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1일 수요일

통합 복음 (3)



(막 2: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말씀하셨다. "소자(小子)야("Son"), ((눅 5:20) 이 사람아("Man")) 안심하라. 네 죄 용서함을 받았다". (마 9:3) 어떤 율법학자들이 (막 2:6) 거기 앉았다가 속으로 말하기를,((눅 5:21)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막 2: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불경스럽다. 이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이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용서하겠느냐".

(막 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말씀하셨다. (마 9:4)(눅 5:22)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막 2:9)(마 9:5)(눅 5:23) 중풍병자에게 네 죄 용서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마 9:6) 그러나 인자가 (막 2:10) 땅에서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한다". 이에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막 2:11)(눅 5:24) "내가 네게 말하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자 (마 9:7) (막 2:12)(눅 5:25) 그 사람이 곧 일어나 상을 (누웠던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마 9:8) 그들이 보고 다 놀라 심히 두려워하고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눅 5:2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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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註-이 중풍병자에 대해 '마가'는 '가버나움'에서라 하고 '마태'는 예수님의 향리 곧 본 동네(his own city)에서 일어난 것처럼 하고 있다. 사건 전개를 기술해 나가는 순서도 기술한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서를 쓸 때 증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기록하고-'마태'나 '요한'('요한'은 모든 사건의 단순한 소개보다는 주님의 말씀의 내용에 더 치중하고 있고)의 경우는 자기 기억에 의존할 수도 있겠으나-결코 서로간의 기록을 대조하여 손질하여 짜맞추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로써 이 모든 기록이 인위적이거나 상상에 의한 날조가 아니라 실제 그대로의 사실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것 즉 증인들의 증언에 의한 것임을 웅변하는 바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 된다.

즉 이렇게 혼동스럽게 기록해둔 자체가, 기록한 이들이 진실만을 말하고 결단코 지어낸 말을 삽입하여 만든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분명한데, 당시의 기록자들은 그 말씀 자체만 기억하여 전달하였을 뿐, 피차간 각자의 기록을 대조해가며 장소와 때 등에 관한 정확성을 기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실 관계를 엄정히 구분하여 기록했어야 하는 것을 간과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혼동을 수정하도록 조처해  주시지 않고 그대로 두신 것이다. 방금 지적한 바와 같은 그런 효과를 나타내도록 하심이니 과연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신가. 정확히 기록하도록 만드셨다 해서,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진실이라 믿겠는가. 오히려 이런 옥에 티 같은 것이 있음으로 해서 성경의 진실성을 웅변하는 것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런 허튼 말을 하는 사람들의 입을 봉쇄하는  결과로 반전(反轉)되어 나타나 있는 것. 이렇게 일견 혼돈이 되는 부분은 이 대목이 아니라도 여러 군데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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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레위'

(마 9:9) 예수님께서 거기서 떠나(막 2:13)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니 군중들이 다 나아오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마태'라는 사람이) ((눅 5:27) '레위'라 하는 세리(稅吏, 세관원, 징세원)가) 세관(稅關)에 앉은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5:28) 그가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눅 5:29)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므로 (막 2:15) 그의 집에 ((마 9:10)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당시 '유대'인들로서 로마 정부의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니 말하자면 로마의 주구(走狗)처럼 대접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사욕으로 무리하게 세금을 정하는 일이 흔하여 이들을 죄인시했다-註)와 죄인들이 (세리와 다른 사람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름이었다. (막 2:16)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마 9: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눅 5:30) '바리새'파 사람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비방조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너희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막 2:17)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눅 5:31)(마 9:12) "건강한 이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이에게라야 쓸 데 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矜恤, pity, commiseration, sympathy, compassion)을 원하고 제물(祭物)을 원치 아니한다'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義人)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罪人)을 (눅 5:32)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공관복음인 '마태', '누가', '마가' 복음서 중 특별히 '마태'와 '누가'에서 사건 순서 배열이 약간 다르므로 산상보훈(山上寶訓)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순서를 정했으나 주로 '누가'를 주된 골격으로 삼았고, '요한'복음을 포함해서는 물고기 5마리와 떡 2덩이 기적을 중심으로 사건 배열을 정했다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註).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막 3: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군중이 따르는데 (막 3: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Tyre)'와 '시돈(Sidon)' 근처에서 허다한 군중이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므로 (막 3:9) 예수님께서 군중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하기 위해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막 3: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여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막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니 (막 3:12)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계하셨다.

산으로 가셔서

(눅 6:12) 이 때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셔서 밤이 다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날이 밝자 그 제자들을 부르셔서 (막 3:13) 자기의 원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시니 나아오므로 그 중 열 둘을 택하여 "사도(使徒, apostle)"라 칭하셨으니 (막 3:14)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셔서 전도도 하며 (막 3:15)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었다.

(막 3:16)(마 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음)을 비롯하여 그 형제 '안드레', (막 3:17)(눅 6:14)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막 3:18)(마 10:3) 또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세리(稅吏ㅡ관세원, 징세원)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눅 6: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눅 6:15)(눅 6:16)(마 10:4) '셀롯'('셀롯'이라 함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급진적 정치 결사인 "열성당" 당원을 가리킴)이라 하는 '가나안' 사람 '시몬'이며 (막 3:19) 또 예수님을 파는 이가 될 '가룟' 사람 '유다'였다.

산상 보훈(山上寶訓)

(예수님의 가르치심 중에 유사한 것은 그 말씀하신 사건과 때를 무시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내용 별로 한데 모아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했다. 한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가르치시고 있기 때문이다-註),

(마 5:1)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오므로 (마 5:2)(눅 6:20)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입을 열어 가르쳐 말씀하셨다. (마 5:3) "가난한 이는 (심령이 가난한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천국(天國)이 그들의 것임이다(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다).

(마 5:4) 애통하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눅 6:21) 이제 주린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다.

(마 5:5) 온유(溫柔, gentleness)한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땅을 상속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義, 올바름)에 주리고 목마른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불쌍히 여기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 받을 것임이다.

(마 5:10)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이는 복이 있을 것이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눅 6: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핍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나쁘다) 하여 버리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나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니 (마 5:12)(눅 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보답(報答, reward)이 큼이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 같이 핍박하였다(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다).

"화 있을 것이다"

(눅 6:24) 그러나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다. (눅 6:25)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배부른 사람들아, 너희는 주릴 것이다. 화 있을 것이다, 너희 이제 웃는 사람들아, 너희가 애통하며 울 것이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다.

"'모세'는 그렇게 말했으나 나는 말한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마 5:18)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一點) 일획(一劃)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이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이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의(義)가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審判, 하나님이 내리시는 모든 악에 대한 보응,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 함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는 의미의 욕설)'라 하는 이는 공회(公會)(사사로운 업무가 아닌 공적 업무를 관장하는 곳으로서 이해됨. 종교적인 의미로서 모이는 예배 장소는 회당(會堂)이 해당된다-註)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이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禮物, 모세 율법에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가지 헌납하는 물건)을 제단(祭壇)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릴 것이다. (마 5:25)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화해하라((눅 12:58)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 고소하는 이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어가고 재판관이 너를 옥리(獄吏, 간수, jailor)에게 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 5:26) 참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한푼이라도 남김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님(하나님)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4)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寶座, the throne)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도시임이요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다.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따라 나는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눅 6:29) 네 이 뺨을 치는 이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이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네 겉옷을 빼앗는 이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마 5:42)(눅 6:30) 무릇 네게 구하는 이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이에게 거절하지(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

(눅 6:31)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라.(마 7:12)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면 찍어 내버리라"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 (마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失足)케(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내버릴 것이다. 네 백체(百體)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30) 또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릴 것이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마 18:8)(막 9:43) (막 9:44) {없음}(어떤 사본(寫本)에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음).

(막 9:45)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릴 것이다.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지옥(Gehenna-그리스어)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마 18:9)(막 9:46) {없음}(어떤 사본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음) (막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릴 것이다. 한 눈으로 영생에(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고 (막 9: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을 것이다. ("지옥"이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라고 하셔서 강조하셨을 수도 있다-註).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눅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이들에게 말한다, 오직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 (눅 6:35) 너희를 미워하는 이를 선대하며 (눅 6:28) 너희를 저주하는 이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 너희를 모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 같이 함으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太陽)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이에게 내려주심이다.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면 무슨 보답이 있으리요.((눅 6:32)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세리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죄인들도 사랑하는 이를 사랑한다). (눅 6: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이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한다. (눅 6: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으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려 준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줄 것이다. 그리하면 보답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이에게도 인자(仁慈)하시다.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

구제할 때에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義)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보답을 받지 못한다.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위선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미 보답되었다.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이다.

기도할 때에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위선자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미 보답되었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한다.(마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마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ㅡ잘못이나 허물, 과오와 실수)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

(눅 11:1)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마치시니 제자 중 하나가 여쭙기를,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저희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눅 11:2)(마 6: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시며 (마 6:10) 뜻이 하늘에서 이루는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눅 11:3)(마 6:11) 오늘 저희에게 (날마다) 일용(日用, daily bread)할 양식을 주시고 (눅 11:4) 저희가 저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마 6:12)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저희 죄도 용서하여 주시고 (마 6:13) 저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들지 않게 하여 주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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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註-"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니,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는데 "아들"들이 된 우리는 땅에 있다. 이는 부자(父子) 간의 격리를 의미함이니 확실히 비극이다. 모든 것은 이런 비극적 현실을 인식함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자'(마 8:22)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산 자'가 되어 있어 아들들이니 그리스도와 함께 된 아들들로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아들이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이 세상에서 아들의 보내심을 받은(요 20:21)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아들들이다(롬 8:17).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고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시니)자들이 되어(고후 6:1/요 5:17) ①아버지의 이름을 온 세상 만민에게 알리고 ②그 나라를 전파하고(눅 9:2,60/행 20:25/28:31) 우리를 대하신 ③아버지의 뜻을 알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본분인 것이다.

①아버지의 이름을 전파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을 알림이다(행 4:12). 그런즉 "아버지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또는 "우리 아버지", 이렇게 된다. 따라서 중심 주제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②아버지의 나라를 전파한다는 것은 거기가 생명의 나라요 아버지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은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의 세상임을 알리는 의미다. 고로 이 세상 일을 오늘날 우리가 백안시(白眼視)하고(골 3:1,2)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아(요 12:25) 세상 삶에 빠져 있지 않아야 함을(요일 2:15/딤후 4:10)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에덴낙원에서 영물들을 창조하심으로써 확립하신 바 삶의 원리 즉 사는 법 다시 말해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를 알려 주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양심이 가르치는 바로서 한 몸을 이룬 공동체적 삶의 근간이니 곧 한 몸에서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써 그 어느 쪽도 자아중심이지 않아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상대를 위하여 사니 자기 부인이라고 한 마디로 요약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위치해 있는 유일한 의미이므로 그래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 아들된 도리인즉 이런 일에 전적으로 종사하는 까닭에 우리의 기원 역시 이에 맞추어지는 것이다. 곧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 삶의 기본 도리 곧 우리를 창조하신 뜻(목적)을 전달하여 그 법질서를 따라 모든 인생들이 살도록 함이다. 물론 그렇게 살고 살지 않는 여부는 각자에 달린 문제다. 그렇게 하도록 완전한 자주 독립성을 각인에게 부여하시고 보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오늘 일용(日用)할 양식을 구함이니, 여기에는 두어 가지 이유가 있다. 이미 앞에서 아버지는 '하늘(영계)'에 계시고 아들들은 '땅(자연계)'에 속해 있는 사실을 상기(想起)하는 것부터가 비극적 사연이 개재되어 있음을 강조했지만, 원래 영계 곧 에덴낙원에 살도록 되어 있는 인생들이 당치도 않게 이 자연계에 속한 뭇 짐승들처럼 자연계에서 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고 비극인 것이니 왜냐면 이것이 인간으로서는 죽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끝내는 죽도록 하시려고 만드실 리 없다(롬 5:12). 죽지 않는 것이 되자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는 반드시 썩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지라(자연법칙이 그러하므로) 신령한 몸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과연 에덴낙원이 그러한 신령한 세계 곧 영계라는 사실은 창세기나 기타 성경 각 대목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는 터. 꼭 "에덴낙원은 영계였다" 하고 설명을 달아야 영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가 아님을 여러 객관적 사실로써 확인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영원성을 지닌 영혼과 한정된 자연계 소속의 육체는 절대로 좋은 배합일 수 없으니, 육체가 죽어 없어져 혼자 남게 되는 영혼의 불만, 불평이 극도의 고통에 이를 것은 필연적인데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인간을 창조하실 리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니 이는 평범한 상식에 속한다. 이런 것조차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아담은 자연계 육체로 시종 살고 있었고 에덴낙원은 자연계의 한 동산이었다고 맹신해 왔고 그렇게 가르쳐 온 것이 지금까지의 소위 "신학(神學)"의 실체다.

아담이 범죄로써 애초의 초자연계 몸을 상실하고 이 자연계에 항구적으로 소속됨에 따라 정상적인 인간 삶의 세계(초자연계)가 아닌 데에서 살자니 첫째 입에 들어가는 먹는 것부터가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자연계에 속한 동물들처럼 그냥 풀(野生)이나 뜯어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힘들여 농사를 짓겠는가. 또 짐승들처럼 피부에 자연스러운 털옷이 입혀져 어떤 기후에든 적응하는 것도 아니다. 힘들여 옷감을 손수 만들어 옷을 해 입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명의 결과가 아니라 저주의 결말인 것이다. 왜냐면 인간이 원래 살도록 되어 있는 영계에서는 그렇게 수고할 이유가 없었으니 옷은 피부에서 발산하는 광채로서 빛의 옷이요 먹고 마시는 것은 신령한 몸에 걸맞게 별로 먹지 않아도 될뿐더러 오직 먹는다는 것은 생존 차원이 아니라 삶의 낙을 즐기는 차원에서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계에서는 먹지 않으면 죽는 판이요 그것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본질상 매일 먹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런 비극적 실태가 이 주님 가르치신 기도의 "일용할 양식"에서 생생하게 입증되어 나타난다.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먹을 것이 충분히 생겨나는 것도 아니니 이마에 땀 흘려 수고해야 그런 생존 수단이 생기게 된다고 저주 차원에서 말씀하신 그대로다(창 3:17). 즉 먹는 것까지도 일일이 하나님께 구해야 할 상황이다. 구하지 않아도 인생들이 살 만한 환경이라면 왜 역대(歷代) 아사자(餓死者)가 생겨나는가. 죽을 때는 죽더라도 최소한 굶어 죽는 자는 없어야 할 것이 아닌가.

또 하나의 의미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서 "품속"(요 1:18)의 아기와 같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모든 피조물의 실상이다. 영원히 그렇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는 태 속에서부터 빠져 나와 자라고 어른이 되면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들어 육체가 쇠약해짐으로써 병들고 죽지만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 신령한 육체는 영원히 그 상태 그대로 영속되므로 아버지 품속에 있는 상태 역시 영원히 그러하다. 모든 것이 처음 창조된 그대로의 완벽하고 온전한 모습 그대로 지속됨이다.

아들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만유의 주인이신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품속"의 아기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다"(요 10:29) 하시면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14:28)고 하셨다. 그래서 성령 강림하신 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아버지의 거룩하신 소자(아이, Child)라 하였고, 성령 충만하여 함께 기도할 때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것이므로 평상시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번역자들도 원래의 흠정영역을 빼고는  거룩한 종(Holy Servant)이라고 일치하게 '풀이하여' 표현하고 있으나, 아버지 앞에서의 "아이"라는 표현보다 "종"은 더욱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아버지 친히 그 아들에 대하여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실 때에는 아들이 장차 사람이 되실 것을 미리 말씀하시는 까닭에 "종"이라고 하셨지만, 피조물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종"이라 함은 아주 마땅치 않은 것이다. 엄연히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아들이시요 독생자이신 것이다.

성령께서 그 당시 "거룩하신 소자((小子), Holy Child)라고 표현하도록 하신 것은 이상 설명과 같은 사유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아버지 "품속에 계신다"(요 1:18)고 말함으로써 확인되어 있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인식하고 있는 대로의 "엄마 품속"이라 할 때의 의미를 원용(援用)한 것이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그대로이다. 즉 엄마 품속의 아기는 입을 엄마 젖꼭지에 갖다 대기만 하면 빨 수 있는 '먹을 것'이니, 바로 이러한 의미가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인 것이다. 우리가 비록 현재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이미 이루어져 있고 엄연한 실질적 모습 그대로이므로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로서, 우리의 현재 위치가 거듭되는 설명이지만 이 세상에서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할(히 13:5/딤전 6:8) 오직 일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 어떤 의미로든 삶의 낙을 향유하는 위치가 아님을 명시하는 것이 이 주님 가르치시는 기도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보내심을 받아 시키는 대로 일하는 자로서 그 날 하루하루 먹으면 족하지 남은 것을 쌓아두고 재어두어 부유함을 자랑하는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더불어 여기서 강조하게 되는 의미는 저주 받은 죽은 자로서의 인생은 내일이 없다는 것이다. 내일 죽을지 심지어 오늘 이 시간 후의 일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쓸 것을 구하는 것 이상으로 합리적인 구함은 없는 것이다. 즉 내일이 없는 인생의 비극적 실상을 끝까지 주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인생. 오늘 이 시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만이 확실한 것이 현재의 인생의 현주소다. 앞서의 설명대로 이것은 삶의 낙을 누리는 차원이  아니라 일하는 차원이다. 오늘 몫으로 할 일에 오늘로써 충실을 기하는 것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구함이다. 물론 이 죄 용서를 비는 것은 이전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죄를 거듭거듭 용서해 주시기를 구함이 아니다. 이미 그 죄는 다 용서 받은 의미가 우리의 세례 받음이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는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다"(요일 5:16,17) 함과 같이 이럴 경우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원래 "우리"로써 시작한 기도이고 "우리"로써 마치는 것이니 '나'라는 개념은 여기에 없다. 따라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구하는 성격의 기도일 수가 없다. 나로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확고한 결의 속에서 시작한 삶이므로(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벧전 4:1) "우리" 속의 내 이웃을 위해 구함이다. 물론 나라고 해서 절대로 죄를 짓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할 처지는 아니니 이 경우 다른 형제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 이 기도를 드릴 때는 내 이웃(형제들)의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드리되 반드시  그렇게 용서해주시는 법질서를 따라 구함이니 즉 내 스스로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때에 한해서 베풀어 주시는 용서이므로(마 18:35) 그런 이웃이 그와 같이 먼저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다니엘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때 자기를 포함해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한 것이 그러한 제사장적인 기도의 예(例)이다. 자기 자신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죄를 범하지 않기로 한 의지의 사람 다니엘이 "우리는 죄인입니다" 한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건져 주시기를" 구함도 역시 같은 성격 즉 제사장으로서의 기원이다. 물론 이와 같이 기도하면 그 우리 속에 기도하는 나 자신도 포함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 스스로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는 철칙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가르치신 기도도 "우리"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내가 범죄하였음을 뒤미쳐 뒤늦게 깨달았을 때는 당연히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버리는 것이요 그래서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것도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의 죄를 뉘우치고 버린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 나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는 아닌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 몫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나의 몫은 오직 회개하여 죄를 버림이다. 물론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는 줄 내가 믿기 때문에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은 확신 속의 기도라야 함을 나타냄이니 이 믿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드러나듯이 세상 영광과 권세가 마귀 사단에게 넘겨진 상태다(눅 4:4-7). 이런 현실 앞에서 그와 같은 변함없는 믿음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믿음과 동시에 우리의 결의를 다시 한번 더 다짐하는 대목이기도 한 것은 이런 마귀에게 속한 세상(요 18:36)을 사랑하지 않고 여기서의 삶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한 때문이다.

왜 이런 점이 반복되어 강조될 필요가 있느냐  하면 많은 사람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이 세상 삶을 사랑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비극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서도(요 12:25) 구원은 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열의 아홉은 되는 오늘날의 실태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경고하시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거짓말을 더 믿는 것이 에덴낙원의 아담 당시나 오늘날이나 일관된 실로 괴이한 "역사의 되풀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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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할 때에

(마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위선자들처럼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이미 그 원하는 것을 받은 것이다. (마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 6:18) 이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이다. (사람에게 나타내기 위해 했으므로 그 목적한 대로 즉 "하나님 앞에 경건하구나" 하고 사람들이 인정해주었으니 "이미 그 원하는 것을 받았다" 하신 것ㅡ註)

재물에 대하여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寶物)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녹이 슬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한다.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한다.[(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다]. (마 6:21)(눅 12:34) 네 보물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누가의 기록을 보아도 이 등불에 관한 언급이 두 번 나온다. 같은 내용도 여러 번 주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치 한 자리에서 모든 말씀을 하신 것처럼 해서 정리했는데 이는 비슷한 내용은 한데 모아 그 표현에 따른 내용의 본질을 음미하고자 함이다-註).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重)히 여기며 저를 경(輕)히 여김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
하여 섬기지 못한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 12:22)(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 12: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눅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나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기르시는 것이니 너희는 새보다(이것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눅 12:25)(마 6:27)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눅 12: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눅 12:27)(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백합화를(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한다(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한다).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 (눅 12:28)(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 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9)(마 6:31) 그러므로 너희는 염려하여 말하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여 찾지 말며 근심(의심)하지도 말라. (눅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마 6:32) 이는 다 이방인(불신자)들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신다. (눅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마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 (눅 12:32) 적은 무리들아(Little flock),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눅 6:39)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와 선생

(눅 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이는 그 선생과 같을 것이다.

"네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마 7:3)(눅 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한식(韓式) 가옥에서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건너지른 나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눅 6:42)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그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5) 위선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분명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뺄 것이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pearls)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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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註-믿지 않는 사람들을 개나 돼지로 비하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과 짐승의 차이처럼 전혀 해당이 되지 않고 상관이 없는 사실을 강조하심이다. 그러면 "너희를 찢고 상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받아 믿어 거룩하게 되지 않으면 그 반대가 되어 실질적으로 복음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에 원수가 되는 사이비, 가짜, 세상 종교가 되고 그런 종교인으로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禮, 예법)"(요 16:2)인 줄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받는 것이 되지 않고 구원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 없는 개나 돼지에 전달하는 모양새가 되어 정작 구원은 시키지 못하고 종교인만 만들게 되는가 하면, 자기 부인의 복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자아중심의 제자들이 이를 곡해하여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는가?" 하고 많이 물러가고 다시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게 될 때 "아무나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배운 사람 곧 아버지께서 이끄는 자가 내게 오는 것이다"(6:45,65) 하심과 같이, 죄인임을 자각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다짐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인데도, 덮어놓고 "믿으면 영생한다"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싸구려로 남발하는 경우다.

무엇을 아버지에게서 배우는 것인가 할 때, 이 세상의 죽음의 처참한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여 스스로의 죽은 자 되어 있는 사실과 사단에게 속박되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무서운 현실을 자각하는 것을 말함이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자기 부인이 아니라 더 심하다고 할 말씀이 있더라도 감히 물러갈 생각을 못하고 베드로처럼 "생명의 말씀이 계시니 누구에게 우리가 가겠습니까"(:68)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먼저 깨우쳐 주어 회개하도록 인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상태에서 영생하는 복음을 전달함으로써 "믿기만 하면 되고 선물로 거저 받아 챙기기만 하면 된다"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수박 겉 핥기로 말할 때(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모조품인데도), 구원받음은 고사하고 더 완고하고 회개하기가 힘든 종교인(소위 기독교인)으로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네는 구원 받았다고 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거룩함을 강조하고 자기 부인을 역설하는 등의)을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그런 세상 종교에 열심일 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가장 선봉에 나서서 방해하고 교회를 탄압하는 일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교회를 "찢어 상하게 하는" 일에 앞장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의를 주시고 경고하시는 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되 정확하게 알아 정확하게 전달하라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자녀가 먹을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막 7:26) 하심이 바로 이 뜻이다.


모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앞에서의 이 세상의 참상, 죄와 사망에 얽매여 있는 인간의 철저한 무기력성을 절감하고 배우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또는 그런 유형에 해당하는 모든 세상 만민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모세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가리키는 데에 그 설정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롬 3:20),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듣기 이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각자의 죽음의 상태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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