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9일 토요일

세상에서의 최고도의 완성된 미학(美學)


전지전능하신 이의 어버이 사랑의 아름다우심이여!

머리와 몸이 한 몸 체제가 되어 동고동락하는 것ㅡ이 이상으로 이상적인 삶의 구조는 없다. 전지전능하시다 하여 그냥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을 다시 선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의 죄인으로서의 저주에 동참하시고 함께 고통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맛보시고 함께 하나되는 이치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드라마나 소설로 꾸민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아름다운 주제가 된다. 이 모두 한 몸됨의 하나되는 원리원칙대로 하나님 친히 따르심이니 이렇게 원리원칙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시다. 여기에는 모든 의(올바름), 선(좋은 것), 그리고 공평공정함이 보장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 역시 자주 독립성을 100프로 보장하심이니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덥석 받아 챙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사랑의 주인 의식으로써 시종 일관하여 하나님의 이 새 창조 작업에 함께 동참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다시 말해 마치 우리 스스로 우리 구원을 이루는 그런 형식을 닮게(밟게) 하심이니 이 또한 어느 모로 보나 아름다운 것이다. 피동적(수동적)이 아닌 적극성으로 주체 의식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심은 나중 후회할 것 없는 사랑의 나라에서의 능동적인 풍성한 삶을 누림에 한없는 보람을 느끼게 하심이다. 나도 천국 건설에 한 몫 했다는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시도록 하는 배려이시다.

지금까지 창조자 하나님께 대한 그릇되고 막된 인식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의 신(神)" 사탄이 인생들의 마음에 심어놓은 것으로서 그래서 퍼뜨려진 것이다. 모든 인생의 자연계 존재로서의 무기력성은 초자연계에 속한 영물(靈物)로서의 막강한 위력의 초능력 앞에 허수아비와 같은 것으로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위치일 수밖에 없다. 물론 동일하게 막강한 "거룩한 천사"들의 맞대응이 있으나 우리 인간의 이 배후 세력은 우리 자신 정확히 말해 나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 좌우되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강조되는 것은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이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의 한 몸됨에 나 자신 얼마나 부응하고 호응하느냐, 여기에 달린 것이다.

사탄과 맞설 수 있는 거룩한 천사로서의 상대는 미가엘이라는 천사다(계 12:7/단 10:21). 우리 인간들 때문에 맞붙은 대규모 전투로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이 하늘 전쟁(우주 전쟁)에서 성경대로(계 12:7) 패퇴한 사탄은1908년 6월 30일 지구상에 영구 추방당함으로써 지금 세상은 이들 악령들로 가득 차 있다. 소위 "외계인" 또는 "ufo" 소동이 오늘날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것도(물론 이 이전에도 조금씩 나타나기는 했어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사가 시작된 이후 연대별로 따지면 바로 지금 이 때가 비상 시국이 되고도 남는다.

사탄 등 악령 일당은 패전으로 인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는 더 이상 자리를 확보 못함으로 인해 상처 받은 결과로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는 처지에서 또한 그렇다. 그래서 지금까지 에덴낙원에서의 "뱀"이라는 그 정체가 효과 있게 숨겨져 왔지만 지금은 대대적으로 폭로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좌냐 우냐, 생명이냐 영원 멸망(멸망은 존재의 인멸이 아닌 생명의 낙과는 상대성을 이루는 고난 고통 일색뿐임을 의미)이냐 양자 택일의 결단만이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가장 합리적인 이치에 따른 인간 구원은 악령이 감히 모방 못한다. 초능력으로써는 거짓된 것과 합쳐(살후 2:9-11) 전무후무한 것으로 과시할 수 있어 여기에 무지무식한 이들이 많이(거의 전부라 할 정도로) 넘어가겠지만 이와 같은 진리의 합리성으로 따져서는 감히 미치지 못할 것이니 이 점에 착안하여 그 모든 태풍 같은 위세의 시험과 유혹을 능히 이길 일이다. 가령 모방한다 하더라도 이미 기정 사실화한 것을 베끼고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 거짓됨을 그로써 자체 증명함이 될 것이기에 이에 자세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점은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고난 받음, 욕됨을 당함(그래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라는 사전 경고를 주셨지만) 그리고 죽임 당함은 우리가 기피할 일이 아니라 받아 마땅하고 사모해 마지 않을 "은혜로 주신 것"(빌 1:29)이라는 사실이니 우리는 이를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기뻐 뛰놀라 하시면서 아이들 같이 껑충껑충 뛸 정도의 것임을 밝히셨으니(눅 6:23) 이 또한 마음에 새길 일이다. 사랑의 하나됨 즉 3위1체의 원리에서 내 생명은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이시니(그 대신 고난 받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어) 우리의 머리터럭 하나도 상함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눅 21:18).


그러므로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모시고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우리의 삶이니 사랑의 아름다움이요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실천적 미학(美學)이다. 그 시절 로마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사자의 밥이 되기 위해 줄 지어 향하던 발걸음의 그리스도 사람들의 행렬에서 어린 아이를 안고 가는 한 젊은 엄마의 희망과 기대와 사랑의 순수함에 한껏 겨워 노래 부르며 가는 그 찬미가를 듣고 너무나 놀란 한 구경꾼은 그 자신 믿음에 들어가 후세에 그 사실을 기록으로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능욕(reproach)을 지고 영문 밖으로(세상 사랑과 삶의 낙 밖으로) 그 분을 따라(사랑의 실천으로 당하신 고난이요 지금도 우리와 함께 당하시는) 나아가는 우리의 입술에는 사랑의 송가(頌歌)가 가득 차고 넘치며 끊이지 않는 것이다(히 13:13-15). 시편 139편, 시편 23편도 그런 송가 중의 하나이다. 아니, 성경 전체가 노래 가사 아닌 것이 없다. 

............................................................................


"지하교회"란 말은 어폐가 있다. 초대교회 형태를 벗어나, 이 세상이 마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 것처럼 교회당 건물을 보란 듯이 크게 짓고 하나님의 교회랍시고 위세를 과시하던 지금까지의 무지한 교회 운영을 기준하여 하는 말이기에 그렇다.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핍박 받는 것으로 시종일관하게 되어 있는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망각한 세속적 표현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초대 교회 형태"라고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 아니라면 "세포(cell) 교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포"라는 의미는 핵 분열하듯이 12명을 적정 단위로 하고 그 이상으로 불어나면 반으로 다시 쪼개어 6명 선에서 출발, 계속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불려 나가는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매일 모이고(매일 모이는 것으로 원칙으로 삼고 적절하게 신축성 있게 운영하면 될 것이니 개인 사정을 따라 불가피하게 빠지는 날이 있을 것이므로) 일주 한번은 기백명이든 천명이든 전체가 한 번에 모여(건물이 없을 때는 하루쯤 임차해도 무방할 터) 대집회를 여는 구상도 좋은 것이다. 어쨌든 틀에 박힌 것에 집착하여 화석화(化石化)하는 것을 막도록 힘쓸 일이다. 생명체는 환경에 순응하여 적절히 변화하는 것이 특색이다. 그런 변화가 없으면 목석과 비교해 나을 것이 무엇이랴.

앞 글에서 악령들이 속일 때 "기독교는 지금까지 인류 생활을 향상시키지 못했다. 현재에도 평화와 안녕의 질서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미래의 영생의 약속인들 제대로 지킬 것이냐" 식으로 무지한 인생들에게 접근한다 했거니와, 실상 이런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은데, 인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악령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내가 바로 구원자다" 하고 나설 준비로써 그런 생각을 광범위하게 인생들의 뇌리 속에 미리 각인시켜 놓았다 함이 옳은 분석일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안녕과 복락을 약속한 일이 없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악인에게 평안이 없다"고 성경이 처음부터 선언한 것처럼, 악인 즉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인간이든 영물이든 단 하나라도 있을 때 그 사회는 안녕과 질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 하나가 들어 얼마든지 전체 사회를 온통 흐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 하나가 들어 전체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고통 속에(한 몸으로서의 체제이므로) 빠뜨린(롬 8:22) 현재의 예를 들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상태에서의 안녕과 평안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강제와 간섭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악인 혹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때요 그런 장소(무대)로서의 세상인 것이다. 생명의 핵심이 사랑이 되어 있는 속성상 절대로 강제적 수단으로 평안과 안녕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자진 자발적인 자유인으로서의 선택에 의해 그래서 의와 선(그 총합이 바로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하는 이들로써 구성된 사회라야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이 구현되는 것.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승승장구하고 득세할 수밖에 구조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의인(선인)은 밀리고 부대끼고 박대를 당하는 것이 필연으로 되어 있다. 성경은 이를 다시 필수적인 것으로 가르친다. 이유는 생명 가운데 있는 의인이 구원의 대상자의 죽음에 동참하여 하나가 되어야만 그의 죽음이 의인의 생명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항구불변의 삶의 법칙(이는 또한 구원의 법칙이니 곧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의 이치)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친히 본을 보여주신 바다.

적 그리스도의 거짓된 속임수의 수작은 그런 소위 "외계인"의 메시지 전달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이 강제력에 의한 통일, 통할이다. 그런 강제적인 것은 위의 설명처럼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로 이 영원한 삶의 법칙을 애호하여 준수하는 하나님의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갸륵하고 숭고한 작업에서 모든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있기에 악령들이나 악인들의 위협이나 회유가 먹혀 들 수가 없다.


성경 내용의 합리성은 가장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총동원되어 있는 것임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시니까 그런 것이다. 모든 법칙의 창조자이시니까 그런 것이다. 법칙에 모순이나 자가당착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법칙일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외면한 채 그리고 알려고도 않은 채 "무조건 믿는 것이 대수다' 하고 무식하게 가르쳐 온 것이 오늘날까지의 서글픈 실상이었다. 여기서 한시 바삐 탈피할 일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