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4일 월요일

이 세상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낯빛은 진노ㅡ"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로서 계심과 똑같이 "사랑"(요일 4:16)으로서의 측면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히:12:29)로서의 양면으로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롬 11:22)입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severity)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kindness)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가 될 것이다" 한 것입니다. 모두 의인이고 거룩한 천사들만으로 남는다면 엄위가 물론 없겠지만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음을 기화로 어긋나가 불법을 행할 때에는, 그리고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 대로 여러 번 기회를 주시고 여러 번 타이르시고 게다가 오래 참으시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도무지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실 때에는 모든 것은 180도로 달라집니다.

더 이상 기다림이 소용 없다고 보실 때 "아끼지 않으시고", "도끼로 찍어내시고 버리시게" 됩니다(눅 13:7/눅 3:9). 믿고 회개하지 않는 자도 그 대상이지만 믿음에 들어와도 처음 약속(회개)과는 달리 배신하는 경우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도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4)는 약속과 동시에 경고의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열매 맺음에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나 자신은 믿는다고 해도 성경대로 믿지 않고 경고를 받지 아니할 때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냐?" 한다면 그것은 "구원, 믿음, 은혜" 자체를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잘못 배웠고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남 탓할 것도 없고 나 자신이 두드리고 찾지 않고 구하지 않은 허물이 역력하니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에 대하여 우리가 더욱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니 혹 새어 나가듯이 떠나 버릴까 염려하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그 마땅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1-5) 함과 같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님이 말씀하신 바요 그 들은 자들(사도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로서 하나님도 큰 기적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들과 함께 증거를 보이셨다" 했으니, 오늘날은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의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도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특정인을 지도자로 생각하고 그들을 따른 것이 허용되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친히 그 위치에 영원히 계시므로 하나님과만 직접 상관할 일이요 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모든 것을 확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 친히 성경을 가르치시고 친히 교회를 지도하시는 시대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임무였던 말씀 전달은 이제는 성경으로 집약되어 있고 이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고로 교회 내에 목자(성경상의 명칭대로 "장로, 감독")의 역할은 초대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먼저 믿음에 들어 와 남들에게 전도하여 모은 여러 사람들의 본이 되어 있는 이들의 몫입니다. "본"이지 특정인에게 특정의 "가르침"의 전권이 부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르침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직 본을 보임에서 목자(牧者) 구실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으뜸이 되는"(요삼 1:9) 또는 주동이 되고자 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영혼은 내가 챙겨야지 어느 누구에게 의뢰하든 그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려는 가운데에서만 나도 위함을 받고 챙겨 줌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함이 그런 이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이시라 일방적으로 이해하여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 7:11)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12) 무자비한 처단밖에 돌아오는 몫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낯빛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인내의 모습이 아니십니다.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요 3:36)고 말씀하신 대로, "진노"입니다. 오직 이런 세상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로 기도하는 이들에게만 하나님이 모습은 무한 자비의 십자가 고난을 지시던 때의 그 사랑이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기도하시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들을 오늘날 찾으십니다. 오늘날 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마치 그 앞에 바쳐지는 희생 양처럼 되어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울부짖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세상 사랑은 나타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편안하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심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해산의 고통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시고(롬 8:26) 그리고 고난 받는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고난 중에 계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측면이십니다. 아들과 하나되신 아버지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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