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2일 목요일

통합 복음 (11)






그리스도의 복음과 세상 종교와의 차이

그러면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내가 사랑의 법칙 곧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면 영생(천국)에 들어가고 지키지 않으면 못들어간다니 결국 내 힘과 공덕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냐?". 이에 대한 답을 말하기 전에 먼저 묻게 되는 것은, "지키지 못할 이유가 대관절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유는 오직 단 한가지뿐이다. 그것은 믿지 않는다는 이것이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나 그래서 경우 따라 겉으로는 나타내나 속인즉 실상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아무리 그것을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결과를 내지 못했었다. 왜 그런가 하면 인생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이므로 죽게 되어 있는 자는 죽는 것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런 죽은 자에게서 생명의 일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고 죽은 자가 아무리 노력해보아야 거두는 것은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다니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일 터.

그리고 죽은 자로서 자기 행위로 구원받으려 한다면 그 행위(선행)의 동기가 모두 자기 구원에만 응집되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만을 위하는 자아중심 일변도다. 남을 위하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실속인즉 자기 구원이기 때문이다. 죄, 불행, 악, 불의, 불법 일체가 이 자아중심 즉 "욕심"에서 나옴이다(약 1:15). 그래서 무조건 자기를 위하는 터이므로 이것이 그들의 소위 "구원"의 허상(虛像)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바람 잡듯 구름 잡듯 실체가 없다.

그렇게 자아중심 일변도로 나아가 영생하면 무슨 소용이냐 하는 그 뜻이다. 다시금 죽이고 미워하는 아비규환의 살풍경이 될 바에야 그래서 진절머리가 나 자살자라도 생겨날 양이면 영생이 무슨 소용인가. 이 짦은 목숨도 지겨워 자살하는 자가 생기는 판이 아닌가. 영생하되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어 있어야 그것이 진정 구원이고 영원한 삶이 아닌가. 무슨 보장이 되어 있는가. 현존하는 모든 고통 그리고 욕망 등이 실재하지는 않고 마음이 지어낸 산물이라고 자기 세뇌만 시키면 되는가.

이는 마치 포수에게 쫓기던 타조가 힘에 부치자 느닷없이 뜀박질을 멈추고 모래 속에다 머리를 파묻고는 포수가 보이지 않으니 이제야 살맛 난다고 안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너무나 어이 없는 망상이 아닌가. 행복의 합리적 근거를 대라는 것이다. 그것 없이 아무리 영생 극락을 믿어보아야 바람 잡는 격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근거가 너무나 명백하다. 즉 한 몸의 구조로서의 삶의 체제다. 남의 것을 탐내서 그것을 못가져 속앓이를 하거나 폭력으로 탈취하거나 할 필요 없이 한 몸의 각 지체의 각 부분이니까 나는 그들을 위하고 그들은 모두 예외없이 남김없이 나를 위하는 터라 그들 자신 그리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스스로 내게로 가져오는 판이다.

그들 모두가 내 것이 된다. 내가 억지로 뺏어 와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내 것이라며 갖다 바치는 구조다. 머리를 위시해서 그렇다. 이 머리와 몸의 구조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의 오직 한 가지 불변의 사실은 이 "머리"이시라는 데에 있다. 사람을 만들어 종처럼 마음대로 부리고자 만물을 지으셨던가? 그것은 어버이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무식에서 연유된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자식 사랑은 다 있듯이 이 하나님의 창조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되는 것뿐임을 왜 모르는가. 곧 자기 분신을 만들어낸 어버이 마음이다. 창조를 하든 직접 낳아서 어버이 마음이든 한 갈래 한 뿌리다.

첫 사람 아담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바로 이 머리 곧 어버이 역할을 충실히 해왔을 것이다. 모든 인류의 어버이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대행하기에 손색이 없도록 그렇게 지으심을 받았건만 이 어버이 마음 다시 말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한 몸 체제의 삶의 법식(法式)대로 살지 않음으로써 그 스스로 죽음에 함몰하게 되니 이런 죽음과 고통의 인간 비극이 비롯된 것이다.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따라서 머리를 위함으로(머리가 자기를 위해주니까 또 머리의 지시를 따라 다른 지체들이 위해주므로) 머리도 몸도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 자기 부인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머리로서의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위한 사랑을 십자가 고난의 죽으심으로써 확증해 보이신 터다. 이 "머리"되신 분께서 하나님으로서 각자의 육체 속에 즉 내 안에 계심으로써 모두가 이렇게 한 머리를 모신 한 몸을 구성하게 되면 이것이 곧 최고도의 이상향적 삶의 구현이다. 이런 구조하에서는 아무리 낮은 자라도 머리를 위시해서 모두가 자기를 위해주니 으뜸이 아니면서도 우두머리 대접을 받는다. 이것이 진정 평등이다. 이러한 사랑의 삶의 방법을 스스로 따르니 내가 하고 싶어 솔선해서 하는 터라 이것이 진정 자유다.

창조자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 종교인(예컨대 불교도)들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실상을 알지 못하므로 자기 노력으로 영생하려 하는데, 그런 노력일 것 같으면 죽기 전에 결코 죽지 않는다는 무슨 시늉이라도 해 보여 그것을 입증해야 한다. 왜 그것을 실증(實證)해주지는 못하면서 말만 가지고 영생한다 하는가. 세상 종교가 그런 허황된 주장으로 일관하면서도 그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못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썩는 육체가 어찌 죽지 않는 육체가 될 수 있다고 하는지 그것을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 믿는다는 종교인들도 앞서 설명한 자기 부인을 모르고 실천 못하면 그 소위 "하나님 안다"는 지식이 뜬구름에 속할 뿐이다. 누가 저 구름을 만질소냐. 쳐다만 볼 뿐이다. 무신론자와 똑같은 운명을 제 스스로 만드는 격이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하므로 그 믿음이 있다는 표시로 교회에 나가고 교회 일에 충실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자기 행위(종교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밖에 안된다.

은혜로 믿음으로 선물로서 구원 얻는 핵심은 사랑에 있으므로 이 사랑의 핵심이 자기 부인인데도 이 의미를 알 까닭이 없다. 자기 부인을 마치 자기 부정인 양 곡해하고 기피하기까지 한다. 성경에서 아예 삭제하려고 들 기세다.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피상적인 지식으로만 만족해하니 그래서 이단 삼단의 각종 사이비가 판을 치는 것이다. 판을 쳐도 곧잘 거기 잘 넘어간다. 진리가 무엇인지 사이비가 무엇인지 도대체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소위 "기독교"의 전반적인 실태다.  

무신론적 입장에서 선 종교인들은, 육체가 썩는다는 것은 자연법칙을 따름임을 알아야 하는 것. 이 자연법칙을 무시하고서 영생, 구원 운운하니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일 수가 없다. 순수하게 인간 망상일 뿐이다. 미신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혈과 육(血肉, 자연계에 속한 육체)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전 15:50)고 했다. 바로 그 뜻이다. 그리스도 구원의 희소식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하여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새 피조물의 육체로 지으심 받는 것으로써 인생이 구원된다는 데에 있다. 과거에 없던 것을 있게 만들면 되고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시면 되는 것이니 그래서 창조의 영역이라야 유일하게 이런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것.

그 '새로운 무엇'이 다름아닌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이 자연계를 초월하시기에, 내가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면 이 자연법칙을 초월하기보다 곧바로 지배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말하자면 내가 신의 속성을 지니게 됨이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벧후 1:4)고 했다. 이렇게 되면 조리가 정연하다. 세상 종교처럼 그냥 무턱대고 불성(佛性)을 갖춘다느니 부처가 된다느니 하는 식의 애매 모호한 막가는 말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하나님이시라고 그 영으로 그냥 내 안에 오신다고 내가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나와 같은 사람이 되셔야 하는 것이니,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는 나와 같은 나의 모형(模型, a model)을 만드시어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죽음을 죽게 하고 그리고 이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 모형과 나를 일치시켜 영원히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 나의 영생 곧 구원이 가능하게 됨이다. 하나님 친히 이 모형이 되어주심이다. 하나님이 이 몫을 감당 또는 담당하시나 아버지가 아니신 아들이셔야 하는 것.

왜냐면 아들이 나 위해 죽으시는 경우 영원히 죽으시지 다시 살아나실 수 없고 살아나시면 안되는 것. 다시 살아나시면 그 죽으심이 일종의 전시 효과만 될 뿐 실질적인 나의 죽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시 살아나셔야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어 내가 영원히 사는 자가 되므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신 것이 아들께서 죽으시고 아버지께서 이 아들을 살리시는 것. 왜냐면 둘이 하나되어 계시므로 그렇고(하나되면 똑같이 살든지 죽든지 해야 하는 이치로), 또 아들은 아버지를 살리실 수 없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시는 것이 가능하니 작은 자는 항상 큰 자를 따르지 큰 자가 작은 자를 따를 수 없는 것이 삼위일체 원리의 주종(主從) 관계이기 때문.

고로 죽으신 아들이시나 그래서 정말로 죽으셨으나 아버지가 살아 계심을 인하여 즉 살아 계시는 아버지를 따라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으니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신다"(롬 8:11) 함과 같다. 다시 말해 아버지께서는 아들 안에 계시는 자기 영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렇지 않고 죽은 자를 그냥 살리실 수는 없으니 내가 죽은 것은 나의 죄 때문인즉 죽으면 영원히 끝나는 것으로서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 아들께서도 나 때문에 죽으셨으나 절대로 살아나실 수 없으나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아버지께서 살리심으로 비로소 살아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 나와 하나되어 있어야 함이니 하나되어 있는 자가 천하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으니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음이다.

단 이제는 내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미 장사되어 새 사람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어 범죄하기 전의 첫 사람 아담의 위치로 복귀해 있으므로 나 자신의 죄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마처 채우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죽음의 고난을 당하는 의미만이 있어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고난을 회피하고 이 세상에서의 안일한 삶을 바라고 자아중심으로 나가면 앞서 설명한 대로 모든 것은 나 자신이 들어 수포화시킴이다.

시종일관 철두철미 원리원칙을 따름이니 이는 엄정한 법칙 아래 움직이는 자연계의 현상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만물의 기본 원리인 삼위일체의 법칙 아래 되어지는 것이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되는 구원의 이치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는 자연계만 관장하는 법칙이 아니라 이와 같이 인생 구원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기도 하니 이는 당연하다. 왜냐면 모든 사물을 관장하는 우주의 기본 법칙으로 군림해 있는 까닭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는 대칭(대립) 원리다. 오늘날 과학계는 소위 초대칭법칙을 논하고 있다. 이 바로 다름아닌 삼위일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단지 차이는 그들은 이 원리를 통하여 신(창조신)의 존재를 더듬어 찾아보려 하는 것임에 반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친히 계시해 주심을 따라 인지한 다음 그래서 하나님 친히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심을 통해 삼위일체의 원리가 우주 만물의 기본 법칙이 되어 있음을 알았다는 그 차이뿐이다.

저들은 거꾸로 치 올라 가는 격이고 우리는 순리대로 물 흐르듯 아래로 내려오는 모양새다. 따라서 저들은 무척 힘들고 고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아직도 그들은 확답을 못내리고 긴가민가 하는 초조와 긴장 속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초 고속으로 비행하여 목적지에 이미 달해 있는 모양새다. 다시 말해 이 삼위일체의 원리를 3운법칙으로 이미 확증해놓고 있는 상태다. 그들은 물질과 반물질이라는 대칭 관계에 의해서 지금 한창 땅을 뒤지고 있는 판이지만 우리는 이미 이 원리에 의해 자연계와 대칭되는 영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으며 그 증거로서 3운법칙의 구조 자체를 통한 증명을 얻어 내고 있다.

자연계의 현상은 과학적 실험을 통해 그 증거를 얻어내지만 자연계와 대칭인 영계 즉 초자연계의 일은 그런 실험을 통할 수 없으니 세계가 다르므로 오직 계시에 의함이다. 과학은 그 시작부터 자연계에 한하는 연구 분야다. 자연계를 초월하는 초자연계(영계)의 일은 과학으로는 안되고 역시 초 과학으로 밖에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초자연계도 그 마땅히 알아야 할 지식에 이르면 과학이 된다. 다시 말해 자연계 외에 초자연계라는 분야를 새로 거느리는 과학으로 모양을 바꾸게 됨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알고 있는 바대로의 과학은 자연계에만 한정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초자연계의 일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를까 하는 것은 별문제다.

왜냐면 우리 자신이 자연계에 속해 있지 초자연계에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에 있는 물고기가 땅에 있는 짐승의 일을 알려고 하는 것과 같고 땅의 동물이 수중의 동물에 관한 것을 알려는 것과 같음이다. 그러나 초자연계의 존재 자체만은 삼위일체의 원리로 확증되어 있고 삼위일체의 원리(trini law, trinity law)는 3운법칙(trini homo)의 희한하고도 놀랄 만한 구조를 통해 증명되어 있음을 다시 이 자리에서 밝힌다. 그것도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듯이 누구나 알기 쉽도록 짜여져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리스도를 믿으라"가 아니라 "회개하라"(행 17:30)가 되어 있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영생(구원)의 필수 필연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 즉 둘이 하나됨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 됨(자기 부인으로써 섬김)과 동시에 '주인'으로서의 혜택을 공유하는(섬김을 받는) 것이, 삶을 행복하게 그리고 영원성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웬만한 죄를 지어도 눈감아 주셨다는 것은(:30) 회개하면 산다는 확실한 근거가 채 마련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개의 필요성은 알지만 회개한다고 해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시대다. 이전 모세 율법 시대와는 양상이 다르니 그 때에도 물론 믿으면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셨고 아브라함 이후 그렇게 되었으나 그것도 근거 없이 된 것이 아니었으니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그 근거가 되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왜냐면 믿음의 본질은 그 때 당시나 지금 그리스도 시대에서나 같기 때문이다. 즉 회개하여 순종함에 있으므로 당시에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명백히 밝혀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위시해서 이들 모두 그렇게 순종한 주인공들이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순종이 일체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회개하는 자 다시 말해 다시는 악을 짓지 않는 자, 사랑의 계명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는 확실한 생명의 보장이 되어 주신 것이다.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고한 "믿을 만한 증거"(:31)를 통해 온 세상에 현재 전파되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안점은 영생을 주시고 받는 데에 있지 않고, 영생을 잃게 된 원인을 척결하여 한번 얻은 생명을 다시는 도로 잃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의 모든 악을 회개하여 버림에 있는 것이다.

이치야 뻔하지 않은가. 영생해본들 영생을 누리는 방법을 모를진대 영생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살아도 살 줄을 몰라 삶과는 역행하여 자기만 아니라 모두를 불행에 빠뜨린다는 사실이 이미 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 사단이나 아벨을 죽인 가인으로 만천하에 입증되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좋고 귀한 기계라도 그것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면 그것은 오직 그림의 떡, 아니면 도리어 죽음을 초래하는 불행이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생명에 역행하는 것이 죄요 악이요 불의, 불법이다. 영생을 이제는 확실히 받게 되는 마당에 당연히 그 전제 조건으로서의 회개로써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함은 당연하다.

천사들은 제 위치를 지켰는데도 자기 분수대로 행동하지 않은 악령들이 생긴 것을 볼진대 이만하면 충분한 증거다. 악이 생명을 파괴시키므로 한 몸 체제에서 암적 존재임을 그렇게 증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도록 창조하신 것을 이와 같이 살지 못하게 죽도록 만드는 죄악이 용납될 턱이 없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것부터가 하나님의 명령이시다. 과거에는 이런 회개의 명령을 온 세상 사람에게 내리신 적이 없는 것은(:30)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셔야 마땅히 회개한 결과로서의 생명이 얻어질 수 있음이다. 값비싼 기계를 선물로 주기 이전에 먼저 그 기계의 조종법을 가르치는 것이 순서다. 기계를 다루는 법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다름아닌 회개를 명령하는 본질적 의미이다. 그래서 먼저 회개하여 세례를 받아야 죄 용서가 된다(2:38). "회개의 세례"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졌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세상 앞에서 자기의 죽음을 공표하는 의식이다.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 친히 이 동일한 세례를 우리 위해 받으신 것이다. 우리 위해 죽으신 사실을 이로써 명시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 동일한 세례에 참여함은 그러한 성격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함께 하나로서 동참한다는 의미다. 이로써 과거 죄의 청산은 완결되었고 동시에 앞으로는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는 장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졌으니 왜냐면 나 자신이 죽어 무덤에 묻혔기 때문이다. 내가 죽었는데 무슨 죄를 짓는다는 말인가.

죄는 욕심인데(약 1:15)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일체의 것인데 내가 죽었을진대 무슨 욕심이 일어날 여지가 있는가. 그러므로 모든 것은 죄를 짓지 않기로 하는 나의 믿음과 의지와 선택과 결단으로 좌우된다. 회개가 그래서 중요하고 영생 얻기 전에 가장 먼저 그리고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때문에 회개 없이 얻으려는 영생을 그리스도께서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음식을 맛보려고 앉아 있는 뻔뻔스러움에 비유하셨다(마 22:11,12).

이런 사람들은 곧 회개하지 않는 한 가차없이 걸러내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회개를 않는 것이나 처음에는 회개했으나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이전과 같은 죄를 짓는 것이나 아무 차이가 없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아중심을 택할 때 다시 말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올바른 길을 버릴 때, 지금까지 살아왔고 쌓아왔던 선행, 순종, 믿음, 사랑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다(겔 33:12,13/3:20/18:24).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고가 그것이다(행 5:1-11).

그러므로 ①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리고 ②영생하는 것을 알리고 ③영생하는 방법 곧 서로 사랑함으로써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 일을 온전히 이룸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바로 이 사실이 명백히 되어 나오는 것이니, 곧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라 하신 것이다. ①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 아버지"로서 충분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곧 영생을 누리게 되었으니 ②이 세상을 절대로 삶의 고장으로 착각하여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생각을 버릴 것이니 이 세상은 오직 구원 받아 마땅한 자를 구원하는 시간으로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로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는 날 이 세상도 지체없이 끝난다고 미리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널리 알려 사람 구원하는 일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인데 어느 여가에 이 세상 삶을 사느라 시간을 보내리요.

그리고 ③영생을 누리는 방법 곧 사람 삶의 이치가 한 몸 체제를 이루어 머리를 중심으로 하나처럼 움직여 서로 사랑하는 데에 있으므로 자기를 부인하여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 있으니 모든 것은 이상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바 현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 있다. 천국으로 말하면 그것은 곧 생명의 법질서로서 즉 '사랑'이라는 한마디로 요약이 되는 일체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사랑을 원치 않는다니, 그것은 그 자신 스스로가 일체의 사랑 심지어 자기를 구원해내시게 될 하나님의 사랑마저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니 그것은 상식에서도 벗어나는 것으로서 굳이 말한다면 자살 행위밖에 더 될 것이 없다. 사랑 없는 삶을 어찌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가. 사랑 없어 외롭고 괴롭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아닌가. 이 찰나 같은 삶도 지겨워 스스로 끊어 버리는 판에 사랑 없이 영생한다면 더 기가 막힐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상식 차원에서 사랑하지 않으면 살 자격도 또 실상 살 수도 없음을 성경이 강조하여 계명(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요 13:34)을 지키지 않으면 영생(구원)도 없다는 그 뜻을 그렇게 어려워하는 것인가.

그것이 그리도 알아듣기 어려워 "육신대로 살아도"(롬 8:13)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고후 5:15) 죄는 여전히 지어도 구원은 받는다고 고집하는가.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고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죽었던 내가 살아났으니 살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이로서의 마땅한 행동을 보이라는 것인데 내 힘으로 살아났던가? 죽은 이가 어찌 자기 힘이란 것이 있는가? 이 역시 상식에서 벗어나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내 힘으로 살아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면 이후로 생기는 모든 일이 아무리 내 편에서 볼 때 전력을 다하고 죽을 힘을 쏟아붓는다고 하더라도 내 자랑, 내 잘 난 것, 내 훌륭해서 된 것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 역시 상식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 내 공로 같은 것이 되어, 과거 이런 은혜를 알지 못하여 세상 종교처럼 무조건 착하게만 살면 영생한다는 그런 사고방식과 같은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가. 실제 내 안에 이 우주보다 더 크시고 능력의 근원이시고 그 주재자이신 하나님 친히 계시는 것이다. 우주 천지 만물의 모든 기력(氣力)과 생기(生氣)의 전체 에너지가 몽땅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응축되어 그 분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심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 힘이 나를 움직이도록 발동을 걸고 있는데 어찌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내 힘, 내 노력, 내 공덕과 같은 종류일 수가 있는가.

인생은 이미 죽은 목숨으로서 철두철미 이 자연법칙에 얽매여 있어 때문에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바 인생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영생에 이를 수도 없고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오직 인간 망상, 헛된 꿈에서 나오는 소리로서만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는 교리를 내세울 뿐이다. 실상 될 수도 없는 것을 되는 것처럼 말만 늘어놓는 것이다. 말로써야 무엇인들 못하리. 첫 사람 아담이 '에덴'낙원에 있을 때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아담이 범죄한 것은 힘이 모자라서 능력이 부족해서 저질러진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이 안락하고 화려한 '에덴'낙원 자체가 그 힘이었다. 그러나 그 스스로 생각을 달리하고 판단을 그르쳤을 때 다시 말해 시험하는 자의 말을 더 믿었을 때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떨어져 나갔을 때 그 결과로 순종하지 않았을 때 범죄에 이른 것이다. 그런 아담과는 달리 현재 우리 모든 인간은 그런 힘이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힘을 도로 찾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바로 그 "권능"이시다.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나의 증인이 될 것"(행 1:8)이라 하신 그대로다. 영계에서의 그 휘황찬란하던 신령한 몸을 빼앗기고 이 자연계의 썩어져 가는 육체 속에 갇혀 있음에서도 보듯이 산 자로서의 모든 힘이 완전히 상실된 인간. 이런 상실된 즉 사라져버린 힘을 가지고 마치 있는 듯이 가상(假想) 공간에서 노는 것이 모든 종교적 발상이다. 이 원천적으로 없는 생명력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께서 그 힘이시고 그 힘을 내 안에 훌륭히 지니고 있음이다.

혹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받게 되어 있는 고난과 죽음을 말하려 할 것이다. 창창한 영원한 생명의 낙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 일시적으로 맛보는, 그것도 그런 것이 있을수록 장차 내게 나타날 더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요인(要因)이 될(고후 4:17) 고난인데도 이 고난 때문에 믿음과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려(思慮)없는 그래서 당장 코 앞의 유불리(有不利)를 따져 움직이는 동물이나 할 일이지 사유(思惟)하는 인간으로서는 차마 입밖에도 낼 수 없는 부끄러운 것이다. 왜 창피스러우냐 하면 이성 없는 짐승처럼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은 내가 아무리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음"으로 "넋이라도 있고 없고"가 될지언정 나의 짝이 되어 계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 엄연히 버티고 살아 계시는 한 절대로 죽을 수가 없으니 왜냐면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믿는다면, 내가 죽음으로써 다른 영혼 살릴 수 있는 길이 열려질 수 있는데 몸을 사린다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세계에서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런 모든 어리석은 행동에는 오직 이유가 '믿음이 없다'는 것으로 귀일(歸一)한다.

이 한가지 답밖에 없다. 힘이 있는데도 일을 그르치는 이에게는 어떤 긍휼도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하는 짓이 되어 즉 스스로 "불의를 좋아해서"(살후 2:12) 불의를 따르는 것이므로(히 10:26) 구제의 가망이 없다. 영물들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 영원히 멸망의 운명에 처해져 있는 것도 이 구제불능을 가리킨다. 힘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짓밟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히 6:6/10:29) 이는 그래서 다시는 용서가 없다. '한계, 한도를 넘은' 경우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버린 것이다.

구원 받는다는 것은 다시 난다는 것이요 다시 나는 것은 산 자로서의 힘을 얻음이다. 힘을 얻었으니 자기 스스로 자살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 생명을 그 어느 피조물도 손댈 수 없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작품인데 감히 누가 어찌할 것인가. 오직 그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즉 자살하는 데에서야 그 누구도 이를 막을 수가 없다. 다시 세상에 출생하는 새 창조, 새 생명에서, 이렇게 자살하는 행위가 과연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위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다.

이렇게 사람 사는 원리, 구원 받는 이치는 너무나 간단 명료하여 누구든 제대로 익힐 수 있다. 누가 따로 가르칠 것도 없고 학,박사의 입을 빌릴 일도 없는 것이니 지식이나 학문으로 될 일이 아니다. "기름 부으심이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했으니 이 '기름 부으심'(요일 2:27)은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는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새 창조의 불가피성을 외면함으로써 빚어지는 어리석음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처음부터 이런 당치도 않은 것을 생각하고 헛된 것을 믿음으로써 시작하는 미신에 불과한 세상 종교의 그 무엇이 이치에 맞고 논리에 들어맞고 합리적인 것이 있기에 그런 사막의 신기루에 불과한 것에 속고 있는가. 소위 기독교를 신앙한다는 종교가들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 덩어리다. 내 것이라고는 일절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하여 마치 내 것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니 기독교 교인이건 다른 종교인이건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니 하나님 것을 내 스스로 돌려 드리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힘과 능력으로 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다 그를 힘입어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는"(행 17:28)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 주신 것은 나를 위해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 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 하시는 모든 일은 그 피조물을 위하심이다. 이것이 삼위일체 원리에 의한 "한 몸으로서의 삶"의 원리다.

그러므로 아무리 내 노력을 들이고 힘쓰고 애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그 힘이요 능력이지 나 자신으로부터 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나님이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 마음대로 빼앗아 가시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내게 주시면 나의 것으로서 주신 까닭에 내 스스로 이를 바쳐야 즉 내 것처럼 해서 스스로 하나님께 드려야 마치 그것이 원래의 내 것인 양 해서 받으시고 하나님이 소유로 삼으시는 형식을 취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의미이다. 즉 주님의 것은 내 것, 내 것은 주님의 것이 된다.

그런즉 나는 당연히 주님의 것인데 그 주님의 것을 도로 돌려드리는 것밖에 없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으로써 그 능력을 활용하는 것밖에 없다. 내가 무슨 대단한 것을 이룬 것도 행한 것도 아니다. 단지 나에게 자유를 주시고 자유 의지를 작동하게 하셔서 취사 선택하게 하셨다는 그 사실이 나를 당치도 않게 교만한 마음을 품게 만드는 것뿐이다. 마음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으니 존재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마음(뜻)을 따라야 하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 방향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에 "자유"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함과 같다. 이 마음은 사랑의 영역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이 자유 의지가 핵심이다. 그래서 사랑을 또한 생명의 요체라 하는 것이니 사랑 없는 삶은 상상할 수도 없음이다. 사랑은 홀로 있을 때에는 쓸 수 없는 것이고 둘 이상이 함께 할 때에만 개념화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생명 또는 삶이라는 것은 반드시 여럿이 또는 둘이 하나를 이룬 '한 몸'의 구조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새 생명 안에 있어 이미 구원 얻은 우리로서 내 아무리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도 그것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빌 3:9)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음이니 이미 그리스도 친히 내게 힘과 능력이 되시어 그 능력으로 움직이는 것 즉 항상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 즉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산 자로 만드시어 다시 출생하게 하셨으므로 즉 살아 움직이도록 만드셨으니, 그런 움직임에 불과한 것이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다.

다시 말해 나를 구원하신 의도에 부합되게 즉 나를 산 자(영원히 사는 자)로 다시 출행하게 하신 목적에 맞게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나의 그리고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어 계시는)를 위해 살아 머리의 모든 지시를 따름으로써 한 몸의 구조 안에서 삶을 누리는 것. 이 제대로 "누리는" 것이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인 것. 계속 먹고 마셔야 한번 받은 생명을 유지 보전하는 것과 같으나 그 먹고 마시는 것을 번거로운 짐으로 여기지 않고 삶의 낙 자체로 여김과 같다.

단지 이 세상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생각밖에 없는 시험하는 자로서의 사단의 시험 무대이므로 과거 옛 시절 아담과 같이 될 수 있는 까닭에, 그런 전례를 따르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고전 10:12) 터이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하게 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시험이 없는 천국에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으니 마땅히 두렵고 떨어야 하는 위험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아담이 자기 입으로 그 선악과를 씹고 있을 줄 처음에야 상상이나 했으랴. 그러나 현실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 때도 하나님은 계셨고 아셨다. 그러나 이를 막으시거나 지켜 보호해주실 수가 없었던 것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 능력이 총동원되어 가동되고 있으나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덤벼 드는 상태에서는, 주님께서도 속수무책으로 그냥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것밖에 없는 것이 무서운 우리의 현실이다(히 6:6/10:26,29). 선악과를 입에 넣고 있던 아담의 그 행동이 바로 우리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순간에 해당되는 것이다. 아담은 자기 생명을 그와 같이 스스로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간섭하여 강제해서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왜냐면 그 마음이 벌써 그렇게 돌아섰으므로, 막는다고 당시는 막았더라도 반드시 기회가 있으면 재차 삼차 계속해서 즉 그 목적이 이룰 때까지 시도하여 결국 성사하게 되어 있는 터이므로 강제로 제지한다는 것 자체가 무익한 일이요 무의미이다. 그래서 스스로 사랑하여 순종하든지 아니면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자멸에 이르든지 양자 택일로써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기에 두렵고 떨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악령이든 거룩한 천사든 영물들은 이미 그런 "현실"을 겪었고 치른 오늘날이다. 지금은 우리 인생들의 차례다. 지금은 거룩한 천사들이 그렇게 떨며 두려워함이 없으나 과거 사단이 악령이 되던 그 때에는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떪으로써 자기 생명을 지켰던 결과다. 반면 사단과 일부 영물들은 그런 두렵고 떪이 없이 자기의 교만해진 마음을 따라 방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에 두지 않게 됨으로써 지금과 같은 결과를 거두었던 것이니 우리 역시 그 둘과 같은 과정을 밟는 것뿐이다.

당시 여자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고자 하는(창 3:5,6) 허영심에, 남자(아담)는 피조물의 말을 조물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고 더 끌리는 다시 말해 피조물(언제나 자기 자신과 같은 아리땁고 사랑스러웠던 여자)을 더 위하고 섬겨 경배하는(롬 1:25)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린 것이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루는 것인데 이 복종 자체가 생명의 낙이요 환희 그 자체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머리는 몸을 위함이 그 유일한 존재 의의로서 따라서 머리의 지시가 전적으로 몸을 위함인데 그 지시 자체가 몸에게는 생명이 아닐 수 없다.

먹고 마시는 일을 고역으로 여기고 수행하는 일은 없다. 그 자체가 생명의 낙이다. 우리가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먹을 양식이라 하심이 같은 이유다. 그것이 아무리 죽음이 고난일지라도 내게 결국은 생명으로 완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다. 이를 "믿는" 것이다. 나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하나만 믿는 것이 아니다. 모든 말씀에 적용되고 모든 믿음에 두루 통한다.

이 세상은 생명이 아닌 죽음의 세상으로서 자기 부인이 아닌 자아중심이 되어 생명의 자기 부인과는 본질적으로 맞지를 않아 충돌이 불가피함으로 자기 부인이 마치 무슨 사형언도나 되는 것처럼 인식들을 하고 있으나 "믿지" 않은 결과일 뿐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도로 돌려드리는 너무나 상식적인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오직 그 분부대로 따르게 되어 있음이 생명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기계처럼 움직이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역시 사랑으로써 하나님을 대하기를 원하시는 것뿐이다.

사랑은 단순히 아끼고 좋아한다는 의미를 말함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면 엄연히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따름이니 곧 둘이 하나됨을 말하는 것으로서(이는 3운법칙으로 증명되어 있는 삼위일체의 원리대로 되어짐이다) 즉 하나님은 머리로서 몸을 구성해 있는 피조물을 위하시고 피조물 각자는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므로, 먼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위하시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 즉 갑은 을의 것이요 을은 갑의 것이 됨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이와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므로 우리 위해 죽으시는 고난을 불사하셨고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우리 각자를 위해 내어 주신 것이니, 이는 "나는 너의 것으로서 너만을(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위한다"는 의미가 되심이다.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으로서, 우리 역시 동일한 사랑으로써 이에 동조하고 동참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을 때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요 13:8)는 선고 아래 놓이게 됨은 필연.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은 그 씻기신 자체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스승을 따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율법(계명. 명령, 지시)을 주심이 된다.

때문에 베드로가 너무 황송하여 "절대로 저의 발만은 씻기지 못하십니다"(:8) 했을 때 주신 대답이 그와 같은 단호한 말씀으로 나타나신 것. 다시 말해 우리 위한 십자가의 죽으심, 그래서 자기 부인을 나타내심은 우리도 "이로써 사랑을 알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도록"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을 하도록 명령하심이니(요일 3:16) 만일 여기서 "저는 자기 부인을 못합니다" 할 때에는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는 선고밖에 들을 것이 없게 된다. 바꾸어 말해 구원이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 그 누구도 구원 얻기를 바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13:34)을 주심이 바로 그런 의미다. 우리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명은 지키라고 주시는 것이니,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도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다. 지키라고 주셨지만 당시 또는 현재로서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 없이는 지킬 수가 없는 실상을 우리 스스로 깨닫게 하심이었다(롬 7:24).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없는 것과의 차이다.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의 전혀 다른 시대에 우리가 처해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여전히 율법 아래 종이 되어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그렇지만, 지금은 회개하여 믿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이 계명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 있기를 거부하니 여전히 "육신"(롬 7:14-8:13) 즉 "죄의 몸"(6:6) 아래 있는 것.

말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해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롬 8:2). 나를 먼저 해방하셨기 때문에 내가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개함으로써 이 자유 해방이 된다. 왜냐면 회개해야 죄 용서가 되고 그래야 성령께서 내게 임하심으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인하여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게 되는 까닭이다. "죄의 몸"이 파괴 "멸절되는"(6:6) 것.

그 스승과 행동을 같이 하는 것이 제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몸과 머리는 하나이므로 그 색깔이 같고 머리를 따라 움직이는 몸이므로 머리의 지시를 받는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33) 하심이 그 뜻이다. 그냥 구원 얻는다고 하지 않으시고 "제자됨"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을 따른다고 말한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눅 9:23/막 8:34)임을 분명히 하셨다.

누가는 이 말씀을 거듭해서 말씀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눅 14:26,27) 하심과 같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이는 곧바로 주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통한다.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 것과의 차이이기 때문이다(고후 5:15).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수밖에 없는 것은(눅 12:8,9/마 10:32/딤후 2:12),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되는 양면성 및 동시성의 원리 그대로다.

공동체 의식을 가르치는 역사(歷史)의 교장(敎場)

사랑은 공동체 의식이기도 하다. 나 혼자만 생각하고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와 하나되어 공동 이익을 추구함이다. 그래서 '우리' 의식이라 하기도 한다. 즉 울면 함께 울고 웃으면 함께 더불어 다 같이 웃고 행복해한다(롬 12:15). 공동체 의식과 상반되는 것은 자아중심 곧 이기주의다. 공동체 의식과 자아중심이 같은 상황을 놓고 어떻게 대처하고 그 결과가 나타났는지 그 명확한 역사적 실례가 한국사에서 나타났으니 다름아닌 임진왜란에 명암으로 엇갈려 나타난 이공(李公) 순신과 '나(원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이 없는 내가 바로 원균이라는 뜻으로)'원균의 행적이다.

공동체 의식은 주체 의식, 주인 의식으로도 통한다. 스스로 앞장 서고 적극적이고 매사 능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이기주의는 자기 이익에 노예가 되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만 해바라기처럼 움직이는 것이 그 특성이다. 자기 이익 나는 쪽으로만 항상 움직이므로 자연적으로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에도 오불관언이 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죄는 '피 흘리는 죄'로 고유명칭화가 되어 있다. 왜냐면 종국적으로는 살인 곧 타(他)의 생명 파괴 행위로 낙착되는 까닭이다. 모두가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고 해보라. 전쟁이나 상호 파멸은 필지이다.

원균은 특별히 악한 인간형이 아니다. 거의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보편적인 평범한 인생 유형이다. 다시 말해 나 그리고 당신이 그 때 살았다면 거의 백 프로 나타냈을 그런 구차한 '살기 위한 몸짓'이었을 뿐이다. 당시 이공 순신과 대비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이공과 대비되는 인간 유형의 대표 격으로 언급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이 점을 강조하여 원균과 이순신을 대조하여 말할 때는 그냥 원균이라 하지 않고 '나'원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나 자신, 내가 바로 원균이란 뜻이다. 원균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아무도 없고 내가 바로 돌 맞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역사 인식이다. 다시 말해 이공 순신과 같은 철저한 멸사봉공의 인생관이 확립되지 못하면 그래서 그 남다른 의지력(왜 의지력이 필요한가 하면 나머지 대부분의 군상들은 예나 지금이나 '물결치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식의 삶의 유형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이를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그에 상응한 상당한 에너지가 필수이기 때문)으로 이를 관철시키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원균으로 대표되는 일상적인 이기주의 인생 군상으로 흘러가게 마련이기 때문.

'나'원균은 애초부터 승산없는 싸움에는 휘말리기를 꺼리는 유형이다. 왜군의 대세를 보자 승산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그 스스로 휘하 모든 병력을 해산시키고 함몰시켰다. 그리고는 자기 목숨 하나만 건지려고 뭍으로 기어 오르려는 판에 자기보다는 나은 인생관을 지닌 부하들의 권고에 떠밀려 이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보니 우리 군사의 연전연승하는 신바람 휘파람에 속이 타 들어간 나머지 이공의 공(功)을 시기하고 가로채는 만행마저 서슴지 않은 것.

결국 자기 한 몸의 영달을 위해 국가 유일의 동량인 이공 순신을 모함하여 파멸로 몰아넣으려는 순간에까지 간 것이다. 반면 이공은 주인의식이 분명하여 나라에서 시키지도 않은 거북선 건조를 그것도 유력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완성시켰고, 어리석은 군주와 조정의 손아귀에 걸려 들어 하마터면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변을 치르고도 '나'원균으로 인한 우리 수군 전멸의 비보(悲報)에 접하자 이를 고소하다고 여기기커녕 백의종군에다(도원수 권율의 허락을 받고) 고문에 시달린 몸을 이끌면서도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당장 정확한 정보 수집에 나선 것이다. 

패잔병력이나마 남은 군사력을 추스려 장차 닥칠 적의 대거 침공에 대비한 것은 그의 탁월한 전술도 전술이지만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활력화시킨 자주 정신 곧 철저한 공동체 의식에서의 주인 의식의 발로였다. '나'원균이 들어 망치게 될 뻔한(왜냐면 나라의 관문에 위치해 있었기에) 국운을 이러한 정신으로 평소 연단된 이공 순신이 들어 두 번씩이나 일으켜 세웠으니, 중국 본토까지 초토화시킬 뻔한 전란을 초기에 종식시킨 위대한 최대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전란에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일개 무장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만대에 사표가 되는 이상적인 인간형으로서, 공동체 의식이 어떻게 한 나라라는 거대한 사회 집단을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내었는지 모든 인류에게 밝혀 주는 교과서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의미이다. 동시에 평범한 표본적인 인간 유형으로서 한 개인의 이기심이 일조유사시에 얼마나 가공할 만한 심각한 폐해를 났는지, 양면으로 이 같은 크나큰 교훈을 가르치고 있기에 우리는 이공 순신과 '나'원균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교훈과 계명이 바로 이러한 평범한 인간 세상의 일에 그대로 유감없이 반영되어 있음이니, 내용의 본질상 아무 다름이 없고 단지 '영생'인 만큼 규모가 크다는 것뿐이다. 똑같이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인즉 동일한 원리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바로 이런 이기주의, 개인주의요 "의"와 "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공동체 정신을 달리 표현함이다. 즉 '한 몸 체제'로서의 영생이다. 이 한 몸 구조가 아니고는 영생이 불가능하다. 이런 공동체 의식이 없음을 인해 아담은 범죄로 죽었고 악령들 역시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결과다.

자기 부인

자기 부인이 사랑에는 불가결하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나 실제 생활에서나 누구나 시인하는 것이지만 단지 이 세상이 온통 자아중심의 이기주의화가 되어 있는 까닭에, 그리하여 순자의 성악설이 하나의 부정할 수 없는 주장으로 맹자의 성선설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보듯이, "자기 부인"이라 하면 곧 죽을 줄 알고 그래서 미친 것으로만 인식됨을 인하여 무릇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부인을 배척하지 않는 이가 없는 실정이기에, 시종일관하여 환영 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이 삶의 터전이 아닌 죽음의 장소요 시험대인 줄로 바르게 성경 따라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오직 사람 건져내는 일에만 유일한 의미가 있음을 알고 있는 이게는 자기 부인은 당연지사 중의 당연지사다. 당장 멸망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 살리기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 사는 것은 본디부터 안중에도 없는 것이기에 "사람 낚는 어부", 사람 잡아 올리는(그물로) 어부로서의 그런 고난쯤은 예사로 취급하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 사는 것이 정상이고 세상 삶을 누리는 것이 당연시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반납하고 오직 사람 살리기에만 전념할 그런 위치에 그리스도인이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는다고 분명히 못박으셨다. 도리어 미워해야 영생하도록 보존한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아무리 산해진미로 진수성찬을 마련해놓고 잡수시라고 갖은 아양을 다하며 유혹해도 도대체 거기 빠져 있을 틈이 없는 것을 어찌하랴.

멸망 당할 위기에서 사람 살려 달라 외쳐대는 뭇 인생의 고뇌 어린 울부짖음에 양심상 도저히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는데 어찌 하리요.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서 부자로 지내면서 호화롭게 호의호식하는 이들은 이미 자기 위로를 다 받아버렸다고 선언하셨다. 얼마나 무서운 선고이신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다시 그 점을 강조하셨다. 이런 저주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 세상에서 돈을 섬기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시간을 보낼 마음인들 일으키겠는가.

고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주변의 내 이웃 건지기 위해 세상 삶에 한눈을 팔 겨를조차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하셨다. 왜냐면 믿는 형제들이 칭찬을 한다면 좋은 소식일 것이나 세상 사람이라고 하면 이런 삶의 방식에는 전혀 문외한일 것이니 다시 말하면 자기 부인 없는 자아중심의 생활을 하면서 그런 생활을 부추기기 때문에 칭찬하고 환호할 것이기에 그렇다.

사람 건져내기 위해 이왕 죽어 썩을 몸 하나 던져 그 대가를 고스란히 그대로 받는다 해서 그것이 무슨 여한(餘恨)이 되랴. 그것은 오히려 영원을 두고도 지극히 값진 보람찬 일이 아니랴. 영원을 두고 후회할 일보다 영원을 두고 잘 했다 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함이 더욱 더한 즐거움이 아니랴. 다시 말해 자기 부인 자체를 위해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다보니 자연적으로 자기 부인이 되어 버리고 자기 부인이 아니고는 일이 안되기 때문에 그 스스로 그렇게 몸을 던져 몸을 사리지 않는 것뿐이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수고 끝낸 천국에서도 자기 부인은 영원한 삶의 밑천이다. 행복한 삶의 기본 바탕이다. 한 몸됨의 기본 질서이다. 바로 이와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성경에서 경고하는 대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다. 왜냐면 과거 자아중심으로 살던 때처럼 자기를 위해 살아 자기 즐거움과 안락을 위주하는 것이니 자연적으로 이웃의 구원에는 관심과 시간과 정력이 가지지 않는 것이 됨은 당연하다.

이 세상에서의 위로는 동물적인 위로이다. 그 역시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최소한의 시간도 보장 받지 못하는 즉 내일이라도 죽으면 잠자코 속절없이 끌려가야 하는 그런 목숨이다. 신기루를 바라고 사막 위를 뛰어가는 자살행위를 왜 하겠는가. "미친 마음"(전 9:3)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사람 살리는 일 자체가 고난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 살리기 위한 일에 종사하려고 할 때는 이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왜냐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골 1:24)함으로써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 몸의 원리로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게 되어 있는"(고전 12:26) 이치다. 바로 이런 이치를 바탕으로 사단도 이 세상 신으로서 우리들에게 각종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권세가 허락됨이니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을 어디라고 감히 손댈 수 있으리요. 그래서 이 뜻과 일치하게 현재의 모든 피조물의 상태는 고통하는 때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는 터이다(롬 8:22).

이 세상은 악마 즉 이 세상 신(神))이 통할하는 세계로서 이 세상 신이 사람 구원의 일을 한사코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인간(자기의 조종을 받는)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니, 사단과 그리스도 교회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전쟁 상황이다(창 3:15). 이런 현실과 맞물려 자기 부인을 통한 수고와 수난이 대대로 이어지니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불가피성이 있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이 세상 한 때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인즉 이 자기 부인은 생명과 사랑의 핵심임을 앞에서 지적했다.

한 몸 체제에서 머리도 몸도 몸의 그 어느 지체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자기 이외의 다른 모든 이가 다 자기를 위해 주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업에 매진함에서 오는 불가피성만 아니라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모두의 머리로 모시고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유기적인 조직체로서의 성격을 보아서도 머리께서 고난을 받으셨는데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 몸을 형성하고 있는 우리가 그 고난에서 예외가 되고 제외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롬 8:17)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나누고 있는 터에 그 고난을 함께 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힘든 것도 아니다. 오직 믿음 하나에 달린 일이다. 믿음 없으면 불가능으로 여겨질 것이고, 있으면 그것이 불가능일 턱이 없기에 그렇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데 즉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리 고되고 어려워도 그 생명 길을 포기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 죽음과 멸망의 길이 아무리 독버섯처럼 매혹적이라 해도 그것을 캐다가 입에 넣는 바보나 미친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인간이 영생 얻기 위한 방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조물주 하나님의 말씀답게 인간이 인간답게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심이요 그 길로 인도하심이다. 올바르게 살되, 가장 먼저 시급한 일부터 해결하심이니 즉 죽은 상태를 살려놓으신 다음(이것이 "구원") 그렇게 사랑의 법질서대로 살도록 해주심이다.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모든 필요한 힘을 공급하신 다음에 그 힘을 제대로 활용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올바르게 살면 그것이 자연적으로 영생에로 회귀됨은 당연하다. 이미 영생을 누리게 되도록 새 창조로써 모든 힘을 제공하시고 부여하신 까닭이다. 피조물이라면 조물주께서 어떤 분명한 목적을 두고 만드심이다. 그 만드신 목적에 부합하게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목적에 부합하게 모든 피조물이 상응해 주기를 바라심이다.

그 목적이라 함은 사랑 가운데 한 몸 의식 즉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가운데에서 모두가 한 사람 예외 없이 행복하게 삶을 누리도록 하심에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때문에 앞에서 공동체의식, '우리' 의식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다. 여기서 '걸러내는' 작업이 필수이다. 이렇게 걸러내고 추려내고 솎아내는 작업은 산 자들 가운데에서 시행되는 것이지 죽은 자를 상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시험자 곧 이 세상 신(神) 사단이 시험하는 것도 구원 얻은 자 즉 산 자들을 상대로 함이다.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은 이미 걸러진 상태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교만한 생각으로 아직도 자기 계획하는 바가 성취되리라는 망상 속에 잡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실은 멸망을 앞두고 있는 처지이다. 자기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 정도는 아니나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고 요행수를 바라는 정도라 하겠지만, 어쨌든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은 사실이다. 때문에 천년 왕국 이후에도 사단은 반드시 무저갱에서 올라와서는 집요하게 도 다시 한번 천하를 꾀어 속임으로써 큰 무리를 이룬다고 예언되어 있다.

이러한 악한 피조물들이 명백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의 계획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원리원칙주의, 공평공정, 공명정대로 나가시는가를 증명하는 증거가 되고 있다. 즉 하시는 일이 공평 공정과 원리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단과 같은 피조물도 자기 능력으로 대세를 만회해보고자 거침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원리원칙대로라면 공평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교만이 스스로를 소경으로 만드는 예이다. 그리고 멸망의 운명에 처해진 자가 꿈꾸는 대세 만회라는 것은, 자기가 멸망의 장소에 들어가게 될 기한을 가급적이면 늦출 수 있으면 늦추고 이후 차츰 되어져 가는 경과를 보아 가며 멸망의 운명을 벗어나보겠다는 그런 정도다. 가령 구원되는 사람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면 그 정해진 숫자에 이르지 못하도록 적극 방해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식이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여 스스로 순종하는 자들만 구원하시는 고로 그리고 사랑은 누가 강제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기 자유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인즉, 바로 이 점을 노리고 그렇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도록 방해를 하고 갖가지 시험을 하면 자기 계획이 틀림없이 성사될 수 있다고 딴에는 믿어 오고 있는 사단이다. 인격성을 지닌 생물체는 그 자유 의지가 반드시 보장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도록 하나님께서 강압 조처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다. 만일 그리 되면 이상 설명한 창조의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미 되어진(창조의 결과로)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목적에 부합한 행동을 각 피조물이 하게 되기를 바라심이다. 따라서 사단은 "그렇다면 나도 시도해볼 만하다"고 계속 자기 고집대로 나가는 것이며, 고로 딴에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희망(자기의 계획이 성사될 수도 있다는)을 버리지 않고 있는 상태다.

영물로서의 피조물의 특징은 그 광범위한 지식에 있다.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그리고 절대로 편파적이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만사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특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자기 계획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망상을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렇게 나가면 나갈수록 그것은 하나님께서 철두철미 원리원칙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공평무사하심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요 절대로 조물주로서의 독주(獨走)나 전횡(專橫)이나 강압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실증(實證)이 되고 있다.

사단과 악령들이 이렇게 방자하게 행동해도 그 자신 스스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이라고 오해할 필요가 없으니, 욥기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자기 역할을 수행함이다(욥 1:6). 자기 역할이라는 것은 물론 시험하는 일이다. 즉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는"(마 13:49) 일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세상 사람 즉 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 아니니 죄인들은 이미 자기 수중에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터이다. 오직 의인 중에서 즉 구원 받은 자들 중에서 고집스럽게 자아중심을 회개 않는 악인들을 추려내는 작업을 맡고 있음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의 영생 받음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치심이다. 구원은 두 가지 측면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니 하나는 현재의 죽은 상태에서 죽을 것은 죽고 그 죽음의 그루터기에서 다시 삶을 피워 올려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새 생명"(롬 6:4)의 삶을 바탕으로 인간답게 하나님의 아들답게 영원히 사는 자답게 살도록 능력을 베푸심이다.

그 능력 베푸심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육신"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심에 있으니 즉 다시는 "육신대로 살지"(롬 8:13) 않도록 하시는 "자유 해방"(:2)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하나님을 위해) 살도록(고후 5:15) 하심이다. 바꾸어 말해 다시는 죄 짓지 않도록 하심이다.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이 왔고(롬 5:12)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영생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살지 않는 자기 부인과 직결되어 있는 통합 의미이다.

이는 이미 설명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과 부합된다(롬 14:7-9/고후 5:15). 따라서 이와 같이 자기 부인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도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는 그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거의 모든 말씀은(대표적으로, 마 7:21/25:45), 이 구원의 양면(영생과 자기 부인의 삶)에서 전자에 해당되는 것을 거쳐 후자 쪽으로 진입해가는 과정에서 빚어질 모든 사태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생활의 원리임을 말씀하심이다. 인간이 원래 이 원리를 따라 살았어야 함을 조물주 하나님으로서 말씀하심이다. 그렇게 살지 않은 탓으로 현재와 같은 불행과 비극에 빠져들었음을 알리심이다. 이 원리대로 살지 않음을 인하여 사단이 생기고 아담의 죽음 곧 인류의 죽음이 야기되지 않았던가. 이런 생활 행보(行步)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 문화(자아중심 일색인)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극과 극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둘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하고 찬란한 미래라는 거대한 배경과 배후가 있다. 바로 그 나라를 위해 고난 받는다고(살후 1:5) 성경은 분명 밝히고 있는 터에, 이 싸움에서 밀려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함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런 일이 항다반다로 벌어지고 있어 그래서 성경의 추상 같은 경고가 쉴 새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죄 많은 세상 사느라고 죄 짓고 나약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렸으니 불쌍히 여기셔서 모쪼록 천국 길이 되도록 지켜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어떻게 그런 나약한 패배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만드시고자 새 창조를 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최강의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사악한 사단 앞에서 맥도 못추는 연약해 빠진 인간 그대로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처음부터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죄 짓고 살아 사단에게 종이 되는 인간이라면 처음부터 "성인(saint, 聖人-우리말 번역은 성도(聖徒))들이라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거룩하다(聖)"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줄로 생각한다면 당신의 인식 자체부터가 문제다. 그런 비뚠 인식으로는 절대로 거룩하신 하나님 가까이 영원히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죄가 무엇이냐,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함이다(고후 5:15). 욕심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약 1:15).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성경은 두 말하는 법이 없다.

이중 언어 곧 이런 해석도 되고 저런 해석도 되는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그런 언어를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는, 이 세상 신(神)과의 싸움에서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아름다우시고 사랑스러우신 말씀을 오늘 이 시간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오늘도 삶의 본을 보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믿음에 들어가게 하시고 믿음에 선 이들은 그 믿음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는 내용 외에 더 드릴 것이 없고 더 드릴 말씀도 없다. 이 세상 하직 때까지 그런 성격의 기도일 뿐이다.

이것이 주기도문 즉 주님께서 가르치신 형태를 따라 구하는 기도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절대적인 사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진정 사람 사는 곳(이 세상은 삶의 본고장이 아니므로)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은 마땅히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우리가 이 땅에서 온전히 행동함에 있음을 알게 되도록 기원하는 기도 속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양하고 그 나라를 선포하고 그 뜻을 알리는 것이요, 이를 따라 사람 살리는 모든 작업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수고가 나타남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함께 일함이 없이(고전 3:9/고후 6:1) 말만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이들을 용서해 주는 행동이 뒤따라야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될 수 있음과 같다. 믿음 있는 기도는 "행함이 있는" 기도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아 죽었고 헛되다고 야고보서에 강조한 그대로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 곧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는 주님 말씀하시기를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못하고 너희 안에 있다" 하셨다(눅 17:21).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 하고 여쭈었을 때 하신 대답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the kingdom of God coming with power), 혹은 인자가 그 왕권(王權)을 가지고 오는 것(the Son of man coming in his kingdom)"을 볼 자들도 있다 하신 후 변화산 상에서의 변형을 이루셨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신령한 몸, 초자연계 몸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신령한 몸으로 변형 또는 변환되시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 모세와 엘리야도 같은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자연계에 속한 구름마저 광채가 나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하신 의미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거기 장사하는 모든 장사아치들과 그 파는 가축들과 환전(換錢)하던 화폐들을 사정없이 둘러엎으시고 쫓아내시는 등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던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이런 일을 하니 하나님께로부터 난 증거(혹은, 권위)를 보이라"고 했을 때, "이 성전을 헐라" 하신 데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성전"이라 하심으로써 예루살렘 성전과 성령(아버지의 영 그리고 아들의 영이시니 곧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로 계시는 모습)께서 계시는 당신의 육체를 동일시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상징되던 것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육체가 그 성전이 됨으로써 실질적인(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그림자로서 나타내는 것이 아닌) 실체로 전환되는 것을 가리키시고 가르치심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육체가 성령의 성전이 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몸이 주님의 변화하신 모습처럼 원칙적으로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 사실을 드러냄이다.

단지 필요에 의해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을 따름이다. 무슨 필요냐 하면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연의 목적을 마치면 주님 나타나실 때 우리 역시 주님의 신령한 몸과 같은 본연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변환하도록 되어 있는 것.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되신 이상 당연히 애초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신령한 몸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지만 '필요에 의해서' 즉 죄인된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죄 있는 육신의 몸부터 입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 필요가 이제는 충족되고 그 담당하신 일이 완수됨에 이르러 그래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이전의 그 어느 인간도 임종시의 언어로는 할 수 없었던 말씀을 유일하게 하셨던 것과 같이, 모든 것을 이같이 다 이루신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와 하나되어 똑같은 과정과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니 곧 현재의 우리의 이 연약한 육체로써 당하는 모든 고난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육체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난 받기 위해 즉 그리스도 위해 죽으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질 육체다. 이 사실을 각자는 부디 명심할 일이다. 살면 가히 하나님의 아들처럼 살아야 즉 능력의 초자연계 몸으로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이 세상 사는 것이 정당하여 하나님 뜻이라면 지금 당장 초자연계 몸으로 변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고로 감히 이 세상 살고자(요 12:25) 하는 이마다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몸의 구속을 가리켜 양자됨 즉 아들됨이라 한다. 왜냐면 그런 모습이어야 실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완전한 면모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심은 그런 사유가 그 하나이기도 하다. 즉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그리고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하면서도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연약한 모습이셨기 때문이다. 이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제대로의 인간(아담) 모습이 아니다. 범죄하여 죽음에 처해진 모습으로서 정상이 아닌 것이다(롬 5:12). 따라서 두번째의 모습 즉 정상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셔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이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 위해 즉 우리 개개인의 이름으로 죽으심으로 이 세상을 떠나셔서 보내실 성령께 관하여 말씀하실 때, "그는 진리의 영(靈)으로서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그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나 너희는 그를 아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실 것"(요 14:17)이라 하심으로써 명백히 하셨음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당시 제자들이 아는 것은 눈에 보이시는 바 육체로 계시는 그리스도셨다. 그러나 "안다"고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시다. 제자들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거하신다고 하신 까닭이다.

그러면 왜 당신 자신이라 하시지 않고 "성령"이라 하여 제3인칭으로 나타내셨는가 하면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하나되어 계시므로 언제나 그와 같이 하나로 움직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로 계시는 모습을 가리켜 어떻게 "나 자신"이라 하실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나로 계심이 바로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계심이었다. 아들께서도 하나님이시니 영으로는 항상 아버지와 하나로 계심인 것이다. 고로 당시 그리스도 안에 계시던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셨고 아들의 영과 함께 계심이다.

또 동시에 아들의 영이시니 아들 역시 하나님이시므로("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또한 성령이시다. 그러나 두 분으로 계신 모습이 아니니 한 모습이시다. 영은 볼 수 있는 형태를 취하지 않지만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인데, 이 사실은 내가 지금 모시고 있는 성령으로 다시 설명이 된다. 즉 내가 모신 성령은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계신 그리스도이심과 동시에 아버지께서 또한 아들과 하나로 계시는 모습이시므로 아버지의 모습이시기도 하다. 이제는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계시므로 아들이 모습은 사람의 모습이시다. 이러한 사람의 모습을 가리켜 아버지의 모습이시라고 명백히 하신 것이다(요 14:9).

따라서 아버지의 모습 따로 아들의 모습 따로가 아니라 한 영의 모습 즉 하나로 계심 그대로이시니 "하나님이 형상"(고후 4:4/골 1:15)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서 통일되어 계심이요, 단지 의미가 아버지와 아들로서 하나이시라는 뜻이다. 동시에 내 영과도 하나이시니(고전 6:17) 아들께서 이미 사람이 되시어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이신 그 영도 사람이 영처럼 되시어(사람의 육체를 입으셨은즉)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으로 아주 변하신 것이 아니라 양면으로 두루 통하게 되셨다는 그 의미다.

그러므로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라고도 하는 것이다. 나의 육체와 영혼을 모두 통틀어 '육체'라 할 때 성령(그리스도 또는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는 아들)께서 그 육체의 '영혼'이 되심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나' 또는 "그리스도와 나" 이렇게 되는 것이지, '아버지와 아들과 나' 이렇게는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 즉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는 것이 됨은 물론이다(요이 1:9).

우리 속에 우리의 영이 있는 것처럼 사람으로서의 주님의 육체 안에는 사람의 영이 아니라 아들 곧 아들의 영 즉 하나님의 영(하나님은 영이시므로)이 계시는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영으로 계실 때 항상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것이다. 고로 예수님의 육체 안에 거하시는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이시면서(육체로 계시니까) 동시에 하나님(하나님은 영이시니까)이신 분으로서 유일한 존재이시다.

그러므로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그 의미가 바로 '임마누엘'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 또한 그 육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아들과 하나이시기 때문.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면서 다시 제자들에게 오시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마"(요 14:18)고 약속하신 것. 그리고 "우리가 와서 그와 거처를 함께 할 것(함께 같이 살 것)"(:23)이라 약속하심이 오늘날의 우리가 성령 받아 모심의 의미이다.

"고아"란 말씀의 개념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부모 자식 사이에서 통용된다. 부모가 떠나면 고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아처럼 버려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엄마처럼, 아빠처럼 자기 낳은 아이를 다시 품으시기 위해 오신다는 뜻이다. 이는 요한 사도가 아들 친히 "아버지 품 속에 계신다"(요 1:18)고 함과 같다. '엄마 품속의 아기'와 '그 엄마' 이상으로 가까운 인간 관계는 없다. 바로 그 엄마와 아기의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표현하신 것이다. 실상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獨生者) 하나님께서 나타내셨으니 곧 사람되신 것을 말함이다.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요한 사도는 그 계시록에서 나타내고 있다. 비록 환상 중에서도 그 모습을 대하자 그(그 육체)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혼절해버렸다(계 1:17). 바울(당시는 사울)은 그 영광에 접하자 곧장 눈이 멀어버렸다. 신령한 몸의 영광을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감당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비록 사람이 되셨지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의 모습으로 그렇게 나타나셨을 뿐이다.

왜냐면 하나님으로서의 요소는 그 어느 인간도 접근할 수 없다고 이미 선언되어 있는 터이다(딤전 6:16). 요한 사도가 그 앞에서 죽은 자처럼 되어버린 그 신령한 몸이라는 강력한 능력의 상태에 인간이 존재함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라 말씀하심이 이로써 드러나진 것이다.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서 기타 모든 것이 부수적으로 따름이다. 아담이 먼저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신령한 존재가 된 다음에 이런 아담을 위해 '에덴'낙원을 창조하신 것이고, 거기에 신령한 식물이 나게 되었고 동물 역시 존재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천사들(악령들을 포함해서)이 바로 그 때 창조된 영물들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복음 전도의 표제어는 다름 아닌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여 새롭게 창조되라는 하나님의 사랑스러우신 부르심이다. 생사에 관한 일이므로 자식 낳아 기르는 부모의 심정이 여과없이 그대로 나타나시는 절절한 음성이시다. 이같이 다시 나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것이 선결 요건이다. 지금까지 자아중심으로 살아온 과거를 청산하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살아야 함이다.

회개하는 것은 말로만 자기가 죄를 지었고 죄인이라고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정도야 사람마다 양심이 있으므로 누구나 의식하고 있는 현실이다(요 8:7-9). 그러므로 회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이다. 이제부터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함이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을 수가 있음이다(고후 5:15). 오직 죽으나 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롬 14:7-9). 이전에는 이와 같은 명령을 하시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자아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것은 자아중심이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자기 부인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누구든 죄를 짓지 않는 자기 부인(고후 5:14,15 내용이 가리키는 바)이 가능해졌으므로 죄를 짓는 자는 그리스도 밖에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격이므로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니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재판장)로 선포되신 것이다(행 17:31/마 3:10,12).

세상 종교(당치도 않게 "기독교"를 표방하는)의 교리에 물든 사람은, 마지막 심판이 그리스도를 믿고 아니 믿고의 여부만을 가려낸다는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강력히 전파한 바울 사도 자신이 말하기를 "참고 선을 행한" 자를 하나님께서 영생으로 보답하신다 한 것이다(롬 2:7,10). 그리고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자는 심판하신다고 했다(:8). 우리말 번역이나 영역 KJV은 "당을 짓는다"고 했으나 잘못된 것이니 기타 영역도 대개 "self-seeking"으로 번역하고 있다.

자아중심은 자기 왕국이다. 인간이 일억이 된다고 가정하면 일억개의 국가가 독립해 있어 모래알처럼 다투고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급기야 다 함께 망한다는 그런 결과가 됨을 말함이다. 이런 것을 어찌 사람 삶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 중심이 되면 그래서 자기 부인이 되어 한 머리 아래 통일되어 있으면 그 구심점이 분명해지므로 서로가 모두 하나로 뭉쳐져 한 몸처럼 되어 가령 일억의 인구일 때는 나 자신이 일억배가 되도록 풍성한 삶을 누림이 된다. 자기 부인이란 것이 바로 이런 효과를 내는 사람 삶의 기본 지혜인 것이다. 사랑의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말씀이 함유하고 있는 또 다른 내용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즉 이 세상(자기 부인이 아닌 자아중심만이 판치는)에서의 삶이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자아중심의 세계에서 무슨 삶의 낙이 있다는 것이기에 이를 "누린다"는 말인가. 사는 것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 즉 자아중심이라고 기정사실화해 놓고 그래서 남을 꺾어야 내가 부지된다는 이런 살풍경 속에서 무슨 양심상의 평안이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노상 표방하는 것이 육신에 사로잡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인생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내리요"(롬 7:14)라는 탄식만 일삼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이라고 가르치니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구원을 받고서도 "누가 나를 건져내리요!" 하고 애타게 구원을 열망하는 꼴이니 이른 자가당착을 보고 어찌 세상이 비웃지 않으리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죄의 결말인 죽음으로부터의 해방만 아니라 그 죽음의 뿌리인 "죄로부터의 구원"(마 1:21) 즉 자유 해방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이 자유 해방을 하고많은 이단들은 엉뚱하게도 "죄를 지어도 죄 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죄를 지음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그 가책을 묵살하여 마비시킬 수 있음이 그리스도의 소위 "우리 대신하신" 죽음으로 보장되었다는 그야말로 악마 사탄이나 입에 올릴 만한 망발을 서슴지 않는다. 2014년 4월경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기독교"의 "막가"파(派) 이단의 온갖 비위 사실이 여기 이 "대신 죽음"의 교활한 교리에서 유래된다.

"대신 죽음"이 아니라 "함께 죽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되시고자 나의 죽음에 동참하신 죽음이므로(이미 나는 죽어 있어 내가 행하는 모든 순종과 선행과 율법 행위가 나의 구원과는 일절 무관한 것으로 그 행위가 나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함으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인 것) 이를 가리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을 의미한다"(고후 5:14)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자기 부인이 주축이 되어 영원토록 이어질 새 생명 얻어 진정한 삶을 누리게 되도록 다시 출생함이 유일한 목적이고, 구차한 자연계 육체의 썩어질 삶에 탐닉하는 것이 목적일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이렇게 성령으로 출생한 후에는 구원이 화급한 주변 모든 사람에게 참으로 인간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급선무요 이 외 그 어떤 것도 염두에 둘 일이 아니다.

단연코 말하거니와 이 세상 삶을 사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기 앞서 자멸을 초래하는 불나방이 행동이다. 그래서 주님 말씀에 지금 웃는 이는 화가 있을 것이라 하셨고 지금 부유한 이는 장래에 아무 위로도 얻지 못하고 오직 재앙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이 세상 삶을 누리며 즐기고 거기 빠져 있는 것이 "웃는 것"이고, 돈을 사랑함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밖에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사랑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으니 이런 사람이 장차 "울 것"이라 하신 것이다.

그 대신 우는 이가 웃을 것이요 가난한 이가 복이 있다 하셨으니 구원 얻기 전에는 죽음에 직면한 스스로의 처지를 인식하여 통탄스럽게 여겨야 구원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요 구원 받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을 위해 울며 기도하고 눈물 어린 사랑으로 그 장래를 걱정해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 양심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인간 삶이란 자기 부인 곧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다.

이 자연계에 얽매인 썩어가는 육체의 삶이 정상적인 인간 삶이 아니니, 초자연적인 것 즉 신령한 하늘 나라 곧 천국이 인간 삶의 본고장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기가 세상에 나온 근원이 되는 엄마의 품을 떠나서 아기가 살 수 없고 그런 상태에서 산다 해도 무한 고생만이 있고 자라서도 정상적인 삶의 유지가 어려운 결과가 됨과 같은 것이다. 피조물은 항상 영원토록 조물주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애기들인 것이다.

피조물 인간에 대한 그 애틋한 사랑은 자식 낳아 길러보고 자식 잃어 모든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이들의 참혹한 지경을 목도하고 공감하는 사람이면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으리라. 바로 그런 심경이시기에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위해 그 십자가의 고통도 주저하지 않고 맞아들이시고 감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도 이 구원에 대해 모르고 방황하는 인생들에 대한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시랴.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구원 얻었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을 사랑하고 주변 이웃을 생각함이 없는 모든 이들에게 진실로 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고 있는 바다. 우리의 양심 자체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명확한 증거 중의 하나다. 저절로 생겨난 인간이라면 이렇게 내면적으로 악과 선이 싸우지를 않는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간 본질을 두고 그 바탕이 악하다느니 선하다느니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양심이라는 것이 본디부터 악과 선이 싸우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인간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셔서 만사를 자유 선택에 의하여 행하도록 하시되 최소한의 행동의 규범 또는 기준을(선을 사랑하고 의를 행하도록) 정해 주신 기계적 장치인 것이니(롬 2:14,15)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에 부합되게 강제성이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름으로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됨으로써 육신에 속한 자아중심의 악이 자기 부인을 핵심으로 하는 선을 제압하게 됨으로써 선과 악이 서로 싸우는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육신"(롬 7:5-8:13)에 대한 설명에서 보듯이 양심의 가책이 그것이다. 서로 싸운다는 것이라기보다 일방적으로 악이 선을 압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으로 시종일관하는 까닭에 양심에 부합하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저절로 생겨났다면 악한 자는 악한 데로 물 흐르듯이 풀리고 혹 선한 자가 있으면 그 선한 대로 풀리면 되는 것이지 악을 행해놓고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희한한 일 중에서도 희한한 신비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신비는 신비가 아니라, 인간 외적인 존재가 계셔서 인간 존재를 통할하여 그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법칙 곧 사랑의 법칙을 설정해놓으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증거이고, 어떤 연유로 해서 인간이 그 표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기막힌 내력이 숨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증거인 것이니 즉 성경이 밝히는 대로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그 발단이다. 철학자 칸트는 그 평생 창조신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인간 이성의 차원에서 하늘의 별들을 보고 그리고 자기 속의 양심이라는 사실을 보고 "놀라고 두려운 경이의 눈으로 대한다"고 고백했었다.

그러나 그도 이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듣지 않았으니 성경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그 역시 "바보"(시 14:1)들 중의 하나였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나의 육체>라는 자아중심의(원래 자연계 육체는 동물적 본능인 자아중심으로 살게 되어 있는 성향이므로. 이에 반하여 초자연계 육체는 그 육체가 주동이 됨이 아니라 그 영 자체가 자아중심을 선호함으로 되는 까닭에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의 범죄 행위의 단초가 된 것) 악과 선(성령 안에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게 되는)이 "서로 대적한다" 즉 "싸운다"(갈 5:17)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일방적으로 압도하기는 마찬가지이지 과거와는 달리 성령으로 능히 육신을 제압할 수 있음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가리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전 9:27) 한 것이다. 롬 7:14와는 아주 대조적인 것으로 얼마나 차이가 큰가. 앞에서 이공 순신과 '나'원균을 예로 들었거니와, 이순신과 '나'원균 아니 우리 평범한 모든 이기주의적인 인간의 차이는, 자기에게 유익되지 않으면 기피하고 유익이 되면 움직이는 것과 그것이 아니고 원리원칙에 따라 그것이 당연히 내가 할 일이고 옳기 때문에 하는 것과의 차이인 것이다.

'나'원균으로 말하면 결코 겁쟁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승산없는 싸움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나온 것이다. 만일 환경이 좋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었다면 용맹을 발휘하여 욱일승천으로 공을 세웠을 것이다. 이런 것이 자아중심이다. 나는 자아중심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우리 중 과연 몇인가? 그래서 '나'원균이라 하는 것이다. 반면 이공은 자기가 일단 바닷길을 막고 있는 수문장(守門將)인 이상 남이야 무엇이라 하든 자기 할 도리를 다한다는 주인 의식으로 거북선을 만들어 대처하였던 것이다. 한산도 대첩에서 그 거북선을 활용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공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처음부터 승산이라고는 없는 명량해전이다. 여기서 '나'원균과 이공의 차이가 선명하게 부각된다. 명량해전 당시는 이미 '나'원균으로 말미암은 우리 수군(水軍) 전멸로 인해 거북선도 없었다. 고로 한산도 대첩도 거북선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니라 이순신의 평소 '인간다운' 삶에 대한 굳건한 신념이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혁혁한 전공과 위명을 들날리게 한 것이다.

패잔 병선(兵船) 겨우 12척이다. 13척이든 12척이든 그런 것은 상관 없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우리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기세 등등하여 하늘을 찌르는데다, 그것도 병력이 수십 갑절이나 되는 상대이다. 절대로 승산이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하고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다한다는 일념으로 이기주의적인 우리 평범한 인간들의 눈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싸움에 이공은 그렇게 나선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순신 정신'이라 한다. 공익정신, 공동체 정신에서는 자기 유불리를 가리지 않고 오직 자기 맡은 역할에 오로지 충실한다는 것뿐이니 이것이 곧 자주 정신, 주인 의식이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과 자기 부인은 본질은 같으면서도 그 엄청난 차이가 하늘과 땅과 같다. 고로 모든 공동체 의식이 반드시 자기 부인은 아니니 그림자와 실체와의 차이와 같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은 그 실체인 것이다. 공동체의식이 자아중심과 대립되는 의미이기는 하나 자기 부인에는 미치지 못하니 자기 부인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새 사람으로서의 새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자기 부인으로서, 자아 중심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점에서 같은 공동체 의식이라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본질이 같다는 것은,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한 몸' 체제로서의 인간 삶이라고 의식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사람이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산다고 해서 영생하는 것은 아니니,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미 인간은 죽은 자로서, 죽은 자로서의 옛 사람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다음, 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둘이 하나되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체 의식의 인간 삶의 본질을 깨닫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빛을 사랑하고 어두움을 싫어하는"(요 3:21) 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어두움을 좋아하고 빛을 싫어한다"(:19,20)는 것은 그 특징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데에 있는 까닭이다.

비록 실체가 아니라 이런 그림자로서의 의미이기는 하지만 이공과 같은 공동체 의식이 그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바로 이런 한 몸 의식으로 살아야 행복한 삶이 될 수 있는 까닭에 바로 그런 한 몸 체제로서 삶이 이루어지도록 처음 피조물들(인간이든 영물(靈物)이든)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삶의 이치에 제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그런 긍정적 결과를 아니 낼 수가 없음이다. 옳기(義) 때문에 그리고 좋은 것(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 의식으로 나가는 이들은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하기 때문에 양심의 명령을 좇아 행함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타난 하나님 중심의 의미이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만유의 상속자, 즉 주인 의식으로 행함이다. 하나님께서 애초 정하신 삶의 법질서를 따라 행함이다. 주님 말씀하신 바 "제자가 그 스승보다 크지 못하고 종이 그 주인보다 크지 못하니 나를 핍박하였으므로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요 15:20) 하시고 이 세상(자아중심 일변도)에서의 인생 항로가 결코 순풍에 돛 단 배 같은 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험난한 고난의 가시밭길이라 경고하신 것처럼, 다만 그러한 삶의 자세가 옳고 또 해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 모든 핍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공과 같은 경우는 장래의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나라에서 장차 그를 포상한다는 미래도 없었다. 오히려 아둔하고 어리석은 조정과 임금은 그를 전쟁 중에서도 죽이려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공을 세운 덕에 평화가 오면 자기에게는 곧바로 모함과 죽음이 기다릴 줄 미리 짐작한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는 전쟁과 함께 그 생을 끝내기로 작심하고 고의로 전투복을 벗어 버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성계가 왜구 소탕으로 국민적 영웅이 된 다음에는 야심을 품고 오히려 나라를 둘러엎은 선례가 있어 영웅 대접은커녕 모함 받아 반역죄로 몰릴 것임을 백의종군하던 당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런 약속도 기약도 없었지만 단지 그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할 도리이기 때문에 이공은 감연히 그 고난의 가시밭길을 홀로 걸어갔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자기 양심이 자기를 용납하지 않을 줄 알고 그런 자세로 시종일관했던 이공에 비하면,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너무나 분명한 약속 아래에서 확실한 경로를 밟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늘의 별처럼 확실하고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머리 위에 빛나고 있지 않는가. 너무나 확실한 성경의 갖가지 증거와 증언이 확실하게 그 배경이 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부끄러워할 일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은 그렇게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말씀을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약속과 증거를 나타내 보이시고 하시는 분부시다. 뿐 아니라 현재 신분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상태이다. 얼마나 막강한 힘과 능력의 원천인가.

베드로 사도가 밝힌 대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벧후 1:3) 것이니 이렇게 이미 주신 다음에 내리시는 명령이시다. 무슨 초자연적이고 영웅적인 것을 요구하심이 없다. 평범 중에서도 평범한 것뿐이다. 오직 올바른 것(의)을 따르고 좋은 것(선)을 택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임하면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할 것을 성경은 엄격하게 명하고 있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우리는 이공만을 결코 영웅시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이공이 아니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금을 통해 그렇게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르게 살다가 간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올바르게 산 삶으로써 거두는 효과가 당장 눈 앞에 나타난 것을 우리가 목도하기는 참으로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눈 앞에 확연히 나타나자면 당장 이기고 지는 판가름이 날 전쟁판이 아니면 안되고 그런 전쟁 중에도 그 인물이 그와 같이 때를 맞추어 등장하지 않는 한 절대로 구경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공과 '나'원균처럼 서로 대비되어 나타나지 않고는 그 역사적 교훈이 그냥 묻혀 버릴 터인데, 이 이공과 '나'원균의 임진왜란만은 기가 막히도록 절묘한 구성을 이루고 있으니, 이런 특징을 들어 말한다면 아마 그 예가 인류 역사상 기록에 남겨져 오기로는 오직 이 하나뿐이라 해도 틀림이 없으리라. 소설을 쓴다 해도 그야말로 극적인, 좀 더 실감있게 표현하여 인간의 머리 구상으로 짜낸 그 어떤 이야기로도 흉내내지 못할 그런 '짜임새'다.

이공과 '나'원균의 상반된 가치관과 인생관이 두 번씩이나 그 명암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하나는 한산도 대첩이요 다른 하나는 명량해전에서 일본군의 야욕을 항구적으로 분쇄시킨 것이다. 즉 '나'원균이 들어 무참히 짓밟히게 했던 강토를 이공이 들어 그나마 겨우 차단시켜 놓는 참으로 역전(逆轉)과 역전의 극적인 구성이다. 한반도는 물론 중국 본토까지도 그렇게 두 번씩이나 위기를 맞고도 기사회생하게 만든 토대를 이룬 것. 두 번 다 이순신 한 사람의 공로다. 중국 본토라고 하는 것은 만일 이공의 수로(水路) 차단이 없었다면 왜군은 한반도를 손쉽게 보급기지화한 후 그 길로 중국의 산동반도를 직격하여 중원 천지를 결딴 내어 버렸을 것이기에 서슴지 않고 하는 말이다.

이 두번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원균이 들어 망쳐 버린 우리 수군 병력을 다시 이공이 그림 같이 재등장하여 기사회생시켜 놓는 장면이 된다. 그것도 이공의 평탄한 전투 행적에서가 아니다. 명령 불복종으로 잡혀 가 죽을 뻔하던 중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백의 종군하다가 그런 대승리를 거둔다. 자아중심의 평범한 인간 유형이라면, '나'원균으로 인한 우리 수군 전멸 소식에 그 혹독한 고문으로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부리나케 말을 달려 실정을 살피려고 하지를 않는 법이다.

자기를 도태시키고 '나'원균을 앉혔다가 꼴 좋게 되었다고 오히려 고소하게 생각해서 좀더 이 비극적 사태를 구경하려고 들었을 것이 백이면 거의 백 모두의 평범한 주인공들의 행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공은 달랐다. 여전히 자기 일로 여겨 자기 책임처럼 달려간 것이다. 아직도 치욕스러운 백의 종군으로 있으면서 그렇게 누가 시킨 것도 없이 자기 스스로 행동한 것이다. 얼마나 장쾌한, 과연 사람다운 사람의 삶의 족적(足跡)이냐. 배포가 두둑한 가히 온 천하를 포용하는 궤적(軌跡)이 아닌가.

그 결과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더 처참했을 비극으로부터 단독으로 구출해낸 것이다. 명량해전에서 왜적이 거침없이 서해안으로 내달았다면 한산도 해전에서는 실패했던 왜군이 기필코 중원 천지도 유린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끝판에 가서는 아무 미련 없이 이공 스스로 그 생명을 포기한 채 전사하는 것으로 막은 내려진다. 소설이라도 이보다 더 감흥있게 지어낼 수 있는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즉 세상에서 삶을 누리고자 하는 헛된 생각을 접으면 오직 할 일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밖에 없을 것이므로 이것이 성경의 모든 경고에 대한 안전판(安全瓣)이 된다고 하겠다. 세상 삶을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니 삶을 즐길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의 원수 악령 사단이 이 세상의 실질적인 왕 곧 지배자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신(神)"이 되어 세상을 주름 잡고 있기 때문에 그가 미워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방관, 좌시할 리가 절대로 없다. 그의 편이기 때문에 그냥 두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로 사단과의 이러한 대결 구도로 우리의 위치가(전에는 사단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나)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상황에서 세상에서 안일하게 지낸다는 것은 내가 사단에게 종속되어 사단에게 실질적으로 아무 위험이 되지 않는다는 증거만 될 뿐이다. 사단이 미워할 정도로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 있다면 사단이 가만히 둘 리가 없다. 못살게 들볶아 마침내는 타협하고 항복해오도록 유도할 것이 틀림없다.

둘째, 사람이 천하를 얻는다 한들 제 목숨 잃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신(마 16:26) 그대로, 내일 또는 이 시간 후에 내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이 세상 살기 위해 영원한 미래의 보장을 배척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미련의 극치가 아닌가. 천년을 내 뜻대로 산다고 해도 그 천년도 영원 세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도 초자연계 몸 즉 완전한 능력의 몸으로 살아야 제 맛이지 이런 초라하고 나약한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삶의 낙을 누리려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은 눈곱만도 없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요 언어도단이다.

물 속을 혹은 하늘 위를 육지처럼 나다닐 수가 있나. 그것은 고사하고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병원균에 의해 무참히도 학살당하는 주제에 이런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삶을 누린다는 착상 자체가 "미친 마음"(전 9:3)이 아니면 무엇인가.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 먹으려고 달려들 일이다. 뜬 구름 잡으려고 달려들 듯이 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모두가 예외없이 자아중심이다. 자아중심이라는 것은 밀림지대의 야수들이 사는 것보다 더 살벌한 상황을 말한다.

짐승들은 일단 자기 배만 채우면 굳이 다른 동물들을 해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미워하는 일이 없고 원수 삼는 일이 없으니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심이 한이 없고 끝을 모른다. 이런 짐승만도 못한 자아중심 일색인 존재들이 서로 모여 있는 사회에 무슨 항구적 평화가 있다기에 이런 삶을 사랑하여 욕심 내고 미련을 끊지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는가(사 48:22). 세상 사람 모두가 자기 부인에 의해 한 몸이 된 체제와 구조 속에 살아야 제대로 된 삶의 맛을 낸다. 그런 세상이 천국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법칙에 의한 짝의 원리에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은 서로 대립, 대칭(상칭)되는 위치에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면 반드시 오는 세상에서는 그 반대가 되어버려 결단코 삶의 낙이라고는 없는 고난 고통뿐임을 알지 않는가. 그렇다면 찰라 같은 한 순간의 삶의 낙으로써 영원 세월의 고난 고통을 맞바꾼다는 말인데 그런 바보스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이건 이성 없어 판단 못하는 짐승의 짓이지 이성과 지성을 갖춘 사람의 일일 수 없다.

고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니까 사람처럼 행동하고 사람처럼 처신하라는 것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사람답게 행동한다는 것은 한 때의 본능으로 움직이지 않고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움직이고 처신한다는 뜻이다. 범죄 행위는 짐승처럼 구는 짓거리이다. 욕심이(약 1:15) 그런 범죄의 교만을 만든다. 악령 사단은 모든 피조물 위에 우뚝 서서 만물을 다스리고 있는 아담을 시기했었다. 자기가 그런 자리에 있지 못하다는 현실에 불만이 많았다. 아담은 아담대로 그런 사단의 욕심에 충동되어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솔깃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새 창조의 때로서 저주 받은 상태에서의 자식 생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시기이므로 만물이 친히 이와 같은 고통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따라 해산하는 고통 중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롬 8:22). 한 몸의 체제이므로 함께 고통 중에 있음은 당연하다. 이런 엄중한 때에 감히 희희낙락 살려고 하다니! 악령도 천사도 그룹이나 스랍도 다 이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 상황인데 인간만이 사단에 의해 눈이 가려져 있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다지도 철없이 태평연월이나 된 듯 살려고 날뛰는 무서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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