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5일 화요일

"율법 행위로 얻는 구원"은 그리스도 없이 구원되려는 시도를 말하고



구원된 다음에는
"율법 행위"="계명에 대한 순종"이란 등식이 성립됩니다. 
물론 여기서 당연히 "모세" 율법은 제외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상대적으로 설명할 때만 제외하고는
이 모세 율법을 말하지 않고 "계명에 대한 순종"을 의미함이니
착오가 없어야 합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지키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뜻 곧 생명의 법칙으로서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을 말하고 공동체 의식을 말합니다.
함께 고난 받는다는 의미로 "매일 십자가 짐"을 의미합니다.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머리에는 지식이 꽉 차 있습니다ㅡ항상 들어왔기 때문.
그러나 그 지식대로 사랑의 움직임이 없습니다.
죽은 지식입니다. 그 지식으로는 구원이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행군은 교회 노정을 상징한 것.
많은 사람이 구원의 출발을 잘 했으나
그 중의 다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고
이들은 예외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멸망했듯이 오늘날도 반드시 그러할 것임을
이 역사는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나는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행동으로 옯기지 않는 한 분연히 일어서서 주님 사업에
뛰어들지 않는 한 진리를 외치지 않는 한
영원세계의 멸망 아니면 생명의 희락을 스스로 정하는
이 결단의 시간에 미적거리고 있는 한
그리고 이 위험과 은혜의 기회를 선포하지 않는 한
나 자신 아무 희망도 없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내일이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만이 이 시간만이 존재합니다.  






"내가 전에 네게 은혜를 베푸리라 했으나 이제는 그렇게 않을 것이다"ㅡ엘리 제사장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 이루라"ㅡ"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같은 의미







사람들은 종교 생활을 선호한다ㅡ허나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



판에 박힌 의식적인 종교 행위ㅡ사랑과는 당연히 무관하다. 사랑은 삶 곧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기 때문. 구원의 복음(희소식)을 이런 종교로 바꿔치기하는 일에 사탄은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손댄 것은 아니다. 말씀은 그대로 존속하지만 사탄이 그 가짜를 만들어놓고 속여 왔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절에 바울은 "살아 있는 제물"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 합리적인 상식에 맞는 이치에 합당한 예배라 강조한 것인데도 오늘날까지 전반적으로 이 경고를 무시해 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ㅡ머리이신 주님과 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물은 제물이나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제물. 원천적인 의미로도 그렇고 실제 상황이 또한 그렇다. 날마다 십자가 지고 가는 우리 각자의 행보가 그러하며 또한 악한 자가 지배하는 세상인지라 악인이 의인에게 가증스러움이 되는 것처럼 의인은 악인들에게 똑같은 가증스러움이 된다고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인들은 이 세상 신 및 수하 악령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사주하는 세상 사람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므로 끊임없는 핍박과 탄압의 대상이 되어 왔고 주님 오실 때까지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악재를 하나님께서는 막중한 가치의 호재로 전환/변환시켜 주셨으니 곧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그 남으신 고난에 그 몸으로서 함께 나누는 영광이요 은혜다(빌 1:29).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께서 혐오하시고 배척하신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랑 없이 형식에만 치우쳐 나타내는 외식적인 것을 가증하게 보신다고 구약에도 강조되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형식을 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일절 관계 없이 사랑의 순종이 주관하는 일상 삶을 중요시하시므로 당연히 이에서 벗어날 때 우리의 모든 예배가 말 그대로 무용지물일 수밖에. 이상 강조한 대로 견해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오직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이 본질에서만 벗어나지 않도록 경계한 것이니(롬 14:7-9) 이는 항구적으로 유효한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외면하고 사랑 없이 자아중심으로써 형식에 치중할수록 자기 형식에 맞추지 않는 일체를 부정하고 독선적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나아왔고 교파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이제는 여기서 탈피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회개 않고 고집할 때 탈락될 것이다. 탈락하는 자는 예외없이 적그리스도를 추종하게 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다름아닌 영광의 몸으로 회복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단지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기 때문에 주로 "성령"으로 일컬어지시는 것이니 알지도 못하는 또는 정체를 모르는 인물을 사랑함이 불가능하듯이 지금까지 교회 중에 활동하시는 성령께서 바로 주님이심(아버지께서 동일하게 함께 하신)을 알 때 우리의 인식의 변화는 사람에 따라 정도가 있겠지만 엄청난 것이다. "성령"께서 어떤 위치에 계시는지 너무 막연하여 단지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등의 피상적인 인식으로 대해 왔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너무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물이 완연하니 자업자득임을 어이하랴. 이제는 3위1체의 법칙대로 하나님의 모습을 완연히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대칭(對稱) 아담ㅡ"마지막 아담(the Last Adam)"께 대한 사랑의 노래→찬미/찬송



아래 분들리히가 부른 오페라 아리아를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사람이시라 해서 좀 색다르게 인식해 왔다면
이제는 완전 불식할 일이니 사람이시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시되
그 이상으로 흠모할 사람이 이 지상에는 없는 유일한 사람이시다(시 73:25).
오직 그 하나님 되심은 성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일시에 똑같이
마치 나 한 사람에게만 와 계시는 것처럼 계심에 있는 것.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만이시라면 그 육체로 내 안에 들어와
내 영혼처럼 존재할 수가 없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내 영혼처럼 1년365일 24시간
나와 함께 계시며 함께 사실 수 있다는 점ㅡ이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으로서의 특징만 예외이시지
모든 면에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시다. 
사람이시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듯이
(지금은 우리 인간이 남녀 성별로 되어 있어 이성간의 사랑
그러나 아무리 이성간의 사랑이지만 먼저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이요
성적 관계는 그 다음에 오는 것이라야 참 사랑인 것처럼)
그와 같이 주님과의 개인간의 사랑인 것.
(육체적인 이성간의 사랑도 3위1체의 법칙 따른 원리는 같으니
즉 아담 홀로 있다가 아담에게서 닮은꼴이 파생됨으로써
아담은 남자가 되고 상대는 여자가 되었기 때문에
둘로 현존하지만 원래의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한 본성이
남녀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우리가 육으로 난 것이라고 주님께서 밝혀 주신 대로
주님께서는 그것과 대칭이신 "영(성령)으로 나게" 하시는 주체이신즉
즉 아담에게서 여자가 난 것처럼 대칭아담에게서 교회가 남이니
때문에 요한 계시록은 교회를 어린양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는 것)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적인 사랑의 노래(저작권이 없는)를
주님께 대한 나의 개인적인 사랑의 노래로 번안해서 불러도
아무 관계가 없고 지장도 있을 수 없다ㅡ사랑의 감정은 동일한 것이니까.
그러나 절대로 오늘날까지 필요없이 유행되고 있는 소위 예수님 그림은
일절 여기에 관여시키지 말 것이다. 전연 엉뚱한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은 죄인 다시 말해 "죽은 자"로서의 인간 즉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모습이니 이것이 절대로 정상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정상적인 모습은 범죄하기 전 아담의 모습 즉 초자연계에 속한 영광의 모습인 것. 
부활하여 아담이 마치 살아서 그 죄를 다 벗은 다음
원래의 영광의 모습으로 복구된 바로 모습이 주님의 부활의 모습이신 것. 
바울 사도가 회개할 때 뵌 그런 모습이시나
자연계 육체는 그런 영광의 모습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그 영광의 빛에 당장 눈이 멀었을 뿐 형상은 구경도 할 수 없었음을 상기할 일이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우신 가장 사랑스러우신 그리고 가장 남성미를 두두 갖추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최대의 미려한 모습이신 것이다.
우리가 초자연계 육체로 변환되면 그런 모습일 것이나
그러나 그런 우리의 모든 모습보다 더 출중하신 모습이실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나실 때
모든 믿는 이들이 "기이하게(wonder)" 여기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미리 지적하고 있다.

고로 이런 사랑의 노래를 일반인도 부르기 쉽도록 편곡해서
아름다운 찬송곡으로 지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까지는 무조건 예배 형식의 하나로tj만 찬송을 인식해서
어찌 보면 단조로운 곡 일색이었는데 세상 사람들도 익히 아는 사랑 노래에
주님께 대한 아름다운 내용을 가미시켜 부르게 된다면
복음 전도의 차원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으리라 판단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Vb12RXmM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