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9일 일요일

정신 나간 말ㅡ"하나님의 종인데 특별 대우를 받는 게 무어 그리 이상한가"ㅡ찰즈 스펄전



악령들과의 맞수는 거룩한 천사들이다. 사람(아담)은 이들 악령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거룩한 천사로 창조되었으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즉 자아중심을 따름으로써 악령이 되어버린(인간이 자유 의지로써 자아중심을 더 선호하여 악인이 되듯이) 사탄의 간계에 빠져들어 아담이 자연계 존재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에, 아담(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과의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는 악령들과 대치해 있는 거룩한 천사들인 것이다. 악령들이 거룩한 천사들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니므로 이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원래 있을 수 없는 것이나, 전자는 사람들을 구원 받지 못하게 즉 해치려는 것이 목적이고 후자는 원래의 사명대로 인간들을 돕는 것이므로 자연 다툼과 전쟁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최후, 최대 결전에서 패하여 영구적으로 에덴낙원으로부터는 추방된 것이 1908년 6월 30일의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이다. 한 가지 알 것은,  사람을 위하는 것이 천사의 일이고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악령들의 일이라고 하여, 사람을 육체적 위험에서 건져내는 것도 무조낸 하나님의 천사들이라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이면에 사람들의 멸망을 획책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성경의 말씀을 따르지 않게 하고 그 반대되는 것으로 인생들을 인식시키는 것이라면 선을 가장한 즉 "광명의 천사"(고후 11:14)로 가장한 악령들의 소행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인간을 위해도 그로 인해 인간이 영원 멸망을 자초하는 계기가 된다면 악령들은 얼마든지 그런 "사람을 위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이다. 이것이 모든 이른바 "선" 또는 "악"에 대하여 그 진위(眞僞)를 식별하는 기준이다. 인간이 행하는 "선"도 마찬가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선은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선밖에 없으니, 자아중심의 각종 동기에서 나오는 선은 선일 수가 없고 도리어 악인 것. 자기 부인은 오직 마지막 아담과 하나됨에서 나오는 것. 그러나 영생과는 무관하나 악이 아닌 선도 있으니 만유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여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행하는 선은 자아중심에서 나오는 선행과는 구별되고 있는 것. 베드로가 고넬료의 경우를 두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다"(행 10:35)고 했을 때의 그 의 곧 선행이다.  


세상(삶)을 사랑하지 말라 즉 이 세상을 사람 사는 곳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성경의 경고(요 12:25)는 그 근거가 뚜렷하고 논지가 명쾌하다. 간단히 세 가지로 그 중요 이유를 들 수 있다. ① 인간의 원수 악령이 지배하는 세상이므로 그렇다(눅 4:6,7/요일 5:19/고후 4:4). 자기 원수인 구원 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삶을 즐기도록 악령이 방치해둘 리가 없다. 이는 상식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성경을 부정함이다. 성경을 부정하고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② 전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3위1체의 원리로 기독교계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초자연계 몸으로 초자연계 세상인 에덴낙원에서 완벽한 삶 곧 영생(생명에는 원래 죽음이 없으니 범죄하지 않았으면 아담이 죽을 리 없다-롬 5:12)을 누렸다는 것이니, 따라서 내가 만일 아담이라면 이런 판국의 "죽음"(창 2:17/골 3:3/마 8:22)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탄식하고 슬퍼하고 "미워하지"(요 12:25) 않겠는가. 

성경에서의 이 세상의 의미는 복음 전파에만 한정되어 있다.
복음 전파만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고 확언하셨기 때문이다(마 24:14). 그렇다면 <세상=삶>이라는 등식이 무너지게 된다. 이유는, 그리 되면 '세상'이 끝나면 '삶'도 끝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세상=일함>, <세상=악령들과의 싸움>이 될 뿐이지, <세상=삶>이 아닌 것이 명백해진다. 세상의 의미가 복음 전파 즉 사람 살리기에만 있다면 이러한 소중한 일을 하라고 주신 기회와 시간을 삶의 낙을 누리는 데에 허비할 때 하나님의 것(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게 주신 사랑을 믿고 나도 나 자신을 주님께 모두 드리는 것이 회개요 믿음이므로)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것으로 도둑질한 것이 되니 이런 행위가 절대로 무사히 넘어갈 리가 없다.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영원 멸망만이 있을 뿐이다.

③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구원 받아 영생에 들어왔으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당연히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자연계 육체는 영생하게 되어 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반드시 세포는 노쇠하여 결국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영생의 생명력을 구가하던 아담이 자연계 몸으로 퇴화하였으므로 그 원래의 기력이 남아 있어 우리의 표준으로 하면 장수는 했지만 천년도 채 못넘겼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이요 천년이 하루 같다"는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벧후 3:8) 하루도 못되어 죽은 것이다. 고로 이렇게 아직도 자연계 육체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래서 결국 모든 인생들과 똑같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부터가 여전히 죽은 자로서의 행색이지 산 자로서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과거는 이런 모습이라도 생명이라 착각했지만 지금은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으니 곧 죽은 자로서의 매일의 행각(行脚)이다. 

여기서 같은 의미로서 다시 몇 가지를 더 보탠다면 그 첫째로, 불 속에서 내가 건짐을 받아 구원되었으면 내 몸이 그 불로 인하여 다치거나 상한 데가 없는 한 그 불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들을 건지려고 전력을 다함이 상식이다. 물에 빠져 있어도 마찬가지이고 기타 그 어떤 위험 속에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밤 중에 홍수가 나 방둑이 터져 모든 동네가 망할 위기에 있음을 먼저 발견한 자가 있으면 당연히 그 위험을 알려야 사람의 도리다. 동네 방네 다니면서 위험을 알릴 충분한 시간이 있음에도 이 의무를 버린 채 혼자 산으로 도망 갔다면 그 사람은 인간 사회에는 완전히 매장된다는 것도 같은 이치를 말함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모든 상한 것과 다친 것, 죽게 된 것을 고침 받아 영생하는 자로서의 성한 자가 되어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미리 위험을 깨닫고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이 위험을 알지 못하고 있는데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는가. 그런즉 당연히 내가 할 일은 사람 살리고 구원해내는 일 외에 달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왕하 7:9). 때문에 <우리의 구원 받음=우리의 보내심 받음(요 20:21,22)>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하셨으니 더 달리 말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고로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한다"(요 14:31) 하신 대로 보내심을 받는 것은 오직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게 대한 사랑을 확증해주셨기 때문이다(롬 5:8). 모든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은 "사랑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 머리이신 아버지(자기의 형상이신 아들을 통해 모든 것을 하시는)께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룬 형체들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나를 세상에 보내시지 않는다. 이점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려고 오셨던가? 그렇다면 우리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지 않으셨으리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성경에 분명히 해놓지 않았는가.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골 1:24) 것이니, 이것이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필수 요건으로서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함"(마 7:21)이다. 양자(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롬 8:15)를 삼을 때에는 양부모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엄격한 전제 조건이 붙는다. 양부모의 뜻대로 하지 않을 때에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파양이 된다. 이와 같이 어느 모로 보아도, 우리가 도저히 세상에서 살려는 마음을 먹을 수가 없다.

만 가지로 재어보아도 세상 삶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식대로 행하는 것이 순리다. 이를 역행하면,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취함과 같은 양상이 된다. 스스로 선택한 대로 즉 뿌린 대로, 심은 대로 거둘 뿐이다(갈 6:8,9). 상식대로 행하지 않은 실례가 엄연히 있다. 죽음을 자초한 첫 사람 아담의 예가 그렇고 영원 멸망을 자초한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의 예이다. 그리고 그 반대되는 예도 있다. 즉 거룩한 천사들은 상식을 따랐기 때문에 원래의 자기 생명의 위치를 지킨 것이다. 우리로 말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빌 2:12) 실례이다.

아담이나 악령이나 모두 "이루지" 못한 경우가 된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으나 그 생명을 유지 보전하는 것은 각자 책임이다. 이것이 "이룸"이다. 우리에게도 새 창조로 새 생명을 주셨다. 마찬가지로 이 생명을 간수할 책임이 우리 각자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각자의 구원을 이룸"이다. 이렇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두고도,  구원 자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이 경고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감히 자기 마음대로 멋대로 해석하여 엉뚱하게 다르게 가르침으로써 오늘날 설교자 중 그 어느 누구도 이 경고를 발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들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오직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마 18:3) 믿고 순종하는 이들(설교자든 교인이든)은 그런 엉터리 설교(말씀대로 하지 않는)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마음은 변할 수 없기에 그 순종으로써 영생에 들어간 것뿐이다.

찰즈 스펄전의 설교를 거의 누구나 최고 가치로 여기지만 스펄전은 청년 때부터 복음을 잘못 배웠었다. "대신 죽음"이 그 신학의 기본으로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거룩한 명령을 그리스도 오기 전 모세 율법 차원에서 잘못 깨달은 때문에 이런 일화도 남겼다. 그는 열차를 탈 때 1등석을 타고 다녔다. 이를 보고 어떤 집사가 핀잔하는 투로 지적했더니 하는 말이 "하나님의 종인데 그만한 대우를 받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은가"였다. 그 유명하다던 설교자보다 집사가 복음을 제대로 익힌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신 것처럼 "나귀 새끼"를 타야 하는데(요 12:15) 그는 준마, 명마를 타고 다니면서 "나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한 셈이니 여전히 척결되지 못한 자아중심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모든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 선입견과 편견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스펄전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단 한 마디도 그 두터운 명설교집 중에 삽입해 놓은 적이 없다. 동전의 양면 중 그 반 쪽을 완전 무시했으니 동전의 일면만 가지고 화폐 구실을 하려 하나 한 마디로 불가능한 것이다. 구원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구원을 간수하고 지키는 것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 중요성은 범죄한 첫 사람 아담, 범죄한 사탄 이하 악령들이 그 증거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이 무서운 현실을 외면하니 어찌 안심할 수 있고 안전할 수 있으랴. 이런 경고는 비단 빌 2:12만 아니다. 성경 전체가 그런 경고로 넘쳐나고 있다. 위로의 말씀보다 경고의 말씀이 더 많아 그 비중이 크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행 9:31)라는 두 레일 위로 잘 달렸었다. 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하여 눈이 어두워져 한 가닥 레일 위로 달려간다고 착각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열차는 달리지 않았다. 기적 소리만 요란스럽게 울려댄 것뿐이다. 그것을 달리는 것으로 여기는 착란 현상만 빚어낸 것뿐이다. 모두 성경을 통해 계시를 사모하지 않은 치명적 타격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여전히 강조했지만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이들에게는 구원 받음에 아무 하자가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복음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당연히 그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여 살고 그 뜻대로 행함이니 이것이 바로 항상 "복종함"(빌 2:12)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더 많이 안다는 지식(소위 "신학"이라는 이름의) 자랑에 빠진 이들은 예외없이 구원을 모른 채 이 세상에서의 천금 같이 귀한 시간(구원 받도록 하기 위해서만 그리고 구원되었으면 구원의 희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할당된)을 다 날려 버리고 절망(희망이라고는 일절 없는)의 영원 세계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 둘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에 "일용(日用)할 양식"이라 하신 것처럼 '오늘'밖에 확실한 것이 없다. 이 시간 후의 일도 알 수 없지만  모두 "오늘"임은 분명하다. 원칙적으로 내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데 무슨 날이 많다고 비록 천년을 산다 한들 이런 세상 삶을 사랑하다니 한 마디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가. 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대로 행하려는 나의 의지 유무를 확인할 것. 내 구원을 위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닌가(자아중심), 참으로 하나님 뜻이 내 뜻이 되어 내 스스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뜻을 행하려 하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것. ② 쉬지 말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일 것(뜻을 알기 위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 것이다"(요 7:17)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확약하셨다. 뜻을 행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그 셋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막 8:38) 하신 대로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으로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고(롬 8:7/약 4:4) "날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시 7:11) 세상인데, 그리고 인간(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땅인 이 세상인데(창 3:17/5:29), 그리고 이 세상이 인간의 나라 곧 인간의 세상이 아니라고 선언하셨는데(요 18:36), 이 세상 삶을 사랑하다니,  말이 되는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는 이와 같이 아담 범죄 후 지금까지 이 세상 위에 "머물러"(요 3:36) 있고 걷힌 적이 없다. 진노와 저주 가운데 이 세상이 놓여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이런 세상에서 감히 살자는 마음을 품는가.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하셨으니, "진노가 내린다"가 아니라 "진노가 머물러 있다" 하신 그 뜻은 명확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아담 때에 한번 내려진 뒤로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거두어진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저주와 진노 속에 갇혀 있는 세상에서 감히 살려고 하고 세상 삶의 낙을 사랑하려 한다니 이상 말씀의 성경을 믿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 같이 정면으로 성경을 부정하는 언행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게 되고 미워해야 다시 말해 사랑하지 않아야 영생하도록 보전한다고 경고하신 것이다(요 12:25).

이런 저주(인간 범죄 후 땅에 내려진)로 인해 생물은 진화가 아니라 퇴화 아니면 멸종 단계에 이른 것이다. 진화(進化)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성경적 사실에 정면 위배됨이다. 우리가 말하는 유신론은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실상에 대해서 100프로 그 진실성을 인정하는 것을 말함이지 세상의 안목에서 말하는 소위 "유신론"이 아닌 것이다. 창조신과 창조론은 인정하면서도 성경을 부정하는 주장까지 함께 포함시키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유신론이다. 그래서 요즈음 나오는 궤변 중의 하나가 소위 "외계인"들이 인류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거짓말로야 무슨 말인들 못하랴. 그 소위 "외계인"들을 신이라 인정한다면 그 역시 창조론이요 유신론이다. 실상 그들은 "신"(고후 4:4)들이다. 그러나 인류를 창조한 신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보다 나중 창조되어 인간을 위해 즉 아담을 보좌하기 위해 지으심 받은 영물(靈物)들로서 그런 "외계인" 행세를 하는 것은 인간들을 속이기 위한 가장, 변장인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 악령들을 정의하여 "온 천하를 속이는 자"(계 12:9)라고 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성경의 하나님 외에는 달리 하나님이 존재할 수 없음을 밝히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이다. 왜냐면 이 두 가지가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3위1체의 원리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계심에서 만유가 창조되고 존속 유지되는 3위1체 원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창조를 부정한다. 그래서 무신론이다. 무신론자가 만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려 한다면 진화론밖에 없다. 3운법칙이나 3위1체의 원리는 이 창조자를 드러내고 제1원인으로서의 창조를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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