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갑과 을의 57개의 "마디(정확히 말하면, 마디 사이)"라는 것은 바로 이 3과 19 사이의 도치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정해진 것이라 봄이 옳겠다. 그리고 의미가 더 있으니 갑(OT)과 을(SN)은 57개 마디이지만 병으로서의 FS형은 56개라는 데에 있다. 즉 실체는 갑과 을이요 병은 갑, 을이 하나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뿐 '독자성을 지닌' 실체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차별화를 두되 너무 현격한 차별일 수 없고 단지 1차이의 구별을 나타내기 위해 FS형은 56개 마디이다. 3과 19와의 도치성을 나타낼 수 있고 뿐 아니라 FS형과 OT, SN형을 이상과 같이 구별해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숫자가 바로 이 56과 57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다음에는 갑에서 을로, 을에서 병으로, 병에서 갑으로, 그리고 다시 갑에서 을로 흐르는 흐름의 화살표는 어떻게 표시되었느냐 하면 위의 그림에서 보임과 같이 "같은 숫자는 끼리끼리 결착한다"고 전제해두면 을과 병은 숫자 7로써 통하고 통하기 때문에 을에서 병으로 흐른다는 것이고 병과 갑은 3으로써 통하니 역시 을로부터의 흐름을 이어 받아 병에서 갑으로 흐름을 나타내는 것. 그러면 갑에서 을로 흐르는 것을 어떻게 나타나져 있느냐,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갑(OT형)은 LP, DP, JP 모두 균등, 균일하게 1/3씩이다. 다시 말해 네모 반듯하여 흠잡을 데가 없는 왕자의 생김새다. FS형이 LP, DP가 4/7, 3/7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갑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고로 갑(OT형)이 이 세 유형 FS, OT, SN 중에서 중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갑에서 을로 흐름이 첫 가닥을 잡는다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갑→을→병→갑, 이렇게 해서 연속적으로 흐름이 이어져 갑과 을은 병이 모습 즉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3위1체 원리는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을, 3운법칙은 3위1체의 원리를 상호 검증하고 있는 것이다.
대칭성 원리 세상을 근원에서 규율하는 법칙은 인과율이다. 여기에 열역학 제 1법칙과 제 2법칙을 보탤 수 있다. 근대과학의 성과는 이 셋으로 전부 설명된다. 문제는 이 셋을 하나의 통합적인 시선으로 조망할 수 있느냐다. 구조론이 답을 제시한다. 근본은 하나다. 구조론으로 보면 열역학 제 1, 제 2 법칙, 곧 질량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인과율로 대표되는 하나의 보편원리에 에너지를 태워 전개시킨 바 하부구조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있다’는 것이 인과율이다. 그런데 원인과 결과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대칭성이 있다. 원인과 결과는 마주보고 대칭된다. 그 대칭성이 원인과 결과 양자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어떤 독립된 둘을 연결하여 관계를 만든다. 관계를 맺어주고 유지시켜 준다. 남녀를 연결하는 것은 사랑, 임금과 신하를 연결하는 것은 충성, 점원과 고객을 연결하는 것은 신뢰다. 대칭되는 둘 사이에는 반드시 중간에서 연결하는 것이 있다. 사랑이니, 충성이니, 신뢰니 하는 추상적 표현들로 애매하게 얼버무려왔던 그것에 체계를 부여하여 과학의 언어로 엄밀하게 기술한 것이 구조다. 인과율에 기초한 수학적 사고가 근대과학의 토대라는 점은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상식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함이 있다. 기존의 인과율은 시간상에서 성립하는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칭을 이루는 시소의 두 날개는 동시에 움직인다. 수학에서 일반화 된 대칭성 개념은 시간과 무관하다. ‘1+1=2’라면 ‘=’를 중심으로 양변이 대칭된다. 기하학도 도형의 대칭원리 중심으로 전개된다. 인과법칙이 시간상에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공간에서도 인과법칙은 작동한다. 무엇인가? 인과율 이전에 대칭성이 있다. 대수, 기하학적 대칭성에 에너지를 입혔을 때 비로소 인과율의 시간개념이 적용된다. 인과율은 순서가 있다. 항상 원인이 먼저고 결과가 뒤따른다. 그러나 인과율에 에너지를 태워 전개한 열역학 제 1법칙, 곧 질량보존의 법칙에서는 기하, 대수의 대칭과 마찬가지로 질과 양 사이에 순서가 없다. 그런데 열역학 제 2 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와서는 순서가 있다. 원인이 먼저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평면적 관점이 아닌 입체적 관점으로의 비약이 필요하다. 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기다. 사실이지 인과율은 너무 나간 것이다. 열역학 1법칙이 먼저고 2법칙이 나중이다. 대칭성 원리가 먼저고, 거기에 에너지를 태워야 비로소 2법칙이 성립한다. 에너지를 태우기 전의 대칭성이 인과법칙에 앞선다. 기존의 인과율은 시간적 선후관계를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간에도 적용된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시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성립하는 것이 공간에서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성립한다. 시간축이 선후관계라면 공간축은 종속관계다. 전체가 지배하고 부분은 종속된다. 시간에서 원인이 이끌고 결과가 뒤따르는 원리와 같다. 하나의 대칭성에 에너지를 태웠을 때 시간과 공간 양측면이 유도된 것이다. 인과율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통일하는 것은 사건(event)개념과 일(work)개념이다. 인과법칙의 선후관계와 종속관계는 시공간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안에서 규명된다. 사건이 없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사건(event)은 주사위를 1회 던지는 것이다. 1회로 끝난다. 완결된다. 시작과 끝이 있다. 외적으로 닫혀있음이다. 존재의 독립성 의미가 있다. 이는 열역학 제 1법칙과 연관된다. 순환과 환원의 원리다. 사건은 반복된다. 제 1회로 던져진 주사위가 제 2회로 되던져질 때 원점으로 되돌아와 순환된다. 결과에서 원인으로 환원된다. 그 사이에 매듭이 있다. 제 1회와 제 2회는 동일한 것으로 판정되어 구분된다. 열역학 1법칙이 제 1회와 2회 사이에 칸을 나누어 단호하게 잘라버리는 것이다. 1회를 하나의 사건으로 독립시켜 버린다. 2회는 다른 사건이 된다. 여기서 시작과 끝의 대칭성이 드러나서 사건은 완결된다. 일(work)은 에너지 측면에서 고찰된다. 사건은 시작과 끝의 대칭으로 1회가 완결되며, 이때 시작 포지션에는 에너지가 있고 끝 포지션에는 에너지가 없다. 여기서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드러난다. 사건의 입구와 출구 사이에서 일방향성을 드러내는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이는 존재의 기능 측면을 드러낸다. 그렇다. 존재는 명목과 기능의 집합이다. 존재(存在)는 존(存)과 재(在)의 집합으로 성립된다. 존(存)은 명목을 지시하고 재(在)는 기능을 지시한다. 존은 열역학 1법칙을, 재는 2법칙을 지시한다. 인과율은 이 지점에서 열역학 1, 2법칙을 완전히 통일한다. 셋은 하나의 원리가 가지는 여러 측면이다. 시간개념 위주의 인과율은 에너지를 태워 존재를 전개한 것이다. 그 이전단계인 대칭성 원리가 원본 모형이다. 대칭성 원리는 기하학과 대수학에서 다루어지며 존재로 전개하기 이전의 순수한 형태다. 대칭성은 2가 1을 겸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의적 동시결정원리가 성립한다. 과거와 미래 2는 현재에 의해 1이 된다. 이것이 시간의 인과율이다. 시소의 좌우 두 날개는 축에 의해 1이 된다. 공간의 인과율이다. 1이 2가 됨으로써 만유가 탄생한다. 위대한 낳음이 이룩된다. 세상은 그렇게 낳아서 전개하여 마침내 이룩된 세계다. 그 낳음의 원리, 창조의 원리, 진보의 원리가 이렇게 해명되었다. 망라하고 있다. 구조론은 인과율의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대칭성을 해명한다. 축 1이 날개 2를 겸하는 정도에 따라 다섯가지 대칭이 있다. 다섯가지 포지션으로 인과율의 원인과 결과, 존재의 명목과 기능을 연결한다. 사건과 일, 그리고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을 인과율 하나로 통일해낸다. 관계를 맺어주고 관계를 발전시킨다. 에너지를 열고 닫는 스위치다. 그 방법으로 수학적 대칭성에 에너지를 태워 존재를 완성한다. 이로써 존재가 수학적 추상으로부터 어떻게 유도되는지 밝혀졌다. 철학적 사유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존재 개념이다. 데카르트가 제 1원인을 추구한 끝에 최종적으로 존재 개념에 도달한 예가 그러하다. 만유는 수학으로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물질로 되어 있다. 수학적 원리에 에너지를 입혀야 비로소 물질이 일어나 존재가 수립된다. 수학적 원리가 앞서고 물질적 법칙이 뒤따른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에너지다. 그 에너지를 제어하는 법칙이 구조론이다. 이렇게 인간의 수학과 자연의 물질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가 밝혀진 것이다. 수학적 추상의 세계와 구체적 물질의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 해명되었다. http://gujor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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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옮겨 온 글(http://gujoron.com)에서 첨언하고 싶은 것은, 과학자든 그 누구든지 간에 "여기까지는 왔는데 그 다음은 무엇이고 어디냐" 해야지, "이제는 다 알았다, 결론을 내자" 하고 거기 안주(安住)하기 시작하면 그 여태까지 쌓아 온 지식마저 덕이 되지 못하고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3위1체의 원리는 그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초자연계를 넘겨다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상 더 갈 곳이 없다 하여 오래 방치해 둠으로써 고장이 나 버린 "지식 탐구"라는 차(車)를 끌어다가 초자연계라는 차고의 수리소에 갖다 주어 새로운 안목으로 새 출발로 달리게 하는 견인차 역할인 것이다. 위의 옮겨 온 글에서는 따라서 몸만 있고 머리는 없는 셈이다. 대칭성 원리 등 몸에 관한 내용은 옳으나 머리 없는 몸이 되어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형국이다. 창조자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든 논리가 겪는 같은 운명이다. . 젊은 알렉산더가 동방 정략에 나서 페르시아를 단숨에 석권해버린 후 인더스 강변에 이르자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지레 짐작으로 판단하여 결론을 내린 후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한 것과 같은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발 아래만 보지 말고 눈을 들어 광활한 지평선, 수평선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자연계 저너머의 초(반)자연계. 이 세계가 있으면 반드시 양세계로 병립해 있으니 그 반대 세계로 눈을 돌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 의식이 이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니 얼마나 비극적 현실, 상황인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너무나 근시안적이었다. 자연계가 있으니 반드시 반대 자연계가 있다. 이것은 필연이다. 이 필연성을 지적해주는 것이 3운법칙과 상호 검증 관계에 있는 3위1체 원리의 사자후(獅子吼)다. 세상이라는 결과물이 있으니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창조자의 손길이 있다. 보이는 것이 있으니까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대칭성의 원리다. 간단하게 생각해야지 복잡하고 어렵게 접근할 아무 이유가 없다. 이 세계의 생사(生死)가 있으니 반드시 오는 세계에서의 영원한 삶과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진화론을 질책하는 이유가 이렇게 확증된 창조자의 실재를 두고도 이를 부인하고 아직도 고집스럽게 무신론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한시성은 오는 세계에서의 영원성을 웅변하는 바로 그 근거 자체임을 3위1체의 법칙은 밝히는 것이다. 영원한 죽음. 이 죽음 즉 멸망은 존재의 인멸이 아니다. 대칭성 원리에서의 "정반대되는 성질"을 의미함이므로 생명의 쾌락과는 반대되는 일체의 것을 뜻한다. 이 엄숙한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지 않는다면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랴. 인생의 유일무이의 과제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오는 세상으로부터 미움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대칭성 원리다. 인과율이니, 대칭성 원리니 하는 것들이 지금까지 제대로 대접을 받아오지 못했다. 중구난방식으로 각기 자기 소견대로만 해 온 것이다. 그러나 3위1체의 원리로 그 모든 것이 이제는 확실한 자리 매김을 하게 된 것이니, 한 치 오차 없이 모든 것은 이를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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