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6일 수요일

인류사는 대규모의 기만사 (끝)


위의 "하나님이 살아 있는 확실한 증거"라는 동영상 조회수가 240만을 육박하고 있다. 이들이 창조자 하나님의 실존을 알기 위한 일반인들의 구도심을 나타내는 것이면 바람직하지만, 실제는 교회에는 나가나 정말 성경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신이 가지 않는 이들이 조회를 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너무나 서글픈 현실이라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처음부터 막무가내의 자기 고집으로 일관하는 성격이라 이런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법이다. 어중이떠중이까지 합쳐 한국의 기독교도가 1,200만이라 자랑하지만, 그 중에 240만이나 되는 이들이 이 비디오를 보았다 하니 그 실상(확신도 없이 교회에 출석만 하는 또는 회의적인 자세를 해결하지 못하는)을 알 만한 것으로서, 그래서 한심하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이런 동영상을 통해 이제는 하나님 계심을 알았으니 천국 가고 영원한 형벌을 면할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성경(구약)도 다 믿고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세상에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배척한 것을 보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그렇다.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은 그런 "하나님 증명"을 위해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물론 기본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마 16:24), 매일 십자가 짐(눅 9:23),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생명)을 미워하는 것(요 12:25)에 착념함이니,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믿음 좋아 귀신도 한 때 쫓아내고 능력도 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선지자로서의 임무를 하고 있어도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함을(마 7:21) 확인시켜 줌에 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먼저, 자기 부인이나 십자가 짐을 오해하여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 목적이라 착각한다면 구원의 "구"자(字)도 모르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무슨 또 구원이라는 말인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도, 구원을 받았으니 즉 죽은 자가 산 자가 되어 있으니 마땅히 산 자처럼 행동하라는 그런 의미요 경고이다. 단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라는 의미만 명심해두어야 하는 것. 3위1체 원리에서의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일방적으로 되지 않는다. 구원도 마찬가지이니, 갑이 을을 사랑하면 을도 갑을 사랑해야지 갑 혼자만 을을 사랑한다고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게 되어 있는 믿음이다(갈 5:6).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이 사랑에 있다. 머리에 대한 몸(의 각 지체)의 사랑. 몸에 대한 머리의 사랑의 작용에 대한 무반응이 아닌 당연한 반작용. 그래서 믿을 때 회개하는 것이요 회개한 자에게만 죄 용서가 되고 죄 용서가 된 깨끗한 바탕 위에서만 성령께서 임하심이다. 회개는 이러한 갑의 사랑에 대한 을의 되갚는 사랑으로서, 머리되신 주인님(나를 소유하시는, 왜냐면 주인님 친히 나의 소유가 되어 주셨고 사랑의 종 노릇을 하고 계시니)께 그 소유(물)로서 그 종으로서 오로지 순종하겠다는 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래서 이 약속 이행인 것이다. 이것이 자기부인, 매일 십자가 짐의 의미이다.

바꾸어 말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곧 첫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함, 둘째는 이렇게 공동의 머리로 모시고 있어 그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 곧 믿음의 형제(우리말로도 "형제"들이라 하면 "자매"들도 모두 아우르는 의미)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이다. 나 자신과 같이 위함은, 그들 모두가 거대한, 확장, 확충된 나 자신이 되어 있음이다. 이것이 한 몸됨의 실상이다. 머리도 내 것이니 그리스도 친히 나의 소유이시다. 친히 그 자신을 내게 주심을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은 단순히 내 죄를 씻어 내가 용서되고 영생 얻고 하는 그런 피상적인 것으로만 인식할 일이 아니라 이상 설명과 같이 자신을 내게 송두리째로 영원하신 선물로서 주시어 오로지 나만 위하시게 되어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의 영원한 선포로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사랑의 속성을 따라 상대적이고 자유 선택에 따르는 것으로서,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아님은 재언을 요지 않는다. 그래서 믿는 자만 얻는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절대로 해당 사항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선별하고 차별하심이 아니라 순수하게 나의 자주 독립성에 의한 자유 선택의 결과물이다.

이런 필수 사항이기 때문에 말로만 사랑함이 아니라 행위가 따라야 하므로(세상 모든 사랑이 그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그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것) 야고보는 믿음에 따르는 행위를 가리켜 "죽은 믿음", "헛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이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요 매일 십자가 짐이다. 바울이 강조한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음"(고후 5:14,15),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음"(롬 15:2,3) 다시 말해 사람 사랑이다. 한 아버지를 모신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첫째이고, 그 다음으로 장차 형제들이 될 수도 있는(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세상 사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그 사랑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여 건지는 일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구원 받음을 "보내심 받음"(요 20:21,22)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 살리는 것이 목적이므로, 사람 살림에는 그 상대가 되는 이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들의 저주를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이기에(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대로) 고난 받음이 필수인즉, 우리가 "현재"(요일 3:2ㅡ"지금은"이 아니라 "지금"이라고 해야 읽기 쉽건만 이런 작은 것조차 방치해두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당연히 천사들처럼 초자연계 몸을 입고 있어야 하지만, 이런 누추하고 연약한 육체를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현재 계시는 모습 그대로다. 주님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신 때문이니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그런즉 사람 살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그리고 이 '사람 구원'을 한사코 막으려 덤비는 악령들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일부러 이런 낡은 자연계에 속한 몸을 다시 걸치고서 세상에 임한 모양새이므로 우리가 "보내심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어디로부터 받았느냐, 물론 하늘로부터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모양새를 이 땅에서도 이루시느라 그리스도의 성령(아버지의 성령과 하나되신)께서 내 안에 게심이니, 이는 바로 나 자신이 하늘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 앉아 있는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다(엡 2:6).

"천국, 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등 명칭이 많으나, 결국 우리의 고향(본향)이니, 때문에 이 세상을 "나그네 길"이라고 성경이 명명함이요 왜냐면 인간(아담)이 원래 초자연계 육체로서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가 가리키는 사실이 여기에도 있으니 이 또한 중요하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서 보면 세상 삶에서의 내 목숨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오매불망 나의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뿐이다. 인식의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이 사실을 전적으로 외면해 온 것이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고 안일하게 남이 써놓은 글이나 말에만 무조건 의뢰심을 발동하여 추종한 결과다. 계속 강조하는 바로서, 성경에 대한 이런 부분적인 몰이해는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이들에게는 구원받음에 아무 장애를 주지 않았으나, 무거운 암흑의 장막을 드리운 것만은 사실로서 대개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에게 걸림 돌로 작용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 애착에 대한 죄 의식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인간이 초자연계 능력의 존재였음을 가르치지 않았다. 모르니까 그런 것이다.

아담의 "죽음"도 영적인 죽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등으로 애매 모호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초자연계 몸으로부터 자연계 몸으로의 퇴락임을 설명하지 못했다. 사탄이 "용, 옛 뱀"(계 12:9/20:2)임을 성경에서 두 번씩이나 연달아 강조해도 여전히 그룹(cherub) 중 하나라고만 고집한 데에서도 그 무지무식은 여지 없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미련의 거품을 과감히 걷어낼 일이다. 그 "전통 보수"의 권위는 오늘날 사라진 지 오래다.)  초대교회는 모든 말씀을 성령의 계시를 받아 분명히 가르쳤으나 2, 3백년 내려오면서 바울이 탄식한 대로 급속도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해 간 것이다(갈 1:6).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기이한 것이다. 노아 홍수라는 엄청난 대재난의 혹독한 맛을 보고서도 그 비극적 사실을 노아로부터 배워 잘 알면서도 급속도로 세상이 타락해 간 것과 같은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만큼 악령 사탄이 인생들의 사고방식을 무소불위로 장악하고 휘두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너무 간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왜곡시켜 온 것 자체가 하나의 경이요 기적이다. 초능력은 모두 기적으로 통한다. 악령 사탄의 초능력에 의하여 지금까지 인생들이 좌우지 되어 온 까닭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고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무지무식에 대해 억지로 개입하실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가려져 있을 때는 스스로 오만해져서 망하게 되어 있는 자에게만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총 정리하게 되어 있는 마당에서 "구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올바른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었다는 그 "증거" 차원에서도 가감 없는 순수한 말씀이 모든 인생에게 알려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와 3운법칙의 등장이다.

고로 자기 부인, 매일 십자가 짐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 받아 성령과 더불어 함께 일함은(고후 6:1/벧전 1:12), 인류에 대한 최고도의 봉사, 보람찬 사랑의 최고 수준의 역사(役事), 사람 살리는 최고의 인술(仁術)을 베풂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누가 마다하리요. 이를 꺼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자체를 잘못 깨달아 잘못 채운 단추에서부터 비롯된다. 처음부터 "복음"을 잘못 배운 것이다. 신학교를 나와도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맡아도 마찬가지다. 바로 배운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혹은 절대 다수가 그렇다는 얘기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주소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 및 3운법칙이 세상에 나온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가감없이 정확히 그 뜻 풀이를 하여 초대교회 당시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려 함이다.

히틀러 아래에서의 독일 청소년들의 광란이나 중국 모택동 아래에서의 홍위병들의 광란과 같은 그런 광란의 시대가 왔으니 곧 오늘날이다. 적 그리스도의 사주 아래 그런 광란이 최고 절정을 이룰 것인데 이상 모든 현상은 그 예행 연습과 같은 성격이다. 인터넷, TV 등등으로 해서 그 광란의 도수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가고 있다. 완전히 미쳐 가고 있는 세상이다.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자처하는 스웨덴에서는, 동성 성행위가 죄악이요 멸망의 장본이 됨을 소돔 고모라의 경고대로 경고했다 해서, 미국에서는 소위 "동성 결혼"이라는 천하의 불법을 수용하지 않고 그런 맹랑한 불법행위에 대해 주례 서 주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180일 징역형에다 매일 천 달러씩 벌금형을 추가시켰다 하고, 역시 기독교국가라고 자처하는 영국에서는 노방(路傍) 전도자가 길거리에서 전도할 때 예수님과 마호메트를 비교해 차별해서 말했다는 죄명으로 체포했다고 하지 않는가.

기독 자유당의 팜플렛이 그렇게 전하고 있다. 완전히 열병에 들떠 있는 세상이다. 기독교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되어 있음을 자랑하노라는 국가들이 이 모양이다. 양식과 양심까지 마비되어 있다. 오히려 그들이 천대하는 국가들이 양식과 양심만은 살아 있어 여기 동조하지 않고 있으나, 이 역시 변동은 시간 문제다. 로마 제국 핍박 시대에 기독교도가 로마시에 불을 질렀다고 네로가 엉뚱한 트집을 잡아 교회를 무참히 탄압한 것처럼 이제는 과거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던 "동성 성행위자 차별"이라는 기상천외의 죄목으로도 교회를 탄압하는 구실이 되어 있으니, 악한 자 사탄 곧 용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실정이 원래 이러하다. 언제든 무슨 수로든 북한 사회 이상의 강제력이 동원될 수 있는 터이다.

이런 심각한 사태를 해결하자고 해서 기독교도가 정치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이 역시 꼴불견이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면 초대교회는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루에 3천, 5천씩(남자만) 회심하여 교회로 돌아오는 여세를 몰아 정치 세력화하여 정권을 장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의 참 모습은 앞서 설명한 대로 '고난 받는 약자'가 됨에 있다. 이것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앞에서 지적한 노아의 방주, 이스라엘의 독립(물론 그런 것도 당연히 제 몫을 하고는 있지만) 등 일련의 사실이 성경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증거는 항구적으로 그 자체 증명인 것이다. 그 자체 증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약하심"(고후 13: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를 본으로 삼는 교회의 약함(고후 12:10)이다.

세상 종교의 특성을 보라. "믿겠느냐 말겠느냐, 안믿으려면 우리의 정의의 칼을 받아라" 하는 일부 종교의 구호처럼, 절대자를 선전하는 것인 만큼 절대적인 강자의 군림을 강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거꾸로 모든 이들에게 죄인 취급 당하는(구원 상대자가 하나님 앞 죄인으로서, 이러한 우리 위해 우리 죄의 저주를 받으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셨음과 같이, 우리 역시 같은 본을 따라 같은 방법을 취함이 필연이므로) 고난 받음이 바로 성경의 진실성을 그 무엇보다 웅변으로 입증함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이 강력한 의미를 회석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위장하는 세상 종교를 내세워 세상 나라들을 한 때 지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정당을 만든다는 것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웃기는 일이다. 교회로서의 본분을 저버림이 극도에 달했기에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다.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이 정답이 아니다. 이미 그런 체제를 갖추고도 오늘날 성경에서 그렇게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소돔고모라의 죄(유 1:7/벧후 2:6/롬 1:26,27ㅡ동성 성행위)를 지적하여 말한다고 처벌하는 것을 보라. 그리스도 교회의 전략은 그렇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부패한 유럽 국가가 그렇게 한다고 나도 따라 한다는 것인가. 옳은 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속 빈 강정이기 때문에 그런 들뜬 모방을 일삼게 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영, 성령)으로 되는 것이다" 하심과 같다. 그렇게 해야 "큰 산이라도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된다"[슥 4:6-7].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것이다"(마 18:19) 하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교회가 합심해서 드리는 기도에 천하사를 제어하는 막강한 위력이 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이 최대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수단을 택하지 않고 인위적인 수단 방법에다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가 제 빛을 잃고 기도를 얼마나 등한시하는지를 여실히 입증하는 것이다.

과거 발행되던 월간지 한 페이지가 달랑 남아 있기에 우연히 보니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나 공산주의자들이 국정을 찬탈하려는 시도가 자행됨을 알고 피비린내 나는 공산 혁명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교회 중 뜻 있는 이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거의 6개월간이나 합심 기도 끝에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 나라 대통령이 정부 내에 잠입해 있는 적색 분자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추방해 버린 것이다. 또 영국에서는 국가적 위기를 당하여(이 역시 공산주의들과 관련된 것이라 기억하지만) 이를 염려한 한 부부가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한 결과 마침내 그 국면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는 간증(그 저술가의 서책 중 일부 내용)을 과거 접했던 일이 있다. 이런 사례는 수집하자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인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나가면 인간적인 결과밖에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나가면 당연히 하나님 친히 개입하시게 되는 것 또한 불문가지다.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부언하면, 왜 동성 성행위가 비정상으로 마땅히 타기되어야 하고 병적이고 치료의 대상이며 사회적으로 용납될 일이 아니냐 하면, 3위1체의 원리에서 설명할 때 양자간의 하나됨은 성질이 정반대되는 것끼리의 조화 통일 즉 남녀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사귀더라도 어느 한 쪽이든 배우자가 있을 때 부당하며 불법이 되는 것은 이러한 둘이 하나됨의 원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미혼 남녀가 접촉하는 것도 둘이 하나로서 결합하는 약속을 하면 그 사실을 세상에 공표함으로써 떳떳이 하나를 이룬 다음에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요 범법일 수밖에 없다.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지(서로가 상대를 대함에서 부담이 없으므로) 여부를 가리는 차원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삶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 원리 곧 만유의 법칙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철저히 따지는 까닭이다. 자연법칙을 따라 자연계가 유지 존속되듯이 이 만유 질서의 기본이 되는 법칙(3위1체의 법)은 어떤 경우에도 준수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서로가 좋아서 행하는 일일지라도 거시적 안목에서는 전체 사회 기강을 해치는 일이요 전체의 행복 도모에서 장애 요인이 되는 씨앗이 되는 것인즉 마땅히 척결 대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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