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31일 목요일

창조자가 어디 있느냐ㅡ볼 수 없으니 없는 것이 아니냐


필자가 3위1체 원리를 강론할 때에는 과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과학은 분명히 지적해 두거니와 "자연과학"이다. 필자는 자연계가 아닌 그와 대칭형을 이루고 있는 초자연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 과학은 당연히 아는 것이 없다. 필자는 처음부터 자연과학자연(然)하지 않았다. 자연 과학자도 아니거니와 자연 과학을 공부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의사도 없다. 자연계와 대립되는 초자연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주워 들은 것을 짜 집기 해서 아는 체한다"고 하는데, 필자가 아는 것, 필자의 분야만을 정확히 지금 말하고 있다. 자연 과학자들도 자기가 아는 것만 말해야 하는 것이지 자기 분야가 아닌 것은 집적거릴 필요가 없다. 그동안 과학자들의 공로와 공적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 자연과학에 의해 실험 관찰한 결과를 공유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결과만은, 그것을 궁구해 낸 자연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두의 것이다.

본인이 강조하는 것은 그런 자연과학의 분야가 아니고, 본인이 알고 있는 척도로써 자연과학의 시시비비를 가려 내는 것뿐이다. 예컨대 아인슈타인과 보어와의 논쟁에서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그 파동성이냐 입자성이냐 하는 것, 양자 역학의 실험에서 "양자 얽힘"을 무슨 유령의 미립자처럼 여기는 그런 미망(초자연계와 자연계의 양립성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까 "미망"일 수밖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진화론의 취지는 인간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3위1체 법칙의 인과율에 비추어 재조명하게 되어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필자는 창조론에 가세하는 데에 흥미도 없다. 그들은 그들나름의 소견대로 진행할 것이다. 오직 필자의 전문 분야(필자의 전문 영역은 초자연계와 관련된 것이다)로서의 관점에서 자연계 현상은 양면 중의 단지 일면에 불과함을 지적하는데, 자연과학자들은 자연법칙뿐이라고 고집하는 데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충돌이다.

필자의 의도는 이 초자연계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요 여기에 주목하라는 데에 있다. 수용하고 않고는 각자 자기 몫이다. 여기에 아무 이해 관계는 없다.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유관성과 밀접성은 보어의 상보성 논리로써 그리고 최근의 "양자 얽힘"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으므로 이를 지적함이다. 

진정으로 학문을 하고 진리 탐구에 열중해 있는 대가들은 이런 소리에도 무슨 근거가 있나 하여 진지한 자체로 경청하는데 반해,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자만해 하는 피래미들은 그런 학구열은 없이 얄팍한 지식에만 항상 도취해 있으므로 함부로 논단하고 비평가로 자처하는데, 이는 분명 꼴불견이다.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않음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시각 차이가 현저하기 때문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중국의 음양이원론을 찾아 닐스 보어가 중국에까지 갔던 것을 보라. 

세계가 자연계와 초자연계로 양립되어 있으니 당연히 그 연구 분야도 양면으로 나누어져 있어야 마땅하나 속성상 자연과학이 초(또는 반)자연계를 구명해 내기에는 한계가 있고 역부족의 운명을 지닌다. 그러나 초자연계가 엄연히 존립한다는 그 자체만의 지식으로도 중요한 것이니, 왜냐면 초자연계의 존재들이 자연계에 국한된 제한된 역량의 인간을 위협하고 있는 실상이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를 역설함도 바로 이에 대한 대처, 대비책에 말함에 있는 것이다.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도 시인하고 있는 소위 "외계인"이다. 이런 박학다식한 천재도 그들의 기만 행위에 속절없이 속아 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경고가 3위1체 원리의 선포이다.

고로 이런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 해결 비법은 학문적 지식으로 접근하는 데에 있지 않고 상식에 의존하라는 것이 시의적절한 충고가 된다. 그런 지식으로 맞선다는 것은 초능력의 존재 앞에서는 한 마디로 불가항력임을 명심할 일이다.


"건전한 판단"이란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 존재를 믿느냐" 하는데, 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경우, 이를 건전한 판단 혹은 논리라 한다.

"우주를 볼 수 있느냐, 없다. 그러면 우주를 만드신 이라면 우주보다 클 것인데, 우주도 보지 못하면서 어찌 그 창조자를 볼 수 있다고 그러느냐. 만약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존재라면 그 크기를 말할 때 이 너른 우주에 비하면 먼지 중의 먼지만도 못할 것인데, 저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어찌 우주를 만들었겠느냐 하고 더 믿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볼 수 있어도 못믿겠다,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못믿겠다 하니 범의 장단에 춤추기도 어렵다. 그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이 외에 나열하게 되는 여러 가지의 이유들은 순수하게 그 개인적인 것으로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낱낱이 열거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의 빈약성이 단번에 드러나게 된다. 말 장난에 불과하거나 사사로운 편견이나 선입관에 좌우됨이 여지 없이 폭로된다. 예를 들면, 창조자가 정의로운 존재라면 왜 세상이 이렇게 부정 불법으로 득실대느냐 하는데, 성경이 그 해답을 명백히 밝히고 있건마는 성경을 굳이 읽으려고 아니하는 데에서  그런 무신론의 어쭙잖은 변명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왜 세상에 이러한 끔찍한 불행이 있느냐 하는 질문도 스스로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천재 과학자로서의 무신론보다 일개 평범한 상인이나 회사원의 유신론이 "상식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절대 다수라고 해서 그 주장이 상식적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극소수라의 견해라고 해서 비상식이라 단정할 수도 없게 된다. 콜럼버스나 갈릴레오나 자기 세대에서 극소수에 속했던 인물인 것이다. 또 유신론자나 종교인(여기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상식적이라고 일괄적으로 분류하지 못한다. 왜냐면 창조신의 존재를 시인하는 데에서만은 상식적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서는 몰상식함을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안 별로 다루어 그 상식과 비상식을 논하여 가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의 주제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ㅡ그 메시지가 여기 있다


유튜브로 올려진  

https://www.youtube.com/watch?v=p9wFQHRu2NI




https://www.youtube.com/watch?v=QXGFVgLLzPk
영어로 통역



https://www.youtube.com/watch?v=b-uYTntKEp8
이순옥 집사
 



https://www.youtube.com/watch?v=vfOvC0jOfRk
중국 교회 수난사


https://www.youtube.com/watch?v=vsgAsyL1RIM
이순옥 집사
 




하나님이 계시다면 당신께서 보우하신다는 교회가 그토록 고난 받도록 버려 두시는가,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판단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식은 우리의 선입관이요 편견일 뿐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름이다. 왜냐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처음부터 미리 밝혀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돌려 달리 생각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한 점 의혹이 있을 수 없는 진실 그대로의 기록이고 진리라는 증거가 됨을 확언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성경이 진실이냐 거짓이냐 다른 것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이 사실 하나만 놓고 보아도 충분히 그 답이 된다. 

상식은 당시대의 보편화된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횡단하기 전에 사람들은 지구 저편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 때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었다. 이것은 상식이 아니라 무식이다. 상식은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것으로서 '건전한 판단'을 말한다. 때문에 "몰상식"이라는 말이 통하는 것. 고로 상식은 진리와도 통한다. 무지 무식과 마땅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난 받는 이들, 그렇게 극한 상황 속에서 고난을 받아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이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아니고는 이와 같이 되기가 불가능한 것임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것이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됨"이다. 이렇게 되지 않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확언해주셨으니 우리 각자 이 말씀 앞에 옷깃을 여밀 일이다. 고로 말의 요지가 무엇이냐 하면 처음 믿을 때 충분히 생각하고 야곱처럼 심사숙고한 한 다음에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자기 부인해야 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 짐을 각오해야 한다는 "망대 세우기 전 예산 세우기", "전쟁하러 나서기 전 손익 따지기"를 충분히 한 다음에 결단하라는 것이요 그리고 한번 결단한 다음에는 좌고우면할 것 없이 그대로 멧돼지처럼 저돌성을 보이며 매진하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지혜다. 

고로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방금 말한 대로 손익 계산을 잘 하라는 것이다. 차일피일이 아닌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토한 다음에 믿는지 여부를 결단하라는 것이다. 그 충분한 시간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주시는 바다. 여기에는 속전속결이 해당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차일피일 결단을 유예하는 어리석음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 극한 상황을 각오하고 대비함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아닌 것이다. 사탄은 한번 결정한 것을 번복시키게 하는 일에
능수다. 양약이 입에 쓰다는 말대로 하나님은 신념, 신조, 절조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역경이 수반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자유 속에서 마음대로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볼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부지 생각이 된다. 왜냐면 그렇다면 북한에 있는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으랴. 하나님께서 그들과 우리를 차별하신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달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니, 이 사실을 통해 지금까지 모르고 지내 온 것을 이제는 크게 깨달아 세상을 사랑하던 것, 축복 받아 잘 산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고 지금부터는 이 세상 사랑하던 "죄악"을 뉘우치고 일심으로 기도생활하며 전도 생활하고 자기 부인과 매일 십자가 지는 생활을 하리라고 마땅히 새로 결심하고 새로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 받는 형제들의 이 현실은 우리를 크게 각성시키고 책망하는 것이다. 아니, 그들과 함께 고난 받으신 주님 친히 그들을 통해 우리를 준렬히 꾸짖으심이니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은 결국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때의 이러한 교회 실정을 설명하여 계시록에 "이 여자(교회)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니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계 12:2) 했으니 바로 이 사실을 말함이다. 북한의 현실이 이 해산의 고통 중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우리는 이에 창여하지 않았음을 크게 깨달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지금부터는 동참해야 하는 각오를 따질 때이다. 

이러한데 어디서 "하나님의 측복 받아 잘 먹고 잘 살고 호강을 누린다"는 말이 나오는가. 이런 망상 속에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 편에 있지 않고 마귀의 사주를 당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오히려 빈사 상태에 있는 것은 소위 자유 세계에 있다는 모든 "교회"이다. 그래서 고난 받는 교회는 우리의 갱생을 위해 그토록 해산의 신음 중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생명으로 펄펄 살아 있고 우리는 영원 멸망에 처해질 위기에 처해 있음이다. 그리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담한 현실은 저쪽이 아닌 이쪽이다. 그들은 한 때뿐인 고통을 받는 반면 우리는 영원한 고통을 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능력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손으로 베껴 쓴 성경이라도 애독하는데 반해




우리는 이런 성경도 읽지 않고 방치하는 데에 있다



2016년 3월 30일 수요일

단순한 지식이 아닌 최후통첩식 경고가 3위1체 원리의 성격



3위1체의 원리가 무신론, 진화론, 교회 내의 팽배해 있는 사도 바울의 지적대로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들을 척결하여 청소해내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성경의 모든 진리를 자연계와 그 대칭형인 초자연계를 아우르는 법칙과 원리 측면에서 강력히 뒷받침함으로써 다시 면모를 새롭게 하여 우리의 구원이신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여 그 최첨단 지식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그에 필적하게 또는 당연히 수반되는 형태로서 그 초자연적인 측면 곧 자연계와 유일하게 상대가 되는 초(또는 반)자연계의 실재를 밝힘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한 성경의 진리임을 다시 말해 그 정확무오함을 재선포함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은 적 그리스도의 때가 아니어서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의 "마지막 때 지식이 더하는 때"가 아니어서 교통 통신 분야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적 그리스도의 세대가 박두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각종 지식이 넘쳐 나게 되자 거기 보조를 맞추어 최최(最最)첨단 지식이라 할 수 있는 이 3위1체의 원리와 이를 검증하는 3운법칙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현대의 자연 과학계의 첨단 논의라 할 수 있는 빛의 성질에서의 입자성과 파동성, 그리고 양자 역학에서의 "양자 얽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그것보다 더 앞서 나아가는 초자연계에 관한 또는 관련된 확증적인 증거로서의 3위1체 원리입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과 보어와의 해묵은 논쟁에서 그 실상을 밝히는 것이며 "양자 얽힘"의 신비스러운 현상이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과학적(이는 초자연적 면에서의) 사실임을 드러내어줌으로써 성경의 진실성을 확고하게 뒷받침해 줌이니, 이제까지 외면당해 온 핵심적인 성경의 진리가 다시 초대교회와 같은 수준으로 전파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부인이요 매일 자기 십자가 짐의 진실입니다. 이렇게 성경 진리의 요체가 소위 "로마서 7장의 바울 자신(사도가 된 다음)의 체험"이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왜곡된 성경 해석에 의해 크게 그릇되게 인식되어 온 것을 혁파함에 있는 것이니, 초대 교회 당시 전파된 애당초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다시 오늘날 드러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동안 잘못 배웠고 잘못 알아 왔고 잘못 가르쳐 온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여도 어린 아이 같이 되어 구원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순종에 이른 경우 구 누구든 구원 얻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습니다. 비록 교리적으로는 잘못 가르쳐 왔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모든 뜻에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는 한 그런 경우 구원은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구원의 진리가 간단 명료하다는 뜻입니다.

오직 자아중심을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만 걸림돌로 작용한 저간의 성경 해석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민에게 "증거되기 위해" 복음이 전파되는 때로서 이제까지 잘못 이해되어 온 복음의 실상, 실체가 초대 교회 당시와 같이 그 모든 영광으로 충분히 빛이 발해져야 하는 필연성에서 더 이상 그런 미망(迷妄) 속에 싸여 있을 일은 아니기에 마지막 때 이와 같이 새롭게 조명(照明)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3운법칙 곧 인간 생애의 법칙으로 검증되고 있는 3위1체의 원리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당시와 똑같이(행 17:30 회개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잘못된 성경 해석에서 빚어진 모든 오류 따라서 그 모든 자아중심의 늪에서 벗어나 성경의 변함없는 진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에 있는 것이니 즉 그 핵심이 양면성에서의 동시성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작용에 마땅한 우리 자신의 "반작용"인 것입니다. 비가 내리면 마땅히 싹이 나야 합니다. 그런 작용에 대한 반응이 없으면 비는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고 무용지물, 무의미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 역시 사랑으로 보응 또는 보답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게 되어 있습니다(요 14:21). 즉 싹이 나게 하는 비는 무용지물이 되지 않고 생명에 필수 요건으로 다시 작용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사탄이 퍼뜨린 치명적인 위해 요소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또는 사랑으로만 한정해서 인간 구원을 해석한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과 같은 왜곡된 전혀 진실이 아닌 도리어 멸망에 이르게 하는 사탄의 교리만이 판을 쳐 왔습니다. 사탄은 성경이 그렇게도 강조하고 있는 "선을 행하라"는 경고를 마치 복음이 아닌 것같이 가르쳐 온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한다"는 바울의 설명을 아주 엉뚱하게 해석하게 만들어 자기 입맛대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을 길들여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모든 거짓이 3위1체의 초과학적 진리, 원리로 규명되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중심을 회개치 않는 경우 고스란히 적 그리스도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욉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살후 2:11,12) 했습니다. "불의를 좋아함" 즉 자아중심을 회개하지 않는 일체의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3위1체의 법칙은 신불신(信不信)간에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지렛대가 되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의 구원에 이르는 디딤돌이 될 것이요 그럼에도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성경에 강조함과 같은 걸림돌로 작용하여 심판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마지막 때 이와 같이 다시 복음이 천명되었어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충분히 그 악함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3위1체의 법칙은 만유를 주재하는 모든 원리의 최고 기간(基幹)이라 하여 단순히 지식의 하나로 작용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만 그친다면 그런 지식이야 수 백만 가지가 있다 한들 무의미하기만 할 것입니다.

모든 지식을 알아도 생명(영생)에 이르지 않는데 천하를 얻어도 자기 생명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세상이 3위1체 원리의 의미와 가치를 몰라도 그 모른 그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를 위하여 필요한 이에게만 해당되는 지식이므로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는 그 날 모든 인생들이 생명과 죽음으로 분류되어 양 갈래로 나누어질 때 그 판결의 잣대로 절대적인 권위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고로 3운법칙으로 검증되고 있는 3위1체의 원리는 지식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심판에 이르는 걸림돌임과 동시 영생에 이르는 디딤돌로 양면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3위1체의 원리를 수용한다고 해서 이 의미는 달라질 리 없습니다. 







사탄을 속히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실 것이다(롬 16:20)


2016년 3월 29일 화요일

전천후(全天候) 희열과 평안ㅡ고난 중에 아이들처럼 기뻐 껑충껑충 뛰라고 하셨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다"(others were tortured, not accepting their deliverance, that they might obtain a better resurrection)-히 11:35. 그러면 더 나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힘써 악형을 자진해서 받을 것인가? 그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닥치는 악형을 굳이 면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왜냐 그 이유를 밝혀 "더 나은 부활"이라 한 것이다. "더 나은 부활"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자아중심이므로 그렇게 해서 아무리 "악형"을 받아도 무의미하므로 일부러 그런 사람은 그런 것을 받지 못하도록 차단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은혜"(빌 1:29)라고 했듯이 그런 은혜를 아무에게나 허락하실 리가 없다. 다만 그런 악형을 당할 때 굳이 면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에 방점을 두게 된다.

"고로 낙심하지 아니하니 겉 사람은 폐멸이나(to decay, perish)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관심사는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는 것이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바...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신음(해산의 수고 때의)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고후 4:16-5:5).

간단히 말해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 초자연계 몸으로 나중에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썩어질 육신으로 되어지는 다시 말해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니 여기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 아닌 까닭이다. 주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명쾌히 선언하신 그대로다. 우리가 받는 고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룬다"-얼마나 고무되는 지적인가.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영광이 중첩되어 쌓인다는 의미로도 해석해서 나쁠 것이 없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는 "기뻐 뛰라(to leap for joy)!" 하셨다. 다 큰 어른 수염이 백발이나 나도 어린 아이처럼 껑충껑충 길길이 뛰라는 말씀이니 그만큼 굉장하고 엄청난 포상이 있음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포상을 바라고 우리가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것이 그와 같이 말도 못하다는 것이므로 충분히 폭발적인 희열을 누릴 수 있게 됨이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을 때나 지금 이 때에나 항상 이 말씀을 아로새겨 원기 백배, 의기 충천하여 넘치는 용기로 매사 하나님의 일에 임할 것이다.

그런즉 놀림과 조롱이 상대가 될 뿐 아니라 채찍질 등 신체적인 해를 입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좋다, 돌에 맞아 피 흘림도 좋다, 톱으로 켜는 고통을 당해도 좋다, 얼마든지 오라, 실컷 오라는 것이다. 다 소화해낼 터이니까. 칼에 죽는 것은 물론이고 바깥 추운 데로 쫓겨나니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산중으로 암혈(바위 굴)과 토굴(흙의 움막집)에 유리 방황하는 판이 나도 다 좋다.

온갖 종류의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아도 좋다. 너털웃음을 웃어주리라. 삥그레 하여 주리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히 11:36-38). 진정 하하헤헤히히호호후후다. 요사한 웃음이 아니라 전천후 웃음이다. 세상 재미로서의 웃음이 아니라 원시(遠視)하고 투시(透視)함에서 오는 넘치는 희열과 평안함과 자신감이다.


노래(찬송)가 아니 터져 나올 수가 없다. 이런 것을 믿지 않으면 그럼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믿음은 가려서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를 믿으면 다 믿게 되어 있고 그 중 하나를 믿지 못하면 전체를 모조리 믿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리스도께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명심할 일이다. 

오늘날의 소위 "신유, 방언, 귀신 쫓음의 은사는 사이비(似而非)ㅡ요주의



"6일 창조"에서 하나님(아들께서 형상이시고 아버지께서 그 실체) 주변에서 심부름을 한 존재들이 "스랍"과 "그룹"들이다. 욥기에 "새벽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들이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6일 창조")를 끝내시자 "하나님의 아들들이 환호했다"는 구절이다. 구약성경에 언급된 계명성(새벽별) 즉 루시퍼는 그들 그룹 중 하나다. 그룹과 스랍이 그 수가 얼마가 되는지는 현재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의 천사들과 악령들은 첫 사람 아담 이후 창조된 영물(靈物)들이다. 

루시퍼(Lucifer)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방자한 행동을 했다고 구약에서 밝히고 있다. 이들 6일 창조 전 영물들은 현재의 영물("천사"라고 하는)들처럼 수가 많지 않아 이 루시퍼를 따른 타 영물들은 없었다. 인하여 당시의 세계는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며(베드로가 말한 "물의 넘침"은 노아 홍수를 말함이 아닌 것) 그리하여 창세기의 "6일 " 창조 이전의 "물"과 "혼돈"과 "암흑"의 직접 원인이 된 것이다. 그 결과 루시퍼는 무저갱에 들어간 것이며 계시록에서는 그를 가리켜 "아폴룐"이라 하고 있다.

이 이상으로 이 존재에 대해 현재로서는(영원 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알게 되지만) 알 길은 없다. "6일" 창조 이전에 피조물 세계가 현재의 우리 세계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면 역시 오늘날의 "6일" 창조와 같은 양식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랍과 스랍 등 영물과 대칭을 이루는 자연계의 거대 동물들과 식물들이 있었으리라 유추해봄은 그리 지나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생략해 버리고 있다. 이 생략했다는 이 사실이 또한 유의미한 것이다. 

성경이 만일 하나님의 감동 감화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으로 지어낸 것이라면 반드시 그 이전 세계에 관해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했을 것이요 아니라면 그 넘쳐 나는 물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뭍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내력을 말했을 것이다. 거짓말로 지어내는 판에 무슨 소리인들 못하랴. 그러나 단 한 마디도 그에 대해서는 침묵만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자체 증명이 되는 증거는 성경 곳곳에 즐비하게 스며 있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하등 생물이 차츰 진화하여 된 인간이라면 그 진화의 전단계가 되는 원숭이들이 사라져 없어야 하는데 그리고 지금도 원숭이가 사람되는 현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런 대목은 쑥 빼 버리고 덮어놓고 사람이 진화되었다 하니 정신이 나간 사람 외에는 누가 그런 것을 믿겠는가. 학식과 상식은 다르다. 학식 있다고 상식이 건전한 것은 아니다. 원숭이든 침팬지든 고릴라든 그대로 자기네 종을 보전하여 생존하고 있고 그 원숭이의 직전 단계의 다른 동물들도 그대로 있다.

그래서 진화론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 나온 소설이라 하는 것이다. 이 자연계라는 우물 속에만 갇혀 지낸 결과로서의 개구리의 울음소리일 뿐이다. 자연계에만 갇혀 지내온 것은 진화론자들만 아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유신론자, 신학자, 일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니 에덴낙원을 자연계 동산처럼 여기고 인간의 원래의 초자연계적 초능력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이제까지 지내 온 것이 그 증거다. 상식과 학식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 역시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는 관련이 없다. 이성적인 자유로운 사고(思考)를 못하고 강제로 조종당하고 제압됨으로써 마비되어 있는 결과다.

필자가 이런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도 그 유일한 근거가 현재 고난 받는 형제들의 피 값으로 일구어낸 제물 겸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의 덕이다. 여기서 재삼 강조하지만 우리 살아남은 이들도 세상에서 그 어느 때든 순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귀한 영혼들의 고난과 기도가 아니라면 우리 역시 아직도 에덴낙원이 자연계의 어느 동산쯤으로만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애초에는 초자연계에 속한 존재였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니, 고질적이라 할 수 있는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누리는 일에 유력한 힘의 원천의 하나가 될 수 있음이다. 

이 세상은 사람 살리는 곳이요 이 인생 구원의 하나님 사업에는 희생양의 고난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바울(다시 사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친히(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한 몸이 되심으로 함께 고난 받으심이니 즉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받으시는 고난이다. 그래서 지금은 새 창조를 이루시는 과정에서 모든 피조물이(롬 8:22) 함께 해산의 고통 중에 신음하는 때이다.

여기서 오늘날의 소위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소위 "방언"을 하고 "귀신 쫓음" 등의 현상에 대한 지적으로서,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은 해산의 고통이 없다는 것으로써 그 사이비성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이런 것에 물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성경이 언제나 강조하는 핵심 사안은 변화된 삶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재출생, 신창조에 의해 아들된 자들의 유일한 본분이기 때문이다. 하므로 처음부터 "회개하라"는 것이 첫번째로 내리시는 명령이시다.

귀신을 쫓아내는(예수님을 비롯 초대교회 사도들이 한 대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막간(幕間) 무대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며 더군다나 그 일로 소위 "헌금"을 거둘 때에는 백프로 사기극이다. 사기라고 해서 초능력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칭하기 때문이다. 속임수인 것이다. 능력으로는 악령들도 천사와 똑같은 수준이고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니, 지금은 그들의 무대이다. "방언"도 당시대에 구사되는 인간의 언어다.

때문에 초대 교회 벽두 성령께서 임하실 때 "방언"을 하게 되자 외국 각지에 거류하다가 온 유대인들이 자기네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방언"을 할 때에 악령들도 사이비 방언을 하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 여부를 알기 위해 영을 시험해보라고 요한이 말했듯이 당시도 의당히 악령들의 방해 공작이 기승을 부렸지만 "방언"이나 기타 "은사"로써 이를 모방하는 일은 없었다. 성경에 맞지 않는 인간의 주장이나 견해가 당시 교회를 쉽게 물들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상은 소위 "참 것"과 "가짜의 것"으로 나누어 "방언"을 하는 당사자들도 생각할 지경으로 난무하고 있다. 이런 판국인데 "성령의 은사"의 역사가 방언으로 나타나실 리 없다. 한국 교회의 1907년 부흥 당시나 미국의 1850대 부흥에서도 "방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날 나타나게 하실 이유가 없다. 소위 "방언", "신유(神癒)", "귀신 쫓음" 등 초능력의 현상만 나타내기에 치중되어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바울이 그 서신에서 지적한 "성령의 은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있다. 이런 것에 괘념할 일이 아니다.

귀신 축출도 귀신이든 악령이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함이지 다른 의미가 없다. 명령하면 순순히 명령에 따르는 것이지 youtube에 나오는 대로 무슨 쇼를 벌이듯이 하는 것은 기괴함만 더할 뿐이다. 그런 것은 귀신을 쫓는 것이라기보다 저들끼리 짜고 치기의 연출일 뿐이다. 경건미(美)도 성결미도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런 것에 미혹되지 말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즉각 순응만이 있을 뿐이니 버둥대고 말고 할 여지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빙자하고 사칭하는 오늘날 시대다. 이제까지는 별로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그동안 막는 자가 있어 막았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은 그 막은 것이 풀려나 있는 때다. 야단스러운 것을 좇아 다닐 것이 아니라 생활의 혁명으로 변화된 삶의 능력으로 드러나는 제사장의 중보 기도와 말씀 전파와 함께 병행하여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야 "하나님께 속한 것"(요일 4:1)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들을 이겼으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다. 저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니 세상이 저들의 말을 듣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는 것이다"(요일 4:1-6).

그러면 위에 언급한 사이비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가 하면 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시인한다. 그러면 어디에 차이가 있어 그들을 분별하게 되느냐 하면 바울이 지적한 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함"(딤후 3:5)으로써 "하나님은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않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 (딛 1:16)라는 점에 있는 것이다. 행위로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의 요한 사도가 명백히 가르쳐 지적하지 않았는가. 즉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뵙지 못하였다"(요삼 1:11)고 했다.

이 선을 행함으로 말하면 바울 사도도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했고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했었다.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에 들어가고 자아중심일(우리말 번역 및 킹제임스 영역의 "당을 짓는다-contentious"는 오역) 경우 멸망한다"(롬 2:7-10)고 명시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소위 "능력"을 행하는 경우 요한 사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속했으면 반드시 필자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처럼 주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대로 "자기 부인" 및 "매일 십자가 짐"을 설파하게 되어 있다. 어디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모두가 자아중심의 일색, 일변도다. 바울과 요한이 위에서 언급한 선행은 그리스도를 토대로 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그 어떤 선도 의도 행할 수 없음을 명백히 하여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 3:12)고 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비록 믿어도 여전히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 오늘날 "교회"의 전반적인 풍조에 젖어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일 하나님께 속한 영이라면 오늘날 팽배해 있는 자아중심(이른바 "교회' 내에서의)을 통박하고 회개하라는 매서운 메시지부터 먼저 전달했어야 하는 것.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다"(요일 2:23) 한 그대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다. 악령들이 성령을 사칭하고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위장한다. 그런 위협에 잘도 넘어가는 것은, 성경적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스스로 부지런히 읽어 친히 계시해 주시는 것을 받음 즉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배우라"(요 6:45)는 것. 그리스도께 오기 전에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릇 진리는 두드리는 자, 찾는 자, 구하는 자에게 계시로써 주시게 되어 있다.

2016년 3월 28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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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this song is tragic: In Siberia in 1852 they found a dead body of coachman who got frozen during a long road. There was a notebook with handwriting poems in his bag. Name of the author of the poems Иван Макаров (Ivan Makarov) was not known 
during his life time. After a year since they were published the poems composer Александр Львович Гурилев (Alexander Gurilev) (1803 – 1858) wrote music for a poem what he liked the most. That was a start for the famous Russian romance “The Lonely 
Coach-Bell”. In three years another Russian composer К. Сидорович (K. Sidorovich) wrote his version of music for the poem 
and this romance has got a long life and all people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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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ttle bell lies on the ground Although it tries it cannot sound It used to ring across the air Its sweetened tone would linger there But from a careless hand it rocked Its shell is only made of crock Although it lies there split in two It still tries to ring out to you Now deep inside my wooden clock There is a tick but not a tock Although into the room it chimes It only tells me half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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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ach Bell
In the distance a bell, faintly sounding Through the dust rising up from the road And a coachman is heard singing sadly, That I ask, what that song might forebode.   So much sadness there is in that sound; So much grief in that lonely refrain That my heart which was hardened and weary In my breast was re-kindled again   I recalled nights long gone, other places And the fields and the forests so dear That my eyes which so long have been arid Became moist with a glistening tear   In the distance the bell, faintly sounding Is an echo from times so remote; And my coachman, now silent and weary And the road fades away with that n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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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ely Coach-Bell
Oh, how lonely the coach bell is ringing, And the dust from the road fills the air. And the coachman’s sorrowful singing Floats across the wild fields in despair.
That sad song overflows with such feeling, So much grief can be heard in that strain, That my cold heart, long hardened and weary In my bosom was kindled again.
I recalled other nights, other wand’rings, And the fields and the forests so dear, And my eyes, which so long have been arid, Became moistened like jewels with a tear.
Oh, how lonely the coach bell is ringing, As it swings in the night to and fro. And my coachman has now fallen silent, And I still have a long way t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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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words areㅡ 

Ring-bell is thundering monotonusly .. mild dust slightly covers the road .. coachman's sadly song is echoing over the field

So much sorrow-filled is this song .. so much sadness is in this native melody .. so that from my cold-blooded, congealed chest .. heart inflates in fire

I remembered other nights .. homely fields and forests .. and on my long-drained eyes .. ran as sparkle, a tear

The ring-bell is chiming monotonously .. from distance-to-distance tailing off .. my coachman has silenced .. and the way in front of me now seems endless









2016년 3월 27일 일요일

"6일" 창조 이전과 이후



"6일 창조"에서 하나님(아들께서 형상이시고 아버지께서 그 실체) 주변에서 심부름을 한 존재들이 "스랍"과 "그룹"들이다. 욥기에 "새벽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들이다. 구약성경에 언급된 계명성(새벽별) 즉 루시퍼는 그들 그룹 중 하나다. 그룹과 스랍이 그 수가 얼마가 되는지는 현재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의 천사들과 악령들은 첫 사람 아담 이후 창조된 영물(靈物)들이다.

루시퍼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방자한 행동을 했다. 이들 6일 창조 전 영물들은 현재의 영물들처럼 수가 많지 않아 이 루시퍼를 따른 타 영물들은 없었다. 인하여 당시의 세계는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며(베드로가 말한 "물의 넘침"은 노아 홍수를 말함이 아닌 것) 그리하여 창세기의 "6일 " 창조 이전의 "물"과 "혼돈"과 "암흑"의 직접 원인이 된 것이다. 그 결과 루시퍼는 무저갱에 들어간 것이며 계시록에서는 그를 가리켜 "아폴룐"이라 하고 있다.

이 이상으로 이 존재에 대해 현재로서는(영원 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알게 되지만) 알 길은 없다. "6일" 창조 이전에 피조물 세계가 현재의 우리 세계와 짝을 이루고 있었다면 역시 오늘날의 "6일" 창조와 같은 양식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랍과 스랍 등 영물과 대칭을 이루는 자연계의 거대 동물들이 있었으리라 유추해봄은 그리 지나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생략해 버리고 있다.

성경이 만일 하나님의 감동 감화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으로 지어낸 것이라면 반드시 그 이전 세계에 관해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했을 것이요 아니라면 그 넘쳐 나는 물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뭍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내력을 말했을 것이다. 거짓말로 지어내는 판에 무슨 소리인들 못하랴. 그러나 단 한 마디도 그에 대해서는 침묵만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자체 증명이 되는 증거는 성경 곳곳에 즐비하게 스며 있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하등 생물이 차츰 진화하여 된 인간이라면 그 진화의 전단계가 되는 원숭이들이 사라져 없어야 하는데 그리고 지금도 원숭이가 사람되는 현상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런 대목은 쑥 빼 버리고 덮어놓고 사람이 진화되었다 하니 정신이 나간 사람 외에는 누가 그런 것을 믿겠는가. 학식과 상식은 다르다. 학식 있다고 상식이 건전한 것은 아니다. 원숭이든 침팬지든 고릴라든 그대로 자기네 종을 보전하여 생존하고 있고 그 원숭이의 직전 단계의 다른 동물들도 그대로 있다.

그래서 진화론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 나온 소설이라 하는 것이다. 이 자연계라는 우물 속에만 갇혀 지낸 결과로서의 개구리의 울음소리일 뿐이다. 자연계에만 갇혀 지내온 것은 진화론자들만 아니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유신론자, 신학자, 일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니 에덴낙원을 자연계 동산처럼 여기고 인간의 원래의 초자연계적 초능력의 신분을 알지 못하고 이제까지 지내 온 것이 그 증거다. 상식과 학식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이 역시 인간의 이성과 지성과는 관련이 없다. 이성적인 자유로운 사고(思考)를 못하고 강제로 조종당하고 제압됨으로써 마비되어 있는 결과다.

필자가 이런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도 그 유일한 근거가 현재 고난 받는 형제들의 피 값으로 일구어낸 제물 겸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의 덕이다. 여기서 재삼 강조하지만 우리 살아남은 이들도 세상에서 그 어느 때든 순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귀한 영혼들의 고난과 기도가 아니라면 우리 역시 아직도 에덴낙원이 자연계의 어느 동산쯤으로만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애초에는 초자연계에 속한 존재였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니, 고질적이라 할 수 있는 세상 사랑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을 누리는 일에 유력한 힘의 원천의 하나가 될 수 있음이다. 

이 세상은 사람 살리는 곳이요 이 인생 구원의 하나님 사업에는 희생양의 고난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바울(다시 사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친히(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한 몸이 되심으로 함께 고난 받으심이니 즉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받으시는 고난이다. 그래서 지금은 새 창조를 이루시는 과정에서 모든 피조물이(롬 8:22) 함께 해산의 고통 중에 신음하는 때이다.

여기서 오늘날의 소위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언급해두고 싶은 것은, 소위 "방언"을 하고 "귀신 쫓음" 등의 현상에 대한 지적으로서,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은 해산의 고통이 없다는 것으로써 그 사이비성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이런 것에 물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성경이 언제나 강조하는 핵심 사안은 변화된 삶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재출생, 신창조에 의해 아들된 자들의 유일한 본분이기 때문이다. 하므로 처음부터 "회개하라"는 것이 첫번째로 내리시는 명령이시다.

귀신을 쫓아내는(예수님을 비롯 초대교회 사도들이 한 대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막간(幕間) 무대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며 더군다나 그 일로 소위 "헌금"을 거둘 때에는 백프로 사기극이다. 사기라고 해서 초능력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칭하기 때문이다. 속임수인 것이다. 능력으로는 악령들도 천사와 똑같은 수준이고 얼마든지 행할 수 있으니, 지금은 그들의 무대이다. "방언"도 당시대에 구사되는 인간의 언어다.

때문에 초대 교회 벽두 성령께서 임하실 때 "방언"을 하게 되자 외국 각지에 거류하다가 온 유대인들이 자기네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방언"을 할 때에 악령들도 사이비 방언을 하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 여부를 알기 위해 영을 시험해보라고 요한이 말했듯이 당시도 의당히 악령들의 방해 공작이 기승을 부렸지만 "방언"이나 기타 "은사"로써 이를 모방하는 일은 없었다. 성경에 맞지 않는 인간의 주장이나 견해가 당시 교회를 쉽게 물들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상은 소위 "참 것"과 "가짜의 것"으로 나누어 "방언"을 하는 당사자들도 생각할 지경으로 난무하고 있다. 이런 판국인데 "성령의 은사"의 역사가 방언으로 나타나실 리 없다. 한국 교회의 1907년 부흥 당시나 미국의 1850대 부흥에서도 "방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날 나타나게 하실 이유가 없다. 소위 "방언", "신유(神癒)", "귀신 쫓음" 등 초능력의 현상만 나타내기에 치중되어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바울이 그 서신에서 지적한 "성령의 은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있다. 이런 것에 괘념할 일이 아니다.

귀신 축출도 귀신이든 악령이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함이지 다른 의미가 없다. 명령하면 순순히 명령에 따르는 것이지 youtube에 나오는 대로 무슨 쇼를 벌이듯이 하는 것은 기괴함만 더할 뿐이다. 그런 것은 귀신을 쫓는 것이라기보다 저들끼리 짜고 치기의 연출일 뿐이다. 경건미(美)도 성결미도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런 것에 미혹되지 말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즉각 순응만이 있을 뿐이니 버둥대고 말고 할 여지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빙자하고 사칭하는 오늘날 시대다. 이제까지는 별로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그동안 막는 자가 있어 막았기" 때문이라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은 그 막은 것이 풀려나 있는 때다. 야단스러운 것을 좇아 다닐 것이 아니라 생활의 혁명으로 변화된 삶의 능력으로 드러나는 제사장의 중보 기도와 말씀 전파와 함께 병행하여 성령의 은사는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2016년 3월 26일 토요일

유인원으로부터 인간을 창조하심ㅡ유인원이 진화한 것 아니다





출처(조선일보 기사를 읽고 뉴욕타임즈에서 옮긴 것):
http://www.nytimes.com/2016/03/25/science/researchers-find-fish-that-walks-the-way-land-vertebrates-do.html

Cryptotora thamicola라는 학명의 이 눈 먼 암굴 물고기(cave fish)는 폭포수가 떨어지는 암벽의 90도 경사진 데를 네발 짐승처럼 올라가는 것이 태국에서 목격되었다. 그래서 물고기로부터 뭍의 네발 짐승으로 어떻게 "진화"되었느냐 하는 과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라고 자연 과학자들은 흥분하고 있으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이 이렇게 되어 있다ㅡ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었다"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0-29]

그러므로 물고기, 날짐승, 뭍짐승, 사람의 순서다. 다시 말해 물고기로부터 날짐승, 날짐승으로부터 뭍짐승을 만드시고 뭍짐승으로부터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뭍의 짐승 중 원숭이 즉 유인원으로부터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 이 암굴 고기는 위의 날개 형태의 지느러미라 할까 발 형태라 할까 하는 것은 그대로 있고 아래의 (지느러미) 형태의 것은 발이 되도록 만드신 것이 날짐승이다. 그리고 다시 이 날짐승으로부터 날개마저 발이 되도록 네발 가진 짐승을 만드시니 이 뭍짐승 중에서 직립 보행과 방불한 형태의 고릴라, 침팬지 류를 만드시고 이를 토대로 사람을 만드시기에 이른다. 이렇게 과정을 거쳐 만드시는 것이 무어 그리 이상한가. 창세기에서 말하는 "6일"은 우리가 아는 대로의 365일이 아닌 것임을 그 앞 서술에서 확인된다.  

성경이 "6일"이라 한다 해서 우리가 아는 "6일"로 이해하는 것부터가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이다. 그 6일이 도대체 얼마의 기간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4계절이 생기기 이전부터 그런 날(日)이 있었다는 사실만 알면 족하다. 그것조차 알려고 한다면 과분한 것이니 우리의 처지가 지금 자연계에 속한 하릴없는 육체임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일거에 묵사발로 만들 수 있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처음부터 이런 자연계 육체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악령이나 천사와 같은 초자연 육체로 창조되어 있었음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신학자들이 이를 인정했던가? 아니다. 여전히 에덴 동산을 자연계의 한 동산쯤으로 착각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래서 상식적 근거 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시 무엇을 만드실 때에는(지금도 그러하나 사실상 이제는 현재 진행 중인 사람의 새 창조와 새 하늘, 새 땅 외에는 창조가 끝났지만) 창조이다. 고로 이미 자연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클라이맥스로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 인간을 위해 똑같은 자연계 동산을 만드시겠는가. 자연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창설하심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대칭성(짝)으로 모든 것을 만드시고 존재하게 하신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 3위1체 원리인 것이다. 자연계적 사실에만 시야를 국한시키니 항상 시행착오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 짝이다. 남자와 여자, 짝이다. 인체도 좌, 우 양면으로 짝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도 먼저 좌면 좌, 우면 우 한 쪽을 만드시고 다른 쪽을 맞추는 식으로 만드신 것이라 생각된다. 별들도 제 짝이 있다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러한 짝으로 만물이 되어 있는 것을 밝힌 것이 3위1체 법칙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확정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이라 해도 동양의 음양 사상이나 현대 물리학에서의 보어의 상보성 원리 겨우 그 정도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논쟁도 이런 사실을 확정적으로 규명해내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끝까지 보어의 주장에 동조하지 못한 것을 보라. 성질이 정반대인데 어떻게 그런 둘이 하나로 조화 일치할 수 있느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 성격에서 보어의 상보성도 음양 이원론도 그 둘의 관계를 제대로 규명해내지 못한 것이다. 

즉 이 대칭 국면의 정반대되는 성질의 화합이 하나님 친히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모자(母子) 관계를 형성하고 계심을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서 바로 그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유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둘은 대등할 수가 없다. 대등하면 하나로 존립 불가능이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파생됨으로써 비로소 하나일 수가 있는 것이다. 3위1체 원리는 바로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그 핵심이다. 양면성 구조는 이미 음양론으로나 상보성으로나 세상에 알려져 있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직 이 양자 관계가 원인과 결과, 실체와 형체 등 주종 관계로 있음을 주제로 삼는 것이 3위1체 원리다. 파생시킨 자와 파생된 자와의 관계를 편의상 "모자 관계"라 한다. 양성을 다 포함시켰으므로 듣기에도 수월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만물이 짝으로 되어 있음을 기정사실화할진대 하나를 알면 그 다른 하나에 대해 그 존재 어부를 따지려 할 필요가 없다는 여기에 또한 강조점이 두어지게 된다. 자연 만물이 있으면 초자연계의 존재는 필연이니 이를 증명하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자연계와 초자연계라는 짝으로 되어 있는 세계일진대 역시 같은 논리로 이들 결과물과 이 결과를 파생시킨 창조주가 엄존하신다는 것은 물으나마나, 따지나마나, 생각하나마나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자연계 지식으로는 만년을 간다 한들 초자연계의 실상을 알 재주가 없다. 우리가 초자연계 육체의 존재로 환원되어야 비로소 알게 되어 있는 그런 환경이다. 그런즉 초자연계의 초능력을 행사하는 판에 이런 인간을 대상으로 무슨 진화를 가히 들먹일 수 있느냐 그 얘기다. 이래서 3위1체 법칙의 비중이 그토록 크고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립되고 있는 둘 사이의 정반대의 성질, 이것이 바로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양자 얽힘"의 "엎 스핀"과 "다운 스핀"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의 SN유형과 OT유형 간의 3과 19라는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3과 19는 지금 지적하는 이러한 두 정반대되는 성질의 완전한 도치(倒置, inversion)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어주는 것이다.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드신 원숭이를 토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원숭이, 침판지, 고릴라는 그대로 오늘날도 존속해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 번식한 것이다. 저런 물고기도 오늘날에도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니, 자다가 봉창 두드림과 같은 일은 이제는 그만 두고 자연과확자들은 영원 세계를 흠모하여 영생의 문을 두드릴 일이다. 진정으로 호소하는 것이다.  

6일 창조의 그 하루가 우리가 인식하는 날수로는 얼마의 세월이 소요되었든지 간에 그런 것을 우리가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으니 그리 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정작 달은 보지 못함이 된다. 달을 본다는 말은 "창조는 그래서 완료되었고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성경의 결론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적 사실은 수용하지 않고 진화는 아직도 계속된다고 하니 웃기는 일이 아닌가.      

성경 욥기에 "우박 창고, 눈 곳간, 운운" 하는 것을 두고도 말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그 표현이 옛날 과학적 지식이 없던 시절 일식, 월식을 가리켜 하늘의 개가 해나 달을 삼켰다가 뱉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런 유치함이 아니냐는 뜻인데 그 자신 그런 똑같은 유치함에 싸여 있는 줄은 모른다. 하나님을 보여달라 하는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그런 유치함과 똑같은 것이다. 창조주로서의 위치와 그 피조물인 인간으로서의 처지와의 차이도 구분할 줄 모르는 무지인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 관련 설명도 인간을 기준하지 않고는 어찌 묘사가 가능하겠는가. 천사와 같은 영물이 아니라 인간이 그 대상이 아닌가. 옛 사람과 현대인의 지식의 차이가 있는데 모든 시대인에게 공통된 이해를 기대한다면 현대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수준에 따라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아버지"와 "아들"로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여자가 끼이지 않느냐 하고 항의하는 것과 같다. 항의라도 하면 좋지만 내가 잘 났다는 식으로 그런 표현을 쓰는 성경을 골동품의 가부장제도의 유산이라고 비하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인간의 교만이라 하는 것이다. 이 오만함이 모든 일에서도 그렇지만 인간 구원에 최대의 장애 요인인 것이다. 인간의 의식 구조를 따라 부모 자식을 논하는데 이를 모자 관계라 하겠는가. 어쨌든 인간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아담의 대표성을 따라 일관되게 "아버지"와 "아들"로 통일시킴이다. 첫 사람 아담이 인간의 대표가 아닌가. 닮은꼴은 먼저 원형(본형)이 있고나서야 생기는 것이다. 아담의 닮은꼴이라야 만족을 하겠기에 그 닮은꼴을 기왕 만드신 자연계 동물들의 암수 생성법에 따라 만드시니 비로소 남녀가 된 것이요 아담이 남자이기 때문에 남성 위주로 대표성을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남녀 구분은 영원 세상에서는 사라지는 것이니, 생식을 목표로 한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것처럼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모든 것을 창조하심이다. 동물과 식물은 짝이요 영물들과 아담이 또한 짝이니 다스림을 받는 자와 다스리는 자와의 관계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같다. 성경은 아담 부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고 되어 있다. 아담 부부가 초자연계 몸이 되어 찬란한 광채로 둘러싸인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후 문맥으로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성경은 군소리, 잡소리를 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의 자연계 몸으로 전락해버린 인간을 기준하여 서술하다보니 현재는 옷을 입어야 몸을 가리는지라 그래서 "부끄럽다'라는 말을 동원한 것이다. 왜 부끄러운가, 천사(영물)들은 그런 남녀 구분이 없는데 자기네는 하등 세계인 자연계의 동물들이 암수로 나누어져 있듯이 그런 모양새를 띠고 있었음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완전하고 후자는 남과 여로 나누어져 불완전함이 측면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식 작용도 영원히 사라지고 없는 영원 세계에서 천사보다 못한 불완전한 남녀 유별이 지속될 이유가 없다.  

"우박 창고", "눈 곳간"이란 표현도 우리 인간은 무엇이든 창고나 곳간에에 쌓아놓고 물건을 쓰듯이 우박도 눈도 필요한 때에 따라 언제나 다함이 없이 내리니 그런 식의 표현밖에 없지 않은가. 즉 "우박이나 눈이 생성되는 과정을 네가 지켜 보았느냐"는 의미로서 거대한 자연계의 경이가 그렇게 표현된 것으로 알면 손가락을 봄이 안되고 정상적으로 달을 봄이 되는 것이다.


한 몸 구조에서 각 지체가 하는 모든 일은 머리의 지시를 받아 그 지시대로 행함이므로 머리가 그 지체를 통하여 친히 함과 같은 의미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것으로 묘사된 모든 말씀과 능력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대행한 것이다. 천사들은 그 모든 일을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 이름으로 말에나 일에나 행하는 것이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머리되시는 이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 이름으로 즉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것뿐이다.  

2016년 3월 25일 금요일

인류 최초로 밝혀져 확립되어 있는 가장 행복하게 사는 방법

인체는 머리와 몸 그리고 좌우가 서로 대칭이 되어 있다

그것은 '한 몸'으로 사는 방법입니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서로서로 위하는 것입니다. 몸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머리가 있어야 하며 머리 혼자 살지 못하고 몸이 붙어 주어야 그래서 각기 제 기능을 발휘해주어야 하는 이치 그대로입니다. 이럴 경우 몸은 몸대로 자기를 위할 수도 없고 위해서도 안됩니다. 머리가 자기를 위해주기 때문이요, 다시 말해 머리의 지시(명령, 계명)를 따라 자기 이외의 다른 지체가 응해(복종, 순종해)주어 모두 자기를 위해주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머리 역시 스스로를 몸에다 묶어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할 수 없고 또한 위해서도 안됩니다. 남녀 사이의 한 몸이 됨도 이런 둘이 하나됨의 한 몸을 이루어 같은 방법으로 서로를 위하기 때문에 사랑이라 합니다. 그래서 남녀 한 몸이 되면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되고 여자의 육체는 자기와 하나 즉 한 몸이 되어 있는 남자가 그 임자가 됩니다(註1). 만일 이 때 남자가 자기 상대인 여자 외의 다른 여자를 볼 때에는 이 하나됨이 깨어지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몸의 임자(소유권자)를 버리고 배신 행위를 하니 애초에 하나 곧 한 몸이 되자는 약속을 파기한 것입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둘의 관계에서 둘은 반드시 대소, 주종, 인과 관계를 맺습니다(註2). 이는 또한 실체와 형상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결코 대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대등하면 절대로 하나 즉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註3). 머리는 자기 분신 즉 몸으로서 몸의 각 지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몸 역시 자기의 근본이 되는 머리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 있은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미워할 까닭이 없고 그래서 한 뜻, 하나의 지향성이 됩니다.

이렇게 인과 관계가 되어 있으므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둘이 동시에 생성되어 대등해지면 서로가 머리의 자리를 놓고 다투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하나됨이 불가능합니다(註4). 그래서 이런 대등한 위치에서는 그 어느 쪽도 하나가 될 수 없고 따라서 둘의 하나됨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여럿이기는 하나 그 여럿됨이 행복의 온상이 되지 못하고 불행의 씨앗만 됩니다.

이렇게 머리와 몸(의 각 지체)으로 되어 있으면 다중(多衆)이 되어 그 수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많으면 많을수록 나(그 몸의 지체를 이루고 있는 한 부분)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지 불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머리와 몸으로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하면 단 둘이만 있어도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져 풍비박산이 됩니다. 절대로 행복한 삶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서로간의 감정이 격화되어 하나는 다른 하나를 파멸시키게 됩니다. 이것이 자아중심의 속성입니다(註5). 자아중심의 반대되는 것이 자기 부인(self-denial)입니다(註6).

그런즉 행복한 삶의 비결 즉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명백합니다. 하나 곧 한 몸됨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몸을 위하는 머리의 존재가 필수 요건입니다. 이는 대등 관계에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인과(因果), 대소(大小), 주종(主從) 관계라야 합니다(註7). 어버이가 자식을 낳았으니(인과) 당연히 선후 관계가 분명하여 작은 자는 큰 자(대소)를 따르고(주종) 어버이로서의 위치는 머리가 되어 그 몸에게 마땅히 본이 되어 있습니다. 본이기 때문에 따른다 또는 순종한다는 말이 옳습니다.

그래서 대등 관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몸 체제가 되어 있음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이 "하나됨"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남녀간의 사랑의 노래에도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심오한 것도 아니고 오직 상식 차원에서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한 몸으로서의 각 지체 각 부분을 이루게 되면 모두가 자주 독립성을 지녀 자기 특색이 있고 자기 자랑이 있으니 다시 말해 눈의 역할, 귀의 역할, 팔의 역할 등등 각기 구실이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이 종합, 조화하여 한 몸으로서의 기능을 완수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해 모두 색깔이 다릅니다. 그 영롱 찬란한 빛깔로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룹니다. 더 분명히 말해 나는 그 중의 손톱, 발톱 같은 미미한 꼬리 부분에 해당하더라도 모든 지체가 머리처럼 나를 칙사 대접하니 머리가 따로 없고 꼬리가 따로 없어 진정한 평등입니다.

이런 평등한 삶인데 누가 마다하리요. 그래서 서로가 이 행복한 삶의 비결을 사랑하여 자진해서 남을 섬기는(각기 지체로서 다른 지체를 위하는) 일을 하니 내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자유인인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 평등이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함보다 백배, 천배, 만배(이웃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로 위해집니다. 다시 말해 나는 파란 색인데 이웃의 빨강, 노랑, 초록의 색깔이 탐스럽다는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닌 혼자일 경우라면 내가 가진 것이 아니므로 소유주가 달라 내가 향유할 수 없으므로 그 나와 다른 것을 탐내고 그 상대를 시기하게 되고 급기야는 뺏고자 덤비기까지 합니다. 도둑질, 살인 등 욕심이 발동하여 공동 파멸이 됩니다. 그러나 한 몸이 되어 있으면 그 색다른 빛깔의 내 이웃들이 모두 나에게 그 특징을 갖다 바치게(獻上) 됩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이렇게 그 모든 다른 것을 맛볼 수 있고 누릴 수 있으니 영원히 향유하는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한 몸의 특징이므로 모두 그 혜택이 골고루 누려집니다. 평등이고 평균됨입니다. 또 이 한 몸 관계에서는 손톱 하나라도 알리면 모든 몸이 아픕니다. 이빨 하나가 쑤셔도 온 몸이 고통입니다. 반대로 하나가 잘 되면 그 잘됨과 영광스러움이  그 하나 즉 그 한 가지 지체에만 국한되지 않고 온 몸의 영광이 됩니다. 머리의 영광이 또한 온 몸 전체 모든 지체의 영광이 됩니다. 따라서 비록 천 억의 인구가 있을 때 그 중 하나라도 고통 중에 있으면 그 나머지 천억(그 고통 중의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 하나의 고통에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註8).

바로 이것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한 몸의 체제 속의 머리와 몸으로 구별되어 있으나 평등하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혼자 잘되고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한 몸 구조에서의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배신하는 것이므로 나중에 모두(한 몸을 이룬)가 행복을 누릴 때 단연코 당연히 배제됨이 사필귀정입니다.

이런 한 몸이 되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이치도 모르고 단지 그런 한 몸됨의 결과만을 알아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 말 그대로 한낱 이상주의로만 남아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또는 공산주의자)는 그림자만 부여 안고 꿈만 꾸는 잠꼬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누구나 머리가 되어서는 안되고 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한 인간만이 되어야 하고 그것도 우리의 최고의 어버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바로 인류의 가장 최초의 첫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인간이 죽지 않는 영생하는 자 곧 초자연계 몸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왜냐면 머리가 될 유자격자는 하나뿐인즉 영존(永存)해야 합니다. 그가 영존할진대 당연히 그에게서 파생되는 자들 즉 모든 인류가 초자연계 육체로서 영원성을 누려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니 즉 첫 사람 아담의 자리를 대신 채우시기 위함입니다.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삼고 있는 성경의 전체 내용입니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인간 삶을 논하는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밝힌 것입니다. 불교는 이에 대해 무지하여 창조신마저 부정합니다. 무신론자로서 자연과학자들도 같은 행보요 자세입니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불교만 아니라 그 어떤 종교도 심지어 성경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까지도 이런 사람 사는 방법을 성경대로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은 알았으나 실제 삶 자체가 그런 구조로 되어 있음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삶을 사랑하고 계명 지키기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맹목적인 믿음 하나로 바람 잡듯이 해온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 부인"과 "매일 십자가 짐"을 외면해 왔습니다. 세상 사랑은, 이웃이야 어찌 되었든 나만 편하고 잘되면 그만이라는 욕심입니다. 성경을 안다고 해도 성경을 몰랐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한 2,3백년간은 알았으나 급속도로 타락해 갔던 때문입니다. 역시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정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보다도 단지 탐욕스럽게 영생하는 발판으로서만 인식한 결과입니다.

유신론자로서도 이상처럼 정확히 사람 삶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밝혀진 진실이요 진리입니다. 단지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것에만 단세포적인 생각으로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상 가는 합리적인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진리가 대낮같이 밝혀졌으니 각자 자유의지를 따라 자기 운명을 정할 것입니다. 한 몸의 체제 속으로 들어오느냐 아니면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영원히 제외될 것이냐 오직 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부터는 이와 같이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고 이런 의미로서의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뜬 구름 잡듯이 안개 움켜쥐듯이 애매 모호하게 전달할 일이 아닙니다. 첨단 과학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이와 같이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되어 있는 인생 구제의 방법을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자연법칙의 총본산이 성경입니다. 모르면 알려고 노력은 하지 않고 편견과 선입관에 사로잡힌 인생들이 어리석은 착각으로 이리저리 말 장난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영원히 요지부동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이를 모방할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밝히셨으므로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자는 아무리 초대형 기적으로 법석을 떨어도 모방일 뿐 다시 말해 속임수일 뿐 이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깃발을 들고 세계 끝까지 나아가 "마지막 아담"(註9) 의 나라를 전파하는 그 증인(證人)(註10)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만 한 몸 체제를 이룸은 각자가 예외없이 그 안에 영혼 격으로서 그리고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로 치면 한 혈관으로 통하고 한 신경 계통으로 조화 일치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 고로 모든 사람이 나를 대하기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하는 것이니 실상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註1-성경 고린도전서 7장 3,4절
註2-3위1체의 원리
註3-3위1체의 원리
註4-3위1체의 원리
註5-성경 창세기의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 사건
註6-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註7-3위1체의 원리
註8-성경 고린도전서 12장 26절
註9-성경 고린도전서 15장 45절
註10-성경 사도행전 1장 8절




2016년 3월 24일 목요일

"마지막 때에"(단 12:4)ㅡ다니엘의 예언ㅡ"쟁기(p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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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페이지와 이 페이지의그림 출처:
https://www.google.co.kr/search?q=plow&espv=2&biw=1280&bih=789&tbm=isch&tbo=u&source=univ&sa=X&ved=0ahUKEwiEsbK-rNrLAhWH26YKHaNVDkMQ7AkIWQ&dpr=1

위의 주소대로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쟁기를 잡은 그림은 별로 없고 모두 기계화가 되어 있어 오늘날의 추세를 알 수 있다. 편안히 앉아 기계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니까 웬만하면 한눈팔아도 "무리", "억지"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예컨대 "쟁기"라고 할 때 그 뜻을 몰라 한참 부산을 떨어야 겨우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도록 방치되겠는가. 그런 시대가 오기 전에 이 세상은 끝난다는 확실한 빙거다. 바로 지금인 이 21세기 초엽으로서 끝난다. 교통 통신 분야의 급속한 발달을 예언한 다니엘(단 12:4)은 20세기(20세기 바벨론 궁전 벽에 나타난 손 글씨ㅡ클릭 링크) 전후를 가리킴이었다. 

물론 아무리 최고도로 기계화가 되어 쟁기는 사라지더라도 "쟁기"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림, 사진 등을 통해 아무 어려움이 없다고는 하겠지만, 성경이 최고(最古)의 정보이기도 하고 최첨단 정보인 이상, 케케묵은 골동품에서나 확인될 수 있도록 또는 그런 것으로서 인식이 될 정도로, 허술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취급되거나 방치되게 하실 리가 없다는 뜻이다. 이미 20세기로서 자정(子正) 시침(時針)은 멈추어 있다. 새 날이 밝아오기 전의 새벽 시간의 시침이 움직일 때는 적 그리스도의 등장에 뒤이은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의 재림으로 곧장 연결되는 것이다.  

고난 받는 북한 교회와 내가 한 몸이 아니면 머리되시는 분과도 한 몸이 아닌 것 (2)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신 그리스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흘리시던 눈물의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 한두 때만 우신 것이 아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항상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셨다고 하는데 과장된 말일 수가 없음을 바울 사도의 눈물로도 입증된다 할 것이다. 말씀을 전할 때도 두렵고 떠는 정도가 아니라 눈물로써 교회에 경고한 것이다(행 20:19,31/고후 2:4/빌 3:18). 바로 이 이유 때문에도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장차 웃을 것"(눅 6:21)이라 하신 것이다. 눈물이 실종되어 있는 세대다. 이는 능력의 실종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실종된 교회를 말한다. 눈물의 설교가 없다. 오래 전 대구의 어떤 연로한 "전도 할아버지"는 전도지를 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소리로 "예수님 믿으시오" 했던 것처럼 그런 눈물의 전도, 눈물의 중보 기도,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롬 12:1)로 하는 제사장의 기도를 보기가 무척 힘들다. 새벽 기도를 나가도 줄곧 내 자신, 내 문제, 내 가족 위주다. 물론 다 좋다. 겸하여 반드시 이웃을 위한 해산의 기도라야 그 기도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자아중심이 되어 죄인의 기도가 되니 죄인은 그 기도가 가납(嘉納)되지 않는다. 


이 자연계 세상에서의 육체의 고난이나 죽음도 불쌍해서 눈물이 나오는 판인데 하물며 영원 죽음과 고난을 앞두고도 전혀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저러고들 있으니 생각 있는 이들이여, 어찌 대성통곡 중의 탄원의 기도가 없겠는가. 나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롬 9:3) 듯한 고통의 호소가 없으리요. 나 역시 심성(心性)이 마비되어 있지 않는 한에는 어찌 그 비통스러움을 감지하지 못하리요. 이 세상은 고해(苦海)라기보다 사해(死海)요 누해(淚海)다.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고난 받는 북한 교회와 내가 한 몸이 아니면 머리되시는 분과도 한 몸이 아닌 것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형상만 아니라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신(神-고후 4:4)이라고 한 영물(靈物)들도 영혼이 조성됨으로 말미암아 초자연계(에덴 낙원)에 들어가 초자연계 육체가 된 인간(아담)을 위해서 즉 그를 보좌하기(to help)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순수한 영이고 그래서 인간으로 치면 영혼이 바로 그 육체 격으로 되어 있는데 아담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아울러 다스리는 위치에서 양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는 의미에서 이중 구조이다. 그러나 범죄로 인해 초자연계 육체로 있던 육체가 도로 자연계 몸이 되어버림으로써 이전 아담이 자연계 육체로만(영혼이 생성되기 이전) 되어 있던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인류의 비극이다.


그러므로 영물들이 영이기 때문에 자주 독립성이 부여되어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오늘날까지 둘로 분류되어 "거룩한 천사"와 악령으로서의 영구적인 운명으로 양립되어 있는 상태에 있음과 같이, 비록 육체는 이러한 비극적 결말에 처해 있어도 영만은 영물과 같은 속성이므로 자주 독립성에 의한 자기 선택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인생들이다. 따라서 영원 멸망에 처해지면 사탄을 비롯한 모든 악령들과 함께 들어가는 불 못이므로 사탄과 악령들이 그 운명을 면할 수 없음과 같이 인간도 절대로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인간이 그런 처형에서 풀려 나는 길이 있다면 사탄도 역시 풀려 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니 풀려 날 수 있을까. 없다면 인간도 없다. 

한평생 죽으라고 뼈빠지게 일하고 모으고 해서 그래서 놀러도 가지 않고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해서 회사도 차리고 운영하다가 갑자기 암에 걸려 모두가 허사가 될 지경에 이르자 의사에게 매달려 내 재산 절반이라고 주겠으니 이 병만은 고쳐주시오 하고 울부짖다가 죽으니 아내는 그 재산 가지고 남자를 정해서 가버렸다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것이 속임이요 거짓인 것이다. 성경에도 부자가 여러 가지로 잘 지내보려고 창고를 짓는 등의 궁리를 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유명을 달리한다고 경고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면 나는 이제부터 제대로 놀러도 가고 세상 낙을 조금씩 누려가면서 돈을 벌겠다고 하려는가. 그런 부자보다 더 어리석다 할 것이다.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성경의 경고는 이 세상 자체가 그런 속임수요 거짓이라는 뜻으로서 영원한 것이라야 그런 거짓이 없다는 그 뜻이다. 오늘 안죽고 몇 십년 더 산다고 한들 그것이 영원 세상에 비하면 몇 푼어치 가치가 있겠는가. 영원 세상에서 온갖 호강을 누리며 사는 기회를 놓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반대 현상인 온갖 것 즉 3위1체 원리가 가리키는 대로 생명과는 정반대되는 것("엎 스핀"이면 "다운 스핀")만을 부둥켜 안고 몸부림쳐야 하니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 둘째 사망이요 멸망인 것이다.  


아담 하와가 범죄하여 이 자연계 육체로 환원되어 이 지경이 되어 있는 것은 그런 영원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본격적인 "영혼의 죽음"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육체에 한하는 이 세상 고생이나 죽음은 죽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실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 역시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상식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패멸을 당하게 된다. 


원래는 아담 부부가 에덴낙원에 초자연계(신령한) 몸으로 있으면서 자식들을 생산하여 나중에 "선악간에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 심판 받게 되어 있는 것으로, 영물들과 함께 영생 아니면 멸망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아담 내외부터 범죄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는 것(불신자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들은 후 믿고 안믿고의 양단간의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죽음과 생명의 양자 택일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과 똑같은 과정을 겪음인 것이다.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우리는 이 자연계 세상에서 그 과정을 치르는 것으로서 무대만 서로 다를 뿐이다. 


첫 사람 아담이 영물과 인간을 한데 아울러 심판하게 되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마지막 아담께서 마지막 심판의 심판주(재판장)가 되어 계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의미이나, 첫 사람 아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심판을 하게 되어 있었음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사탄을 위시해 악령들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도 영원 형벌에 악인들과 함께 들어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런즉 이런 사뭇 엄숙하고도 떨리는 현실 앞에서 어찌 "미친 마음"(전 9:3)이 되어 또는 이 세상 신 사탄에게 사로잡혀("사로잡혀" 있음의 일방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생 스스로 회개 않는 악함으로 인한 둘의 결합 또는 합작) 눈이 어두워(인간 스스로 악을 선호함에 따라 사탄이 눈을 어둡게 함으로 인한) 보지 못하는 그래서 이러한 엄청난 실상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한 상태를 알면서도 이 세상 삶에 연연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래서 이러한 마비된 감각의 태무심과 무관심은 본인이야 아무리 하나님 믿고 구원 받았다 하더라도 한 마디로 단정하면 "믿지 않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엄정한 자가 진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의 이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여기에만 버둥거리면서 일우일희하면서 지내던 일체의 것을 청산하고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일에 나머지 생애의 모든 정력과 기력을 다해야 하는 것. 오직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어야 하는 필연성에서 운영되는 세상사임이 드러난다. 그 동안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왜냐면 회개를 하지 않는 한 악에 사로잡혀 살인자 가인처럼 될 것이 뻔하기에)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이 철저히 운영되고 인간에게 적용되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인간 지배는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이는 하나님의 통제의 영역이므로) 앞서 지적한 대로의 새 창조, 재 출생을 막기 위한 일체의 방해 공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욥과 같은 경우처럼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때문에 "이 세상의 임금"(prince)이라 하신 것. 이상향 세계에서의 삶이 핵심이지 이렇게 강제로 규격화되어 있는 현재의 이 세상 삶은 인간으로서는 삶이 아닌 것은 명약관화.

자연계에 속한 인생의 삶을 이와 같이 세 가지로 한해 철저히 마름질해 간다는 것만 알아 그래서 자연계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결과만 우리가 아는 것뿐이지, 우리의 자유 의지와 실제 삶(이 세상에서의)이 어떻게 엮어지고 꾸려지고 상관성을 이루어 나타나는지는, 자연계에 속한 우리로서는 그런 초자연계에 속한 영역의 일을 규명해내는 것은 한계 밖의 일이다. 또 알아서 덕되는 것도 없다. 


발 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것 즉 범죄로 야기된 죽음의 이 자연계 몸을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의 과제이니까. 이 역시 상식에 속한다. 나 자신 먼저 여기서 벗어났으면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일하게 구제되도록 힘쓰느라 다른 것에 한눈팔 여유도 없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행위를 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경고하신 것이다(눅 9:62).





위의 그림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모습. 이렇게 일하고 있는데 뒤를 돌아볼 수 있는가. 그럼에도 뒤를 돌아보는 억지, 무리(無理)가 바로 이 세상 사랑이요,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것 등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세상 걱정 근심, 세상 쾌락, 부자되어 살아보겠다는(막 4:19) 마음이 모두 그러하고, 이 경우 열매 없는 자가 되어 생명에서 모두 탈락된다. 핍박이 나서 믿음을 버리는 경우와 똑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막 4:19). 재리(riches)의 "유혹"이라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역(英譯)은 deceitfulness다. 즉 속임수, 거짓이다. 왜냐면 오늘 밤이라도 영혼 떠나면 나와는 그 모든 부(富)가 완전히 남남이 되기 때문. 


한평생 죽으라고 뼈빠지게 일하고 모으고 해서 그래서 놀러 가지도 않고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무진 애쓴 결과 회사도 차리고 운영하던 도중 갑자기 암에 걸려 모두가 허사가 될 지경에 이르자 의사에게 매달려 내 재산 절반이라고 주겠으니 이 병만은 고쳐주시오 하고 울부짖다가 죽으니 아내는 그 재산 가지고 남자를 정해서 가버렸다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것이 방금 말한 속임이요 거짓인 것이다. 성경에도 부자가 여러 가지로 잘 지내보려고 딴에는 창고를 짓는 등의 한창 궁리를 하고 있던 바로 그 밤중 즉 하룻밤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경고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면 나는 이제부터 제대로 놀러 가기도 하고 세상 낙도 조금씩 누려가면서 돈을 벌겠다고 하려는가. 그런 부자보다 더 어리석다 할 것이다.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성경의 경고는 이 세상 자체가 그런 속임수요 거짓이라는 뜻으로서, 영원한 것이라야 그런 속임수, 거짓이 없다는 그 뜻이다. 오늘 안죽고 몇 십년 더 산다고 한들 그것이 영원 세상에 비하면 몇 푼어치 가치가 있으랴. 


영원 세상에서 온갖 호강을 누리며 사는 기회를 놓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대로 그 반대 현상인 온갖 것 즉 3위1체 원리가 가리키는 바 생명과는 정반대되는 것("엎 스핀"이면 반드시 "다운 스핀"이듯)만을 부둥켜 안고 영영세세 몸부림쳐야 할 것이니 어찌 아니 두렵고 떨리요. 성경에서 말하는 바 "둘째 사망"이요 "멸망"이니 이를 안 다음 어찌 태평이리요.  

아담 하와가 범죄하여 이 자연계 육체로 환원되어버려 이 지경이 되어 있는 것은 그런 영원성 비극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본격적인 "
영혼의 죽음"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니 그에 비하면 육체에 한하는 이 세상 고생도 죽음도 죽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실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 역시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상식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패멸을 당하게 된다. 

원래는 아담 부부가 에덴낙원에 초자연계(신령한) 몸으로 있으면서 자식들을 생산하여 나중에 "선악간에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 심판 받게 되어 있는 것으로서, 영물들과 함께 영생 아니면 멸망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아담 내외부터 범죄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는 것(불신자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들은 후 믿고 안믿고의 양단간의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죽음과 생명의 양자 택일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과 똑같은 의미요 똑같은 과정을 겪음인 것이다.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우리는 이 자연계 세상에서 그 과정을 치르는 무대만 서로 다를 뿐이다. 


첫 사람 아담이 영물과 인간을 한데 아울러 심판하게 되어 있었던 것처럼, 당연히 지금도 마지막 아담께서 마지막 심판의 심판주(재판장)가 되어 계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의미이다. 첫 사람 아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심판을 하게 되어 있었음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사탄을 위시해 악령들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도 영원 형벌에 악인들과 함께 들어가기 위한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죽음(고생, 고통 중에 처해짐)과 그와는 순수하게 180도로 내용이 다른 생명 세계에서의 판가름을 스스로 하게 되어 있는 양자 택일의 순간을 이어가는 우리가, 과연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대해야 하는지 상식적으로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황금덩이보다 더 값비싼 아니,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시간들이 지금도 계속 무자비하게 흘러간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우리 위해 기도하시는데 머리가 어떠한즉 몸도 그러하니 그래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유 1:20/엡 6:18)는 명령인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산고(産苦), 해산의 고통의 신음(우리말 번역 "탄식"은 아주 동떨어진 의미의 잘못된 번역이다) 속에 기도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눈물"(히 5:7)이 아니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영원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이 뻔한데 어찌 눈물이 아니 나올 수 있으리요. 내가 목석인가. 육체의 고통과 불행을 보아도 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영원 멸망이리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눈물의 사도였다. 다른 사도 역시 편지에 그렇게 쓰지를 않아서 그렇지 똑같은 심정으로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면 제 이름이 생명 책에서 지워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모세의 기도를 드리는 하나님 앞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내 자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것이 내 골육의 구원"(롬 9:3)이라 한 바울 사도의 기도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의 기도를 닮음인 것이다. 나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니 어찌 해산(birth pangs)의 기도가 아니리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신음(이 "탄식" 역시 오역)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롬 8:22) 역시 이 "해산의 수고"인 것이다(창 3:16). 이 해산이 수고 차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고"(빌 1:2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골 1:24)인 것이다. 

우리가 모진 핍박을 받음도 이 숭고한 '해산의 수고'의 차원인 것이다. 79세의 북한교회 장로(감독)가 65명의 교회 식구들을 이끌고 찬송 한 번 실컷 불러 보려고 기껏 탈북했다가 자유 대한으로 탈출할 절호의 기회를 만났어도 스스로 이 주님의 해산의 고통 중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전원 순종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모두 남김 없이 순절(殉節)한 것이다. 나는 그들과 한 몸이 아닌가. 그들과의 한 몸 정도가 아니라 머리되시는 주님과의 한 몸이 아니라는 증거인가.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면서 전부를 아는 듯이 했던 우리 모두 그 오만을 버려야



(자연)과학자들도 지적(知的) 오만을 버릴 때가 되었다. 우리가 아는 과학은 자연과학이다. 여기서 밝히는 것은, 자연계와 대칭으로 병립하고 있는 초자연계의 실존이므로 자연과학만을 전부라 착각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다. 이를 3위1체의 원리가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구명(究明)하는 과학이니 얼마나 흥미 진진한 분야인가. 가히 학문의 제왕이라 할 것이다. 단지 역설하는 것은 진화론은 그런 자연과학 축에도 들지 못하는 억설일 뿐이라는 것. 무신(여기서 말하는 無神은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부정)론을 전제하고 세워진 인간의 망상이라는 점이다. 초자연계를 입증하고 인과율을 확증하고 따라서 만물 창조의 제1원인으로서의 창조신을 증명한 3위1체 원리로써 그런 억측에 불과한 진화론을 완전히 그 밑둥지에서부터 와해시켰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자연계와 초자연계, 만물과 그 조물주 이러한 양면성 혹은 대칭 관계를 입증함은 자연 과학으로서는 당연히 한계 밖이고 그 소관사가 될 수가 없다. "양자 얽힘"에서의 "다운 스핀", "엎 스핀'의 현상도 바로 이런 진실을 석명하는 간단한 예에 불과한 것이건만, 예의 초자연계의 실존과 이 3위1체의 원리에 대해 무지하다보니까 "신(神)의 입자"라는 둥 허둥대는 것을 보라.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지론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지금 착각하고 있는 판이다. 

(자연)과학자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 식으로 그와 같이 완전히 손 놓고 있는 처지일 수밖에 없는 것은, 3위1체 원리는 초자연계와 자연계 양면을 망라하는 유일무이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런 독보적인 것을 입증하는 것이 3운법칙 곧 인간 생애의 법칙인데, 왜냐면 그 원리를,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 그리고 "양자 얽힘"에서의 짝을 이룬  소립자 간의 상호 도치성(倒置性) 즉 정반대되는 양상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현상처럼, 역시 그런 동일한 현상을 꼭 그대로 노정(露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리학적 측면에서의 이상 두 발견(빛의 두 상반된 성질 및 양자 얽힘에서의 두 소립자 간의 반응)을 두고 자연계밖에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자연과학자들이 갈팡질팡하며(3위1체 원리에 대해 무지하니까) 해석을 못내리는데 반하여, 이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은 그림을 그린 듯이 그 회한한 절묘한 구조로써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3위1체의 원리 도식(圖式)을 하나도 축내지 않고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와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은 상호 검증 관계에 있다는 것을 누차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계밖에 없다, 자연법칙밖에 없다는 편견, 선입관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과 진리는 자연법칙으로써만 재단(栽斷)될 수 있다는 부질없는 그리고 한정도 없는 오만이 낳은 기형아가 바로 진화론임을 알라는 것이 3위1체의 법칙이 주는 경고인 것이다. 진화론이라고 하는 대신 생물 환경 적응 관련 내용으로 자기 정체를 확실히 하게 된다면 생물학적 관찰에 따른 저간의 눈부신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게 된다. 그런데 얼토당토않게 진화(to evolve)라고 해버리니 그런 과학적 연구 결과조차도 함께 무의미해지고 묻혀 버리게 되는 것이다. 

진화론을 "인류의 수치"라고 하는 것은 무신론이 원래 인간을 지배하는 악령의 수작에 의한 것이고 어떤 근거든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진화론은 이 무신론의 이른바 "과학적 증거" 또는 그 아류로서 그동안 잘 써먹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 세상 신인 그가 느닷없이 유신론으로 180도 전환하여 속이려 들려는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음이다. "속인다"는 뜻은 그 자신이 이제는 창조신으로 군림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손바닥을 바로 펴도 "진리", 그 똑같은 손바닥을 금방 뒤집어도 여전히 "진리"로 여기도록 하는 그야말로 인류를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하여 그 가증스러움을 더하니 어찌 "인류의 수치"라는 탄식이 아니 나오겠는가. 

이처럼 진화론이 무신론(성경의 창조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 진화론이라는 등식이 되어 있으므로 "진화"의 이른바 "과학적 증거"가 대관절 어떤 것이기에 그러는 것인지 너그럽게 또는 여유를 두고 알아 볼려고 할 필요도 없이,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으로 검증된 3위1체의 원리로 무신론이 여지 없이 분쇄된 이상에는 진화론도 따라서 그러함이 불을 보듯 하기에, 굳이 각론에까지 들어갈 것도 없이 단도직입으로 결론부터 말하고 끝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생물의 모든 종은 창조 당시 그대로다. 진화할 것도 퇴화할 것도 없다. 인간만이 그 범죄로 즉 자업자득으로 초자연계 존재로부터 자연계 존재로 퇴화해 있을 따름이다. 앞으로 이 세상 지배자 용(龍)은, 인간이 영생하는 자로 "진화" 과정 중에 있고 소위 외계인이 그 먼저 진화된 본보기로서 인류의 이러한 진화를 돕기 위해 먼 나들이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그 주특기인 거짓말을 전개해 나갈 듯한데, 그렇지 않고는 창조신으로 가장하게 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위1체 원리에 의한 '둘이 하나됨'을 근거로 하는 "자기 부인"의 진리를 사랑함으로써 이를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아중심의 욕심대로 고집해 나가는 그 누구든지 간에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것으로 낙인찍혀, 적 그리스도의 대대적인 속임수에 말려들어 가는 "하나님의 심판"(:12)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