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2일 목요일

통합 복음 (7)






(29註-"안식일"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안식일(安息日ㅡSabbath)에 대해'라는 항목으로 별도 주를 달았으므로 참고하실 일이나, 여기 다시 약간 더 설명이 필요한 것은, 위의 말씀에서 일반적으로 "안식일"이라 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같은 말씀을 기록해도 마가는 "안식일"은 언급하지 않고 단지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신 것으로만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마태는 물론 직접 들었으므로 더 잘 기억하여 그렇게 기록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만일에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의미의 "안식일"이고 절대로 "쉬는 날"로서의 의미가 아니었다면 마가가 그 "안식일"을 빼먹을 리가 없다. 주님께서 만일 그런 의미 즉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로서 즉 안식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이라는 말씀보다 더욱 더한 무게가 있는 것이 "안식일"이 되겠기에 그렇다.

마가가 다른 사도들로부터 듣고 기록할 때 그 사도들(사도)이 강조한 그대로 기록했을 것이니 그 사도들(또는 사도)이 만일 안식일을 중시했다면 반드시 그런 투로 말했을 것이고 따라서 마가가 안식일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고로 그냥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만 기록한 것을 보아도 사도들이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음이 명백하다는 얘기다.

사도들이 이와 같이 그런 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 또한 명백하니, 그것은 보통 우리가 말하는 "쉬는 날"이지 특정한 날 곧 '유대'인의 안식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는 사실을 위주로 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기에 그러하다. 모세 율법의 본령(本領)인 성전이 멸절되어 사라지는 마당에 안식일을 지킴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물론 과거에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성전이 훼손 파괴되는 일이 벌어졌었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성전은 재건되어졌다. 그래서 그 성전이 다시 수축되기까지 '유대'인들은 충실히 안식일 준수는 물론 다른 모세 율법을 지켰다. 왜냐면 그리스도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뿐만 아니다. 그렇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뜨려지고(주후 70년) 지금까지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가 건립되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도 그들의 성전이 세워진 적이 없다.

제사장들을 세워야 하는데 레위 족속을 오늘날 찾아낼 재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의지는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그리스도께 대한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의 흔적은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전과 그리고 레위 족속으로 말미암는 제사장과 기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터에 안식일 하나만 덩그렇게 남아 지켜진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우스운 일이 아닌가.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안식일 즉 7일 중 1일만 하나님 섬기는 날이 아니라 매일 즉 1주 7일 모두가 하나님 섬기는 날로 선포되는 내용이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즉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선지자의 말한 대로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해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하심과 같다"(행 7:48-50)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믿는 우리 각자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니 우리의 일상생활 곧 1년 365일이 하나님께 바쳐진 날 곧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로 선포됨이다. 스데반이 말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히브리서에 명시하지 않았던가. "제사장 직분이 바뀌니 율법도 반드시 바뀌어져야" 하는 것이다(히 7:12). 수입의 1/10만 주님께 바쳐지는 것이 아니요 10/10 전부, 일주 하루만 주님을 섬기는 날이 아니라 평생 그리고 나의 존재 자체가 주님을 위해 있고 나 자신을 위해 있지 않는다는(고후 5:15/롬 14:8) 것이 "바뀐 율법의 강령"이 됨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 하신 뜻이 바로 이것이다. 안식일이 영원히 하나님을 위한 날, 하나님의 날로 정해진다면 그렇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다. 다시 말해 모세 율법에서 말하는 안식일 개념은 우리 존재 전부가 원래부터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아주 초보적인 안내였기 때문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하신 것이다.

어찌하여 복음을 종교로 만들고자 하는가? 종교에는 구원이 없음을 왜 모르는가. 종교는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구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생활이 종교가 아니고 종교가 생활이 아니다. 승려나 신부나 교역자나 종교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 이들 외에는 종교와 생활은 별개다. 그러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은 원천적으로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다.

내 것이 없다는 것은, 내 것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 친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로서 성령으로 나와 하나되어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고로 주님을 나의 것(소유), 나의 힘, 나의 생명으로 매일 매시 누리고 번성하는 나의 일상생활이므로 따라서 나의 삶 자체에서 내가 항상 나타내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아래에 모은 각 구절의 내용들은 이미 12제자들을 전도차(次)로 둘씩 보내실 때 하신 말씀이나, 여기에 와서야 수록하는 것은 미래에 관한 말씀으로서 별도 편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전도한다는 것은 핍박과 갖가지 고난을 감수하며 이를 항상 각오하면서 해야 하는 일이므로 이렇게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다시 오시는 사실처럼 위로되는 것도 없다.

이 같이 다시 오심에 대한 말씀과 그리고 대담하게 말씀을 전해야 할 필요성에서 여러 가지 위로와 경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미래에 관해 말씀을 하신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제자들이 여쭈었기 때문이다. 이번 한 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앞서 전도차로 보내실 때처럼 기회가 닿는 대로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가르치셨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 한데 모아 편집한 것이다.

아래 예수님의 말씀(답변으로 주신)을 종합할 때, 복음서에 기록된 혹은 말씀하신 순서는 무시하고 내용으로만 분류하여, 중복되는 말씀을 삭제하는 형식으로 편집했으므로 양해하시기 바란다. 삭제를 하더라도 약간이라도 표현이 다르면 그 다른 점을 일일이 나타내고 임의로 버리는 일은 없도록 했다. 그리고 주님 당시만 해도 지진이 일어나면 국지적(局地的)인 사실로서만 알지 세계 각지에서 지진이 처처에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없었던 상황인데도, 마치 오늘날 한 곳에만 있어도 각지의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은 이미 우리 세대에 통신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세상 곳곳의 사정을 집안 일처럼 알게 되어 있는 오늘날의 실정을 예언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뒤에 또 언급이 되겠지만 예루살렘 멸망의 일과 주님 재림하심으로 세상이 멸망할 것을 나누어 말씀하신 바를 분간 못하고 그냥 기억 나는 대로 적고 있어, 마치 주님 재림의 날에 예루살렘 멸망의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인 양 착각하기 쉬우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혼동하기 좋도록 기록되어진 것 자체가 오히려, 진실만을 말하고 결단코 지어낸 말을 삽입하여 만든 것이 아님을 자체 증명함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데 당시 기록한 사람들은 그 말씀 자체만 기억하여 전달했을 뿐 그와 같이 엄밀히 구분하여 기록했어야 하는 것을 간과한 점 그대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에 이 자체가 그 진실성을 증명해 보임이다. 만일 거짓말로 지어낸 것이라면 그런 엄청난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보통 머리로서 되는 일이 아닌데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비상한 머리로 "세상 마지막 날에 산(山)으로 피신하면 산다"는 따위의 정신 나간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혼동을 수정하도록 일깨워 주시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두신 것이다.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그런 효과를 나타내도록 하심이다. 과연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신가. 만일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하셨다 해서 즉 둘을 명확히 구분해서 기록했다 해서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말하겠는가. 오히려 이런 옥에 티 같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웅변하는 것이 되고 그런 허튼 말을 하는 사람들의 입을 유구무언으로 봉쇄해버리는 결과로 반전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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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곧 그 때에

(여기서도 성령의 정체 즉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심을 밝히신 대목이므로 한데 섞지 않고 제각기의 구절들을 그대로 별도 수록했다-註).

(눅 21:12)(막 13:9)(마 10:18) 이 모든 일 전에 나를 인하여 (내 이름을 인하여) 또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감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고관들(총독들) 앞에 끌어 가므로 그들 앞에 설 것이니 (끌려갈 것이니), (눅 21: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이는 그들과 이방인(불신자)들에게 증언할 기회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내가"-"성령이"-"아버지의 성령이"

(눅 21:14) 그러므로 너희는 대답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눅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口材)와 지혜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마 10:17) 사람들을 주의하라. (눅 12:11) 너희를 회당(會堂, 예배 처소)과 공회(公會, 공적인 일을 의논하는 곳)에 넘겨 주겠고 그들이 너희를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정권 잡은 자들과 권세 있는 이들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눅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실 것이다.

(막 13:11)(마 10:19)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라. 무엇이든지 그 시에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실 것이니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다.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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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註-이것이 또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의 하나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진실이요 결코 인간이 만들어낸 꾸민 이야기가 될 수 없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다. 이런 말은 그 어느 거짓말쟁이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실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 한 나라를 몽땅 장악할 수도 있을 기회가 될 최고 통치자 앞에서의 전도를 앞두고 어찌 그런 '미리 말할 것을 연구하는' 마음이 없으리요. 그러나 그런 것을 금한 것이다.

그러니 만일 성경이 지어낸 것이고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되어 있다면 이런 내용을 담아 두겠는가. 더군다나 그렇게 미리 연구하지 않는 것을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세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그 종교의 자멸과 폐쇄 이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해당 종교의 확산을 꾀하겠는가. 또 그런 확산 확대의 목적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그런 거창한 거짓말을 만들어내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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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

(눅 17: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할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 하여

(눅 17:22)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때가 이를 것이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할 것이다. (눅 17: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보라!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할 것이나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눅 17: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 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할 것이다. (눅 17: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가 되어야 할 것이다".

(31"註-이제 곧 등장하게 될 "멸망의 아들", "악한 자" 적(敵)그리스도도 여기 해당된다. 그는 처음부터 그런 초자연계 몸으로는 올 수 없기 때문.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초자연계 몸으로써 다시 오신다. 왜냐면 자연계 몸으로는 이미 오셨고 그래서 죽으셨다가 초자연계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 그리스도(구원자)의 의미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라는 데에 있다. 즉 우리와 똑같으셔야 하는 것. 우리가 아담의 몸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음과 같은 이치. 우리와 똑같으시려고 우리와 같은 이런 자연계 몸을 입으시고 자연계 몸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받으신 끝에 죽으신 것.

"약하심"(고후 13:4)으로 죽으신 다음에는 그것으로 일단 종결되어야지 부활하셨다고 해서 그 초자연계 몸으로 세상에 나타나시면 안되는 것은 그리 되면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다 초자연계 몸이 되어야 하기 때문. 왜냐면 마지막 아담이시니까 모든 인생들은 아담(마지막)의 닮은꼴이어야 하기 때문. 지금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히 6:6/10:26,29)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되는 것이니 그런 악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

고로 믿을(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모든 뜻에 순종할) 사람은 다 믿어(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과 계명에 복종하여-빌 2:12) 시험을 거쳐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명한(고후 13:5) 다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니 그제서야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초자연계(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것. 부활하셨으므로 마땅히 그 부활하신 몸으로 이 세상에 계셔야 하나 그렇지 않고 오늘날까지 "하늘이 그를 한시적으로 받아두는"(행 3:21) 이유 중의 하나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無酵節)이 가까우므로

(눅 22: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無酵節, 유월절이 상징하는 바 '모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하지 않은 빵을 유월절을 포함한 7일간 먹는데 이 기간을 통틀어 무교절이라 한다. 즉 유월절로써 시작되는 무교절이니 그 일주간(7일)에서 첫날은 그것이 그 주의 무슨 요일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안식일이었음)이 가까우니 (마 26: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마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팔릴 것이다" 하셨다.

(막 14:1) 2일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인데 (마 26: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우두머리)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눅 22:2)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마 26:4) 예수님을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었다. 고로 궤계(원칙에서 벗어난 탈법적 방식)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의논하면서 (마 26:5)(막 14:2) 말하기를 '민요(民擾, a revolt)가 날까 하니 명절에는 말자' 하였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막 14:3)(마 26:6)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셔서 식사하실 때에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값지고 귀한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4)(마 26:8) 제자들이(어떤 사람들이) 보고 분하여 서로 말하기를,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느냐? (마 26:9)(막 14:5)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 이상의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므로, (마 26:10)(막 14:6)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여자를(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막 14:7)(마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마 26:12)(막 14:8) 이 여자가(그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함이다). (마 26:13)(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념할 것이다".

'그리스'인 몇이 찾아와

(요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그리스(Greece)' 사람 몇이 있는데 (요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말했다. "선생님(Sir), 저희가 예수님을 뵙고자 합니다". (요 12:22) 이에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가서 여쭈니, (요 12:23)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요 12:24)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이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이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마 10:39와 같은 내용-註)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이도 거기 있을 것이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요 12:27)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 저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습니다. (요 12: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하는 소리가 났다.

(요 12:29) 곁에 서서 들은 군중들은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요 12:30)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다.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마귀 곧 이 세상 신(神, 고후 4:4)을 가리키심-註)이 쫓겨날 것이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려지면(들려 올려지면-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가리키심-註)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다".

(요 12: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을 보이심이었다. (요 12:34) 이에 군중들이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메시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는데 선생님은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할 것이라 하십니까? 이 인자는 누구입니까?"("들려진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처형된다는 말로서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당시 상용어가 되어 있었던 듯하고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말씀의 뜻도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註).

(요 12:3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이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한다.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셨다. ("He did hide himself from them"-자기를 감추셨다).(요한은 이 "숨으셨다"는 표현을 앞에서도(요 8:59) 사용한 바 있다. 대중 앞에 의도적으로 나타나시지 않으려 하심을 말한 것 같다. 우리 위해 죽으시되 정밀하게 때와 시간에 맞추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위함이니 이에 대한 것은 이미 앞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사실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註).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요 12:37) 이렇게 많은 기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요 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으로서 기록되기를, "주님, 우리가 말한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팔이 뉘게 나타나셨습니까?" 한 것이다. (요 12: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말하기를 (요 12: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킴으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함이라' 하심을 이루시려는 것"이라 한 것이다.

(요 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요 12:42) 그러나 관리들 중에도 그를 믿는 이가 많으나 '바리새'파 사람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부터 (사회적) 축출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었다. (요 12: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 팔려는 생각을 넣어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사람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눅 22:3)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사람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막 14:10) (마 26:14)(눅 22:4) 이에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줄 것이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므로 (눅 22:5)(막 14: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자 ((마 26:15) 은(銀) 30을 달아 주니) (눅 22:6) '유다'가 허락하고 (마 26: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님을 군중들이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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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註-"은 삼십"은 은화(銀貨)로서 30 세겔(shekel-'유대'인의 화폐 단위)을 말함이니 노예 한 사람을 풀어 주는 즉 속량(贖良)해 주는 속전(贖錢-몸값)이라 한다. 따라서 메시아 예수님이 바로 "또 하나의 나 자신"이실진대 이렇게 몸값에 팔리셔서 죽으시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그 몸값으로 속량이 되어 풀려 남을 뜻한다. 그 몸값을 나중에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되돌리려 할 때 대제사장들이 이를 "피 값"(마 27:6)이라 한 것처럼(때문에 이 또한 상징적으로 의미가 심장하다), 나를 속량하시는 그 속전이 바로 예수님의 피라는 뜻이다. 곧 그 생명을 나를 위해 버리심으로써 나의 몸값으로서의 대가(代價)를 지불하신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유월절 어린 양을 사기 위해서는 자기 집에서 양을 기르지 않는 한 돈을 주고 사야 했다. 희생 양으로서의 예수님은 이와 같이 유월절 양으로서 죽으시기 전에 그런 팔고 사는 거래 행위로서 상징적으로 나타내어진 것이다. 그러나 꼭 이와 같이 모든 일이 빈틈없이 이루어지기 위해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12 제자 중 하나로 들어오게 되고 나중에 이 같이 그 스승을 팔게 되고 그 판 값이 노예 몸값이라는 판에 박듯이 짜여진 각본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가룟 유다 자체가 희생물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양 한 마리 잃으면 나머지 99마리의 양을 두고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온 산중을 뒤진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범죄하게 되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각본 따라 짜여졌다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위와 같은 오해는 어디까지나 한정적이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렇게 인간적이라면 하나님이시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하나님되시는 것은 여전히 그 하나님다우심에 있으니 인간이 이에 미친다면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라 할 것이 아닌가. 인격성을 갖춘 모든 피조물(인간이든 영물인 천사 및 악령이든)은 절대적인(고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는 법이 없다) 자기 의지대로 자유 의사로 하는 것이나, 이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미리 보시고 아신다는 그 차이다.

이는 조물주로서는 당연하니 우리 인간 역시 무엇을 제작할 때는 그 만들어진 것이 어느 정도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 미리 예상하고 머리에 그리지 않고는 착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바로 이 미리 보시고 아심에 따라 개별적으로 피조물(그것이 인간이든 영물인 천사나 악령이든)의 자유 의지를 그대로 보장하신 채 마치 그것을 하나님 마음대로 조종하시듯 하는 '일의 결과'만을 나타내신다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원리원칙주의는 항구불변이니 즉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절대로 꺾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꺾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피조물 세계 자체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한번 자유를 주심으로써 창조하신 후 이 자유를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신다면 한번 아신 일을 번복하는 일이 되므로 이 경우 법질서도 원리원칙도 없게 되는 까닭이다. 고로 우리의 지식과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한계에 부닥쳤을 때는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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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만찬

(눅 22:7)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렀으므로 ((막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마 26:17) 무교절의 첫날에)('유대'인의 날 수 계산은 해가 지면서 시작되어 다음 날 해 질 때까지 24시간의 하루이다. 고로 여기서부터는 저녁 시간이 되며 이 날 밤을 새우고 새벽녘에 잡혀 가시게 된다-註)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기를 "선생님께서 유월절을 잡수시도록(우리 식으로 말하면 명절 음식을 잡수시도록-註) 저희가 어디에서 준비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니 예수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눅 22:8)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가서 우리를 위해 유월절을 준비해서 먹게 하라" 하시므로(눅 22:9) 여쭙기를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니) 말씀하셨다.

(눅 22:10)(막 14:13)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니 그를 따라가서 (막 14: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의 말씀에((눅 22:11) 선생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나의 객실(客室)이 어디 있느냐' 하신다'고 하라. (막 14:15)(눅 22: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일 것이니 거기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여라". ((마 26:18) "성안 아무에게 가서 말하기를 '선생님 말씀에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셨다'고 하라" 하시니) (막 14:16)(눅 22:13)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마 26:19)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通過節)을 예비하였다.

'요한', '누가', '마태', '마가'의 엇갈리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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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註-유월절이 상징하는 바 '모세'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하지 않은 빵'(이것이 무교병[餠, 떡])을 유월절을 포함한 7일간 먹는데 이 기간을 통틀어 '무교절(無酵節)'이라 한다. 고로 무교절 첫날이란 것은 바로 유월절의 시작임을 뜻한다. 유월절에 잡는 양은 원래부터 상징성을 띤 것으로 메시아 예수님의 우리 위한 죽으심 즉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벗어나던 날 밤에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그렇게 피가 발려 있는 집은 멸망시키는 천사가 들어가지 못하고 지나쳐 갔으며(通過) 피가 발려져 있지 않은 이집트 국민의 모든 집에는 천사의 손이 미쳐 그 가정의 맏아들이 예외없이 몰살 당한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날을 '요한'은 분명히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요 19:14)이라 했으며 그 시간까지 밝혀놓고 있다.

반면 '마태'는 "무교절의 첫날"(마 26:17) 이라 한 것이다. 무교절의 첫날이면 바로 유월절인데 유월절은 그 전날 즉 유월절 예비일에 잡은 양을 먹고(출 12:) 그 피를 문설주(문의 양쪽에 세워 문짝을 끼워 달게 된 기둥)와 인방(引枋, 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문이나 창의 아래위로 가로지른 나무)에 발라놓는 날이다. 다시 말해 '마태'는 이 기록에서 약간 착각을 한 것이다.

이런 착각은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즉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을 잡는 날"(막 14:12)이라 하고 있다. 무교절의 첫날과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을 동일시한 것이다. '마가'와 '마태', '누가'로서는 이는 명백히 잘못된 날짜 판단이다. 또 잘못된 지식이다. 원래 '마태'는 율법에 정통하지도 않거니와 '마가'나 '누가' 역시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만을 중시했던 탓에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당시 상황을 증언자들로부터 듣고, 들은 대로 기록하기만 한다는 자세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요한'은 당시 젊었고 기억력이 비상하므로(그의 복음서 기록에서 예수님 말씀을 소상하게 증언해 주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시간까지 대는 것을 보아 그 날짜 관념이 당시 12 사도로 그 일에 참여했던 '마태'에 비해 월등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우선 보기에 손발이 맞지 않은 4복음서 자체가 진실된 다시 말해 꾸며댄 거짓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실 그대로의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고 있음을 앞에서도 강조했다. 이런 서로 엇갈린 표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 누구도 감히 손대지 않은 것을 보라!

성경이 만일 꾸며낸 즉 인간의 손과 말과 생각이 그리고 의지가 처음부터 주도하고 장악하여 대목마다 빼고 끼우고 다듬고 한 것이라면 이런 것을 방치해두겠는가. 어림 없는 일이다. 성령께서 친히 이렇게 되도록 즉 고스란히 처음 기록된 그대로 버려두도록 섭리 관장하셨기 때문에 인간 그 누구도 감히 손보려 하는 마음을 먹지 못한 것이다.

성경의 축자(逐字) 무오류(無誤謬)

이렇게 되면, 성경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글자 하나하나에도 절대 오류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로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나,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졌다는 의미는 그 내용의 진실성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약점마저 감추고 싸매고 손질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그대로 두는 것이 그 내용의 진실성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굳이 없애려 하시겠는가.

메시아 예수님의 부활이면 그 부활하셨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면 그로써 충분한 것이다. 오히려 위의 설명처럼 그런 착오에 의한 것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면 더욱 더 그런 증거가 되는 마당에서는 유리한 것이다. 그런 엇갈린 기술(記述)들이 부활의 증언에 장애되기커녕 오히려 덕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활만 아니고 다른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고 의문을 달 것인가.

그 다른 경우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것이 성경인데 만일 그러한 것이 진리를 밝힘에 장애가 된다면 살아 계신(이 점 다시 역설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묵과하실 줄로 감히 생각하는가? 그런 경우 절대로 묵과하실 리 없다. 가령 위의 예와 같이 '마태', '마가', '누가'가 유월절 첫날이 바로 희생 양을 잡는 날이라고 적었다 해서, 구약에 기록되고 그리고 지금도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대로, 양은 그 전날 곧 유월절 예비일에 잡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의 권위가 흔들리거나 그것이 신빙성이 없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그렇게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심이 분명하다. 왜냐면 그렇게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경의 자구(字句) 하나하나가 다 진실이고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우리도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거니와 하나님께서도 그런 데에 대해서는 괘념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위에서 마태, 마가, 누가의 오류를 지켜보고 있지 않는가.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그 날에는 밀을 손으로 비벼 입에 틀어넣어도 안되고 병을 고쳐도 안되는 등 여러 가지를 금하고 그것을 어길 때는 무조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해 버리고 단정해 버린 당시의 유대인들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도리어 안식일에 노예가 되어 있는 꼴과 같다. 그런 추태를 당시 '바리새'인들은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이 있음으로써 우리 인간이 무엇을 배우고 깨닫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하는 그 본질적인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공연히 그 껍데기만 붙들고 앉아 남의 행동이나 판단하며 손가락질하고 저울질하는 데에만 기준을 삼고 있는 어리석음이다. 당시 '유대'인의 경우와 같이 그런 것은 자멸의 길이니,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경우일수록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으므로 경계를 요한다.

왜냐면 속이 비어 있으므로 겉모양이나마 유지를 해야 본성적으로 안도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그런 외형적인 것에 매달려 모든 판단을 그런 식으로 해버리게 된다. 내면적인 충실을 기하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 그런 외형에 대한 열심이니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래서 항상 "섰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덫과 함정과 걸림 돌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못가노라 쉬어서도 안될 일이지만 잘 가노라 닫는(빨리 뛰는) 일도 없어야 하는 것. 대사도 '바울'이 누가 감히 교만해할 사람이라고 보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내면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런 '바울'이라도 교만할까 저어하시어 그 육체에 "가시"(고후 12:7)를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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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마 26:20)(막 14:17)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그 열 둘을 데리시고 와서 사도들과 함께 ((눅 22:14) 때가 되자) (눅 22:15)(막 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 26:21)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다. (눅 22: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할 것이다".

(다음 기록에서는 누가와 마태(혹은 마가)의 서술이 약간 다르므로 그 다른 대로 두 가지로 구별해서 아래에 소개한다-註). (눅 22:17) 이에 잔을 받으셔서 사례(謝禮)하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눅 22: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할 것이다". (눅 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다".

(마 26:26)(막 14:22)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셔서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하시고 (마 26:27)(막 14:23) 또 잔을 가지셔서 사례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실 때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 26:28)(막 14:24) 이것은 죄 용서함 받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마 26:29)(막 14:25) 그러나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할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어 (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십니까?"

(요 13:7)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 것이다. (요 13:8) '베드로'가 말했다. "제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요 13:9)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제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요 13: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이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 몸이 깨끗하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다" 하시니 (요 13:11) 이는 자기를 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므로 '다는 깨끗치 아니하다' 하셨다.

(요 13:12) 그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主)라 하니 너희 말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

(요 13:16)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상전(上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이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다.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요 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다.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이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 13: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함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다. (요 13:20)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보낸 이를 영접하는 이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요 13:2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눅 22:21)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이의 손이 나와 함께 상(table) 위에 있다. 틀림없이 단정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마 26:21)(막 14:18)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사람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눅 22:22)(막 14:21)(마 26:24)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

(요 13:22)(막 14:19)(마 26:22)(눅 22:23) 제자들이 서로 보고 묻되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며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이가 누구일까?" 하고 심히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각각 여쭙기를, "주님, 저입니까?" 하였다. (요 13:23)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이(이를 기록한 요한 자신을 가리킴-註)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기를, "말씀하신 이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요 13:25) 그가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했다. "주님, 누구입니까?".

(마 26:23)(막 14:20)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열 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 것이다. (요 13:26) 내가 한 조각을 집어다가 주는 이가 그다"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집어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셨다. (마 26:25) 예수님을 파는 '유다'가 대답하기를, "'랍비(선생님)', 접니까?".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한 대로다". (유다가 그릇에 손을 넣는 것과 동시에 주님께서도 손을 넣으셔서(혹은 주님께서 손을 넣으실 때 유다도 손을 넣어) 그 집고자 하는 것을 대신 집어 그 조각을 유다에게 건네주시면서 계속 요한에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註).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유다의) 속에 들어가므로(요한의 기록은 이 때 사단이 그에게 들어간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누가는 이미 그런 마음을 먹은 때부터 들어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사단이 그런 "생각을 넣었다"(요 13:2)는 것과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요 13:27) 것을 구별하고 있다-註), 이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요 13: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요 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였다.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요 13: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 (요 13: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인하여(그 안에서) 영광을 얻으셨으면(to be glorified in him)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자기 안에서) 그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니(to glorify him in himself) 곧 주실 것이다.

(요 13:33) 얘들아(Children),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같은 말을 한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올 것이다". (요 13:37)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제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요 13: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나를 위해 네 목숨 버리겠느냐?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요 14:1) 이어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處所)를 예비하러 가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거처할 장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할 것이다. (요 14: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요 14:5) '도마'가 말했다. "주님,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요 14: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요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다".

(요 14:8) '빌립'이 말했다. "주님, 아버지를 저희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리하면 만족이겠습니다". (요 14: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는데도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이는 아버지를 보았는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 14:12)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이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다.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할 것이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다.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할 것이다.

성령께 대하여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保惠師)(흠정영역(KJV)으로는 "Comforter"이나 실제 의미는 단순히 '돕는 자'("helper")로서 아담을 위해 여자를 창조하실 때도 우리말 번역 "배필"에 해당되는 단어가 이 "돕는 자"(helper)이다. 그리고 "또다른"이라 하셨으니 주님 친히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그 위치에 계셨기 때문-註)를 너희에게 주셔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요 14:17) 그는 진리의 영(靈)으로서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 (삼위일체 원리의 '둘이 하나됨'에서,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된 이 하나됨을 가리켜 갑은 을이라 하고 을은 갑이라 하게 된다. 상대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자기라 할 수 없고 상대를 가리키는 것이 사리에 옳은 것. 이 설명을 하시면서 친절히 설명하시어 "내가 다시 너희에게 성령으로 즉 아버지와 함께 하나되어 있는 모습으로 오게 될 것이다" 하시는 것-註)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다. (아들께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고 나는 아들 곧 주님과 하나되어 영원히 존재하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은 또 하나의 나 자신을 보는 것임. 영원하신 나의 짝 곧 삶의 반려자이신 것-註)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이라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나를 사랑하는 이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

(요 14:22) '가룟'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다. "주님, 어찌하여 주님 자신을 저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십니까?" (요 14:23)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함께 살 것이다).

(요 14:24)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는 내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이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요 14: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聖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다.

(요 14: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다. (요 14: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이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다.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그리고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셨다. (제자들과 함께 나가시면서 또 말씀하신 것을 요한은 기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註).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시다. (요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러할 것이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서,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는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다.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룰 것이다.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될 것이다.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 없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다.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으니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을 것이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으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다. (상대를 위해 자기 목숨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으니 이는 평소 그와 같이 자기를 상대에게 "주는" 것으로서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상대를 위해 죽는 것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할 일이 아니다-註).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으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다. (요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했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이들이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이들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요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요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다. (요 15: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 (요 15:23) 나를 미워하는 이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한다.

(요 15: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그들이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다. (요 15: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바 '그들이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Comforter)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는 것이다. (성령은 아들께서 보내시는 것이요 그리고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것이니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하신 것-註).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니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黜會, 사회로부터 격리시킴)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이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禮)라(to do God service or to offer a service to God)' 할 것이다. (요 16: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다.

(요 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 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다. (요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이가 없고 (요 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함으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다.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다.

(요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실 것이다.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다. (요 16: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릴 것이다' 하였다".

(요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하시므로 (요 16:17) 제자 중에 서로 말하기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요 16:18) 또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 16:19) 예수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다' 함으로 서로 문의하느냐? (요 16:20)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하나, 너희가 근심하지마는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다.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아니한다.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볼 것이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

(요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니 너희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요 16:25) 이것을 비사(比辭, proverb)로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께 대한 것을 분명히 말할 것이다. (요 16: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해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요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다. (요 16:28)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

(요 16:29) 제자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요 16:30) 우리가 지금에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압니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요 16:3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니 벌써 왔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의 기도

(요 17:1)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이르렀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도록 하여 주십시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이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아는 것입니다. (요 17:4) 아버지께서 제게 하라고 주신 일을 제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해드렸으니 (요 17:5) 아버지, 창세(創世) 전에 제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저를 영화롭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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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註-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성경에서 "저를 영화롭게 해주십시오" 하는 말씀이 어색하게 들린다면, "제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해드렸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자기를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목적하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렸다면 결국 당신 자신의 영화를 목적하심이 아닌가 하겠지만, 위의 기도는 제자들 앞에서 하신 기도로써 제자들이 깨닫고 본받아 지킬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으니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생명과 사랑의 법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던 것. 아들께서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원리를 설명하심이다. 제자들은 요한과 야고보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자기를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고(막 10:37) 서로 누가 크냐 하는 것으로 쟁론하는(9:24) 정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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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7:6) 세상 중에서 제게 주신 사람들에게 제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저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제게 주셨으며 저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요 17:7) 지금 저들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습니다. (요 17:8)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말씀들을 저들에게 주었으며 저들은 이것을 받고 제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알며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줄도 믿었습니다.

(요 17:9) 제가 저들을 위하여 비오니 제가 비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제게 주신 이들을 위함입니다. 저들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요 17:10) 제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인데 제가 저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요 17:11) 저는 세상에 더 있지 않으나 저들은 세상에 있고 저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니 거룩하신 아버지,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을 보전하셔서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요 17:12) 제가 저들과 함께 있을 때에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을 보전하여 지켰습니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입니다.(요 17:13) 지금 제가 아버지께로 가니 제가 세상에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저들로 제 기쁨을 그들 속에 충만히 누리게 하려 함입니다.

(요 17:14) 제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들에게 줌으로 세상이 저들을 미워하였으니 이는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인함입니다. (요 17:15) 제가 구하는 것은 저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구함입니다. (요 17: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요 17:17)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요 17: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저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9) 또 그들을 위해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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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註-여기서 "거룩함"의 의미를 알게 된다. '거룩하다'는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는 '거룩해지려는' 의지를 포함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범죄 행위가 생김으로써 나타난 그 상대적인 의미이기에 그렇다. 범죄가 자기 자유 의지에서 나오는 것처럼 거룩함도 자기 선택에 의한 것이니 순종함을 통하여 거룩함에 이르기 때문(롬 6:22). 그래서 성경은 "거룩하라"(벧전 1:16/히 12:14/고후 7:1)고 명령하고 있다.

즉 거룩함은 자기를 위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자기 부인의 의지가 확고할 때를 말함인즉 그리스도 친히 자기를 우리 위해 바치시려는 순간의 십자가 고난을 앞둔 시점이므로 "저들을 위해 제가 저를 거룩하게 합니다" 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 위해 죽으심과 더불어 우리에게 생명의 도리를 가르치신다는 목적도 있음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새 계명"(:34)을 주신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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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7:20) 제가 구하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들의 말을 인하여 저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 17:21) 아버지께서 제 안에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셔서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해주십시오.

(요 17:22) 제게 주신 영광을 제가 저들에게 주었으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입니다. (요 17:23) 곧 제가 그들 안에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셔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과 또 저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입니다.

(요 17:24) 아버지, 제게 주신 이들도 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저를 사랑하시므로 제게 주신 저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요 17:25)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해도 저는 아버지를 알았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 (요 17:26) 제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할 것이니 이는 저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입니다".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막 14:26) (마 26: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갔다. (마 26:31)(막 14:27)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牧者)를 칠 것이니 양떼가(양들이) 흩어질 것이다' 하였음이다. (마 26:32)(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마 26:33)(막 14:29)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니 (마 26:34)(막 14:3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해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하셨다.

(눅 22:33)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님, 제가 주님과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습니다" 하니 (눅 22:34) 이에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참으로 네게 말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마 26:35)(막 14:31) '베드로'가 말하기를, "제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다.(요한은 식사 후 감람산에 들어가시기 전에 말씀하실 때 베드로와 닭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마태는 감람산에 들어가신 후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서로 엇갈리는 듯하나, 연거푸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고 베드로 역시 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註).

또 누가 크냐 하는 다툼

(눅 22:24) 또한 그들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났으므로 (눅 22:2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시혜자(施惠者-benefactors,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뜻이므로 "섬긴다"는 것과는 반대)라 칭함을 받으나 (눅 22:26) 너희는 그렇지 않으니 너희 중에 큰 이는 젊은 자와 같고 우두머리는 섬기는 자와 같다. (눅 22:27) 앉아서 먹는 이가 크냐, 섬기는 이가 크냐? 앉아 먹는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이로 너희 중에 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을 이미 앞에서 하신 바가 있다. '누가'는 그 다른 경우를 들어 여기 기록하고 있는 바 제자들이 그런 다툼을 또 벌인 듯하다-註).

(눅 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이들인즉 (눅 22: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눅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table)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throne)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한다".

(눅 22:35) 또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전대(돈을 넣는)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들이 말했다. "없었습니다". (눅 22:36) 이에 말씀하셨다. "이제는 전대 있는 이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칼)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 사라".(눅 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다". (눅 22:38) 그들이 여쭙기를 "주님, 보십시오. 여기 검 둘이 있습니다" 하니, 대답하시기를 "되었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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