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일 토요일

"네가(내가) 누구냐?"ㅡ"위대하신 "마지막 아담"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존재이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스승)'라 칭함을 받지 말 것이니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사회적인 넓은 의미에서의)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 것이니 너희 지도자는 하나로서 곧 그리스도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마 23:6-12).

그런 모든 명칭과 관념은 하나님을 모르고 지내던 지나간 시절의 유산이요 잔존물이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똑바로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 친히 우리의 머리로서 그 모든 것이 되시는 까닭이다. 머리의 역할은 몸의 모든 지체 각 부분과 직통, 직결됨에 있다. 다른 그 무엇 그 어떤 제3자를 통하지 않는다. 제3자가 존재한다면 3위1체의 원리가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선생', '지도자', '아버지' 등의 위치는 오직 머리의 역할에 한한다. 그것으로 족하고 그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모두 머리로서의 마지막 아담을 성령으로 모시고 있음이 그 이치이다. 고로 아무리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 안에는 최고로 높다고 인정되는 자와 똑같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차이도 없이 똑같은 성령이 계심으로써 마지막 아담이신 머리를 모시고 있은즉 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이다. 그러므로 어떤 차등도 계급도 지위 고하, 우열도 없이 오직 '몸과 머리' 관계뿐이다. 하나님이 계시는지도 몰랐고 알아도 그저 막연하기만 했을 때에는 사람(하나님 대신)이 지도자요, 선생이요, 아비인 줄 알아 우러러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다르다. 인식부터 싹 바꾸고 갈아치워야 하는 때이다. 청개구리처럼 하라는 것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철저히 골라서 하듯이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아랑곳 않고 "교부(敎)", "신부(神)", "목사(牧)"ㅡ이런 식이니 인간의 아둔한 고집도 알아 줄 만하다. 버리지 못하는 옛 인습적 사고 방식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안에서는 모두가 주인 의식으로 나가야 하는 때이니, "나는 못해, 나는 자격 없어, 할 만한 사람만이 하게 되어 있고 나는 아냐"ㅡ 이런 식의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사고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다. 마지막 아담 인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세상 사람들이야 머리되시는 하나님부터 외면하니 논급할 것도 없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 2:20). 그러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빌 4:13)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2:12),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으로써 멸망에 이른다"(3:18,19)는 "많은 눈물"의 경고가 나와 있는 바울의 똑같은 편지에서 이런 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하다.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래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소위 종교 개혁자가 될 수 있고 아무개 하면 다 알 수 있는 그런 능력의 부흥 강사, 전도자, 기도자 등 얼마든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니, 남이 위대한 일을 했으면 그 일은 그 자신이 한 일이 아니요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므로 오늘 이 시대에 처한 나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이는 나도 제일인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도 근거도 밑도 끝도 없는 야망이나 패자(覇者) 심리와는 아주 다르다. 자아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이다.

"으뜸이 되려는"(요삼 1:9) 심뽀는 사탄에게 속한 것이요 멸망의 지름길이다. 오직 주인을 섬기는 사랑의 종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의식 개혁을 말한다. 그것이 큰 자의 일이든 작은 자의 일이든 꼬리의 일이든 심장의 일이든 개의할 바 아니다. 머리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므로 그런 위치, 역할의 종류가 내게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몸의 역할에서 필요 불가결한 존재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함이니 이를 가리켜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나의 먹을 양식"(요 4:34)이라 하신 것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보내심을 받는 의미인 것이다(요 20:21,22). 내가 죠지 뮬러(George Muller)가 될 수 있고, 내가 송상절(宋常節)이 될 수 있고, 석자직(石子直)이 될 수 있고, 헛슨 테일러(J. Hudson Taylor)가 될 수 있고, 기도자 하이드(Praying Hyde)가 될 수 있고, 찰즈 피니(Charles Finney)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홀리 앤(Holy Ann, Ann Preston)의 기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을 일으킨 장감(長監) 선교사들의 정오(正午) 기도회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1857년 기도회 부흥(Fulton Street Noonday Prayer Meeting)의 도화선이 된 그 중심 인물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주체 의식은 '대표(代表) 의식'에서도 나타난다.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나의 탓으로 여기는 겸허한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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