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3일 일요일

3위1체의 원리와 인간 생애의 법칙(三運法則)의 사자후(獅子吼)



3위1체의 원리가 규정하는 사항은 아래와 같다
만유(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는 양립되어 있는 대칭 관계에 있다(the law of symmetry)
그 양자는 모자(母子, 파생시키고 파생되는) 관계다(the law of trinity)
이것이 둘이면서도(양자 관계이면서도) 하나로서 존재하는 이유다
즉 '하나로서의 둘(duality as unity)', 또는 '둘로서의 하나(unity as duality)'이다 
둘이면서 하나로 존재하고 움직이므로 마치 갑과 을(양립 관계) 외에 병(둘로서의 하나)이 따로 더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양상이어서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갑, 을, 병 3위(位)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둘이고 이 둘은 원래 하나에서 갈라진 것이어서 계속 원래의 하나이기를 지향하므로, 이를 정확히 표현하여 일시이원삼위일체(一始二元三位一體, one origin, duality, trinity, one body)라 하는 것이다



이 원리가 만유를 규정하는 것일진대 이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때 가령 인간의 생애를 관장하는 법칙도 당연히 이 3위1체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과연 그런가. 
그 구조면(짜임새, structure)에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 "나타냄"이 아주 회화적으로(일부러 그림을 그려 나타내듯이) 되어 있어 경탄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먼저 3위1체 원리의 구조도(圖)를 살필 필요가 있다. "일시이원삼위일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것이 된다. 


    

C(검은 바탕)로 애초에 존재하다가 자기의 닮은꼴을 냄으로써(파생시킴, 모자 관계) A와 B가 되었으므로 C의 검은 바탕을 A, B가 양분하고 있는 모습이다. 양분하되 같은 모양일 수는 없으므로 즉 성질이 정반대인즉 검은 바탕으로 좌, 우로 다르게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화살표는 A가 B보다 크다 즉 파생시켰음을 나타낸다(굵은 화살표로 표시). 그러나 화살표가 C로 다시 뻗어 있어 C를 통해 다시 A로 역류하는 현상을 보임 즉 A에서 B로 흐르던 흐름이 C를 통해 다시 A로 치흐르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A, B가 하나로 존재하고 작동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원운동' 다시 말해 '순환'으로써 하나됨을 가리킨다. 둘레가 원이 되어 있는 그대로다. 둘이 원래가 하나였기 때문에, 계속 그 하나됨을 유지하는 의미의 이 역류 현상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갑(A)에서 을(B)로 일방적인 흐름만 계속된다면 그 흐름은 지속적일 수 없고 언젠가는 둘의 관계는 와해된다. 즉 갑은 소멸되고 을만 잔존하게 된다 할까. 그러면 당연히 갑은 자기 생존을 위해 을과는 남남이 될 수밖에 없는 자구책을 강구할 수밖에. 무슨 말이냐 하면, 바로 이 사실이 둘의 하나됨을 항구적으로 유지 존속시킨다는 뜻. 말하자면 보어의 "상보성"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고ㅡ인간 삶에서 이는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 생애의 법칙인 3운법칙의 구조는 어떻게 이상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가. 

  


위의 그림에서 병의 검은 바탕(검다기보다 有色)이 갑과 을에서는 양분되어 나타난 것을 3운법칙은 FS형의 축소판인 JP를 OT 및 SN형이 대동함으로써 그리고 FS형에서는 이런 JP가 없고 LP(활동 기간), DP(침체 기간)만 있는 것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첫째이다.

그도 그렇거니와, 보다 놀라운 것은 갑과 을의 성질이 정반대인 것을 "양자 얽힘"에서의 "다운 스핀"과 "엎 스핀"처럼 명확히 도치(倒置)형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식으로 나왔기에 그런 "도치(inversion)"가 되느냐 하면, 갑과 을을 각각 57마디(節, 정확히 말하면 "마디 사이")로 나누었을 때 갑은 그것을 3등분한 것으로써, 을은 그것을 뒤집어 또는 거꾸로 해서(도치) 19등분한 것으로써 나타내고 있음이다.  

다른 숫자는 모두 1, 3, 4, 7 등 인간에게 아주 익숙한 낯 익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유독 전혀 낯선 19라는 숫자가 뚱딴지처럼 튀어 나오게 되어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래서 갑과 을의 성질이 도치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듯이 나타내었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둘째이다. 

이 갑과 을의 57개의 "마디(정확히 말하면, 마디 사이)"라는 것은 바로 이 3과 19 사이의 도치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정해진 것이라 봄이 옳겠다. 그리고 의미가 더 있으니 갑(OT)과 을(SN)은 57개 마디이지만 병으로서의 FS형은 56개라는 데에 있다. 즉 실체는 갑과 을이요 병은 갑, 을이 하나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뿐 '독자성을 지닌' 실체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차별화를 두되 너무 현격한 차별일 수 없고 단지 1차이의 구별을 나타내기 위해 FS형은 56개 마디이다. 3과 19와의 도치성을 나타낼 수 있고 뿐 아니라 FS형과 OT, SN형을 이상과 같이 구별해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숫자가 바로 이 56과 57이다. 이것이 셋째이다.




다음에는 갑에서 을로, 을에서 병으로, 병에서 갑으로, 그리고 다시 갑에서 을로 흐르는 흐름의 화살표는 어떻게 표시되었느냐 하면 위의 그림에서 보임과 같이 "같은 숫자는 끼리끼리 결착한다"고 전제해두면 을과 병은 숫자 7로써 통하고 통하기 때문에 을에서 병으로 흐른다는 것이고 병과 갑은 3으로써 통하니 역시 을로부터의 흐름을 이어 받아 병에서 갑으로 흐름을 나타내는 것. 그러면 갑에서 을로 흐르는 것을 어떻게 나타나져 있느냐,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갑(OT형)은 LP, DP, JP 모두 균등, 균일하게 1/3씩이다. 다시 말해 네모 반듯하여 흠잡을 데가 없는 왕자의 생김새다. FS형이 LP, DP가 4/7, 3/7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갑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고로 갑(OT형)이 이 세 유형 FS, OT, SN 중에서 중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갑에서 을로 흐름이 첫 가닥을 잡는다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갑→을→병→갑, 이렇게 해서 연속적으로 흐름이 이어져 갑과 을은 병이 모습 즉 하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3위1체 원리는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을, 3운법칙은 3위1체의 원리를 상호 검증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글은 독자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아래 주소에서 옮겨 온 것이다. "대칭성 원리"에 대한 내용을 검색하는 중에 발견한 것이다.  


대칭성 원리


세상을 근원에서 규율하는 법칙은 인과율이다. 여기에 열역학 제 1법칙과 제 2법칙을 보탤 수 있다. 근대과학의 성과는 이 셋으로 전부 설명된다. 문제는 이 셋을 하나의 통합적인 시선으로 조망할 수 있느냐다.
구조론이 답을 제시한다. 근본은 하나다. 구조론으로 보면 열역학 제 1, 제 2 법칙, 곧 질량보존의 법칙과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인과율로 대표되는 하나의 보편원리에 에너지를 태워 전개시킨 바 하부구조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있다’는 것이 인과율이다. 그런데 원인과 결과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대칭성이 있다. 원인과 결과는 마주보고 대칭된다. 그 대칭성이 원인과 결과 양자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어떤 독립된 둘을 연결하여 관계를 만든다. 관계를 맺어주고 유지시켜 준다. 남녀를 연결하는 것은 사랑, 임금과 신하를 연결하는 것은 충성, 점원과 고객을 연결하는 것은 신뢰다.
대칭되는 둘 사이에는 반드시 중간에서 연결하는 것이 있다. 사랑이니, 충성이니, 신뢰니 하는 추상적 표현들로 애매하게 얼버무려왔던 그것에 체계를 부여하여 과학의 언어로 엄밀하게 기술한 것이 구조다.
인과율에 기초한 수학적 사고가 근대과학의 토대라는 점은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상식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함이 있다. 기존의 인과율은 시간상에서 성립하는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칭을 이루는 시소의 두 날개는 동시에 움직인다. 수학에서 일반화 된 대칭성 개념은 시간과 무관하다. ‘1+1=2’라면 ‘=’를 중심으로 양변이 대칭된다. 기하학도 도형의 대칭원리 중심으로 전개된다.
인과법칙이 시간상에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공간에서도 인과법칙은 작동한다. 무엇인가? 인과율 이전에 대칭성이 있다. 대수, 기하학적 대칭성에 에너지를 입혔을 때 비로소 인과율의 시간개념이 적용된다.
인과율은 순서가 있다. 항상 원인이 먼저고 결과가 뒤따른다. 그러나 인과율에 에너지를 태워 전개한 열역학 제 1법칙, 곧 질량보존의 법칙에서는 기하, 대수의 대칭과 마찬가지로 질과 양 사이에 순서가 없다.
그런데 열역학 제 2 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와서는 순서가 있다. 원인이 먼저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평면적 관점이 아닌 입체적 관점으로의 비약이 필요하다. 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기다.
사실이지 인과율은 너무 나간 것이다. 열역학 1법칙이 먼저고 2법칙이 나중이다. 대칭성 원리가 먼저고, 거기에 에너지를 태워야 비로소 2법칙이 성립한다. 에너지를 태우기 전의 대칭성이 인과법칙에 앞선다.
기존의 인과율은 시간적 선후관계를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공간에도 적용된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시간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성립하는 것이 공간에서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성립한다.
시간축이 선후관계라면 공간축은 종속관계다. 전체가 지배하고 부분은 종속된다. 시간에서 원인이 이끌고 결과가 뒤따르는 원리와 같다. 하나의 대칭성에 에너지를 태웠을 때 시간과 공간 양측면이 유도된 것이다.
인과율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통일하는 것은 사건(event)개념과 일(work)개념이다. 인과법칙의 선후관계와 종속관계는 시공간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안에서 규명된다. 사건이 없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사건(event)은 주사위를 1회 던지는 것이다. 1회로 끝난다. 완결된다. 시작과 끝이 있다. 외적으로 닫혀있음이다. 존재의 독립성 의미가 있다. 이는 열역학 제 1법칙과 연관된다. 순환과 환원의 원리다.
사건은 반복된다. 제 1회로 던져진 주사위가 제 2회로 되던져질 때 원점으로 되돌아와 순환된다. 결과에서 원인으로 환원된다. 그 사이에 매듭이 있다. 제 1회와 제 2회는 동일한 것으로 판정되어 구분된다.
열역학 1법칙이 제 1회와 2회 사이에 칸을 나누어 단호하게 잘라버리는 것이다. 1회를 하나의 사건으로 독립시켜 버린다. 2회는 다른 사건이 된다. 여기서 시작과 끝의 대칭성이 드러나서 사건은 완결된다.
일(work)은 에너지 측면에서 고찰된다. 사건은 시작과 끝의 대칭으로 1회가 완결되며, 이때 시작 포지션에는 에너지가 있고 끝 포지션에는 에너지가 없다. 여기서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드러난다.
사건의 입구와 출구 사이에서 일방향성을 드러내는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이는 존재의 기능 측면을 드러낸다. 그렇다. 존재는 명목과 기능의 집합이다. 존재(存在)는 존(存)과 재(在)의 집합으로 성립된다.
존(存)은 명목을 지시하고 재(在)는 기능을 지시한다. 존은 열역학 1법칙을, 재는 2법칙을 지시한다. 인과율은 이 지점에서 열역학 1, 2법칙을 완전히 통일한다. 셋은 하나의 원리가 가지는 여러 측면이다.
시간개념 위주의 인과율은 에너지를 태워 존재를 전개한 것이다. 그 이전단계인 대칭성 원리가 원본 모형이다. 대칭성 원리는 기하학과 대수학에서 다루어지며 존재로 전개하기 이전의 순수한 형태다.
대칭성은 2가 1을 겸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의적 동시결정원리가 성립한다. 과거와 미래 2는 현재에 의해 1이 된다. 이것이 시간의 인과율이다. 시소의 좌우 두 날개는 축에 의해 1이 된다. 공간의 인과율이다.
1이 2가 됨으로써 만유가 탄생한다. 위대한 낳음이 이룩된다. 세상은 그렇게 낳아서 전개하여 마침내 이룩된 세계다. 그 낳음의 원리, 창조의 원리, 진보의 원리가 이렇게 해명되었다. 망라하고 있다.
구조론은 인과율의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대칭성을 해명한다. 축 1이 날개 2를 겸하는 정도에 따라 다섯가지 대칭이 있다. 다섯가지 포지션으로 인과율의 원인과 결과, 존재의 명목과 기능을 연결한다.
사건과 일, 그리고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을 인과율 하나로 통일해낸다. 관계를 맺어주고 관계를 발전시킨다. 에너지를 열고 닫는 스위치다. 그 방법으로 수학적 대칭성에 에너지를 태워 존재를 완성한다.
이로써 존재가 수학적 추상으로부터 어떻게 유도되는지 밝혀졌다. 철학적 사유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존재 개념이다. 데카르트가 제 1원인을 추구한 끝에 최종적으로 존재 개념에 도달한 예가 그러하다. 만유는 수학으로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물질로 되어 있다. 수학적 원리에 에너지를 입혀야 비로소 물질이 일어나 존재가 수립된다. 수학적 원리가 앞서고 물질적 법칙이 뒤따른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에너지다.
그 에너지를 제어하는 법칙이 구조론이다. 이렇게 인간의 수학과 자연의 물질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가 밝혀진 것이다. 수학적 추상의 세계와 구체적 물질의 세계가 만나는 접점이 해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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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둘로 되어 있다. ‘▷▷’와 ‘▷◁’다. ‘▷▷’는 질서고  ‘▷◁’는 가치다.  ‘▷▷’는 에너지고 ‘▷◁’는 정보다. ‘▷▷’는 둘이 한 방향을 보고 있고 ‘▷◁’는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구조는 ‘▷◁’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은 모두 ‘▷▷’다. 놀랍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의 절반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절반의 세계에도 이제는 눈을 떠야 한다.
‘▷▷’는 모을수록 힘이 커진다. 1+1=2가 된다. 우리가 아는 당연한 상식의 세계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진실한 것은 ‘▷◁’다. ‘▷◁’는 둘의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큰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일치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하늘과 땅, 밤과 낮, 여름과 겨울, 남자와 여자, 플러스와 마이너스는 ‘▷◁’로 되어 있다. 소통하는 것은 모두 ‘▷◁’로 되어 있다. 예쁜 것, 사랑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 가치있는 것은 모두 ‘▷◁’로 되어 있다.
‘▷◁’의 의미는 ‘▷▷’가 모을수록 힘이 커지는 것과 달리 둘의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둘 다 함께 쓰러진다는데 있다. 부부 중에 하나가 역할을 잃으면 나머지 한쪽도 쓸모가 없어진다.
‘▷▷’는 클수록 좋고 ‘▷◁’는 밸런스가 맞을수록 좋다.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있는 것이다. 구조론은 ‘▷◁’의 세계를 탐구한다. 마주보는 ‘▷’와 ‘◁’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정보가 있다.
젓가락은 왜 젓가락 모양인가?  젓가락 ‘▷’와 손가락 ‘◁’와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젓가락 속에는 손가락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다. 마찬가지로 숟가락 끝의 타원형 모양은 입술의 모양을 닮고 있다.
컵이 ⊂모양인 이유는 사람의 목구멍이 ⊃모양이기 때문이다. 둘은 마주보고 대칭된다. 컵에는 그 컵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와 그 컵에 담겨지는 물에 대한 정보가 숨어 있다.
모든 관절부분, 모든 힘의 전달부분, 모든 만나고 접촉하고 소통하는 부분에는 ‘▷◁’의 원리가 숨어 있다. 세상은 온통 ‘▷◁’의 사슬이다. 꽃잎 두 장도 ‘▷◁’이고 다리의 두 교각도 ‘▷◁’이다.
‘▷◁’은 마주보고 있다. 마주보아야 이루어진다. 마주보아야 통한다. 사랑이 이루어지고 미(美)가 이루어지고 선(善)이 이루어진다. 구조론은 마주보기다. 마주보며 손 잡고 함께 일어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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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바로 아래의 의미이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그래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니 우리는 하나다
삶이란 모름지기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나의 상대를 위함이다
하나님의 삶도 마찬가지ㅡ우리를 위하심이다ㅡ머리와 몸의 관계다
애초 홀로 계셨을 때에만 당신 자신을 위함이셨지만
아들을 낳으신 다음에는 전적으로 아들을 위하심이다
그리고 아들께서는 당연히 아버지를 위하시는 삶
이래서 삶이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정의를 내려주신 것이다
바로 이 정의(定義)와 정의(正義)를 따라 사는 것이 생명
이를 벗어나는 것이 불의, 불법이니 이 생명의 법을 범함이다
모든 불행과 비극은 이 법을 어김에서 왔고 곧 죄, 악이다
고로 이전의 행복한 삶으로 회귀함에는
이 법을 따름으로써만 되는 것이니
이런 삶의 기틀, 원상 회복의 길을 열어주신 마지막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천하에 이외로 리가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 뜻을 가리킴이다(사도행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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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옮겨 온 글(http://gujoron.com)에서 첨언하고 싶은 것은, 과학자든 그 누구든지 간에 "여기까지는 왔는데 그 다음은 무엇이고 어디냐" 해야지, "이제는 다 알았다, 결론을 내자" 하고 거기 안주(安住)하기 시작하면 그 여태까지 쌓아 온 지식마저 덕이 되지 못하고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3위1체의 원리는 그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초자연계를 넘겨다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상 더 갈 곳이 없다 하여 오래 방치해 둠으로써 고장이 나 버린 "지식 탐구"라는 차(車)를 끌어다가 초자연계라는 차고의 수리소에 갖다 주어 새로운 안목으로 새 출발로 달리게 하는 견인차 역할인 것이다. 

위의 옮겨 온 글에서는 따라서 몸만 있고 머리는 없는 셈이다. 대칭성 원리 등 몸에 관한 내용은 옳으나 머리 없는 몸이 되어 갈 바를 몰라 방황하는 형국이다. 창조자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든 논리가 겪는 같은 운명이다. 


젊은 알렉산더가 동방 정략에 나서 페르시아를 단숨에 석권해버린 후 인더스 강변에 이르자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지레 짐작으로 판단하여 결론을 내린 후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한 것과 같은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발 아래만 보지 말고 눈을 들어 광활한 지평선, 수평선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자연계 저너머의 초(반)자연계. 이 세계가 있으면 반드시 양세계로 병립해 있으니 그 반대 세계로 눈을 돌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 의식이 이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니 얼마나 비극적 현실, 상황인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너무나 근시안적이었다. 자연계가 있으니 반드시 반대 자연계가 있다. 이것은 필연이다. 이 필연성을 지적해주는 것이 3운법칙과 상호 검증 관계에 있는 3위1체 원리의 사자후(獅子吼)다. 세상이라는 결과물이 있으니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창조자의 손길이 있다. 보이는 것이 있으니까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대칭성의 원리다. 


간단하게 생각해야지 복잡하고 어렵게 접근할 아무 이유가 없다. 이 세계의 생사(生死)가 있으니 반드시 오는 세계에서의 영원한 삶과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진화론을 질책하는 이유가 이렇게 확증된 창조자의 실재를 두고도 이를 부인하고 아직도 고집스럽게 무신론적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한시성은 오는 세계에서의 영원성을 웅변하는 바로 그 근거 자체임을 3위1체의 법칙은 밝히는 것이다. 


영원한 죽음. 이 죽음 즉 멸망은 존재의 인멸이 아니다. 대칭성 원리에서의 "정반대되는 성질"을 의미함이므로 생명의 쾌락과는 반대되는 일체의 것을 뜻한다. 이 엄숙한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지 않는다면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랴. 인생의 유일무이의 과제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오는 세상으로부터 미움만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대칭성 원리다. 


인과율이니, 대칭성 원리니 하는 것들이 지금까지 제대로 대접을 받아오지 못했다. 중구난방식으로 각기 자기 소견대로만 해 온 것이다. 그러나 3위1체의 원리로 그 모든 것이 이제는 확실한 자리 매김을 하게 된 것이니, 한 치 오차 없이 모든 것은 이를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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