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1일 화요일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자유ㅡ"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패트릭 헨리)

자유케 하는 복음(福音, 희소식)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 한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갔습니다. 하수관 통 속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디오게네스(깡통은 차지 않았지만) 앞에 젊은 알렉산더는 거만하게 서서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지 말하라, 들어주리라" 했습니다. 그 때 디오게네스 답왈, "소원? 내 앞을 가리고 서셨으니 햇볕이 차단되었으므로 한 쪽으로 비켜 서 주시겠소이까". 나중에 알렉산더는 돌아가면서 측근에게 말했습니다. "나 이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저 디오게네스가 되겠다". 알렉산더는 이 세상의 제왕이었지만 디오게네스는 무관의 제왕(無冠帝王)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누구 그 무엇에도 꿇리지 않는 자유인이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ㅡ이것이 가장 큰 자유입니다. 자기 부인이 그 자유인의 풍도(風度)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 자신이 바로 나의 최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도 사탄도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몰락해 버린 예 중의 하나입니다. 양단간의 선택입니다. 극과 극의 대립 구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자유인이 되어 있습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에게만 종속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도 자유입니다. 왜냐면 사랑 관계에 있으므로 사랑은 절대 자유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스스로 종속하는 것이지 결코 강압에 의해 타의로 종속하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일방적이 아닌 쌍방 교차(또는 교류) 종속입니다. 그래서 머리이신 마지막 아담께서는 "나는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서 존재한다" 선언하셨습니다. 사랑은 이와 같이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진 자발적인 섬김, 주인 의식으로서의 섬김, 따라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내 스스로 좋아해서 나타내는 섬김, 이것이 자유인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희소식, 좋은 소식, 복된 반가운 소식)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함"(사 61:1)인 것입니다. 포로되어 구금된 자에게 자유를 주는 방법을 전하기 때문에 반가운 소식 즉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의 허구성에 대한 정문일침(頂門一鍼)

진화론의 허구성을 논함에 있어 논점을 다른 데에 두지 말고, 현재 인류가 애초의 초자연계 존재로서의 상태에서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계 육체로 전락, 퇴화(진화와는 반대 개념)되어 있는 사실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아무리 강조해보아야 핵심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겉으로만 맴돌 뿐입니다. 핵심은 인간(아담)이 현재 악령들이 변장, 가장하여 소위 "외계인"이라면서 온갖 요술을 벌이고 있는 바로 그 초능력의 초자연계 존재였음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이들도 전혀 그 방면에는 눈을 돌리지 못한 것이니, 성경을 인위적으로만 해석하고 계시를 통해 나타내시는 진리로서는(마 11:25-27) 믿지 않는 오만함 때문입니다. 대오각성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통하지) 않고서는 전반적으로 성경의 모든 사실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구원 받음에는 지장이 없었던 것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경고하신 대로 워낙 구원의 방법이 간단 명료했기에 사랑으로 순종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된 때문이나,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무식 무지가 방치될 수 없는 절박한 사정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면 악령 곧 이 세상 신(神)이 온갖 지식과 속임수를 동원하여 스스로 창조자로 가장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는 바로 그 시점이 오늘날이기 때문입니다.

진실 검증

구원 받기 위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강조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자기 기만입니다. ① 그러나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고난을 강조하고 이 세상 삶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나올 때에는 그 속에 거짓이 없고 오직 진리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까지는 줄곧 세상의 미움을 받고 핍박 받고 고난 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신이 마귀이니까 당연히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는 그러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② 이 말씀에 반하여, 이렇게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삶을 사랑하고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하려 하는 소위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이 말씀의 진실성을 거듭 다시 증명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위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면 이 세상 신이 이와 같이 가짜를 만들어 놓을 리가 없기 때문이요, 가짜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진짜가 있음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돌보지 않고 기피하고 무시하는 최대 약점이 오히려 최대 강점이 되어 있는 것이니, 여기서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집니다.




아래 글은 먼저 올렸던 글을 삭제하고 약간 보완하여 다시 올립니다.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은 반복 학습에 의한 자기 세뇌를 기대하기 때문인데, 바울 사도나 베드로 사도나 그 편지에 "너희가 이미 진리에 섰으나 다시 기억 나게 하려 한다" 하였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하기를 힘쓰겠다고 한 것도 이러한 효과를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오늘날까지 인간의 교리로 가르쳐 온(마 15:9) 것과의 차이가 너무 현저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이니까 당연히 세상 위에 군림해야 한다거나 하나님의 피조물 세상이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만사 형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 등이 모두 그런 "사람의 계명이요 교훈"들입니다.


축복 받아 이 세상에서 잘 살라ㅡ이것은 이 세상 신인 마귀나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고로 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속임수요 거짓임을 확신하면 틀림 없습니다. youtube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바 소위 ufo라고 하여 악령들이 인간을 속이며 벌이는 광경을 보십시오. 저들은 공중에 자유자재로 돌아다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신 그대로입니다. 날개가 없어도 무궁무진한 에너지로 종횡무진으로 쏘다니고도 피로할 줄 모릅니다. 초자연계 삶이 어떤 것인지 알려거든 이들의 그러한 놀음놀이를 보면 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초라합니까. 가히 생명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천사에게다 날개를 붙여주는 것은 성경에 무식한 인간들의 상상이요 그야말로 소설입니다. 악마가 그렇게 믿도록 조장한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믿지 마십시오. 날개 형상은 천사가 아닌 그들보다 먼저 창조된 즉 6일 창조에 속하지 않은 그 이전 창조의 영물들인 그룹(cherub)과 스랍(seraph)만이 지니고 있는 형태입니다. 물론 날기 위해서의 날개가 아닙니다. 6일 창조에서 에덴의 초자연적 바탕으로 창조된 천사들 즉 영물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거니와 온갖 무쌍한 조화를 부리며 공중이나 바다 밑이나 마음대로 휘젓고 다닙니다. 날개가 왜 필요하답니까. 그들에게는 인간처럼 병균의 침입도 당하지 않습니다. 사고를 당해 불구되는 일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유의 삶입니다.

앞서 보신 동영상에서 인간과 같은 형체 둘이서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에서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데 사람들의 비디오 조작인지 아니면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만약 실제로 악령들이 그런 식으로 변장해서 놀음놀이를 했다면 이것이야말로 악령들의 실존 및 인류에 대한 그들의 속임수의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장난도 아니고 그들의 허약한 구석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본보기인 까닭입니다. 천사는 악령들과 같은 본질의 영물이므로 다시 말해 거룩한 천사들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악한 쪽을 선택했기에 그 일부가 악령이 되어 있을 따름으로, 자연계 육체가 아닙니다.

천사가 인간에게 나타날 때에는 성경에서처럼 반드시 사람(자연계 육체)으로 나타나고 악령들도 얼마든지 그렇게 합니다. 날개는 동화 같은 속임수입니다. 얼마나 지금까지 악령들이 인생들을 속여 왔는지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사탄은 용(龍)이지 당연히 날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자와 같은 모양새로 천사를 나타낸다는 것은 그것이 악령에 의한 것이든 인간의 조작에 의해서든, 가소로운 속임수 또는 그런 속임수에 놀아나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무지라 할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모든 기이한 기적들도 천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행한 것입니다. 그 정도로 막강한 초능력이므로 우리로서는 한 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 나머지 현상들은 오늘날 비록 나쁜 의도 즉 인생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기는 하나 악령들이 소위 "외계인"이니, "외계 우주선"이니 하며 나타내는 것으로써 엿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각종 "기적"을 악령들은 전시할 작정으로 있으니 그 때 가서 놀라지 않도록 하십시오. 거짓까지 보태서 하나님으로 분장하여 나타내는 바 인간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니까 충분한 성경 지식으로 지금 단단히 완전무장하십시오.

그 때 가서 어리석게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와 같이 공중에서만 아니라 깊은 해양 속으로 안마당 드나들 듯이 하고 있는 저들 영물들입니다. 긴 설명 필요 없이 바로 이렇게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이렇지 못하고 내일 죽을지도 몰라, 오늘 이 시간 무슨 사고를 만나 불구가 될지 혹은 목숨 끊어질지도 몰라, 음식 잘못 먹어 당장 송장이 될지도 몰라 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어찌 사는 것입니까. 이다지도 약한 육체, 종이 곽만도 못하다 할 자연계 육체를 가지고 살려고 하다니요. 이렇게 안개 같고 바람 같고 이슬 같은 목숨이 신기하게도 오늘 내일 이렇게 연이어 가는 것은 모두 3운법칙에 의한 통제 덕분입니다. 왜냐면 그 죽는 시간이 오기까지는 그야말로 불사조처럼 지탱할 수 있도록 장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인생들은 눈이 감겨진 채 "살아도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으로 우왕좌왕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한 수명이 사람마다 달라 일률적인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 장치가 있기 때문에 이 종이 곽만도 못한 인간 육체가 잘도 버티어 나가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것입니다. 종이 곽만도 못하다는 것은 종이 곽은 그대로 바스러져도 그 형태가 그대로 종이로서 남지마는, 자연계에 속한 인간 육체의 형태는 숨이 끊어지는 즉시 변화가 일어나 흉한 몰골로 썩기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고로 이런 삶을 하나님이 살라고 하실 리 없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축복 받아 이 세상 잘 산다는 것은 마귀의 소리임을 다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잘 사는 흉내를 내고(왜 흉내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이 위의 설명대로 잘 살기는 고사하고 삶의 모양새 자체가 될 수 없으므로) 과시할 때에는 틀림없는 사이비임을 간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집회를 거대한 것으로 과시하고 호화판으로 장식하고 세상 군왕처럼 군림하는 자세를 조금이라도 내비칠 경우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양의 털의 옷을 입은 이리이니 즉각 퇴장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회에서 탈퇴하시기 바랍니다.

그 남으신 고난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데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 계시는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고난 받는 북한 교회입니다. 거기 계시는 증거는 100%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차한 육체의 삶을 위주로 감언이설을 쏟아내는 곳이 있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 불문곡직하고 나오십시오. 그런 곳에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를 모방하여 말을 할 수는 있으나 사람이 구원되는 것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 곧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는 그 증거에 있습니다. 이 증거는 주님의 뜻을 따라 그리고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 중에서 누리는 자유에 있습니다.

북한 교회는 겉으로는 부자유 그 자체이나 진정한 자유인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면 축복 받아 사업이 형통한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그 그림자적 형태로 말씀을 가르쳐야 했던 모세 율법 시대의 것을 마치 오늘날에도 통하는 것처럼 속이는 말들입니다. 지금은 "십일조"만 아니라 10의 10조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요 내 것이라고는 없으니 모두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왜냐, 그리스도 친히 자기의 전부를 나에게 선물로 영원히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냄으로써 사업이 형통한다면 그것은 그 정도라도 내는 데에 의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 하신 말씀이 응했기 때문이라 하겠지요.

그리스도 친히 나의 소유가 되어 계십니다. 그러면 말 다 한 것이지요. 그리스도와 나와의 주종 관계는 이렇게 주인 친히 그 본을 보이심으로써 종된 내가 따르게 하심이니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리 심신 허약자라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이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입니다. 만국 공용어입니다. 이 사랑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여기에 구원의 이치가 다 설명되는 까닭에 일자 무식자, 어린 아이라도 듣고 믿으면 구원되는 것입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가름하는 중요 척도 중의 하나가 되므로 이 점 다시 강조합니다. 




2016년 5월 30일 월요일

속아 산 세상, 속고 있는 세상 (5) ㅡ엄마 손잡고 깡충깡충 뛰놀며 거니노라









처음부터 인간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살도록 하셨다면 인생들을 "죽은 자"(마 8:22)라고 하실 리 없다. 흔히 말하는 대로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을 "죽음"이라 지칭하셨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정도로만 그칠 뿐이지 "영생하도록" 구원하신다 함도 역시 있을 수 없다. 왜냐면 인간의 범죄도, 인간을 애초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시지 않았기에 빚어졌다고 말할 여지가 충분해지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범죄를 계기로 인생들을 영생하게 하신다는 것도 조리가 맞지 않게 된다. 그런즉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즉 초자연계적 존재로 아담을 만드셨으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 몸이 됨으로써 '죽는 자' 혹은 "죽은 자"가 되었다고 하면 아주 간단하게 끝난다.

실상 성경의 관련 대목들이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도 한사코 자연계 몸이라는 편견과 선입관을 고집하는 통에 성경 이해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아담이 영생하는 즉 천사들과 같은 초자연계 몸이었다고 설명한 예가 없다. 오직 성경밖에는 없다. 성경에 꼭 "신령한 몸이었다"고 명시해야만 하는가. 다 같은 에덴낙원의 동식물인데 왜 식물만 신령하여, 선악을 알게 하고 심지어는 영생하게까지 하는 신령한 나무까지 있었겠는가. 그 때 당시 창조된 동물 역시 신령한(초자연계) 존재라는 것쯤이야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이라도 능히 판단하고도 남을 일이다. 바울이나 요한도 명백히 사탄을 "그 옛 뱀"이라 명시하였고 아담의 죽음이 오직 범죄 때문이었고 범죄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하지 않았는가.

죽지 않으면 영생하는 존재가 아닌가. 성경에 관한 한 사탄은 인생들을 아주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사탄이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라는 사실만 빼놓으면, 이상의 사실은 이상하고도 괴이한 일이 될 것이나, 사탄의 존재를 설정하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지사가 된다. 악령의 초능력으로 아무리 천재라도 멍청이 만들기는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구원 얻는 데에는 사랑의 순종이 핵심이므로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것을 과거에는 몰랐어도 되었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이 우선이므로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안된다. 다니엘의 예언(단 12:4)대로 "지식이 더하는" 때로서  모든 사람이 "제법 아는 체하는" 시대이기에, 최소한의 기본 지식은 정확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용(龍, dragon) 곧 사탄(히브리어로 "적대자"라는 뜻이므로 별명일 뿐 아담이 지어 준 원래의 이름은 아니며 원래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그가 인류의 원수가 되어 있음을 알면 족함)이 자기 실상을 감추기 위해 지금까지 인류를 속여 온 것은 자기의 목적 달성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아담)이 원래는 자기 손위(手上,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며 자기들보다 먼저 창조되어 6일 창조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어)여서 모든 영물들(거룩한 천사나 악령을 막론하고)을 다스리는 고귀한 신분이었음을 인간들이 앎으로써 자기에게 덕될 것은 없다. 영물들보다 먼저 초자연계 존재가 되어 있었던 아담이기 때문이다.

자연계 존재로는 맨 나중에 창조되어 창조 서열상 맨끝이나 초자연계 존재로서는 맨처음으로서 이 또한 조화(調和)이다. 단지 지식면에서, 자연계의 흙("dust")으로 애초 그 육체가 창조된 아담과, 처음부터 영계(초자연계)인 에덴의 땅("ground")을 소재로 하여 창조된 영물들과 동일할 수가 없다는 그 차이뿐이다. 지식 면에서는 후자가 월등하므로 후자의 보좌를 받는 인간(아담)이었던 것. 이는 서로 보완함으로써(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에서도 확인되듯) 어느 한 쪽도 치우침이 없어 오만해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배려였다. 이 역시 조화이다. 이런 보좌역으로서의 역할을 악용하여 "뱀" 곧 용은 인간을 속여 죽음에 빠뜨렸었다. 속일 때에도 감히 아담은 상대하지 못했다. 그 대신 아담과 한 몸을 이룬(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므로) 여자(당시에는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지어줄 수 없었고 단지 '남자'와 '여자'로서의 구별만으로 충분했음)에게 접근했던 것.

당시의 "선악과"가 오늘날의 "세상"(요일 2:16/창 3:6)이 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람이 자아중심의 자연계 육체의 성향 일변도로 나간 것이나,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 모든 인간이 자아중심이 되어버려 자아 중심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나, 본질면에서 같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요일 2:15) 이 자아 중심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함"(요 12:25)은 자아중심을 미워하는 뜻이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히 자아중심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그래서 사탄이 세상 부귀영화를 보여주면서 "내게 절하라"(눅 4:7) 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구원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므로(왜냐면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심이 확인되었으므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이유가 없어ㅡ롬 14:7-9/고후 5:15), 자아중심의 세상을 사랑하여 벗함으로써 자아중심에 물들게 되면, 자아중심이 아니었던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연계 육체의 자아중심으로 변질됨과 같은 상황이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인생들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어 그 옛날 아담 부부가 선악과를 먹도록 한 것과 같이 하려는 것이 오매 불망 사탄이 원하는 목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자연적으로 자아중심이 될 수밖에 없어ㅡ롬 8:5-8) 따라서 멸망은 필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구원된)에게는 시험의 형태로 다가오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미 꼼짝없이 채워진 족쇄가 이 세상 사랑이다.

인생들이 에덴낙원의 실상을 알게 되면 자기(사탄)와 맞먹으려 들 것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므로 영물들 위에 군림해 있던 아담의 권위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교회도 자기를 상대하게 될 것인즉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고 바로 이런 인식 전환의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은 뻔하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 이 세상에서도 부여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현재"(요일 3:2)의 신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마지막 아담과 하나됨의 권위도 절대적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기도 하니 천하 무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귀신들이 쫓겨 가고 두려워하는 이유도 그리스도의 이 권위를 각자 행사할 수 있음이 그 원인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기독교인)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던 그룹 중 하나였던 그 계명성(Lucifer, 새벽 별ㅡ성경은 그룹과 스랍 전체를 "새벽 별들"로 표현하고 있다-욥 38:7)인 양 사탄을 착각해 온 것이다. 사탄이 그렇게 속인 까닭이다. 그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고,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아담에게 도전하고 반역한 것이다. 그런즉 사탄은 지금까지 인생들을 속여 오기를 ①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였고,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② 에덴 낙원이 자연계였을 뿐이라고 기만해 왔다.

여기서 이 둘의 공통점은 초자연계와 그 세계에 속한 존재인 악령들을 부정함에 있다. 오직 이 자연계뿐이라고 속여 온 것이다. 대칭(상칭)성으로서 그 두 세계가 존재하게 되면 초자연계는 자연계와 더불어 처음부터 존재해 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게 되면, 영생도 천국도 그저 그런 인간이 상상해낸 결과물일 뿐이지 그 실체조차도 흐지부지 유야무야가 되어 버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영생, 천국이란 것이 있기나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고 여기게 만든다. 결국 앞서 설명한 대로 별 수 없이 세상 사랑으로 이어지도록 연결 고리가 정해지는 것은 필연.

지금까지 세상을 주름잡으며 판을 쳐 온 무신론, 진화론, 그리고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가 이렇게 자연계 일변도로 해서 뿌리 내려진 어이 없는 결과물들이다. 따라서 초능력, 초자연계에 속한 기적 같은 것은 ① 아예 부정해 버리거나, ② 아니면 아예 창조주 하나님과 결부된 것으로만 믿도록 조종해온 사탄이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조건 초능력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니, 인간의 사고방식이 그렇게 이 세상 신(神)에 의해 다듬어지고 통제되어 온 것이다. 악령들과 관계된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속임수는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대대적인 속임수를 쓸 때, 바로 지금 이 시대를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바로 이 적 그리스도의 등장 시기다(살후 2:3-12). 처음부터 사탄은 이 때를 위하여 과거부터 부단히 여러 모로 준비해 왔었다. 페루 나즈카 평원 위의 기하학적 도형이라든가, 기타 남아메리카 여러 곳에 오늘날의 소위 "외계인"들처럼 가장해서 과거에 나타나 각종 천문 지식을 퍼뜨린 사례라든가, 이 모든 것이 악령들의 그런 사전 계획의 일환이건만 세상 사람들은 이를 알 턱이 없다. 이상 두 가지(①, ②) 극단(極端)으로 이제까지 사탄에게 세뇌를 당해 왔으므로 악령들의 짓거리인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사탄이 처음부터 기획해놓은 책략대로 고스란히 빨려들어가고 있는 지금 실상이다.

그리고 "구원을 얻었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은 또 어떻게 속아 왔는가. 더 한심한 실태가 나타난다. 성경에서 밝히는 범죄의 본질은 자아중심이다. 단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그런 것만으로 범죄를 이해할 것이 아니니, 행복한 삶의 생명은 머리와 몸의 하나됨에서 오는 자기 부인(자기가 자신을 위하지 않는)에 있는데 이런 성경적인 정확한 분석은 외면하고 막연하게 자기 욕심만을 챙겨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뺏고 하는 등의 현상만을 염두에 두도록 사탄은 만든 것이다. 그 모든 뿌리가 자아중심인데도 이를 감추었고 그 반대인 생명과 의(義)의 뿌리가 자기 부인인데도 이를 무시하게 만든 것이다.

"육신의 일"(자연계 몸의 자아중심의 본능)과 "영의 일"(자기 부인)(롬 8:5)의 명확한 차이를 구별 없이 한데 얼버무리고 사탄은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소리를 설교 강단에서 아주 듣기 불가능할 정도로 거의 종적을 감추게 만들어 버렸다. 이는 당연히 세상 사랑과 맞물린다. 그런즉 아무리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 해도 그 말씀을 인간의 편견으로 곡해하려 들면 한정이 없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위해 사는 자아중심이 되어도 구원은 된다고 믿고 그것을 "은혜의 구원"으로 믿는 이상, 멸망은 필지이다. 성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어린 아이라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간명한 것이지만 사탄이 비틀어 놓은 대로 듣고 믿어 그대로 삼켜버리니, 옛 에덴낙원에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탄의 거짓말임에도 아담 부부가 쉽사리 넘어가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되므로 사탄은 아주 자신 만만하게 임해 왔던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무시한 것처럼 오늘날 "구원받았다"는 이들이 꼭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고 사는 자도 없다"(롬 14:7-9), 산 자 즉 구원 받은 자가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5)이라고 수 천 번을 강조해도 믿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나님께서도 이 경우 속수무책이시다. 완전히 손 놓으실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류를 식은 죽 먹기로 속이고 있지만 성경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려졌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라"(고후 4:3) 한 대로 되어지는 것뿐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하나님을 사랑하여(고전 8:3) 그 뜻에 순종하는(행 5:32) 이들에게만 한결같은 구원의 능력의 은혜가 임하시고 있는 것이며 세상의 그 무엇도 여기에 장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선택대로 되는 사항일 뿐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려고"(요 7:17) 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어 뜻을 행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휘둘리게 되어 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고후 4:4)이라 한 그대로다.

세상은 사막의 신기루다. 신기루는 마치 사람 사는 도시가 지척에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현상으로 거기에 속아 따라가다보면 더 깊은 사막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도시고 집이고 사람 사는 데고 아무 것도 없다. 바람 같고 메아리 같은 것뿐이다. 공허뿐이다. 세상이 그러하다. "오늘 밤 내가 너의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니 그러면 네가 준비해 둔 이 모든(세상의)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하심과 같다. 당장 오늘 밤이다. 내일도 아니다.

혹자는 "에덴낙원이 초자연계였다는 사실을 초대교회 이후 교회가 그렇게 몰랐을 리 있느냐" 하겠지만, 그러면 반문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 우리가 구원됨을 사도들이 가르치지 않아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대신 죽으심'을 통해 구원 받는다는 헛된 망상에 젖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보다 교부(敎父, 아버지 "부"자인데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지독하게도 하는 고집들이니, 인간을 "아버지, 스승, 지도자"라 부르지 말라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그리고 그리스도 친히 본격적으로 그 역할을 영원히 하시게 된 때문인데-마 23:8-10)들의 글만 열심히 쫓아다니며 뒤진 결과로 된 것이다.

교부들의 글에 바울 사도의 설명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통해 그 죽으심이 우리 죽음, 그 부활이 우리 부활이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명료하게 써놓았다면 그렇지 않았을까. 교부들이 그런 "대신 죽음"을 가르쳤다기보다 교회 중 절대 다수가 세상 삶을 사랑하여 자아중심이 되다보니 "하나님과 원수"(롬 8:7)가 되어 있음을 양심상 책망으로 잘 알기에 여기서 벗어나는 핑계와 변명으로 로마서 7장을 난 데 없이 바울 자신의 체험으로 둔갑시키고(왜냐면 구원 받지 못한 자기 실상과 같은 까닭에) 그래서 이를 합리화하려는 과정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갖다 붙인 것이다.

'대신 죽으심'이라면 상식에도 벗어나고(죄를 지은 당사자가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결자해지 차원에서) 논리적이지도 않은 것이니(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보응을 받는 것인데 죄의 형벌을 미리 받아놓은 것이 되니까 앞으로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아주 위험한 결론이 되어버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이런 상식과 논리를 뒤엎어도 되는 것이라면, 그럼 누가 논리적 판단과 상식을 따라 행동하려 하겠는가.

또 하나의 비논리는, "대신 죽음"은 그 대신 죽음의 혜택을 보는 자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야 "대신 죽었으니까"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지금 숨을 쉬고 있다고 산 것이 아니라 영생하는 자가 영생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있는 운명이니 죽은 자이지 산 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이다. 원래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초자연계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신 죽는다는 것은 성경에도 배치되는 인간의 망상으로 날조된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 멸망"인가? 그러면 대신 멸망하신 그리스도께서 왜 살아나셨는가. 그러면 멸망이라는 의미를 완전히 허물어뜨림이 된다. 죽음은 다시 살아나면 되지만 멸망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멸망은 마지막 심판 후의 최종적인 결정에만 쓰이는 말이다. 같은 차원에서, 대신 죽음은 그대로 영원히 대신 죽은 상태에 있어야 그 대신 죽음의 혜택을 누리는 자가 죽지 않는 것이지,  대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면 그와 동시에 그 대신 죽음의 덕을 보는 자는 죽음에 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무슨 연극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배우가 죽은 시늉을 하고 있다가 막이 내리면 다시 일어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께서 그런 연극을 하시는 분이라고 착각한다면 그렇게 속임수를 쓰시는 하나님을 무슨 수로 신뢰할 수 있는가.

대신 죽음이 대신 멸망이라면 나는 그로 인하여 여하한 일이 있어도 멸망할 일이 없다가 된다. 왜냐면 "나를 대신해 죽으심을 믿으면 구원"이니까. 그런 구원에 대한 '믿음'의 증거로서 교회에만 충성스럽게 나가면 된다고 착각하게 된다. 일상적인 생활이 죄 짓는 것인지 아닌지 그 여하를 묻지 않는다. 즉 자아중심이냐 자기 부인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비합리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로마서 7장의 율법 아래의 실상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실상으로 갖다 붙이는 억지 해석이 시작된 것이다(벧후 3:16).

죄는 크고 작음이 있을 수 없다. 용서되고 용서 안되고 하는 차이는 있어도(요일 5:16) 경중의 차이는 있을 수 없으니 한 뿌리이기 때문이다. 즉 자아중심이므로 아무리 작아도 이를 회개하지 않는 한 큰 죄, 즉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 지경에까지(즉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 반드시 이르게 되어 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므로(마 1:21) 여하한 죄도 짓지 말아야 즉 자아중심이 되지 말아야(롬 2:7-10) 다시 말해 오직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하는 것이(고후 5:15/롬 14:7-9) 구원 받은 증거다.

율법은 계명 곧 생명의 법칙이다. 자연 만물이 자연법칙을 따라 생존을 이어 가듯이 인격성을 지닌 영적 피조물은 그 생존의 필수 요건이 되는 것이 삶의 원리를 준수함이다. 즉 한 몸 체제에서의 머리와 몸 관계에서 오는 두 계명이니, 머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고(위하고) 그 지시를 따라 같은 지체를 이룬 내 이웃을 사랑하여 위함이다.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말씀하신 그대로다. 간단히 한 마디로 요약된 것이다. 모세 율법은 이를 그림자로 나타내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자기 역할을 해 왔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상징적인 것은 필요 없게 되고 이제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아래 있어 하나님의 영원한 계명을 따라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요 21:17) 이 물음으로 귀착되는 것이니 이 구심점에서 빗나가지 말 것이다.

한 몸의 원리에서는 머리도 실상은 나 자신이요 나 외의 다른 지체도 모두 나 자신일 수밖에 없다. 애초 하나로 존재했다가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갑', '을', '병' 3각 구도(tripod)로 되어 있는 3위1체의 원리에서 '병'을 말함이다. 하나에서 갈라져 나왔으니까 여전히 하나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음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이 생명의 계명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다가 유혹이 온다고 그 일편단심을 버릴 수 있는가. 그렇게 되면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만 될 뿐이다. 주변 환경과 사태가 순행이 아니라 역행할수록 더 힘써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이 그런 역행하는 시험 무대이다. 자기 부인은 약자, 소수로 취급 받고 자아중심이 득세하고 판을 치는 곳이기에 그러하다. 자아중심의 화신처럼 되어 있는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 되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

"남이 네게(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ㅡ"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마 7:12)라 하신 대로 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로서의 삶에 대한 의지(意志), 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모든 인륜 도덕의 요강(要綱)인 것이다. 택하심으로 구원된다는 것은 이 생명의 원리와는 상반된 것이다. 누구는 영생을 주시기로 미리 택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고 다른 이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므로 멸망한다는 것은 악마의 교리다. 이 "택하심"에는 반드시 미리 아심을 따르는 즉 각자의 선택 의지를 따라 좌우된다는 전제가 붙어야 가능한 것이다. 성경이 이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

그런 특권, 선민(選民) 의식으로는 절대로 구원 얻지 못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평균, 형평이다. 역할로는 귀한 지체가 있고 덜 중요한 지체가 있어도 혜택은 골고루 미쳐져야 하는 것.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셔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다"(고전 12:22-25) 함과 같다.

머리는 모든 지체와 상관한다. 다시 말해 모든 지체를 똑같이 대하지 차별해서 관계하지 않는다. 때문에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시고 영원 멸망으로 판결하시게 된다. 머리의 뜻대로 하지 않은 결과이니 즉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는"(마7:21) 것이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평균되고 평형을 유지할 정도로만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하고 가진 것으로 만족해하는"(딤전 6:8/히 13:5) 공동체 의식의 사람(당연히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심으로써)이 들어가는 천국이다.

그래서 지금 웃는 자, 이제 부유한 자 화가 있다 하셨다. 사람이 갓나 죽으면 그 인생만이 헐복해서 죽은 줄로 알거나 젊어 죽는 이를 그 사람만의 처지로 한정해서 인식하면 반()공동체 의식의 표본이 된다. 그런 죽음을 나 자신의 죽음으로 인식하는 것이 공동체 의식이요, 저주와 멸망의 대상이 되는 특권, 선민 의식이 아닌 것이다. 똑같은 인생으로 태어나 차이가 있을 수 없음이다. 하나님께서 차별하여 인간을 창조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도 그렇게 죽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뜻이 계시어 이렇게 사는 줄로 아는 것이 지혜다. 구원 얻게 하려 하심이요 구원 얻은 다음에는 사람들을 구원해내도록 하려 하심이다. 그 외에 아무 다른 뜻이 있으실 수가 없다(눅 9:25). 다시 말해 나는 특별한 복을 타고 났으므로 세상에서 얼마든지 장수하며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는 구원이 될 수가 없다(요일 2:15).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왜 내게 구원의 말씀을 전해주지 않았고 나 위해서 기도 좀 해주지 않았는지 당신에게 묻고 싶다" 하고 나중에 원망 들을 일을 아니하려는 차원에서도 복음(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복된 희소식) 전파는 필수 필연이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말씀 전파하기를 부끄러워하는-눅 9:26/계 21:8-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는 불가능하기 때문) 엄히 명하거니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1-2)함과 같다. 그리고 세상 삶의 사랑은 갖가지 면으로 살펴보아도 영원한 저주이다. 세상 삶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모든 요인은 악인을 멸망하도록 만들기 위한 함정의 구실밖에 하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악인'은 '죄인'과 달라 자기 죄를 끝까지 고집하고 회개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신다.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고전 1:26-29) 한 대로, 당신이 믿음 있는 것 즉 하나님 사랑할 것을 미리 보시고(아시고) 당신을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도리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가난하고 없는 자가 되게 하셨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럼에도 지혜 있는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 강한 자, 있는 자가 되려 할 것인가? 그래서 세상 사랑으로 나갈 것인가? 물론 부자마다 모두 택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라고 모두 택하신 것은 아니니 하나님께 받은 각자의 선물(恩賜)이 있고 다르기 때문이다(고전 7:7). 그러나 얼마든지 그런 것이 미리 택하심의 의미는 될 수 있는 일이다. 왜냐면 "그러한 이들 중에 부르심을 받은 자가 많기" 때문이다.

대신 죽음이 우리 구원의 이치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받을 리도 없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난 받는다면 구원이 아직도 미완성이라는 뜻이 되어버린다. 그리 되면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구원이 종료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의 책벌이 있을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도 성립 불가능이다. 우리의 고난 받음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함이니 아직도 남은 사람(또는 아직 태어나야 할 그래서 구원의 말씀을 듣고 구원 받아야 할)이 있어 구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고난은 그와 같이 "남은" 사람들을 위함이니, "대신 죽으심"이라면 그 '미리 받은 형벌'을 계속 적응시키면 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고난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구원의 이치가 한 몸으로 하나됨에 있어 그 구원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이 죄인으로서 받는 저주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함에 있는 것인즉 이 작업을 이제는 머리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몸된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으나 그 완성된 구원을 남은 사람들에게도 적용시키는 데에는 동일한 구원의 이치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로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친히 고난 받으심(그 몸된 교회의 고난 받음을 통해 나타나는)이 필수이니 어디까지나 동일한 기조(基調) 곧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함"(고전 12:26)이라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따름이다. 각 사람을 구원함은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의 각 부분"(:27)을 만듦에 있기 때문이다. 구원해야 할 상대와 하나되는 이치에서 의인(그리스도로 인한)으로서의 내가 그의 죄 값으로서의 저주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한 몸)됨을 인하여 머리께서 당하신 고난을 조금이나마 맛보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이기도 하다.

우리가 오늘날 초자연계의 존재를 역설하여 에덴낙원이 초자연계요 아담이 초자연계 몸(영적 육체)으로 있었던 사실을 강조함은, 멸망의 함정인 세상 사랑을 막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니 세상의 실상을 밝혀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초자연계 이야기를 끄집어 낼 이유가 없다 해도 좋다. 이를 거꾸로 이야기하면, 초대교회 당시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곧장 세상 사랑을 버리는 것을 의미함이어서 자기 부인이나 자아중심을 일부러 힘들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바울의 명확한 언급에서도 나타난다(롬 14:7-9/고후 5:14,15). 따라서 과거 에덴낙원이 어떻고 아담이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굳히 상기시켜 말할 필요성마저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해도 과히 틀일 말은 아니다.

아담이 그러했다고 우리도 당장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것도 아닌 만큼,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의 인생으로서는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었던 것. 이와 같은 중요 현안에 비하면 그런 사실(에덴낙원의 초자연계적 본질 등)이 덜 중요한 것으로 밀려나 자연적으로 교부들의 글에서도 강조되지 않다보니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악한 자(적 그리스도)의 기적(초자연계에 속한 존재의 초능력 과시)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각종 기적이 난무하기 시작하고 악령들의 실체가 비록 가장된 형태이기는 하나 밀착 근접해서 육박해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적(神的) 권위로 군림해 오니 이 때야말로 과거 그러한 초자연계 존재로서의 '뿌리 찾기'가 절실한 시기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전반적인 기독교계가 부패 타락하여 "배도(背道)"(살후 2:3)의 지경에 이르게 됨을에 이르러 시의적절한 오늘날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모두가 속아 온 세상이다. 창조주 하나님도 없는 듯이, 이 자연계가 이 세상의 전부인 듯이 지내 왔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서도 핵심은 놓쳐버린 채 수박 겉 핥기 식으로만 알아 와 사탄의 조종 아래 자기를 속여 온 것이다. 그러나 만만다행인 것은 항상 강조하는 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마 18:3) 이들은 구원 얻음에 일절 지장이 없었으니 만일 지장이 있을 정도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조처를 이미 적절히 취하셨을 것이다.

이 세상 신이 천하를 속였지만(계 12:9) 어린 아이 같은 이들은 오히려 손도 대지 못함이니 이것이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아버지의 뜻"(11:26)임이 분명해진 것. 그러나 지금은 때가 다르다. 몰라서는 안되고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무신론을 최대한 활용해 먹던 사탄이 이제는 유신론을 활용하게 될 만큼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외치는 소리는 사탄의 유신론이 인류의 귓전을 치기 전에 성경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적시에 깨닫고 구원에 이르라는 것이다. 사탄이 창조자 하나님을 들먹이게 될 즈음이면 이미 때는 늦다.

세계(세상)가 짝으로 되어 있을진대 그 양 세계는 성질이 전혀 다르다. 그 반대가 된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귀가 아프도록 반복해 들려줄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삶과 죽음, 임시 방편에 의한 시한부 삶과 죽음,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다. 지금 이 세상은 후자에 속하므로 전자가 본격적인 삶이라면 그 죽음도 본격적인 죽음의 고통이다. 따라서 전자는 생명의 세계이고 지금 이 세상은 죽음이다. 다시 말해 오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지금은 죽음의 고통이 정상이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 무리(無理)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이에게 아무 희망도 없다.

이 죽음의 세상에서 죽음의 질서대로 죽음의 고통과 고난을 받는 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자는 복이 있다.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로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 버린다 하신 그대로 될 것이다. 미워해야 영원토록 보존한다 하셨다. 고로 지금 이 자연계와 대칭되는 초자연계 세상이 존재함을 알았으니 이 사실을 중심으로 생활 의식을 180도로 바꾸시라. 하나님의 실존을 몰랐던 이들은 의당히 그에 맞게 바꾸고 하나님을 믿어 왔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인식부터 바꾸시라.  

나와 함께 하나되시어 죽음의 고난 받으신 후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이다. 우리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 부활하심으로 이미 완료되었으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말하고 그 고난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부과되어 있음을 밝힌다. 이 역시 이치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 이루어진 몸된 교회라는 데에 있다. 머리와 몸은 하나이므로 모든 것을 함께 함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나 부활하신 마지막 아담처럼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지 않고 여전히 자연계 몸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고로 세상의 구원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 몸된 교회의 고난 받음이 필수. 즉 그리스도의 고난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 사실을 마지막 아담께서는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말씀으로써도 확언하셨다. 세상 사람의 구원받음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는 계속 그런 '원인'으로 계셔야 하는 것. 원인 제공이 계속되어야 계속 그런 '결과' 탄생이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 한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 받음은 당연. 그러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고난 받음은 앞서 설명한 대로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받으심에 동참하여 함께 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고난 받으시므로 고난 받는 교회에 함께 하시고 고난을 기피하는 데에는 계시지 않는다.

과거에도 남처럼 형통하지 못해 고생하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고생에서 벗어나느냐 하면, 여전히 그 고생 그대로 하되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당하는 고생으로 180도 전환되는 의미가 엄청나다. 과거 믿기 전에 형통하던 사람은 그리스도께 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새 국면으로 돌입하되 죽은 자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산 자의 위치에 있으므로 지금까지 자기 몫에 태인 개인적 복이라 착각하던 세상의 위로 따위는 한사코 거부하는 것. 눈에 보이는 대로(자연계에 속한)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초자연계에 속한)으로써 영위되는 삶이므로. 오늘 180도로 삶이 달라졌으니까 어제와 오늘이 같을 리 없다. 가령 과거에는 전도하기를 꺼리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달라 입을 열어 말씀을 기꺼이 전파하는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 안에서 나란 존재는 '하나'가 아닌 언제나 '둘'

그러므로 이런 막강한 존재는 우주 천하에 또 없다. 그런데 또 이런 존재들이 무수히 많은데 이들 모두가 또한 나 자신을 형성하고 있으니 더군다나 머리되시는 마지막 아담을 나의 소유로 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충만한 의미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꼭 어떤 한 사람이 나와 함께 있을 때 나에게만 와 주어 함께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나와 함께 계심이니 이것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장차 영광의 몸으로 나타나실 때도 지금 성령으로 계실 때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의 의미이다. 사람은 원래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으니까. "신"이라고 하는 영물도 피조물로서 그런 제약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단지 초능력이 있어 공간을 초월하는 그 무엇은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피조물은 이런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경우 이를 "하나님(창조자)"이시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으니 우주와 만물이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를 가히 무엇이라 표현하랴. 필설로 형용 못한다ㅡ이 한 마디로 족하다. 

마지막 아담은 사람이시므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시기 때문에 마치 나와만 함께 하시고 함께 사시는 의미가 충분히 되고도 남으신다. 사실상 그러하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시니까 모든 사람과도 그와 같이 계시는 것. 그래서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되다"(요 16:7) 하셨다. 왜냐면 모든 제자 각 사람에게 똑같이 마치 한 사람처럼 계실 수가 있기 때문. 그래야 성령으로 오시어 위와 같은 의미로 계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의 요점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막연히 여러 사람인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으로만 그칠 일이 아니니, '한 사람'이 나와 함께 사시는 것으로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나에게만 함께 하시고 나와만 함께 사시는 그런 의미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둘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둘인 의미이니 이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 강조해도 좋다. 하늘에 계시는 것으로만 인식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심은 나와 같은 육체로 계시는 경우일 뿐이니 바로 그 육체로 세상에 나타나심을 가리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 하는 것이다. 그 때는 우리 각자의 육체도 영광스러운 초자연계 육체로 변환된다. 마지막 아담께서 어느 정도로 내게 임하여 함께 계시는 효험 또는 영향력이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내게 달린 것이니, 내가 어느 정도로 주님께 가까이 하느냐, 사랑하느냐, 순종하느냐 여기에 항상 비례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 나의 믿음과 사랑에 좌우되어 나타나시는 것이 마지막 아담의 능력임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시고 그 성령으로 나와 함께 계시고 사심이, 아담의 육체를 우리 각 사람이 타고나서(물려받아서) 인간의 육체로 존재하고 있는 이치와 똑같은 것으로 이해할 때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차이는 아담의 경우 그 육체이고 마지막 아담의 경우 그 성령이시라는 데에 있다. 곧 우리 각자 앞앞이 개별적인 선물(나의 소유)로서 성령께서 내게 계시니, 마치 나의 영혼(새 피조물로서의 '영혼'이시니 나 자신은 그 '육체'이고 성령께서는 그 '육체'의 '영혼'에 해당되심으로써 새로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으로서 계심과 똑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령"이라 표현될 때에는 대개 일반적으로 사람되신 아들을 가리키는 바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이시고 실체이신 아버지께 대하여 형상이시기 때문. 고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을 이상하게("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시느냐" 하고) 생각할 것이 없으니, 사람이신 아들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 그러나 하나님이시므로 "성령"으로 표현되시는 것이 당연하다. 또 아들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되어 계시므로 아들 단독으로 표현할 필요(각종 이치를 설명할 때)가 있을 때 외에는 이렇게 아버지와 둘이 하나로 계시고 움직이시는 모양새이신 "성령"으로 표현되시는 것이다.  

고로 "아들'이시라 "그리스도"시라고 단독으로 표현할 수가 실상 없는 것이다. 항상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고 움직이시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의 의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아버지의 우편에 함께 앉아 있는 것이나,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된다(계 3: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로 악령들을 명할 때 저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됨은 필연적이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라 할 때에는 반드시 나 자신과 연관시켜 인식해야 하며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 결부시켜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단독으로는 절대로 알지 않도록ㅡ이것이 올바른 성경 이해의 열쇠다.

또한 믿는 형제와 결부시켜 인식하는 것 역시 필수다. 그 믿는 형제나 나 자신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자기 부인"을 근거로 하여 말하는 것이니 "자기를 위해 죽거나 살지 않을"(롬 14:7-9/고후 5:15/빌 1:21) 때에 한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 무작정 "내 믿노라" 한다고 믿는 형제가 아닌 것. 과연 주님만을 위해 사느냐 아니면 자기를 위해 사느냐 하는 것은 평소 그 행실에서 대개 드러나는 법이므로 판별하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연약한 자"(롬 15:1)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연약하다"는 뜻은 이상 설명한 믿음의 기본 요건에서 미흡한 점을 가리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착각하지 말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기본에서는 동일하고 차이가 없으나 그 응용면에서 믿음이 있고 없고 강하고 약한 것으로 따지는 것뿐이다.

믿음이 강하든 약하든 간에 자기를 "믿는" 자로 일단 간주하는 이상에는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자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롬 14:7)는 단언이 통하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의 기본이기 때문이니 왜냐면 둘의 하나됨은 반드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하는 데에서만 성립되는 까닭이다. 남녀 둘이 한 몸이 되는 것 역시 이 둘이 하나됨의 법칙을 따르므로 자기 몸을 상대의 것(소유물)으로 인정하고 그대로 생활할 때에만 그 한 몸됨이 성립되는 것과 같다. 유사한 짓거리를 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런 유사한 짓은 "음란하다" 하여 성경은 역시 똑같은 단죄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둘이 하나됨, 하나로서의 둘은 영원 불변의 생명의 법칙으로 작동되는 까닭에 비록 당장에는 당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필연적으로 모두를 망치는 요소로 작용하므로 이 3위1체의 원리를 거스르는 그 어떤 형태든 생명에서는 제외된다. 자연법칙의 정밀함과 엄정함을 보라. 바늘 끝 하나도 들어갈 만한 빈 틈이 없이 철두철미하게 운영되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내가 나를 위한다고 자각하는 순간 즉시 돌이켜야 하는 것이지 회개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종국적인 파멸은 필연이다.

자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사실 바로 여기에 안주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관심사는 사실상 있을 수 없는 것. 왜냐면 더 이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요구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 개개인에게 대한 사랑으로 각자와 하나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니 그리고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영원히 계시니 만유에 충만하신 하나님이신즉 영이신 하나님을 만일 물질적인 최소 미립자로 분류할 수 있다면 우주 천체의 총 수효보다 많은 사람(예수 그리스도)으로 분산해 나타나실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과 동시에 물질에 속한 육체의 사람, 사람과 동시에 하나님이신 특성이 그러하시다. 그런즉 우리 개개인과 더불어 하나를 이루시어 마치 나와만 계시는 것처럼 계시고 함께 사시는 것은 이해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자식은 부모 자랑하기에 바쁘니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다. 그러면 부모의 자식 자랑은 어떠할까. 자식 스스로가 그렇게 부모가 자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우리 개개인을 자랑하실 수 있는지 여부는 순전히 우리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둘이 하나됨에서 나는 항상 주님(주인, 소유주)만을 위하므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오직 일하고 싸우는(일을 방해하는 악령들의 세력을 상대로) 것이므로 반드시 나와 함께 일하고 계시는 주님께 기도하지 않으면(일일이 여쭙고 움직이지 않고는) 안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생활 철칙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다 정도가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 거지가 사랑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한정이 없다. "이것만 해도 충분하다"는 그런 제한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는 중에 더 하고 충분한 중에 더 충분해지고 싶어 하여 만족을 모르고 끝을 모르는 것이 사랑이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을 끝까지 찾아 헤매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사랑의 능동성, 적극성, 주인 이식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상대를 위해서 그러하므로 아무리 욕구가 태산 같아도 그것이 절대로 죄가 되지 않는다. 전체를 위하는 공동체 의식에서 그러하므로 악이 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개인 차는 생긴다. 사랑의 온도 차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도 누구는 30배, 누구는 60배, 100배 등의 간격이 생김을 주님께서도 인정하셨다(막 4:8). 다 같이 100%를 지향해도 그런 결과가 된다. 

필자가 알기로는 그와 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매사 매건 주님께 일일이 여쭙고 행동에 옮긴 저명 인사들의 간증록에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중국의 석자직 목사, 65명 북한 교회의 그 79세 "감독"(행 20:28/빌 1:1, 성경의 명칭ㅡ"목사"라고 자신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신학교를 졸업한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Ann Preston, Helen Ewan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누구의 충고나 가르침 없이 그 스스로 정하여 그와 같이 생활했다는 점에서 남녀 모두 공통이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증거다.

이는 정상 상태에서 이상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 상태에서 정상 상태로 복귀하는 삶의 양식이다. 비정상으로 있으면서도 정상 상태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 비정상인 줄은 까마득하게 몰랐기 때문. 지금은 모든 것이 이전의 원 상태로 회복하는 단계에 있다(행 3:21). 이미 소개했지만, 일정한 사례비 없이 기도와 믿음만으로 생활한 석자직 목사가 평소 기도하여 여쭙고 모든 결정을 하다가 그 날만은 선교사가 거금을 주며 복음 사업과 생활에 보태 쓰라고 했을 때 감사하다 하고 기도 없이 그냥 챙겨 넣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에 석목사 자신은 몰랐으나 그 때 그가 상대하던 귀신 들린 청년은 단박에 알아채고 애당초 기가 죽어 있던 때와는 반대로 기고만장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좀 전에는 하늘처럼 높아 보이더니 이젠 내 발톱의 때만도 못해졌구나!". 석목사는 즉각 깨닫고 그 돈을 도로 돌려주고는 외딴 곳에 가 회개 기도를 한 후 즉시 돌아와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일화는 몇 번이고 강조해도 좋은 성령의 가르치심이다. 주님께서 근심 중에 석목사를 일시 떠나 계셨기 때문에(사실은 석목사가 주님을 떠난 것) 귀신은 이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매사 어떻게 할 것을 여쭙게 되면 그 기도에 대해 일일이 음성으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 후에 되어지는 일은 주님께서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길을 지도하실 것"을 믿는 터이므로 마음에 짚이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잠 3:6,7). 예의 79세의 북한 교회 "감독"의 경우에는 남한으로의 탈출 여부를 여쭙고 있을 때 마음 속에 강하게 울려오는 것(생각)이 곧 주님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내가 구하지도 않는데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법은 없으니 그렇게 되면 로봇에게나 통하는 기계적인 것이 되는 까닭이다. 내가 매사 매건 기도하는 것은 좌우지간 어떤 방향으로 나가든 오직 주님 뜻대로 행하겠다는 결연한 나의 순종의 결의 표명이므로 이것은 모든 일에 주님 친히 지시하심과 같은 의미가 된다.

주님께 기도로 여쭙지 않으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7) 것이 되어버린다. 나의 주인님께서 일일이 나에게 지시하시는 것이든 종된 내가 일일이 주인님께 "어찌할까요?" 여쭙는 것이든 본질은 같으므로 종인 내가 먼저 말씀 드림이 당연한 도리다.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속일 때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이후에야 성경이 "무리가...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수 9:14)고 준열히 책망하고 있음과 같다. 다윗은 항상 전쟁하러 나갈 때 반드시 하나님께 여쭙고 행동했다. 우리는 개개인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자들이므로 다윗이나 여호수아 못지 않게 '공적인 일'에 임해 있는 하나님의 '공직자'들이다.

우리의 사사로운 일은 하나도 없다. 여호수아나 다윗이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할 위치다. 하나님의 일을 번거롭다 하고 마지 못해 하거나 할 때 그것은 '구원 받은' 자의 사랑이 아니고 '구원 받기 위한' "율법 행위"밖에 더 되지 않는 것이니 아무리 예수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고 천만 번을 되뇌어도 구원의 "구"자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므로 마음에 아로새길 일이다. 우리는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빌 2:12) 동시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 함은 구원 받은 사랑의 기쁨, 평안이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서 그 원동력이 되는 까닭이다.

이 세상은 사는 데가 아니라 싸우고 일하는 때요 장소인 고로 이 세상에서만 이상과 같이 해야 지혜라는 뜻이 아니다. 천국에서의 영원 세월을 두고서도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인생들이 왜 남녀 짝을 지어 사는가. 둘이 한 몸이 되어 사는 것을 왜 지고(至高)의 행복처럼 생각하는가. 이와 마찬가지다. 주님과의 이런 둘이 하나됨의 삶이 행복한 삶의 최고 보장이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 세상 한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 무궁토록 변함 없는 삶의 양식(樣式)인 것.

자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 부처에게도 이런 말을 바치는 이들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를 증명하신 것.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이시니 나 역시 나 자신보다 그 분을 더 의식함이 당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 곧 우리 모든 각자에게 둘이 하나를 이루어 계시니 나 이상으로 내게 불가결한 존재이시다. 참으로 내가 그를 떠나 어디에 가 있으리요. 나를 떠난다고는 말할 수 있더라도(이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그를 떠나서는 나는 한 시도 살 수 없으리라.

지금까지 살아 왔다고들 자부해 왔지만 실상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음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인한 오늘 이 시점이다. 머리를 떠나서 어찌 몸 홀로 살 수 있다고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으리요.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 존재하는 피조물로서 아기가 그 엄마의 품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새끼가 그 어미의 젖을 떠나 살 수 없듯이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를 떠나서는 한 시도 살 수 없으니 모든 피조물은 어버이로서의 창조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인간도 알지 못했으나 모든 인간이 그 각자의 생애가 3운법칙에 의해 철저히 관장되어 온 것과 같다. 이제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으나 인간의 생애는 그와 같이 빈 틈 없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면서 맞물려 갔던 것이다. 인간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서 그 생애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야 알든 모르든 철통같이 만인간에게 적응되어 온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 및 영물들에게는 자유를 주신 것뿐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신 것이다. 사랑이 생명의 핵심이요 사랑은 자유 의지 곧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는 선택이 온전히 내 몫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죽음의 멸망 길에 들어설 수도 있는 자유까지 주셨다는 데에 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주심과 동시에 그렇게 조처하셨던 것이다. 능력을 제외하고는 바로 하나님의 자질 자체라 할 수 있다. 그 선택한 대로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다.

인간이든 영물이든 간에 악한 자들이 영원 멸망에 처해짐도 그런 자유 의지의 자유 선택의 일환이다. 그래서 악에 대한 형벌이라 하지만, 실제는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렇게 악(생명의 법칙대로 순응하지 않는 일체의 것)을 선택해도 그 예상하게 되어 있는 결과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오만방자한 판단,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무시와 멸시가 그렇게 몰고 간 때문이다. 실상인즉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존(한 생명체로서 삶을 향락할 수 있는)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데도 홀로 너끈하게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착각해 온 것이다.

악령이나 귀신이나 지금까지도 그런 착각 내지 오판 속에 지내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면 잘만 하면 자기네(사탄의) 계획이 성사되어 현재의 이 세상이 무한정 끌어갈 수도 있다고 계산하는 까닭이다. 비록 천년 왕국이 끝나갈 즈음 해서도 사탄은 이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마지막 전쟁에서 입증되고 있다(계 20:7).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면서 비로소 사탄은 자기의 계산이 틀렸다는 것을 최종 자인하게 됨과 동시에 마지막 심판을 거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변하면서 완전히 세계는 새 국면으로 전개된다. 자기에 대한 이러한 성경 기록을 사탄이 믿지 않는 이유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철두철미 공명정대 공평공정 원리원칙에 의해서만 되어지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그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만 하면 자기의 계획도 얼마든지 기회를 틈 타 성공하고 기사회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무저갱의 "아볼루온"(계 9:11), 아폴룐은 어떻게 될까. 처음 범죄한 그 그룹(cherub)으로 알고 있는데 영원한 불 못에 합류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언급이 생략되어 있으니 지금은 우리 역시 함구할 수밖에 없고 그 날에 가서야 모든 실상이 알아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신 사실을 지적했지만, 인간들 중에 소수만이 범죄에 이르렀다면 이 무저갱에서 비록 생명과는 정반대이긴 하나 어느 정도 상황이 완화된 상태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을 것이 아닌가 상상해보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한 것이 인간보다는 강하시고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는 지혜로우시다 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으로서 가타부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면 족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모든 원리원칙은 우리의 영역을 초월해 있기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서 올바르지 않으심이 없고 인간으로서 수긍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사탄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즉 하나님 임의로 즉 독재하시지 않고 원리원칙을 따라 모든 것을 하심을 아는 고로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수라고 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한탄이요 근심이지 우리 인간의 판단으로는 흠과 하자가 없다고 단정해도 무방한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이 근심하실 일이요 우리는 우리 일에나 관심을 두는 것이 옳다.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는 것이지 분수를 넘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늘날 필요한 것ㅡ중국의 송상절, 석자직, 영국의 죠지 뮬러, 헛슨 테일러, 미국의 찰즈 피니 등의 인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하심은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다" 하신 것과는 의미가 다르니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한다" 정도이면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즉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에는 내내 그런 "부끄러워하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왜냐면 어디서 어디까지만 그렇게 부끄러워할 수도 있는 세상이 된다는 말씀으로 그 시기를 명시하여 못박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성경이 진실 그대로이고 여기에 그 어떤 거짓이나 속임수가 있을 수 없다는 확증이 된다.

모든 거짓은 거짓말을 농하는 당자(개인이든 집단이든)의 유익(사사로운 이익)을 위함이며 그렇지 않은 예가 없기 때문이다. 속이는 '상대를 위해서 하는 거짓이나 속임'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와 같이 "부끄러워할" 수도 있을 정도의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조건이라면 또 이를 미리 경고하신 것이라면 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시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면 먼 미래의 일까지 내다보시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도록 정해놓으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활동이든지 그것이 진보 발전하여 나아지게 되는 것을 예상하지 끝까지 이 세상이 다하도록 "약하고" "소수이고" 세상 모든 민족(나라)으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고 탄압의 대상으로 남는다고 말하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고 계획하지도 않기 때문이다(마 10:22/24:9).

이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히 그 확증이 되지만, 이 외에도 성경은 여러 대목이 있어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고 있으니 세상의 모든 성경 학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 기록된 말씀에 대하여 100% 신뢰를 해도 좋다.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 것이다. 성경 말씀에 반대되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무조건 일언지하에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의 이름으로 증명한다고 호들갑을 떨더라도 성경적 사실은 요지부동이다. 그런 이른바 "과학적 증명"은 ①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이 세상 신(神-우리 육체인 인간은 '신'의 거짓말을 대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고 오직 계시된 진리의 하나님 말씀으로써만 이길 수 있다는 본질적 차이를 미리 확인해두는 것이 좋다) 악마의 속임수이든가 인간의 제한된 지식에 의한 착오이든가 둘 중 하나이든지 아니면 둘 모두일 것이니 이 점 분명히 마음에 각인해 두어야 하는 것.

인간이 자연계 육체에 속해 있는 한 이상 두 사실은 불가항력의 위력이 됨을 아는 것이 필수 지식이다. 진실로 이상 말씀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역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씀이다. 온 천하 인간을 속이는 악령(그들을 "신"[고후 4:4]이라고 하니까)으로부터서도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런즉 이 경고 말씀을 부디 명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 기울일 일이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우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그 생명의 말씀이,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 "음란하고 죄 많고 악한"(막 8:38/갈 1:4/눅 11:29/마 12:45) 세상에서는 부끄러워할 정도가 되어 있음을 당연 사실로서 당연히 받아들임이 좋다.

이 세상이 정상인들의 정상적인 세상이 아닌 것이다(전 9:3). 악해서도 정상이 아닌 즉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지만, 악령에게 휘둘려 그 속임수에 넘어가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하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그래서 이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는 한(요 6:45,65) 누구든지 아무라도 그리스도 앞으로 올 수 없으니 그들을 위한 쉼 없는 제사장의 중보(仲保, mediatorial) 기도가 그래서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제사장의 기도 없이는 구원의 역사가 불가능하고 이런 제사장의 기도는 제물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골 1:24)" 것이며 우리가 현재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곧 마지막 아담과 같은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지 않고 당분간 이 자연계 몸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유이다.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할 것이니...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사 53:12) 하심과 같다. 마지막 아담을 따라 우리 역시 그 동일한 행보(行步)와 과정을 거쳐야 함이니 곧 "(그리스도처럼)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우리 각자도)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눅 24:26)이 아닌가. 정당한 순서를 밟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니, 왜냐면 몸으로서 머리의 지시대로 행하기로 하고 회개하여 죄 용서 받고 성령 받음으로 우리가 구원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처음 맺은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내 스스로 약속을 파기하고 내 스스로 한번 받은 바 생명을 아담처럼 또는 악령들처럼 내다버리는 꼴이니 어찌 무사하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감"(마 7:21)이 반드시 이러한 고난의 관문을 통하여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니, 세상 사랑하여 하나님 뜻을 행할 기회와 시간을 다 헛되이 날려보내거나 고난 받음이 무서워 하나님 말씀을 부끄러워하여 주저주저하다가 "두려워하는"(timid, coward-계 21:8) 자로 낙인 찍혀 영원 멸망에 들어간다고 성경에 명시하지 않았는가.

찰즈 스펄전의 설교를 아무리 좋아하고 그런 것을 아무리 강단에서 외쳐보아도 그것이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를 주저하는 자로서 천국에 들어갈 자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까닭이다(계 21:8/딤후 4:1,2). 아무리 교회 교인들 앞에서는 비단 같은 설교를 해도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간절한 마음으로 전달하는 입이 열려지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이 우주 천하에 단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문제의 답을 주는 열쇠는 이렇게 평범한 데에,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다. 

칼빈, 루터와 같은 신학자 또는 찰즈 스펄전과 같은 설교가 오늘날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중국의 송상절(宋常節) 박사(미국 유학의 약학 박사이지만 그런 세상 명예와 안정된 교수로서의 직업을 팽개치고 짧은 40대의 한 목숨 14년 여생을 오로지 복음 전파에 바쳤던) 같은 사람이다. 석자직(席子直) 목사(자기도 한 때 헤어나지 못했던 아편 중독자들을 상대로 전도 활동에 뛰어들어 기도에 전념한 나머지 부부가 7년간이나 옷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는) 같은 사람이다. 미국의 찰즈 피니(Charles Finney) 목사(29세에 양양한 변호사 개업을 내던지고 온 세상 앞에 "사시장철 교회 종을 울려대며" 사망의 잠에 빠져 든 세상을 일깨우듯 천국 전파에 몸바쳐, 능력이 나갔다 싶으면 곧장 금식 기도에 들어가 성령의 능력으로 재충전된 다음 말씀을 전파하여 10여년간 청중을 휘어잡던) 같은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깔벵의 예정론에 물들어 있는 한국 장로교회는 이런 피니 같은 인물을 배척하고 있어 불행히도 그의 활동에 대해 소개된 바가 전무하다시피 되어 있고, 또 교파주의에 빠져 그 외는 거의 이단시하는 장감(長監) 모두, 죠지 뮬러가 Brethren(형제회) 소속이라 하여 무시함으로써 역시 그의 놀라운 기도 응답의 위업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 상태인 점에서 마찬가지다. 반드시 이런 인물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신학을 한답시고 도미 유학을 떠나는 풍조가 오늘날도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런 건실한 믿음의 본보기에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심방을 나갔더니 "먹고 사는 데에 바빠 성경 읽고 기도할 틈이 없다"고 하는 한 대장장이 교인의 말을 듣고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충분히 먹고 살 것을 주신다는 본을 보여주기 위해 몸소 순수한 기도 응답에 의한 삶으로 그 증거를 보여주리라 결심하고 부부 합의하에 그 후부터 교역자로서의 일절 사례비는 사양하고 기도 응답으로써만 목회 생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수많은 고아들 양육 사업을 벌여 1만 여명의 아이들을 훌륭히 성장시키니 사회 일각으로부터는 너무 지나치게 잘 먹이고 잘 입혀 고아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평까지 들었을 정도가 되고 기타 전도 사업(전도자들의 생활 후원, 문서 사업 등)에도 여력을 미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일을 순수하게 기도 응답으로만 부족함이 없이 꾸려 간 독일 태생의 영국인 죠지 뮬러(George Muller) 목사와 같은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뮬러가 나타낸 본에 자극을 받아 역시 믿음의 기도 응답으로 선교 활동을 하기로 결심, 거대한 중국 대륙을 겨냥하여 순수한 기도 응답으로 많은 인물과 막대한 자금을 움직인(800여명의 선교사, 전국 18개성에 걸쳐 300여 선교관, 500여 중국 전도인 양성) 저 유명한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창시자인 의사 출신의 영국인 헛슨 테일러(J. Hudson Taylor)와 같은 인물이 요구되는 것이다. 헛슨 테일러는 사도 바울 이후 최대의 선교사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런 믿음의 개척자, 선구자, 선각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구원 받아 영생하는 우리로서 이런 자연계 육체를 입고 있다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모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자연계 육체에 속한 생명은, 본격적인 다시 말해 삶의 낙을 누리는 생활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냐, 일하고 싸우는 것이니 안되면 단 몇이라도 구원해내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느끼는 일상 생활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워(골 1:24)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데에 모든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음이다(고후 6:1). 우리가 영생을 얻어 구원 받은 위치에 있어도 여전히 이런 죽음 상태의 육체 속에 남아 있는 이유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일하고자 함이요 이 일을 방해하는 악령들의 세력과 싸우기 위함, 오직 그것뿐이다. 고난 받으며 일하는 자, 목숨 버려 전쟁에 임한 자가 생의 향락을 누릴 수 있는가. 역시 상식 문제다. 때문에 악착같이(with all perseverance-엡 6:18) 기도에 힘쓰는 것이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1,2)는 명령 수행에 기쁨으로 온 몸을 바쳐 수고하는 것이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이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8,29) 즉 영생의 길로 인도하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참고 선을 행함"(롬 2:7-10)이요 영생에 들어감이니 그렇지 않고 자아중심으로 일관하면 멸망뿐이다(:8,9). 이 역시 상식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더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이르신 대로 머리 되신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자기 생명을 스스로 유지함이다. 스스로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담은 죽었고 일부 영물은 영원 멸망의 고통에 처해지게 되어 있는 운명을 자초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단지 영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복음(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복된 소식, 희소식) 아닌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전한 것이다. 영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면 앞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신으로 살 것이 아니라 당장 초자연계 몸의 막강한 초능력으로 변환하여 살아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면 곧장 "휴거"와 같은 교리처럼 세상을 떠나게 하면 된다. 이 또한 상식이다. 백 프로 죄 용서를 받아 구원 받았다면서 이런 범죄의 결과물로서의 자연계 몸으로 여전히 꾸물거리는 형태를 취하면 모순이 되는 것 역시 상식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고로 이런 모순이 모순이지 되지 않고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구원=삶>이어서는 안되고 <구원=하나님의 일함>이어야 하는 것이니, 즉 <하나님의 일을 함=행함>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일하지 않음=죽은 믿음, 헛것>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참고 선을 행함"이 "영생"(롬 2:7-10)이 되고 "천국에 들어감"(마 7:21)이 되는 고로,  바울 사도는 "그런즉 거하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살든지) 우리가 주(主,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주(주인, 소유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하였다.

오늘날 기독교의 "배도(背道)"(살후 2:3)는 이 점을 간과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핵심을 빼 버린 것이다.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뿐이다. 이럴 경우 아무리 믿어도 그 믿음이 영생의 구원으로 나타날 수가 없다. 바로 이상 여러 구절이 나타내는 의미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행위(또는 율법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이 아니다.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개념 파악을 처음부터 그르친 결과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것이다.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은 그리스도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 얻고자 하는 구원을 말함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구원이 될 수가 없다. 지금 세상 종교(기독교라는 이름의 천주교가 포함된)의 교리가 그렇다. 천주교가 이 범주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마리아 경모(敬慕)'를 일절 배제해야 하는데 그럴 기색이 전연 없으니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리스도가 없다. 그리스도+마리아는 그리스도일 수가 없는 것이니 영원히 '그리스도+마리아'일 뿐이다. 그리스도+율법행위도 그리스도가 아님에는 마찬가지다. 영원히 '그리스도+행위'로 남을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율법행위(모세 율법)를 주장하는 풍조가 교회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바울 사도의 편지는 당시의 그러한 사이비 주장을 척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강조하고 '그리스도도 믿고 모세 율법도 지키는 것'을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이라 지목하여 빈 껍데기일 뿐임을 역설한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마리아'와 같음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의 <그리스도를 믿음=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일함(하나님의 일함)>과는 차원부터 다른 것이다. 이를 혼동하기 때문에 영생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자아중심에서는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부인"의 부인으로 일관되게 흘러 가 진리에 역행한 것이다.

따라서 거두는 것은 바람이요 안개요 결과론적으로 각종 이단과 사이비의 온상만 되었다. 구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백한 무신론 또는 이교(異敎) 신앙도 아닌 어정쩡한 토양이라 각종 이단이라는 무성한 잡초만 우거져 번성하는 토대만 되어진 것이다. 확실한 성경 해석으로 자기 정체를 밝히지 못함으로 인하여 교인들을 올바른 말씀 이해로 완전 무장(武裝)을 시켜 놓지 못하니까 사이비 이단들이 생겨날 때마다 거기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이 없어 많은 교인들이 그런 이단 사상에 휩쓸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

구원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한 몸됨의 체제 속에 들어감으로 되는 것인즉 아버지(아들과 하나되어 계시는)의 뜻을 행하지 않고는 아담의 범죄와 죽음을 답습하는 것뿐이다. 몸(의 각 지체의 각 부분)이 머리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자기 생명을 무한대로 확충, 확장하는 것이 영생이므로 그 외로는 생명을 누리게 되는 다른 방법 방도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자연계의 일반 동식물의 생명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를 향유하는 인간이나 영물 등 영적 존재는 스스로 살아가는 자주 독립성이 생명의 핵심이니 왜냐면 사랑 없이는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이 사랑의 핵심이 바로 자유 결정의 자유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아무도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됨, 하나된 둘로서의 관계가 사랑이다.

하나됨이 사랑이니 이 하나됨은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반드시 처음 것이 나중 것을 파생시킴으로 말미암아 모자 관계 즉 인과, 주종, 대소, 선후 관계를 형성함이 필수이므로 머리와 몸의 관계에 있고, 이 사실을 적시하고 있는 3위1체의 원리가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고전 11:3)이심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머리로서의 마지막 아담 즉 그리스도이시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고 하여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이것이 자기 부인)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10:33)고 그 본받음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바울 사도는 설명한 것이다. 즉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사람들의 구원이다. 본디부터 누리도록 되어 있던 영생에로의 복귀이니 곧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삶을 즐기셨던가? 우리도 그 본을 따름이 마땅한 것이다. 스승(먼저 믿어 그 믿음으로써 남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사람)으로서 제자(그 가르침을 받아 믿게 된}들에게 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본이 이와 같이 자기 부인을 통한 인생들 구원이니 그 이상으로 우리가 괘념할 일이 없다. 이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고 손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자는 마땅히 그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함이니 그렇게 못하면 인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앞에서 모순이란 말을 했지만 모순으로만 그치지 않고 일을 완전히 망쳐놓게 된다. 그와 같이 고난 중에 일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되겠는가. 또 믿자마자 생명의 영광 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악인들 역시 하나도 예외없이 따라 붙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말하기를 악인들이 믿게 되면 좀 좋은가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도 모르고 둘도 모르는 소리다. 억지로 구원시켜 놓으면 다시 말해 인간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동적으로 다 구원받게 되면 세상은 또 다시 에덴낙원의 비극이 되풀이되고 그러면 세상은 다시 이 모양으로 굴러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세상은 단 한 번 이 세상만으로 끝나야 하는 것. 고로 악인들이 영생에 들어가는 방법은 여늬 사람과 똑같이 회개함에 있다. 때문에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세상에 오셨다 하신 것이다. 회개를 하는 것은 죄인이요 그렇지 않으면 악인으로 남는 것. 

불이 났으면 당연히 불이야 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요, 홍수나 쯔나미가 밀려 오면 당연히 그 절박한 위험을 이웃에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위험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이 위험을 먼저 발견한 사람의 당연한 책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람 살리기 위한, 영원 멸망을 경고하여 알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임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인 것이다. 그래서 상식이라 하는 것. 그러므로 오늘날 거대 집단화되어 있고 문저성시를 이루고 있는 사이비 이단들의 특징은 이 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공통점을 이룬다. 

고로 그들이 내거는 주장(그들이 "성경 해석"이라고 내세우면서 표방하는 교리)들을 알아 보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시간 낭비일뿐더러 여차하면 거기 말려들게 되는 경우 진흙탕 속에서 꼼짝도 못하게 된다. 일관된 그들의 공통점을 간파하면 되는 것이니 즉 그들의 특징은 이 세상 다시 말해 자연계 삶을 위주하는 개인 또는 집단의 풍요함에 있는 것이다. 그런 사이비 교리를 주창하는 그들의 삶을 보라,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해" 하는(딤전 6:8/히 13:5) 삶인가? 아니다, 평균 이상으로, 세상으로 말하면 소위 "유복한 삶"을 누리는 그들이다. 다시 말해 종교를 빙자해서 치부(致富)하고 있다.

그들은 "돈이 좋기는 좋다" 하고 공공연히 말하는 정도다. 오늘날처럼 악령들이 음풍(淫風)을 불어넣는 시대에서는 이런 세상 사랑은 필연적으로 성적 문란으로 나타난다. "그림자"적인 구약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밝히신 그리스도("실체"가 되시는)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1부1처 외에는 용납되지 않는다.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창기와 관계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창기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고전 6:16).

따라서 그 창기 외에 다른 여자와 관계하면 회개하지 않는 한(영원히 자아중심을 버리고 자기 부인으로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멸망에 이르는 범죄가 될 수밖에 없다.를 보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그리스도의 시대는 창세기 시대 초나 노아 홍수 직후 시대처럼 사람이 짝을 지어 살라고 축복하는 시대가 아니고,  그렇게 처음부터 말씀하신 하나님 친히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들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고 선언하신 세대가 되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살라는 것이다. "나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전 7:7,40)고 한 바울 사도의 교회 위한 충정의 권고만이 통하는 시대가 되어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고 집단적인 풍요라는 것은, 거대한 교회당 건물을 짓고 소위 성전(하나님의 집)이라 하면서 자랑하는 행티와 같은 것을 말한다.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철부지 생각을 하는 것이다. "Once saved, always saved"ㅡ육신의 생각을 따라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그들이 말하는 바 소위 "믿은" 다음에는 기도도 필요 없고 회개도 필요 없다 함으로써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취사선택하여 멸망에 이르고 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고후 7:9-11) 한 바울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완전 폐기하기로는 여타 거의 전부의 오늘날 개신교 교리와 같은 것이니 50보 100보 차이로서, 다만 이들 사이비는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벗어나 백주 대낮에 까놓고 행동하여 양심마저도 버렸다는 데에 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새삼스럽게 입에 담을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성경에 일용할 양식 즉 매일 그 날 먹을 양식을 구하라 하신 것이니(마 6:11) 왜냐면 원천적으로 내일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선상에 겨우 걸쳐 있어 간들거리는 목숨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一息間, a sigh)에 다하였습니다"(시 90:9) 함과 같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라 하였고,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내일이 오면, 내일이란 것이 다시 연속되어지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마 6:34)하심과 같다.

우리의 이와 같은 자연계 목숨이 하나님의 애초 창조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그런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분노-시 7:11)임을 여기서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롬 5:2). 이런 찰나같은 목숨이나 마치 영원히 쇠해지지 않는 것처럼 착각되는 것은 오직 악한 자들을 걸러내기 위한 목적 외에는 없는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건만,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은 인식 착란 속에 인생들이 빠져 있는 것은 확실히 비극인 것이다. 만약 사람 목숨이 한 순간에 또는 일정 한계를 따라 금시금방 죽어 나간다면 악인을 포함한 모든 인생이 이런 삶을 버리고 한사코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예외없이 달려들 것이 아닌가.

바로 그래서 "악인을 걸러내는 함정, 덫, 올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가는 줄 모르고 삶의 낙에 빠져 지내다가 구원 받지 못하도록 하려 하심이다. 회개하는 죄인을 원하시지 악인은 원하시지 않는다. 악인을 구원하시면 사탄 등 악령들도 구원 받아야 하는 것. 악인이 구원 받으면 아담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되고 악령들의 멸망이 형평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인생들이 악인을 포함해 모두가 구원 얻게 되면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도 모두 그 영원한 멸망의 운명이 철회되어야 하고 에덴낙원의 비극은 영구적으로 되풀이되게 마련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시종일관, 일사불란하여 처음과 나중이 일치하는 원리원칙대로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서, 때문에 구원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비한 것이며(3위1체의 원리를 따른 사랑과 삶의 동시성과 양면성에서) 그 외의 사람들은 제외될 수밖에 없다. 오직 회개하여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머리를 위할 줄 알고 머리의 지시를 받아 이웃 즉 함께 지체된 이들들 위할 줄 알아야(이것이 "사랑"이다) 행복한 삶에 들어갈 것이 아닌가.

2016년 5월 29일 일요일

속아 산 세상, 속고 있는 세상 인생들 (4)



오늘날 성경과 어긋나는 모든 기이한 현상, 초능력, 별의 별 것들이 다 나타나도 한 마디로 악령들의 짓거리로 치부해버리면 아주 간단하다. 마음 편하고 신경 쓰거나 휘둘릴 이유가 없다. 정보 전달 매체가 발달하여(이는 이 마지막 때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한 정지 작업) 악령들이 벌이는 갖가지 초능력이 "youtube" 등 각종 동영상(물론 사리 분별력 없는 하릴없는 인생들에 의한 사진/동영상 조작도 숱하지만)을 통해 순식간에 세상에 유포되는 시대다. 적 그리스도가 자기 선전을 할 수 있는 최대의 발판이 이와 같이 이미 닦아져 있는 것. 그런즉 모든 요란스러운 것들이 기승을 부림은 인생들의 넋을 빼놓으려는 악령들의 획책이라 단정, 일소에 부치고 오직 우리는 그런 모든 속임수의 혼란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해내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일 일이다.

영물들이 온갖 초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것이나 우리에게는 시끄러운 소음으로 밖에 인식될 것이 없다. 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은 신적(神的) 권위로 착각,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의 경이 그 자체로 비쳐지겠지만. 따라서 우리는 오직 그것이 악령의 소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성경으로 지적해주고 우리의 생명이신 마지막 아담으로써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는 유일한 사람 사는 길만 전달하기 위해 노심초사 기도하여 인도하심을 받은 대로 말씀을 전달할 일이다. 그런 악령의 초능력이 나타나는 비디오의 예를 하나 들면, "elf"(꼬마 요정 또는 요정ㅡfairy, goblin 등)라는 것이 있어 서양 동화에 가끔 나오는데 옛적부터 그런 것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 오늘날 확인됨을 알 수 있다.

아래 비디오에서, elf가 두 번 나타나는 것(1차 나타날 때는 반신, 2차로 나타날 때는 그보다 더 약하게)을 볼 수 있는데, 필자가 왜 이 비디오를 조작이 아닌 실제 상황으로 보는가 하면, 2차로 나타나는 직후 번쩍 하는 섬광(약하기는 하지만)을 순식간에 내비치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섬광은 인간의 조작일 수가 없다. 조작하는 자가 그런 것을 삽입해 넣을 정도로 악령들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또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사안이 워낙 보통의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사악한 악령(귀신이 아닌)과 관련된 일이므로 이런 영들은 이런 섬광 즉 번쩍 하는 빛과 대개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귀신이 요술이 아니고 악령의 변신술에 해당된다. 

바로 아래의 동영상에 나타나고 있다. elf와 마찬가지로 merman(남자), mermaid(여)라는 것도 옛부터 인어(人魚)라 하여 나타난 모양이나(오늘에 와서는 동영상을 통해 더 극성을 부리는 듯) 모두 인생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악령들의 짓거리인즉 일소에 부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악령들은 그런 인체-동물(물고기) 로봇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나타내는 각종 기적과 동일한 초능력이니(같은 영물들로서)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악령"이라는 한 카테고리로 묶어 뚤뚤 말아 내동댕이쳐 버리면 간단히 끝난다. 인간도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는 단계인데 악령이야 더욱 정교한 것을 만들고도 남는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Tk5x6CSOIaM

https://www.youtube.com/watch?v=4edinafjGQo

인간의 죽음을 희석시키려는 악령들의 음모요 흉계 중에 인간 형태의 소위 "외계인"의 사체(死體)를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나타내려는 꿍꿍이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보다 월등한 능력의 그러한 존재들도 죽는 판인데 인간의 죽음이라고 해서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냐 하는 따위다. 즉 범죄로 인간 사망이 왔다는 성경적 사실에 대한 공격이다. 이는 인체 로봇이지 인간이 아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아 태어나는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임을 명심할 일이다. 인체 로봇은 영혼이 없는 자연계 짐승과 같은 단지 육체일 뿐이니 현혹되지 말 것이다. 영물을 "신"(고후 4:4)이라고 했듯이 창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초능력이 가능하다고 처음부터 인정하고 일괄 치부해버리면 간단한 일이다. 각종 괴이 현상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

초능력이라고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자연계와 초자연계라는 양 세계를 만드셨고 각 세계에 소속된 피조물을 만드셨음을 알아야 하며, 초자연계 소속의 피조물은 자연계에 속한 우리가 보기에는  초능력의 일을 식은 죽 먹듯이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 과거 구약시대에 나타내어진 각종 기적도 거룩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뜻을 좇아 행한 것임과,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허락 아래(살후 2:11,12) 자행되고 있고 장차 더욱 그러할 악령들의 모든 초능력이 과거 천사들이 행한 것 이상으로 나타나지더라도(왜냐면 거짓 것이 포함되므로, 거짓말이 당장에는 드러나지 않고 얼마든 부풀어지는 것처럼 거짓 기적 역시 그러하므로) 결단코 놀랄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도 당장이라도 그런 기적이 나타나면 거기 완전히 넘어갈 이들이 많을 것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는지 아닌지 알게 된다고 확언해주신 것처럼(요 7:17),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살전 4:1/엡 5:10/고전 7:32) 마음이 없는 데에서 이런 모든 혼동스러움은 기인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이 없으므로, 바울이 충성된 종으로서 교회를 위해 절절한 심정으로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전 7:40)는 충고를 받들어 동일한 충정을 설교 교단에서 피력하는 일도 없고 스스로 마음에 두는 자도 없는 오늘의 현실이니, 바로 이 모든 사실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사랑이 없는)은 이제부터는 가차없이 도태당하게 마련인즉 크게 각성할 일이다. 물론 성경은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또 결혼하지 않는다고 사랑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남녀 불문하고 "나의 동정(virginity)을 내 스스로 지킬 수 있는가" 여부는 자문자답해보아야 옳고 또 지킬 수 있으면 지키도록 피차간 격려하는 것이 바람직한데도 이런 것이 지금까지 사문화(死文化)되어 온 것이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없이 무조건 인간은 결혼해야만 한다는 한 가지 관념 외에는 없었으니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32)는 마음의 실종이 문제임을 지금 지적하는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임박한 환난"(:26)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사랑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고 생명은 사랑이 핵심이므로(둘이 하나됨 즉 한 몸됨에서 최대의 행복이 보장되어) 사랑하지 않는 자 즉 자아중심을 회개하여 버리지 않는 한 생명 아닌 멸망이 영원히 자기 몫에 태일 수밖에 없는 것. 주님 사랑이 아닌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모순되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 사랑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영생 및 행복과는 격리)의 상태에 동참하시어 그래서 하나됨을 통해 나를 다시 살리시려(행복하게 영원히 살도록)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것이 아닌가. 그 이상으로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그러면 되었지 그 이상으로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무반응인가. "너만 날 사랑해라, 나는 사랑 않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마다 않겠지만, 나는 너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 한다면 그런 파렴치가 어디 있는가.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나가고 있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까지. 상식 차원에서 이해할 일이건만 이 상식을 무시한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만 받겠단다. 머리만 사랑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몸(머리와 몸)의 이치에서 이 사랑 없음은 반드시 몸의 다른 지체와도 연관된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가. 에덴낙원에서의 비극이 재연되는 것이다. 이것까지도 상식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단순 명료한 것이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그리고 무식해도 다 이해할 수 있고 "말씀으로", "믿음으로"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이해 못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 사랑을 거부할 따름이다. 자아중심이기 때문. 네 혼자만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자아중심의 한정 없는 욕심이다.

욕심이 자아중심인 것이다. 자기가 머리요 몸이요 우주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창조자라는 뜻이다. 이런 황당한 사고방식으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가.  스스로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 때문이다. 나를 비우고 버림으로 자기 부인을 하면 모두가 다 함께 행복하게 사는데도 이를 무시하는 고집이요 교만 때문이다. 사탄은 시험하는 자가 아무도 없어도 그리 된 것과 마찬가지다. 고로 시험해서 내가 넘어가는 것이라기보다 내 스스로 그런 마음이 되어 그 시험에 동조하는 것도 동시에 작용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도 진리를 알기 위해서도 읽지만(믿음에 아직 들어오지 못한 경우) 성경을 사랑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뜻을 알고 행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다. 그렇게 읽으면 지금까지 알지 못한 것을 가르쳐주시고 인도해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함도 말씀 사랑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성경과 친숙하지 않은 탓이다. 세상 사랑,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만 가득한 것이다. 범을 피하려다가 만나는 것이 곰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생명 곧 사람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 가도 죽음, 저기 가도 죽음, 만나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단지 생명으로 착각하는 것뿐이다. 살고자 하여 피하여 가도 거기 버티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 사탄이요 저기 가도 버티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신인 마귀뿐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신", "임금"(성경에서 명시하는 대로)이 마귀라는 의미다.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그들을 호령하고 명령할 수 있다. 이렇게 사탄을 질타할(마 16:23/4:10) 수 있는 위치는 사탄의 영역인 이 세상 부귀 권세의 자리가(눅 4:5-7) 아니다. 십자가의 남은 고난 중에 계신(그 몸된 교회를 통해) 마지막 아담의 위치에서다.

이 차이를 혼동하고 구별하지 못하는 이 너무나 많다. 왜냐면 하나님 편에 서야 그들을 제압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인생들과 함께 하나되심으로써 고난 중에 계시기 때문이다. 머리되시는 하나님이 그러하시니 그 몸된 모든 피조물이 당연히 그러하다(롬 8:22). 거룩한 천사들도 악령들도 모두 그러하다. 오직 눈이 가려진 인생들만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실상에 대한 무지로 인해 고통을 회피하려는 것뿐이다. 회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라 피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니,  목적이 그것이므로 온갖 죄를 지으면서까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것이다.

믿는다고 하는 이들 거의 대부분이 이 살고자 함, 세상 사랑에 마음이 가 있다. 로마 7장과 대조적인 고전 7장을 보라. 물건을 매입해도 매입하지 않은 것같이 세상 물건을 써도 다 쓰지 못하는 것같이 아내/남편이 있어도 없는 것같이 하는 데에서는 세상을 하나의 실체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대하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실체는 다음 차례로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지금은 아니다.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도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도 지금은 아니다. 맛만 보는 것뿐이다. 본격적으로 그 실체를 생명이면 생명, 죽음이면 죽음을 있는 그대로 먹고 마시는 때가 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가 가르치는 a(갑), b(을) 양자(兩者)의 도치성(倒置性)이다. 상반되는 성질끼리의 하나로서의 조화 통일이다. 

이와 같이 a(甲)만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b(乙)로 뒤바꿔지는 것이 c(丙)이다. 즉 하나됨이니 이런 하나됨이 없으면 '이 세상' 다음에 '오는 세상'이 올 리가 없다. 왜냐면 하나로서의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처음에는 생명이었고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처음에는 a 곧 영생뿐이었으나 죽음이 중간에 생긴(범죄로 인해) 것이니 이것이 b이다. 그래서 a가 있으니 b가 있고 b가 있으니 a가 있게 됨으로 인하여 양면 세계로 영원히 대립되는 것(c)이다. 곧 3위1체 원리의 인과율이다. 불교는 인과율로써 환생, 윤회를 설명하려 하나, 현세 즉 일체의 만물 만상이 결과인데도 그 원인을 부정하니 처음부터 첫 단추 잘못 끼운 것임이 드러나고 따라서 거짓이요 이 거짓의 배후가 사탄의 속임수임을 오늘날 만천하에 드러나지고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가 DPA pix 등 악령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이유는 악령들과 그들의 초능력을 기정사실화하고 추호도 동요하지 말라는 데에 있다.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 온갖 해답이 있는 줄 모르고 기문(奇聞)괴담(怪談)에 현혹되고 있는 것이다. 초자연계 존재들을 다스리는 초자연계 존재였던 인간(아담)이 범죄의 결과로서 서열이 거꾸로 되어 악령들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나와 이웃하는 것은 인간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들 곧 악령들과 귀신(네피림의 죽은 넋)들이니 이들과 더불어 몸을 맞대다시피 하여 이 짧은 세월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자유인으로서가 아닌 일방적 노예로서의 종살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악령들처럼 이 세상에 나돌아다니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만 "오르락내리락"(요 1:51) 분주히 전광석화로(번개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래 비디오에 보면 천사라고 하면서 둘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와 창밖 평평한 지붕 위를 그 중 하나가 거닐고 있는데 완전히 나체의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긴 나팔 같은 것을 입에 물었는지 오른손에 들었는지 잠시 허공에 서성이는 형상이다. 그러다가 몇 초만에 함께 사라지는데 사람의 조작으로 이런 현상을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oFUHXnEmQ

인생은 다음 둘 중 하나로서 ①악령들과는 피 터지게 싸워야(히 12:4) 하는 것이며 ②아니라면 그 장중에 완전히 사로잡혀 꼼짝없이 오갈 데 없이 그들의 의중에 놀아나는 한낱 꼭두각시임을 통절히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있어도 절대로 '자유'는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과 마지막 아담을 믿고 안믿을 자유는 있으나 마지막 아담 안에 있지 않는 한에는 그 어떤 자유도 존재하지 않음을 뼈저리게 실감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 인간들 중에는 네피림(악령들이 퍼뜨린 인간 별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변장한 악령들도 무수히 섞여 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이들의 특징은 인간으로 변신하여 나돌아다니다가도 어느 순간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는 데에 있다. 물론 동물로도 변신하여 사람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모든 일에 능수 능란하니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들의 수중에 인간이 놀아난다는 말이 가능하랴. 이를 제압하는 것은 오직 마지막 아담(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밖에 없으니 이를 매순간 실감하는 다시 말해 "성령 충만"(엡 5:18), 말씀 충만한 그리스도 사람의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처럼 성령(마지막 아담) 충만한 감독(장로), 집사, 성인(聖人, saints)들이 되어야 마땅하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고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을 때의 "성령"은 물론 아버지의 영이시고 그리스도께서 "성령 충만하셨다"는 표현 역시 아버지의 영을 가리킴인 것. 그리스도의 영께서도 물론 "성령"으로 호칭되시나 이런 경우에는 아들과 함께 하나로 계시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것).

"내가 네 행위를 알거니와 네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칠 것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네게 충고하니와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을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계 3:15-22).

이것 아니면 저것이요 저것 아니면 이것이지 어중간한 어정쩡한 것은 이제는 용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반드시 마귀에게 사로잡힐 것이요 그렇지 않으려거든 성령 충만할 것이다. 그리스도 충만은 그리스도를 항상 의식함이니 사랑은 항상 생각함이기 때문이다. 재차 강조하거니와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으로 그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의식(자기 위주 즉 자아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의식(그리스도 위주, 중심)이다. 두 의식이 함께 공존하지는 못한다. 3위1체 원리에서 갑은 을의식, 을은 갑의식으로 분류되는 까닭이다. 이는 당연하니 갑은 을을 위함으로써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둘은 불가분의 하나를 이루어 있는 까닭이다.


"더러운 귀신"이라 하신 것은 그 근본이 더럽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양성(兩性) 교접에서 생겨난 것이면 "더럽다"고 하실 리 없다. 악해서라면 "악하다"는 뜻으로 "악령"이라 하시면 되는 일이므로 "더럽다"고는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 정해진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이니 깨끗하므로 더럽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더럽다"고 하셨으므로 욕심에 의해 불법적으로 저지른 악행에 의해 생겨난 존재이기에 그러하다. 인간의 정상적인 남녀 성행위에서 오는 유출물 또는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 자식들을 모세 율법에 "부정(不淨)하다" 하셨으니 같은 이유다.

여아(女兒)는 남아보다 곱절이나 부정하다 하신 것을 보면 그리고 주검(corpse)을 부정하다 하신 것을 보아도, 초자연계 몸으로서 생산된 자녀라면 이런 표현이 없었을 것이나 범죄 결과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면서 생산되는 자식들이기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로 이 경우에만 인간이 낳은 자녀가 부정하다 하셨지 그 외 여하한 경우에도(인간의 영이든 육체든) 이를 가리켜 "더럽다"고 하시지 않은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계의 초능력은 세상이 온갖 구실과 핑계를 대며 믿지 않더니 이제 와서 악령들의 초능력은 믿기 바쁘게 될 전망이다. 같은 영물들의 초능력이니, 성경의 여러 기적들은 거룩한 천사들이 나타내었고 지금 와서 소위 "외계인 운운" 하면서 나타내는 것과 기타 이와 유사한 것은 악령들의 소행이다. 인간을 속이기 위한 것인데다 가장해서 나타내니 더 "요란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그 규모가 크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더 엄청난 대대적인 "기적 행함"이 된다. 그러므로 기적 그 자체만으로써 평가하거나 판단하게 되어 있는 시대가 아니다.

한 가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초능력은 말 그대로 초자연계에 속한 능력으로서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문명 발달이나 "진화"의 소산이 아니다. 자연계에 속한 것은 억만년을 가더라도 초자연계에 속한 초능력은 나타내지 못한다. 초능력은 초자연계에 속한 것이다. 3위1체의 원리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대립(대칭, 상칭) 원리로 갈라놓는 것을 중요하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지금 소위 "외계인 운운" 하면서 나타내는 악령들의 기만술은 초자연계에 속한 초능력 즉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기적의 영역이다.

"기적, 이적, 표적"이라는 것은 자연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또 자연계에 속한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 보여졌다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하는 것이 그 초능력의 특징 중 하나로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다. 레이더에 잡혀졌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기적과 같은 초능력인 것이다. 초능력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순식간에 넘나들면서 그런 조화를 부린다. 자연계에 한정된 힘은 그런 변화를 부리지 못한다. 이 차이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소위 "외계인"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자연계에 속한 존재는 절대로 초자연계 존재로 스스로 변환될 수 없다. 그러나 초자연게 존재는 얼마든 마음 먹으면 자연계 존재가 될 수 있다. 자연계의 존재가 진화하면 그런 초자연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악령들의 속임수다. 3위1체 원리로 말하면 가능과 불가능의 대칭 체계이므로 그런 주장이 속임수요 거짓말임을 폭로시키는 것이다. 

은하계 저너머 우주 끝까지 가더라도 자연계 일색일 뿐이다. 초자연계는 티끌만치도 포함되지 않는다. 우주가 방대해서 그 전체가 보이지 않아 볼 수 없는 것뿐이지 속성상 보이지 않는 초자연계와는 차원부터가 다르다. 자연계와 초자연계는 완전한 별개의 세계다. 자연계 인간이 초자연계 존재가 될 수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연계 존재로 창조하셨다가 영생하는 존재 즉 초자연계 인간으로 변환시킨다는 것은 창조 행위가 되신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엄청난 모순이 되는 것이니 왜냐면 창조가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끝났다 선언하시고 이미 만족스러워 "보시기에 좋았다"로 결론 났기 때문이다. 이런 창조의 연속은 구원도 구속도 될 수 없고 더더군다나 "은혜"는 더욱 될 수 없게 된다. 왜냐면 처음에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불찰로 밖에는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초자연계 존재였다는 결론밖에 없다. 먹지 말라 주의를 주신 선약과를 먹음으로써 범죄하여 자연계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애초의 그 초자연계 속성의 초능력 육체가 되어 영생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 창조를 통해서만 되는 일이니, 진화하여 되는 일이 아니다.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의 동식물이, 6일 창조에서와 같은 하루 이틀 세어 간 것과 같이 창조된 것은(제3일에 식물, 제4일에 바다 생물과 날짐승 식으로) 아님과 같다. 왜냐면 창조(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차원에서의 생물의 진화는 제6일째로서 완결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종료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새 창조(재 출생에 의한)는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영접하는 자마다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더 이상 "진화"라는 단어는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진화를 갖다 붙이는 것은 인생들을 농락하는 악령들의 상투적 수법이다. 3위1체의 원리는,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가름하여 자연계는 초자연계를 넘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초자연계만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강함과 약함' 등과 같은 정반대되는 성질로 나누어져 있음과 같은 의미로서 자연계와 대칭(대립, 양립)되어 있으므로, 초자연계 존재는 자연계 존재로 얼마든 스스로를 변환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계 존재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인간이 오늘날 구원 받아 영생하게 되는 것은 처음에 초자연계 육체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로 초자연계 존재가 될 수 없고 영생도 따라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령들이 스스로를 변장시켜 또는 인체 등 각종 생체 로봇을 만들어 활용함으로써 인생들을 속이고 있는 소위 "외계인"의 초능력은 초자연계에 속하기 때문에 가능한즉 그들은 당연히 초자연계 존재들이요 따라서 그런 초자연계 존재들이 자연계에 속한 우주 어느 성단(星團)에서 왔고 거기가 그들의 "본거지 운운" 하며 능글맞게 너스레 떨며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연극에 불과할 뿐임이 드러나니 소가 웃을 일이다. 바울 사도는 3층천에 갔다 왔다는 말을 하고 있으나 그 3층천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는 우리가 알 필요가 없고 어쨌든 거기는 초자연계인 것이다.

3위1체의 원리는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자연계 존재로 자처하면서 자연계인 천체에서 왔다는 등의 말을 감히 입밖에 내는 것은 그들의 모든 것이 거짓이요 악령들 자신의 변장으로 가능해지는 대규모 속임수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우주 교신, 운운" 하는 것도 무지한 인생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소설이요 농락일 뿐이다. "crop circle" 비디오에 보면 아무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이 소위 "기(氣)"를 쐰다고 하여 벌렁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진실을 모르니까 대담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악령들이 거기에다 사람에게 해로운 무엇을 뿜거나 풀어놓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인간을 해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함 즉 영원 멸망에 있을 뿐이다. 오직 문제는 그 악령들의 말을 듣고 진실처럼 착각하는 데에 있다.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멸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에덴낙원이 영계 곧 초자연계였다는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유가 드러난다. 이러한 실상을 알지 못하면 그들의 소행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속절없이 그 초능력에 혹하여 넘어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자연계 동식물의 대칭 구도로 초자연계의 동식물도 만드신 사실을 알아야 함이니, 식물(선악과 나무, 생명나무 등)이 그러하니 동물(각종 영물로서의 천사나 악령)도 그러하며, 인간은 양세계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로서 양 세계에 속해야 하는 필연성에서 그 자체적 구조가 그런 대칭형으로서의 이중성을 띠고 있는 바 곧 영혼과 육체이다.

초차연계 존재는 초자연계에서 나오는 법. 다시 말해 에덴낙원이 바로 그런 영물들(천사든 악령이든)의 본거지인 것이다. 그러나 악령들은 천사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영구 추방된 것이다. 그러니 그 소위 "외계인들"의 연원지로서 초자연계를 말하기는 불가능하고(말한다고 해도 인생이 초자연계에 대해서는 깜깜 무지가 되도록 그동안 닦달해 왔으므로 이해하지도 못할 것인즉 이런 점에서는 악령들 자신도 자승자박인 셈) 그래서 부득불 자연계에 불과한 우주 어느 곳이라는 둥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 점이 그들 자신의 기만 행위를 스스로 폭로시키는 결과의 모순점이 된다.

바로 이러한 모순을 가차없이 노정시키고 있는 것이 이상 설명대로의 3위1체의 원리이다. 즉 초자연계 존재는 초자연계가 그 근원으로서 성경에 말하는 "하늘"이요("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늘 나라", "하늘의 하나님"-창 24:3 등ㅡ물론 천공[天空]이라는 말에도 쓰이기는 하지만) 자연계 존재는 자연계에 속한 이 우주가 그 근본 바탕이다. 고로 인간을 속이는 악령들이 소위 "외계인"들을 자연계 초월의 초능력을 행사하는 자들로 설정하면서도 자연계일 뿐인 이 우주 어느 곳을 그들의 세계로 지정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소가 웃을" 넌센스라 한 것이다.

3위1체의 원리로써 다루어지는 갑, 을, 병 3각(tripod) 구도에서 갑과 을은 절대로 혼합될 수가 없는 것이다. 둘이 하나라는(갑과 을로서의 엄정 엄격한 둘이지만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갑도 을도 아닌 병으로써만 자신을 나타내는) 3자 구도에서만 만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혼재(混在)하여 섞일 수는 있어도 그 둘이 융합(혼합)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악령 사탄은 이렇게 황당무계의 되지도 않은 이치로 인간을 속이려 하는 것이니 무조건 초능력 앞에서는 인간이 쪽을 못쓴다는 약점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다. 초능력 앞에서는 인간의 이지도 지성도 거의 불가항력으로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직 이상 설명한 것과 같은 3위1체 원리의 이치를 따라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경우에만 이러한 대대적인 속임수를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초자연계 존재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우리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초자연계 역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멀어서 보이지 않는 것과 아무리 가까운 지척에 있다 해도 속성상 보이지 않는 것과의 구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식적 판단도 초능력으로 눈을 흐려 놓을 때에는 속수무책이라는 그 뜻이다. 단 참고할 것은, 동물의 눈에는 이러한 불가시적 초자연계 존재가 카메라 렌즈의 눈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런 불가시적 존재는, 그들 스스로를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겠다는 의지로 스스로를 조정해야만 비로소 인간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볼 수가 없다. 정상적인 자연계 육체인 동물의 눈에는 보이기 때문에 ufo가 나타날 때 말이나 개 등 동물은 보고 그 정체를 육감으로 아는 까닭에 거의 발광 수준에 이를 정도로 비명을 지르거나 날뛰기까지 하나, 인간은 원래가 자연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초자연계 육체로 있다가 범죄로 이 자연계 몸으로 환원(애초에는 자연계에 속한 흙으로 조성되었다가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가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었으므로)되어 버린 까닭에 동물들의 감식력(초자연계 존재를 인식하는)만도 못한 것이다. 왜냐면 정상으로부터 비정상으로 전락한 때문이다. 인체가 병들면 그 고유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함과 같은 이치다. 


자연계 존재가 진화하여 초자연계 존재 또는초능력을 나타내게 된다고 하는 것이 악령들의 주장인데, 이런 망상 또는 거짓말을 3위1체의 원리가 분쇄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양 세계는 존재해 왔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과 관계에서 어느 것이 먼저냐 할 때 자연계를 먼저 만드시고 에덴낙원이 창설되었으나, 이 에덴낙원 자체로 말하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에덴의 동편에 동산을 지으신 것이므로 서로 교차하게 된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동시성과 양면성에 따른다. 창조된 순서는 자연계적 요소가 먼저이나 창조의 바탕이 되어 있는 본질에서는 초자연계가 먼저다. 그래서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에 들어감으로써 자연계 육체의 인간은 초자연계 존재가 된다. 이미 영혼은 초자연계 영역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도 실종자가 매년 수십만에 이르고 있다. 악령들은 3운법칙에 의해 죽음으로 종결될 시점에 와 있는 사람들을 이와 같이 납치해 가서 인체 로봇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오래 전 대구의 개구리 소년들 실종 사건도 이 악령들의 유괴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3운법칙상 똑같은 해에 사망하기로 작정되어 있는 소년들끼리 그렇게 모여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세상 인간은 톱니바퀴처럼 한 치 오차 없이 돌아가는 정밀한 우주 그 자체라 하는 것이다. 아니 우주보다도 더 엄정한 치밀성으로 운용되는 것이 인간 세계의 우주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도 유사 종교 행위ㅡ속아 산 세상 (3)


시대는 지금 양분되어 있다. 초자연계를 인식하기 이전의 시대와 인식하기 시작한 다음의 시대로 분류된다. 전자는 지금까지의 수 천년 세월에 걸쳐 있다. 후자는 오직 이 21세기를 말한다. 기간의 장단으로 치면 후자는 한 순간과 같다 할 것이나 중요성으로 치면 후자는 전체를 뒤덮고도 남는다. 이 21세기를 무대로 하여 적 그리스도의 출현 그리고 뒤이어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가 모두 한꺼번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런 것이 3위1체 원리의 조화(調和) 통일이다. 고로 전자에 속한 것을 모두 버리고 후자에 걸맞는 개혁을 해야 하는 것이니 곧 각자의 자아 개혁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새 창조, 거듭 남의 모든 은혜로써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하여 구비해 놓으셨어도 나 자신이 이에 응하지 않는 한, 자아 개혁의 의지가 없는 한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래서 "믿으라"고 하기에 앞서 "회개하라"(마 3:2)고 세례 요한은 외쳤고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4:17)는 말씀으로써 하나님 말씀 전파의 단초를 여신 것이다. 

회개하라는 것은 "올바로 살라"는 뜻이다. 회개는 올바르게 살지 못함을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옳게 살겠다는 결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구원"은 너무나 잘못된 이해로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람들을 지정하시어(왜냐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에"-살후 3:2) 영원한 생명을 공짜로 안겨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그런 정도로 심각하게 곡해해 온 것이다. 본질을 빼어버리고 껍데기만 한 아름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의 180도로 구원의 말씀을 돌려놓는 그래서 "다른 복음", "다른 예수"로 바꾸어놓는 일탈이었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청개구리처럼 하라는 것은 아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잘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인류의 반역이다. 조상 귀신은 보이지 않아도 잘만 위하는 것이 그런 것 중의 하나다. 보이지 않는 조상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 낸 악령들의 술수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도 유사 종교의 일종이다. 영혼 불멸을 믿고 화복을 끼칠 수 있는 권력이 조상들에게 있음을 믿고 죽어 좋은 데 갈 수 있다고 믿는 등등이니 그런 것을 상술한 경전만 없다 뿐이지 형태는 다를지라도 종교다. 유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조상 숭배 때문에 유교를 종교로 취급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인간사도 능히 알 수 없는데 어찌 죽은 다음의 일을 논하겠느냐라고 공자 자신이 말했다지만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하여 조상 숭배를 제도화했으니 모순이다. 이런 조상 숭배는 소위 고등 종교가 없었던 아프리까 미개인들 이들 아프리까 부족이나 유교 문화의 한국을 비롯한 동양 일원에서만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번문욕례와 같은 유교 의식은 나가떨어지고, 조상덕을 입을까 또는 조상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하는 자아중심의 욕심으로 조상 제사만은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사후에도 그렇게 극성스럽게 조상을 위한다면 한국 등은 살아 생전에는 더욱 더 효심을 발휘하는 세계의 일등 효자 국가로 명성을 드날릴 터인데 왜 그렇게는 안되어 있다는 말인가. 부모 살아 생전에는 홀대하더니 왜 죽은 다음에는 야단법석들이냐고 외국인들이 한 마디씩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저들이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다"(시 106:28,29)든가,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전 10:20)는 데에서도 보듯이, 이런 조상 숭배는 하나님을 격노케 만드는 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롬 1:25)에서 우상 숭배와 같은 수준이다. 조상을 섬긴다는 것은 빈 말이다. 

'조상' 숭배가 아니라 '귀신' 숭배, '조상'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위함이니 귀신은 네피림의 망령일 뿐이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인간의 경배를 인생들을 속임으로써 도둑질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환생 증거" 등은, 악령과 귀신이 인간 개개인의 인적 사항을 다 꿰뚫는 초능력의 소유자들이므로 마치 당사자 즉 본인이나 된 것처럼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식은 죽먹기다. 아니라면 그 자신이 네피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소상히 알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으나,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든 그 누구를 네피림으로 확인하여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으므로 함부로 생사람 잡는 식으로 네피림이라 단정 짓는 것은 금물이다.  

가령 달라이 라마의 경우 그를 네피림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다. 그리 되면 달라이 라마에게 전도할 기회를 영영 막아버리는 결과가 된다. 네피림은 악령의 분신으로서 본질이 악령(이미 영원 멸망의 운명으로 결정된)이기 때문에 구원이 불가능함이다. 만일 달라이 라마 같은 이들이 구원되지 못하도록 악령이 작용하여 그들을 네피림으로 낙인 찍히도록 각종 초능력으로 환생한 것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단 한 명이라도 구원되지 못하도록 혈안이 되어 있는 악령들인즉 그런 일은 하고도 남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네피림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영역(英譯)으로는 "모든 피조물(every creature-KJV)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분부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개나 소나 식물에게 복음을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상신이 와서 제삿밥을 먹어주고 후손을 잘 되게 하고 혹은 재앙을 내리고 하고 혹은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따위는 모두 헛소리이다. 악령들의 초능력이므로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네피림 차원에서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을 상대로 해서는 그 영혼 파멸을 위해 자아중심의 거짓말 위주로 나가는 것이 악령들의 속성이므로 개의할 필요도 없거니와 가치도 없다. 불교든 조상 숭배교로서의 유교든 이런 것은 무속 신앙과 함께 우상 숭배 배격 차원에서 모두 버려야 할 때이다. 세상이 성경의 복음(福音, 희소식, 반가운 소식, 좋은 소식)을 종교의 범주에 집어넣어 격하시켜 그렇지 인간의 신창조, 재출생의 진리는 종교가 아니다. 이를 모방하여 희석시키려고 이 세상 신이 갖다붙여 준 종교라는 이름의 "기독교"일 뿐이다. 그래서 천주교, 개신교 등 세상 종교와 다름없는 것으로 각종 인위적인 교리를 각색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로 이제는 마땅히 종교를 버리고 거듭 나고 새로 창조되는 이 마지막 기회에 누구나 올인해야 하는 것이다. 


효도는 살아 생전에 하는 것이지 죽고 나서 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자아중심에서 오는 이기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복받고 저주를 면하고자 하는 무지 무식의 소치일 뿐 아무 의미가 없다. 나사로는 곧장 불 가운데로 들어갔고(마지막 심판 전에도 악인들로서 확정된 사람들이 가는 곳은 불 속이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들어갔고 네피림의 망령들처럼 이 지상에 정처없이 배회, 방랑하지 않는다. 
네피림인 듯이 또는 조상 신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사무엘 선지자와 사울 왕과 신접한 여인의 대화(對話)에서도 보듯이 거짓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면 간단하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이 세상은 거짓 투성이요 이 세상 신인 악령에게 하릴없이 속아 사는 곳이다. 성경만이 이 진실을 말하고 그 외에는 일절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사탄이 철통 같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늘 끝 하나 비비고 들어갈 틈을 사탄이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인류 문화는 성경만 빼놓고는 보이는 세계에 한정된 것이었다. 동전의 양면성에서 일면만으로는 화폐 가치가 없듯이 꼭 그러한 양상의 절름발이(한 쪽 다리를 못쓰니까) 사물 인식의 상황이었으니 그 지식이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러하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체했으니 무식 무지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당사자 자신만은 이를 알지 못했으니 어리석자면 그 어리석음이 한이 없고 가련한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그와 짝할 데가 없다. 불교가 그러했고 자연과학이 그러했고 진화론이 그러했다. 자연과학을 여기서 들먹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혼까지 그 존재를 부정한 망념 망상 탓이다. 

자연과학의 제반 발명 발견으로 인류 생활이 급속도로 향상되었다지만 이 세상이 인간 삶의 터전이 아니요 오직 새 창조와 재출생을 위한 기회 부여에 그 유일한 의미가 있다고(왜냐면 복음 전파가 완료되면 이 세상도 끝난다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확언해주셨으므로) 전제할 때, 이런 소위 "눈부신" 문명의 이기는 적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를 위한 것일 뿐이지 영생하는 일에는 아무 것도 기여한 것이 없고 오히려 이 때문에 인간 심성을 더욱 교만해지게 만들어 진화론 등 무신(無神) 사상만 더욱 부채질한 것이 되었으므로 오히려 덕이 되지 못하고 해를 끼친 것이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르면 그 모르는 것을 인정하면 그뿐이요 흠이 없겠지만 그러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고집했으니 그 폐해가 극심하다.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이 여기서 한 걸음도 이탈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3위1체의 원리에 의해 인간의 인식 능력이 그 한계성을 적나라하게 여지 없이 드러내게 된 오늘날,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그리고 인식을 180도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한 마디로,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양자 택일이다. 무식으로 남느냐, 실상을 바로 받아들여 자신을 일신 또는 쇄신시키느냐 둘 중 하나다. 이 21세기에 처해 있는 인류는 양단간의 기로에 서 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 양자 선택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간섭 못한다. 악령들도 당연히 간섭 못한다. 하나님 친히 손을 못대시는데 피조물이야 불문가지다. "보이지 않으니 그 존재도 없다", 이것은 철없는 어린 아이의 안목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이제까지 삶이라고 살아 온 것이다. 너무 어이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불교도 버리고 진화론도 버리고, 무신론은 물론 버릴 일이다. 지금까지의 자연계 일변도의 모든 인식과 사고방식을 버릴 때가 정히 온 것이다. 이 자연계뿐이라는 전제 아래 구축되었던 모든 것을 미련없이 버리지 않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여전히 무지 무식 가운데 자기를 방임할 양이면 버리지 않아도 좋다. 그렇지 않거든 하루라도 빨리 버리면 버릴수록 좋다. 오직 성경만이 요지부동이니 최초부터 이 보이지 않는 실상을 유일하게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를 따른 이 진실을 처음부터 유일하게 설명해 왔던 것이다.


보이지 않으나 실존한다. 지금까지의 인간 인식으로는 놀라운 일이다. 아니, 이런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지내왔던 인간의 무식을 정작 놀라워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깜깜 무식과 무지 속에 우리 인간을 가두어 왔던 이 세상 신이란 존재에 대해 누구나 반드시 놀라워해야 하는 것이다. 180도 인식을 바꾸라. '좌향좌' 했으면 이제는 반드시 '우향우'밖에 없다. 어정쩡하게 그 중간 각도는 없다. '뒤로 돌아' 뿐이다. 비정상적 동전의 일면 인식으로부터 양면 인식으로 급선회로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이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처음부터 양립해 왔다는 것. 보이지 않는 세계는 쏙 빼버리고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 노닥거려 왔으니 이 미망에서 그 불완전함에서 벗어나면 날수록, 하루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단 일분 일초인들 그런 어리석음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IQ가 타민족과 비교해 높았던 우리나라 사람은 이러한 사물의 속성을 벌써 본성적으로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사후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고 때문에 미래 세계를 지향하는 속성을 감출 수 없어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 국가가 되다시피 했고 기독교가 들어오면 기독교 국가 못지 않은 행습을 보여 왔다. 그래서 이 나라는 기독교와 불교가 함께 동반 성장하는 나라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가 그 정확한 윤곽을 드러냄으로써 3위1체의 원리로 실증(實證)된 이상에는 미련없이 지체 없이 가시적 세계에만 한정되어 진전되어 온 진화론이든 불교든 그 의미를 더 이상 유지 존속할 필요가 없다.


진화는 비록 그것이 부분적으로 진실이라 할지라도 자연계에만 국한한 것이지 초자연계는 예외다. 초자연계를 염두에 두고 진화를 연구한 역사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초자연계가 병립해 있다는 실상이 밝혀진 이상에는 그 진화론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자연계가 진화해서 초자연계가 된 것이 아닌 이상 이는 필연이다. 초자연계는 자연계가 시작되면서 함께 출발했던 것이다. 불교의 무상(덧없음)도 상주(常住)의 대칭어이다. 언어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가 그러하다. 무상(無常)이 상주(영원 불변성)와 함께 하는 쌍둥이인 줄 알았더라면 불교는 아예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세상은 무상뿐이라 속단, 오판했던 결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상주라는 것이 있는 줄 알았다면 그 상주로 되돌아가는(환원, 복귀) 방법만 찾았을 게 아닌가. 상주는 처음부터 없었는데 그 없는 상주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런즉 비단 불교만 아니라 결론은 지금까지 인류가 헛살아 왔다는 것이다. 완전히 속아 산 것이기 때문. 왜냐면 좌우 양면을 동시에 보지 못하고 한 쪽만 보도록 이 세상 신에게 강요당하여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런 심각한 착각 속에 지내 왔으니 무슨 결론인들 제대로 하고 판단인들 정상대로 해왔겠는가.


사람은 생각대로 판단대로 움직이는 것인데 사물 인식을 정상대로 못하고 오로지 마귀(이 세상 신)에게 꺼둘려 왔으니 모든 것이 그르치고 망쳐버린 의미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오직 진실과 진상, 진리를 말하는 성경을 믿는 자 그것도 어린 아이 같이 믿은 사람에 한해 그르친 그릇된 오도된 삶을 살지 않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제 초자연계라는 그 다른 한 면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그럼 지금부터는 명실 상부한 사람 삶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면 실상 그렇지도 않다. 이제 그 진실을 앎과 동시에 적 그리스도가 나와서 다시금 대대적으로 속이는 판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즉 성경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지금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이 이 세상 신에게 휘둘리고 꺼둘린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이 비극적 현실을 탈피하려면 지금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마지막 아담께로 돌아와 새 창조를 받고 다시 출생하는 일부터 먼저 해놓고 볼 일이다. 앞으로 적 그리스도가 나서서 그의 선지자 또는 대변인들을 통해 어떤 식의 거짓말을 나열하여 세계인들을 속일지 모르나 성경과는 배치되고 상반되는 내용으로 나올 것인즉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미리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 성경 진리를 대하고 믿고 사랑할 것인지 여부를 때늦기 전 결단할 일이다. 지금은 결단할 때이다. 악한 자가 등장하기 전에 결단하여 행동에 나설 때이다.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한 자를 막는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 받을 자를 두루 찾아 구원시킨다는 의미이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후 6:1)는 의미는 변함이 없음이다.


부자가 악인이라는 것은 자아중심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이 고난의 세상에서 혼자라도 잘 살겠다는 것으로 그대로 표출된 표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부자가 자기는 단지 청지기로서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재산을 잠시 세상에서 맡아 관리하고 있다는 인식 전환을 하면 문제가 없지만(딤전 6:17-19) 그렇지 않는 한 낙타로 비유하신 대로 필멸일 뿐이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시대를 분간하고 식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시는 때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선을 긋는 때로서 그 중차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건마는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천기는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은 분별 못하느냐"(마 16:3) 책망하셨듯이 지금이 또한 그러하다. 적 그리스도 등장 후 즉시로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때를 앞둔 오늘날이기 때문이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더불어 그 이전 그림자적인 소임을 해왔던 모세의 율법이 버려진 것처럼, 초자연계의 존재가 확증되어 있는 오늘에 이르러 그 존재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몰랐던 과거의 모든 시행착오는 버려야 마땅한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어린 아이 적 시절의 모든 것은 버림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신 나간 말ㅡ"하나님의 종인데 특별 대우를 받는 게 무어 그리 이상한가"ㅡ찰즈 스펄전



악령들과의 맞수는 거룩한 천사들이다. 사람(아담)은 이들 악령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거룩한 천사로 창조되었으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즉 자아중심을 따름으로써 악령이 되어버린(인간이 자유 의지로써 자아중심을 더 선호하여 악인이 되듯이) 사탄의 간계에 빠져들어 아담이 자연계 존재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에, 아담(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과의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는 악령들과 대치해 있는 거룩한 천사들인 것이다. 악령들이 거룩한 천사들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니므로 이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원래 있을 수 없는 것이나, 전자는 사람들을 구원 받지 못하게 즉 해치려는 것이 목적이고 후자는 원래의 사명대로 인간들을 돕는 것이므로 자연 다툼과 전쟁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최후, 최대 결전에서 패하여 영구적으로 에덴낙원으로부터는 추방된 것이 1908년 6월 30일의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이다. 한 가지 알 것은,  사람을 위하는 것이 천사의 일이고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악령들의 일이라고 하여, 사람을 육체적 위험에서 건져내는 것도 무조낸 하나님의 천사들이라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이면에 사람들의 멸망을 획책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성경의 말씀을 따르지 않게 하고 그 반대되는 것으로 인생들을 인식시키는 것이라면 선을 가장한 즉 "광명의 천사"(고후 11:14)로 가장한 악령들의 소행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인간을 위해도 그로 인해 인간이 영원 멸망을 자초하는 계기가 된다면 악령들은 얼마든지 그런 "사람을 위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다. 이것이 모든 이른바 "선" 또는 "악"에 대하여 그 진위(眞僞)를 식별하는 기준이다. 인간이 행하는 "선"도 마찬가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선은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선밖에 없으니, 자아중심의 각종 동기에서 나오는 선은 선일 수가 없고 도리어 악인 것. 자기 부인은 오직 마지막 아담과 하나됨에서 나오는 것. 그러나 영생과는 무관하나 악이 아닌 선도 있으니 만유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여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하는 선은 자아중심에서 나오는 선행과는 구별되고 있는 것. 베드로가 고넬료의 경우를 두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다"(행 10:35)고 했을 때의 그 의 곧 선행이다.  


세상(삶)을 사랑하지 말라 즉 이 세상을 사람 사는 곳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성경의 경고(요 12:25)는 그 근거가 뚜렷하고 논지가 명쾌하다. 간단히 세 가지로 그 중요 이유를 들 수 있다. ① 인간의 원수 악령이 지배하는 세상이므로 그렇다(눅 4:6,7/요일 5:19/고후 4:4). 자기 원수인 구원 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삶을 즐기도록 악령이 방치해둘 리가 없다. 이는 상식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을 부정함이다. 성경을 부정하고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② 전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3위1체의 원리로 기독교계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초자연계 몸으로 초자연계 세상인 에덴낙원에서 완벽한 삶 곧 영생(생명에는 원래 죽음이 없으니 범죄하지 않았으면 아담이 죽을 리 없다-롬 5:12)을 누렸다는 것이니, 따라서 내가 만일 아담이라면 이런 판국의 "죽음"(창 2:17/골 3:3/마 8:22)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탄식하고 슬퍼하고 "미워하지"(요 12:25) 않겠는가. 

성경에서의 이 세상의 의미는 복음 전파에만 한정되어 있다.
복음 전파만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고 확언하셨기 때문이다(마 24:14). 그렇다면 <세상=삶>이라는 등식이 무너지게 된다. 이유는, 그리 되면 '세상'이 끝나면 '삶'도 끝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세상=일함>, <세상=악령들과의 싸움>이 될 뿐이지, <세상=삶>이 아닌 것이 명백해진다. 세상의 의미가 복음 전파 즉 사람 살리기에만 있다면 이러한 소중한 일을 하라고 주신 기회와 시간을 삶의 낙을 누리는 데에 허비할 때 하나님의 것(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게 주신 사랑을 믿고 나도 나 자신을 주님께 모두 드리는 것이 회개요 믿음이므로)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것으로 도둑질한 것이 되니 이런 행위가 절대로 무사히 넘어갈 리가 없다.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영원 멸망만이 있을 뿐이다.

③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구원 받아 영생에 들어왔으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당연히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자연계 육체는 영생하게 되어 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반드시 세포는 노쇠하여 결국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영생의 생명력을 구가하던 아담이 자연계 몸으로 퇴화하였으므로 그 원래의 기력이 남아 있어 우리의 표준으로 하면 장수는 했지만 천년도 채 못넘겼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 같다"는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벧후 3:8) 하루도 못되어 죽은 것이다. 고로 이렇게 아직도 자연계 육체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래서 결국 모든 인생들과 똑같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부터가 여전히 죽은 자로서의 행색이지 산 자로서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과거는 이런 모습이라도 생명이라 착각했지만 지금은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으니 곧 죽은 자로서의 매일의 행각(行脚)이다. 

여기서 같은 의미로서 다시 몇 가지를 더 보탠다면 그 첫째로, 불 속에서 내가 건짐을 받아 구원되었으면 내 몸이 그 불로 인하여 다치거나 상한 데가 없는 한 그 불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들을 건지려고 전력을 다함이 상식이다. 물에 빠져 있어도 마찬가지이고 기타 그 어떤 위험 속에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밤 중에 홍수가 나 방둑이 터져 모든 동네가 망할 위기에 있음을 먼저 발견한 자가 있으면 당연히 그 위험을 알려야 사람의 도리다. 동네 방네 다니면서 위험을 알릴 충분한 시간이 있음에도 이 의무를 버린 채 혼자 산으로 도망 갔다면 그 사람은 인간 사회에는 완전히 매장된다는 것도 같은 이치를 말함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상한 것과 다친 것, 죽게 된 것을 고침 받아 영생하는 자로서의 성한 자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미리 위험을 깨닫고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이 위험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는가. 그런즉 당연히 내가 할 일은 사람 살리고 구원해내는 일 외에 달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왕하 7:9). 때문에 <우리의 구원 받음=우리의 보내심 받음(요 20:21,22)>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하셨으니 더 달리 말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고로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한다"(요 14:31) 하신 대로 보내심을 받는 것은 오직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게 대한 사랑을 확증해주셨기 때문이다(롬 5:8). 모든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사랑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 머리이신 아버지(자기의 형상이신 아들을 통해 모든 것을 하시는)께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형체들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나를 세상에 보내시지 않는다. 이점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려고 오셨던가? 그렇다면 우리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지 않으셨으리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성경에 분명히 해놓지 않았는가.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24)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 요건으로서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함"(마 7:21)이다. 양자(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롬 8:15)를 삼을 때에는 양부모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엄격한 전제 조건이 붙는다. 양부모의 뜻대로 하지 않을 때에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파양이 된다. 이와 같이 어느 모로 보아도, 우리가 도저히 세상에서 살려는 마음을 먹을 수가 없다.

만 가지로 재어보아도 세상 삶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식대로 행하는 것이 순리다. 이를 역행하면,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취함과 같은 양상이 된다. 스스로 선택한 대로 즉 뿌린 대로, 심은 대로 거둘 뿐이다(갈 6:8,9). 상식대로 행하지 않은 실례가 엄연히 있다. 죽음을 자초한 첫 사람 아담의 예가 그렇고 영원 멸망을 자초한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의 예이다. 그리고 그 반대되는 예도 있다. 즉 거룩한 천사들은 상식을 따랐기 때문에 원래의 자기 생명의 위치를 지킨 것이다. 우리로 말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빌 2:12) 실례이다.

아담이나 악령이나 모두 "이루지" 못한 경우가 된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으나 그 생명을 유지 보전하는 것은 각자 책임이다. 이것이 "이룸"이다. 우리에게도 새 창조로 새 생명을 주셨다. 마찬가지로 이 생명을 간수할 책임이 우리 각자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각자의 구원을 이룸"이다.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두고도,  구원 자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이 경고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감히 자기 마음대로 멋대로 해석하여 엉뚱하게 다르게 가르침으로써 오늘날 설교자 중 그 어느 누구도 이 경고를 발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들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오직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믿고 순종하는 이들(설교자든 교인이든)은 그런 엉터리 설교(말씀대로 하지 않는)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마음은 변할 수 없기에 그 순종으로써 영생에 들어간 것뿐이다.

찰즈 스펄전의 설교를 거의 누구나 최고 가치로 여기지만 스펄전은 청년 때부터 복음을 잘못 배웠었다. "대신 죽음"이 그 신학의 기본으로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거룩한 명령을 그리스도 오기 전 모세 율법 차원에서 잘못 깨달은 때문에 이런 일화도 남겼다. 그는 열차를 탈 때 1등석을 타고 다녔다. 이를 보고 어떤 집사가 핀잔하는 투로 지적했더니 하는 말이 "하나님의 종인데 그만한 대우를 받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은가"였다. 그 유명하다던 설교자보다 집사가 복음을 제대로 익힌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신 것처럼 "나귀 새끼"를 타야 하는데(요 12:15) 그는 준마, 명마를 타고 다니면서 "나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한 셈이니 여전히 척결되지 못한 자아중심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모든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 선입견과 편견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스펄전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단 한 마디도 그 두터운 명설교집 중에 삽입해 놓은 적이 없다. 동전의 양면 중 그 반 쪽을 완전 무시했으니 동전의 일면만 가지고 화폐 구실을 하려 하나 한 마디로 불가능한 것이다. 구원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구원을 간수하고 지키는 것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 중요성은 범죄한 첫 사람 아담, 범죄한 사탄 이하 악령들이 그 증거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이 무서운 현실을 외면하니 어찌 안심할 수 있고 안전할 수 있으랴. 이런 경고는 비단 빌 2:12만 아니다. 성경 전체가 그런 경고로 넘쳐나고 있다. 위로의 말씀보다 경고의 말씀이 더 많아 그 비중이 크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행 9:31)라는 두 레일 위로 잘 달렸었다. 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하여 눈이 어두워져 한 가닥 레일 위로 달려간다고 착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열차는 달리지 않았다. 기적 소리만 요란스럽게 울려댄 것뿐이다. 그것을 달리는 것으로 여기는 착란 현상만 빚어낸 것뿐이다. 모두 성경을 통해 계시를 사모하지 않은 치명적 타격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여전히 강조했지만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이들에게는 구원 받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복음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당연히 그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살고 그 뜻대로 행함이니 이것이 바로 항상 "복종함"(빌 2:12)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지식(소위 "신학"이라는 이름의) 자랑에 빠진 이들은 예외없이 구원을 모른 채 이 세상에서의 천금 같이 귀한 시간(구원 받도록 하기 위해서만 그리고 구원되었으면 구원의 희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할당된)을 다 날려 버리고 절망(희망이라고는 일절 없는)의 영원 세계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 둘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에 "일용(日用)할 양식"이라 하신 것처럼 '오늘'밖에 확실한 것이 없다. 이 시간 후의 일도 알 수 없지만  모두 "오늘"임은 분명하다. 원칙적으로 내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데 무슨 날이 많다고 비록 천년을 산다 한들 이런 세상 삶을 사랑하다니 한 마디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가. 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대로 행하려는 나의 의지 유무를 확인할 것. 내 구원을 위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닌가(자아중심), 참으로 하나님 뜻이 내 뜻이 되어 내 스스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뜻을 행하려 하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것. ② 쉬지 말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일 것(뜻을 알기 위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 것이다"(요 7:17)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확약하셨다. 뜻을 행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 셋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막 8:38) 하신 대로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으로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고(롬 8:7/약 4:4) "날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시 7:11) 세상인데, 그리고 인간(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땅인 이 세상인데(창 3:17/5:29), 그리고 이 세상이 인간의 나라 곧 인간의 세상이 아니라고 선언하셨는데(요 18:36), 이 세상 삶을 사랑하다니,  말이 되는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는 이와 같이 아담 범죄 후 지금까지 이 세상 위에 "머물러"(요 3:36) 있고 걷힌 적이 없다. 진노와 저주 가운데 이 세상이 놓여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이런 세상에서 감히 살자는 마음을 품는가.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하셨으니, "진노가 내린다"가 아니라 "진노가 머물러 있다" 하신 그 뜻은 명확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아담 때에 한번 내려진 뒤로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거두어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저주와 진노 속에 갇혀 있는 세상에서 감히 살려고 하고 세상 삶의 낙을 사랑하려 한다니 이상 말씀의 성경을 믿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이 정면으로 성경을 부정하는 언행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게 되고 미워해야 다시 말해 사랑하지 않아야 영생하도록 보전한다고 경고하신 것이다(요 12:25).

이런 저주(인간 범죄 후 땅에 내려진)로 인해 생물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 아니면 멸종 단계에 이른 것이다. 진화(進化)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성경적 사실에 정면 위배됨이다. 우리가 말하는 유신론은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실상에 대해서 100프로 그 진실성을 인정하는 것을 말함이지 세상의 안목에서 말하는 소위 "유신론"이 아닌 것이다. 창조신과 창조론은 인정하면서도 성경을 부정하는 주장까지 함께 포함시키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유신론이다. 그래서 요즈음 나오는 궤변 중의 하나가 소위 "외계인"들이 인류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거짓말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랴. 그 소위 "외계인"들을 신이라 인정한다면 그 역시 창조론이요 유신론이다. 실상 그들은 "신"(고후 4:4)들이다. 그러나 인류를 창조한 신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보다 나중 창조되어 인간을 위해 즉 아담을 보좌하기 위해 지으심 받은 영물(靈物)들로서 그런 "외계인" 행세를 하는 것은 인간들을 속이기 위한 가장, 변장인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 악령들을 정의하여 "온 천하를 속이는 자"(계 12:9)라고 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성경의 하나님 외에는 달리 하나님이 존재할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이다. 왜냐면 이 두 가지가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3위1체의 원리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계심에서 만유가 창조되고 존속 유지되는 3위1체 원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창조를 부정한다. 그래서 무신론이다. 무신론자가 만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한다면 진화론밖에 없다. 3운법칙이나 3위1체의 원리는 이 창조자를 드러내고 제1원인으로서의 창조를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