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0일 월요일

속아 산 세상, 속고 있는 세상 (5) ㅡ엄마 손잡고 깡충깡충 뛰놀며 거니노라









처음부터 인간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살도록 하셨다면 인생들을 "죽은 자"(마 8:22)라고 하실 리 없다. 흔히 말하는 대로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을 "죽음"이라 지칭하셨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정도로만 그칠 뿐이지 "영생하도록" 구원하신다 함도 역시 있을 수 없다. 왜냐면 인간의 범죄도, 인간을 애초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기에 빚어졌다고 말할 여지가 충분해지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범죄를 계기로 인생들을 영생하게 하신다는 것도 조리가 맞지 않게 된다. 그런즉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즉 초자연계적 존재로 아담을 만드셨으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 몸이 됨으로써 '죽는 자' 혹은 "죽은 자"가 되었다고 하면 아주 간단하게 끝난다.

실상 성경의 관련 대목들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도 한사코 자연계 몸이라는 편견과 선입관을 고집하는 통에 성경 이해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아담이 영생하는 즉 천사들과 같은 초자연계 몸이었다고 설명한 예가 없다. 오직 성경밖에는 없다. 성경에 꼭 "신령한 몸이었다"고 명시해야만 하는가. 다 같은 에덴낙원의 동식물인데 왜 식물만 신령하여, 선악을 알게 하고 심지어는 영생하게까지 하는 신령한 나무까지 있었겠는가. 그 때 당시 창조된 동물 역시 신령한(초자연계) 존재라는 것쯤이야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라도 능히 판단하고도 남을 일이다. 바울이나 요한도 명백히 사탄을 "그 옛 뱀"이라 명시하였고 아담의 죽음이 오직 범죄 때문이었고 범죄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는가.

죽지 않으면 영생하는 존재가 아닌가. 성경에 관한 한 사탄은 인생들을 아주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사탄이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라는 사실만 빼놓으면, 이상의 사실은 이상하고도 괴이한 일이 될 것이나, 사탄의 존재를 설정하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지사가 된다. 악령의 초능력으로 아무리 천재라도 멍청이 만들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구원 얻는 데에는 사랑의 순종이 핵심이므로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것을 과거에는 몰랐어도 되었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이 우선이므로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안된다. 다니엘의 예언(단 12:4)대로 "지식이 더하는" 때로서  모든 사람이 "제법 아는 체하는" 시대이기에, 최소한의 기본 지식은 정확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용(龍, dragon) 곧 사탄(히브리어로 "적대자"라는 뜻이므로 별명일 뿐 아담이 지어 준 원래의 이름은 아니며 원래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그가 인류의 원수가 되어 있음을 알면 족함)이 자기 실상을 감추기 위해 지금까지 인류를 속여 온 것은 자기의 목적 달성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아담)이 원래는 자기 손위(手上,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며 자기들보다 먼저 창조되어 6일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어)여서 모든 영물들(거룩한 천사나 악령을 막론하고)을 다스리는 고귀한 신분이었음을 인간들이 앎으로써 자기에게 덕될 것은 없다. 영물들보다 먼저 초자연계 존재가 되어 있었던 아담이기 때문이다.

자연계 존재로는 맨 나중에 창조되어 창조 서열상 맨끝이나 초자연계 존재로서는 맨처음으로서 이 또한 조화(調和)이다. 단지 지식면에서, 자연계의 흙("dust")으로 애초 그 육체가 창조된 아담과, 처음부터 영계(초자연계)인 에덴의 땅("ground")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 영물들과 동일할 수가 없다는 그 차이뿐이다. 지식 면에서는 후자가 월등하므로 후자의 보좌를 받는 인간(아담)이었던 것. 이는 서로 보완함으로써(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에서도 확인되듯) 어느 한 쪽도 치우침이 없어 오만해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배려였다. 이 역시 조화이다. 이런 보좌역으로서의 역할을 악용하여 "뱀" 곧 용은 인간을 속여 죽음에 빠뜨렸었다. 속일 때에도 감히 아담은 상대하지 못했다. 그 대신 아담과 한 몸을 이룬(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므로) 여자(당시에는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지어줄 수 없었고 단지 '남자'와 '여자'로서의 구별만으로 충분했음)에게 접근했던 것.

당시의 "선악과"가 오늘날의 "세상"(요일 2:16/창 3:6)이 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람이 자아중심의 자연계 육체의 성향 일변도로 나간 것이나,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 모든 인간이 자아중심이 되어버려 자아 중심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나, 본질면에서 같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요일 2:15) 이 자아 중심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함"(요 12:25)은 자아중심을 미워하는 뜻이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히 자아중심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그래서 사탄이 세상 부귀영화를 보여주면서 "내게 절하라"(눅 4:7) 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구원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므로(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심이 확인되었으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이유가 없어ㅡ롬 14:7-9/고후 5:15), 자아중심의 세상을 사랑하여 벗함으로써 자아중심에 물들게 되면, 자아중심이 아니었던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 육체의 자아중심으로 변질됨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인생들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어 그 옛날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먹도록 한 것과 같이 하려는 것이 오매 불망 사탄이 원하는 목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자연적으로 자아중심이 될 수밖에 없어ㅡ롬 8:5-8) 따라서 멸망은 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구원된)에게는 시험의 형태로 다가오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미 꼼짝없이 채워진 족쇄가 이 세상 사랑이다.

인생들이 에덴낙원의 실상을 알게 되면 자기(사탄)와 맞먹으려 들 것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던 아담의 권위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도 자기를 상대하게 될 것인즉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고 바로 이런 인식 전환의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은 뻔하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 이 세상에서도 부여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현재"(요일 3:2)의 신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마지막 아담과 하나됨의 권위도 절대적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기도 하니 천하 무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귀신들이 쫓겨 가고 두려워하는 이유도 그리스도의 이 권위를 각자 행사할 수 있음이 그 원인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기독교인)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던 그룹 중 하나였던 그 계명성(Lucifer, 새벽 별ㅡ성경은 그룹과 스랍 전체를 "새벽 별들"로 표현하고 있다-욥 38:7)인 양 사탄을 착각해 온 것이다. 사탄이 그렇게 속인 까닭이다. 그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고,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아담에게 도전하고 반역한 것이다. 그런즉 사탄은 지금까지 인생들을 속여 오기를 ①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였고,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② 에덴 낙원이 자연계였을 뿐이라고 기만해 왔다.

여기서 이 둘의 공통점은 초자연계와 그 세계에 속한 존재인 악령들을 부정함에 있다. 오직 이 자연계뿐이라고 속여 온 것이다. 대칭(상칭)성으로서 그 두 세계가 존재하게 되면 초자연계는 자연계와 더불어 처음부터 존재해 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게 되면, 영생도 천국도 그저 그런 인간이 상상해낸 결과물일 뿐이지 그 실체조차도 흐지부지 유야무야가 되어 버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영생, 천국이란 것이 있기나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고 여기게 만든다. 결국 앞서 설명한 대로 별 수 없이 세상 사랑으로 이어지도록 연결 고리가 정해지는 것은 필연.

지금까지 세상을 주름잡으며 판을 쳐 온 무신론, 진화론, 그리고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가 이렇게 자연계 일변도로 해서 뿌리 내려진 어이 없는 결과물들이다. 따라서 초능력, 초자연계에 속한 기적 같은 것은 ① 아예 부정해 버리거나, ② 아니면 아예 창조주 하나님과 결부된 것으로만 믿도록 조종해온 사탄이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조건 초능력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니, 인간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이 세상 신(神)에 의해 다듬어지고 통제되어 온 것이다. 악령들과 관계된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속임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대대적인 속임수를 쓸 때, 바로 지금 이 시대를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바로 이 적 그리스도의 등장 시기다(살후 2:3-12). 처음부터 사탄은 이 때를 위하여 과거부터 부단히 여러 모로 준비해 왔었다. 페루 나즈카 평원 위의 기하학적 도형이라든가, 기타 남아메리카 여러 곳에 오늘날의 소위 "외계인"들처럼 가장해서 과거에 나타나 각종 천문 지식을 퍼뜨린 사례라든가, 이 모든 것이 악령들의 그런 사전 계획의 일환이건만 세상 사람들은 이를 알 턱이 없다. 이상 두 가지(①, ②) 극단(極端)으로 이제까지 사탄에게 세뇌를 당해 왔으므로 악령들의 짓거리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사탄이 처음부터 기획해놓은 책략대로 고스란히 빨려들어가고 있는 지금 실상이다.

그리고 "구원을 얻었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은 또 어떻게 속아 왔는가. 더 한심한 실태가 나타난다. 성경에서 밝히는 범죄의 본질은 자아중심이다. 단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그런 것만으로 범죄를 이해할 것이 아니니, 행복한 삶의 생명은 머리와 몸의 하나됨에서 오는 자기 부인(자기가 자신을 위하지 않는)에 있는데 이런 성경적인 정확한 분석은 외면하고 막연하게 자기 욕심만을 챙겨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뺏고 하는 등의 현상만을 염두에 두도록 사탄은 만든 것이다. 그 모든 뿌리가 자아중심인데도 이를 감추었고 그 반대인 생명과 의(義)의 뿌리가 자기 부인인데도 이를 무시하게 만든 것이다.

"육신의 일"(자연계 몸의 자아중심의 본능)과 "영의 일"(자기 부인)(롬 8:5)의 명확한 차이를 구별 없이 한데 얼버무리고 사탄은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소리를 설교 강단에서 아주 듣기 불가능할 정도로 거의 종적을 감추게 만들어 버렸다. 이는 당연히 세상 사랑과 맞물린다. 그런즉 아무리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 해도 그 말씀을 인간의 편견으로 곡해하려 들면 한정이 없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위해 사는 자아중심이 되어도 구원은 된다고 믿고 그것을 "은혜의 구원"으로 믿는 이상, 멸망은 필지이다. 성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어린 아이라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간명한 것이지만 사탄이 비틀어 놓은 대로 듣고 믿어 그대로 삼켜버리니, 옛 에덴낙원에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탄의 거짓말임에도 아담 부부가 쉽사리 넘어가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되므로 사탄은 아주 자신 만만하게 임해 왔던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한 것처럼 오늘날 "구원받았다"는 이들이 꼭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고 사는 자도 없다"(롬 14:7-9), 산 자 즉 구원 받은 자가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5)이라고 수 천 번을 강조해도 믿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나님께서도 이 경우 속수무책이시다. 완전히 손 놓으실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류를 식은 죽 먹기로 속이고 있지만 성경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려졌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라"(고후 4:3) 한 대로 되어지는 것뿐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하나님을 사랑하여(고전 8:3) 그 뜻에 순종하는(행 5:32) 이들에게만 한결같은 구원의 능력의 은혜가 임하시고 있는 것이며 세상의 그 무엇도 여기에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선택대로 되는 사항일 뿐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려고"(요 7:17) 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어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휘둘리게 되어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고후 4:4)이라 한 그대로다.

세상은 사막의 신기루다. 신기루는 마치 사람 사는 도시가 지척에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현상으로 거기에 속아 따라가다보면 더 깊은 사막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도시고 집이고 사람 사는 데고 아무 것도 없다. 바람 같고 메아리 같은 것뿐이다. 공허뿐이다. 세상이 그러하다. "오늘 밤 내가 너의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니 그러면 네가 준비해 둔 이 모든(세상의)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하심과 같다. 당장 오늘 밤이다. 내일도 아니다.

혹자는 "에덴낙원이 초자연계였다는 사실을 초대교회 이후 교회가 그렇게 몰랐을 리 있느냐" 하겠지만, 그러면 반문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 우리가 구원됨을 사도들이 가르치지 않아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대신 죽으심'을 통해 구원 받는다는 헛된 망상에 젖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보다 교부(敎父, 아버지 "부"자인데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지독하게도 하는 고집들이니, 인간을 "아버지, 스승, 지도자"라 부르지 말라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본격적으로 그 역할을 영원히 하시게 된 때문인데-마 23:8-10)들의 글만 열심히 쫓아다니며 뒤진 결과로 된 것이다.

교부들의 글에 바울 사도의 설명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 그 죽으심이 우리 죽음, 그 부활이 우리 부활이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명료하게 써놓았다면 그렇지 않았을까. 교부들이 그런 "대신 죽음"을 가르쳤다기보다 교회 중 절대 다수가 세상 삶을 사랑하여 자아중심이 되다보니 "하나님과 원수"(롬 8:7)가 되어 있음을 양심상 책망으로 잘 알기에 여기서 벗어나는 핑계와 변명으로 로마서 7장을 난 데 없이 바울 자신의 체험으로 둔갑시키고(왜냐면 구원 받지 못한 자기 실상과 같은 까닭에) 그래서 이를 합리화하려는 과정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갖다 붙인 것이다.

'대신 죽으심'이라면 상식에도 벗어나고(죄를 지은 당사자가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결자해지 차원에서) 논리적이지도 않은 것이니(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보응을 받는 것인데 죄의 형벌을 미리 받아놓은 것이 되니까 앞으로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아주 위험한 결론이 되어버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이런 상식과 논리를 뒤엎어도 되는 것이라면, 그럼 누가 논리적 판단과 상식을 따라 행동하려 하겠는가.

또 하나의 비논리는, "대신 죽음"은 그 대신 죽음의 혜택을 보는 자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야 "대신 죽었으니까"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지금 숨을 쉬고 있다고 산 것이 아니라 영생하는 자가 영생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있는 운명이니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이다. 원래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초자연계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신 죽는다는 것은 성경에도 배치되는 인간의 망상으로 날조된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 멸망"인가? 그러면 대신 멸망하신 그리스도께서 왜 살아나셨는가. 그러면 멸망이라는 의미를 완전히 허물어뜨림이 된다. 죽음은 다시 살아나면 되지만 멸망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멸망은 마지막 심판 후의 최종적인 결정에만 쓰이는 말이다. 같은 차원에서, 대신 죽음은 그대로 영원히 대신 죽은 상태에 있어야 그 대신 죽음의 혜택을 누리는 자가 죽지 않는 것이지,  대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면 그와 동시에 그 대신 죽음의 덕을 보는 자는 죽음에 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무슨 연극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배우가 죽은 시늉을 하고 있다가 막이 내리면 다시 일어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께서 그런 연극을 하시는 분이라고 착각한다면 그렇게 속임수를 쓰시는 하나님을 무슨 수로 신뢰할 수 있는가.

대신 죽음이 대신 멸망이라면 나는 그로 인하여 여하한 일이 있어도 멸망할 일이 없다가 된다. 왜냐면 "나를 대신해 죽으심을 믿으면 구원"이니까. 그런 구원에 대한 '믿음'의 증거로서 교회에만 충성스럽게 나가면 된다고 착각하게 된다. 일상적인 생활이 죄 짓는 것인지 아닌지 그 여하를 묻지 않는다. 즉 자아중심이냐 자기 부인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비합리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로마서 7장의 율법 아래의 실상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실상으로 갖다 붙이는 억지 해석이 시작된 것이다(벧후 3:16).

죄는 크고 작음이 있을 수 없다. 용서되고 용서 안되고 하는 차이는 있어도(요일 5:16) 경중의 차이는 있을 수 없으니 한 뿌리이기 때문이다. 즉 자아중심이므로 아무리 작아도 이를 회개하지 않는 한 큰 죄, 즉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 지경에까지(즉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 반드시 이르게 되어 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므로(마 1:21) 여하한 죄도 짓지 말아야 즉 자아중심이 되지 말아야(롬 2:7-10) 다시 말해 오직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하는 것이(고후 5:15/롬 14:7-9) 구원 받은 증거다.

율법은 계명 곧 생명의 법칙이다. 자연 만물이 자연법칙을 따라 생존을 이어 가듯이 인격성을 지닌 영적 피조물은 그 생존의 필수 요건이 되는 것이 삶의 원리를 준수함이다. 즉 한 몸 체제에서의 머리와 몸 관계에서 오는 두 계명이니, 머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고(위하고) 그 지시를 따라 같은 지체를 이룬 내 이웃을 사랑하여 위함이다.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말씀하신 그대로다. 간단히 한 마디로 요약된 것이다. 모세 율법은 이를 그림자로 나타내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자기 역할을 해 왔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상징적인 것은 필요 없게 되고 이제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아래 있어 하나님의 영원한 계명을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요 21:17) 이 물음으로 귀착되는 것이니 이 구심점에서 빗나가지 말 것이다.

한 몸의 원리에서는 머리도 실상은 나 자신이요 나 외의 다른 지체도 모두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애초 하나로 존재했다가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갑', '을', '병' 3각 구도(tripod)로 되어 있는 3위1체의 원리에서 '병'을 말함이다. 하나에서 갈라져 나왔으니까 여전히 하나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음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이 생명의 계명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다가 유혹이 온다고 그 일편단심을 버릴 수 있는가. 그렇게 되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만 될 뿐이다. 주변 환경과 사태가 순행이 아니라 역행할수록 더 힘써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이 그런 역행하는 시험 무대이다. 자기 부인은 약자, 소수로 취급 받고 자아중심이 득세하고 판을 치는 곳이기에 그러하다. 자아중심의 화신처럼 되어 있는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 되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

"남이 네게(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ㅡ"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마 7:12)라 하신 대로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로서의 삶에 대한 의지(意志), 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모든 인륜 도덕의 요강(要綱)인 것이다. 택하심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이 생명의 원리와는 상반된 것이다. 누구는 영생을 주시기로 미리 택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고 다른 이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므로 멸망한다는 것은 악마의 교리다. 이 "택하심"에는 반드시 미리 아심을 따르는 즉 각자의 선택 의지를 따라 좌우된다는 전제가 붙어야 가능한 것이다. 성경이 이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

그런 특권, 선민(選民) 의식으로는 절대로 구원 얻지 못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평균, 형평이다. 역할로는 귀한 지체가 있고 덜 중요한 지체가 있어도 혜택은 골고루 미쳐져야 하는 것.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셔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다"(고전 12:22-25) 함과 같다.

머리는 모든 지체와 상관한다. 다시 말해 모든 지체를 똑같이 대하지 차별해서 관계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시고 영원 멸망으로 판결하시게 된다. 머리의 뜻대로 하지 않은 결과이니 즉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는"(마7:21) 것이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평균되고 평형을 유지할 정도로만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하고 가진 것으로 만족해하는"(딤전 6:8/히 13:5) 공동체 의식의 사람(당연히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심으로써)이 들어가는 천국이다.

그래서 지금 웃는 자, 이제 부유한 자 화가 있다 하셨다. 사람이 갓나 죽으면 그 인생만이 헐복해서 죽은 줄로 알거나 젊어 죽는 이를 그 사람만의 처지로 한정해서 인식하면 반()공동체 의식의 표본이 된다. 그런 죽음을 나 자신의 죽음으로 인식하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요, 저주와 멸망의 대상이 되는 특권, 선민 의식이 아닌 것이다. 똑같은 인생으로 태어나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이다. 하나님께서 차별하여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도 그렇게 죽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뜻이 계시어 이렇게 사는 줄로 아는 것이 지혜다. 구원 얻게 하려 하심이요 구원 얻은 다음에는 사람들을 구원해내도록 하려 하심이다. 그 외에 아무 다른 뜻이 있으실 수가 없다(눅 9:25). 다시 말해 나는 특별한 복을 타고 났으므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장수하며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는 구원이 될 수가 없다(요일 2:15).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왜 내게 구원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았고 나 위해서 기도 좀 해주지 않았는지 당신에게 묻고 싶다" 하고 나중에 원망 들을 일을 아니하려는 차원에서도 복음(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복된 희소식) 전파는 필수 필연이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말씀 전파하기를 부끄러워하는-눅 9:26/계 21:8-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하기 때문) 엄히 명하거니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1-2)함과 같다. 그리고 세상 삶의 사랑은 갖가지 면으로 살펴보아도 영원한 저주이다. 세상 삶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모든 요인은 악인을 멸망하도록 만들기 위한 함정의 구실밖에 하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악인'은 '죄인'과 달라 자기 죄를 끝까지 고집하고 회개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26-29) 한 대로, 당신이 믿음 있는 것 즉 하나님 사랑할 것을 미리 보시고(아시고) 당신을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도리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가난하고 없는 자가 되게 하셨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럼에도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 강한 자, 있는 자가 되려 할 것인가? 그래서 세상 사랑으로 나갈 것인가? 물론 부자마다 모두 택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라고 모두 택하신 것은 아니니 하나님께 받은 각자의 선물(恩賜)이 있고 다르기 때문이다(고전 7:7). 그러나 얼마든지 그런 것이 미리 택하심의 의미는 될 수 있는 일이다. 왜냐면 "그러한 이들 중에 부르심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이다.

대신 죽음이 우리 구원의 이치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을 리도 없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난 받는다면 구원이 아직도 미완성이라는 뜻이 되어버린다. 그리 되면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구원이 종료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의 책벌이 있을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도 성립 불가능이다. 우리의 고난 받음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이니 아직도 남은 사람(또는 아직 태어나야 할 그래서 구원의 말씀을 듣고 구원 받아야 할)이 있어 구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고난은 그와 같이 "남은" 사람들을 위함이니, "대신 죽으심"이라면 그 '미리 받은 형벌'을 계속 적응시키면 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고난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구원의 이치가 한 몸으로 하나됨에 있어 그 구원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이 죄인으로서 받는 저주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함에 있는 것인즉 이 작업을 이제는 머리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몸된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으나 그 완성된 구원을 남은 사람들에게도 적용시키는 데에는 동일한 구원의 이치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친히 고난 받으심(그 몸된 교회의 고난 받음을 통해 나타나는)이 필수이니 어디까지나 동일한 기조(基調) 곧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고전 12:26)이라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따름이다. 각 사람을 구원함은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의 각 부분"(:27)을 만듦에 있기 때문이다. 구원해야 할 상대와 하나되는 이치에서 의인(그리스도로 인한)으로서의 내가 그의 죄 값으로서의 저주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한 몸)됨을 인하여 머리께서 당하신 고난을 조금이나마 맛보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오늘날 초자연계의 존재를 역설하여 에덴낙원이 초자연계요 아담이 초자연계 몸(영적 육체)으로 있었던 사실을 강조함은, 멸망의 함정인 세상 사랑을 막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니 세상의 실상을 밝혀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초자연계 이야기를 끄집어 낼 이유가 없다 해도 좋다. 이를 거꾸로 이야기하면, 초대교회 당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곧장 세상 사랑을 버리는 것을 의미함이어서 자기 부인이나 자아중심을 일부러 힘들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바울의 명확한 언급에서도 나타난다(롬 14:7-9/고후 5:14,15). 따라서 과거 에덴낙원이 어떻고 아담이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굳히 상기시켜 말할 필요성마저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해도 과히 틀일 말은 아니다.

아담이 그러했다고 우리도 당장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것도 아닌 만큼,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의 인생으로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었던 것. 이와 같은 중요 현안에 비하면 그런 사실(에덴낙원의 초자연계적 본질 등)이 덜 중요한 것으로 밀려나 자연적으로 교부들의 글에서도 강조되지 않다보니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악한 자(적 그리스도)의 기적(초자연계에 속한 존재의 초능력 과시)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각종 기적이 난무하기 시작하고 악령들의 실체가 비록 가장된 형태이기는 하나 밀착 근접해서 육박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적(神的) 권위로 군림해 오니 이 때야말로 과거 그러한 초자연계 존재로서의 '뿌리 찾기'가 절실한 시기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전반적인 기독교계가 부패 타락하여 "배도(背道)"(살후 2:3)의 지경에 이르게 됨을에 이르러 시의적절한 오늘날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모두가 속아 온 세상이다. 창조주 하나님도 없는 듯이, 이 자연계가 이 세상의 전부인 듯이 지내 왔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서도 핵심은 놓쳐버린 채 수박 겉 핥기 식으로만 알아 와 사탄의 조종 아래 자기를 속여 온 것이다. 그러나 만만다행인 것은 항상 강조하는 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마 18:3) 이들은 구원 얻음에 일절 지장이 없었으니 만일 지장이 있을 정도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조처를 이미 적절히 취하셨을 것이다.

이 세상 신이 천하를 속였지만(계 12:9) 어린 아이 같은 이들은 오히려 손도 대지 못함이니 이것이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아버지의 뜻"(11:26)임이 분명해진 것. 그러나 지금은 때가 다르다. 몰라서는 안되고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무신론을 최대한 활용해 먹던 사탄이 이제는 유신론을 활용하게 될 만큼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외치는 소리는 사탄의 유신론이 인류의 귓전을 치기 전에 성경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적시에 깨닫고 구원에 이르라는 것이다. 사탄이 창조자 하나님을 들먹이게 될 즈음이면 이미 때는 늦다.

세계(세상)가 짝으로 되어 있을진대 그 양 세계는 성질이 전혀 다르다. 그 반대가 된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귀가 아프도록 반복해 들려줄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삶과 죽음, 임시 방편에 의한 시한부 삶과 죽음,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다. 지금 이 세상은 후자에 속하므로 전자가 본격적인 삶이라면 그 죽음도 본격적인 죽음의 고통이다. 따라서 전자는 생명의 세계이고 지금 이 세상은 죽음이다. 다시 말해 오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지금은 죽음의 고통이 정상이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 무리(無理)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이에게 아무 희망도 없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 죽음의 질서대로 죽음의 고통과 고난을 받는 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자는 복이 있다.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로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린다 하신 그대로 될 것이다. 미워해야 영원토록 보존한다 하셨다. 고로 지금 이 자연계와 대칭되는 초자연계 세상이 존재함을 알았으니 이 사실을 중심으로 생활 의식을 180도로 바꾸시라. 하나님의 실존을 몰랐던 이들은 의당히 그에 맞게 바꾸고 하나님을 믿어 왔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인식부터 바꾸시라.  

나와 함께 하나되시어 죽음의 고난 받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이다. 우리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 부활하심으로 이미 완료되었으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말하고 그 고난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부과되어 있음을 밝힌다. 이 역시 이치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이루어진 몸된 교회라는 데에 있다. 머리와 몸은 하나이므로 모든 것을 함께 함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나 부활하신 마지막 아담처럼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지 않고 여전히 자연계 몸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고로 세상의 구원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 몸된 교회의 고난 받음이 필수. 즉 그리스도의 고난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 사실을 마지막 아담께서는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말씀으로써도 확언하셨다. 세상 사람의 구원받음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는 계속 그런 '원인'으로 계셔야 하는 것. 원인 제공이 계속되어야 계속 그런 '결과' 탄생이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한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 받음은 당연. 그러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고난 받음은 앞서 설명한 대로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받으심에 동참하여 함께 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고난 받으시므로 고난 받는 교회에 함께 하시고 고난을 기피하는 데에는 계시지 않는다.

과거에도 남처럼 형통하지 못해 고생하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고생에서 벗어나느냐 하면, 여전히 그 고생 그대로 하되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당하는 고생으로 180도 전환되는 의미가 엄청나다. 과거 믿기 전에 형통하던 사람은 그리스도께 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새 국면으로 돌입하되 죽은 자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산 자의 위치에 있으므로 지금까지 자기 몫에 태인 개인적 복이라 착각하던 세상의 위로 따위는 한사코 거부하는 것. 눈에 보이는 대로(자연계에 속한)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초자연계에 속한)으로써 영위되는 삶이므로. 오늘 180도로 삶이 달라졌으니까 어제와 오늘이 같을 리 없다. 가령 과거에는 전도하기를 꺼리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달라 입을 열어 말씀을 기꺼이 전파하는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나란 존재는 '하나'가 아닌 언제나 '둘'

그러므로 이런 막강한 존재는 우주 천하에 또 없다. 그런데 또 이런 존재들이 무수히 많은데 이들 모두가 또한 나 자신을 형성하고 있으니 더군다나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을 나의 소유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충만한 의미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꼭 어떤 한 사람이 나와 함께 있을 때 나에게만 와 주어 함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나와 함께 계심이니 이것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장차 영광의 몸으로 나타나실 때도 지금 성령으로 계실 때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의미이다. 사람은 원래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으니까. "신"이라고 하는 영물도 피조물로서 그런 제약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단지 초능력이 있어 공간을 초월하는 그 무엇은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피조물은 이런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 이를 "하나님(창조자)"이시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으니 우주와 만물이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를 가히 무엇이라 표현하랴. 필설로 형용 못한다ㅡ이 한 마디로 족하다. 

마지막 아담은 사람이시므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시기 때문에 마치 나와만 함께 하시고 함께 사시는 의미가 충분히 되고도 남으신다. 사실상 그러하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니까 모든 사람과도 그와 같이 계시는 것. 그래서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되다"(요 16:7) 하셨다. 왜냐면 모든 제자 각 사람에게 똑같이 마치 한 사람처럼 계실 수가 있기 때문. 그래야 성령으로 오시어 위와 같은 의미로 계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의 요점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막연히 여러 사람인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으로만 그칠 일이 아니니, '한 사람'이 나와 함께 사시는 것으로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나에게만 함께 하시고 나와만 함께 사시는 그런 의미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둘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둘인 의미이니 이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 강조해도 좋다. 하늘에 계시는 것으로만 인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심은 나와 같은 육체로 계시는 경우일 뿐이니 바로 그 육체로 세상에 나타나심을 가리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 때는 우리 각자의 육체도 영광스러운 초자연계 육체로 변환된다. 마지막 아담께서 어느 정도로 내게 임하여 함께 계시는 효험 또는 영향력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내게 달린 것이니, 내가 어느 정도로 주님께 가까이 하느냐, 사랑하느냐, 순종하느냐 여기에 항상 비례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 나의 믿음과 사랑에 좌우되어 나타나시는 것이 마지막 아담의 능력임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고 그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심이, 아담의 육체를 우리 각 사람이 타고나서(물려받아서) 인간의 육체로 존재하고 있는 이치와 똑같은 것으로 이해할 때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차이는 아담의 경우 그 육체이고 마지막 아담의 경우 그 성령이시라는 데에 있다. 곧 우리 각자 앞앞이 개별적인 선물(나의 소유)로서 성령께서 내게 계시니, 마치 나의 영혼(새 피조물로서의 '영혼'이시니 나 자신은 그 '육체'이고 성령께서는 그 '육체'의 '영혼'에 해당되심으로써 새로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으로서 계심과 똑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령"이라 표현될 때에는 대개 일반적으로 사람되신 아들을 가리키는 바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이시고 실체이신 아버지께 대하여 형상이시기 때문. 고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을 이상하게("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시느냐" 하고) 생각할 것이 없으니, 사람이신 아들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 그러나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으로 표현되시는 것이 당연하다. 또 아들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되어 계시므로 아들 단독으로 표현할 필요(각종 이치를 설명할 때)가 있을 때 외에는 이렇게 아버지와 둘이 하나로 계시고 움직이시는 모양새이신 "성령"으로 표현되시는 것이다.  

고로 "아들'이시라 "그리스도"시라고 단독으로 표현할 수가 실상 없는 것이다. 항상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고 움직이시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의 의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아버지의 우편에 함께 앉아 있는 것이나,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된다(계 3: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악령들을 명할 때 저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됨은 필연적이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라 할 때에는 반드시 나 자신과 연관시켜 인식해야 하며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 결부시켜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단독으로는 절대로 알지 않도록ㅡ이것이 올바른 성경 이해의 열쇠다.

또한 믿는 형제와 결부시켜 인식하는 것 역시 필수다. 그 믿는 형제나 나 자신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 부인"을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이니 "자기를 위해 죽거나 살지 않을"(롬 14:7-9/고후 5:15/빌 1:21) 때에 한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 무작정 "내 믿노라" 한다고 믿는 형제가 아닌 것. 과연 주님만을 위해 사느냐 아니면 자기를 위해 사느냐 하는 것은 평소 그 행실에서 대개 드러나는 법이므로 판별하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연약한 자"(롬 15:1)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연약하다"는 뜻은 이상 설명한 믿음의 기본 요건에서 미흡한 점을 가리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착각하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기본에서는 동일하고 차이가 없으나 그 응용면에서 믿음이 있고 없고 강하고 약한 것으로 따지는 것뿐이다.

믿음이 강하든 약하든 간에 자기를 "믿는" 자로 일단 간주하는 이상에는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자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롬 14:7)는 단언이 통하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의 기본이기 때문이니 왜냐면 둘의 하나됨은 반드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하는 데에서만 성립되는 까닭이다. 남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 역시 이 둘이 하나됨의 법칙을 따르므로 자기 몸을 상대의 것(소유물)으로 인정하고 그대로 생활할 때에만 그 한 몸됨이 성립되는 것과 같다. 유사한 짓거리를 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런 유사한 짓은 "음란하다" 하여 성경은 역시 똑같은 단죄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둘이 하나됨, 하나로서의 둘은 영원 불변의 생명의 법칙으로 작동되는 까닭에 비록 당장에는 당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필연적으로 모두를 망치는 요소로 작용하므로 이 3위1체의 원리를 거스르는 그 어떤 형태든 생명에서는 제외된다. 자연법칙의 정밀함과 엄정함을 보라. 바늘 끝 하나도 들어갈 만한 빈 틈이 없이 철두철미하게 운영되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내가 나를 위한다고 자각하는 순간 즉시 돌이켜야 하는 것이지 회개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종국적인 파멸은 필연이다.

자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사실 바로 여기에 안주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관심사는 사실상 있을 수 없는 것. 왜냐면 더 이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요구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 개개인에게 대한 사랑으로 각자와 하나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니 그리고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영원히 계시니 만유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신즉 영이신 하나님을 만일 물질적인 최소 미립자로 분류할 수 있다면 우주 천체의 총 수효보다 많은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분산해 나타나실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동시에 물질에 속한 육체의 사람, 사람과 동시에 하나님이신 특성이 그러하시다. 그런즉 우리 개개인과 더불어 하나를 이루시어 마치 나와만 계시는 것처럼 계시고 함께 사시는 것은 이해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자식은 부모 자랑하기에 바쁘니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다. 그러면 부모의 자식 자랑은 어떠할까. 자식 스스로가 그렇게 부모가 자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우리 개개인을 자랑하실 수 있는지 여부는 순전히 우리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둘이 하나됨에서 나는 항상 주님(주인, 소유주)만을 위하므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오직 일하고 싸우는(일을 방해하는 악령들의 세력을 상대로) 것이므로 반드시 나와 함께 일하고 계시는 주님께 기도하지 않으면(일일이 여쭙고 움직이지 않고는) 안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생활 철칙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다 정도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 거지가 사랑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한정이 없다. "이것만 해도 충분하다"는 그런 제한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는 중에 더 하고 충분한 중에 더 충분해지고 싶어 하여 만족을 모르고 끝을 모르는 것이 사랑이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을 끝까지 찾아 헤매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사랑의 능동성, 적극성, 주인 이식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상대를 위해서 그러하므로 아무리 욕구가 태산 같아도 그것이 절대로 죄가 되지 않는다. 전체를 위하는 공동체 의식에서 그러하므로 악이 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개인 차는 생긴다. 사랑의 온도 차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도 누구는 30배, 누구는 60배, 100배 등의 간격이 생김을 주님께서도 인정하셨다(막 4:8). 다 같이 100%를 지향해도 그런 결과가 된다. 

필자가 알기로는 그와 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매사 매건 주님께 일일이 여쭙고 행동에 옮긴 저명 인사들의 간증록에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중국의 석자직 목사, 65명 북한 교회의 그 79세 "감독"(행 20:28/빌 1:1, 성경의 명칭ㅡ"목사"라고 자신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신학교를 졸업한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Ann Preston, Helen Ewan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누구의 충고나 가르침 없이 그 스스로 정하여 그와 같이 생활했다는 점에서 남녀 모두 공통이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증거다.

이는 정상 상태에서 이상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복귀하는 삶의 양식이다. 비정상으로 있으면서도 정상 상태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 비정상인 줄은 까마득하게 몰랐기 때문. 지금은 모든 것이 이전의 원 상태로 회복하는 단계에 있다(행 3:21). 이미 소개했지만, 일정한 사례비 없이 기도와 믿음만으로 생활한 석자직 목사가 평소 기도하여 여쭙고 모든 결정을 하다가 그 날만은 선교사가 거금을 주며 복음 사업과 생활에 보태 쓰라고 했을 때 감사하다 하고 기도 없이 그냥 챙겨 넣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에 석목사 자신은 몰랐으나 그 때 그가 상대하던 귀신 들린 청년은 단박에 알아채고 애당초 기가 죽어 있던 때와는 반대로 기고만장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좀 전에는 하늘처럼 높아 보이더니 이젠 내 발톱의 때만도 못해졌구나!". 석목사는 즉각 깨닫고 그 돈을 도로 돌려주고는 외딴 곳에 가 회개 기도를 한 후 즉시 돌아와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일화는 몇 번이고 강조해도 좋은 성령의 가르치심이다. 주님께서 근심 중에 석목사를 일시 떠나 계셨기 때문에(사실은 석목사가 주님을 떠난 것) 귀신은 이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매사 어떻게 할 것을 여쭙게 되면 그 기도에 대해 일일이 음성으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 후에 되어지는 일은 주님께서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길을 지도하실 것"을 믿는 터이므로 마음에 짚이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잠 3:6,7). 예의 79세의 북한 교회 "감독"의 경우에는 남한으로의 탈출 여부를 여쭙고 있을 때 마음 속에 강하게 울려오는 것(생각)이 곧 주님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내가 구하지도 않는데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법은 없으니 그렇게 되면 로봇에게나 통하는 기계적인 것이 되는 까닭이다. 내가 매사 매건 기도하는 것은 좌우지간 어떤 방향으로 나가든 오직 주님 뜻대로 행하겠다는 결연한 나의 순종의 결의 표명이므로 이것은 모든 일에 주님 친히 지시하심과 같은 의미가 된다.

주님께 기도로 여쭙지 않으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7) 것이 되어버린다. 나의 주인님께서 일일이 나에게 지시하시는 것이든 종된 내가 일일이 주인님께 "어찌할까요?" 여쭙는 것이든 본질은 같으므로 종인 내가 먼저 말씀 드림이 당연한 도리다.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속일 때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이후에야 성경이 "무리가...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수 9:14)고 준열히 책망하고 있음과 같다. 다윗은 항상 전쟁하러 나갈 때 반드시 하나님께 여쭙고 행동했다. 우리는 개개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자들이므로 다윗이나 여호수아 못지 않게 '공적인 일'에 임해 있는 하나님의 '공직자'들이다.

우리의 사사로운 일은 하나도 없다. 여호수아나 다윗이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할 위치다. 하나님의 일을 번거롭다 하고 마지 못해 하거나 할 때 그것은 '구원 받은' 자의 사랑이 아니고 '구원 받기 위한' "율법 행위"밖에 더 되지 않는 것이니 아무리 예수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고 천만 번을 되뇌어도 구원의 "구"자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므로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 우리는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빌 2:12) 동시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 함은 구원 받은 사랑의 기쁨, 평안이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서 그 원동력이 되는 까닭이다.

이 세상은 사는 데가 아니라 싸우고 일하는 때요 장소인 고로 이 세상에서만 이상과 같이 해야 지혜라는 뜻이 아니다. 천국에서의 영원 세월을 두고서도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인생들이 왜 남녀 짝을 지어 사는가. 둘이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을 왜 지고(至高)의 행복처럼 생각하는가.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과의 이런 둘이 하나됨의 삶이 행복한 삶의 최고 보장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 세상 한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 무궁토록 변함 없는 삶의 양식(樣式)인 것.

자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 부처에게도 이런 말을 바치는 이들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를 증명하신 것.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시니 나 역시 나 자신보다 그 분을 더 의식함이 당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 곧 우리 모든 각자에게 둘이 하나를 이루어 계시니 나 이상으로 내게 불가결한 존재이시다. 참으로 내가 그를 떠나 어디에 가 있으리요. 나를 떠난다고는 말할 수 있더라도(이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그를 떠나서는 나는 한 시도 살 수 없으리라.

지금까지 살아 왔다고들 자부해 왔지만 실상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인한 오늘 이 시점이다. 머리를 떠나서 어찌 몸 홀로 살 수 있다고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으리요.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 존재하는 피조물로서 아기가 그 엄마의 품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새끼가 그 어미의 젖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를 떠나서는 한 시도 살 수 없으니 모든 피조물은 어버이로서의 창조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인간도 알지 못했으나 모든 인간이 그 각자의 생애가 3운법칙에 의해 철저히 관장되어 온 것과 같다. 이제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으나 인간의 생애는 그와 같이 빈 틈 없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면서 맞물려 갔던 것이다. 인간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서 그 생애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야 알든 모르든 철통같이 만인간에게 적응되어 온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 및 영물들에게는 자유를 주신 것뿐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신 것이다. 사랑이 생명의 핵심이요 사랑은 자유 의지 곧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는 선택이 온전히 내 몫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죽음의 멸망 길에 들어설 수도 있는 자유까지 주셨다는 데에 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주심과 동시에 그렇게 조처하셨던 것이다. 능력을 제외하고는 바로 하나님의 자질 자체라 할 수 있다. 그 선택한 대로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다.

인간이든 영물이든 간에 악한 자들이 영원 멸망에 처해짐도 그런 자유 의지의 자유 선택의 일환이다. 그래서 악에 대한 형벌이라 하지만, 실제는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렇게 악(생명의 법칙대로 순응하지 않는 일체의 것)을 선택해도 그 예상하게 되어 있는 결과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오만방자한 판단,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무시와 멸시가 그렇게 몰고 간 때문이다. 실상인즉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존(한 생명체로서 삶을 향락할 수 있는)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데도 홀로 너끈하게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착각해 온 것이다.

악령이나 귀신이나 지금까지도 그런 착각 내지 오판 속에 지내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면 잘만 하면 자기네(사탄의) 계획이 성사되어 현재의 이 세상이 무한정 끌어갈 수도 있다고 계산하는 까닭이다. 비록 천년 왕국이 끝나갈 즈음 해서도 사탄은 이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마지막 전쟁에서 입증되고 있다(계 20:7).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면서 비로소 사탄은 자기의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최종 자인하게 됨과 동시에 마지막 심판을 거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변하면서 완전히 세계는 새 국면으로 전개된다. 자기에 대한 이러한 성경 기록을 사탄이 믿지 않는 이유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철두철미 공명정대 공평공정 원리원칙에 의해서만 되어지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만 하면 자기의 계획도 얼마든지 기회를 틈 타 성공하고 기사회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무저갱의 "아볼루온"(계 9:11), 아폴룐은 어떻게 될까. 처음 범죄한 그 그룹(cherub)으로 알고 있는데 영원한 불 못에 합류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언급이 생략되어 있으니 지금은 우리 역시 함구할 수밖에 없고 그 날에 가서야 모든 실상이 알아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신 사실을 지적했지만, 인간들 중에 소수만이 범죄에 이르렀다면 이 무저갱에서 비록 생명과는 정반대이긴 하나 어느 정도 상황이 완화된 상태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상상해보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한 것이 인간보다는 강하시고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는 지혜로우시다 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으로서 가타부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면 족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모든 원리원칙은 우리의 영역을 초월해 있기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서 올바르지 않으심이 없고 인간으로서 수긍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탄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즉 하나님 임의로 즉 독재하시지 않고 원리원칙을 따라 모든 것을 하심을 아는 고로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수라고 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한탄이요 근심이지 우리 인간의 판단으로는 흠과 하자가 없다고 단정해도 무방한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이 근심하실 일이요 우리는 우리 일에나 관심을 두는 것이 옳다.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는 것이지 분수를 넘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