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6일 수요일

인류사는 대규모의 기만사 (2)


필자는 이 3운법칙이나 3위1체 원리를 구명(究明)해내기 위해 학문적으로 접근한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이는 자연계에만 국한해서 모든 인식 작용을 발동시킬 수밖에 없었던 인간인지라 "보이지 않는" 반(초)자연계 영역은 금시초문일뿐더러 한계 저너머이기 때문이다. 만일 학문적으로 접근했더라면 3위1체 원리는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 인식은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터라 자연계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아예 감도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필자는 성경을 통해 초자연계의 실존을 믿고 있었다는 그 차이만 있는 것이다. 그런 차이야 실상 대단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모두 자기 스스로 발견해낸 것과 같은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3위1체의 원리"란 것이 있으니 두드려보고 만져보고 쓰다듬어보고 해서 괜찮은 물건이라 싶으니 가져다 쓰면 되는 것뿐이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보어의 상보성 원리", 다 격에 맞고 그렇게 말해야 마땅하다. 왜냐면 그 연구자들의 각고면려 끝에 이루어낸 업적인즉 상찬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개의 3위1체 원리, 아무개의 인간 생애의 법칙, 이런 것은 한 마디로 천부당 만부당이다. 다만 성경만은 누구 못지 않게 읽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성경을 읽는 일이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성경 많이 읽은 것을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읽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면 어떤 경로로 해서 3위1체의 원리 등이 세상에 알려졌느냐 할 때 "아무개가 발표함으로써 알려졌다", 그것뿐이다. 다음 사실은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 즉, "그는 성경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있던 차였다". 더 완벽하게 기술하려면, "성경 말씀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린' 결과 마침내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한다"가 될 것이다.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의지(意志)가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이제는 그 실체가 일단 밝혀졌으니 지금부터 학문적 접근이 가능할 수도 있겠고 이 방면에 기본 소양을 갖춘 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겠지만ㅡ. 그러나 초자연계의 벽에 부딪치는 한계가 명백한데 학문적 접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면 무엇이냐, 목적이 무엇이냐. 필자의 목적은 인간 생애의 법칙이라는 말 그 대로 그리고 3위1체의 원리가 가르치는 그대로, 우리 인간과 이 인간을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 모든 피조물의 어버이가 되시는 조물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원래 성경에 밝힌 그대로 알림에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애초의 그 영광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길을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홍보하고 인하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고통 고난의 양자 택일에서 그 올바른 방향을 제시함으로서 제대로 선택하여 그르침이 없도록 하는 이 사명 의식 외에는 일절 다른 의도가 없다. 곧 삶의 법칙, 인간 구원의 법칙이니 당연히 3위1체의 원리에 터전한 것으로서 간단히 말해 '머리와 몸으로 구성되는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이요 구원의 원리다. 임진왜란 당시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그런 정신을 훌륭히 입증해낸 역사의 귀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순신정신 선양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위해 마지막 아담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자기 부인"은 바로 그 완벽성의 결정체다. 세상에서의 공동체 의식(이공으로 인해 충분히 구현된)은 오직 그 그림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실체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세상이 안일하고 편할 때에는 빛을 발하지 못하고 항상 응달 신세가 되는 것처럼(악마 용이 이 세상을 현재 지배하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실상), 이 완벽성을 기하는 자기 부인의 삶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올바른 의(義)와 선(善)의 자세가 세상에서 환영 받을 리 없다. 왜냐면 그것은 악마 사탄이 목숨을 걸고라도 저지하고 있는 현안이기 때문이다. 영생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영생에 이르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 신변에 이로울 수가 없다고 판단해 온 사탄이다. 이런 점에서도 그러하고, 의롭게 선하게 살려고 하여 모두가 함께 최대 행복으로 들어가는 영생 길을 택함에는 반드시 시련과 역경과 시험이 따르게 되어 있다.

반면 멸망에 이르는 통로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수월하고 누구나 쉽게 추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속성상 그렇다. 이유는 올바르게 삶으로써 그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향락할 수 있는 경우라면 누구나 이에 호응하고 달려듦으로써 악인과 의인을 식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왜 이 둘을 반드시 식별하여 가려내어야 하느냐, 지금은 인생 삶 자체가 고(苦)이기 때문에 이 고를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의와 선이므로 누구나 고를 기피하고 낙을 찾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고를 벗어나 에덴낙원에서처럼 낙을 누리는 단계로 일단 접어들게 되면 당장 그 본색을 드러내어 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 용(dragon, 龍)의 짓거리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음이다.

고로 이 세상은 생리적으로 악이 형통하고 의와 선이 역경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여기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으니 각별히 이 점에 유의할 일이다. 즉 영생의 길과 문은 좁고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길도 평탄하여 찾는 이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어 있다. 이는 방금 설명한 대로 필연이니 이 걸림 돌에 넘어가지 말 것이다.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갖은 시련과 고난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딤후 3:12). 이런 것을 이상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당연지사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 공동체 의식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른 삶의 법칙임을 설명하였거니와 한 몸 체제를 말함이니 따라서 한 몸을 이룬 단 하나의 지체라도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나누게 되어 있는 것. 북한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 고통을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당하고 있는 사실을 안다면,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는 것이 머리의 명령 곧 머리의 뜻임을 알아야 하는 것. 그럼에도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사탄의 교리를 내세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대형교회들이 있으니 그런 미혹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갇힌 자를 생각하면서 이 세상 삶을 향락할 수 있는가. 감히 "하나님의 축복 운운" 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 극심한 탄압 속에 있는 북한 교회는 축복을 못받아 그런가. 그래서도 마귀의 소리요 그 속임수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와 축복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리게 되어 있는 영생과 구원 외에 달리 그 무엇이든 "축복 운운" 할 때는 무조건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증거가 되니 각성할 일이다.

삶의 법칙이 인간 구원의 법칙이 됨도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한 몸 체제를 구현하시고 이 바탕 위에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생명에 동참하게 하시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에 투입되어 "보내심 받은"(요 20:21,22) 이치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그러한 "남으신 고난"에 동참함으로써만 이룩되는 인간 구원의 사업이다. 때문에 구원 받았으면 마땅히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으로 삶을 향유해야 함에도 일부러 이런 자연계 몸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의미가 우리의 성령 받은 곧 구원의 의미임을 재차 강조한다.

이와 같이 시련과 역경과 시험 가운데서 고난의 죽음의 대상이 되어 있는 까닭에 이 세상에서 번듯하게 호화 웅장을 극한 대형건물을 지어놓고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음은 당연귀결이다. 초대 교회는 향후 모든 세대 모든 교회의 본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과연 초대교회는 어떠했는가. 개장하자마자 핍박부터 들이닥쳤다. 불의한 헤롯왕의 칼날에 이유 없이 야고보 사도가 쓰러졌다. 없어서는 안될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육성으로 전달하던 스데반에게 감히 손을 대어 돌무더기의 피투성이로 만들어 죽여 버렸다.

감히 하나님의 사람을. 이런 것이 모두 성경의 진실성 즉 하나님의 말씀임을 유감없이 입증하는 증거다. 만약 지어낸 이야기라면 이렇게 둘러댈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작당 치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것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일견 "약한" 또는 "무관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강한 하나님으로 그려야 할 터인데 정반대로 약하디 약한 존재로 부각시키지 않았는가.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다른 그 어떤 것에도 그 진실성 증명을 의뢰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다. 스스로 증명하는 이 막강한 권위를 보라. 

때문에 이러한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이니 당연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는가. 물을 것도 없이 이런 극악한 핍박에 대처하는 모양새일 수밖에 없다. 대형교회? 웅장한 건물? 천만에다. 핍박 받아 당장 헐리거나 탈취 당하여 다른 용도로 전용될 건물을 무엇 때문에 힘들여 짓겠는가. 이런 웅장한 예배당을 짓는 것마다 "우리는 이 세상 신이 사탄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세상에 공표하는 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대로 골라잡아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 안믿으면 저것도 믿지 않음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고 그래서 구원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교회당부터 크게 지어 올리느냐 이 뜻이다. 모두 속 빈 강정이란 증거다. 고로 처음부터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 하신 것이다. 이는 당연히 "항상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는 교회이므로 숫자가 많고 적음에 개의치 말라는 미리부터 주시는 경고이시다. 숫자가 많아야 교회이고 적으면 아니라는 공식은 없다. 오히려 두 셋만 모여도 주님 계시니 아버지 계시고(요이 1:9) 하나님이 계시면 거기가 성전이요 교회이다.

이 말씀은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마 18:19) 말씀하신 끝에 하신 것이다. 즉 교회로서 모이는 목적 그 주된 이유가 합심 기도다. 그냥 찬송 몇 절 부르고 설교 듣고 하는 것으로써 예배가 되지 않는다. 합심 기도와 더불어, 매일 피차 권면해야 할 필요성에서다.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일이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기" 위함이니, "시작할 때에 확신했던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어"(히 3:12-14)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하는 길이 험하구나 할 필요가 없다. 현실이 죽음인데 이 죽음에서 구출되었다는 이 단 한 가지만으로도 기뻐 춤출 듯이 되어야 그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베드로도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것이며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7-9) 하였다. 세상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 탄식부터 먼저 하는 것이다(눅 18:26).

이런 저런 실상을 아무 것도 모르고 단지 사람 사는 세상, 살면 살아지는 것으로 착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친히 말씀하시고 실상을 밝히심으로써만 비로소 알아지게 되는 인류의 비극적 실태다. 인간을 죽음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린 철천지원수 악마의 장중에 놓여 있는 세상인 것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성전이랍시고 앞다투어 웅장한 건물을 짓는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나 되는 듯이. 정녕 그러하다면 초대교회는 웅장한 건물부터 시이저의 궁전보다 더 화려하게 지어 올렸어야 했으리라.

그러므로 중국의 지하 교회(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나), 현재의 북한 지하 교회를 기준으로 하여 교회 운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왜냐면 그것이 초대 교회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이들 교회가 바로 초대 교회의 본보기를 그대로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자유를 누려 왔다고 할 서구 교회가 타락 일로에 접어들어 썩은 냄새가 천지를 진동할 정도라 동성 성행위에 대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는 실태를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고로 ㅡ

만인 제사장(막 11:17)
만인 제물(하나님의 어린양과 한 몸을 이룬)
만인 성전(聖殿, holy temple)

이상 세 가지를 그 어느 때보다 강조할 시점에 이르렀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은 잘못된 번역이고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옳다. 그리고 기도는 제물이 선행되어야 응답이 된다. 우리가 받은 고난이 바로 이 제물로서의 역할이다(롬 12:1). 그리고 이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것이므로 성전에서만 거행됨이니 하나님 계시는 내 육체가 곧 그 전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 우리의 육체가 이 3요소를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인"이라 함은 "믿는 자이면 누구나 그렇다"는 뜻이다. 그 중에 본이 되는(벧전 5:3) 자에게 목자(pastor)의 임무가 부과된다. 사도 시대 교회는 이들을 "감독", "장로"라고 불렀다. 어떻게 부르건 의미는 같으니 상관 없다.

그러므로 교회 운영은 어려울 것이 없다.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은 변화된 삶에 있으니 곧 내 속에 나의 영혼 격이시요 머리가 되시는 마지막 아담을 모심으로 되는 일이다. 단지 머리되시는 주님(주인, 소유주)의 지시를 따라 한 아버지의 한 형제들을 이룬 식구들이 함께 모여, 전술한 바와 같은 합심 기도 및 피차 권면에 힘쓰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함에는, "두 사람이라도 합심 기도하면 다 응답이 된다"고 약속까지 하셨으니 몇이 모이든 숫자에 괘념하거나 연연해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두 셋이 모여도 "내가 함께 있으마" 하신 것이요 그리함으로써 교회는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주변에 전도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오면 수가 불어나는 것은 정한 이치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교회 내 중요 현안에 대해 어떤 결정이 있을 때 초대 교회는 "성령과 우리는"(행 15:28) 이러이러하게 결정하였노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마땅히 우리도 이 본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이시나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고 움직이시므로 "성령"이시라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이께서 "두 세 사람만 모여도 내가 거기 있다" 하신 마당에 누가 무엇이라 감히 입을 놀릴 것인가. 다시 말해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교회 기능은 충분히 되는 것이다. 인간이 제정한 특수 직제에 의한 직분자가 주인일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시다. 또한 소위 "성전"으로서의 건물이 교회 기본 요건일 수 없음은 앞에서도 설명했다.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모세 시대에 하나님 성전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조차도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말씀으로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설파하지 않았던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으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기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하셨다"(행 7:46-50) 한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령을 모시고 있는(요이 1:9) 그 사람이 성전이요 그런 사람이 모인 자리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 계시는 곳이 성전인 것이다.

우리의 이 세상 나그네 생활(안주 정착하여 정상적인 삶의 낙을 누림이 아니라 내 본향에서의 본격적 삶을 동경하며 임시 방편으로 쓰는 한시적 수단)의 모습을 묘사하시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하셨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요 12:24-26) 하셨는데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위에서 밝히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생활인 것이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삶이다. 같은 삶이라도 쓴 것이 있고 단 것이 있다. 지금은 쓴 것부터 먼저 맛보는 상황이요 단 것은 영원무궁하므로 차후에 올 차례다. 그 영원무궁한 것에 비해 미리 쓴 것부터 맛보아야 하고 맛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각 교회 교역자부터 성경을 다시 읽고 깨닫는 것이 우선이고 시급하다.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된 순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교인들이 그 교역자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함을 다시 강조한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고 다니는 교회를 박차고 뛰쳐나올 것은 없다. 같은 교인들과 소통하고 교역자를 위해 드리는 기도의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이 성경적이다.

정 소통이 안될 때에는 잠자코 거기서 물러남이 옳다. 어떤 일로든 다투어서는 안되니, 거기에 내 자산이 얼마나 바쳐졌든 간에 손 털고 나오는 것이 온당하다. 하나님께 바친 것이니 그 바친 재산 목록은 하늘에 비치되어 있을 것이므로 헛일이 아니므로 아까워할 필요는 없다. 바치는 마음이 문제이지 액수도 관계 없고 사후 처리도 괘념할 일이 아니다. 최선껏 다해서 안되면 손을 놓는 것이다. 굳이 그것을 지킨다고 해서 덕될 일은 없다. 정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 집단에 남아 헌신적으로 기도에 전념할 일이다. 모든 기도는 들으시게 마련이다.

집단에서 나오게 될 경우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두 셋이 모이는 북한식 교회 운영 방법을 취해도 아무 하자는 없다.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절대 다수라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진리대로 행하면 그뿐이다. 하나님 계시고 천사들이 절대 세력으로 호위하는 마당에 누가 무엇이라 하리요. 악령인들 손댈 것인가.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점만 확인해두면 된다. 하나님께서 친림(親臨)해 계시는 각자의 몸이 성전이다. 성전은 거룩하니 당연히 거룩하지 않고는 성령께서 계실 수가 없다.

거룩함이 무엇인가. 내가 이룩한 거룩함이 아니라 거룩함의 토대 위에서 즉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나를 위하시는 근거 위에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고후 5:15) 거룩함이다. 때문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고후 7:1) 수가 있는 터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1) 이룸이다.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와 일치된다.

교역자는 이상과 같은 취지에 따라 구역 예배(장로교에서 시행하는 것과 같은)를 활성화시켜 세포 조직과 같은 체제로 교인들로 영적 무장을 하게 함이 필수이다. 그러면 급속도로 교회 확장을 유도할 수 있다. 왜냐면 끊임 없이 전도하게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제자 훈련을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부흥운동은 거기서 태동되어야 바람직하다. 그런즉 대형교회당을 선호하지 말되 그렇다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용도 폐기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최대한으로 적극 활용할 일이다. 소위 "성전"이라 하여 특정일에만 개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65일 개방하여 전도관으로 또는 기도실로 얼마든 활용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초대교회 또는 핍박받던 중국 교회에서 시행하던 집 교회(골 4:15) 형식으로 해도 얼마든지 성경적이다. 집에서 모이기는 8명 내지 10명 정도라도 좋다. 실속이 있으면 되는 것이지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하신 대로 건물 역시 마찬가지다. 소수가 모일 때에는 동성끼리가 좋다. 이런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를 위시하여 초창기 교회에서는 세인들이 비평하여 말하기를 남녀가 밀실에서 엉뚱한 짓을 도모한다는 말이 나돌았음과 같은 오해를 불식시키는 차원이다. 반드시 남녀가 모여야 교회가 구성되는 법은 없다. 여기에 관한 것은 "바영사운"(http://hahahehehihihohohuhu.com) "집교회", "메시아 교회" 등에서 상술하였으므로 참고하시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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