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4일 월요일

새 피조물로서의 새 생명은 새 인식, 새 관점의 전적(全的)인 인간 삶의 천지 개벽을 뜻한다




3위1체 법칙을 따라 된 인간의 구조는 영혼과 육체이다. 영물(에덴 낙원의 "짐승")들은 지상 동물과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범죄로 인해 자연계 육체로 영구 정착되지 않았다면 영물(악령)들이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건드릴 수도 없고 따라서 "네피림"이란 것이 생길 리도 없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써 영원히 초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죽음 없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한 번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 즉 영생하지 못하는 자연계 육체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떨어졌으므로 하나님(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각자와 이 3위1체 원리로 하나되심으로 된 필연적 결과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비극적 결과를 전화위복시키는 방편으로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심으로써 이루신 것이다.

전화위복이라는 것은 독생자(홀로 한 분이신 외아들) 외에 많은 아들을 얻으셨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일 뿐 처음부터 많은 아들을 얻고자 하심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원리원칙 아래 공평공정하게 이루신다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지 않았어도 초자연계 몸으로 얼마든지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어 있고, 또한 영물들 중에 거룩한 천사와 악령들로 구분이 생겼듯이 우리 인간도 초자연계 몸으로 살면서 의인과 악인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아담(범죄하지 않았다면)의 심판을 받아 악인들은 악령들과 함께 영원한 형벌을, 그리고 의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더불어 영원한 복락(福樂)을 누리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악과 선으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었으니 완전한 자유 의지(자유 선택권)를 주셨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로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모습으로 계셨기 때문에 그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만드셨으므로 만유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 원리가 탄생, 작동하게 된 것)으로서의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한 대로 하나로 계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함은 이 원리로 계심을 가리킴이다. 또 이 원리로 만물을 지으셨으므로 사랑으로 지으셨다는 뜻이요 만물을 이 사랑의 법칙을 따라 전적으로 위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하나로 계시니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두 분이시지만 둘이시라 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로 표현되심이니 아들의 모습, 아버지의 모습이 따로 있으심이 아니라 아들이 곧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아들의 모습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신즉 또 그 모든 말씀이시므로 이에 대해 헷갈림이 없어야 하는 것.

형상과 실체의 관계이시니 우리로 치면 영혼과 육체 관계로서,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다시 '육'으로 삼고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을 그 '영'으로 모셔 새로운 하나 관계로서의 3위1체의 원리로 존재하게 되었으니 곧 "새로운 피조물"이다. 물론 영원 멸망에 처해지게 되는 악인들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그냥 처음 그대로의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이중 구조인 것이다.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고전 15:45)과 하나되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영혼과 육체로 따로 보지 않고 보는 것은 육체만을 대하나 그 안에 있는 영혼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대할 때 보는 것은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 그와 하나로서 계시는 그리스도를 함께 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두가 균등하게 평준화가 되어 있으니 크고 작은 자로서의 구별은 있되 진정한 평등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에도 형상이신 아들을 대하는 것이나 동시에 그 형상의 실체로 계시는 아버지를 상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해 조금도 혼동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로 계신다고 해서 누구를 상대함이냐 하고 어렵게 생각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어떤 때는 아버지께서 되시고 어떤 때에는 아들께서 되시는 등 번갈아 나타나심도 아니다.

언제나 하나로 계심이니까 우리가 대하기는 아들(형상)이시지만 그 안에 계시는 아버지(실체, 우리로 치면 영혼)를 대하시는 것이므로 "아버지"라고 불러도 아들과 하나로 계심인즉 아들을 대함이요, 아들을 상대로 하여 "주님"이라 불러도 그 실체로서 아들과 하나로 계시는 아버지를 대함이다. 고로 한 형상을 상대하는 하나님이시니 둘로서 또는 두 모습으로서 계시는 것이 아니다. 빛이 파동성과 입자성이라는 두 가지의 전혀 별개의 성질로 되어 있어도 빛 하나로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입자성으로만 상대해도 틀린 것이 아니니 파동성을 함께 함유하기 때문이요 반대로 파동성으로만 보아도 틀린 것이 아니니 입자성도 함께 취급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이런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이란 개념에 익숙해져야 마땅하다. 나의 구원의 이치가 이 3위1체 원리의 둘의 하나됨으로 인한 것이라 함은 그리스도와 내가 별개요 각각 독립된 개체이지만 그를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으로 내 안에 모심으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 이치를 따라 그 죽음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은 내가 그렇게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음이 되는 엄연한 사실, 그 현실을 따라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과 을이 둘이서 하나되어 있는 구조가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납득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이유는,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자기 소견을 따라 움직이면 어떻게 하나로서의 모양을 취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잘 설명하는 것이 몸과 머리의 관계이니 몸 따로 머리 따로 논다면 어찌 그 둘이 한 몸의 체제와 형상을 갖추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이치가 명약관화이다. 그래서 나를 위하지 않는데 따라서 죄라는 것이 아예 원천 봉쇄되어 있는데 "어찌 죄 속에 거하리요, 살리요"(롬 6:1,2), 어찌 죄를 짓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이치를 모르고 혹은 따르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소위 기독교의 각종 부패상이 노정되는 터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양심이라는 불문율의 (하나님의) 계명이 있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맛이라도 있지만, 소위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이들은 양심마저도 무시하려 들므로 소금의 맛을 나타낼 수 없는지라 세상으로부터 가장 지독한 이기주의자라고 욕을 듣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처음부터 아주 잘못 배워 온 것이다. 이제는 이런 무지는 용납되지 않는다. 또 이와 같이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는데 "마리아"라는 전혀 이치에 맞지도 않는 그야말로 당치도 않은 존재가 내게 무엇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것이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기독교"의 현주소다. 때 늦기 전에 크게 각성할 일이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히 13:4).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탐욕도 우상 숭배-골 3:5)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동성 성행위(click)자나 도둑이나 탐심이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고전 6:9,10)고 서릿발 같은 성경의 경고 앞에서도, "은혜로,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대목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 소위 교회의 "대신 죽으심"이라는 "전통적 해석"을 무비판으로 수용하여 정작 성경은 외면해 버린 것이다.


동성 성행위(click)자를 두고도 "인권, 운운"하니 기타 모든 불법 행위자들도 박해 받는 "소수자의 인권" 차원으로 덮어주려는가! 총체적으로 자아중심 일색이니 자기 부인이 없음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 종교의 교인만 되었을 따름이다. 이 세상이 악마에게 지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최소한 세조 앞에서의 단종 폐위의 불의에 대한 사육신의 의분과 기개만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파송되었으면 왜국에서 보인 "나는 신라의 개 돼지는 될지언정 왜국이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일갈한 박제상의 충의의 의지만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사탄이 아담의 나라를 찬탈해 이 세상에 불의로 군림해 있음을 안다면 만주 벌판에서 말 달리던 독립 투사의 선각자, 선구자의 의기만은 살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실제 가치를 따지자면 이 모든 것보다 정작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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