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30일 월요일

오늘날 필요한 것ㅡ중국의 송상절, 석자직, 영국의 죠지 뮬러, 헛슨 테일러, 미국의 찰즈 피니 등의 인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하심은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할 것이다" 하신 것과는 의미가 다르니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부끄러워한다" 정도이면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즉 이 세상이 존속하는 동안에는 내내 그런 "부끄러워하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왜냐면 어디서 어디까지만 그렇게 부끄러워할 수도 있는 세상이 된다는 말씀으로 그 시기를 명시하여 못박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성경이 진실 그대로이고 여기에 그 어떤 거짓이나 속임수가 있을 수 없다는 확증이 된다.

모든 거짓은 거짓말을 농하는 당자(개인이든 집단이든)의 유익(사사로운 이익)을 위함이며 그렇지 않은 예가 없기 때문이다. 속이는 '상대를 위해서 하는 거짓이나 속임'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와 같이 "부끄러워할" 수도 있을 정도의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조건이라면 또 이를 미리 경고하신 것이라면 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시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왜냐면 먼 미래의 일까지 내다보시거나 아니면 그렇게 되도록 정해놓으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활동이든지 그것이 진보 발전하여 나아지게 되는 것을 예상하지 끝까지 이 세상이 다하도록 "약하고" "소수이고" 세상 모든 민족(나라)으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고 탄압의 대상으로 남는다고 말하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고 계획하지도 않기 때문이다(마 10:22/24:9).

이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히 그 확증이 되지만, 이 외에도 성경은 여러 대목이 있어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고 있으니 세상의 모든 성경 학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 기록된 말씀에 대하여 100% 신뢰를 해도 좋다.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 것이다. 성경 말씀에 반대되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무조건 일언지하에 무시해도 좋은 것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의 이름으로 증명한다고 호들갑을 떨더라도 성경적 사실은 요지부동이다. 그런 이른바 "과학적 증명"은 ①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이 세상 신(神-우리 육체인 인간은 '신'의 거짓말을 대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고 오직 계시된 진리의 하나님 말씀으로써만 이길 수 있다는 본질적 차이를 미리 확인해두는 것이 좋다) 악마의 속임수이든가 인간의 제한된 지식에 의한 착오이든가 둘 중 하나이든지 아니면 둘 모두일 것이니 이 점 분명히 마음에 각인해 두어야 하는 것.

인간이 자연계 육체에 속해 있는 한 이상 두 사실은 불가항력의 위력이 됨을 아는 것이 필수 지식이다. 진실로 이상 말씀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역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씀이다. 온 천하 인간을 속이는 악령(그들을 "신"[고후 4:4]이라고 하니까)으로부터서도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런즉 이 경고 말씀을 부디 명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 기울일 일이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우신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그 생명의 말씀이,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 "음란하고 죄 많고 악한"(막 8:38/갈 1:4/눅 11:29/마 12:45) 세상에서는 부끄러워할 정도가 되어 있음을 당연 사실로서 당연히 받아들임이 좋다.

이 세상이 정상인들의 정상적인 세상이 아닌 것이다(전 9:3). 악해서도 정상이 아닌 즉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지만, 악령에게 휘둘려 그 속임수에 넘어가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하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그래서 이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는 한(요 6:45,65) 누구든지 아무라도 그리스도 앞으로 올 수 없으니 그들을 위한 쉼 없는 제사장의 중보(仲保, mediatorial) 기도가 그래서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제사장의 기도 없이는 구원의 역사가 불가능하고 이런 제사장의 기도는 제물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골 1:24)" 것이며 우리가 현재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곧 마지막 아담과 같은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지 않고 당분간 이 자연계 몸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유이다.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할 것이니...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사 53:12) 하심과 같다. 마지막 아담을 따라 우리 역시 그 동일한 행보(行步)와 과정을 거쳐야 함이니 곧 "(그리스도처럼)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우리 각자도)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눅 24:26)이 아닌가. 정당한 순서를 밟아 올라가야 하는 것이니, 왜냐면 몸으로서 머리의 지시대로 행하기로 하고 회개하여 죄 용서 받고 성령 받음으로 우리가 구원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처음 맺은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내 스스로 약속을 파기하고 내 스스로 한번 받은 바 생명을 아담처럼 또는 악령들처럼 내다버리는 꼴이니 어찌 무사하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감"(마 7:21)이 반드시 이러한 고난의 관문을 통하여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니, 세상 사랑하여 하나님 뜻을 행할 기회와 시간을 다 헛되이 날려보내거나 고난 받음이 무서워 하나님 말씀을 부끄러워하여 주저주저하다가 "두려워하는"(timid, coward-계 21:8) 자로 낙인 찍혀 영원 멸망에 들어간다고 성경에 명시하지 않았는가.

찰즈 스펄전의 설교를 아무리 좋아하고 그런 것을 아무리 강단에서 외쳐보아도 그것이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를 주저하는 자로서 천국에 들어갈 자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도 없는 까닭이다(계 21:8/딤후 4:1,2). 아무리 교회 교인들 앞에서는 비단 같은 설교를 해도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간절한 마음으로 전달하는 입이 열려지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이 우주 천하에 단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문제의 답을 주는 열쇠는 이렇게 평범한 데에, 바로 코 앞에 있는 것이다. 

칼빈, 루터와 같은 신학자 또는 찰즈 스펄전과 같은 설교가 오늘날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중국의 송상절(宋常節) 박사(미국 유학의 약학 박사이지만 그런 세상 명예와 안정된 교수로서의 직업을 팽개치고 짧은 40대의 한 목숨 14년 여생을 오로지 복음 전파에 바쳤던) 같은 사람이다. 석자직(席子直) 목사(자기도 한 때 헤어나지 못했던 아편 중독자들을 상대로 전도 활동에 뛰어들어 기도에 전념한 나머지 부부가 7년간이나 옷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는) 같은 사람이다. 미국의 찰즈 피니(Charles Finney) 목사(29세에 양양한 변호사 개업을 내던지고 온 세상 앞에 "사시장철 교회 종을 울려대며" 사망의 잠에 빠져 든 세상을 일깨우듯 천국 전파에 몸바쳐, 능력이 나갔다 싶으면 곧장 금식 기도에 들어가 성령의 능력으로 재충전된 다음 말씀을 전파하여 10여년간 청중을 휘어잡던) 같은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깔벵의 예정론에 물들어 있는 한국 장로교회는 이런 피니 같은 인물을 배척하고 있어 불행히도 그의 활동에 대해 소개된 바가 전무하다시피 되어 있고, 또 교파주의에 빠져 그 외는 거의 이단시하는 장감(長監) 모두, 죠지 뮬러가 Brethren(형제회) 소속이라 하여 무시함으로써 역시 그의 놀라운 기도 응답의 위업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 상태인 점에서 마찬가지다. 반드시 이런 인물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신학을 한답시고 도미 유학을 떠나는 풍조가 오늘날도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런 건실한 믿음의 본보기에 접할 수 있는 정보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심방을 나갔더니 "먹고 사는 데에 바빠 성경 읽고 기도할 틈이 없다"고 하는 한 대장장이 교인의 말을 듣고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충분히 먹고 살 것을 주신다는 본을 보여주기 위해 몸소 순수한 기도 응답에 의한 삶으로 그 증거를 보여주리라 결심하고 부부 합의하에 그 후부터 교역자로서의 일절 사례비는 사양하고 기도 응답으로써만 목회 생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수많은 고아들 양육 사업을 벌여 1만 여명의 아이들을 훌륭히 성장시키니 사회 일각으로부터는 너무 지나치게 잘 먹이고 잘 입혀 고아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평까지 들었을 정도가 되고 기타 전도 사업(전도자들의 생활 후원, 문서 사업 등)에도 여력을 미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일을 순수하게 기도 응답으로만 부족함이 없이 꾸려 간 독일 태생의 영국인 죠지 뮬러(George Muller) 목사와 같은 인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뮬러가 나타낸 본에 자극을 받아 역시 믿음의 기도 응답으로 선교 활동을 하기로 결심, 거대한 중국 대륙을 겨냥하여 순수한 기도 응답으로 많은 인물과 막대한 자금을 움직인(800여명의 선교사, 전국 18개성에 걸쳐 300여 선교관, 500여 중국 전도인 양성) 저 유명한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창시자인 의사 출신의 영국인 헛슨 테일러(J. Hudson Taylor)와 같은 인물이 요구되는 것이다. 헛슨 테일러는 사도 바울 이후 최대의 선교사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런 믿음의 개척자, 선구자, 선각자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구원 받아 영생하는 우리로서 이런 자연계 육체를 입고 있다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모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자연계 육체에 속한 생명은, 본격적인 다시 말해 삶의 낙을 누리는 생활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냐, 일하고 싸우는 것이니 안되면 단 몇이라도 구원해내는 것을 삶의 보람으로 느끼는 일상 생활이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워(골 1:24)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데에 모든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음이다(고후 6:1). 우리가 영생을 얻어 구원 받은 위치에 있어도 여전히 이런 죽음 상태의 육체 속에 남아 있는 이유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일하고자 함이요 이 일을 방해하는 악령들의 세력과 싸우기 위함, 오직 그것뿐이다. 고난 받으며 일하는 자, 목숨 버려 전쟁에 임한 자가 생의 향락을 누릴 수 있는가. 역시 상식 문제다. 때문에 악착같이(with all perseverance-엡 6:18) 기도에 힘쓰는 것이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1,2)는 명령 수행에 기쁨으로 온 몸을 바쳐 수고하는 것이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것이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8,29) 즉 영생의 길로 인도하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참고 선을 행함"(롬 2:7-10)이요 영생에 들어감이니 그렇지 않고 자아중심으로 일관하면 멸망뿐이다(:8,9). 이 역시 상식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더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이르신 대로 머리 되신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자기 생명을 스스로 유지함이다. 스스로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담은 죽었고 일부 영물은 영원 멸망의 고통에 처해지게 되어 있는 운명을 자초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단지 영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복음(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복된 소식, 희소식) 아닌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전한 것이다. 영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면 앞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신으로 살 것이 아니라 당장 초자연계 몸의 막강한 초능력으로 변환하여 살아야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면 곧장 "휴거"와 같은 교리처럼 세상을 떠나게 하면 된다. 이 또한 상식이다. 백 프로 죄 용서를 받아 구원 받았다면서 이런 범죄의 결과물로서의 자연계 몸으로 여전히 꾸물거리는 형태를 취하면 모순이 되는 것 역시 상식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고로 이런 모순이 모순이지 되지 않고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구원=삶>이어서는 안되고 <구원=하나님의 일함>이어야 하는 것이니, 즉 <하나님의 일을 함=행함>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일하지 않음=죽은 믿음, 헛것>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참고 선을 행함"이 "영생"(롬 2:7-10)이 되고 "천국에 들어감"(마 7:21)이 되는 고로,  바울 사도는 "그런즉 거하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살든지) 우리가 주(主,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주(주인, 소유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하였다.

오늘날 기독교의 "배도(背道)"(살후 2:3)는 이 점을 간과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핵심을 빼 버린 것이다.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뿐이다. 이럴 경우 아무리 믿어도 그 믿음이 영생의 구원으로 나타날 수가 없다. 바로 이상 여러 구절이 나타내는 의미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행위(또는 율법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이 아니다.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개념 파악을 처음부터 그르친 결과다. 첫 단추부터 잘못 채운 것이다.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은 그리스도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 얻고자 하는 구원을 말함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구원이 될 수가 없다. 지금 세상 종교(기독교라는 이름의 천주교가 포함된)의 교리가 그렇다. 천주교가 이 범주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마리아 경모(敬慕)'를 일절 배제해야 하는데 그럴 기색이 전연 없으니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리스도가 없다. 그리스도+마리아는 그리스도일 수가 없는 것이니 영원히 '그리스도+마리아'일 뿐이다. 그리스도+율법행위도 그리스도가 아님에는 마찬가지다. 영원히 '그리스도+행위'로 남을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율법행위(모세 율법)를 주장하는 풍조가 교회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바울 사도의 편지는 당시의 그러한 사이비 주장을 척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강조하고 '그리스도도 믿고 모세 율법도 지키는 것'을 '행위로 얻으려는 구원'이라 지목하여 빈 껍데기일 뿐임을 역설한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마리아'와 같음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의 <그리스도를 믿음=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일함(하나님의 일함)>과는 차원부터 다른 것이다. 이를 혼동하기 때문에 영생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자아중심에서는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부인"의 부인으로 일관되게 흘러 가 진리에 역행한 것이다.

따라서 거두는 것은 바람이요 안개요 결과론적으로 각종 이단과 사이비의 온상만 되었다. 구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백한 무신론 또는 이교(異敎) 신앙도 아닌 어정쩡한 토양이라 각종 이단이라는 무성한 잡초만 우거져 번성하는 토대만 되어진 것이다. 확실한 성경 해석으로 자기 정체를 밝히지 못함으로 인하여 교인들을 올바른 말씀 이해로 완전 무장(武裝)을 시켜 놓지 못하니까 사이비 이단들이 생겨날 때마다 거기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이 없어 많은 교인들이 그런 이단 사상에 휩쓸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

구원은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한 몸됨의 체제 속에 들어감으로 되는 것인즉 아버지(아들과 하나되어 계시는)의 뜻을 행하지 않고는 아담의 범죄와 죽음을 답습하는 것뿐이다. 몸(의 각 지체의 각 부분)이 머리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자기 생명을 무한대로 확충, 확장하는 것이 영생이므로 그 외로는 생명을 누리게 되는 다른 방법 방도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자연계의 일반 동식물의 생명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 의지를 향유하는 인간이나 영물 등 영적 존재는 스스로 살아가는 자주 독립성이 생명의 핵심이니 왜냐면 사랑 없이는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이 사랑의 핵심이 바로 자유 결정의 자유 의지에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아무도 사랑이라 하지 않는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둘이 하나됨, 하나된 둘로서의 관계가 사랑이다.

하나됨이 사랑이니 이 하나됨은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반드시 처음 것이 나중 것을 파생시킴으로 말미암아 모자 관계 즉 인과, 주종, 대소, 선후 관계를 형성함이 필수이므로 머리와 몸의 관계에 있고, 이 사실을 적시하고 있는 3위1체의 원리가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고전 11:3)이심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머리로서의 마지막 아담 즉 그리스도이시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고 하여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이것이 자기 부인)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10:33)고 그 본받음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바울 사도는 설명한 것이다. 즉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사람들의 구원이다. 본디부터 누리도록 되어 있던 영생에로의 복귀이니 곧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삶을 즐기셨던가? 우리도 그 본을 따름이 마땅한 것이다. 스승(먼저 믿어 그 믿음으로써 남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사람)으로서 제자(그 가르침을 받아 믿게 된}들에게 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본이 이와 같이 자기 부인을 통한 인생들 구원이니 그 이상으로 우리가 괘념할 일이 없다. 이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고 손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자는 마땅히 그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함이니 그렇게 못하면 인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앞에서 모순이란 말을 했지만 모순으로만 그치지 않고 일을 완전히 망쳐놓게 된다. 그와 같이 고난 중에 일하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되겠는가. 또 믿자마자 생명의 영광 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악인들 역시 하나도 예외없이 따라 붙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말하기를 악인들이 믿게 되면 좀 좋은가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도 모르고 둘도 모르는 소리다. 억지로 구원시켜 놓으면 다시 말해 인간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동적으로 다 구원받게 되면 세상은 또 다시 에덴낙원의 비극이 되풀이되고 그러면 세상은 다시 이 모양으로 굴러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세상은 단 한 번 이 세상만으로 끝나야 하는 것. 고로 악인들이 영생에 들어가는 방법은 여늬 사람과 똑같이 회개함에 있다. 때문에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세상에 오셨다 하신 것이다. 회개를 하는 것은 죄인이요 그렇지 않으면 악인으로 남는 것. 

불이 났으면 당연히 불이야 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요, 홍수나 쯔나미가 밀려 오면 당연히 그 절박한 위험을 이웃에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위험이든 마찬가지다. 이것이 위험을 먼저 발견한 사람의 당연한 책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람 살리기 위한, 영원 멸망을 경고하여 알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임은 바로 이런 차원에서인 것이다. 그래서 상식이라 하는 것. 그러므로 오늘날 거대 집단화되어 있고 문저성시를 이루고 있는 사이비 이단들의 특징은 이 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공통점을 이룬다. 

고로 그들이 내거는 주장(그들이 "성경 해석"이라고 내세우면서 표방하는 교리)들을 알아 보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시간 낭비일뿐더러 여차하면 거기 말려들게 되는 경우 진흙탕 속에서 꼼짝도 못하게 된다. 일관된 그들의 공통점을 간파하면 되는 것이니 즉 그들의 특징은 이 세상 다시 말해 자연계 삶을 위주하는 개인 또는 집단의 풍요함에 있는 것이다. 그런 사이비 교리를 주창하는 그들의 삶을 보라,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해" 하는(딤전 6:8/히 13:5) 삶인가? 아니다, 평균 이상으로, 세상으로 말하면 소위 "유복한 삶"을 누리는 그들이다. 다시 말해 종교를 빙자해서 치부(致富)하고 있다.

그들은 "돈이 좋기는 좋다" 하고 공공연히 말하는 정도다. 오늘날처럼 악령들이 음풍(淫風)을 불어넣는 시대에서는 이런 세상 사랑은 필연적으로 성적 문란으로 나타난다. "그림자"적인 구약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밝히신 그리스도("실체"가 되시는)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1부1처 외에는 용납되지 않는다.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창기와 관계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창기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고전 6:16).

따라서 그 창기 외에 다른 여자와 관계하면 회개하지 않는 한(영원히 자아중심을 버리고 자기 부인으로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멸망에 이르는 범죄가 될 수밖에 없다.를 보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그리스도의 시대는 창세기 시대 초나 노아 홍수 직후 시대처럼 사람이 짝을 지어 살라고 축복하는 시대가 아니고,  그렇게 처음부터 말씀하신 하나님 친히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들도 있으니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고 선언하신 세대가 되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살라는 것이다. "나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전 7:7,40)고 한 바울 사도의 교회 위한 충정의 권고만이 통하는 시대가 되어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고 집단적인 풍요라는 것은, 거대한 교회당 건물을 짓고 소위 성전(하나님의 집)이라 하면서 자랑하는 행티와 같은 것을 말한다.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철부지 생각을 하는 것이다. "Once saved, always saved"ㅡ육신의 생각을 따라 제멋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그들이 말하는 바 소위 "믿은" 다음에는 기도도 필요 없고 회개도 필요 없다 함으로써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취사선택하여 멸망에 이르고 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고후 7:9-11) 한 바울의 경고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완전 폐기하기로는 여타 거의 전부의 오늘날 개신교 교리와 같은 것이니 50보 100보 차이로서, 다만 이들 사이비는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벗어나 백주 대낮에 까놓고 행동하여 양심마저도 버렸다는 데에 있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새삼스럽게 입에 담을 필요조차 없지 않은가. 성경에 일용할 양식 즉 매일 그 날 먹을 양식을 구하라 하신 것이니(마 6:11) 왜냐면 원천적으로 내일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선상에 겨우 걸쳐 있어 간들거리는 목숨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一息間, a sigh)에 다하였습니다"(시 90:9) 함과 같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라 하였고,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내일이 오면, 내일이란 것이 다시 연속되어지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마 6:34)하심과 같다.

우리의 이와 같은 자연계 목숨이 하나님의 애초 창조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그런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분노-시 7:11)임을 여기서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롬 5:2). 이런 찰나같은 목숨이나 마치 영원히 쇠해지지 않는 것처럼 착각되는 것은 오직 악한 자들을 걸러내기 위한 목적 외에는 없는 것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건만,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은 인식 착란 속에 인생들이 빠져 있는 것은 확실히 비극인 것이다. 만약 사람 목숨이 한 순간에 또는 일정 한계를 따라 금시금방 죽어 나간다면 악인을 포함한 모든 인생이 이런 삶을 버리고 한사코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예외없이 달려들 것이 아닌가.

바로 그래서 "악인을 걸러내는 함정, 덫, 올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 가는 줄 모르고 삶의 낙에 빠져 지내다가 구원 받지 못하도록 하려 하심이다. 회개하는 죄인을 원하시지 악인은 원하시지 않는다. 악인을 구원하시면 사탄 등 악령들도 구원 받아야 하는 것. 악인이 구원 받으면 아담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되고 악령들의 멸망이 형평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인생들이 악인을 포함해 모두가 구원 얻게 되면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도 모두 그 영원한 멸망의 운명이 철회되어야 하고 에덴낙원의 비극은 영구적으로 되풀이되게 마련이다.

그런즉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시종일관, 일사불란하여 처음과 나중이 일치하는 원리원칙대로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서, 때문에 구원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비한 것이며(3위1체의 원리를 따른 사랑과 삶의 동시성과 양면성에서) 그 외의 사람들은 제외될 수밖에 없다. 오직 회개하여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어 머리를 위할 줄 알고 머리의 지시를 받아 이웃 즉 함께 지체된 이들들 위할 줄 알아야(이것이 "사랑"이다) 행복한 삶에 들어갈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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