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2일 목요일

통합 복음 (12)





이런 희귀한 역사적 교훈을 우리 민족은 지니고 있는데 이를 어찌 외면하랴. 외면한다면 가장 소중한 자산 하나를 상실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빛을 보지 못하는 의로운 생각과 결단의 삶이 결국 어떤 결과를 이루어내고야 마는지 온 세계가 실로 경청해야 할 인류 최대의 교훈적 유산의 하나다. 공동체 의식에서 우러나오는 결과가 이렇게 가시적으로 극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일반 인생사이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은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모습을 똑똑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특전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의롭게 살려 하고 그 소신대로 사는 사람은 대개 백이면 백 이름없이 자취없이 소리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통례다. 이렇게 명확하게 그 결과로써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이공 역시 무명의 한 말단 관리로서 세상이 말하는 대로 "불우한" 생애를 마치고 복 없는(복이 태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또 우직하기만 하고 고집스럽기만 하고 세상 물정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주위의 핀잔 속에서 그냥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을 터이다. 그렇다고 임진왜란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 민족적 참극 속에서도 이공과 같은 인물이 혜성처럼 나타난 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뿐이다.

이공이 평소에 나타낸 멸사봉공의 정신은 주위에서 아무도 알아 주는 이 없이 자기 신상에 갖가지 불이익만 낳았었다. 알아 주는 몇몇 지기(知己)도 그런 큰 동량 감이 썩어가는 것을 보는 안타까움만 토로하며 한숨만 내리 쉴 뿐 세태만 탓할 뿐이었다. 그러나 미증유의 국난이 그를 드러내 준 것이다. 모두가 몸을 사리고 갈팡질팡 하여 쥐 죽은 듯 했을 때 이순신의 그 정신만이 홀로 우뚝 서서 나라를 혼자 힘으로 건진 것이다.

이공이 그렇게 막지 않았다면 명나라 구원병이 무슨 소용이랴. 한반도를 한 입에 삼켜 기세 등등한 왜군은 마치 불길에 기름 붓는 격이 되어 더욱 거세진 병력이 되었을 것이니 이를 막느라 전전긍긍하다가 손도 써보지 못한 채 패망했거나 아니면 전란에 엉망진창이 되어 지리멸렬했을 것이다. 바닷길을 막아 주었기에 한반도도 명나라 중원 천지도 명맥을 유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목요연하게 평소에 괄세 받던 올바른 삶의 올바른 정신이 빚어낸 이렇게 혁혁한 결실과 그 당연한 결말을 만천하에 입증해 보인 실례는 동서고금을 통해 없다. 있었다면 어느 기록에서든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그 유례를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하기에 그렇다. 

그러나 동양 3국에 연한 일대 전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대주의에 찌듦으로 인한 전적으로 우리 한민족 탓이다. 단지 일개 무장으로서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그 일만을 두고 구국영웅이라고 하는 정도에 그칠 뿐, 사람 삶의 가장 근본을 이루는 이 공동체의식이 거둔 실효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나'원균으로 대표되고 상징되는 인간 보편화된 자아중심의 삶과 대조되게 부각되어 있다는 점에서의 그 막중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 교훈의 실체가 완전히 외면당한 채 지금까지 묻혀 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현실은 이렇다.

이렇게 이순신 정신을 강조하고 이공의 삶을 기리는 것은 우리 복음의 내용이 바로 그런 실질적 내용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즉 한 몸 의식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에서 그 특징을 이루는 주인의식을 성경이 강조함이다. 그런 정신이 인류를 살리고 유지해내는 바로 그 원동력임을 증명해 줌이다. 반면 자아중심이 평소에는 그냥 예삿일로 취급되지만 일조유사시 얼마나 치명적인 해독의 원흉이 되는지 이를 넉넉히 입증해 줌이다. 다시 말해 죄의 속성이요 결말이다.

그리고 의로운 삶이 절대로 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평범한 현실을 또한 일깨워 주고 있다. 왜냐면 이공은 전쟁 전에는 그의 올곧은 성격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품으로 인해 상관의 미움을 받아 세상은 가는 곳마다 이공의 진로를 가로막은 장애물이 되어 준 것이다. 그래서 강등되고 좌천되기를 거듭하여 현감(縣監) 직이라는 미관말직에 머물러 있었던 것. 성경은 한 몸됨의 이 공동체 의식에서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함께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이웃을 사랑하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런 한 몸으로서의 체제로 이루어진 삶이 법도를 벗어나 자아중심으로 살면 즉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롬 8:13)는 사실로써 경고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과 나란히 이 살아 있는 역사적 교훈을 항상 널리 릴 책임이 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실질적인 효과가 이 이공과 '나'원균의 역사적 교훈과 결부되어 막중한 의미를 드러내 주고 있음이다. 평시에는 이공과 같은 인물은 빛을 보지 못하고 가족 고생시키는 못난 남편, 융통성 없는 아버지로 홀대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은혜의 때 이 구원의 날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환영을 받지 못하나 그러나 그 중에도 믿는 사람은 때가 이르면 이공의 국난 극복과 같은 혁혁한 결말을 보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현재는 자아중심 일색의 이 세상에서 나그네 길의 고달픔을 외면할 수 없는 것.

당시 관료들이 출장을 가면 그 비용으로 양곡이 지급되었는데 이공은 용무를 다 마치고 돌아오면 반드시 그 남은 양곡을 그것이 얼마가 되든 간에 반환했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몹시 좁쌀 같은 쩨쩨함이라고 손가락질하겠으나 바로 그 "쩨쩨함", 그 철저한 공사(公私)에 대한 분별이 국난에서 구국영웅이 되게 한 원동력이었던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공은 키는 크고 힘은 장사였으나 결코 호걸풍이 아니고 학자풍이었다고 어릴 때부터 한 이웃에서 자라 잘 알던 유성룡이 말했었다.

세상은 그를 일개 무장(武將)으로만 알고 있으나 인간 정신의 고창자(高唱者), 그리고 진정한 인간 삶의 실천인(實踐人) 그리고 그 승리자로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족적으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 같은 선진국 정도라면 국내외로 널리 홍보하여 이미 온 세계가 다 아는 위인으로 추앙되고 있었을 일이다. 이웃 일본만 해도 아는 사람은 그를 세계적인 위인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동족인 이 나라 사람들은 사대주의에 젖은 약소국 근성에 사로잡혀 무조건 외국 것에 부화뇌동하기에만 정신이 없으니 선진문명국 문턱에 오르기는 항상 요원하기만 하다. 그 정신적 바탕이 무너져 가는데 물질적으로 부유하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고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은 이런 '나'원균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그런 자아중심적인 삶을 청산하고 이순신 정신과 같은 멸사봉공의 자세로 임하라는 그 메시지이다. 인간답게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올바르게 살고 선하게 사는 것이 바로 한 몸 구조로서의 공동체 의식에서 주인 의식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그런 사람들만의 이상 세계가 현실로 구현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우리는 이제 그 역군(役軍)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원균 식으로 살면 필멸이라고 경고하기를 아울러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 결말이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이다. '나'원균의 자아중심에서 그 해와 악을 우리는 이 역사적 교훈을 통해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중심은 번번이 하는 일마다 공적(公敵)의 짓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공과 같이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구원과는 별개다.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왜 인간이 멸망의 비운에 처해 있는가, 왜 범죄하는가, 그 원인을 '나'원균의 행동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이다. 자아중심으로 나가지 않고 한 몸 의식, '우리' 의식으로 나가는 그것이 "육신대로 살지"(롬 8:13) 않는 것이요 자기 부인의 기본 의미라는 뜻이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마 3:8). 요한이 이 열매를 가리켜 아주 구체적으로 예거한 바 있다(눅 3:10-14).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 바로 그런 의를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여 행하는 법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순신 정신으로 나타난 그 결과는 이 세상에서의 이야기다. 바로 그런 이순신 정신을 구현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이 바로 그런 정신과 같은 본질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의 핵심은 한 몸 의식 곧 공동체 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을 때 어떤 이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냐 하고 여쭈니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바로 그 예화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공동체 의식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불완전한 것이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비로소 공동체 의식 즉 한 몸의 이치로서의 삶의 의미로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것임에도 그것이 인간 삶에 적용될 때는 이공의 경우처럼 크나큰 위력을 나타낸다는 그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다.

자기 부인이 어떤 결과로 나타나느냐 할 때 바로 이공으로 대표되는 그런 현저한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義)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한 몸 의식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이다. 자아중심을 왜 미워하느냐 할 때 '나'원균으로 나타난 결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불의를 한사코 미워하는 것이다(히 1:9). 죄가 그런 자아중심의 속성이기 때문. 자신도 망하게 하고 주변의 숱한 인명들을 손상시키고 멸절시키는 것이니, 에덴낙원에서의 사단의 살인행위(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 그리고 아벨에 대한 가인의 살인행위가 그 증거다.

한 사람이 들어 나라가 망할 뻔했고 한 사람이 들어 나라를 건졌다는 사실은 이공과 '나'원균이 당시 위치를 바꾸었다고 가상해보면 드러나는 일이다. 이공이 그 요긴한 길목인 국가 관문을 지켜 가령 경상 우수사로 있었다면 이공은 사력을 다해 막아 섰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전라좌우 수사들이 병력을 거느리고 내원(來援)했을 것이고 사태는 급진전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니, 처음부터 일본은 전쟁 전에 우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 경상우수영의 철통 같은 방비 태세에 감히 내침(來侵)해 올 야욕을 품는 것조차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이 세계, 이 세상 나라는 인간 삶의 터전이 아니다. 영계에 속한 천국이 인생 본연의 삶의 터전이다. 인간은 원래 영계(초자연계)에 속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 인간 세상이 자연계에 속한 사실도 그러하거니와 사람 삶의 법칙대로 운영이 되지 않는 세계다. 그러므로 죄 많은 이 세상은 멸망이 필지이다. 따라서 이 법질서를 따라 살지 않음을 모든 인생은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생명의 법질서를 어기고 있었던 것이 이 자연계에서의 인간 삶인데, 이 법질서 곧 생명과 영원한 행복의 원리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도 이제까지 그렇게 할 힘이 없었던 것.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세상에 오시어 우리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 모두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요 3:6)을 통한 새 창조를 받음으로 능히 지킬 수 있게 됨으로 인하여 회개를 명하시는 것이다(행 17:30). 그리스도 없는 이 자연계에서의 삶은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닌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의 동물적인 삶이므로 이런 환경을 청산 종식시키고 자연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초자연계 몸의 초자연계 삶의 나라가 천국(heavenly kingdom)이요, 현재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 죽음과 멸망뿐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품 속으로 돌아온 새 생명의 삶이므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자연계(the kingdom of the nature)에 속한 지금까지의 인간 삶은 사람으로서는 타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 세상 신(神)에게 속아 그에게 종속된 것이므로 증오할 만한 것임이 드러나는 것. 고로 이 세상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상이고 이상적인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한없는 어리석음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상적인 인간 삶은 생명의 법질서에로의 복귀이다. 지금까지의 죽음과 멸망이 그 종착점인 동물적 생활 양식을 미련없이 버려야 함이니 곧 자아중심이다.

이와 대칭이 되고 반대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중심이요 이웃 중심이다. 그래서 첫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니 내 이웃이 나와 별개가 아니라 다 같은 사랑스러우신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입은 똑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나의 분신(分身) 곧 나의 몸의 한 지체 격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기 전의 이공의 전도(前途)가 밝지 못했던 것은 악한 소인배들이 이공의 진로를 따라가며 사사건건 막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공을 미워한 것은 전날 이공의 상관이었을 때 부정 부당한 청탁을 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한데 대한 사감(私憾)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공이 자기 신념대로 일관되게 행동한 것이 상찬의 대상은 못될망정 도리어 그 앞날의 장애가 되었으니 이것이 세상의 특성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자아중심을 버리고 공동체 의식으로 살려고 하랴. 이공과 같은 유형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여하한 세파도 뚫고 나아갈 여간 큰 결심과 배포가 아니고는 한마디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의식으로 일궈낸 단 물은 빨기에 혈안이 되고 또 그 자체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만 정작 자기도 그런 정신으로 살라고 하면 예외없이 몸을 사린다. 거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다. 이것이 세상이 악하고 자아중심 일색이라는 증거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는다"(잠 29:27)고 한 그대로다. 이와 같이 세속적인 삶에서도 옳음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할진대 하물며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 영합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경청한 다음의 필연적 결론으로서 "구원 받는 사람이 적습니까" 하고 여쭌데 대하여 대답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 하신 것이다. 자아중심의 세상에 결코 영합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가르치면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상식 중의 상식에 속한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은 에덴낙원에서 사단이 아담 부부를 속일 때처럼(이것이 모든 거짓과 속임수의 시작이자 표본이다) 반드시 현재 내가 그 말을 따르게 되면 상당한 유익이 됨을 강조하는 듣기에 그럴싸한 것을 말하는 법이다.

인생 삶을 마감한 후에 일어날 일을 가지고 거짓말을 지어내지 않는 법이다. 성경의 가르침 즉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등지는 것뿐이다. 죽고 나서야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모두 생각하는 판인데 죽고 나서 이렇다저렇다 식으로 아무리 거짓말해 보아야 그것이 먹혀들 리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나가는 것이 오늘날의 소위 "기독교"다. 잘 믿으면 축복받아 혹은 십일조(수입의 1/10)를 내면 이 세상에서 잘 산다고 가르치지를 않나,

기독교가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라고 가르치는 것이니까 당연히 세상을 지배하고 지도해야 한다는 자기 멋대로의 생각으로 이제까지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해 오지를 않았나, 모두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면서 지금까지 성업 중에 있으니 이야말로 속임수요 거짓이다. 이런 인위적인 종교로서의 소위 "기독교(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대로의)"를 사실 그대로 거짓말이요 속임수라고 하면 맞는 말이나, 그런 내용으로는 비판하지 않고 이들 사이비가 표방하는 성경 자체를 거짓이고 속임수라 착각하니 잘못해도 한참 잘못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탄의 계략이다.

그가 이 세상이 전권을 쥔 이 세상 왕이요 신(神)인 이상, 이 세상 인간들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일을 하는 것쯤이야 마귀에게는 식은 죽 먹기다. 기독교의 가짜를 만들어 얼마든지 흥왕(興旺)시킬 수 있고 진짜 위에 군림하게 할 수 있다. 성경의 가르침 자체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항상 소수로서 약한 자의 위치에 있어 각 시대마다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다음에야 더 할 말이 무엇이야

이 자연계에 속한 현재의 세상이 위의 설명처럼 생명의 법질서에서 아주 동떨어져 정반대의 양식으로 움직이고 있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이 그 특색이고 이를 지배하는 것이 악령 곧 인간의 원수인 사단이므로(고후 4:4)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다. 고로 이 영광스러운 새 창조의 재(再) 출생은 이 악령들의 세력과의 전투 개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한마디로 인류 역사는 인간과 사단간의 전쟁 상황이다(창 3:15).

그러나 승패가 이미 결정 난 싸움으로서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는 담대하라" 하셨다(요 16:33). 이 "이김"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기정 사실화한 자기 부인의 바탕 위에서만 믿고 누릴 수 있는 승리의 환희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 투신하지 않는 이에게는 이 세상 신과의 싸움이 있을 수 없는 여전히 그의 노예가 되어 있음이요 따라서 그리스도의 승리와는 무관하기 때문.

고로 이 "천국"이라는 표현으로써, 이 세상의 자연법칙에 예속된 현재의 인간 삶을 단죄(斷罪)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세상을 대체하는 "천국' 개념이 되는 까닭이다. 이는 곧 우리 육체를 단죄하셨다는 사실과도 같은 내용이 된다(롬 8:3). 바로 이 사실을,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강력히 뒷받침하시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위, 삶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뉘우쳐 새롭게 바꾸지 않는 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력하게 주지시키고 있음이다.

위쪽으로

인간 스스로 불러들인 죽음의 운명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음에 이르자 하나님의 인간 구원이 필연적이게 되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생명을 부여하시고 창조하시어 생명체로 건재하도록 만드셨는데 인간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으니 이는 애초 창조의 목적이 좌초되었음을 의미한다. 왜냐면 한번 죽으면 그것을 다시 되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원칙에서 볼 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이미 무시한 까닭에, 하나님의 한번 입 밖에 내신 말씀은 그것이 곧 원리이요 법칙이므로 이 죽음의 현실은 영원히 변경될 수가 없어 그래서 인간은 죽음에서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새 창조의 필요성

그러므로 새 창조밖에 없다. 첫 창조는 결딴 나 버렸고 전연 새롭게 즉 이전 것과는 별도로 인간을 창조하시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이 도저히 구원될 수가 없는 것이니 이유는 위에서 밝힌 그대로다. 즉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시는데 그것을 새로운 창조로 하신다는 것이니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하나님의 이 구원을 학수고대하면서도 그 궁금증은 더해 갔다. 때가 이르러야 그 비밀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그 때를 인간은 기다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기간도 못참아 급속도로 부패 타락해 갔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나타나는 기간이 늦어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예상과는 아주 빗나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고 그 자유 선택을 보장해 주셨는데 그 자유를 인간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듯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자유로써 조물주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악용, 오용된 것이다.

인간을 위해 창조된 영물(靈物)들 역시 그런 경향은 인간과 나을 바 없었다. 적지 않은 악령들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이 세상 신(神) 곧 마귀(사단)이다. 더구나 이 인간세계에 마귀가 군림하여 인간들을 조종하다보니 인간들의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마귀가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행위와 더불어 아담 스스로 불러들인 화근이었으므로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한은 이 악순환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야 이런 "있어서는 안될" 모든 것이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정상 세계로 복귀하게 되는 것. 그러면 왜 그 정상 상태로 돌아가지 않느냐 하면 구원 얻어야 할 인생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구원 얻을 인간이 없어질 그 때에 "있어서는 안될" 이런 세상은 참으로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것이 없는 세계로 정착하게 되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노아의 홍수 직전까지도 사람들이 집 짓고 결혼하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도 그러할 것이니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미리 택하심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즉 미리 아심으로써 미리 택하시지 않으면 그 후 앞으로 태어날 인생들 중에 혹 구원 얻는 사람도 있을 터인즉 그리스도의 재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나, 누가 구원 얻을지 미리부터 아시므로 이제 후로는 단 한 사람도 믿고 구원 얻을 사람이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 때 세상에 다시 오실 수 있음이다.

그리스도의 미리 택정(擇定)하심은 이런 사실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다 회개하여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새 생명에 들어오기를 바라시나 인간들이 회개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회개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어야 하는 까닭에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만을 찾으시다보니 또 그런 사람만이 영생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이런 사람은 강제로 억지로 만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 의지를 따라 그렇게 회개하여 하나님의 법질서로 되돌아오는 것을 그 스스로 기뻐서 해야 하므로 이렇게 지체된다면 지체되는 것이다.

메시아 약속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에게 그리고 인간 세계에 이 구원자(救援者) 곧 메시아의 출현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분은 하나님이시고 또한 인간이시라는 사실도 그 선지자들을 통해 밝혀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둔하여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 알려고 해도 알아듣지를 못함이 아니라 알려고 하지를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이다. 왜냐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의 마음이 일반적으로 악으로 줄달음질 쳤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찌 하든 살고자 하는 자아중심의 마음으로 미련해진 것이다.

자기의 죽음의 실상을 깊이 생각하려 하는 것보다 우선 눈 앞의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꼴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를 살피실 때 어느 것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었다. 거의 모조리 제각기 자기 속셈만 차리려 하고 그래서 죄와 악을 물 마시듯, 밥 먹듯이 하고 있었던 것. 인간들이 아담 부부로부터 태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일어난 사건이 살인행위였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입증된다.

자아중심이다보니 자기보다 잘되는 이웃을 못참고 못봐 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시기심이 발동하여 자기 동생을 죽인 가인의 행사가 나온 것이다. 모두 이렇게 되다가는 약속하신 대로 인류의 구원자가 때가 되어 나타나시더라도 그 분이 과연 그 약속하신 분인가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도 없게 될 판이었다. 그 분이심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분을 인간들이 따르고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분이 나타나시더라도 인간 죄인처럼 고난 받으시는 분으로 나타나실 터이니 더욱 그러할 터이다. 누가 그런 모습의 인물을 인간 구원의 주체로서 여기겠는가. 물론 초자연적인 능력과 위세를 과시하면서 나타나신다면 모든 인간이 하나 같이 그런 분을 하나님의 권위로 쉽사리 인정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누가 또 그런 분을 죽이려 하겠는가. 우리 위해 죽으시려고 오시는 것인데, 그렇게 되어도 역시 일은 되지 않는다. 인생을 새로 창조하실 수가 없는 일이 되니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내 형상으로 오셔야 하는 메시아

위풍 당당하게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로 나타나시게 되어 있는 메시아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오시면 인간 구원의 새 창조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의미도 없게 된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시면야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누구나 다 이를 구세주로 인식이야 하겠지만 그리 되면 우리의 구원이 불가능한 것이니, 죽는 운명의 죄인 곧 나의 모습으로 오셔야 되겠기 때문이다. 허나 누가 그런 저주 받은 죄인이나 걸인(乞人) 풍의 한 인간의 낮고 비참하고 약하디 약한 저주 받은 죄인으로서의 모습을 반기며 하나님의 구원자로 영접해 들이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곧장 부패하기에 바쁜 인간들의 무리 중에서도 그래도 굳건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는 한 개인을 찾으셔야 했다. 그래서 그 개인으로 하여금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그 후손을 잘 교육시켜 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할 뿐 아니라, 먼 훗일에 이르러서도 장차 오실 메시아를 모든 인간들을 대표해서 인지할 수 있도록 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택하신 것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썩 좋은 결과가 되지를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자 한 사람이야 아무리 잘 믿고 훌륭하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한다 하더라도 그 후손이 자기가 아닌 이상 자기처럼 그렇게 믿음이 있으리라는 보증은 되지 못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그래서 역사가 생기고 하면 그것이 전통이 되어 메시아 오시기까지만이라도 지탱해 주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신 것이다.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

그 '아브라함'의 후손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이 이른바 하나님의 선민(選民)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 중에서 편파적으로 한 민족만을 편애하셔서 선민으로 내세워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 같이 부패 타락의 일로로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 중의 한 민족이라도 대표적으로 사전(事前) 교육시키셔서 나중에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나타나실 때 바로 이 분이 그 분이라고 인정할 수 있도록 하심이 그 유일하신 목적이었던 것.

그러나 유의할 것은 이렇게 선민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별명으로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것) 민족의 그 동안의 역사는, 그 선민(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란 명칭답게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따르게 될 모든 사람으로써 구성된 바로 그 "하나님의 교회"를 이룸이 되고 바로 그런 의미의 상징성을 띠게 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그 기나긴 역사로서 점철된 모든 사건과 사례들은 장차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경고와 교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구약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딤후 3:16,17)이라 했고,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롬 15:4)이라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 하였다. 베드로 역시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0,21)이라 했다.

고로, 역대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우리에게 임하게 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미리 나타낸 일종의 예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두 신약성경을 말함이 아니라 구약 성경 곧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으로 엮어진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여기서 바울이 쓴 편지 글 역시 성경이라 인정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4복음서 및 사도들의 여러 서신 그리고 요한의 계시록이 신약성경을 구성하고 있는데, 구약성경의 모세 율법은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

앞에서 인간을 하나님께서 교육시킨다는 말을 했거니와 다른 교육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되었다는 것, 그리고 왜 죄인이 되어 있는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래야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모든 말씀을 알아 들어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바 새 창조가 가능해지는 것이요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모세의 율법이다. 그런데 이 모세의 율법이 세워지기 전에 그 출발점으로 시작된 것이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모세 율법이 그 이후 대대로 지켜지게 될 역사적 시발점이 된다.

그러한 근본 의의를 지니기 때문에 그 날이 있게 되는 달을 그 해의 첫 달 즉 한 해가 시작되는 달로 정했다(이 역산법(曆算法)을 통상 '종교력'이라 하여 '유대'인의 '민간력'과 구분되는데 유월절이 드는 종교력 1월은 민간력('유대'인의 행정, 사업, 일상생활에 적용) 7월에 해당된다. 물론 우리 역법과도 다르며 우리의 3,4월에 대략 맞춰진다. 그 날이 마침 만물이 한창 무르익어 소생하기 시작하는 봄이 풍만한 4월경이 된다. 이래서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스라엘'은 광야 길로 돌아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도중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고 "모세 율법"으로 통칭되는 각종 법과 규례가 확립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를 어기지 않고 준수할 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약속하시게 된다. 이것이 옛 언약(言約) 곧 구약(舊約, Old Testament)으로 통칭되는 구약 성경의 내용이다. 이에 반해 신약(新約) 즉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새롭게 새 차원에서 즉 새 창조의 의미로 주시는 약속 말씀이시니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그 죽으시면서 흘리신 피로 세우신 새 약속이다(눅 22:20). 이 내용을 수록한 것이 신약성경(New Testament)이니 이전 것과는 다른 새 언약이라는 의미이다.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차이는 옛 것은 새 것을 위한 즉 새 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그림자의 의미로서 상징적이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옛 것을 기반으로 해서 나타난 실체가 새 언약 곧 본격적으로 우리가 지키게 되어 있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된다. 구약 따로 신약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한 준비 혹은 보조 역할로서 즉 사전 교육 차원에서의 구약이다. 그런즉 구약은 신약으로 대체되는 것이고 더 이상 모세 율법은 그 효용(效用)이 지속되지 않는다.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 편지글에서 강조하여 변론하고 있는바 "율법"이란 것이 바로 이 구약의 내용 즉 모세 율법을 대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대체적이라 함은 창조 당시부터 시작해서 영원히 확립되는 하나님의 율법을 강조하여 설명한 대목도 있기 때문인데 이를 혼동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라고 하는 언급이다.

이 영원한 계명은 아들께서도 친히 지키시는 것으로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심과 같다. 이 가장 핵심이 되는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켜 "온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마 22:40)이라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는 차원에서는 구약 시대나 오늘날 우리 신약 시대나 아무 차이가 없는 것. 당시 '이스라엘'이 믿지 않음으로써 타락하고 멸망에 들어간 것과 같이 오늘날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같은 결과를 낳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사실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오늘날 우리들에 대한 경고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1)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명백히 하신 것처럼 율법이 폐기되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7,18) 하신 그대로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함은 "그리스도를 믿음이 없이"라는 단서가 붙는 내용이다. 왜냐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고 전제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제는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통하는-고전 9:21)을 행하는 것이 선(善)이요 의(義)이다. 따라서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으로 보답된다"(롬 2:7)고 바울 사도는 명시했다. 그 앞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6) 했으니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대로 "믿음 여부"가 아니라 "행함의 유무"로써 결정되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갚으신다"(:8) 했는데, 이 "당을 짓는다"는 것은 영역 KJV의 "contentious"와 같은 의미로서 오역이다. 대부분의 영역(Biblegateway)은 자아중심 곧 이기주의(selfishness, self-seeking)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9) 했으니 이 선언을 하면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차별하지 않음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다시 더 강조하기를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10)고 했다.

바울 사도는 다른 데에서고 같은 내용으로 강조했으니,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는 것으로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5:9-11) 했다. 이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이다"(요 5:29) 하심과 같다.

이 말씀들을 통해서도 금방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소위 "복음" 이해는 전연 성경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 구원과 결부시켜서는 일체의 행위, 행함을 배제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배도(背道)"의 하나이다(살후 2:3). 이는 전가(轉嫁, imputation) 즉 우리의 죄과를 그리스도에게 넘겨 씌운다는 의미의 반(反)성경적 교리에서 주로 기인하는 것이다. 이른바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죽으심이니 이 둘의 의미상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있는 고로 오직 말씀을 믿고 믿지 않음으로 결정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하였고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8) 한 것이다. 이 믿음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 곧 행함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의미이다. 왜냐면 사랑이기 때문이니 사랑은 말만의 사랑은 통하지 않고 그 사랑의 마음에 상응하는 사랑이 행동이 필수인 것이다.

때문에 거듭거듭 강조하신 것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 14:15,21,23,24/15:10)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고전 7:19/요일 2:3,4/계 12:17)라 한 것이다. "입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9) 하였고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10) 한 대로, 말씀을 믿는 내부적 역사(役事)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서 입으로 시인하여 인정하고 그 모든 말씀대로 행하는 외부적 표현과 불가분이다.

주(主)라 함은 말 그대로 주인, 소유주의 뜻이다. 즉 나를 소유하는 주인이요 상전(上典)이니 종된 나로서는 그 한마디 한마디에 절대적 순종이 요구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알아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신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율법, 계명, 뜻,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가능해진다는 바로 그러한 뜻이 되는 것.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 5:19) 하심이 바로 그 뜻이다.

앞에서 우리는 설명하기를 영원히 변함없는 삶(영생)의 체제는 한 몸 구조에 있다고 했거니와 모름지기 몸(의 각 지체)은 머리의 지시를 받들게 되어 있다. 그렇지 못하고 절대 복종하지 않을 때면 그는 한 몸의 조직으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다. 생명의 조직인데 이로부터 분리되니 자연적으로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 부인 아닌 자아중심 곧 죄의 대가는 죽음인 것이다(롬 6:23/약 1:15). 이제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고 나를 비롯한 각 사람의 주인, 소유주로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니 나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율법" 곧 "새 계명"(요 13:34)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 머리로서 몸의 각 지체에게 내리시는 지시의 기본이기 때문.

원래 "온 선지자와 율법의 총 강령"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곧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을 말함이다. 머리도 몸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니 자기 부인이다. 이 하나님의 율법을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리스도 없이 지키려 하니 지키지도 못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이 한 몸의 구조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이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이 처음부터의 하나님 율법의 핵심이다. 그런데 영물들 중에 사단을 위시하여 일부가 이에 불복하게 됨으로써 범죄가 구성되고 인간 아담이 이를 따름으로써 인간 세상에 죽음이 오게 된 것이다(롬 5:12).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한 몸 구조에서 벗어나 죽은 자가 되었으니 이제 산 자가 되려면 새 체제가 구성되지 않으면 안되고 바로 그 새 체제가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는 구조이다. 이전에는 이런 체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새 창조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몸(의 각 지체)으로서 머리를 지시를 따르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 우리 구원의 골자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은 범죄하기 이전과 똑같이 하나님(머리로서)을 사랑하고 이웃(한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한결같고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새 계명은 여기에 덧붙인 것이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요 13:34)다. 얼핏 보기에는 이전보다 더 엄정 엄격하다. 왜냐면 이 말씀의 뜻은 자기 부인에 터전한 사랑을 요구하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을 않으면 사랑함이 앞에서의 설명처럼 불가능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렇다 뿐이지 실제는 이전과 같은 내용이다. 같은 본질의 내용이지만 워낙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 죽은 자였기 때문에 생명의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구체적으로 상세히 풀어 말씀하시는 것이 이 자기 부인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던가. 자기 자신을 다 바쳐 즉 자기 부인으로써 사랑하신 것이다. 즉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대로 사랑함이다. 삼위일체 원리에서 주종(主從), 대소, 선후 관계가 이것이다. 작은 자와 큰 자와의 관계에서 큰 자는 본을 보이고 작은 자는 이 본을 따르는 관계다. 바로 이 뜻이기 때문에 요한 사도는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것이다. 이로써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서로 위하되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원래의 정상 궤도로 돌아온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으로 낙착된 것이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시범해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곧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고후 5:15/롬 14:7-9)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시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몸된 우리를 위해 사시는 것으로 확고하게 나타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당신 자신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이 믿음은 반드시 그 몸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나 자신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사는 현재의 영원한 삶이다(갈 2:20).

머리 친히 나를 위하시는 터에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필요가 없어서 않는 것이지 강압에 의해 부득불 하는 일이 아니다. 자기 부인을 마치 자기 부정처럼 여기는데 이는 사단이 심어놓은 전형적인 "말씀 혼잡"(고후 2:17)이다. 머리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생명이든 죽음이든 고난이든 안락이든 개의치 않고 오직 머리를 따름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이전의 율법(계명) 지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계명) 지키는 것과의 차이는 전자의 경우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 생명의 법칙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인데 자기 구원 즉 자기 자신을 위함이 되니 죄로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왜냐면 자기 자신을 위함이므로 의롭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의롭게 되려는 데에서는 그럴수록 의에서 구원에서 멀어져 가는 역효과만 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구원 받아 있는 현재의 나 자신으로서는 나의 구원을 위함이 목적이 아니므로(왜냐면 이미 구원되었으니) 오직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 아름다운 이 한 몸 체제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영원한 방법이므로 자진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신바람 나게 행하는 삶의 즐거움 그 자체이다. 남을 위하는 이웃을 위하는 것이므로 보람차기로는 이 이상 가는 것이 없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 삶의 법칙이요 원리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 말이니 먹고 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그 법칙과 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삶의 낙이요 즐거움이기에 그렇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하는 말이 나올 정도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로 그러하다. 이 차이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계명(율법) 지키는 것을 모세의 율법과 혼동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게 만든 것이 다름아닌 사단이다. 그는 원래부터 속이는 자이기 때문이다(계 12:9).

광야 교회

이렇게 모세의 인도를 따라 광야 길로 통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행적을 가리켜 성령 충만하여 스데반은 "광야 교회"라 지칭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상징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유월절 사건은 우리의 새 창조를 나타내고 모세 율법은 이렇게 우리가 새 피조물이 된 다음에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킴, 정상적인 법질서에로의 복귀를 의미하고 상징하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으로 오늘날 이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구애되지 않는 옛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나 그 상징하는 바 의미는 변함이 없다. 그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역시 이미 설명한 대로 새 피조물은 새 법질서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길로 행하기 전 이집트에 있을 때는 모세의 율법이란 것은 없었다. 이집트의 법을 따라 거기 종 살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어 분리되면서 '이스라엘' 고유의 법 체제를 갖춘 것이다. 당연하지만 뿌리째 뒤흔드는 변혁이었다. 우리의 새 피조물로서의 모든 은혜와 특권이 바로 이와 같은 것. 이전에 살던 삶의 사고방식은 절대로 통용되지 못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 그러면 이 새 피조물에 해당되는 생명의 법질서는 무엇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새 계명으로 나타나는바 자기 부인이 그 골자임을 이미 지적했다.

사랑이란 것은 원래부터가 자기 부인을 그 뿌리로 하고 기본 바탕으로 하는 까닭이다. 과거 자아중심의 생활 양식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의 죽음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실이 지니는 의미가 절대적이 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생활이 죄의 뒤범벅이라면 이제 새 피조물된 위치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해 사랑 일색으로 나가는 것이므로 이 생명의 법질서를 사랑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랑이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근간이 되는 것이니 이에 대해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바로 이 같은 생명과 사랑의 법질서의 개략적인 최소한의 맛보기였던 것이다. 자아중심은 자기 스스로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데에 있다. 거기는 하나님도 없고 자기 이웃도 없다. 자기가 우주의 주인이다. 맹랑하고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비극적인 오늘의 현실은 이런 식으로 시종일관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귀속시킨다는 교육이 필요한 것이었고 이에 따라 예컨대 일주 하루 정도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고 수입의 최소 10프로는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떼어놓는 그런 기초적인 학습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생각하면 번문욕례와 같은 이런 모든 것은 요약하면 첫째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둘째는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함에 있는 것을 가르치는 말하자면 유치원 교육이었다.

그러나 워낙 자아중심으로 뭉쳐진 인간이기에 그 구체적인 실천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하게 될 이 내용을 상징하는 갖가지의 제도를 통해서 상기시키고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모든 "믿는" 일에 대하여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처신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이외의 족속 즉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서 멸시하던 이방인들과 나은 점이 하나도 없었음을 구약의 역사가 입증한다.

성경 표현을 빌리면 오히려 그들보다 더 심하게 악을 자행한 것이다. 비유적으로 나타난 상황은 아주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떠난 60만이나 되는 20세 이상의 남자들 가운데 믿음 있어 정작 가나안 땅을 밟은 이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인 겨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뿐이었기 때문. 이런 비극적 실상은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여러 잡다한 민족과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 12 지파(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12 아들로써 나누어진) 중에서 두어 지파만('유대'인들을 가리키는 '유대' 지파와 벤야민 지파이니 제사장 직과 하나님의 성전 일을 맡게 되는 레위 족도 물론 포함) 남겨두고 나머지 10지파가 그와 같은 범죄 타락을 인해 영원히 잘려 나간 것이다. 잘려 나간 채 현재는 그 형적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런 범민족적 특수 교육을 받지 못했던 다른 여러 이방 국가와 하나도 다름 없이 범죄 타락해 버린 것이다.

레위는 본래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하나였으나 성전 일을 맡는 특수 임무를 대대로 물려받아 수행한다 하여 지파로 분류되지 않고 그 대신 요셉의 두 아들이 특별히 열 두 지파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한 지파씩인 다른 형제와는 달리 두 지파를 거느리게 된 것이다. 이 레위 족속이 지파로 분류되지 않고 족속으로 남아 성전 일을 책임지고 있는 것 역시 오늘날의 교회를 더욱 세부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레위 인들을 특별히 그렇게 세우신 이유가 구약 성경에 명시되어 있으니, 즉 당시 첫 유월절 때에(그 때부터 이를 기념하여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했으므로) 주변의 이집트 사람은 그 장자(長子)들이 다 죽었으나(모든 가축의 첫 새끼까지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장자들만은 죽음의 사자가 그대로 통과해 즉 넘어가(출 12:13,27. "유월(逾越)했다"는 것으로 우리말 성경은 번역) 주었던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때 살아남게 된 모든 이스라엘 장자들은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출 12:3)을 각 가정(세대)의 몫으로 한 마리씩 그 날 잡아 그 피를 바르고(:7,22) 그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어린 양으로 인해 그 생명이 구속(출 13:13)되었던 것이다.

가축도 그 첫 새끼는 이와 같이 함으로써 이를 "구속하였다(to redeem)" 했으니 사람의 장자와 마찬가지로 그 날 죽지 않고 생명을 보전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들(이스라엘의 장자들과 가축들)을 모두 "하나님의 것(소유)"이라 하셨다. 이 출애급기 대목에 보면 하나님 친히 두루 다니신다는 말씀이 있고 (:23) "멸하는 자"가 따로 있는 듯이 되어 있으나 천사가 이 모든 일을 한 것이다. 천사는(천사만 아니라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도 물론이고-골 3:17)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어서 이는 하나님 친히 그렇게 움직이시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바로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이 된 이스라엘 모든 장자들을 대신하고 대표하여 하나님의 소유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나님의 성전과 관련된 일)에 봉사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한 것이니, 처음부터 제사장직을 맡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레위인인 것이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다른 나머지 열 한 지파(요셉만 특이하게 그 두 아들로써 각각 지파를 이루었음)와는 달리 가나안 땅을 따로 분할 받은 것이 없고 오직 각 지파 사람들이 그 배정 받은 땅에서 일궈낸 농축산물 소출 중 1/10(십일조)을 받아 생활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그와 함께 죽어 함께 다시 살아난 우리 구원 받은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니 그 피로 구속 받았으니(몸값을 치르심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함이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고후 5:15/롬 14:7-9) 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을 달리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된 장자(長子)의 교회"(히12:23)라 하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의미가 바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의미로만 집중되어 있어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요 5:39) 하신 것. 여기서 말씀하신 성경이 구약성경으로서 다름아닌 이스라엘 흥망사를 둘러싼 모든 내용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메시아)를 나타내시기 위한 이스라엘 역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께서 마침내 탄생하실 때에도 이 4복음서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를 세상은 물론이지만 유대인들까지(나머지 지파는 이미 범죄함으로써 세계 만국에 다 흩어져버려 사라진 지 오래고)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단지 몇몇 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실 당시에도,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남녀 합쳐 겨우 120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도 이 실상은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 승천하실 때 모두 모였다고 볼 수 있는데도 겨우 500명 정도였다.

병 낫기 위해 혹은 호기심에서 혹은 다른 이유로 또는 말씀을 듣기 위해 구름 같이 몰려든 사람들도 제각기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였고 진리를 알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모든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렇게 손 꼽을 정도로 항상 소수로 남는 비극적인 현실이었던 것. 이를 잘 반영하는 것이,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을 것이다' 함과 같다"(롬 9:29)는 '바울'의 '이사야' 예언 인용이다.

'이사야'는 이 대목에서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건만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여물통을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 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에서 시작하는 것을 보아도(사 1:2-17) 이 "남겨두신 씨"란 것은 극히 소수의 택하신 사람들 외에는 모두가 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불신자들처럼 되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났고, 오직 이 "남은 사람들" 덕택에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두가 다 소돔 고모라처럼 오늘날 사라지고 남아 있지 못할 것이나 오직 이 극소수의 믿는 이들 덕택에 겨우 그 그루터기 정도로서 메시아 오실 때까지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었고 이들을 통해 애초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구현될 수 있었으니 즉 그리스도 오셨을 때 그 오심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사야'는 아예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소돔의 장로들", "고모라의 백성들"로 호칭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행적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들 중에서도 절대 다수가 탈락되는(고전 10:5) 한심스럽고도 비극적인 결말을 상징하는 것이니, 말 그대로 우리는 항상 복종하기를 힘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이룸(빌 2:12)이 마땅하다. 바울 사도가 우리가 다 심판대 앞에 드러나 선악간에 그 행한 것을 따라 영생이든 멸망이든 받는다고 전제하면서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고후 5:9-11) 함은 이를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기를,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나 운동장에서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우승하는 자는 하나인 것과 같이 너희도 우승하려는 자처럼 이와 같이 달려 나가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이니 저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달리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고전 9:23-27) 명시한 후, 곧장 이 '이스라엘로써 상징되는 의미'를 예시한 것은 의미 심장하다.

즉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던 것으로서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저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들이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10:1-6)이라 한 것이다. 악, 죄, 불법, 불의가 무엇이냐,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메시아를 배격하기에 이른 '유대' 민족

이러한 실상은 메시아를 죽여 없애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됨은 4복음서에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므로 그 중심 뜻을 파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여전히 자아중심을 회개치 않으니 그 의미가 제대로 먹혀 들어올 턱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바란 메시아는 그네들의 '자아중심의 욕구'에 따라 당시 '유대' 민족을 압박하고 있던 로마 제국과 같은 외적을 물리치고 세계 열국 가운데 군림하는 그런 위풍 당당한 구세주였지, 이렇게 우리 각 사람 개개인을 위해 죽으시고 저주 받으시는 모습 곧 죄인으로서의 형상인 메시아는 아니었으니 이를 알아볼 리 만무했다.

이 4복음서에서 기록된 대로의 그리스도와 '유대'인들과의 각종 알력이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승을 부린 것이 종교적 열심히 대단하다는 대 제사장들, 제사장들, '바리새' 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등의 소위 종교인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복음에 방해되는 세력이 바로 이런 세력화하고 세속화한 종교인들이다. 가장 앞장 서서 복음을 방해하는 것이 여전히 이런 종교인 계층이다. 다른 세상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도 믿고 성경(당시는 구약성경)도 믿는다고 자처하는 집단들이다.

일반인은 몰라서 방해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성경을 안다는 무리들이 그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충만한 그 피상적 성경 "지식"으로써 잣대를 들이대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히 저울질하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요 16:2) 하며 그리스도의 교회와 복음을 탄압하고 방해하고 핍박해온 것이다. 이렇게 '유대'민족을 통해 메시아께서 이 민족 가운데에서 일어난 소수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되어 왔던 그대로 오신 것이다.

이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히 1:1)이라 한 그대로이며,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여호와" 다시 말해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註)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실 때 밝히신 것이 어느 시, 어떠한 때인지를 상고하였다"(벧전 1:10,11)고 한 그대로임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4복음서에서 누누이 구약 예언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다.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과연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셨으니, 이는 의미심장하고 누구나 새겨들을 경고의 말씀이시다. 이는 누구나 성경을 읽을 때이면 확인할 수 있는 바 아담 때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시대와 세대의 똑같은 하나 같이 변함없는 특색이요 색깔을 말씀하신 것이니 곧 "믿지 않음"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면서도 그 색깔은 여전했음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12 지파 가운데 열 지파가 결딴 나버렸고 이제 겨우 '유대'지파를 중심으로 일부만이 남아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 지금 그들이 아무리 불 같은 종교적 열정으로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하나 레위인들을 찾을 수 없어 제사장을 맡을 인맥이 끊겨져 버려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그들이 남아 있든 사라져 버렸든 상관없이 모세 율법으로 대표되던 그 시대는 이미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그림자로서의 형태로 상징해왔던 실체(그리스도께서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는 교회)가 벌서 20세기 이전에 형성되어 새 창조가 시작되어 진행되는 과정에 있음이다.

이제 이 창조의 작업이 끝나면 그토록 대망하던 안식(安息-히 4:9)이 도래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이 전개될 것이다. 그 때까지는 마지막 남은 단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다시 출생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힘과 능력을 다하는 것이요 죽음으로써 충성할 일이다. 이 세상의 의미는 이 외에는 일절 없다.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지금까지도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증언과 똑 같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과 같이 꼭 그대로 이제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를 구성하여 새 피조물의 구조로 존재하고 있음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유월절 사건에서 비롯된 이집트 탈출을 오늘날 우리가 '새 피조물로 다시 출생하는 것'으로서 영적으로 해석하면, 모세의 율법은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요 13:34)대로 현재 우리가 새 생명의 법질서 아래 있음을 동일하게 가리킴이니, "내가 하나님께는 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라고 한 그대로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가 그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총회로부터 가차없이 격리된 것과 같이 이 새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은 지당하다(마 7:21/25:45).

그리고 가나안 복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첫 사람 아담의 경우처럼 낙원에 들어가 시험에 들고 그 결과 생명에서 떨어지는 현상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고, 지금은 새 낙원인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부터 당연히 걸러낼 것은 걸러지고 추려지고 솎아지는 것이니 곧 이 세상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추려지고 솎아지는 비율이 상징되는 것이 있다면 앞에서 밝힌대로 60만 장정(壯丁) 대(對) '갈렙'과 '여호수아' 단 두 명이다. 어쨌든 그 상징하는 바는 크다.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주님의 경고가 이에 해당된다.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이가 "많다"(눅 13:24) 하셨다.

다음에는 가나안 정착에서부터 메시아(메시아는 히브리 말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 말로서 의미는 같으니 곧 "기름 부으신 자"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오시는 이, 성령(하나님은 영이시므로)이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뜻한다) 오시기까지의 기간은, 다시 우리가 새 피조물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를 맞는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의미를 둘 수 있겠다. 이 기간을 개인적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시대적 의미로 결부시켜도 역시 그 상징하는 바 의미는 같다.

즉 쟁쟁하던 '이스라엘' 12 지파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한두 지파로 축소되고 그리스도 오실 당시에는 그것도 전부가 아니어서 불과 120명의 남녀가 성령 강림 때 동참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그 부활하신 모습을 나타내실 수 있었던 유자격자의 숫자는 겨우 500에 불과했다. 이런 상징성이야 믿거나 말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고, 주님의 경고 말씀과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도들의 모든 경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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