만 오직 가능한 것인데 그 "합법"이란 것은 짝의 원리를 따르심이니 다시 말해 죽은 아담과 대칭/對稱되는 대칭 아담이 창조주 친히 되어주시는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아담의 범죄, 죽음의 과정 그대로를 답습해야만 되는 일이다. 즉 아담의 죽음의 고통 속으로 친히 들어오시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일을 그러나 감행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생각해보라, 창조주 친히 피조물이 되시어 피조물과 똑같이 되시는 것도 무엇한데 하물며 죄인의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부끄러움과 고통의 절정으로서의 죽음을 친히 당하심에서랴. 창조주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이 아니시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죄인의 죽음>이다. 그 죄인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있을 수 없다. 완전 벌거숭이 나체가 되어(죄의 응징이라는 의미에서ㅡ아랫도리를 가린 십자가 그림들은 일종의 거짓이요 사기다ㅡ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 그림으로도 표시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대중의 환시리에 공중 높이 나무에 매달리는 죽음. 감히 창조주께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최대의 광경이 그 날 갈보리 산 언덕 위 십자가 상에서 벌어진 것이다. 법질서 확립을 생명으로 하는 법 제정자, 집행자, 심판자로서의 창조주 하나님 자신께서 오직 사랑 하나로, "소멸하시는 불"이심에도 "사랑"의 양면성을 최대한 살리셔서 이 일을 단행하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실 아담이 되시기 위해서는 대칭 아담이 되어주시기 위해서는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필수의 과정이었기에 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당하신 것이다. 

우리 위해 대칭 아담("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심에서 이 죽으심이 최대 고비였는데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일편단심으로써 그 고비를 넘기시니 그리하여 명실상부한 대칭 아담이 되시니 이것이 인간(아담) 승리다. 일단 죽으신 다음에는 부활은 필연.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살리심은 당연하시니까. 아버지의 권위와 능력으로써가 아닌 둘이 하나됨의 원리를 따르심이다. 아버지시라고 하여 이미 죽으신 아들을 살릴 수는 절대로 없다. 그렇게 되면 죽음의 의미 자체를 말살함이 되니까. <둘의 하나되심> 때문이다. 이 말은 이 "하나되심"으로 인해 성부 하나님께서도 성자 하나님과 똑같이 죽음의 고통, 고난을 당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이실 수 없으니까. "하나"의 의미가 이렇다.

이렇게 아담의 죄값(죽음)을 치르시니까 죄의 결말을 벗어나셨으니까 남은 단계는 범죄 전 아담의 영광의 몸, 초자연계 속성의 영생하는 몸으로의 환원임은 당연 순서.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토록 쓰라린 죽음의 고통을 먼저 통과하셨던 것이다. 일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아담의 전/全 과정을 완수하신 대칭 아담으로서의 새로우신 존재 그대로 그 성령으로 내 속에 내 영혼(새 창조의 새 영혼)으로 오시니 내가 바로 대칭 아담이 되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으심이 내 죽음, 그 부활이 내 부활이니까 나의 모든 죄는 용서되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의인됨이며 당연히 영생이고 바로 이것이 "구원받음"인 것이다. 

이를 두고 "아담의 양면성"이라 한다. 범죄 전 아담과 범죄 후 아담의 확연한 차이다. 에덴 동산에서 경고하셨던 "죽음"의 경고가 바로 이러한 자연계 육체로 아주 돌아가버림의 의미였던 것이다. 애초에는 아담이 자연계 육체로 창조되었으니 이는 그 때까지의 모든 자연계 존재의 최고 절정으로서의 인간 아담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었는데 형상은 그렇지만 내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 "내용"은 아담의 몸이 영생하는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어야 가능한 것. 그래서 초자연계인 에덴 동편에다 동산을 창설하신 것이다. 이는 이 모든 일 전에 이미 초자연계(에덴)가 건재해 있었다는 증거다. 거기에다 즉 그 동쪽에다 아담을 위한 동산을 따로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이 영계(초자연계) 곧 에덴에 대해서는 성경은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이런 <생략>은 창세기 초두에 물과 혼돈과 암흑을 기정(기존) 사실로 해버림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는 터이다. 따라서 "에덴"은 그 둘째다. 이렇게 생략한다는 것은 성경이 지어낸 내용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지어낸 이야기라면, 기왕 꾸며내는 이야기인즉 생략할 필요도 없이 그냥 "만들어내면" 되기 때문.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지혜시라 할까. 

그래서 아담의 양면성은 대칭/對稱 아담의 양면성이 되어 있으므로 그 양면성을 나타내심이 다름아닌 "세상에 다시 오심"이다. 이전에는 죄인 곧 죽은 자로서의 아담의 모습으로 오셔야 했고 이후에는 범죄 전 아담 본연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는 필연성 때문이다. 이후의 모습을 보이셨으니 이전의 모습을 함께 나타내셔야 짝을 이룬 둘이 비로소 온전한 모습이 될 것이기에 그러하다. 오셔서 아담이 그 죽음으로 못다한 역할을 하시게 되는 것이 게시록에 나오는 대로의 "천년 통치"다. 아담은 그 범죄로 죽는 바람에 한 번도 세상을 통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칭 아담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심으로써 모든 것은 정상적인 규모, 규격을 갖추어 진행된다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하심은 철두철미 완벽하시고 빈 틈이 없으시고 완전 조화 그 자체이시다. 그 후에 마지막 심판이다. 

이 심판주로서의 역할도 아담의 몫인데 죽음으로써 수행 불능이 되어버렸으나 이제 대칭 아담께서 그 역할을 하심이다. 때문에 바울 사도가 아레오바고 전도에서 이 사실을 천명하여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다"(행 17:30,31) 한 것. 심판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아담이 없어 불가능했었다. 다시 말해 모두가 죄인뿐이므로 심판 자체가 의의가 없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구원의 길이 열렸으므로 구원받은 자는 "회개한"(17:31) 결과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게 되었은즉 의인과 악인이 완연히 구별 가능해졌음이다. 따라서 "참고 선을 행한 자는 영생, 자아중심으로 불의를 행하면 심판"(롬 2:7-10)으로 철저히 갈라지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표현하는 것을 종종 보는데, 사랑의 가르침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인류의 위대한 종교치고 사랑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仁)은 그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마찬가지다. 힌두교, 이슬람교등에서도 증오를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유독 기독교만 사랑의 종교라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 불교인에게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이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보다 특별하게 뛰어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사랑의 종교"라 했다면 잘못 말한 것이고 외부인이 말했다면 오해다. 사랑은 삶의 본질이다. 그것을 어느 계층이나 집단을 두고 특수화한다면 언어도단이다. 대개 구원의 도, 영생의 종교 등으로 표방함은 일반화된 경향이다. 문제는 어느 것이 진리이냐 하는 것이다. 진리는 법(칙)으로 이해되어야 정상이다. 따라서 법은 하나뿐이고, 법은 어떤 경우에서든 애매모호해서는 안된다. "그렇다, 아니다" 이 둘뿐이다. "종교 화해, 통합 운운" 따위의 말은 이 진리의 속성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다. 어느 것이 진리냐, 진리는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다. 모든 사람은 이 사실을 숙지해야 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편협하고 왜소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 그대로 자기와 가까운 <이웃에 대한>, <이웃만의>사랑같이 보인다. 다시 한 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랑도 법(칙)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 살아가는 것이 모두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짐과 같은 이치다. 이렇듯이 생명의 법(칙)이 있을진대 사랑에도 법 기준이 있을 것은 당연하다. 사랑이 생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법은 둘이 하나됨에 있다. 이것은 또한 몸과 머리의 한 몸됨의 이치로도 설명된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법질서 개념으로서의 한 몸됨이니까 따지고 보면 엄밀한 상호 작용을 철칙으로 운영됨을 알 수 있다. 즉 머리의 지시를 따라 그 몸의 각 지체를 이룬 자마다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머리의 지시에 불응할 때 이상이 있다는 증후다. 암세포화한 것은 즉각 격리시키지 않으면 다른 이웃에게까지 전이된다. 고로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은 이러한 한 몸 체제를 이룬 지체됨을 말하는 것이므로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예컨대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일 때에는 창조주를 머리로 하여 그 모든 지시(말씀, 계명)을 따르지 않을 때에 한 몸 소속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므로 "이웃"이 될 수가 없다. 고로 창조주를 머리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 그런 사람들과 이웃간이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런 이웃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이므로 그에 따른 융통성과 신축성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구약에서의 모든 교훈도 이를 밑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를 참작해야 제대로 이해 가능한 면이 있다. 이런 사전/事前 교육 차원에서의 각종 구약성경 상황을 잘못 읽으면 배타주의 등으로 오해하게 된다. 구약경을 읽을 때 유의할 점이다. 

먼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다. 독선적이고, 편애적이고, 무자비한 모습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에덴동산에서 신이 인간에게 했던 첫 행위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혹한 <시험>이었다. 우리같은 보통인간이라해도 사랑하는 자식에게는 그와같은 치명적인 시험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사랑 그 자체>라고 하는 신이 그렇게 무자비한 일을 할 수 있는가. 시험하시고자 한 것이라기보다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기타 사항은 앞 설명을 찬찬히 음미해보시기를 권고 드린다. 이 선악과 나무의 시험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으로서 우리는 신의 성격과 그의 인간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상징적인 의미로 기술한 것은 사건 기록에서 단 하나도 없다. 상징성은 예언서에서 나타난다. 

아벨의 사건,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 일에서도 우리는 신의 편애, 무자비를 볼 수 있을 뿐, 거기에서 사랑은 볼 수가 없다. 한 몸된 도리로서의 자기 구실을 않음으로써 축출당한 당사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조처가 무자비, 편애, 불공평이라고 푸념할 거리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에서 멸망 처분을 받게 될 사람은 그 때 가서는 모든 것이 죄다 알아지므로 그런 부당한 불평이 발붙일 틈이 없게 된다. 

뒤에 일어난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서 어떻게 아브라함 가족만을 골라 그 자손들과만 계약을 맺고 그들만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가. 구약의 하나님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무서워하고, 존경하는 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준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신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인생들이 노아 홍수 이후에도 급격하게 부패해 간 것이다. 노아가 살아 있어 하나님 심판의 산 증인이 버젓이 생존해 있는데도 인간은 전반적으로 악을 뉘우치는 기미가 없었다. 한여름 쉬어빠지는 음식물처럼 걷잡을 수 없는 악의 행렬이었다. 대칭 아담께서 세상에 오시는 날 그가 누구신지 과연 식별할 방법이나 있을 것인가. 또 오신 다음에는 그 말씀을 수용할 수 있는 안목이라도 제대로 갖추어질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도 실로 암담한 세상 인간들이었다. 마침 썩 드물게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와 타협 않는 한 인물을 발견하시게 된다. 이 인물을 집중 교육시키고 그 후손들을 대표적으로 선정해서 메시야 오시기까지 훈련하는 방안을 검토하시게 된다. 아브라함의 가문이 탄생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로의 이들 선민/選民들의 행적 역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세계 어느 민족 못지 않게 거의 구제 불능이라 할 만큼 죄악의 타성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음이 구약의 각종 사록/史錄에서 입증되고 있다. 예언자가 "만물보다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통탄해마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에게조차도 항상 유치하고 무자비한 시험(예를 들면 이삭을 제물로 요구하는 따위)을 내린다. "시험"이라는 한 단어도 대상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악마 사탄의 시험일 때는 그 목적이 상대의 멸망에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약 1:13)고 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의 시험은 하시니 아브라함 상대의 시험이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심중을 몰라서 알기 위해서라기보다 다른 여러 피조물(천사 등)들에게 오해나 착각을 주시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은 하나님처럼 사람의 심중 깊은 것을 알 수 없으니까 하나님이 이유 없이 아브라함을 편애하여 복주시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어 이를 불식시키는 의미에서 그런 "시험"을 하신 것이다. 악마이 시험의 시험과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들이 신의 말을 잘 따를 때만 약간씩 도와준다. 그러나 조금만 잘못하면, <너와 네 식구들을 죽이겠다>, 또는 <나는 그 도읍과 그 주민들을 송두리째 파멸에 넘겨 버리겠다. 비록 한 집에 열 사람이 살아남는다 해도 기어이 그들 모두가 죽고 말 것이다>라고 무자비하게 위협한다. 위협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들에게 가차없는 벌을 내리곤 한다. 성경에 나는 그 도읍과 그 주민들을 송두리째 파멸에 넘겨 버리겠다. 비록 한 집에 열 사람이 살아남는다 해도 기어이 그들 모두가 죽고 말 것이다>라는 대목이 없다. 자기가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이라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확실하게 사실 또는 진실만을 언급하거나 지적해야 한다는 것은 평범한 상식이다. 비판자는 <비판할>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노정시키고 있다. 조목 조목을 들어 특정 내용물을 비판할 때에는 정확성과 진실성이 깃들여 있어야 최소한의 신뢰성이 보장되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에게 본의 아닌 해를 끼칠 수 있으므로 삼가할 일이다.

구약에서의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교육하고 사랑하는 어버이와 같은 모습의 신이 아니라, 피조물들을 자기의 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공갈협박을 하고, 그들과의 싸움에 힘겨워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적대감, 분노, 질투, 무자비한 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같은 한 민족에 대한 편애는 볼 수 있어도 인류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은 볼 수가 없다. 앞서의 내용과 동일하므로 생략한다. "힘겨워 한다"고 했는데 일면 수긍되는 바가 없지 않다는 개인적인 소견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상 악으로만 줄곧 치닫는 인생들을 두시고 "소멸하시는 불"과 "사랑"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하시는 때가 자주 있으시리라는 것이 가끔 느껴지는 필자 개인적 판단이다.

신이 인류구제를 위해 그의 독생자인 예수를 이 지상에 보내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게 한 것을 기독교인들은 신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인들에게는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의 입장에서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 신의 독선처럼 보인다.에덴동산에서 했던 것과 같은 또 하나의 시험처럼 보인다. 신이 인간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었다면 인간들에게 신의 독생자의 피를 손에 묻히게 하는 그런 시나리오는 마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서의 내용과 동일하므로 생략한다.

전지전능한 신이 그의 <사랑하는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구상했던 것이 그와같은 피비린내나는 사건과 이상야릇하고 모호하고 환상적인 <부활>과 같은 방법이어야 했단 말인가. 이것이 신이 인간에게 베푼 지극한 사랑의 행위였다는 말인가.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불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이와같은 하나님의 행위와 모습에서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고, 느끼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의 내용과 동일하므로 생략하지만 단 한 가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인데 아담의 범죄 이전과 이후를 갈라놓는 양면성은 대칭 아담이신 예수님께는 부활 이전과 이후의 양면성으로 드러나고 있는 특성을 강조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부활 이전은 비판자가 표현한 대로 피 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막을 내렸으니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희생 제물(하나님의 어린 양)로서의 모습이신 것이다. 제물은 죄 없는, 죄의 응보와 상관 없는 자가 타 생명의 죽음과 결부되어 죽는 것이므로 희생이라 하는 것인데 그래서 피 흘림이 없으면 다시 말해 타생명의 희생적 죽음이 없이는, 정확히 표현해 대칭 아담의 죽으심이 없이는 죄 용서가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죽음은 자연계 몸으로서의 썩음을 의미하는 것. 이것이 아담의 범죄 후 모습이고 대칭 아담의 부활 전 모습이시고, 초자연계 몸으로서의 부활은 아담의 범죄 전 모습 곧 초자연계 육체이던 영광의 그 모습인 것이다. 이런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죽으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고전 15:17). 비판자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니까 이상야릇하고 모호하고 환상적인 <부활>이라 했지만.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행위와 그 가르침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느낌과 반응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몇몇에 대한 사랑>, 또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라는, <받고 주는 사랑>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것은 비판자가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를 시인하고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것"이라 하셨다. 이 말씀은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 않고 자아중심으로 나가 네 자신을 위해 살면 너와 나의 관계 즉 둘이 하나됨은 와해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해 비판자는 둘이 하나됨의 구조를 모르고 있는 것인데 거의 모든 사람이 오늘날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사랑과 생명의 법칙'은 예수님께서 먼저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심을 알아야(요일 3:16). 우리를 창조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서 거저 주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언이시다. 

다시 말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머리로서 먼저 본을 보이시고 그 본을 따르게 하신 것이다. 무슨 본이냐, 나 자신을 다 바쳐 나의 상대를 사랑하여 위하는 것. 그 때문에 우리 산 자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롬 14:7-9). 고로 이상 말씀은 머리만이 몸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선언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는데 몸이 머리를 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 생명 체제는 붕괴 와해될 수밖에 없다. 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이 머리의 몸 위함을 충분히 입증해주셨으니 그 몸된 나는 당연히 머리되신 주님만을 위해 사는 것. 머리는 몸을 위해 존재하고 몸은 머리 위해 존재함이다. 이것이 대칭 아담으로 말미암아 새로 구성된 새 생명의 얼개(structure)다. 

이것은 남과 여의 한 몸됨에서 남편의 몸은 아내의 것, 아내의 몸을 남편의 것으로서만 작동됨과 같은 이치이고(고전 7:4), 이렇지 않고 남이든 여든 자기 몸 자기 것이라 하여 제 욕심대로 하면 간음죄가 성립된다. 이런 지식이 없으니까 야만인이 다시 되어가고 그래서 간통죄 폐지와 같은 막된 짓을 서슴지 않는 오늘날이다. 머리가 몸을 위하는데 몸 또한 머리만을 위함이 당연한 일이다. 만일 머리를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엉뚱한 욕심을 부려 자아중심이 된다면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히 6:6)이 되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 되면 결말은 "멸망"(:19)임을 명심할 일이다.  

예수가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은 그의 제자들,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핍박받는 사람들 뿐이었다. 
예수가 모든 존재의 창조자의 대리자로서 전 인류를 구제하러 왔다고 한다면 어느 계층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쏟아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이 역시 비판자가 모르고 있는 진실 중 하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비판가가 말한 그 모든 계층의 당사자들 스스로가 오기를 싫어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 삶에 대한 탐욕이 남다른 사람들은 남을 꺾어 누르면서까지라도 오르고자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라 하여 살아왔는데 자기 부인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함께 행복하기 위해 남 위해 사는 즉 몸의 각 지체로서 이웃 지체들을 위해 사는 것이 도무지 식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예수님의 기적과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고 따랐던 그 많은 제자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것이다(요 6:66). 하나님께서 차단시키는 부류가 있으니 그것은 교만한 자이다. 그들에 한해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저어하시는 것이다(행 28:27). 그들은 설령 구원받는다 한들 회개가 없으므로 하는 짓이라고는 사탄의 짓거리밖에 없으므로.   

어느 의미에서는 예수의 추종자들과 병들고 가난하고 핍박받은 사람들은 다음 세상에서 구제받기 쉬운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어야 했던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반대했던 제사장들, 율사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 그리고 권력층의 사람들이었어야 했을 것이다. 베드로와 같은 착한 제자가 아니라 유다와 같은 악한 제자였어야 했을 것이다. 비판자가 성의 있게 성경을 읽었더라면 그런 부류들이 겸손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 책망하셨음을 직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회개하고 오기를 거부한 것이니 자아중심이 워낙 강고하여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다. 만약 예수님께서 범죄 이후의 아담이 아닌 범죄 전의 위풍당당으로 먼저 세상에 임하셨다면(그래서도 안되고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단번에 그들은 예수님 앞에 부복하고 앙망하는 자세로 돌아섰으리라. 이것이 자아중심이 본성이다. 예수님께서 차단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예수님을 버렸던 것이다. 이런 정황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예수 자신은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번을 일곱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면서도, 그 자신의 반대자들에게는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가, 진정으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푼 일은 한번도 없었던 것같이 보인다. 처음부터 그들은 적대시하고 <원수>로 대했었다. 속단하지 말라. 얼마나 알고 있다기에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나? 제자들에게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면서도 예수는 자신의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한 일은 볼 수 없다. 기도하시는 것을 엿들었는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저주가 있을 것이라 경고하신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는 따뜻한 마음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흔아홉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 더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쳤지만, 막상 예수자신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수 있는 유다에게는 어떻게 했는가. 유다가 그를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를 만류하고 설득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저주하고, <네가 하려는 짓을 하라>고 부추기까지 했다. 비판자에게 두 가지 점을 환기해드리고 싶다. 인간의 심리가 그런 상황에서 만류한다고 해서 그 만류를 듣게 되어 있는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성령 충만으로 모든 것을 꿰뚫고 계셨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그 날 저녁 여러 가지로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내가 떡을 집어자 주는 이가 그이다" 이 말씀을 들었거나 눈치를 챘다면 유다는 양심이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였을 수도 있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셨을 때도 웬만하면 즉 베드로 정도가 되었어도 울면 자복하고 회개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그런 기회를 주시느라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 비판자는 거꾸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신약에서의 예수의 사랑은, 보편적이고 범인류적인 것이 아니라, 선택된 일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반대자, 원수, 또는 적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들의 추종자, 자기 편,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기 편이 아닐 때는 배척하고 증오하고 복수했다. 배타적인 사랑이었다. 다시 권고하거니와 구약은 창조자 하나님의 양면성 "사랑" 및 "소멸하는 불"에서 후자를 강조하고, 신약은 전자를 강조함으로써 균형을 이루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니 신구약을 혼동해서 읽지 말 것이다. 순서대로 된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이 진노와 저주를 <먼저> 이해하지 않고는 십자가 죽으심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이하고만 잘못 인식해 온 이들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대목에 와서 한결같이 어리둥절 의아해 한다. 아무 놀랄 것이 없다. 실상 그대로인 것이다. 지금까지 잘못 이해하고 배워 온 것이다. 초대교회는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행 9:31)라는 두 레일 위로 힘차게 달렸음에 반해 오늘날 "배도"(살후 2:3)의 교회는 후자 즉 "성령의 위로"만을 치우쳐 강조하기 때문에 활력을 잃고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기독교의 사랑은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피를 흘리게 한 근본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그리고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세아 등에서 기독교가 이르는 곳에서는 모두 싸움이 있었고, 피를 흘렸거나 흘리게 했다. 그것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그와같은 철저한 <배타적인 사랑>, <끼리끼리의 사랑>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비판자만 아니라 모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하겠다. 세상에서는 신/구교 모두를 "기독교"라 인정하는데 둘 다 성경적이 못되는 것은 50보 100보차이라 하겠지만 로마 카톨릭 즉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이슬람과 같은 데다. 다시 말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피 흘리는 무력적이고 강압적인 것은 거의 전부가 로마 카톨릭 관련이다. 이 종교는 명칭은 기독교이고 기독교 중에서도 종주라고 자처하나 결코 성경적이 아닌 마리아 숭상을 일삼는데 이는 성경과는 아주 남남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더러 "어머니"라 부르시지 않고 일반 부인들을 상대할 때 쓰는 호칭 "여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천주교는 "성모(holy mother)"라 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교리적으로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라도 이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단 사이비인 것이다.  

불교와 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 왔을때는 많은 피를 흘렸다. 이것도 같은 원인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필자로서는 금시초문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비판자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신미 양요 등과 같은 것을 말하는가? 

이처럼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대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이 왜소하고, 편애적이고, 배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처럼 말해지고, 또한 그렇게 행세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어이없어해 하는 것이다. 비판자가 말하는 "사랑의 종교" 지적은 교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비판자의 말대로 종교치고 사랑을 말하지 않는 데는 없으니까. 문제는 그 신도들이 얼마나 사랑의 실천을 하느냐에 따라 그 용어가 정당히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신도들이 언행일치로 사랑의 행위가 뛰어나면 사랑의 종교로 인정 받기에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예수의 기적과 부활 

<그때 세존(붇다)께서는 물 위로 걸어 다니시는데 발이 물에 젖지 않으셨다. 카아샤파는 멀리서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문(沙門,수도자)은 물위로 다니는구나'>(증일 15,2) <난다는 곧 그것(한 덩어리의 떡)을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바쳤다. 그래도 떡은 남았다. 난다는 사뢰었다. '아직 떡이 남았나이다. ' . . . 그때 세존께서는 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 떡을 가지고 여승들, 남자신도들, 여자신도들에게 주어라. '그런데 여전히 떡은 남았다. '너는 이 떡을 가져다 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래도 떡은 남았다. >(증일 20,28) 이것을 읽으면서 기독교인들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이야기와 거의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경전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모든 종교에서는 그들의 교주나 성인들과 관련된 이와 비슷한 기적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한 종교에서 그들의 교주가 행한 기적만이 참된 것이고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들은 가짜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적들이 모두 가짜이거나, 아니면 모두 진짜여야 할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말한다면 기독교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기적만이 <진짜 기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에게 예수가 행한 기적만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예수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불교인들에게는 그 기적 이야기들이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우주를 창조한 신이 파견한 존재가 장님의 눈을 뜨게 해준다든지,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쫒아내 준다든지, 몇 덩어리의 빵으로 수 천명의 사람들을 먹였다든지, 물 위로 걸었다든지 하는 기적을 행했다고 해서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앙징스럽고 유치한 기적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대행자로서의 예수의 존재를 왜소하게, 또한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할 뿐이다. 21세기에 와서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은 초능력(기적)의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기적을 가지고 진위/眞僞를 따질 때가 아니다. 가짜니 진짜니 하는 논의를 그 나타내는 초능력이 크나 작으냐,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들로 잣대를 들이댈 시대가 아닌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대대적으로 기적을 행하고 거짓까지 포함시키는 판이니까 그 기세가 가히 어느 정도까지일까 우리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만은 명백하다. 이 하나만은 쐐기를 박아두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능력이 더 이상 효험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기대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믿음 따라 될 일이지만 이 기적을 가지고 잣대를 삼는다는 매우 위험하다는 그 뜻이다. 성경에 그렇게 경고하고 있으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든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무난할 것이다. 

부활

예수의 부활문제에 대해서도 기적에서와 같은 생각을 하게 한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 부활이야기를 하고 있는 종교는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모두 가짜이고 예수의 부활만이 진짜라고 믿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만약 다른 종교의 부활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부활이 가능한 것이 되므로 예수의 부활은 별 의미가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다른 종교에도 그런 부활의 <얘기>가 있는가? 금시초문인데 필자는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게다가 이 부활사건은 성경 그 자체의 기록에 의해서 보더라도 별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두고라도 예수를 직접 따라다니면서 예수가 행한 기적들을 수 없이 보았고 죽은 후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암시를 몇번이나 받았던 제자들조차도 <빈 무덤>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그리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메시아가 올 것을 오랜 세월동안 기다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예수가 부활 운운한 것을 <고약한 사기>라고 보고, 그 <사기>를 방지하기 위해 묘지를 단단히 지키게 한 사실등에서도 그 사건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허황되게 보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길게 이야기 할 것도 없이 단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는 하나의 희화처럼 보일 뿐이다. 당시 유대인들이야 에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을 감행한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 부활을 믿은 자가 5백여명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전 15:6). 천명도 되지 않은 점에 놀랄 이유는 없다. 성경은 처음부터 믿는 자가 소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부활사건 자체의 역사성 여부는 두고라도,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불교인들에게 신이 그의 대리자를 지상에 파견하고,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 그를 되살려 주었다는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하게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을 수 있는 일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불교인이 놀라는 일은 예수가 일으킨 기적이나 부활과 같은 일들이 아니라, 이와같은 보잘것 없고 허황한 사건들이 어떻게 이렇게 거창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인류문화와 세계역사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의 기적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것이 기적이 아니라, 위에 말한 바로 이점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다시 세상에 오심)과 연계시켜 이해하면 가장 확실하다.  

그리고 이 부활과 재림은 아담과 관련시켜 마땅히 이해해야 하고 아담 관련에 대해서는 앞 부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메시야 예수(본 고장 히브리 말로 "구세주, 구원자"의 뜻)님께서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라 함은 더 이상 "아담"이 없다는 뜻이요 단 둘 즉 첫 사람 아담과 예수님이실진대 이는 대칭(짝)의 개념으로 말한 것이 분명해진다. 짝의 원리에서 짝을 이루는 둘은 본질이 같고 성질이 정반대라는데 있다. 첫 사람 아담이 그 육체를 우리에게 물려줌으로써 우리가 사람이 됨과 같이 대칭 아담께서는 그 영(성령)을 우리에게 영원한 선물(요 14:16)로 주심의 대칭 관계다. 그리고 이미 설명한 대로 아담의 범죄 전과 후의 양면성은 대칭 아담의 부활 전과 후의 양면성으로 짝이 되어 맞추어진다.

다시 말해 단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희생 제물로 죽으신 것이라기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세상에 오셨고 또 우리 위해 죽으셨고 우리 위해 부활하셨으며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이제 아담("첫 사람 아담"과 대칭을 이루신)이 되셨으니까 첫 사람 아담의 그 육체로 말미암아 우리가 인간이 되어 있는 것처럼(불행히도 범죄 후의 아담의 육체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썩음과 죄의 온상으로서의 자아중심적 본능까지 함께 물려받아) 대칭 아담의 성령을 "선물"(행 2:38)로 받아 모셔 새 인간("새 사람")이 되어 대칭 아담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수용하게 되니 죄성/罪性처럼 되어 있는 이 "죄의 몸"(롬 6:6)을 박살내고 자아중심의 본능을 완전 무력화시켰으니 자유 해방이다. 

더 이상 "오호라, 이 나의 곤고함이여" 하고 장탄식할 필요 없이 "죄와 사망의 법"이 여지없이 분쇄되고 "새 생명"(:4) 가운데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8:2) 아래 당당히 안주하게 된 것이다. 180도 변화된 삶. 그래서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게"(갈 5:25) 된 것이다. 이런 획기적인 근본적인 변화가 대칭 아담을 옷입고 있게 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육체로는 아담을 입고 있듯이. 다시 말해 부활하시어 다시 살아나신 대칭 아담께서 성령으로 내 속에 계심으로써 다시 출생함으로 인한 인간 천지개벽이 이루어진 것이다.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비판자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말해도 믿지도 않기 때문에 "어떻게 이렇게 거창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인류문화와 세계역사에 그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기독교의 기적을 말하라고 한다면, 예수가 행했다는 그런 것이 기적이 아니라, 위에 말한 바로 이점이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정직하게 토설하게 만든 것이다.

비판자여, 당신은 바로 이 부활의 기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기적이 아니다. 비판자가 말한 그 "기적"의 정체이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신 것이다. 다시 거듭 강조하거니와, 대칭 아담으로서 부활하심으로써 내가 새로 창조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엄청난 사실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구원을 말하려면 이와 같이 명백하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아담과 "마지막 아담"과의 대칭이다.  

결론 

불교인들은 기독교의 문화, 기독교가 이룬 업적,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여러가지 활동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또 기독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교리에 접할 때는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뿐만 아니라 거부반응까지 가지게 된다. 이 글을 준비하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러나 막상 좀 더 가까이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대하면서 놀랐던 것은, 불교인들에게는 기독교 교리가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비판자여, 구도자여, 처음에는 필자도 비판자에 대하여 짜증도 냈지만 사심 없는 결론에 박수를 보낸다. 다름 아닌 비판자의 "감탄"은 대칭 아담의 <부활>에 있음을 단언한다. 대칭 아담이시기 때문에 부활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 이것이 오늘 이 자리에서의 화두다.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라든지, 편견, 몰이해와 같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가 기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붉은 안경을 낀 사람에게는 세상이 붉게 보일 뿐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붉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 푸른 안경을 낀 사람의 설명이 통할 리가 없다. 그렇다. 있다 없다의 문제다. 아니다, 그렇다의 문제다. 이것이 기본 바탕의 문제인 것이다. 창조가 현실적 상황인데도, 창조주 하나님이 엄연하신 실재이신데도 "그렇지 않다" 하는 것과 "그렇다"의 상극인 것이다. 고로 해결책은 간단하다. 손바닥 뒤집기이기 때문이다. 손등을 보이다가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보이면 끝나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의 관점이 더 옳은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불교의 교리가 <진짜>이고, 기독교의 것이 <가짜>라든지, 또 반대로 말하는 것으로야 아무런 해결도 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유익한 일도 아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한 종교에 대해 확고한 입장에 서 있을 때는, 다른 종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진정한 이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름대로의 이해>라는 것은, 붉은 안경을 끼고 세계를 붉게 보거나, 푸른 안경을 끼고 세계를 푸르게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여기서만큼은 대세를 따르시라. 유신론 종교가 51억이요 나머지 5억이 불교 신봉임을 말하는 것이다. 유신론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 자세는 정방향을 향해 있음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 뿐이다. 그러면서 공존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다. 물은 물이요 기름은 기름이다. 물을 원할 때는 기름을 버리고 기름을 원하거든 물을 버리면 간단한 일이다. 이것이 본론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글의 시작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간에 넘을 수 있는 벽과 그렇게 할 수 없는 벽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이와같은 생각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넘을 수 있는 벽은 있다. 넘을 수 없는 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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