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4일 목요일

"아버지"는 "성부"로, "아들"은 "성자"로 반드시 표현하기로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나를 보려거든 그리스도를 보라!"이다. 
영광 중에 계시는 대칭 아담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므로.
첫 사람 아담을 보려거든 나를 보고
아담을 보려거든 나를 보면 된다는 이치와 같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아니시지만 
그리스도를 보려거든 나를 보라고 할 정도로
나는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갈 4:1)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 <주님께 대한 우리 사랑>이다. 

이 모든 사실은 둘이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당연 결과이다. 
빛을 입자성(particle)으로만 보면 파동성이 전적으로 배제된다.
파동성(wave)으로 보아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빛은 파동성이라 해도 맞고
입자성이라 해도 결코 틀리지 않는다.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오묘함이다. 

갑이면 언제나 어떤 조건에서든 갑뿐일 것이지 왜 을이냐,
을도 어떻게 유령처럼 갑이 된다는 말이냐,
바로 이런 것이 자연법칙 하나만 외곬으로 앎뿐인 
(자연)과학자들의 한결같은 외고집이다. 
학구적 양심이나 학구열도 없이 권위만 내세우려드는 오만함 때문이다. 
이것도 일종의 비루한 기득권 챙기기라 하겠다.

이 <둘의 하나됨>을 처음부터 가르친 성경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고,
성부의 "미리 아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 성자의 "피 뿌림"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하면서도
바울 사도가 교회에 보낸 서신의 인삿말에서
성부(聖父, 아버지)와 성자(聖子, 아들)는 말하면서도
"성령"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같은 개체를 가리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요한 사도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함에서
성경에 "성령의 교통하심"이란 표현이 있는데도
"성령"의 이름이 빠진 데에서 잘 드러난다. 

성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말로써 비방하는 자는 용서가되어도
성령을 비방하는 죄는 절대로 용서가 되지 않는다" 하셨으니
그 위상(位相)으로 말하면
성자보다 상위 격이다. 그런데도 "성령"은 철저히 빠져 있는 이유다.
그렇게 말씀하심은 "성령"의 "이름"(마 28:19)에는 아버지께서 포함되시기 때문. 
포함되신다는 뜻도 되지만 성자께서 성령이라 하실 때는 곧 아버지를 가리키시기 때문.
아버지를 가리키심이나 "아버지"시라 하시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둘의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롬 8:26) 함도 같은 맥락이다.
즉 성자를 가리킴이다. 그러나 성자라 할 수 없으니
아버지와 하나되어 둘이 하나되어 계심의 똑같은 이유 때문이다. 
성경은 이와 같이 올바로 해석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를 못하니까 우왕좌왕 진리에 바로 서지를 못한다. 
그러나 진리의 요결은 사랑에 있으므로 누구나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면"
즉 사랑하여 순종하면 구원 받음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즉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에 사로잡힐 때에는
구원에 이를 수 없었음은 불문가지. 





참고①
성령을 비방하는 죄는 용서가 안된다는 구절을 들어 위협을 가하면서 
악령들이 "성령"의 이름으로 방자하고 참람한 짓거리들을 자행 감행한다.
그래서라도 오늘날 그 어느 때 못지 않게 직접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하라는 것이다. 
필자가 아무리 여러 말로 강조해도 성령 친히 가르쳐 주시지 않는 한
마음에 남지 않는다는 점을 마음에 깊이 명심해 두셔야. 

참고②
필자도 지금까지 글이라고 쓰면서 영어식대로 "아버지", "아들" 이렇게 거침 없이 말했으나
유달리 존대어가 발달한 우리나라 정서에 비추어 도무지 어색하다고 했는데
오늘에야 "성부", "성자"로 번역한 초대 번역인들의 의도에 백프로 공감하면서
차후 "성부", "성자"로만 반드시 통일해서 표기하기로 독자 여러분께 약속 드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도 이 방침대로 하는 것이 옳을 것. 

"성부님", "성자님"이라고 "님"을 붙이는 것은 좋으나
위의 설명대로 "성령님"이라고는 하지 않음. 
이런 사용도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할 때이고 
우리가 부를 때는 "주님", "아버님"(아버님이 어색하면 그냥 "아버지!" 하고 불러도 무방).
호칭의 격식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본질이므로. 
"아버지"라 불러도 우리 인간의 "아버지(남성)"처럼 인식해서는 안되니
바로 그런 의미에서 주님 친히 가르치시기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다" 하신 것. 

주님께서 의미하신 "아버지"는 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도 아니시고
오직 여자가 생기기 이전의 아담(그러나 나중에 여자가 생김으로써 남자가 된)을 기준하되 
여자와 하나되어 있는 남자로서의 아담 본위이다보니
남성으로 그냥 받아 "아버지", "아들"로서 나타내는 것뿐이고
원래의 의미는 영물들(그룹, 스랍, 에덴낙원의 "각종 짐승"ㅡ창 2:19)과 같이 성별이 있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 세계에서의 온전한 어버이 자식 관계만 있음.
바로 이 사실을 가리켜 위의 말씀을 하신 것. 

고로 우리의 원칙적인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인간의 부모처럼 성별로 나누어질 수 없는 분이시고
따라서 우리 역시 그러할 것이고 지금도 의당히 그러해야 함을 보이신 것으로 바로 이해해야. 
바울 사도가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가 그 뜻임.
다른 뜻이라면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고후 5:16)는 말을 할 리가 없는 것.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때 또는 인식할 때에는
반드시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남성으로 오해 내지 착각하지 않도록 해야.
그리고 또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 친히 성부의 맏아들이 되어 계심으로써 우리가 구원된 것인즉
공동의 한 아버지를 모신 거대한 가족 관계가 형성 되어 있음을 나타내시는 의미. 


                             

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대낮 같이 밝게 드러난 진리



나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나이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니
그리스도께서 따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나이실 리도 없다. 다 각각의 존재이니까.

①과 ②를 가리켜 "둘의 하나됨"이라 하는 것.
3위1체 법칙의 요체이다.
만물이 짝으로 존재하는데
그냥 양립해서 존재함이 아니고
(그렇게는 짝이 될 수 없어ㅡ양자간 충돌이 필지라 분리되게 마련)
모자(母子) 관계로서 존립하니 둘이 하나될 수 있는 것. 

말하자면 종전에 알아 왔던 음양 논리에 이 핵심 사항이 추가된 것이
3위1체의 법칙이니 바로 성경에서 처음부터 밝혀 온 것.
음양론이 정정당당하게 진리 내지 법칙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은
그래서 미신 비슷하게 취급되어 음지에서만 어색하게 나돈 것은
이 핵심 사항을 빠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니, 이는 당연하다. 

이로써 인과율도 훌륭하게 입증되니
만물이 존재함은 창조주께서 제1원인으로 계시기 때문이요
이 세상이 있은즉 이 세상을 전생(前生)으로 삼는 내생이 있음이 필연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행하면 영생, 악행하면 심판"(요 5:29)
이러한 질서로 바로잡고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대칭 아담께서 오신 것이다. 
즉 대칭 아담으로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면 선을 능히 행할 수 있음이다. 
영원한 생명과 멸망으로 분류되는 인과 관계다. 

양면성 진리에서 이 세상의 전생은 없었고
이 세상이 시한부이니 오는 세상은 영원하고 
따라서 대칭으로 완료되는 것이지 이 후 더 이상 되풀이는 없다. 

성경을 읽을 줄 몰라서 다시 말해 성령의 가르치심을 무시 외면한 까닭에
지금까지 무지, 백지 상태에 온 것뿐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는 한, 만년 가도 알 수 없는 일.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시어 가르치셨음이며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사 28:23-28)

이런 소소한 것까지 "하나님이...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시어 가르치심"으로 되는 것인데 
하물며 이보다 중한 것이랴.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 3:27).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말씀 무시하고 인간이 가르치는 것으로써
더군다나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니 이런 어리석음도 없다. 
직접 누구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활짝 틔어 놓으셨음에도
항상 "대신", "대신"만 좋아하고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주의 종", 성경을 대신하여 가르치는 신학교, 신학자 등등.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셨음에도(마 23:8-10).
악인을 추려내고 솎아내고 걸러내는 그물과 함정, 덫, 올무에 걸린 것이다.
스스로 악인이 되려는가.  

①과 ②를 제대로 이래 못하는 자연법칙의 한계성밖에 모르는 (자연)과학자들은
지금 양자 역학 하나만 놓고도 쩔쩔 맨다. 진땀을 뺀다.
①이면서도 즉 갑이 을이라 하면서도
동시에  ②라고 하니 즉 갑은 을이 아니라 하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이다. 
여태가지 성경을 무시하고 제 잘난 척했던 업보다. 
이제는 머리를 조아리고 성경을 배워야 하는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독수리(적그리스도의 각종 기적)에
낚아채여 갈지 아무도 모른다. 

필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즉 독자와의 차이는
성경을 믿었다는 것이고
성경을 좀 더 부지런히 문을 두드리듯이 두드리고 찾고 구했다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 한 일도, 특별히 다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겹(複) 사람과 홑(單) 사람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킨다"(고후 10:5)고 했으니
1년 365일 하루 24시간 그리스도 의식(Christ-consciousness)의 생활.
왜냐면 생각하는 족족 주님의 말씀으로 걸러지는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
자동적인 작업이 아니라 나의 사랑의 순종의 작업.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내가 입어 아담(육체)을 매일 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옷입어(롬 13:14/골 3:12) 매일 대칭 아담(성령)을 대하는 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생활.

고로 구원되기 이전처럼 절대로 나 홀로 있다, 생활한다, 살아간다는 자의식은 금물.
그런 홑사람이 아닌 반드시 겹사람, 두 사람이 하나되어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 의식
이것만이 나의 구원 받음의 증거를 삼아야. 
둘이 하나되니까 당연히 자아중심은 없고 오직 자기 부인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그런 관계는 속박이고 견딜 수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그같은 매일 생활은 가장 이상적인 것.

이것이 엄마 품속의 아기.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신 대로,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실증(實證)해 보이신 것이 
나 위한 사람되심(하나님이심에도)이요 십자가 죽으심이 아닌가. 
고로 우리의 구원받은 이후의 일상생활은 이런 복합인생의 복된  삶.
이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임과 같은 이치.
이제 새 창초에서는 전자는 나 자신이요 후자는 성령으로 계시는 대칭 아담으로서의 이중 구조.
당연히 "성령"으로 통하시는 것은
하나님 친히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겹 존재이시고 홑 하나님이 아니시니까. 

홑 사람과 겹 사람의 차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은혜스러운 일.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열손 재배하고 아무 것도 안하고 천국 가기만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에만 불철주야 공들이고
주님을 어찌 하면 기쁘시게 해드릴까 밤낮 거기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고전 7장). 
주님 친히 그와 같이 나를 위해서만 모든 생각과 일을 하고 계시니까.

동시에 여러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하시지만
나만을 위해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 넉넉히 통하고도 남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되심의 하나님 특성.
천사와 같은 영물들도 피조물인지라 이런 일은 불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