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2일 화요일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과 3위1체 원리가 전달하는 유일한 메시지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다. 사람의 심중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믿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결정적 순간에 이르러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외아들임에도 그냥 "바치라" 말씀하실 때 아무 의의 없이 순종하는 그 믿음의 "행동"을 나타내기 전에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확인하게 되었다"(창 22:12)는 말씀을 하시지 않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고보는 그래서 이 사실을 힘 주어 말하기를, "이에 성경에 이른 대로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약 2:23) 한 것이다.

상대가 하나님이시든 사람이든 그 상대의 말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 믿은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믿음 또는 구원 얻는 믿음만은 마치 그렇지 않은 듯이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4:2) 하는 것이 사탄이고 또 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심지어는 그리스도 오시기 전 혹은 믿기 전 율법 아래 있는 상태를 설명한 대목(로마서 7장)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착각하게 만드는 데에서는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순종이다. 사랑으로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상호간 교차해서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상대방의 삶을 사는 것이 자기 부인이요 생명과 사랑의 법칙이요 구원 또는 구속(救贖, 원 상태에로의 회복)이기 때문에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을 순종(복종)이라 하는 것뿐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함은 "내가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존재한다"(눅 22:27) 하심으로써 이미 선포하신 대로 우리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 구현하셨고 확증하신 바다.

한번 이루신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니 영원히 우리를 위하시는("섬기시는") 위치에 계시는 것이다. 그런즉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 경우 구원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순종이 자기를 위하지 않고 이웃을 위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므로 사랑이요 선이요 의로움인 것. 다시 말해 비로소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삼지 않는 그 어떤 선도 소위 순종도 의가 될 수 없는 까닭에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사람은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한 영을 이루면 선을 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바로 그것이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상징된 것이다. 당시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지만 그래서 직접 구원은 실현되지 않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그 본질에서는 똑같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의"의 본보기가 되어 있는 것. 이 사실을 왜곡시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사탄은 끌고 간 것이다. 때문에 바울이 "참고 선을 행해야 영생으로 보답하신다"(롬 2:7-10)고 명백히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로마 교황은 무신론자라도 선만 행하면 천국에서 함께 만날 수 있다는 의미로 발언하였지만 그 역시 세상 사람이라 "구원 얻는 선"의 개념을 알지 못한 소치이다. 양심을 따라 행동함도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고 새로이 창조되어야 제대로 역할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이 아무리 양심적으로 산다고 자부하여도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는 그 범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나와 영원히 하나를 이루어 계시므로 나보다 더 가까우신지라 다시 말해 나 자신은 위하지 않아도 가장 1차적으로 내가 위하는 대상이신지라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 주님 외에 내가 사모할 자 없습니다" 하는 시편의 노래를 무한 감사와 희열로 읊조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는 자만이 아는 노래이니 사랑은 사랑을 아는 자만이 아는 감정인 것. 그런데도 위와 같이 정확하게 정의해놓은 "믿음"을 전혀 다르게 사탄은 해석하게 만들어 "선을 행함"과는 무관한 것으로 오인시켜 많은 사람들을 지금까지 멸망으로 빠뜨려 온 것이다. 지적(知的으로 특정 사실(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만 부정하지 않고 시인하기만 하면 그것이 "믿음'이다, "구원"이다, "영생"이다 하고 자기 세뇌를 하게 만든 것이다.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의 원리가 인류에게 오늘날 이 시점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즉 역점을 두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성경적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니 이 이상으로 여러 소리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 성경에 나타난 모든 명령(계명, 뜻)에 순종하라 함이다. ①여우는 굴이 있고 새는 둥지가 있되 인자(사람)는 머리 둘 곳도 없으니 세상은 사람 사는 데가 아니고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불행히도 둘러 빠져 있는 죽음의 곳이니, 오직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일이 시급하고, ②재 출생, 신 창조를 은혜로 이루었으면 이러한 죽음의 세상의 죽은 자들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함으로써 산 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되, ③그렇게 하면서도 역시 죽은 자들의 세상 일에 기웃거리며 세상을 사랑할 경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 경고 말씀에 절대 복종함도 같은 맥락임은 말하나마나다(눅 9:58-62).


따라서 이상 세 가지를 따라 자기 삶을 영위해 가는 이들은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이고 3위1체 원리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진리, 이 실상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은 부인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만이 유휴하다는 것도 실상 아니니,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단 12:3) 방법이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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