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8일 토요일

21세기는 3환(3자간 경제 순환)법칙의 시대








"쉽고도 어렵다"는 것은, 여기서 "의인(義人)"이라 할 때 추호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경대로 절저한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 이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 위해 죽으셨닥 나를 위해 부활하심을 믿음으로써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한 "새 생명"(롬 6:4)의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영위함으로써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마지막 아담을 위해 사는(고후 5:15)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


3운법칙에 대해서는
요한 계시록에서 사건 줄거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를 따라 연속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 사이 사이에 여러 장면씩 나누어 따로 떼어 설명한 것을 삽입해 넣는 식으로 사건 설명을 하는 것처럼 보임. 그러므로 순서로는 앞이지만 그것을 별도로 나중에 기술하여 설명하는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됨.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면 "새 생명"(롬 6:4) 가운데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다시는 이전과 같은 "죽은 자"(마 8:22/엡 2:5)로서의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아중심이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구원 받은 증거이다.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는 것도 아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마지막 아담과의 하나가 이루어진 까닭에 그렇게 된다. 과거 하나님의 3위1체를 잘 알지 못하던 때처럼 이 점 혼동하지 않아야 하는 것. "성령"은 다름아닌 아버지와 함께 하나되어 계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

성령을 그리스도로 인식하기도 하고 아버지로 인식하기도 하나 둘이 하나로 계심을 가리킬 때에는 반드시 또 그렇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서의 구원이니, 이 하나됨은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여 병이 되는 하나됨으로써만 가능하다. 때문에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이가 없다"고 하였다(롬 14:7-9). 이런 점에서도 하나님의 3위1체의 의미 다시 말해 "성령"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 이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면 모든 사이비 이단의 온상이 되는 까닭이다.

믿으면 구원 얻는다 하여, "믿노라" 신앙 고백하고 세례만 받으면 끝나는 줄 즉 지금 당장이라도 구원 받는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구원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믿음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믿고" "사랑하는" 줄 착각하는 것이 문제다. 세례 받는 의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뜻이다(롬 6:4/골 2:12). 죽었는데 나 위해 살 무슨 '나 자신'이 또 있단 말인가. 죽은 것은 죽었기 때문에 죽었다 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이런 것도 포함하여, 성경을 아주 이상하게 해석하기 시작하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진다. 즉 "간다"는 말이 있으면 "간다"는 말로 액면 그대로 수용 못하고 '신학적 해석'을 가미하기 시작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둔갑시켜 놓는다.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사탄은 이렇게 "말씀 혼잡"(고후 2:17 4:2)을 오늘날까지 조장해 왔었다. "믿음"도 "사랑"도 성경의 모든 중요 단어가 줄줄이 그렇게 둔갑되어 읽히고 있는 모양새다. 기가 찰 일이나,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왜냐면 사탄이 이 세상 신이니 이런 일도 못한다면 그가 어찌 신인가. 또 주님 친히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구원 얻지 못한다'와 같은 뜻) 하셨으니 이런 데에 많은 이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그같은 엄중한 경고를 하실 리도 만무하다.

"각자 자기 십자가 짐"도 그런 둔갑시킨 것 중의 하나다. 즉 이생에서의 모든 고난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럼 세상 사람들의 인생고도 십자가 짐인가. 의미만 엉뚱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관적인 판단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내동댕이치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자기 부인"이니 "각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는 아예 빼어 버렸다. 이 정도, 이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험 지역의 이 팻말 빼 버리는 통에 사고사를 당했는지 이루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ㅡ이 말이 이런 영적 사고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바울이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그런 경고를 했겠는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 3:18) 하고 "그들의 종국은 멸망이다" 하면서 "눈물"로 쓴 경고다. 생사가 좌우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나오는가. 이 설명도 엉뚱한 것으로 둔갑시켜 사람들은 해석하려는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라"는 말씀은 성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잘 아는 척하여 엉뚱하고도 해괴한 인간의 해석을 덧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성경에서 이탈한 체험을 기준으로 감히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좌지우지 해석해 치우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의 소위 "바울 체험"도 같은 경우다. 첫 단추 잘 끼우고 못끼우는 것이 그 이후 거의 모든 것을 좌우지한다는 증거 중의 하나가 이 로마서 7장에 대한 이와 같은 곡해다. 그리스도 중심 즉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아닌 자아중심 즉 자기를 사랑함에서 비롯되는 이전과 똑같은 자세로서 자기 부인은 전혀 없이 교회에만 충실히 나가면 '믿음 있다는 증거 과시'가 되어 이로써 천하태평으로 세월을 보낸다.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이 자신 있다고 자신을 달래면서ㅡ그러나 이것이 자기를 속이는 것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항상 경고해야 하는 것이 이 사랑과 관련된 것이다. "경계의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 1:5)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로서 모이는 이유 중 하나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 아닌가(히 10:24). 한 때는 정상적으로 믿어 각종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해 능력을 행하고 귀신도 그리스도의 권위에 입각한 믿음의 명령 한 마디에 절대 복종하여 쫓겨갔었어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못함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가 비일비재함을 경고하셨을 정도인데 하물며 처음부터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 믿음 없어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에 견주랴.

그런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구원의 확신 속에 있었기 때문에 심판대 앞에서 감히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감히 어디라고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그런 자기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딴에는 틀림없는 구원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옳게 믿어 왕년에는 그 능력으로 귀신들도 여지없이 추방했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변하여 그리 되었거든 하물며 처음부터 잘못 알고 잘못 믿어 첫 단추 잘못 끼운 경우이리요. 그러면 말하기를 "구원의 확신은 도무지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할 것이다. 누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말했는가. 누가 자기 구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는가.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을 끙끙 대며 힘들면서 하는가. 어린 아이는 사랑에 통달해 도사가 되어 있는 연령이다. 철이 들수록 간교해지고 그 순수한 사랑이 차츰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지 말고 어린 아이 상태 그대로 머물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똑똑한 척 여겨 상대의 말을 액면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각종 해석을 염치도 없이 척척 갖다 붙이는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는 진리를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셨다.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사랑이 식듯이 그렇게 식어 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이 식는 것을 성경이 경고한 것이다.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계 2:4).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믿음에서 파선하고", "믿음을 배반하고", "믿음을 저버리고" 등등의 모든 의미가 이 사랑을 버린 것을 의미함이다. 그래서 의인되는 것이 쉽고도 어렵다 한 것이다. 사랑으로만 나가면 쉽지 않을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지 못하고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로 자기를 인식하니까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려는 것이 되어 버린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전 13장)고 한 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로마서 7장의 소위 "바울 체험"도 같은 경우이다. 첫 단추 잘 끼우는 것이 거의 모든 것을 좌우지하므로 이런 점을 되풀이하여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은 전혀 없이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교회에만 충실히 나가면 '믿음 있다는 증거 과시'가 되어 이로써 만족해한다. 한 때는 정상적으로 믿어 각종 성령의 나타나심을 통해 능력을 행하고 귀신도 그리스도의 권위에 입각한 믿음의 명령 한 마디에 절대 복종하여 쫓겨갔었어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못함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가 비일비재함을 경고하셨을 정도인데 하물며 처음부터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 믿음 없어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에 견주랴.

그런 사람들은 다 죽을 때까지 구원의 확신 속에 있었기 때문에 심판대 앞에서 감히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감히 어디라고 함부로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딴에는 틀림없는 구원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닌가. 옳게 믿어 그 능력으로 귀신들도 여지없이 추방했던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리 되었거든 하물며 처음부터 첫 단추 잘못 끼운 경우이리요. 그러면 말하기를 "구원의 확신은 도무지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할 것이다. 누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말했는가. 누가 자기 구원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는가.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을 끙끙대면서 힘들이며 하는가. 어린 아이는 사랑에 통달해 도사가 되어 있는 연령이다. 철이 들수록 간교해지고 그 순수한 사랑이 차츰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지 말고 어린 아이 상태 그대로 머물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똑똑한 척 여겨 상대의 말을 액면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각종 해석을 염치도 없이 척척 갖다 붙이는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는 진리를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신 것이다.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사랑이 식듯이 그렇게 식어 가는 것이다.



이 식는 것을 성경이 경고한 것이다.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계 2:4).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믿음에서 파선하고", "믿음을 배반하고", "믿음을 저버리고" 하는 등의 모든 의미가 이 사랑을 버린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의인되는 것이 쉽고도 어렵다 한 것이다. 사랑으로만 나가면 쉽지 않을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지 못하고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로 자기를 인식하니까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전 13장)고 한 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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