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와 '선'을 요약하면 또 사랑(愛, 仁慈, 慈悲)이 된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과 그 피조물 사이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은 머리와 몸의 관계를 나타내지 않고 가리키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런 법리적 해석을 생략한 단지 좋아하는 감정으로만 풀이하고 있으나 원래는 그렇지 않고 이와 같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다. 법질서 차원에서 사랑이 해석되도록 이와 같이 합리적으로 짜여져 있는 까닭이다. 무슨 법과 질서냐 하면 한 몸 구조에서 그 누구든 자아중심이서는 안되고 반드시 자기 부인이어야 한다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의 삶의 도리 또는 이치는 무슨 거창한 체계의 법이라기보다 아주 기본적인 상식 수준이다. 그러나 법은 법이고 질서는 질서로서 마땅히 엄수되어야 하는 것이니 왜냐면 한 몸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것은 명백히 생명과는 반대 개념인 죽음과 멸망, 고난, 비애로 종결되기 때문에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금방 알 수 있는 삶의 법질서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생각이 들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매사 행동하고자 하는 부류가 영물들 중에서 먼저 생겨나고 그 중의 우두머리 격인 사단의 계교(속임수, 거짓말)로 첫 사람 아담 역시 그 악과 죄, 불법과 불의에 넘어가 이후로는 모든 인류가 한꺼번에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든 것이 오늘날 인류사의 불행인 것이다.
이렇게 머리와 몸으로 구성된 우리의 삶의 체제이기 때문에 머리의 지시 자체가 몸에게는 생명이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했고, "이 말씀을 네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며 또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 6:4-14) 한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삶의 기본 또는 기준으로 삼아 말씀 중심으로 살라는 것이니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성경이 "말씀"이시라 한 것도(요 1:1)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 생명이시라 한 것도(골 3:4) 이런 측면에서 보아도 합당하다. 때문에 하나님을 그와 같이 사랑하고 하나님(머리)의 지시에 따라 자기 이웃 즉 '한 몸' 구조에서 함께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다시 말해 믿는 형제들)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위함 같이 하는 것을 가리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이라 하셨다.
그러나 이 한 몸 구조에서 현재 분리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인간 세상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신데 인간은 모두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이다. 이미 일단 분리되어버린 관계로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리원칙대로 되어 생명의 이 한 몸 체제가 인간에 관한 한 완전히 와해된 것이다. 더 다시는 생명의 이 한 몸 체제에 들어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새 창조에 의한 새 관계 형성 즉 새로운 한 몸 체제로써야 그 원래의 한 몸 체제로의 접속이 가능해져 이전 상태로 복구될 수 있는 것이다.
즉 다시 출생함으로써 새로 창조된다는 것인데 이를 다른 표현으로 "성령으로 출생한다"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영원하신 선물로 성령을 받아 모심이므로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나라는 존재의 영원하신 한 부분을 구성해 계심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와 같이 '새로운 나'의 구성 인자(因子) 되시지 않으면 안되느냐 하면 ①죄를 지으면 무조건 죽게 되어 있으므로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고, ②죽음이 죄의 결과이고 그래서 죄를 지으면 죽지 않으면 안되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조처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①죄를 지으면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은 앞으로 나도 아담처럼 죄를 짓는 경우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②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가 과거 나 중심으로 살던 그 나 자신이 아주 죽어 무덤에 묻혀버려 세상에서 다시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즉 나 중심이 될 수 있을 그 나 자신이라는 것 그래서 '나 중심(자아중심)'이라는 것이 죽음으로써 영원히 "멸절되어야"(롬 6:6) 함이다.
①그래서 과거 죄에 대한 대가 지불로서의 죽음을 내가 죽어야 하고 ②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 자신이 이런 의미에서도 아주 죽어야 할 필요성이 절대적이라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 이렇게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함께 살아나는 것이 필연이다. 죽어야 한다는 것은 위의 설명대로 ①과 ②의 "죽음"이 목표였기에 그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①의 ②의 의미로 아무리 죽어도 다시 살아나야 또는 살아 있어야 그 죽음의 의미가 진가(眞價)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전제되고 선행(先行)되어야 하는 것. 그리고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사람으로서 하나되는 것이니 천사와 하나될 수도 없고 하나님과 하나될 수도 없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나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이고, 나와 함께 그 같은 의미로 죽으심으로써 그 두 가지 죽음의 의미를 충족시킴이요, 그 다음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어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나도 당당히 위치할 수 있게 하심이다.
차이가 있다면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출생하게 된 나는 내 안에 하나님의 아들을 영원히 모심으로써 아버지를 함께 모심이 되므로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養子)이 되어 있는 위치이다. 그만큼 의미도 막중하고 책무도 무겁다. 따라서 아담이 범죄로 죽었을진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나는 더욱 범죄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만일 범죄하면(그래서 회개가 안되면-히 10:26) 아담처럼 용서가 없을 뿐 아니라 이제는 사단과 같은 영물들의 결말과 같이 멸망뿐이다.
그러나 이 '죽고 다시 살아남'은 믿음으로 된 것으로서 나 위해 그렇게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말씀대로 순종(회개하고 세례 받아 죄 용서를 받음으로써)하여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이루어진 즉 믿음으로 이루어진 엄연한 진실이요 사실이다. 단지 인식상의 변화가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을 받은 것은 사람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만큼이나 진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도에 이 믿음이 변하여 자아중심이 되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할"(빌 3:18) 때에는 실질적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10:26,29/6:6) 것이 된다. 내게 관한 한 그것이 현실로 되는 것이다.
고로 이 경우 그리스도로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것이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이니 과거 죄의 대가 청산도 무의미해지고 육신이 내게 원수될 일도 없다. 왜냐면 내 스스로가 육신의 일 곧 자아중심을 선호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믿음"을 지키는 일은 그리스도를 사랑함에서 나타나고 이 사랑은 그 모든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데에서 우러나는 것이 이것이 지극히 당연하니 삶은 사랑이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머리되시는)과 사람 사랑(그들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움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으로 필연적으로 구체화하는 까닭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이시라 한 대로(요 1:1),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 말씀 따라 사는 순종 자체가 우리에게 생명이 되어 그리스도 친히 그 말씀이 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일색(一色)일 수밖에 없으니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이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새기고 우리 이웃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 곧 그리스도를 모든 화제의 주제로 삼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내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내 이마에 붙여 표를 삼고 내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하나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되어 있는"(마 4:4) 그 말씀이 되어 계심으로 우리 구원 받은 사람 각자에게 삶의 법질서가 되어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내용이 내게 생명의 말씀이 되어 있음이다. 예컨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후 5:1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이라든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소유)"(롬 14:7-9)이라 함이 모두 그러하다.
그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룰 것"(요 15:7)이라 하셨고,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자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라"(12:48) 하셨다. 우리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이 절대적이므로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시어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한다"(신 6:15) 하신 것이다.
사랑은 상호간의 작용이지 일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시므로 마땅히 일방적이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비록 죄를 짓는 죄인이라도 그 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하시고 차별 없이 영생을 주시는 것으로서 사단은 교묘한 종교 교리를 만들어내었지만, 자아중심의 "죄인들의 사랑"(눅 6:32)으로서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한다" 하는 것과,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 차원에서 "갑은 을을 위하여 섬기며 사랑하고 을은 갑을 또한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하고 네가 시인하면 나도 시인한다"(눅 12:9/딤후 2:12) 하신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간단히 그 차이를 구별하면 전자는 자아중심에서 즉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데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 부인에서 즉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데에서 그렇게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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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
(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다. (마 23:9) 땅에 있는 이를 '아버지'라 칭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다.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메시아)다. (마 23:11) 너희 중에 큰 이는 너희를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눅 11:53) 거기서 나오실 때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눅 11:54)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꼬투리로 잡고자 하여 목을 지켰다. (눅 12:1) 그 동안에 군중들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리새'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주의하라. (눅 12:2) 감춰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하셨다.
"누가 나를 너희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
(눅 12:13) 군중들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님, 제 형을 명하여 상속분(相續分)을 저와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니 (눅 12:14)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이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니"
(눅 12: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눅 12:17) 심중에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또 말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자. (눅 12:19) 또 내 영혼에게 말하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것이나 (눅 12:20)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 (눅 12:21)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치 못한 이가 이와 같다".
"불을 땅에 던지러 왔으니"
(눅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으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도리어 분쟁(紛爭)케 하려 함이다. (눅 12: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할 것이니 (눅 12: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할 것이다".
(눅 12:54) 또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올 것이라 하니 과연 그러하고, (눅 12:55)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덥겠다 하니 과연 그러하다. (눅 12:56) 위선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별(分辨)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별치 못하느냐? (눅 12: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님께 와서 알려드리니 (눅 13:2) 대답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할 것이다".
"어찌 땅만 버리느냐 "
(눅 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했으나 얻지 못하므로 (눅 13:7) 과원지기에게 이르기를 '내가 3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의 실과를 구하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눅 13:8) 이에 대답하여 말했다. '주인님, 금년에도 그대로 두십시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줄 것이니 (눅 13: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십시오' 하였다".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이는 불의가 없다
(요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시니 (요 7:15) '유대'인들이 기이하게 여겨 말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 (요 7:16)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다.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 것이다.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이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이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 ((요 7:19)에서 (요 7:24)까지는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시므로 앞서 '안식일'에 관한 대목에서 앞당겨 편집해서 올렸으므로 그 쪽에서 참고하실 것-註).
(요 7: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기를,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요 7:26) 보라! 드러나게 말해도 그들이 아무 말도 않는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메시아)인 줄 알았는가? (요 7: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그리스도(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요 7:28)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요 7:29) 나는 아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다". (요 7:30)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이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이었다.
(요 7:31) 군중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말하기를, "그리스도(메시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 7:32) 예수님께 대하여 군중들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요 7:3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다. (요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할 것이다".
(요 7: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기를,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랴. '그리스'사람들 중에 흩어져 사는 이들에게 가서 '그리스'인을 가르칠 터인가? (요 7: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할 것이다'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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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註-하나님의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으나 그 능력으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사용하지 아니하셨으니, 사단이 "그 능력으로 돌을 가지고 떡으로 만들어 요기를 하면 되지 않느냐"는 시험에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 4:4)고 대응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자기를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다시 말해 악을 도무지 행하지 않는 삶이라면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양과 같은 처지일 것인데(10:16) 이대로 무사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 대하여 이상 사실은 그 답변이 된다. 당시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증오하면서도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죽고 사는 그 때가 아직 되지 않았음을 성경은 이와 같이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는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너희(죄인 또는 악인의) 때라 어두움의 권세라"(눅 22:53)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잡지 않았다"(마 26:55)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고 악한 자 마귀가 이 세상의 신으로서 지배한다고 해서 결코 무법천지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강권 통치하시는 것이니 악령 사단도 그 아래에게 자기에게 허락된 범위 내에서만 한해 활동하는 것이다(욥 1:12/2:6).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해하는 일이 일어나고 예수님처럼 "잡히시는" 상태가 벌어질 경우에는 "때"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줄로 알고 동요하지 말 것이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셨고(마 10:29)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게 버려두시지 않는다 하셨고 다 세신다고 하셨다(눅 21:18/마 10:30). 이와 같이 하나님이 철통 같은 철권(鐵拳) 속에 이 세상이 장악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째서 범사에 즉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라"(살전 5:18) 하겠는가.
이런 일에서는 빈틈 없는 하나님의 철저한 장중(掌中)에 놓여져 있는 세상이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만은 말 그대로 절대 자유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모든 면에서 즉 사람이 구원 얻는 일에까지 절대 자유다. 즉 원하면 믿지 않을 수 있어 멸망에 이를 수 있고 동시에 원하는 대로 믿어 구원에 이를 수도 있음이다. 사단의 조종(시험이 아닌, 이 세상 지배자로서의)은 이와 같이 악을 선택하는 경우에 한해서 작동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철권 통치를 증명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3운 법칙(트리니 호모, trini homo)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처럼 악의 때 즉 "어두움의 권세"가 임할 때는 당황하지 말고, 시험하는 때인 줄 알아 자아중심으로 나감으로써 스스로 방어하려는 부질없는 짓을 하는 등의 일이 없도록 주의하고, 전적으로 주님께 내맡겨 매달린 상태로써 그 시험의 때를 면하고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의연히 십자가로 나아가신 것처럼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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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이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腹. stomach)에서 생명의 강물들(rivers of living water)이 흘러내릴 것이다".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榮光)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셨다}.
(요 7:40)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 중에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요 7:41) 혹은 "그리스도(메시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메시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메시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하며 (요 7:43) 예수님을 인하여 군중들 중에 쟁론이 되니 (요 7: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이가 없었다.
(요 7: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그 아랫사람들이 돌아오니 그들이 묻기를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요 7:46) 대답하기를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습니다". (요 7:47) '바리새'파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요 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요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패거리들은 저주를 받은 자다" 하였다.
(요 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요 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만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도 전에 판결하느냐?". (요 7:52) 그들이 대답하기를,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詳考)해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 하였다.
"너희 중 죄 없는 이가 먼저 돌로 치라"
(요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요 8:1) 예수님은 감람산(the mount of olives)으로 가셨다. (요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므로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시는데 (요 8: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 8:4) 예수님께 말하기를, "선생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입니다.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겠습니까?" (요 8: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시험함이었다. (돌로 치라 하면 '로마' 법에 저촉되고 치지 말라 하면 '모세'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니-註).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그들이 묻기를 마지않으므로 이에 일어나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이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물러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다.
(요 8:10)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이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기를 "주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아니하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
(요 8:12)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 8:13) '바리새'파 사람들이 말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다". (요 8:14)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나를 위해 증언해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요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한다. (요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다. (요 8: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요 8:18) 내가 나를 위해 증언하는 이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해 증언하신다". (요 8:19) 이에 그들이 묻기를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요 8:20) 이 말씀은 헌금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함이었다. (요 8:21)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갈 것이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할 것이다".
(요 8:22) '유대'인들이 말했다. "그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할 것이다'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요 8:2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다. (요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하였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요 8:25) 그들이 말하기를, "네가 누구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사람이다. (요 8:26)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니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한다". (요 8:27)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요 8:28)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를 든(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땅에서 들려지시는 것을 가리키심-註)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 것이다.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 (요 8:30) 이 말씀을 하시니 많은 사람이 믿었다.
(요 8:3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居)하면(to abide)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 것이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요 8:33) 사람들이 대답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될 것이라 하는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요 8:3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요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거하는 것이니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할 것이다. (요 8: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안다.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한다. (요 8: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요 8:39)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인데 (요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한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요 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한다".
대답하기를,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다". (요 8:4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을 것이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을 알지 못함이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
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다.
(요 8: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한다. (요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요 8:47) 하나님께 속한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다".
(요 8:48) '유대'인들이 대답했다.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요 8:4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다.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인데 너희가 나를 무시한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신다. (요 8:51)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할 것이다".
(요 8:52) '유대'인들이 말했다.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안다.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할 것이다' 하니 (요 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는데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요 8: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다. (요 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킨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즐거워하다가 보고서 기뻐했다".
(요 8:57) '유대'인들이 말했다. "네가 아직 50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기원 전 2100여년 전 인물-註)'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요 8: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니 예수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요 9:1)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시자 (요 9:2) 제자들이 물었다. "'랍비'(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요 9: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요 9:4) 때가 아직 낮이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밤이 올 것이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 (제자들이 그 소경된 '원인'을 알고자 했기 때문-註)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말씀하셨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다. (요 9: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그가 걸인(乞人, 거지)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말했다.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니냐?". (요 9: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는데 그 사람은 "내가 그 사람"이라 했다.
(요 9:10) 그들이 묻기를,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요 9:11) 대답하기를,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 (요 9:12) 그들이 말했다. "그가 어디 있느냐?". 말하기를 "알지 못한다" 했다.
(요 9:13) 사람들이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갔다. (요 9:14)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므로 (요 9:15)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말했다.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니 내가 씻고 봅니다". (요 9:16) '바리새'파 사람 중에 혹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이가 아니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기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요 9:17) 이에 소경되었던 이에게 다시 묻기를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보느냐?". 대답하기를 "선지자입니다".
(요 9:18) '유대'인들이 그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기를 (요 9: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요 9:20) 그 부모가 대답했다. "우리 아들이고 소경으로 난 것을 압니다. (요 9: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했는지는 알지 못하니 그에게 물어보시오. 그가 장성했으니 자기 일을 말할 것입니다".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시인하는 이는 그 사회에서 축출하기로 결의했으므로 그들을 무서워 함이었다. (요 9: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했으니 그에게 물어보라' 한 것이다. (요 9:24) 이에 그들이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말하기를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안다". (요 9:25) 대답하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입니다".
(요 9:26) 그들이 말했다.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요 9:27) 대답하기를 "내가 이미 말했어도 듣지 않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합니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십니까?" (요 9:28) 그들이 욕하며 말했다.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요 9: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요 9:30) 그 사람이 대답했다. "이상하다! 이 분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시는구려. (요 9: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않으시고 경건하여 그 뜻대로 행하는 이는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압니다. (요 9: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했다 함을 듣지 못했으니 (요 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 9:34) 그들이 대답하여 말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이에 그 사람을 쫓아 내보냈다. (요 9:35)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축출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셔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를 믿느냐?". (요 9:36) 대답하기를 "주님, 그가 누구십니까? 제가 믿고자 합니다". (요 9:3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이가 그이다".
(요 9:38) 그가 말하기를 "주님, 제가 믿습니다" 하고 절하므로 (요 9:3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셨을 때의 "믿는다"는 말씀의 의미가 각별한 것이었기에 "그가 누구이십니까? 제가 믿으렵니다"라는 대답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대답하실 때도 "내가 그이다" 하실 정도였으니 "인자" 역시 각별한 의미로 알아들었고 예수님도 또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註).
양의 목자(牧者)
(요 9:40) '바리새'파 사람 중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말했다. "우리도 소경인가?".(요 9:41)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다. (요 10:1)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羊)의 우리(가축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이는 절도며 강도요 (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牧者)다.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 (요 10:4)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요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한다".
(요 10:6)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요 10:7) 고로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의 문(門)이다.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이는 다 도둑이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마소에게 먹이는 풀)을 얻을 것이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10:11) 나는 선한(좋은)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삯군(고용인)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다. 이리(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이니 이리가 양을 잡아먹고 또 헤친다(흩뜨린다). (요 10: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군(고용인)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요 10:16) 또 이 우리(가축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해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양떼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을 것이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림이다.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
(요 10:19)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요 10:20)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그가 귀신 들려 미쳤는데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고 (요 10:21) 혹은 말하기를,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다.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였다.
(요 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修殿節-11,12월경에 지키는 것으로서 기원전 165년 유다 마카비가 셀류쿠스 군을 격파한 후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혔던 것을 재건, 제단을 깨끗이 하여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것-註)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요 10:23) 예수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porch)에서 다니시니 (요 10: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말하기를,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렵니까? 그리스도(메시아)이거든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니 (요 10:2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믿지 아니한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하는 것인데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한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 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요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萬有)보다 크시니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음이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 10:31) 이에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니 (요 10:32)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는데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느냐?". (요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기를,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다. 신성(神性) 모독죄(冒瀆罪)를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다".
(요 10:3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神)이라 하였다' 하지 않았느냐? (요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 하였거든 (요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신 이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불경하다 하느냐?
(요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너희가 깨달아 알 것이다". (요 10:39) 이에 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셨다.
(요 10: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셔서 거기 거처하시니 (요 10: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기를,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였다. (요 10: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
(요 11:1) 어떤 병든 이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마르다' 남매의 '베다니' 촌에 사는 '나사로'였다.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여자요(눅 7:37-註) 병든 '나사로'는 그 오라비다.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주님, 보십시오. 사랑하시는 이가 병들었습니다" 하니 (요 11:4)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다" 하셨다.
(요 11:5)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8) 제자들이 말하기를, "'랍비'(선생님),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요 11: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이 12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넘어지지) 아니하고 (요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한다".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간다."
(요 11:12) 제자들이 말하기를 "주님, 잠들었으면 낫겠습니다" 하였다. (요 11:13)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므로 (요 11:14) 이에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사로'가 죽었다.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않은 것을 너희를 위해 기뻐하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요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하였다. (요 11:17)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다. (요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5리쯤 되므로 (요 11: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는데 (요 11:20)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으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요 11:21) '마르다'가 예수님께 여쭙기를,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습니다. (요 11:22) 그러나 저는 이제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압니다" 하였다. (요 11:23)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 것이다". (요 11:24) '마르다'가 말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제가 압니다".
(요 11:2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이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7) "주님, 그러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메시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제가 믿습니다".
(요 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동생 '마리아'를 불러 말하기를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였다. (요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가니 (요 11:30)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았던 곳에 그냥 계셨다. (요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 생각하고 따라가는데 (요 11:32)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려 말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습니다".
(요 11:33) 예수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痛憤, 痛忿)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셔서(groaned in the spirit(deeply moved in spirit) and was troubled) (요 11:34) 말씀하셨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말하기를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니 (요 11:35)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요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하고 (요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는가" 했다.
(요 11:38)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으므로 (요 11:3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을 옮겨 놓으라".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말했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니 벌써 냄새가 납니다". (요 11:4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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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註①-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절대로 삶을 즐기게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강조하여 밝히고 있다. 오히려 웃는 자는 화가 있다 하셨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비록 세상을 구원하시러 오셨고 따라서 믿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있는 기쁜 소식, 복된 좋은 소식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오셨으므로 "기뻐하라" 하시고 친히 기뻐하시는 모습을 의도적으로도 나타내시어 웃으실 법도 하지만, 현실이 현실인지라 웃으신 일이 없는 것은 물론이나 이와 같이 눈물을 보이셨고,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통곡을 하신 것이다.
평소 기도하실 때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고 했다(히 5:7).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성경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표이시고 본이신 '한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밝힘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께 그렇게 하셨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사람으로서의 현실은 "눈물"밖에 없고 "두려움과 떨림"만이 있는 이 세상이다.
왜 두렵고 떨 수밖에 없는 현실이냐 하면 아담과 사단 등 악령들의 비극적 사실에서 연유된다. 하나님께서 일단 말씀을 던지시고 경고를 주셨으면 그것이 전부다. 그 나머지는 전적으로 우리 피조물에게 달려 있어 영원한 각자의 운명까지도 스스로 좌우하도록 처음부터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 의지다. 완전한 자유 선택이다. 미리 택하신다는 의미는 미리 아심을 근거로 하는 것이니 이 미리 아심은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 의지를 따라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 알고 계신다는 의미 외에 달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시고 강조하시어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요 12:48)이라 하신 것이다. 똑같이 거룩한 천사들로 창조하셨지만 사단과 악령들은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으니 그들이 애초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결코 막으시거나 간섭하시지 않은 것이다.
아담이 범죄할 때도, 일단 먹지 말라는 경고를 주신 이상 일절 간섭하시지 않고 오늘날과 같은 죽음의 비극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에서도 막지 않으신 것이다. 막으실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께 오직 유일하게 불가능한 일이 즉 하실 수 없는 일이 바로 이런 경우다. 즉 우리가 믿지 않는 경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막 6:5,6)ㅡ이 이상 하실 수 있는 일은 없다.
고로 사람이 하나님을 감히 "제한할"(to limit-"How oft did they provoke him in the wilderness, and grieve him in the desert! Yea, they turned back and tempted God, and limited the Holy One of Israel."(Ps.78:40,41)) 수 있는 것이 이런 경우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무 일도 못하시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과 기타 일부 영역은 "격동하였다(to vex)"라 되어 있어 무의미한 말로 되어 있는데, "사람이 어찌 감히 하나님의 일에 제동을 걸 수 있느냐는 번역자의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인데 이 중대한 경고를 인위적으로 희석시키고 있는 두려운 결과를 내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실 때 항상 강조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신 것이다. 어찌 병든 일에서만 이 "구원됨"이 한정되랴. 우리의 영원한 구원 즉 생사 문제도 이와 같이 우리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무서운 현실'이 되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내 스스로 묶어놓고 나는 스스로 죽음으로 들어가는 꼴이 되는 까닭이다. 이런 현실적인 증명(증거)이 바로 아담의 죽음이요 사단 및 그 일당의 장차 받게 될 멸망이 아닌가.
이런 무서운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조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켜 주심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 은혜는 오로지 우리 스스로 믿고 순종하는 경우에 한한다. 아담과 사단 등 악령들이 믿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그들을 믿도록 하시거나 불신으로부터 건져주시지 않았다. 자유 의지를 일단 주신 이상 일사부재리다. 때문에 믿는 자라야 자기 영혼이 구원되고 영생에 들어가게 된다. 이는 다시 말해 처음에는 믿었어도 중간에 그 믿음이 변하여 "처음 사랑"을 버릴 때(회개하지 않는 경우) 구원이 무효화하고 멸망에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여정(旅程)의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되어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되는 등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하고 "경기장에서 다 달려도 우승하는 자는 단 하나인 것처럼 이와 같이 달려가기를 힘쓰라 한 다음 (고전 9:22-24)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 하고 곧장 이 경고를 한 것이다.
즉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모세 아래에서 세례를 받고(홍해를 건넌 상징적 의미) "성령에 참예한"(히 6:4-7) 바가 되었으나("신령한 식물(食物, 먹을 것)", "신령한 음료", "신령한 반석" 등이 나타내는 의미-고전 10:1-4), "그러나 저들의 다수(多數)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전 10:5/민 26:65/히 3:17) 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이 세상은 "두렵고 떨리는" 세상인 것이다.
그만큼 상태가 심각한데도 정작 당사자인 인생들은 이를 감지하지 못하여 마냥 태평세월을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세상에 빠져 지낸다. 이런 실상을 잘 아는 바울인지라 교회 양떼들을 먹일 때도 눈물로써 했다(행 20:31). 교회 중에 "육신대로 살아 죽게"(롬 8:13) 되어 있는 즉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여 멸망하게 되어 있는 많은 사람"(빌 3:18,19)에게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경고했으나(:18) 듣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그럼에도 여전히 교회 중에 남아 있어 자기 자신을 구원 받은 자로 여기고 있으니까) 있었던 것이다.
내일 심지어는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인생의 참혹한 실로 두렵고 떨리는 현실이 아닌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인생들의 이생(今生)에 아무 의미도 두시지 않았다. 오직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하셨고(눅 13:3,5) 회개하여 살도록 하는 것만이 유일한 의미이고 가치임을 밝히셨다. 사람들은 마치 이생을 한세상 '사는 때', '사는 곳'인 양 여겨, 소위 "억울하게" 죽는 것을 생각하고 "장수하는" 것을 생각하고 "건강하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을 생각하고 그래서 예수님께 그런 질문을 했지만(:1)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는 전혀 빗나간 질문이었음을 우회적으로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신 것은 이 세상의 이런 참상 앞에서 비통해하지 않으실 수 없었기 때문이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왜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던가" 하였을 때 통분해 하셨다는 것은 저들의 믿지 않음을 보시고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살 길이 열리는데도 그들의 믿지 않는 비극적 현실이 또한 더욱 주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한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좌절, 무기력"이라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두렵고 떨게" 만드는 것이다. 믿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덮어놓고 하나님의 지켜 주심과 보호해 주시는 것만 생각하니, 그야말로 뜬 구름 잡고 사막의 신기루에 속는 일이다. 이스라엘이 광야 길로 돌아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사실이 상징하는 바도 이 세상이 바로 그런 사막과 같은 광야라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세례 요한도 나타났고 주님도 황막(荒漠)한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아무나 누구라도 그리스도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신 것은 바로 이 현실을 깨닫고 인생이 모두 죽은 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감해야 하는 필연성을 지적하신 것이다. 완전한 암흑이요 죽음이요 절망인 세상을 알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올 수 없고 세상을 장미 빛의 삶으로 착각하는 한 언제나 그러하다. 오직 사단에게 속아(온 천하를 꾀는 사단이라 한 것처럼-계 12:9) 무서운 속임수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과 인생을 보기 때문에 이런 비극적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일도 없고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참상을, 그렇게 내일에도 죽어 나가고 이 시간 후에도 시체로 변하는 것을 목도하게 하심으로써 부단히 하나님은 경고해주시건만 이를 눈 어두워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솔로몬의 잠언(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쓴)은 이런 온 세상을 가리켜 "미친 마음"(전 9:3)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두렵고 떨리는 것은 그런 말을 한 당사자 본인 솔로몬 자신까지 말년에 범죄하였으니 우리는 도대체 그 생사를 알지 못한다.
왜냐면 성경이 그를 회개한 것으로 기록하지 않고 단지 범죄하였다는 사실만 적시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어디 또 있으리요. 그가 집필한 잠언과 전도서 등이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그 글이 솔로몬 개인의 것이 아니라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 친히 주신 하나님의 지혜 또는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출중한 성경 해설을 하고 옳게 가르쳐도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된 하나님의 것이지 자기 개인의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말씀을 받은 자도 범죄하고 이를 회개하지 않으면 구제 불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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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41) 이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요 11:42) 항상 제 말을 들으시는 줄을 제가 압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군중들을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이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요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요 11:46) 그 중에 어떤 이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알렸다. (요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공회를 모으고 말했다.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요 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러면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강탈해 갈 것이다".
(요 11:49) 그 중에 한 사람 곧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 생각치 아니한다". (요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요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었다.
(요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요 11:54)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는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유하셨다. (註-위의 '가야바'의 말은, "우리가 예수를 죽여야 하는 것은 그가 죽어야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니 그 결과로 그의 죽음은 우리 온 민족이 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따라서 너희에게도 유익함이 된다"는 의미로서 앞서 말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공론을 단순히 집약해서 말한 것뿐이나, '요한'은 이 말을 그리스도의 우리 구속(救贖)의 죽으심을 직접 예언한 것으로 해석하여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가야바'가 별 뜻 없이 말한 것이지만 그 해 하나님 성전의 제사장으로서 그런 뜻 있는 의미의 말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관여하심을 설명한 것이다).
"구원을 얻는 이가 적습니까 "
(눅 13:22) 예수님께서 각 도시 각 촌으로 다니며 가르치실 때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데 (눅 13:23) 혹이 여쭙기를, "주님, 구원을 얻는 이가 적습니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마 7:13)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이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눅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님, 열어 주십시오'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이들인지 알지 못한다' 할 것이니 (눅 13: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은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 (눅 13:27) 그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행악(行惡)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할 것이다.
(눅 13: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나 있는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눅 13:29)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할 것이니, (눅 13:30) 보라! 나중된 이로서 먼저 될 이도 있고 먼저 된 이로서 나중될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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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註②-성경은 인내를 강조한다. 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경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 인내로 결실한다"(눅 8:15) 하셨고,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21:19)이라 하셨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함이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약 5:11)라고 했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競走)를 경주(競走)한다"(히 12:1) 했으며,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으니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계 14:12)라고 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면서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보답을 얻는다...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니 지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셨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패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히 10:35-39)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 말씀을 "나의 인내의 말씀"(계 3:10)이라 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어(인내하셔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게 된 예수님을 바라보자"(:2) 했으며, 우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인내하신) 그 분을 생각하라"(:3)고 했다. 고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해주시기를 원한다"(살후 3:5) 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작고 길이 좁아 찾는 이가 적다"(마 7:13,14). 사람들은 생명 길로 가기를 꺼린다. 생명이 싫어서가 아니라 생명은 얻고 싶으나 우선 당장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까닭이다. 고생 끝에 찾는 길이요 겨우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이다. 전도 여행 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믿음에 들어온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행 14:22)을 미리 경고하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 가르치심에 귀기울여 들은 제자들의 결론이 이상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여쭙기를 "구원 얻는 자가 적습니까?" 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의 말씀은 "적다"라는 단문단답(短問短答) 식이 아니라 "힘쓰라" 하셨고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할 자가 많다"는 경고까지 주신 것이다. 결론은, 힘쓰면 되는 것이다. '적다, 많다'에 있지 않고 '힘쓰느냐, 힘쓰지 않느냐'에 달린 것이다. 단순히 원하고 시도(試圖)하는 차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매달림에 있으니 그래서 우승하기 위한 일념 하나만 가지고 앞뒤 볼 것 없이 오로지 달려가고 있는 자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히 12:1/빌 3:12-15/고전 9:24-10:12).
이것이 바울 사도의 "믿음으로, 은혜로, 선물로서, 행함이 없이 거저 얻는" 구원의 정확한 복음관(福音觀)이다. 죽은 자를 살려주시기까지는 하나님의 영역으로서 때문에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은혜로, 선물로서, 행함이 없이 거저 얻는" 구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단 살려주신 다음의 일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일이 아니라 합께 일함이다. 이 함께 일함에서 내가 할 일이 바로 위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힘씀이다. 내 구원을 위해서인가? 아니다.
이미 구원을 받아 있는데 또 무슨 나 자신의 구원이란 말인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함이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는 즉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사역(使役)에서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24) 것이 필수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빌 3:10,11) 한 것이다. 이고난으로 말하면 우리만이 당하는 고난 고통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우리와 함께 고난 당하시는(행 26:14) 그리스도 앞에서 한가지로 일제히 해산의 고통(인간 고통 중에 최고도로 꼽히는) 중에 있음을 성경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롬 8:22).
이렇듯이 모든 피조물 세계가 산고(産苦) 속에서 신음하며 앓고 있는데도("탄식한다"[롬 8:22]는 우리말 번역은 잘못된 것으로서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될 때 아파서 애써 부르짖는"(계 12:2) 바로 그 상태를 가리킴이다) 사단의 권세에 짓눌려 어두움 속에서 보지 못하는(행 26:18) 인생들만이 천지를 분간 못하여 태평으로 놀고 희희낙락하는 무서운 실정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성경은 "미친 마음"(전 9:3)이라 단정하고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을 표방하고 나서는 세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아주 안일한 "공짜로 얻기만 하면 되는 구원"의 인간 망상(妄想)만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한 눈에 살펴보아도 이상 설명과 같은 기조(基調)로 일관되게 나아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 지라, 인내하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등등. 이런 경고가 싫으면 당시 예수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여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하고 많은 제자가 물러간 것처럼, "이런 것을 누가 믿을 수 있느냐" 하고 다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간단히 끝날 일이다. 누가 믿으라고 강조하지도 않는다. 내 싫으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고 이상스러운 것은 이런 성경의 엄정 엄격한 말씀들을 억지로 비틀어서 전혀 아닌, 성경과는 180도로 다른 내용을 만들어가지고 기독교 간판을 내다 걸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광고하면서 지금까지 역사 오랜 전통으로 성업(盛業)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세계 최대 종교로 군림해 있는 것이다. 실지로 말하면 이것은 아무 이상스러운 것도 될 수가 없다. 오히려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왜냐면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요 지배자(왕-요 14:30)가 악마 사단인 줄 알면 금방 이 신비 또는 수수께끼가 풀려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해 말하면-사단의 공작, 책동인 것이다.
소위 "기독교" 국가라는 전통을 세워 온 이른바 선진 제국이라는 구미 여러 나라가 천인공노할 소돔 고모라 죄를 합법화시키는데 앞장 서고 있는 것도 그 단적인 예다. 이름도 그럴싸하게 "동성 결혼"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城)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심으로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다"(벧후 2:6)는 성경의 경고가 대문짝처럼 크게 내비치고 있어도 거기 "교회"는 꿀 먹은 벙어리, "짖지 못하는 개"(사 56:10)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로마가 그렇게 해서 망했다고 세상에 속한 기본(Edward Gibbon)의 "로마 흥망사(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까지도 사실적인 근거를 들어 경고를 해도 막무가내다. 그러므로 그들(歐美 基督敎 神學界)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할 것도 얻을 것도 없으니 신속히 그들에게서 떠날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갈 일이다.
이런 사실 한 가지로도 사단의 실존 및 활동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불법적 행위에 제동을 걸지 않으시느냐 할 필요는 없다. 악인이나 악령이나 그 악한 소행에 대해서는 형평되게 다루시므로 악령이라 해서 가혹하게 대하시거나 악인이라 해서 사정을 봐주시지는 않는다. 마지막 심판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인간은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악령은 신적인 존재인데 무슨 형평이냐 한다면 그것도 우문(愚問)이 된다. 왜냐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강하신 위력으로 인생들의 배후, 배경이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현재 모든 것은 인간 구원 즉 새 창조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모든 구조와 체제는 조금도 차질없이 이 목적을 위해 진행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인격성을 지닌 피조물의 자유 의지는 100프로 보장되어 있고, 나 한 개인으로서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간섭하거나 강제할 수 없고 오직 나 스스로의 자유 선택에 의해 나의 영원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악마 사단이 시험을 하든 방해를 하든 그 무엇을 하든 이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욥 2:6).
고로 멸망을 해도 나 자신이 들어(첫 사람 아담처럼) 멸망하는 것이요 구원을 받아도 나 자신으로 인해 결정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시고 택하심은 그와 같은 나 자신의 결정에 대해 미리 아시고(벧전 1:2/롬 8:29/11:2) 그 나의 결정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조처를 취해주신다는 의미 이상의 것은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사단의 올무에 걸리지 않고 그 함정을 비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마련해주셨기 때문.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악령들의 모든 속임수와 거짓됨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에게 얽매여 지낸다면 전적으로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허술하게 일을 하실 리도 없고 그렇게 방치해 두시지도 않는다. 오직 성경에 경고한 대로 말씀을 멸시하고 자기 생각과 논리를 앞세우는 자들만이 거치는 돌에 거쳐 넘어지는 것이니 각자는 그런 거침 돌에 스스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고전 10:12) 것 외에 더 신경 쓸 일이 없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고난 받음이 필수이기 때문에(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위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인내는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과도 직결된다. 인내하지 못하는 자, 더 정확히 말해 인내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을 외면하고 소홀히 하여 스스로 모든 말씀의 경고를 무시하는 경우 나는 도태되고 천국 행의 대열에서 탈락하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은 아니다. 인생 구원이 악령들과의 전쟁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그 때문에 "침입해 들어가 빼앗는"(마 11:12/눅 16:16) 것으로 나타내셨으니 이는 다름아닌 전쟁 용어인 것이다. 사단과의 관계에서도 "사단을 이기는" 것으로써 성경은 우리 구원을 줄곧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 아담께서도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는 것은 "이기기"를 힘씀이요 "우승하기" 위해 힘씀이요, 사단을 이기는 것은 사단의 목적이 한 사람이라도 구원 얻지 못하게 함에 있을진대 우리는 단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고전 9:23) 위해 힘씀인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한 바 "복음에 참예함"(:2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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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우에게 "
(눅 13: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아와서 "물러나 여기를 떠나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눅 13:32) 이에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3일에는 완전해질 것이라' 하더라고 말해주라. (눅 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할 것이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마 23:37(눅 13:34)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네가 원치 아니하였다. (마 23:38)(눅 13: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가 될 것이다. (마 23:3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때부터 너희는 "찬송하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먼저 비용을 예산해야
(눅 14:25) 허다한 군중이 함께 갈 때 예수님께서 돌이키시고 말씀하셨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이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이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눅 14: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면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 14:29) 그렇게 하지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이가 다 비웃어 (눅 14:30) 말하기를 '이 사람이 역사(役事)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했다' 할 것이다.
(눅 14: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이 10,000으로써 저 20,000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않겠느냐. (눅 14:32)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화친(和親)을 청할 것이다.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눅 14:34)(막 9:50)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눅 14:35)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버리게 된다. 들을 귀가 있는 이는 들으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눅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2)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이 원망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였다. (눅 1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셨다. (눅 15:4) "너희 중 어떤 사람이 양 100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기까지 두루 헤매지 않겠느냐. (눅 15: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다' 할 것이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눅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하루 품 삯 가치의 화폐 단위)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뒤지도록 부지런히 찾지 않겠느냐. (눅 15: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다' 할 것이다.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使者)들 앞에 기쁨이 된다.
탕자(蕩子)
(눅 15:11)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중에서 제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므로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다가 (눅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궁핍하게 되자 (눅 15:15)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가서 붙여 사는데 들로 보내져 돼지를 치게 된다.
(눅 15:16)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나 그나마 주는 이가 없으므로 (눅 15:17) 이에 스스로 뉘우쳐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기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로 불러지는 것을 감당치 못하고 오직 저를 품꾼의 하나로 거두어 주십시오' 하자" 하고 (눅 15:20)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갔다.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 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하나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였다.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 풍악 잡히며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은즉 (눅 15:27) 대답하기를, '동생이 돌아왔으므로 아버지가 그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기뻐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하므로 (눅 15:28) 그가 노하여 집 안으로 들어가려 아니하니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므로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말했다.
'제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는데 제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다가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은 돌아오니 그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눅 15:31) 아버지가 이에 말하기를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지만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눅 16:1) 또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의 귀에 들어가 (눅 16:2) 주인이 그를 불러 말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된 것이냐?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눅 16:3) 청지기가 속으로 말하기를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다. (눅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할 것이다' 하고, (눅 16:5) 주인에게 빚진 이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이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얼마나 (빚을) 졌소?' (눅 16:6) 말하기를, 기름 100 말이오'. 이에 말했다. '여기 당신의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50이라 쓰라'.
(눅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기를, '당신은 얼마나 졌소?'. 말하기를, '밀 100 석이오'. 이르기를, '여기 당신의 증서를 가지고 80이라 쓰라' 하였다. (눅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했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다.
불의한 재물
(눅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의 재물로써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그들이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이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이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 (눅 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않으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9) And I say unto you, Make to yourselves friends of the mammon of unrighteousness; that, when ye fail, they may receive you into everlasting habitations. (10) He that is faithful in that which is least is faithful also in much: and he that is unjust in the least is unjust also in much. (11) If therefore ye have not been faithful in the unrighteous mammon, who will commit to your trust the true riches? (12) And if ye have not been faithful in that which is another man's, who shall give you that which is your own?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重)히 여기고 저를 경(輕)히 여길 것임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눅 16:14) '바리새'파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으므로 (눅 16:1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이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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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註-"불의한 재물"은 영역으로는 unrighteous mammon(KJV), worldly wealth(NIV)라 하고 있듯이 그리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듯이, 세상에 속하여 자아중심에서 비롯되는 일체의 재물을 말한다. 주님께서 이 불의한 세상을 가리켜,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막 8:38)라 하셨으니, 이런 불의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돈이요, 따라서 재물을 신(능력을 부리는)처럼 섬기게 되어 있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경고를 하실 정도이므로, 당연히 긍정적인 의미의 재물일 수 없고 불의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의 재물이다.
그러므로 이런 재물을 지혜 있게(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이 세대에서는 더 지혜롭게 머리를 굴리는 것과 같이) 사용하라는 말씀이시니 지혜 있게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여 그들을 돕는 데에 활용함을 가리킴이다. 다음과 같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말씀도 그런 경고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 하심은 .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다"(눅 6:26) 하심과 같은 뜻으로서, 이 세상이 음란하고('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음란한 것으로 나타내셨고 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친히 남편이 되시는 것으로(사 54:5)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남편과 신부로(계 21:2) 표현되는 것과 같다) 죄 많은 세대이므로 그런 속성의 절대 다수가 차지하는 대중들이 으뜸으로 치는 내용이라면 당연히 "음란하고 죄 많은" 것일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 앞에 용납이 될 리 없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그런 세상이므로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그리스도 교회의 색깔이 이 세상에서 절대로 환영 받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 도덕적인 견지에서는 일시 세상 사람들의 상찬을 받을지라도(행 5:13) 근본적인 문제에 부닥치면 편이 완전히 갈라지는 것이다. 한 쪽은 보는 것이고(26:18) 다른 한 쪽은 보지 못하니 봄과 보지 못함의 차이가 크고 의견 충돌의 간격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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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나사로'와 부자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purple, 당시에는 부귀를 상징하는 색깔)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며 즐기는데 (눅 16:20) '나사로'란 이름의 한 거지가 헌 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눅 16:21) 부자의 상(床, table)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려 하니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 데를 핥았다.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니 (눅 16:23) 그가 음부(陰府, 저승)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4) 소리쳐 부르며 말했다. ''아브라함' 조상님!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서늘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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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註-영역은 "father" 곧 "아버지"다. 성경은 대개 "아버지"로 통일되어 있으니 "너희 조상"(영역은 "father"-마 23:32)이라 말씀하실 때도 그렇고, 느부갓네살을 벨사살의 아버지로 나타낸 것도 그러하다(단 5:2,11,13,18).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4대손이다. 성경이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다 아담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범죄 결과 영원히 생존하지 못하여 자연계의 짐승처럼 시한부 생명이기 때문에 대를 이어 낳고 낳아가는 것이지, 원래 '에덴'낙원에서 범죄 않고 살았다면 영원히 젊은 아담 부부는 항속적으로 자식들을 낳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게 되면 아담의 자녀들은 남녀 짝은 이루었을지 모르나 그 부모처럼 자녀 생산은 필요 없게 된다. 아담도 생산하고 그 자식들도 생산하게 되면 그로 인한 혼란은 불문가지다. 나중에 율법이 근친 상간을 엄금한(레 18:6,9) 것으로 볼 때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 자연계의 육체로 전락한 탓에 그런 부끄러운 일 또는 원래 있어서는 안될 일 또는 비정상적인 일을 하게 되었으니 그 비극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범죄 후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인간은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시한부 생명이므로 처음 몇 대는 근친 상간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인간의 범죄로 인한 죽음과 더불어 나타나게 된 추악상이요 저주의 일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사실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진실이 다름아닌 아담 부부의 신령한 몸이다. 즉 영원히 사는 몸으로(롬 5:12) '에덴'낙원에 거처하고 있었다는 바로 그것이다. 영원한 몸으로 원래 존재하기로 되어 있었으니 이는 분명 자연계에 속한 몸 즉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몸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몸이 신령한 육체였으니 그 곳 '에덴'낙원 역시 신령한 세계 곧 영계임이 입증된다.
모세 율법에는 근친 상간을 금하시면서도 첫 사람 아담의 아들딸들은 근친 상간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모순이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모든 법도(法度) 그리고 그 행하심은 절대로 이런 모순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 인간의 범죄로 야기된 뒤범벅 즉 모순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어정쩡하고 애매 모호하게 (현재의 저주 가운데 있는 인간들처럼) 어수선하고 불완전하게 되어지는 법이 없다. 처음부터 말쑥하고 깔끔하게 티 없이 창조하시고 또 그 창조를 유지하시는 것이다. 모두 피조물들이 들어서 하나님 창조의 이 아름다움을 흐려놓은 것이다.
이런 모순을 낳게 된 원인이 인간 범죄 즉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의 몸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환원되어 버린 비극적 사실에 있음이 여기서도 명확히 드러나지만, 원래는 우리 모두가 아담의 "아들"("딸"이 아닌)들이었어야 하는 사실은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남으로써 각자 저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이치와 같다 하겠다. 낳는다는 것은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른 닮은꼴을 낸다는 의미다.
아담 부부가 '에덴'낙원에서 자녀를 생산했다고 (범죄하지 않음으로써) 가정할 때, 자기 형상과 모양을 낸다면서 자기처럼 생산하는 자녀를 낳아야지 생산을 못하는 자녀를 낳는다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면,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역시 생산하지 않는 육체로 창조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자가 있어야 생산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여자는 아담 창조와 동시에 창조된 것도 아니고 에덴낙원에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이 창조된 이후에야 창조된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 창조된 아담은 그런 남녀 구별을 지니지 않은 즉 성적 특징이 없는 신체 구조로 되어 있었다는 증명이다. 여자가 생기면서 성별이 있는 신체 구조로 변환된 것이다. 고로 바로 그런 형상과 모양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논리다. 즉 그 자식들은 아예 남녀 성별이 필요 없는 애초의 그 아담의 모습으로만 생산되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담 부부가 신령한 몸으로 '에덴'낙원에서 영원히 살면서 자식들을 낳았을 경우를 생각해본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아담)을 남녀로 만드신 것은 단지 자식 생산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사람이 홀로 지냄이 좋지 않다" 하셨지 "생산하기 위해서는 짝이 필요하다" 해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 여자가 없더라도 아담 홀로 그 고유의 특성(남녀 성별로 구분되지 않은)을 따라 자식 생산이 얼마든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초자연계 몸의 막강한 능력에다가 주변 영물(靈物, 천사)들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자가 생겼으니 자식 생산은 주로 여자가 맡게 될 역할이었을 수는 있다.
또 자식 생산이 무한 대로 지속될 일도 아니다. 일정 기간 인간이 일정 수효로 채워지면 생산은 종료되고 영물들처럼 선악간에 심판이 내려져(물론 아담이 재판장이다) 그 선악을 따라 세계는 재편되고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때에는 아담 역시 더 이상 남녀 성별로 나누어지지 않고 많은 자식들처럼 완전한 속성에로 환원될 것이었다. 이제까지 남자의 속성과 여자의 속성으로 분담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개체적으로만 보면 불완전한 것이다. 남자도 애초 창조되었던(남성으로 육체 구조가 달라지기 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여자 역시 남자가 그렇게 변환되면 자연스럽게 덩달아 변환될 수밖에 으니 남자(아담)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차 영원 세계에 들어가면 남녀 성별이 없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왜 이렇게 단정하게 되느냐 하면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한 분이시지 남녀로 구분된 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남성으로 계시면 여성이 되어 있는 이들이 서운하게 될 것이요 여성이시면 남성된 이들이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왜냐면 마지막 아담과 닮은꼴이어야 하므로 어느 쪽으로든 평형상 문제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다 남성 같이 늠름하고 동시에 다 여성 같이 아리따우면 이것이 형평 차원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조상에게 제사하는 종교
공자는 사람 삶의 도리(한 몸 구조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말함이니 이는 상식 수준)를 강조하면서 너무 지나쳐 죽은 조상까지도 공경해야 한다고 하여 조상에게 제사하도록 한 것이 그 특징이자 흠이다. 불교는 자유 의지를 행사하도록 창조된 역시 평범한 상식 수준으로서의 인간의 책무와 자주 독립성을 강조한 것이야 당연하나, 거기서 지나쳐 창조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 수준에까지 이르고 사람이 곧 신의 경지에 이른다는 망상이 또한 그 특징이자 흠이다.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사람이 죽으면, 악령들이 인간과 관계하여 퍼뜨린 그 후손들(성경은 이를 "네피림"이라 한다-창 6:4)이 죽으면 귀신들이 되는데 그런 귀신들 외에는, 살아 있는 인간과는 전혀 상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악인은 그 부자처럼 불 가운데 처해 있기 때문에 그러하고 거지 나사로와 같이 좋은 곳에 있어도 이 세상 인간과 접촉할 아무 필요가 없으므로 즉 선한 뜻으로는 산 자들과 접촉하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하나님께서 아예 이를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은 반드시 목적이 있는 법인데 무의미하게 할 일 없이 세상에서 배회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용하실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으로서는 일단 죽으면 제각기 자기 곳으로 가기 때문에 세상에 남아 있는 후손들과 일절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네피림의 후손들이 죽은 영혼은 악령들의 분신이므로 구원에 해당되지도 않을뿐더러 아담의 후손들이 가는 곳에도 가지 못하므로 죽은 자의 넋으로서 그냥 세상 중에 배회하기 때문에 접촉이 가능한 것이다.
무당 등 영매(靈媒, a spirit/psychic medium)를 통한 소위 "사자(死者)와의 대화" 등이 모두 이런 유에 속한다. 예수님이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무저갱(無低坑,a bottomless pit)에 들어가게 하지 마시기를 애원한 사실에서도 보듯이(눅 8:31) 무저갱은 그런 귀신 등 네피림을 일시적으로 즉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가두는 형벌의 장소다. 때문에 "사단의 후손"(창 3:15)인 적 그리스도 즉 "불법의 사람" 또는 "멸망의 아들"(살후 2:3)이 이 무저갱에서 나오게 된다(계 11:7).
왜 무저갱에 갇혀 있었는가 하면 아비(사단) 대신에 들어가 있었거나 아니면 세상에 있을 때 그 동류(同類)들보다 특별히 악한 행동을 하여 그 결말로 그렇게 되었거나 아니면 둘 다 그 이유일 수 있다. 아비를 대신한다는 말은, 사단은 실질적인 이 세상의 지배자요 신(神)으로 군림해 있으므로 그런 동일한 불법을 저지른(즉 이 세상에 네피림을 퍼뜨린) 일부 다른 악령들처럼 무저갱에 들어가는 형벌에 처해지는 것이 일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유 1:6,7). 즉 아비인 사단 대신 그 무저갱에 들어 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아비 대신 무저갱에 있던 네피림 족(族) 인간인 "악한 자"(살후 2:9)가 세상에 나와 일시 활동하다가 최종적으로 불 못에 들어가면서 사단은 과거 자식이 있었던 무저갱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가 처음부터 들어가 있어야 했던 자리다.
그래서 이 환생하는 네피림 족을 가리켜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계 17:8)라 한 것이다. 소위 환생이니 전생이니 윤회니 하는 따위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하는 사단이 속임수다. 속임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그렇게 환생, 윤회한다는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즉 네피림의 죽은 넋들이 이 지상을 방황하며 떠돌다가 그네들의 일정한 규례에 따라 임의로 인간(여자)의 태 속에 들어가 다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령들이라 하여 불법으로 별종의 인간들을 생성시키는 마당에 이런 일인들 왜 못하겠는가.
구약성경에 신접(神接)한 여인이 사울 왕의 명령을 받아 사무엘의 넋을 불러 올리는 장면이 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사무엘"이라고 했다(삼상 28:12). 그러나 동시에, 사울 왕이 그 여인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했을 때 분명히 "신들이 올라오는 것을 본다"(:13)고 말했음을 적고 있다. 우리말 번역은 그냥 "신"이라고만 하여 단수(單數)로 나타냈으나 영역은 "gods"이니 곧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다.
그러므로 사무엘의 혼백이라면 그냥 "신이 보인다"고 했을 일이지 복수로서 "신들"이 보여질 리가 만무한 것이므로, 성경은 이로써 이 사무엘의 넋으로 행세하는 것이 귀신들의 조화이지 실제 사무엘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이라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무엘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신접한 여인을 기준으로 표현하고 있음이다. 성경은 아주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런 표현법을 자주 활용하고 있다.
거기에 어떤 설명을 의도적으로 덧붙이지 않고, 오직 그런 객관적 관찰만을 통하여 읽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가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과연 설득력 있는 표현법이라 할 것이니 설명을 시도했다가는 의미가 예기치 않게 복잡해지고 꼬일 수도 있어 각종 곡해를 야기시킬 수 있는 까닭이다. 세상 종교에서 "사람의 혼백 운운" 하는 것은 이런 한정된 의미가 있는 것이고, 이런 아주 제한된 사실을 가지고 전체 인생들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악령 사단의 조종으로 말미암는 속임수이고 거짓임을 재차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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