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9일 일요일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도 유사 종교 행위ㅡ속아 산 세상 (3)


시대는 지금 양분되어 있다. 초자연계를 인식하기 이전의 시대와 인식하기 시작한 다음의 시대로 분류된다. 전자는 지금까지의 수 천년 세월에 걸쳐 있다. 후자는 오직 이 21세기를 말한다. 기간의 장단으로 치면 후자는 한 순간과 같다 할 것이나 중요성으로 치면 후자는 전체를 뒤덮고도 남는다. 이 21세기를 무대로 하여 적 그리스도의 출현 그리고 뒤이어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가 모두 한꺼번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런 것이 3위1체 원리의 조화(調和) 통일이다. 고로 전자에 속한 것을 모두 버리고 후자에 걸맞는 개혁을 해야 하는 것이니 곧 각자의 자아 개혁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새 창조, 거듭 남의 모든 은혜로써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하여 구비해 놓으셨어도 나 자신이 이에 응하지 않는 한, 자아 개혁의 의지가 없는 한 그림의 떡일 뿐이다. 그래서 "믿으라"고 하기에 앞서 "회개하라"(마 3:2)고 세례 요한은 외쳤고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4:17)는 말씀으로써 하나님 말씀 전파의 단초를 여신 것이다. 

회개하라는 것은 "올바로 살라"는 뜻이다. 회개는 올바르게 살지 못함을 뉘우치고 이제부터는 옳게 살겠다는 결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구원"은 너무나 잘못된 이해로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람들을 지정하시어(왜냐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에"-살후 3:2) 영원한 생명을 공짜로 안겨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그런 정도로 심각하게 곡해해 온 것이다. 본질을 빼어버리고 껍데기만 한 아름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의 180도로 구원의 말씀을 돌려놓는 그래서 "다른 복음", "다른 예수"로 바꾸어놓는 일탈이었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때가 되었다. 

청개구리처럼 하라는 것은 아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잘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인류의 반역이다. 조상 귀신은 보이지 않아도 잘만 위하는 것이 그런 것 중의 하나다. 보이지 않는 조상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만들어 낸 악령들의 술수다.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도 유사 종교의 일종이다. 영혼 불멸을 믿고 화복을 끼칠 수 있는 권력이 조상들에게 있음을 믿고 죽어 좋은 데 갈 수 있다고 믿는 등등이니 그런 것을 상술한 경전만 없다 뿐이지 형태는 다를지라도 종교다. 유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조상 숭배 때문에 유교를 종교로 취급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인간사도 능히 알 수 없는데 어찌 죽은 다음의 일을 논하겠느냐라고 공자 자신이 말했다지만 조상에 대한 예라고 하여 조상 숭배를 제도화했으니 모순이다. 이런 조상 숭배는 소위 고등 종교가 없었던 아프리까 미개인들 이들 아프리까 부족이나 유교 문화의 한국을 비롯한 동양 일원에서만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번문욕례와 같은 유교 의식은 나가떨어지고, 조상덕을 입을까 또는 조상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하는 자아중심의 욕심으로 조상 제사만은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사후에도 그렇게 극성스럽게 조상을 위한다면 한국 등은 살아 생전에는 더욱 더 효심을 발휘하는 세계의 일등 효자 국가로 명성을 드날릴 터인데 왜 그렇게는 안되어 있다는 말인가. 부모 살아 생전에는 홀대하더니 왜 죽은 다음에는 야단법석들이냐고 외국인들이 한 마디씩 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저들이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다"(시 106:28,29)든가,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 8:19),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전 10:20)는 데에서도 보듯이, 이런 조상 숭배는 하나님을 격노케 만드는 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롬 1:25)에서 우상 숭배와 같은 수준이다. 조상을 섬긴다는 것은 빈 말이다. 

'조상' 숭배가 아니라 '귀신' 숭배, '조상'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위함이니 귀신은 네피림의 망령일 뿐이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인간의 경배를 인생들을 속임으로써 도둑질하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환생 증거" 등은, 악령과 귀신이 인간 개개인의 인적 사항을 다 꿰뚫는 초능력의 소유자들이므로 마치 당사자 즉 본인이나 된 것처럼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식은 죽먹기다. 아니라면 그 자신이 네피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소상히 알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으나,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든 그 누구를 네피림으로 확인하여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으므로 함부로 생사람 잡는 식으로 네피림이라 단정 짓는 것은 금물이다.  

가령 달라이 라마의 경우 그를 네피림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다. 그리 되면 달라이 라마에게 전도할 기회를 영영 막아버리는 결과가 된다. 네피림은 악령의 분신으로서 본질이 악령(이미 영원 멸망의 운명으로 결정된)이기 때문에 구원이 불가능함이다. 만일 달라이 라마 같은 이들이 구원되지 못하도록 악령이 작용하여 그들을 네피림으로 낙인 찍히도록 각종 초능력으로 환생한 것과 같이 만들어 놓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단 한 명이라도 구원되지 못하도록 혈안이 되어 있는 악령들인즉 그런 일은 하고도 남을 수 있다. 그러므로 네피림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영역(英譯)으로는 "모든 피조물(every creature-KJV)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분부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개나 소나 식물에게 복음을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상신이 와서 제삿밥을 먹어주고 후손을 잘 되게 하고 혹은 재앙을 내리고 하고 혹은 좋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따위는 모두 헛소리이다. 악령들의 초능력이므로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네피림 차원에서도 일말의 진실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을 상대로 해서는 그 영혼 파멸을 위해 자아중심의 거짓말 위주로 나가는 것이 악령들의 속성이므로 개의할 필요도 없거니와 가치도 없다. 불교든 조상 숭배교로서의 유교든 이런 것은 무속 신앙과 함께 우상 숭배 배격 차원에서 모두 버려야 할 때이다. 세상이 성경의 복음(福音, 희소식, 반가운 소식, 좋은 소식)을 종교의 범주에 집어넣어 격하시켜 그렇지 인간의 신창조, 재출생의 진리는 종교가 아니다. 이를 모방하여 희석시키려고 이 세상 신이 갖다붙여 준 종교라는 이름의 "기독교"일 뿐이다. 그래서 천주교, 개신교 등 세상 종교와 다름없는 것으로 각종 인위적인 교리를 각색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고로 이제는 마땅히 종교를 버리고 거듭 나고 새로 창조되는 이 마지막 기회에 누구나 올인해야 하는 것이다. 


효도는 살아 생전에 하는 것이지 죽고 나서 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자아중심에서 오는 이기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복받고 저주를 면하고자 하는 무지 무식의 소치일 뿐 아무 의미가 없다. 나사로는 곧장 불 가운데로 들어갔고(마지막 심판 전에도 악인들로서 확정된 사람들이 가는 곳은 불 속이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 속에 들어갔고 네피림의 망령들처럼 이 지상에 정처없이 배회, 방랑하지 않는다. 
네피림인 듯이 또는 조상 신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사무엘 선지자와 사울 왕과 신접한 여인의 대화(對話)에서도 보듯이 거짓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면 간단하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이 세상은 거짓 투성이요 이 세상 신인 악령에게 하릴없이 속아 사는 곳이다. 성경만이 이 진실을 말하고 그 외에는 일절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사탄이 철통 같이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늘 끝 하나 비비고 들어갈 틈을 사탄이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인류 문화는 성경만 빼놓고는 보이는 세계에 한정된 것이었다. 동전의 양면성에서 일면만으로는 화폐 가치가 없듯이 꼭 그러한 양상의 절름발이(한 쪽 다리를 못쓰니까) 사물 인식의 상황이었으니 그 지식이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러하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체했으니 무식 무지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당사자 자신만은 이를 알지 못했으니 어리석자면 그 어리석음이 한이 없고 가련한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그와 짝할 데가 없다. 불교가 그러했고 자연과학이 그러했고 진화론이 그러했다. 자연과학을 여기서 들먹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혼까지 그 존재를 부정한 망념 망상 탓이다. 

자연과학의 제반 발명 발견으로 인류 생활이 급속도로 향상되었다지만 이 세상이 인간 삶의 터전이 아니요 오직 새 창조와 재출생을 위한 기회 부여에 그 유일한 의미가 있다고(왜냐면 복음 전파가 완료되면 이 세상도 끝난다고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확언해주셨으므로) 전제할 때, 이런 소위 "눈부신" 문명의 이기는 적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를 위한 것일 뿐이지 영생하는 일에는 아무 것도 기여한 것이 없고 오히려 이 때문에 인간 심성을 더욱 교만해지게 만들어 진화론 등 무신(無神) 사상만 더욱 부채질한 것이 되었으므로 오히려 덕이 되지 못하고 해를 끼친 것이 더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르면 그 모르는 것을 인정하면 그뿐이요 흠이 없겠지만 그러고도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고집했으니 그 폐해가 극심하다.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사고방식이 여기서 한 걸음도 이탈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3위1체의 원리에 의해 인간의 인식 능력이 그 한계성을 적나라하게 여지 없이 드러내게 된 오늘날,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그리고 인식을 180도 전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한 마디로,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양자 택일이다. 무식으로 남느냐, 실상을 바로 받아들여 자신을 일신 또는 쇄신시키느냐 둘 중 하나다. 이 21세기에 처해 있는 인류는 양단간의 기로에 서 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 양자 선택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간섭 못한다. 악령들도 당연히 간섭 못한다. 하나님 친히 손을 못대시는데 피조물이야 불문가지다. "보이지 않으니 그 존재도 없다", 이것은 철없는 어린 아이의 안목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이제까지 삶이라고 살아 온 것이다. 너무 어이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불교도 버리고 진화론도 버리고, 무신론은 물론 버릴 일이다. 지금까지의 자연계 일변도의 모든 인식과 사고방식을 버릴 때가 정히 온 것이다. 이 자연계뿐이라는 전제 아래 구축되었던 모든 것을 미련없이 버리지 않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여전히 무지 무식 가운데 자기를 방임할 양이면 버리지 않아도 좋다. 그렇지 않거든 하루라도 빨리 버리면 버릴수록 좋다. 오직 성경만이 요지부동이니 최초부터 이 보이지 않는 실상을 유일하게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를 따른 이 진실을 처음부터 유일하게 설명해 왔던 것이다.


보이지 않으나 실존한다. 지금까지의 인간 인식으로는 놀라운 일이다. 아니, 이런 것을 지금까지 모르고 지내왔던 인간의 무식을 정작 놀라워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깜깜 무식과 무지 속에 우리 인간을 가두어 왔던 이 세상 신이란 존재에 대해 누구나 반드시 놀라워해야 하는 것이다. 180도 인식을 바꾸라. '좌향좌' 했으면 이제는 반드시 '우향우'밖에 없다. 어정쩡하게 그 중간 각도는 없다. '뒤로 돌아' 뿐이다. 비정상적 동전의 일면 인식으로부터 양면 인식으로 급선회로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이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처음부터 양립해 왔다는 것. 보이지 않는 세계는 쏙 빼버리고 보이는 세계만 가지고서 노닥거려 왔으니 이 미망에서 그 불완전함에서 벗어나면 날수록, 하루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단 일분 일초인들 그런 어리석음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IQ가 타민족과 비교해 높았던 우리나라 사람은 이러한 사물의 속성을 벌써 본성적으로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사후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고 때문에 미래 세계를 지향하는 속성을 감출 수 없어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 국가가 되다시피 했고 기독교가 들어오면 기독교 국가 못지 않은 행습을 보여 왔다. 그래서 이 나라는 기독교와 불교가 함께 동반 성장하는 나라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실체가 그 정확한 윤곽을 드러냄으로써 3위1체의 원리로 실증(實證)된 이상에는 미련없이 지체 없이 가시적 세계에만 한정되어 진전되어 온 진화론이든 불교든 그 의미를 더 이상 유지 존속할 필요가 없다.


진화는 비록 그것이 부분적으로 진실이라 할지라도 자연계에만 국한한 것이지 초자연계는 예외다. 초자연계를 염두에 두고 진화를 연구한 역사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초자연계가 병립해 있다는 실상이 밝혀진 이상에는 그 진화론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자연계가 진화해서 초자연계가 된 것이 아닌 이상 이는 필연이다. 초자연계는 자연계가 시작되면서 함께 출발했던 것이다. 불교의 무상(덧없음)도 상주(常住)의 대칭어이다. 언어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가 그러하다. 무상(無常)이 상주(영원 불변성)와 함께 하는 쌍둥이인 줄 알았더라면 불교는 아예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그렇다.


세상은 무상뿐이라 속단, 오판했던 결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상주라는 것이 있는 줄 알았다면 그 상주로 되돌아가는(환원, 복귀) 방법만 찾았을 게 아닌가. 상주는 처음부터 없었는데 그 없는 상주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런즉 비단 불교만 아니라 결론은 지금까지 인류가 헛살아 왔다는 것이다. 완전히 속아 산 것이기 때문. 왜냐면 좌우 양면을 동시에 보지 못하고 한 쪽만 보도록 이 세상 신에게 강요당하여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런 심각한 착각 속에 지내 왔으니 무슨 결론인들 제대로 하고 판단인들 정상대로 해왔겠는가.


사람은 생각대로 판단대로 움직이는 것인데 사물 인식을 정상대로 못하고 오로지 마귀(이 세상 신)에게 꺼둘려 왔으니 모든 것이 그르치고 망쳐버린 의미만의 삶이라는 것이다. 오직 진실과 진상, 진리를 말하는 성경을 믿는 자 그것도 어린 아이 같이 믿은 사람에 한해 그르친 그릇된 오도된 삶을 살지 않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제 초자연계라는 그 다른 한 면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그럼 지금부터는 명실 상부한 사람 삶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면 실상 그렇지도 않다. 이제 그 진실을 앎과 동시에 적 그리스도가 나와서 다시금 대대적으로 속이는 판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즉 성경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지금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이 이 세상 신에게 휘둘리고 꺼둘린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이 비극적 현실을 탈피하려면 지금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마지막 아담께로 돌아와 새 창조를 받고 다시 출생하는 일부터 먼저 해놓고 볼 일이다. 앞으로 적 그리스도가 나서서 그의 선지자 또는 대변인들을 통해 어떤 식의 거짓말을 나열하여 세계인들을 속일지 모르나 성경과는 배치되고 상반되는 내용으로 나올 것인즉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미리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 성경 진리를 대하고 믿고 사랑할 것인지 여부를 때늦기 전 결단할 일이다. 지금은 결단할 때이다. 악한 자가 등장하기 전에 결단하여 행동에 나설 때이다.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한 자를 막는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 받을 자를 두루 찾아 구원시킨다는 의미이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고후 6:1)는 의미는 변함이 없음이다.


부자가 악인이라는 것은 자아중심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이 고난의 세상에서 혼자라도 잘 살겠다는 것으로 그대로 표출된 표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부자가 자기는 단지 청지기로서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재산을 잠시 세상에서 맡아 관리하고 있다는 인식 전환을 하면 문제가 없지만(딤전 6:17-19) 그렇지 않는 한 낙타로 비유하신 대로 필멸일 뿐이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시대를 분간하고 식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시는 때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획기적인 선을 긋는 때로서 그 중차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건마는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천기는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은 분별 못하느냐"(마 16:3) 책망하셨듯이 지금이 또한 그러하다. 적 그리스도 등장 후 즉시로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때를 앞둔 오늘날이기 때문이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더불어 그 이전 그림자적인 소임을 해왔던 모세의 율법이 버려진 것처럼, 초자연계의 존재가 확증되어 있는 오늘에 이르러 그 존재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몰랐던 과거의 모든 시행착오는 버려야 마땅한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어린 아이 적 시절의 모든 것은 버림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