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1일 토요일

슬프다 오늘날 사이비 교리가 온 누리를 물들였다ㅡ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은 까닭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두가 행복하게 살도록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한 중에 영물(靈物, 천사)들처럼 선과 악을 가려내실 수 있는 것이었다.
더할 수 없는 행복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도 악을 행하는 영물들이 생겨난 것.
그러나 첫 사람 아담부터 이렇게 악을 따르게 되니 또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모든 인생이 생명 아닌 죽음부터 먼저 맛보게 된 인생들. 
아담도 그 생명(영생)의 맛만 보았을 따름이다. 아담의 범죄, 죽음으로 인해
오늘날의 인생 비극이 온 것이니 '죽음' 이상으로 이 세상과 인생이 의미는 없어.
영물들의 타락은 이런 험한 꼴을 처음부터 보지를 않았기 때문이라 친다면
인생은 처음부터 죽음의 맛을 본 셈이니 악한 자가 덜 생길 것이라 보았는데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질 기미는 없으므로 사람 만드셨음을 한탄하신 것.

죽음의 의미는 이 자연계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고통, 고난을 아울러 이르는 것이니, 생명에는 이런 것이 없기 때문. 
갓나 죽기도 하고 10, 20대에 삶을 마치기도 하니 그들이 바로 나일 수 있어.
그들은 복이 없어 일찍 죽은 것이 아니고 나는 복이 있어 장수하는 것도 아니니
 똑같은 인생으로서 내가 그들일 수 있고 그들이 또한 나일 수 있는 것.
모두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지금도 그런 차별을 두실 리 만무.  
다시 말해, 이 세상은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괄적으로 <죽음뿐>이나 혹자는 이럴 수도 또는 저럴 수도 있는 것뿐.
이유는 악인들을 걸러내기(또는 의인들이 진실로 의인인지 시험하기) 위한 것.

세상을 고해(苦海)라 하는 것도 이 세상이 죽음임을 웅변하는 것.
인간의 자초지종은 하나님만 아시는 것으로서 구원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는지 
아니면 있었음에도 스스로 그 기회를 내친 것인지 철저히 인과율에 따라 보응될 것.
참으로 구원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면 "죽었어도"(요 11:25/벧전 3:19) 기회 있어
고로 그 일에 대해선 공평공정의 하나님께 일임하면 될 일, 우리의 관심사가 아님.

오직 문제는 구원의 말씀을 전하되 바로 전하고, 들어도(이해해도) 바르게 들어야.
그 첫째가, 차별하시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이의 불행이 내 불행이라는 의미로서
이 세상이 죽음의 세상이요 인생이 모두 죽은 자라는 이 사실에 눈 떠야.
즉 일찌감치 죽어 없어지는 것이 인생인즉 그 까닭을 알려고 해야 정상인데도
나는 운수가 좋아 또는 복이 많아 그런 재앙을 면한 것이라 생각해 왔으니
이성 없는 짐승과 다름 없이 행동한 것이라 온 천하를 꾀는 이 세상 신(神)의 농락.
고로 정상적 사고방식을 따라 상식대로 판단하여 인생은 "죽음"임을 알아야.

그러므로 이 사실에 눈 뜨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다음은 이러한 죽음의 세상, 죽음의 인생일진대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해야.
그러면 그 방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 방법이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받음이다.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받아 인간이 되고(첫 출생, 처음 창조)ㅡ"육으로 나고"
마지막 아담을 '영(성령)'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영으로 남", 
그리하여 지고(至高)의 행복(만유를 상속받아 그 주인이니) 속의 영생이니, 
원래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명백한 대조가 돼. 
그렇잖고 현재 상태로만 남으면 첫 사람 아담이 단지 자연계 인체(人體)로만 남아
초자연계 존재가 되지(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심으로 아담의 영혼 조성) 못함과 같이 돼.
(죽었음을 알았으니 당연히 살고자 몸부림칠 것 아닌가, 그 방법을 말함이다)

이 "영으로 남"(요 3:6) 혹은 "성령으로 남"은
마지막 아담 친히 성령으로 우리 각자에게 '영혼'처럼 오심으로써 되는 일이기에
"성령을 받으라" 하시며 (아담의 코에다 그렇게 하신 것처럼)숨을 내쉬신 것(요 20:22).
그 다음 단계는ㅡ"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임.
이 세 가지 요소(①②③)가 구비되어야 완벽한 구원의 성취이니 ①은 현실 직시,
②는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 ③은 이상 대목에서 말씀하신 대로 나의 복종으로서
즉 보내심을 받은 대로 충실히 그리스도의 뜻을 행함이니 아들의 뜻은 아버지 뜻,
고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마 7:21) 하신 것.

요약하면, <하나님의 은혜>+<나의 순종(자유 의지에 따른 사랑의)>=구원.
순종하겠다는 약속이 회개, 이 약속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심이 "성령의 선물".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는 은혜의 토대 위에서의 순종이니
아무리 내가 복종하기로 작정하고 열심히 일해도 시종일관 은혜일 뿐
내 노력도, 공로도 아니니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 은혜"(고전 15:10).
"명령 받은 것 다한 후...우리는 무익한 종...할 일 한 것뿐"(마 17:10).
당신 자신을 내게 영원한 선물로 주셔서 자신을 다 바쳐 사랑하시니 그 본을 따라
나도 주님을 사랑한 것뿐ㅡ고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  

이는 "거룩함"으로도 나타나 "죄에게서 해방"+"하나님께 복종"+"거룩함"=영생"(롬 6:22).
즉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
왜냐, 사랑에는 나의 자유 의지가 핵심으로서 항상 작동될 수밖에 없는 까닭.
이 의지(意志, will)가 없으면 사랑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니 생명의 핵심은 사랑이요
사랑은 자유 의지가 그 바탕이기 때문에 자유 의지를 처음부터 주신 것이다.
거룩함은 자기를 위하지 않는(자아중심이 아닌) 자기 부인(사랑의 상대방 중심)이니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성인(聖人, saint)들이라 함은 바로 이 때문.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롬 14:7-9/고후 5:15) 사람,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함",
이것이 "성인"에 대한 정확한 정의(定義)다. 

"참고 선을 행해야" 영생을 주신다 한 것이(롬 2:7-10) 바로 이 의미.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할 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자 아무도 없어
반드시 거기에는 나의 의지가 따름ㅡ사랑의 의지ㅡ사랑하기 때문에 
오직 사랑하는 이의 원대로 해주고 뜻대로 해주고 "기쁘게 해주려는"(고전 7:32)
이런 것 없이 어찌 가히 "사랑"이라 하리요ㅡ상식 차원에서 100% 납득할 수 있는 것.

슬프다, 오늘날 교회는 이 교훈을 완전히 망각해버렸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하나님 은혜 ① + 사랑의 순종 ② = 구원>이거늘 
①만 강조하고 ②는 빼버렸다. "성경에 대해 무지"가 이를 가리킴이다.
②를 빼어버리면 사탄을 비롯 모든 악령들, 귀신들보다 나은 것 아무 것도 없다.
② 없는 ①만 강조할 바에야 이들 악령들 모두 역시 구원돼야 한다.
그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 세상은 다시 이 세상처럼 혼돈만 판칠 것이다.
이런 사이비 교리는 이 세상 신(神) 사탄이 끼워넣어 믿게 만든 것이다. 
"어린 아이"(마 18:3)들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11:25) 이들이 만든 교리에도 불구하고 
거뜬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본성적으로 '사랑'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아중심이 되어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양심의 가책을 완화시키기 위해 만든 사이비 교리가 또 있으니
로마서 7장이 믿음에 들어 온 이후의 바울 사도 자신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7장에 사는 삶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다. 
또 하나 사특한 교리는 이미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 얻는 믿음을 얻었고
그래서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망측한 발상이다. 
그러면 자기를 사랑하도록만 만든 인생 로봇이란 말인가.
이 세상 신의 농간, "궤계"(고후 2:11)가 이 정도다. 생각 있는 이는 깨달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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