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7일 일요일

"6일" 창조 이전과 이후



"6일 창조"에서 하나님(아들께서 형상이시고 아버지께서 그 실체) 주변에서 심부름을 한 존재들이 "스랍"과 "그룹"들이다. 욥기에 "새벽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들이다. 구약성경에 언급된 계명성(새벽별) 즉 루시퍼는 그들 그룹 중 하나다. 그룹과 스랍이 그 수가 얼마가 되는지는 현재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의 천사들과 악령들은 첫 사람 아담 이후 창조된 영물(靈物)들이다.

루시퍼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방자한 행동을 했다. 이들 6일 창조 전 영물들은 현재의 영물들처럼 수가 많지 않아 이 루시퍼를 따른 타 영물들은 없었다. 인하여 당시의 세계는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며(베드로가 말한 "물의 넘침"은 노아 홍수를 말함이 아닌 것) 그리하여 창세기의 "6일 " 창조 이전의 "물"과 "혼돈"과 "암흑"의 직접 원인이 된 것이다. 그 결과 루시퍼는 무저갱에 들어간 것이며 계시록에서는 그를 가리켜 "아폴룐"이라 하고 있다.

이 이상으로 이 존재에 대해 현재로서는(영원 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알게 되지만) 알 길은 없다. "6일" 창조 이전에 피조물 세계가 현재의 우리 세계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면 역시 오늘날의 "6일" 창조와 같은 양식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랍과 스랍 등 영물과 대칭을 이루는 자연계의 거대 동물들이 있었으리라 유추해봄은 그리 지나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생략해 버리고 있다.

성경이 만일 하나님의 감동 감화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으로 지어낸 것이라면 반드시 그 이전 세계에 관해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했을 것이요 아니라면 그 넘쳐 나는 물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뭍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내력을 말했을 것이다. 거짓말로 지어내는 판에 무슨 소리인들 못하랴. 그러나 단 한 마디도 그에 대해서는 침묵만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자체 증명이 되는 증거는 성경 곳곳에 즐비하게 스며 있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하등 생물이 차츰 진화하여 된 인간이라면 그 진화의 전단계가 되는 원숭이들이 사라져 없어야 하는데 그리고 지금도 원숭이가 사람되는 현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런 대목은 쑥 빼 버리고 덮어놓고 사람이 진화되었다 하니 정신이 나간 사람 외에는 누가 그런 것을 믿겠는가. 학식과 상식은 다르다. 학식 있다고 상식이 건전한 것은 아니다. 원숭이든 침팬지든 고릴라든 그대로 자기네 종을 보전하여 생존하고 있고 그 원숭이의 직전 단계의 다른 동물들도 그대로 있다.

그래서 진화론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 나온 소설이라 하는 것이다. 이 자연계라는 우물 속에만 갇혀 지낸 결과로서의 개구리의 울음소리일 뿐이다. 자연계에만 갇혀 지내온 것은 진화론자들만 아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유신론자, 신학자, 일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니 에덴낙원을 자연계 동산처럼 여기고 인간의 원래의 초자연계적 초능력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이제까지 지내 온 것이 그 증거다. 상식과 학식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 역시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는 관련이 없다. 이성적인 자유로운 사고(思考)를 못하고 강제로 조종당하고 제압됨으로써 마비되어 있는 결과다.

필자가 이런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도 그 유일한 근거가 현재 고난 받는 형제들의 피 값으로 일구어낸 제물 겸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의 덕이다. 여기서 재삼 강조하지만 우리 살아남은 이들도 세상에서 그 어느 때든 순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귀한 영혼들의 고난과 기도가 아니라면 우리 역시 아직도 에덴낙원이 자연계의 어느 동산쯤으로만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애초에는 초자연계에 속한 존재였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니, 고질적이라 할 수 있는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누리는 일에 유력한 힘의 원천의 하나가 될 수 있음이다. 

이 세상은 사람 살리는 곳이요 이 인생 구원의 하나님 사업에는 희생양의 고난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바울(다시 사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친히(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한 몸이 되심으로 함께 고난 받으심이니 즉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받으시는 고난이다. 그래서 지금은 새 창조를 이루시는 과정에서 모든 피조물이(롬 8:22) 함께 해산의 고통 중에 신음하는 때이다.

여기서 오늘날의 소위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소위 "방언"을 하고 "귀신 쫓음" 등의 현상에 대한 지적으로서,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은 해산의 고통이 없다는 것으로써 그 사이비성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이런 것에 물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성경이 언제나 강조하는 핵심 사안은 변화된 삶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재출생, 신창조에 의해 아들된 자들의 유일한 본분이기 때문이다. 하므로 처음부터 "회개하라"는 것이 첫번째로 내리시는 명령이시다.

귀신을 쫓아내는(예수님을 비롯 초대교회 사도들이 한 대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막간(幕間) 무대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며 더군다나 그 일로 소위 "헌금"을 거둘 때에는 백프로 사기극이다. 사기라고 해서 초능력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칭하기 때문이다. 속임수인 것이다. 능력으로는 악령들도 천사와 똑같은 수준이고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니, 지금은 그들의 무대이다. "방언"도 당시대에 구사되는 인간의 언어다.

때문에 초대 교회 벽두 성령께서 임하실 때 "방언"을 하게 되자 외국 각지에 거류하다가 온 유대인들이 자기네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방언"을 할 때에 악령들도 사이비 방언을 하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 여부를 알기 위해 영을 시험해보라고 요한이 말했듯이 당시도 의당히 악령들의 방해 공작이 기승을 부렸지만 "방언"이나 기타 "은사"로써 이를 모방하는 일은 없었다. 성경에 맞지 않는 인간의 주장이나 견해가 당시 교회를 쉽게 물들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상은 소위 "참 것"과 "가짜의 것"으로 나누어 "방언"을 하는 당사자들도 생각할 지경으로 난무하고 있다. 이런 판국인데 "성령의 은사"의 역사가 방언으로 나타나실 리 없다. 한국 교회의 1907년 부흥 당시나 미국의 1850대 부흥에서도 "방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날 나타나게 하실 이유가 없다. 소위 "방언", "신유(神癒)", "귀신 쫓음" 등 초능력의 현상만 나타내기에 치중되어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바울이 그 서신에서 지적한 "성령의 은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있다. 이런 것에 괘념할 일이 아니다.

귀신 축출도 귀신이든 악령이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함이지 다른 의미가 없다. 명령하면 순순히 명령에 따르는 것이지 youtube에 나오는 대로 무슨 쇼를 벌이듯이 하는 것은 기괴함만 더할 뿐이다. 그런 것은 귀신을 쫓는 것이라기보다 저들끼리 짜고 치기의 연출일 뿐이다. 경건미(美)도 성결미도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런 것에 미혹되지 말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즉각 순응만이 있을 뿐이니 버둥대고 말고 할 여지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빙자하고 사칭하는 오늘날 시대다. 이제까지는 별로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그동안 막는 자가 있어 막았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은 그 막은 것이 풀려나 있는 때다. 야단스러운 것을 좇아 다닐 것이 아니라 생활의 혁명으로 변화된 삶의 능력으로 드러나는 제사장의 중보 기도와 말씀 전파와 함께 병행하여 성령의 은사는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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