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2일 목요일

통합 복음 (13) ㅡ 제5 복음서'/부활의 진실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






 




1897년 팔레스틴 지역에서 발굴된 어떤 고문서에 따르면 내용이 4복음서와 같으나 그 중 몇 가지 특이한 다음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문서를 "logia iesu"라 이름 붙였는데 그 내용이 음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기에 편집자는 "제5복음서"라는 이름을 붙여보았다. 그 특별한 내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영문으로 된 것을 옮겨 온 것이다. 

Except ye keep (your life in) the world as a fast, ye shall not find the kingdom of God, and except ye keep the (whole) week as a sabbath, ye shall not see the Father.①
I stood in the midst of the world and in the flesh was I seen of them, and I found all men drunken, and none found I athirst among them, and my soul grieveth over the sons of men, because they are blind in their heart, and see not. ②

Wherever there are two, they are not without God, and wherever there in one alone, I say, I am with him. Lift the stone, and there thou shalt find Me; cleave the wood, and I am there.③

Let not him who seeks cease until he finds, and when he finds he shall be astonished, astonished he shall reign, and having reigned he shall rest.④

①세상에서의 너희 삶을 금식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일주 전체를 안식일로 지키지 않으면 너희가 아버지를 뵙지 못할 것이다. ②내가 육체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보여져 이 세계의 중앙에 우뚝 서서 보니, 사람들이 모두 세상에 취해 있어 목말라 하는 자가 없는 것을 알았고 세상 인생들의 마음 눈이 닫혀 있어 (이를) 보지 못하고 있음이 슬프다.

③어디서든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내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어디서든 홀로 있어도 내가 그와 함께 있다. 돌 밑을 들추어 보라, 거기에 내가 있음을 알 것이다, 나무를 쪼개어 보라, 거기에 내가 있다. ④구하는 자는 찾을 때가지 멈추지 말 것이다. 찾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요 그 놀라움 가운데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서부터 안식하게(쉬게) 될 것이다.

해석한다면, ①평상시처럼 즐겁게 먹고 마시지 않고 금식하는 것처럼, 세상 지내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니, 평생을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이 세상이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님을 알고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것이 위험천만의 일인 줄 알아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4:34)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말씀이 된다. 이는 성경에서 시종일관하여 경고하고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리고 한주간 하루만 안식일로 지키는 그런 모세 율법에 얽매인 생활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구원 받은 것일 수가 없다.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은 실체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사전(事前) 교육 차원이었다. 이는 내 것이 있고 하나님의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은 일절 없고 나 자신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가르치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즉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그런 관계가 정상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것은 피조물의 것이 된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그 뜻이다. 내가 나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여 내 마음대로 하려 하고 나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는 것이 죄, 악, 불법, 불의다.

이러한 생명의 기본 법질서를 어김으로써 아담이 범죄에 이르러 죽음에 이르자 모든 인간은 생명으로부터 격리되어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산 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나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고후 5:15)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어 주님을 위해 사는 정상 상태로 복구되어 있다(롬 14:7-9). 그러므로 더 다시는 일주 7일 중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 나머지 6일은 나의 날로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그런 것은 구원 받은 자라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요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다. 내 것은 없다. 그 대신 주님의 것이 내 것이다. 주님의 것이 내 것이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쓰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심으로써 주님의 모든 것이 내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 것이라 하여 주님 마음대로 하시지 않는다. 반드시 내가 솔선해서 주님께 나 자신을 바쳐야 그래서 주님 위해 살아야 하고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강제나 간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②주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구원자로 나타나셨으나 그래서 마지막 때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발을 붙이셨으나, 모든 인생이 세상 술에 취하여 그리스도를 알아 보지 못함을 슬퍼하신 것이니, 사람마다, 세상과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죽음이요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여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므로 이런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무용지물인 것이다.

실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땅 위에 서신다"는 것은 욥이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Redeemer)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in the end, at last)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도 여전히 내가 육체 가운데 있어 하나님을 뵐 것이다"(욥 19:25,26) 한 데에서 이미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야 할 때에 정확히 오셨으나 세상이 전반적으로 알아보지 못하니 비통한 일이 아니랴.

세상 사는 재미, 세상 삶의 낙에 잔뜩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있으니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꼴이 되어 있다.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영생만 욕심 내고 세상에서 사는 것만 생각하여 올바르게 사는 것 즉 다시는 죄 짓지 않는 것 더 정확히 말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먼저 들이키고 있는 주제넘은 모양새가 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 친히 "누구든지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요 6:45,65) 하셨다. 위 욥의 예언에서 우리말 번역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했지만 이렇게 번역한 의도는 육체가 썩어 없어졌으니까 육체 밖 즉 영혼으로써 본다는 뜻으로 그렇게 번역을 한 모양이나 영역(KJV, NIV)에서 번역한 대로 육체(자연계에 속한)가 썩어지지만 부활한 신령한 새 몸으로 하나님을 뵐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왜냐면 구속자가 오시면 우리는 당연히 부활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③이 대목은 그리스도 친히 자기가 하나님이심을 밝히심이다. 즉 "하나님은 영"(요 4:24)이시니 이 우주에 충만해 계심이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나와 함께 그리고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당연히 함께 계심이다(마 18:2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하늘에 계심은 '사람'으로서 즉 육체로서 그렇게 계신다는 뜻이요 성령으로는 이 우주에 충만하시다. 이미 이 세상에 오순절 날 성령으로 오시어 교회와 함께 계시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하심과 같다.

④두드리라, 찾으라, 구하라 하셨고 그렇게 할 때 열릴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끝까지 두드리고 찾고 구할 것을 말씀하심이다. 중도에 그만 둘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하지 않음만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는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는 것이므로 이 사실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가르친 것으로만 대대로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까닭에, 아무 것도 새로운 것도 놀라운 것도 없어 백년 천년 가야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기가 현재 소위 "신학"의 현주소다.
위쪽으로






Vlll.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



요한 사도가 그 복음서 말미에 유별난 것으로 들릴 수 있는 한 에피소드를 삽입하고 있다. 왜 이런 특이한 대목이 끼워져 있을까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해서 간략하게 요점만 기술하는 성경 기록의 특징으로 보아 필요없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말로 이 복음서의 최종 결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렇게 드러내고 있으며, 이 하나만 보아도 다른 모든 것이야 더 말할 필요 없이 모두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요한이 의도적으로 이런 기록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다시 말해 성령의 감동으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볼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이는 성경이 진실 그대로의 기록으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록되었음을 또한 자체 증명하는 확고한 한가지 사례가 됨을 우리는 주목한다. 즉 그와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삽입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이 요한복음서가 인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서 처음부터 거짓말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는 의식이 항상 작용하는 관계로 그렇게 속이기 위한 목적 이외의 것으로는 감히 더 이상의 군소리를 보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거짓말은 처음부터 인위적이므로 갈고 닦고 다듬고 반질반질하게 해놓는 특성 때문이다. 과거 우리 한학자 한 분이 우연히 창세기를 읽다가 롯의 딸들이 그 아버지를 술 취하게 만든 다음 차례차례로 아들들을 낳았다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으로는 입에 담지도 못할 사건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보고 무릎을 치며 하는 말이 "이런 것도 있는 그대로 기록해두는 것을 보니 스스로 천명하는 대로 과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유교 경전 같으면 이런 것은 당연히 잘라내고 쳐내어 듣기 좋은 말만 남겨두었을 것이다' 하고 가족과 더불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례와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 복음서의 말미에 적힌 바와 같은 그런 잣단 말은 천하의 그 어느 거짓말쟁이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런 대목(요 21:15-23)이 자연스럽게 끼어 든 것은 요한이 처음부터 기록한 모든 것이 그가 직접 보고 듣고 확인했던 사실뿐이었음을 강력히 방증하는 것이다. 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웅변으로 나타내는 자체 증명이라는 것은, 위에서 방금 지적한 바와 같으니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는 이런 식으로써, 요한이 지금까지 요한복음서에서 기술한 내용이 진실 그대로임을 서명 날인하시는 그런 형국이 되어 있다는 점에 우리는 새삼 놀라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 복음서만 서명 날인해놓으시면 요한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의 다른 복음서 그리고 기타 사도들의 서신들 모두가 같은 내용이므로 모두가 진실됨을 인(印)치시는(날인하시는) 것이 됨이다. 요한은 그 기억력이 비상했던 것 같다. 30세쯤 되셨던 예수님의 품에 가끔 기댈 수 있을 정도로 12 제자 중 가장 나이 어린 아마 20세도 채 되지 못한 십대였을 수도 있다. 예수님과 이종간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게 아주 젊어 그런지 또는 남달리 기억력이 좋아 그런지는 모르나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그 행하신 일보다는 주님의 말씀들을 아주 상세하게 들은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그 기록(요한복음)의 특색이다.

물론 모두가 다 요한 자신의 기억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기록한 후 나중에 다른 제자들에게 들려 주면 그 다른 제자들이 듣고 나서 "그것만이 아니고 이런 말씀도 그 때 하셨다" 하고 지적해 주면 요한 역시 그 말씀을 다시 기억해내어 끼워 넣는 그런 과정도 거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친히 약속하시기를 "(성령께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기억 나게 하실 것이라" 하셨으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만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설교도 그렇다. 상당한 장문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요한 이하 모든 사도들이 들었을 것이요 그런 사도들의 기억들을 살려내어 그렇게 스데반의 명설교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요한이 듣고 기억하여 말한 것을 누가가 직접 전해 듣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누가 역시 듣고 그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그 내용대로 옮긴 것일까. 물론 성령께서 친히 그 기억을 되살려 주시는 등 역사(役事)하신 것이야 언제나 변함없는 진실 그대로다.

요한이 그 복음서 말미에 기록해두고 있는 이 "잣단" 내용이라 하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그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 했으니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려고 이런 기록을 덧붙이지 않았나 할 정도다. 이 "제자"는 바로 요한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도들을 두고서 그런 "자기 과시(자아중심으로서의) 운운" 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만큼 이 말미의 기록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만세반석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스며 있으니 곧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이라고 하는 관점이다. 당시 사정으로 보면, 베드로가 수일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 있고 난 다음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으므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그런 순간이었다 하겠다.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고로 주님 역시 그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리라. 그러면 내가 주님만을 사랑하는데 그런 나의 사랑을 받는 상대방이신 주님도 역시 같은 사랑으로 나만을 사랑해 주시기를 바라는 감정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그보다 더 정확한 것은 그런 주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던 베드로였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요한 역시 듣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약간의 질시(嫉視)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하면 지나친 망상일까.

또한 평소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될 만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였기에, 그런 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베드로에게는 요한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도 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 예수님을 평소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요한이었기 때문이다. 질투란 것은 '나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왜냐면 내가 '그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사랑의 속성이 그러하다 하면 너무 억단일까.

내가 오직 나의 상대만을 사랑하여 생각하고 다른 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나의 상대도 나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감정 또는 요구("욕구"라기보다)가 바로 질투인 것이라 해석해서 하자는 없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인 욕심이라기보다 삼위일체 원리 곧 생명의 법도 자체라 해도 무방하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고 다른 그 무엇에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 둘의 하나됨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육체로 하나됨에서의 남녀는 자기 육체가 상대방의 소유가 됨으로써 가능하므로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또는 욕심대로 돌릴 권리가 없다. 상대방의 육체로서의 "의무"(고전 7:4)를 다할 때 상대방의 것을 내 소유로 삼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것.

구약시대 당시의 일부―다처(一夫多妻) 또는 이방인들의 특수 환경에서의 일처다부(一妻多夫) 등의 현상은 하나님이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진실을 가르치시기(요 4:25) 전의 이야기들이다. 모든 진리가 공개되고 모든 법질서가 정상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오늘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서 이를 어길 경우 영원한 멸망의 결말을 면치 못한다. 허울도 좋은 소위 "성적 자결권"은 자멸의 지름길이다. 소돔 고모라의 죄악(소위 동성끼리의 성행위-롬 1:26,27)과 더불어 간통죄를 국가 차원에서 허용하고 그 모든 불합리에 대한 통제력을 철회하는 망나니 짓을 해도 소위 "교회"는 꿀 먹은 벙어리이니 이런 오늘날 "교회"에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엄마 품속의 아기와 그 엄마와의 관계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육체로 한 몸되어 있는 남녀 관계 그 이상의 것으로서 성경은 이를 표현하여 "한 영"(고전 6:17)이라 한 그대로다. "한 몸"(막 10:8)보다 더 상위 개념이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 함은 당연하다. "성령께서 시기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헛된 말(빈 말)인 줄로 아느냐"(약 4:5) 하고 성령의 사랑을 가리켜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다.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한 그대로다.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께서 내 오른손을 붙들고 계십니다"(시 73:23). "그 오른손"(시 18:35)으로 내 오른 손을 붙들고 계시는 이의 위치는 내 뒤이므로 항상 나를 품으시는 모습 그대로다. 아기를 품에 품다가 그 아기가 자라 어른이 되어 그 몸집이 부모보다 장대하더라도 항상 부모 마음은 그 자식을 품는 그 모습 그대로다. 또 "한 몸"이라지만 세상 어느 아내 남편이 항상 이런 품새로 지내겠는가. 성경에 아가(雅歌)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심심해서 끼워 넣었는가. "생명이 사랑이기 때문에"-이것이 그 답이다. 주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인간적으로 묘사할 때 이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데에서까지 굳이 "질투"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면 이 "질투"라는 말을 쓰는 것이야말로 주님과 나와의 사랑이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는 아주 반대로 실질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남녀끼리의 사랑보다 더(삼하 1:26) 진한 개인적 감정이란 사실임을 이런 용어를 통해 강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는 못하리라. 인간의 일로써 인간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진리를 제대로 터득할 수 있으리요. "질투하는 하나님"(출 34:15)이라 선언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이에 대해서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다. 곧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다. 내가 어떤 이를 나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사랑했다면 나 역시 그에게서 같은 정도의 사랑을 기대함은 인지상정이니 왜냐면 그럴 충분한 사유가 되는 까닭에 그렇게 기대함은 무리가 아니요 이것은 자아중심과는 별개의 의미라 하겠다. 이기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시기나 질투라는 것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런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의 속성상으로도 이와 같은 해석은 충분히 그 타당성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각자에게 임하여 계심으로써 각 육체에게 영혼처럼 위치하시어 나와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니 그런 유(類)의 욕구에 대해서는 이의 없는 100퍼센트 만족도다. 고로 그런 점에서는 더 다시 그와 같은 감정이 믿는 형제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누구는 더 여기시고 누구는 덜 여기시고 하는 것 없이 전부가 완전한 사랑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각자 안에 공평하게 평형되게 다 1대1의 사랑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이 베드로의 물음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대답하신 것은 역시 언뜻 보기에도 동문서답처럼 비쳐질 수 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 하든 그런 것은 그와 나와의 관계(사랑 즉 개별적인 사랑)이고 너는 네 나름대로의 너만이 가진 너와 나만의 관계(사랑 즉 또 하나의 개별적인 사랑)가 중요하고 그것만이 네게 한도 없이 충분하고 다른 것은 네가 상관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시는 뜻이라 하겠고, 그래서 다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시는 베드로에게만 주시는 사랑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이 대목을 통하여 성령께서 강조하시는 사실은, 개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각자 개개인에게 지극히 만족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도록 사적(私的)이고 개별적인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도 변함없이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이렇게 할 수 없다. 당장 삼각관계가 되어버리고 질투와 시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육체로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한 면으로만 바라보는 얼굴을 지니고 있음과 같다. 그 쪽을 보면 다른 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는 가운데에서의 1대1의 사랑이다. 그 둘의 사랑에는 다른 제3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다르시다. 그렇게 1대1의 사랑을 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런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동일하게 베푸실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이 대목은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차이 혹은 하나님의 특성 중의 하나가 된다.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처럼 그런 완벽한 1대1의 사랑이,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가능하게 된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바로 이런 극히 핵심적인 사실을 이 간단한 에피소드로써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때문에 요한 사도 역시 그저 담담하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시는 의미뿐이었다고, 일반적으로 복음서 내용에서는(어느 복음서에서나) 좀처럼 설명을 가하지 않았던 "설명"까지 하고 있을 정도다.

왜냐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람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요한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당시 파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런 오해 풀기라면 그것 하나만 가지고 이 복음서 기록에 일부러 기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오해는 지내놓고 보면 다 사라지고 말 한낱 부질없는 생각이 되어 버릴 것이요 자동적으로 해소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 일개인에 관한 오해를 풀어 주는 차원의 해명이 아니기 때문에, 즉 성령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하는 이 점이 중요하다.

"너만을 사랑하는 내 사랑은 내가 너 외의 그 누구를 너처럼 사랑하든 상관없이 '한 사람'으로서 너만을 사랑하는 그 의미 그대로이니, 이 점에 관해서만은 네가 백 번 믿어도 좋고 100프로 만족할 수 있고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여기에 우리 믿음의 핵심이 있는 것. 곧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너만 사랑하고 나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사랑과 똑같이 그렇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강조하여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자기 자신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이심을 명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때문에 나의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단지 구원 얻어 영생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나의 순간순간의 삶으로 융화되어 나타나는 그런 사랑이니 곧 내 생명의 핵이 됨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는 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함이다. 그래서 이를 간략히 표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생명"(골 3:4)이시라 하게 된다. 이렇게 둘(주님과 나는 엄연히 둘이 아닌가)이면서도 하나요, 하나로 보이면서도(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또 주님 혼자만 계시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둘(주님은 나와 함께, 나는 주님과 함께 존재하는)로서 동거(同居), 동역(同役), 동고동락함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존재이기에 성경은 "새 피조물"이라 하고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다"고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린 결론에 좀 더 덧붙여, 그 요한복음 21:18-25의 줄거리를 다시 훑어보면 이렇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자,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이 일견(一見)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순전히 베드와 요한에게만 관련된 개인적인 이야기인데도 버젓이 수록되어 있다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왜 요한이 따랐을까. 그러면 또 베드로는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주님께 "이 사람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던가. 또 주님의 대답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언정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는 것이었으니 왜 그럴까.

나중에 요한도 이에 대해 설명하기를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단순히 주님 하신 말씀 그대로의 의미뿐이었다고 했다. 물론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인해 당시 자신에 관해 떠돌던 말들을 여기서 단박에 해명코자 이 대목을 일부러 삽입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베드로가 어떤 심경에서 그런 질문을 했고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어떻게 간파하시고 그런 대답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게 된 당시 베드로의 마음 상태는 과연 무엇이었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필자는 그 초점을 베드로의 질투 같은 감정에다 두어보았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필자 개인의 상상 즉 편견으로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당시 베드로의 마음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계셨던 주님의 대답에서 그 실상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즉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고 앞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점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든 하지 않든 요한과의 관계는 요한과의 관계로서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너는 너와 나와의 관계 이상으로 네가 관심을 둘 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요한이 주님을 따르니까 (베드로 자기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도) 그렇게 여쭌 것이다. 요한이 따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여쭐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렇게 여쭐 정도의 그 관심이 요한을 위함이었던가, 주님을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자기를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그저 부지중에 튀어나온 소리였던가. 그 어떤 심리 상태였을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그런 것에 관심 두지 말라는 책망과 비슷하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베드로와 주님과의 관계만 강조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부질없는' 관심이었던 셈이다. 베드로는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과 요한과의 사이에 대한 베드로의 관심인 것이다. 그토록 요한을 사랑하시는데 그리고 현재 요한이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따르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一여기에 베드로의 관심이 미쳐졌던 것.

그런데, "내가 요한과 무슨 엄청난 일을 해 주고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말을 해 주든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너는 오직 나와만 상관 있다" 하시는 것이 주님의 대답이시라고 앞에서 설명했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이 베드로의 "관심"을 질투에다 관점을 두었는데 실상 그럴까? 암암리에 그런 질투 섞인 감정에서 그렇게 말이 나왔을까.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 요한도 따라 나서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인데 즉 베드로 자기 혼자에게 주신 개별적인 분부이신데도 요한이 말하자면 옆에서 끼어 든 격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을 샘에 가까운 감정이라 판단해보았을 뿐이다. 베드로는 요한 못지 않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위치와 시각에서 그렇게 요한을 보았으니 말하자면 경쟁의식 같은 것을 느낀 것이라 하면 역시 망상일까. 질투가 원래 그런 성질이 아닌가. 독점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독점욕을 "질투"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있는가. 요한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더러 따르라 하셨지만 이미 요한의 발걸음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간의 묘한 감정의 교차다.

필자의 판단을 유치한 생각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사랑은 원래 독점이다. 남녀 부부간의 육체의 사랑 곧 둘이 한 몸이 됨에서도 상대에 대한 독점이다. 나 외에는 주인(소유주)이 없다는 확신이다. 다시 말해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이지 더 다시 아내 자신의 것이 아니다(고전 7:4). 남편 외의 남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의 몸 역시 똑같이 아내만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독점(獨占)임과 동시에 완벽한 의미에서의 공유(共有)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사에는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굳이 샘(jealousy)이 아니라고 해도 좋으며, 앞에서 말한 대로의 '관심' 표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고로 위의 설명에서 "질투"라는 용어에 대해 거북해할 이유도 실상 없겠다. 이 '독점'과 '공유' 두 가지를 함께 담고 있는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여기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도 그런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지적하려 함이 아니니, 앞에서 밝힌 대로 오직 주님과 나와의 세상 그 무엇과도 비견(比肩)할 수 없을 '가장 가까운 사이'로서의 사랑을 밝히려 하고 강조하려 함이다.

하나님과의 개별적이고 사적(私的)인 사랑의 관계이니, 이는 한 몸된 아내 남편 사이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보이려 함이다. 이는 바울이 그 편지에서 이미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즉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뉘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32-34) 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의 아들이라 할 때 이는 우리를 낳은 부모의 체질 그 육신을 그대로 물려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 즉 성령을 나의 것으로 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베드로는 "신성"(神性-신의 성품)이라 했다. 육신의 부모는 육체이기 때문에 그 육체를 내 것으로 하여 내가 태어나 그 자식이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영 곧 성령을 나 자신의 일부로써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니까 즉 육체(나 자신)와 영혼(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 관계이니까) 영원토록 모시어 영을 물려받는 것이 됨으로써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하나님으로서 요한만의 세계로써 만족하고 너 베드로는 나와 너 베드로만의 사랑의 세계로서 너와 나만의 세계인즉 내가 요한에게 어찌하든 너는 신경 쓸 것 없고 오직 너는 나와의 사랑의 관계만 진척시키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것만이 너와 나의 유일한 소관사로서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이 또 있느냐" 하시는 말씀이 되신다. 내게는 최고, 최선, 최상, 최신(最新)의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특성은 항상 새롭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이기도 하다. 늘 새롭다는 감격 가운데에 있으므로 싫증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이 어제가 아니었듯이 내일은 오늘이 아닌 것이다. 똑같은 판에 박은 듯한 날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렇다. 사랑이 생명에서 배어 나오고 우러나면서부터 생명 또한 사랑과 이제는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지냄이 좋지 않다"(창 2:18) 하신 대로 혼자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요 혼자가 아니라 둘 또는 그 이상이니 그래서 사랑이 삶(생명)의 중추 역할을 함이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의 우리말 "배필"은 남녀개념이 아니라, 단지 돕는 자("helper")라는 단어이므로 오역(誤譯)이다. 성령을 우리말 번역은 "보혜사(保惠師, Comforter)"라고 했지만 바로 창세기에 여자가 창조되기 전에 나오는 단어로서의 그 "helper"의 의미다. 즉 짝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고 그 말씀 즉시 여자가 창조되지 않았다. 그런 짝으로서 각종 짐승들(이들이 영물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사"들)을 지으셨다.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짝으로 삼으면 되는 데 그 중에 아무도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어 제각기 이름(그 생김새대로 붙여준 별명과 같은 것)을 붙여주었으므로 마지막 시도로 여자를 아담으로부터 창조하신 것이다.

그제야 아담은 이름을 붙여줄 수가 없었다. 자기와 같은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이름이 있다면 자기의 이름인 "아담"밖에 없다. 그래서 범죄 전에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었고 아담이라는 공통된 이름으로 통했다. 범죄하여 여자가 남자에게 진정한 "돕는 자(helper)"의 자격을 상실했을 때 다른 영물들처럼 여자의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아담으로서는 여자에 대한 실망의 순간인 것이다. 이제 요한의 그 복음서 말미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의 모든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이렇게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분을 가리켜 성경에 보혜사(保惠師-"Comforter"(KJV),  "Counselor"(NIV), "Helper"(NKJV))라 하고 있는데, 그런 '보혜사'란 거창한 듯이 보이는 이름은 우리말 번역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창세기에서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실 때 내비치신 바로 그 "조력자"(helper)의 의미임을 재차 강조한다(요 14:16). 다시 말해 서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구조(構造)에서의 그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상대방' 즉 짝의 개념으로서의 '돕는 자'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할 때 그 영이시라는 의미는, 우리의 육체와는 그런 현격한 차이의 의미로서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나에게만 계심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도 그렇게 계심이다. 즉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만 아니라 나 개인에게 또한 이렇게 말씀하심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요한에게 무슨 일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이상으로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최고, 최상, 최선이다. 내게는 네밖에 없다. 네가 내게는 최고, 최상, 최선이다. 내가 나 자신을 네게 선물로 다 주지 않았느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한시도 떠날 수 없어 너와 영원히 하나되어 함께 살지 않느냐. 사람인 나로서 너를 위해 이 이상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이 내가 사람이 되어 있는 측면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라. 하나님으로서 나는 요한이나 기타 모든 사람 그 어느 누구든지 너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육체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되 육체가 아니라 영인 하나님에게는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네가 언제나 명심할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를 가까이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고로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랑이다. 머리가 몸을 위해도 몸이 머리를 위하지 않으면 그 한 몸됨이 유지될 수가 없다. 이것이 한 몸됨의 특징이다. 함께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일방적으로 움직이면 이 하나됨이 존속될 수가 없다.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 있고 또한 요한을 비롯해서 모든 다른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다. 요한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네게 내가 한 말이다. 네게 다시 말하거니와, 너는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이를 위하고 사랑하는 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이의 뜻대로 해 주는 것 자체가 무한한 삶의 낙을 누리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마시고 먹을 때에 느끼는 낙만큼이나 큰 낙인 것이니 생명의 근원적 낙이기 때문이다. 먹는 것은 육체에 관해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이지만, 영적인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므로 우리가 능히 측량할 수 없는 낙일 수도 있어 더할 수 없이 그야말로 극락(極樂, 최고도의 낙)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는 것 자체가 우리 육체가 누리고 느끼는 그 쾌락과는 비교도 안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낙을 느끼게 됨이니 이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 사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말씀과 "나의 먹을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 하신 데에서도 드러난다.

단지 이 세계는 그런 정상적인 생명의 낙이 통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육체적인 낙 그런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의 생명에서 느끼는 낙만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정작 영적인 생명의 낙은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니 이런 측면에서도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다. 고로 '먹는 것 자체가 낙이기 때문에' 먹고 마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일이 옳기 때문에' 비록 그런 자연스러운 낙을 현재 이 시간은 느끼지 못해도 의지력으로 (이것이 자연계의 법칙을 좇아 육체의 낙만을 따르는 동물 같지 않고 지, 정, 의로 행동하는 인간의 인간다운 행위가 됨) 당연히 할 일을 하게 됨으로 인한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면의 색다른 낙을 느끼고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받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그리스도를 위한 즉 사람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기뻐하시는 일을 함에서 오는 보람찬)이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낙이 아닌 낙과는 정반대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요 그래서 이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명시하기를, 주님께서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다"(히 5:8) 하였고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다"(1:9) 한 것이다. 또 "이와 같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5:9)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들이요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된 만유의 주인들이다. 주인답게 격조 높은 품위에 걸맞는 말하자면 검증된 자들이라야 함은 당연하다. 이 검증은 우리가 세상에서 시험을 받음으로써 되는 것이요 그래서 여기서 탈락하는 자가 생김은 불가피하다(마 7:21/25:45). 왕으로서 겁약(怯弱)해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서든 스스로의 왕다운 품격, 왕으로서의 품성, 체통에 흠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검증을 받는 것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딱 한번의 기회뿐이다. 약한 가운데서 강함을 스스로 지키는 것, 역경 가운데서 그런 품성을 검증받는 것인데 주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고후 13:4) 선례를 따르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단 한번으로 끝난다. 베드로는 이것을 정금(正金)이 시뻘건 불에 연단되어 나오는 것에 비유했다. 우리 인생사에서도 이런 일은 항다반사로 일어남을 본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에서 이런 일이 없으랴. 하나님이시라도 사람되신 후에는 이런 과정(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을 통과하셔만 했던 것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개,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금도(襟度)를 네 활개 펴고 마땅히 나타내어야 할 우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함"(히 1:9)으로써 될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해보라, 머리께서는 의를 사랑하여 불법을 미워하는데 몸이 과연 "불의를 좋아할"(살후 2:12) 수 있는가. 사람이라도 그렇게 되면 손발이 안맞아 하나될 수 없는데, 하물며 영생하게 되어 있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구조에서랴. 그래서 아버지의 뜻(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시는)을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명백히 하시지 않았는가(마 7:21).

둘이 하나됨은 우리의 삶의 경우 한 몸의 구조와 체제 속의 삶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 한 몸을 유지 보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 즉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의요, 이와 반대로 나가는 것이 불법, 불의 곧 죄, 악이다. 하나님께 의가 되는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위해 사시지 않고) 오직 그 몸된 우리 각자를 위해 사시는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와 하나님은 처음 창조 당시부터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우리 피조물 자신의 행위 곧 자유 선택에 의한 자아중심이다. 아담이 그러했고 사단 등 악령들이 그러했다. 그런 반면에 현재의 모든 거룩한 천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 바로 그 분류에 속하든 않든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므로 아무쪼록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요한이 기록한 대로의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오간 문답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지만 정작 핵심은 그런 설명에 있지 않다.

주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강하게 느끼는 베드로의 "질투"니 하는 따위의 말은 아주 유치한 망상으로 치부해도 좋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도마에 올려 놓고 요리해본 것은 다음의 가장 핵심적인 것 즉 왜 성령께서 요한으로 하여금 이런 "잣단" 기록을 남겨 놓게 하셨는가 하는 그 근본이 되고 핵심이 되는 다음 의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사랑이면서도(마치 엄마 품속에 안긴 아기처럼,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느라 품속에서 안고 키우면 아기가 하나이지 여러 아기일 수가 없듯이) 전체를 상대로 하는 똑같은 사랑을 강조하시기 위해 이런 대목을 요한으로 하여금 삽입해 넣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역시 이제까지의 설명처럼 말도 못하게 중요하지만, 정작 그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목표로 그와 같은 얼핏 보기에 아무 의미도 없을(앞에서와 같이 심층 분석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내용을 기록하게 하셨느냐 하면,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인 것이다. 즉 요한 복음서의 이와 같은 특이한 끝 마무리 기술(記述)은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아주 확정적으로 인(印) 쳐 주시는 성령의 최종적인 사인(서명 날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냐면 이상의 그리스도와 베드로와의 대화가 부활하신 직후의 시점(時點)에서 일어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자시 강조한다. <부활하신 직후의 시점(時點)에서 일어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부활이 만일 지어낸 것이고 꾸며서 만든 것이라면 절대로 이런 대목이 기록될 수가 없다는 이 한 마디 결론으로써 충분하다. 진실 그대로의 가감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고 요한은 이렇게 기술한 후에도 '필요 없고 객쩍은 사사로운 소리'라고 하여 나중에 삭제하려는 생각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다.

요한 자기 딴에는 자기에 관한 주님의 언급(베드로에게 주신)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가 퍼져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였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은 바로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라는 점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거짓말쟁이가 이런 말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 삼아 지어내려 했다면 왜 이것 하나만 만들어내겠는가. 내친 김에 비슷한 이야기를 더 만들어 냄 직하지 않은가.

요한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베드로의 질문 자체가 어찌 보면 싱겁기 짝이 없다. 또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으로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 역시 위의 설명과 같이 자세하게 분석해보지 않고 언뜻 들으면 알쏭달쏭하기만 하여 요령 부득이 되는 동문서답 격이다. 따라서 요한과 베드로 두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극히 사사로운 멋없는 이야기가 되어 있다.

최소한 이 요한의 복음서를 읽게 될 수많은 독자 개개인에게는 전연 상관도 유익도 없는 대목임이 분명한 것이다. 요한은 참으로 사사(私私)로운 필요 없는 멋적은 이야기를 중요한 복음서 기록에다 덧붙여 놓은 것인가. 아니다. 우리 전체 아니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메시지로서 절대 불가결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메시지가 되어 있음이니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는 최종 증명이 되어 있음, 이것이다. 물론 이것도 이렇게 믿는 자에 한해서 주시는 크나크신 은혜다.

이와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니, 우리에게는 당연히 멋적기만 한 당시의 한 에피소드이지만 그것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점에서 그래서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증명이 되어 있을 것이므로 이를 기록하도록 요한을 감동시키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화이었으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러하니 이것이 바로 이 글과 이 대목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지어낼 경우 이상과 같은 일견 무의미하기만 한 장면을 지어내야 한다는 고충이 뒤따르는 것이기에, 아무리 천재와 같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까지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성과 역사성을 후세 사람들에게 확고부동하게 증명하여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 요한으로 하여금(요한 자신은 자기에 관해 쓸데없이 나도는 낭설을 불식시키려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런 무의미한(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시답잖은 내용을 기록해놓게 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나눈 베드로의 대화>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의 다른 모든 기록은 그 부활이 진실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인 만큼 그런 의도하에서라면 아무 특이한 점이 없으나, 이 대목만은 순전히 요한 사도의 개인적인 해명(解明) 차원에서의 사사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 독보적인 가치가 실로 무한대이다. 그래서 필자는 '무리하기는 하지만' 그 대목이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질투 운운" 하면서까지 억지로 해설을 시도해볼 정도였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복음서 기자는 아주 간단히 기술해  버리고 있으니 이는 너무나 명백한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여러 가지로 그 부활의 사실을 입증해서 드러내기 위해 이런 저런 말로 애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써 모든 답은 이루어져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유독 요한만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자기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해 두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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