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8일 금요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의식해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다"(고후 4:1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실상으로 나누어 생각함이 우리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눈에 나타나 있는 것만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연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지 않다고 쉬이 포기할 일은 절대로 아니니 우리의 생사와 직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보이지 않는 용 곧 사탄, 보이지 않는 기타 악령들, 보이지 않는 네피림의 망혼(亡魂)들이 우리와 직접 맞대어 거처하는 오늘의 이 세상인 것이다. 항상 이런 존재들을 우리는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동시에 그들과 맞수가 되어 우리를 보우하고 있는 천사들의 존재도 인식해야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위하는 터이므로 그들보다 우리와 적대 위치에 있는 악령들의 세력을 의식하고 있어야 그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가능하기에 이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지 않을 수가 없다.

간단히 말해 악령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싸움을 걸어오고 있으므로 우리로서 응분의 조처를 취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항상 말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일방적으로 당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거룩한 천사들의 활동이 있는 것이나 천사들의 보우도 우리가 이들 악령과 맞서는 위치에 있어 그에 합당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한 오직 그림의 떡일 뿐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노도와 같이 홍수처럼 악의 군세(軍勢)가 밀려드는 판인데 이에 맞서는 능력(힘)은 우리의 머리 곧 대장이신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가 남자(아담)와 하나됨을 통해서만 자기보다 모두 상위(上位, 그들보다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었으므로)에 있는 여러 영물들 앞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그들 위에 군림할(영물들보다 나중 창조되었다는 열등 의식을 극복하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하다. 

항상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아무 힘도 쓸 수 없고 따라서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살고자 하여 이렇게 이런 육신으로 있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현실이고 명실 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을진대 당연히 천사(영물)들과 같은 초능력의 존재로 악령들 위에 군림해 있어야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난 받음이 필수 조건이므로 이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그 몸된 교회의 일원으로서 마저 채우기 위해 세상에 있는 터라 오직 여기에만 우리가 관심을 총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그리스도 의식으로 항상 우리 자신을 가꾸고 다듬고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 악령들이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파에 휩쓸려 부화뇌동 식으로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고 성경이 경고하는 것과 같이 매일의 시간 활용에 관해서도 나의 목적대로 요리하는 주인 의식을 발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자로서의 마땅한 자세로 시종일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TV와 같은 눈을 현혹하는 것에 피동적으로 따라 움직일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과감히 차단하는 등의 절제와 통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1,42) 하신 대로,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인"(딤후 2:3,4/빌 2:25/몬 1:2)은 싸워 이기는 것 외에는 관심사가 없다.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바 바울 사도의 권고를 충실히 따를 것이 요구된다. 혼자 지내라는 것이 명령이 아닐 뿐, 다른 것은 다 주님의 명령으로 말한 것이다. 혼자 지내는 것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취하는 것이므로 명령일 수 없으나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고 하셨으니 이에 마땅히 유의할 일이다.

이제까지는 구원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그릇된 교리에 젖어 성경 읽는 것과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등한시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생사가 달린 것으로 인식(왜냐면 불순종일 때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영원한 운명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날 것이기에), 180도 전향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마 7:21) 정상적인 삶으로 진입할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그들은 나를 적대하는 원수들이지 친구 사이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나를 넘어뜨리고 영원한 죽음을 맞도록 하는 그 일에만 맞추어져 있다.

사탄의 시험(눅 4:4)이 바로 이런 뜻이다. 이 시험은 일회성이 아니라(:13) 연속해서 연달아 퍼부어지는 불의 화살들이다(엡 6:16). 전투에서 대장과 대원은 일심동체다. 지휘관의 명령 일하에 하나같이 움직이는 것이 생명이다. 사탄과의 전투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한 시도 지탱할 수 없는 나의 위치를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싸움에는 용맹도 용맹이지만 지략 없이는 이길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지략의 원천이시다(고전 1:30/사 9:6).

때문에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할"(살전 5:17) 필요가 있기에 그렇게 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지휘관의 작전 지시는 부단히 내려진다. 그러나 우리의 지휘관의 지시는 우리가 기도하여 구할 때에 한해서만 내려진다는 이 변함없는 진실을 외면하지 말 것이다. 지시를 수령함이 없이는 마치 낙오병처럼 되어 그 종말은 뻔하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에 있다는 말처럼 자기 믿음을 지키고 구원받음을 계속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주님과 하나되어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니 곧 "보내심을 받은"(요 20:21,22) 대로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 전달하고 삶의 모범을 보여 선한 직업을 가져도 가난한 자 구제를 목적하는(엡 4:28) 생활 자세인 것이다.

어찌하여 세상 살려고 하는가. 이 세상은 사람 사는 데가 아니다. 악마가 지배하는 곳인데 어찌 사람 사는 데인가.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받지 못하는 자연계의 육체를 가지고 어찌하여 삶의 낙을 누리겠다는 것인가. 전투하는 자가 어찌 평상시의 평화시 생활을 꿈꾸겠는가. 전쟁이 벌어졌으니 어찌하든 이겨놓고 보는 것이요 나머지는 그 다음의 일이다.

이공 순신은 그 7년 전란(임진왜란)에서 한번도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세상 얼마나 더 버틴다고 적 그리스도 출현까지 7년이나 걸리겠는가. 그 이전에 세상은 급속도로 변해 갈 것이다. 7년이라 하더라도, 단 몇 사람이라도 더 건져야 하겠으니 단 몇 년이라도 전도하고 기도할 수 있는 여유를 더 주십사 하고 눈물로 호소할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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