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5일 금요일

인류 최초로 밝혀져 확립되어 있는 가장 행복하게 사는 방법

인체는 머리와 몸 그리고 좌우가 서로 대칭이 되어 있다

그것은 '한 몸'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서로서로 위하는 것입니다. 몸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머리가 있어야 하며 머리 혼자 살지 못하고 몸이 붙어 주어야 그래서 각기 제 기능을 발휘해주어야 하는 이치 그대로입니다. 이럴 경우 몸은 몸대로 자기를 위할 수도 없고 위해서도 안됩니다. 머리가 자기를 위해주기 때문이요, 다시 말해 머리의 지시(명령, 계명)를 따라 자기 이외의 다른 지체가 응해(복종, 순종해)주어 모두 자기를 위해주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머리 역시 스스로를 몸에다 묶어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할 수 없고 또한 위해서도 안됩니다. 남녀 사이의 한 몸이 됨도 이런 둘이 하나됨의 한 몸을 이루어 같은 방법으로 서로를 위하기 때문에 사랑이라 합니다. 그래서 남녀 한 몸이 되면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되고 여자의 육체는 자기와 하나 즉 한 몸이 되어 있는 남자가 그 임자가 됩니다(註1). 만일 이 때 남자가 자기 상대인 여자 외의 다른 여자를 볼 때에는 이 하나됨이 깨어지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몸의 임자(소유권자)를 버리고 배신 행위를 하니 애초에 하나 곧 한 몸이 되자는 약속을 파기한 것입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둘의 관계에서 둘은 반드시 대소, 주종, 인과 관계를 맺습니다(註2). 이는 또한 실체와 형상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결코 대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등하면 절대로 하나 즉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註3). 머리는 자기 분신 즉 몸으로서 몸의 각 지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몸 역시 자기의 근본이 되는 머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 있은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미워할 까닭이 없고 그래서 한 뜻, 하나의 지향성이 됩니다.

이렇게 인과 관계가 되어 있으므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둘이 동시에 생성되어 대등해지면 서로가 머리의 자리를 놓고 다투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하나됨이 불가능합니다(註4). 그래서 이런 대등한 위치에서는 그 어느 쪽도 하나가 될 수 없고 따라서 둘의 하나됨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여럿이기는 하나 그 여럿됨이 행복의 온상이 되지 못하고 불행의 씨앗만 됩니다.

이렇게 머리와 몸(의 각 지체)으로 되어 있으면 다중(多衆)이 되어 그 수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많으면 많을수록 나(그 몸의 지체를 이루고 있는 한 부분)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지 불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와 몸으로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하면 단 둘이만 있어도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져 풍비박산이 됩니다. 절대로 행복한 삶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서로간의 감정이 격화되어 하나는 다른 하나를 파멸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자아중심의 속성입니다(註5). 자아중심의 반대되는 것이 자기 부인(self-denial)입니다(註6).

그런즉 행복한 삶의 비결 즉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명백합니다. 하나 곧 한 몸됨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몸을 위하는 머리의 존재가 필수 요건입니다. 이는 대등 관계에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인과(因果), 대소(大小), 주종(主從) 관계라야 합니다(註7). 어버이가 자식을 낳았으니(인과) 당연히 선후 관계가 분명하여 작은 자는 큰 자(대소)를 따르고(주종) 어버이로서의 위치는 머리가 되어 그 몸에게 마땅히 본이 되어 있습니다. 본이기 때문에 따른다 또는 순종한다는 말이 옳습니다.

그래서 대등 관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몸 체제가 되어 있음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이 "하나됨"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남녀간의 사랑의 노래에도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심오한 것도 아니고 오직 상식 차원에서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한 몸으로서의 각 지체 각 부분을 이루게 되면 모두가 자주 독립성을 지녀 자기 특색이 있고 자기 자랑이 있으니 다시 말해 눈의 역할, 귀의 역할, 팔의 역할 등등 각기 구실이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이 종합, 조화하여 한 몸으로서의 기능을 완수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해 모두 색깔이 다릅니다. 그 영롱 찬란한 빛깔로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룹니다. 더 분명히 말해 나는 그 중의 손톱, 발톱 같은 미미한 꼬리 부분에 해당하더라도 모든 지체가 머리처럼 나를 칙사 대접하니 머리가 따로 없고 꼬리가 따로 없어 진정한 평등입니다.

이런 평등한 삶인데 누가 마다하리요. 그래서 서로가 이 행복한 삶의 비결을 사랑하여 자진해서 남을 섬기는(각기 지체로서 다른 지체를 위하는) 일을 하니 내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자유인인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 평등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함보다 백배, 천배, 만배(이웃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로 위해집니다. 다시 말해 나는 파란 색인데 이웃의 빨강, 노랑, 초록의 색깔이 탐스럽다는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닌 혼자일 경우라면 내가 가진 것이 아니므로 소유주가 달라 내가 향유할 수 없으므로 그 나와 다른 것을 탐내고 그 상대를 시기하게 되고 급기야는 뺏고자 덤비기까지 합니다. 도둑질, 살인 등 욕심이 발동하여 공동 파멸이 됩니다. 그러나 한 몸이 되어 있으면 그 색다른 빛깔의 내 이웃들이 모두 나에게 그 특징을 갖다 바치게(獻上) 됩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이렇게 그 모든 다른 것을 맛볼 수 있고 누릴 수 있으니 영원히 향유하는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한 몸의 특징이므로 모두 그 혜택이 골고루 누려집니다. 평등이고 평균됨입니다. 또 이 한 몸 관계에서는 손톱 하나라도 알리면 모든 몸이 아픕니다. 이빨 하나가 쑤셔도 온 몸이 고통입니다. 반대로 하나가 잘 되면 그 잘됨과 영광스러움이  그 하나 즉 그 한 가지 지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온 몸의 영광이 됩니다. 머리의 영광이 또한 온 몸 전체 모든 지체의 영광이 됩니다. 따라서 비록 천 억의 인구가 있을 때 그 중 하나라도 고통 중에 있으면 그 나머지 천억(그 고통 중의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 하나의 고통에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註8).

바로 이것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한 몸의 체제 속의 머리와 몸으로 구별되어 있으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혼자 잘되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한 몸 구조에서의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배신하는 것이므로 나중에 모두(한 몸을 이룬)가 행복을 누릴 때 단연코 당연히 배제됨이 사필귀정입니다.

이런 한 몸이 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이치도 모르고 단지 그런 한 몸됨의 결과만을 알아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 말 그대로 한낱 이상주의로만 남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또는 공산주의자)는 그림자만 부여 안고 꿈만 꾸는 잠꼬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누구나 머리가 되어서는 안되고 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한 인간만이 되어야 하고 그것도 우리의 최고의 어버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바로 인류의 가장 최초의 첫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인간이 죽지 않는 영생하는 자 곧 초자연계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왜냐면 머리가 될 유자격자는 하나뿐인즉 영존(永存)해야 합니다. 그가 영존할진대 당연히 그에게서 파생되는 자들 즉 모든 인류가 초자연계 육체로서 영원성을 누려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니 즉 첫 사람 아담의 자리를 대신 채우시기 위함입니다.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삼고 있는 성경의 전체 내용입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인간 삶을 논하는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밝힌 것입니다. 불교는 이에 대해 무지하여 창조신마저 부정합니다. 무신론자로서 자연과학자들도 같은 행보요 자세입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불교만 아니라 그 어떤 종교도 심지어 성경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까지도 이런 사람 사는 방법을 성경대로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은 알았으나 실제 삶 자체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음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삶을 사랑하고 계명 지키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맹목적인 믿음 하나로 바람 잡듯이 해온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부인"과 "매일 십자가 짐"을 외면해 왔습니다. 세상 사랑은, 이웃이야 어찌 되었든 나만 편하고 잘되면 그만이라는 욕심입니다. 성경을 안다고 해도 성경을 몰랐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한 2,3백년간은 알았으나 급속도로 타락해 갔던 때문입니다. 역시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정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보다도 단지 탐욕스럽게 영생하는 발판으로서만 인식한 결과입니다.

유신론자로서도 이상처럼 정확히 사람 삶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밝혀진 진실이요 진리입니다. 단지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것에만 단세포적인 생각으로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상 가는 합리적인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진리가 대낮같이 밝혀졌으니 각자 자유의지를 따라 자기 운명을 정할 것입니다. 한 몸의 체제 속으로 들어오느냐 아니면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영원히 제외될 것이냐 오직 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부터는 이와 같이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이런 의미로서의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뜬 구름 잡듯이 안개 움켜쥐듯이 애매 모호하게 전달할 일이 아닙니다. 첨단 과학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이와 같이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되어 있는 인생 구제의 방법을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자연법칙의 총본산이 성경입니다. 모르면 알려고 노력은 하지 않고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잡힌 인생들이 어리석은 착각으로 이리저리 말 장난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영원히 요지부동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이를 모방할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밝히셨으므로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자는 아무리 초대형 기적으로 법석을 떨어도 모방일 뿐 다시 말해 속임수일 뿐 이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깃발을 들고 세계 끝까지 나아가 "마지막 아담"(註9) 의 나라를 전파하는 그 증인(證人)(註10)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만 한 몸 체제를 이룸은 각자가 예외없이 그 안에 영혼 격으로서 그리고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로 치면 한 혈관으로 통하고 한 신경 계통으로 조화 일치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 고로 모든 사람이 나를 대하기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하는 것이니 실상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註1-성경 고린도전서 7장 3,4절
註2-3위1체의 원리
註3-3위1체의 원리
註4-3위1체의 원리
註5-성경 창세기의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 사건
註6-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註7-3위1체의 원리
註8-성경 고린도전서 12장 26절
註9-성경 고린도전서 15장 45절
註10-성경 사도행전 1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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