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오직 하나뿐ㅡ이 진리와 반대되는 그 무엇이든 오직 속임수일 뿐 더 달리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종교 통합론자들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사랑" 하나만으로써 세계 종교가 하나요 다 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장치하신 불문율인 양심이 있는지라 사랑을 표방하지 않는 종교가 없다. 그러나 이제 3위1체(一始二元三位一體)의 법칙에 의해 사랑이 명확히 정의(定義)가 된 것이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양자가 '둘의 하나됨'을 이룸으로써 나타내는 피차간의 자기 부인인 것이다. 이 영원한 삶(생명)의 원리를 성경은 남녀 한 몸되는 이치를 통해서도 명백히 설명한 것이다(고전 7:4). 성경이 "한 아내의 남편, 한 남편의 아내"로서의 일부일처제를 강조하는 이유다.
뿐아니라 부부 해로의 원칙 역시 강조함은 당연하니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심 같이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4,25) 한 것이다. 고로 그와 같이 아내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 아내가 자기에게 복종을 요구할 권리가 없고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당연시하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표할 권리가 없다. 이 사랑의 법칙에 의하여 서로가 서로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 남녀평등이니 여남평등이니 하고 싸울 이유가 도무지 없다. 우주 천지의 순리를 거스르니(역행하니) 오늘날과 같은 남녀간의 불협화음이 끊일 날이 없는 것이다.
사정은 세상 모든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입으로는 자비, 사랑, 인애를 부르짖으나 성경에서 밝히는 이 사랑과 생명의 따르지 않는다. 막연히 그저 애매 모호하게만 "사랑, 사랑" 하는 것뿐이다. 오직 성경만이 정확하게 이 이치를 따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왜 "새 계명"이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최종적인 본을 친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머리로서 그 모든 몸의 지체들이 따를 수 있는 기준을 정확하게 정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 위해 당하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나의 소유가 되셨다는 의미이니 이는 전적으로 나를 위하신다, 나를 위해 존재하신다, 나를 위해 일체의 모든 것을 다하신다는 뜻이다. 3위1체의 법칙을 기반으로 한 생명과 사랑의 원리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 그대로다.
고로 성경만이 진정한 유일무이의 인간 생명(삶)의 교과서요 진리의 경전임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왜냐면 머리와 몸의 관계를 따른 하나됨에서 머리로서의 이러한 실질적인 모본(모범)을 나타내어 모든 인생들이 따름으로써 이상향적 삶의 구조인 '한 몸' 됨을 구현한 사례가 전무후무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이런 본을 보였던가? 모하메트가 이런 본을 보였던가? 그 누가 이런 본을 보여 주었던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 이미 인간 구세주께서는 이런 본으로써 훌륭하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는 이로써 새로이 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류 역사의 새 기원이 시작된 것이니 그래서 Anno Domini(since Christ was born, 서력 기원)라 정함이(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간에) 만번 지당한 것이다.
그런즉 세상 종교와의 차이가 명백하다. 하나는 진리요 아니, 하나만 진리요 그 나머지는 모두 사이비 곧 가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진리에 대하여 무식해서 그렇고 오신 후에는 말 그대로 진짜에 대한 가짜 역할이다. 진리에 대해 무식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여기서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은, 기독교를 표방하여 하나님의 실존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면서도 그리고는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라 하면서도 도무지 그의 종(從僕)처럼 행동하지 않을 때 위의 둘을 합친 것보다 더한 해독을 끼쳐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인들이, 그리고 모든 무신론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치하게 성경으로 돌아 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이다. 마지막 기회이니 이 기회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내 종교, 네 종교 하고 다툴 필요가 없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찾고 구하고 문이 열리기까지 두드릴 일이다.
불교를
자주 언급하게 되는 것은 불교도들에 대한 남다른 호감 때문입니다.
불교의 승려들은 일찍이 싯다르타 고타마가 그러했듯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낙(樂)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고(苦)임에
일찍부터 눈을 떠 이를 개탄하여 출가(세속을 등지고 진리
탐구에 몰두)하는 처절한 모습들이 인상 깊은 여운으로 우리에게
남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인간고(人間苦)를
느끼지 못하는 기독교인들과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 삶을 얼마든지 누리면서(심지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는 미신에 이르기까지)
천국까지도 갈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불승(佛僧)들에게 성경에 있는 진리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동기 부여만 충분히 해준다면 보다 높은 확률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가슴 설레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불교도들에게
단 세 가지만 지적해 주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들이
주장하는 바의 기본이 되는 "무상(無常, 덧없음)"은
자연계에 한정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자연계와 짝을 이루고 있는
초자연계를 인식하고 있었다면 결코 싯달다는 불교를 창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 신(神)이 이런 초자연계의 실존(자연계와
대칭성을 이루어 있는)을 인간으로부터 감추기에 급급했고
오늘날까지 상당 부분 성공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한 첫 단추에 해당되는데
이 첫 단추 잘못 채우는 바람에 나머지도 모두 어긋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 혼자만 존재하지 않고 여럿이 함께 살 때에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체제가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한 몸"을 이룸에
있는데, 그 핵심이 되는 머리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 또한 큰 불찰입니다. 이 머리 역할은 나와 똑같은 인간이어서는
안되고 인간이면서 또한 독특하지 않으면 안되는 머리 특유의
본질의 의미가 중요한데 이런 머리 역할을 위해서는 만유의
창조자 외에는 달리 될 수가 없다는 현실을 저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첫 단추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창조자를 부정함으로써
기타 모든 논리도 자동적으로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셋째로
생각할 점은 불교 신행(信行) 중에 간간이 나타나는 초능력적
현상에 대한 오해입니다. 불교만 아니라 요즘 기독교에도
나타나는 바로서 초능력이라 하면 자연계에 한정된 인간으로서는
신(神)적인 권위로 떠받들기가 쉽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
권위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제대로 규명하여 간파하기
위해서는 3위1체의 법칙이 가리키는 대칭성 원리를 아는 것이
필수입니다. 다시 말해 짝의 원리로서 만사만물은 그 성질이
정반대인 둘로서의 양면성을 이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신체가 좌우 대칭이듯 모든 것이 '둘로서의 하나됨'을 이루어
짝이 되어 있는 현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악인과 의인(선인)으로 갈라져 있듯이 인간과 같은 자연계
존재가 있으면 그 초자연적 존재가 있어 그 역시 악령과
거룩한 천사로 구분된다는 것이 처음부터 성경의 설명입니다.
또 성경은 그 초자연계 존재의 악령에 해당되는 이 세상 신이
있어 현재의 인간 세계를 다스리고 있고 이 악령들이
행하는 초능력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자연계 존재의 초능력이 선과 악, 둘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고로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악신(惡神)이므로
특별히 선신(善神) 곧 거룩한 천사라고 명시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악신에 의해 행해지는 기적(초능력)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모든 정보는 성경이 유일합니다. 이 방면에 관한
한 최고(最古), 최고(最高)의 정보원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만사를 대칭성 원리로 갈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악령이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성경이 설명하는
이상 성경에서 언급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는 한 모든
초능력이 악령으로 말미암은 것임이 자명해집니다.
고로
성경과 반대되는 불교 관련 모든 초능력이 악령의 속임수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상 세 가지에만 유의해도 불교의 교리가
절대로 진리가 아님이 드러나고 있으니 한시 바삐 이 "불교"라는
마굴로부터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성경과 배치될 때에는
"기독교" 역시 같은 상황임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만을 비방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시 악령의 마수(魔手)가 뻗어 있는 마굴(魔窟)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니 오늘날 그와 같은 현상을 현저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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