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6일 수요일

인류 역사는 대규모의 기만사(欺瞞史) (1)

인류 역사는 대규모의 기만사(欺瞞史)

기만해 왔고 기만 당해 온 역사다. 악령 용 사탄이 인간을 지배하여 기만했고 인류는 기만 당해 온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열을 올리고 또 그러하겠지만(이유는 자기 스스로가 창조자로 가장하여 등장하려니까), 지금까지는(악령의 그와 같은 시도를 막는 자가 있어 이제까지 막혀 있었기에) 하나님이 없다고 온 세상을 하나같이 속여 온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우리 인간은, 초자연계에 속해 초능력을 행사하는 악령의 적수가 아니다.

일방적으로 당하도록만 되어 있다. 오직 진리를 찾아 두드리고 구한 자에 한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들어 거룩한 천사(악령들과 같은 수준의 영물 즉 초자연계 존재로서 악을 행하므로 악령이라 하고 천사는 공동체 의식에 충실했으므로 "거룩하다" 함이니 같은 사람이면서도 악하면 악인이라, 선하면 의인이라 함과 같은 것)들이 활동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당하고 있어도 당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생들이 어두움에 사로잡혔다 하고 눈이 감겨져 있다 하고 사탄의 세력 아래 있다고 한 것이다(행 26:18/고후 4:4).

고로 이 세상 지배자의 정체를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속이는 대로 그냥 속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지내 온 비극의 역사다. 무신론이 그렇고 진화론이 그렇고 세상 종교가 그렇다. 진화론은 자연계 관찰 그것만으로 족하다. 훌륭한 업적이다. 그 관찰한 결과에다 어쭙잖게 전혀 답지 않게 무신론을 갖다 붙여 성경(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을 부정하려는 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든 만물이든 모두 만들어 완성시키신 것이라 결론을 내리는 성경에 반기를 들어 진화했다고 하니까, 또는 완결된 창조를 "진화를 통한 창조"라는 궤변을 토하니까 말썽일 수밖에 없다.

불교 등 세상 종교도 똑같은 오류에다 그런 "도를 넘어섬"까지 보탠 결과물이다. 이 자연계만 인식하는 즉 동전의 일면만 보는 무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초자연계에서는 덧없다(無常)는 것이 없다. 항구여일이다. 상주(常住)다. 이 상주를 이루고 있는 '이 세계와 대립되어 있는 세계' 곧 초자연계를 간과한 것이다. 이런 미망을 깨우치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반드시 대칭을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고로 지금부터는 인간의 진화를 말하는 진화론은 물론 불교의 교리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 때이다.

천주교는 어떤가. 마리아를 친근히 하여 신격화하고 있다는 것이 결정적 흠이다. 이 마리아의 존재는 아무 쓸모가 없다. 인간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머리와 몸', '영혼과 육체' 관계로서의 대칭 관계를 따르는 것으로서 둘이 하나로 작용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상으로 가까운 인간 관계가 없다. 부모 아내/남편/자식보다도 더 가깝다. 나 자신보다 더 가까우시니 왜냐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는 않아도 그리스도는 위하게 되어 있는 영원 삶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창조 당시부터 변함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심으로 된 것이 아니다. 원래 이러한 생명의 구조였는데 범죄로써 이탈해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는 의미다. 곧 구속(救贖, redemption)의 의미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그 마땅한 우리의 죽음에 동참하시어 이 '둘로서의 하나'를 이루심이 십자가 공로요 따라서 그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 유일의 근거다.

나와 하나가 되셨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성령으로 임하시어 내 안에 상주(常住)하심이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내 안에 계시어 나와 하나되셨으니 그 이상 바랄 것도 보탤 것도 없다. 그런데 웬 마리아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 친히 내 안에 계심이다(요이 1:9). 하나님 친히 내 안에 계시는데 인간 마리아가 무슨 의미가 있고 소용이더라는 말인가. 마리아를 숭상한다는 것은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구원의 이치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성경의 위치에서 보면 사이비다. 이런 사이비는 버리면 버릴수록 덕이다. 붙들고 있으면 있을수록 구원과는 멀어진다. 불교도가 불교의 교리를 떠나 성경으로 돌아와야 하듯이 천주교인도 천주교를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올 일이다.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왜냐면 사람 삶의 도리를 모른다는 점에서는 일반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과 "매일 십자가 짐"을 설교 강단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납득 못해서 설교 강단에서 이 주제로 교인들에게 경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사안의 심각성은 천주교가 마리아를 버리지 못함과 똑같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룸"을 무시함은 작대기 하나가 있으면 이 끝만 강조하고 저 끝을 인정하지 않음과 같은 무리인데도 이를 인식 못한다. 성경에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데도 이를 외면하고 심지어는 알려고도 않는다.

작대기 이 끝만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만 다시 말해 우리 위하신 사랑만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는 일방적인 것이요 '대칭적인' 의미가 아니니, 상대가 사랑하면 나도 사랑하는 것이 '둘로서의 하나'가 되는 의미다. 작대기의 이 끝과 저 끝을 동시에 인식해야 하나의 작대기라는 의미가 형성된다.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위한다는 사랑의 언어요 어법(語法)이다. 그런데도 개신교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일변도다. 계속 강조하지만 작대기의 저 끝만 인식한다. 그리고서는 구원이 완성된 것인 양 자기를 기만한다. 이것이 전반적으로 개신교의 허구성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데도 있다. 그러나 너무 미미하여 그 존재를 알지 못할 정도거나 철저히 무시 배제되어 왔다.

물론 구원은 완성된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한 손가락도 움직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창조로 내가 세상에 존재하게 될 때 내 스스로 무엇을 개입한 적이 없음과 같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가리켜 새 창조라 한다. 다시 출생함이라 말함도 같은 뜻이다. 내가 나고 싶어서 난 것이 아니다. 즉 나라는 요소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우리의 구원 곧 새로 창조됨, 다시 출생함이 이와 같다. 문제는 이렇게 창조되었으면 즉 살게 하셨으면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법대로 살아야지 이 법을 무시하고 내 욕심만 채우려고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 때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인 죽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 죄 값(첫 사람 아담이 지은)으로 우리가 지금 이와 같은 불행 속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 무식하기는 개신교도 불교도나 천주교도와 똑같다. 유신론자라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소위 "신앙고백"을 한다고 영생하는 것이 아니다. 속이는 자 악령 사탄이 만들어 놓은 거짓 것을 더 믿어 이상 설명과 같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속임수에 넘어가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런데도 구원 받은 것이라고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고 그렇게 가르쳐 온 것이다.

불교도나 기독교도나 무신론자나 똑같이 내려지는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 뉘우쳐라, 회심하라, 돌이켜라"(행 17:30)이다. 영원한 이상향은 회개하는 자만이 들어가는 데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신 것이다(마 4:17). 무엇을 뉘우치느냐, 지금까지 삶의 법대로 살지 못했음을 버리는 것이요 삶의 법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즉 3위1체의 원리에 나타난 대로의 '둘의 하나됨'을 따라야 진정 사는 것이다. 작대기 하나를 온전히 인식하려면 이 끝과 동시에 저 끝도 함께 보는 것이니 즉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으면 나도 하나님을 사랑함이 필연 필수이다.

이와 같이 서로 사랑함에서 자기 부인이 나타나는 것이고 매일 십자가 짐이 실천 가능해지는 것이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 된다. 마땅히 살아야 할 '사는 법'대로 내 스스로 사는 것이 나의 구원을 이룸이다. 죽은 나를 살리셨으니 그 산 자답게 나를 산 자로 만들어 주신 그 뜻에 합당하게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의 본부를 다함이, 바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 되도록 그래서 둘이 하나되도록 나를 산 자로 살리셨으니 작대기의 이 끝이 있으니 저 끝이 있어야 하겠기에 그 이 끝 혹은 저 끝으로서의 본무를 다함이 재차 강조하거니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다.

너무나 속아 온 것이다. 그래서 사탄이 이 세상 지배자라 해도 의아해하고 그가 용(龍, dragon)이라 해도 어리둥절해하는 정도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이 정도다. 성경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강제로 눈이 감겨져 보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낫 놓고 기역자"라도 눈이 감겨져 있으니 모를 것이야 뻔하다. 머리가 둔해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강제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성경에 그토록 두 번씩이나 강조해서 사탄이 창세기에 나오는 그 "뱀"(우리가 현재는 자연계에 속해 있으므로 자연계를 기준하여 서술하다보니까) 곧 용(초자연계에서의 그 대칭되는 모습)임을 설명했건만(계 12:9/20:2) 지금까지 마이동풍으로 지내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너무나 딴판인 것으로 세뇌당해 왔던 것이다. 속아 오기가 이 정도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건만 속아 온 것이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말이 이에 해당된다. 인식만 하면 되건마는 눈이 감겨져 있으니 보지를 못한다. 강압적으로 눈을 감겨놓으니 이런 것이다. 뒤로 손을 묶어 꼼짝 못하게 해놓고 안대로 싸매 놓으니 천하 없어도 볼 수가 없고 볼 수가 없으니 도리가 없으며 무지몽매한 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속이는 자의 실상을 알라는 것이다. 속고 있음을 뒤늦게나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각성하라는 것이다.

위험을 알려주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바울 사도는 "내가 모든 것을 꺼림 없이 전달하여 주었으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행 20:26)는 무서운 말을 했다. "무섭다"는 것은, "칼이 임함을 보고도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않음으로써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그 파수꾼의 손에서 찾을 것이다.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을 삼음이 이와 같다.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킴으로 그 길에서 떠나지 않는 경우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할 것이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6-11)는 경고가 오늘날 진리를 안다고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여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살인죄만 처벌 대상이 아니라 살인 방조죄도 있다. 성경은 이 둘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내가 거기 함께 있다"(마 18:20) 하셨다.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고 악령 사탄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세상 종교처럼 버젓이 전당을 지어놓고 있을 짬도 겨를도 여유도 없다. 언제 핍박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므로 그렇다.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올바른 삶에 있으므로 모인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음이다. 모이는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서로를 격려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히 10:25/3:13) 모이는 것이요 이 필요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는 성격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매일 모였다. 필요하니까 매일 모인 것이다. 성전 개념은 그리스도 이후에는 성령을 모신 각 사람의 몸으로 되어 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킬 것이다"(요 2:19-21) 하고 선언하신 것으로 이미 기정 사실화되었다.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착각하지 말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통하지 않는다. 정부 당국이 교회 건물을 파괴 또는 폐기시켰을 때 그러면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집을 손댔으니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전이셨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전인데도 온갖 악형으로 망가지는 것은 별문제다. 구원해내야 할 상대의 고난에 함께 함으로써 한 몸으로서의 '둘이 하나됨'의 진리대로 됨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건물은 그런 의미가 전혀 없다. 이로 보아서도 이상 사실은 명백해진다. 고로 지금 극심한 핍박이 자행되고 있는 북한 사회라 여기고 그 사회에 우리가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 활동을 하면 그것이 정상적이다. 그것이 성경의 표준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교역자가 성경대로 깨닫고 올바르게 가르치는 일이다. 교역자가 그렇지 못하면 그렇게 되도록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일이다. 절의 승려든 성당의 신부든 진리를 깨달은 대로 자기 신도들에게 전할 일이요 건물을 가지고 다툴 필요는 없다. 비교적 이런 면에서 자유로운 개신교 교회당도 마찬가지다. 교역자가 성경대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면 거기서 편 갈라 다툴 이유가 없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거기서 나오면 되는 일이다. 중국에서 그런 가정 교회 또는 집 교회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는 예가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세상 종교는 원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니까 겉 치장이나 요란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신 이들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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