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2일 목요일

통합 복음 (9)








안식 후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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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註-이 부활하신 대목 역시 4복음서 기록이 각기 다르다. 이는 진실에 대한 증언에서 그 진실성에 대한 아주 강력한 자체 증명이 됨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오직 증언만을 토대로 하여 가감없이 수록한 것이므로 당신의 자세한 형편과 환경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고 또 그것을 설명해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고부동한 사실 그 자체에만 중점을 둔 순수하게 객관적인 기록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태와 '요한'은 사도들 중에 있으므로 직접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누가와 마가는 제3자에게서 간접적으로 들은 것을 기록했다는 차이가 있다. 위의 네 가지 경우에 '막달라 '마리아'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내용이 각각 다르다. 목도한 천사가 하나라 하기도 하고 둘이라고도 하며, 여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알고도 무서워하여 그 일을 전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또 전했다고도 하며,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졌다고도 하고 굴려지던 바로 그 시간에 현장에 마침 있었다고도 하는 등 제각각이다.

그리고 천사가 한 말이라도 직접 여자에게만 말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등 차이가 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도 하고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여러 여자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셨다고도 하는 등 각기 상이한 기록을 하고 있다. 또 '마리아'의 경우 주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 하신데 반해 마태의 기록에서는 여자들이 함께 주님을 뵙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은 '마리아'가 무덤이 비었다고 하는 말을 할 때 "우리가"라는 말을 했다 하는데, '마리아' 외 다른 여자가 있었음을 암시함인지 아니면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우리"라 했던 것인지도 밝혀놓지 않았다. 또 그들이 목격한 천사가 하나였느니 둘이었느니 하는 것도 여러 여자가 갔기 때문에 또 여자들이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그 중에 더러는 말하는 천사만 보았을 수 있고 그 말하는 천사 외에 또 하나의 천사가 더 있었음을 본 이들이(이가) 있을 수 있어 그들의 증언에 따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역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면서 천사가 말한 것도 여자들이 여럿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 증언에 따라 기록하였으므로 그런 차이가 날 수 있다. 무서워 말하지 못했다는 것과 말했다는 증언의 차이 역시 여자가 여럿이므로 '막달라 '마리아' 같이 담이 큰 경우는 달려가 즉시 제자들에게 알린 경우이고 다른 여자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냥 무서워 곧장 집으로 돌아갔을 뿐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했다는 증언일 수도 있어 그런 차이다.

그리고 마태는 여자들에게 주님이 동시에 나타나셨다고 하고 마가는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이 다 제자들에게 간 것이라고 볼 수 없고, 개중에는 그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고 너무 충격이 커 그냥 집으로 달아나다시피 해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할 (무서워) 수도 있다.

예수님의 발을 만지고 아니 만지고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베드로를 닮은 그 성격답게 너무 기쁜 나머지 좀 더 강렬하게 주님을 붙잡으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은 그냥 살며시 발을 붙잡고 경배했을 수도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새벽 일찍 아직 캄캄한데도 혼자 누비고 다니며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가서 알렸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리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보았다면 "누가 시신을 훔쳐 간 것"으로 의심할 필요가 없는데 '마리아'가 그 일행 중에는 빠졌기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그러면 왜 그럴까. 그리고 '요한'은 아직 어두울 때라 했고 마가는 해 돋을 무렵이라고 했다. 이는 상당한 차이다. 이 역시 '요한'은 직접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간 사람이고 마가는 전해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마가보다 '요한'이 정확해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마가가 그 때의 여자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살로메"라 했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 사건에서는 어느 경우에서나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때문에 으레 그 경우 갔을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그 이름을 말한 대신, 다른 복음서 기록에는 없는 살로메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아 아마 그 경우 '막달라 '마리아'는 빠지고 그 나머지가 그쯤의 시간에 뒤늦게 갔을 수도 있겠다.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 온 여자들이 적지 않으므로 모두 한 곳에 유숙하지 않고 따로 유하다가 한 무리는 먼저 오고 그 후에 뒤따라 온 다른 무리의 여자들, 이렇게 두, 세 무리들로 나누어진 상황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4복음서 기자는 그 제각각 달려 온 여자들의 증언을 제각기 따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먼저 온 이들에 관한 것이 다음의 마태복음의 기록이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는 어떤가?

'요한' 외에 여자들의 보고를 직접 받았던 당사자들 중 하나인 마태의 기록은, 큰 지진이 나고 그 서슬에 지금까지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또 여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이 일을 보고한 사실에다가 중점을 두고 기술하고 있다. 마태는 이 기록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또다른 '마리아'가 갔다고 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는 그 외에도 여러 여자들이 함께 한 사실을 말하므로 반드시 그 둘만이 그 때 갔다고는 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그 둘의 이름을 거명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여러 여자가 가기는 갔는데 애초 함께 가기로 하여 가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일행에서 어떤 연유로 해서 잠시 뒤처질 수도 있는 일이다. 혹 너무 정신없이 서두느라 미리 준비해두었던 물품(향품과 향유) 중 어느 한가지를 빠뜨린 것이 나중에 생각나 그것을 가지려고 도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성격이 남자인 '베드로'와 같아, 다른 여자들은 혼자서 그렇게 뒤쳐진 행동은 아니하려 하겠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일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출발할 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으나 제각기 향품을 사서 준비했는데 혹 '마리아'는 그것을 가져오기를 잊고 중도에서 도로 돌아가느라 일행에서 뒤쳐지게 되어 결국 혼자서 곧 이어 달려오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앞서 간 여자들이 이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달려가 제자들에게 당도하기 전에 황급히 먼저 달려갔을 수 있다. 길이 서로 어긋나 서로 만나지를 못한 것이다.

억지로 꿰어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개연성은 의당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기록할 상황의 당시 복음서 기록자가 아니다. 전체적으로 그 중요 줄거리만 엮어놓은 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정적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고 따라서 그 부활의 사실을 사실적으로 증명해보려고 노력하는 따위는 아예 의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사이에 다른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보다 먼저 갔다가 그런 지진을 만나고 천사를 보았으며 달려오는 도중에 주님까지 뵙는 동안에 약간 지체하였고, 그리고 뒤처진 '막달라 '마리아'는 잠시 몇 걸음 뒤미처 달려 왔으나, 천사가 돌을 굴려낸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여자들도 수비하던 군인들도 황급히 모두 자취를 감추어 버린 후였으므로, 혼자 무덤에 갔던 '마리아'는 무덤 입구의 돌이 옮겨진 것과 빈 무덤만 보고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온 것이다. 그렇게 잠시 지체하던 여자들보다는 먼저 달려가면서 길이 서로 어긋날 수도 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와서 알리자 황망함을 느낀 '요한'과 '베드로'가 그 진상을 알아보려고 뛰어 올 때 '마리아' 역시 달려 왔고 제자들은 집으로 갔으나 '마리아'만 남아서 울고 있다가 두 천사를 보고 또한 주님을 뵌 것이다. 그래서 다시 제자들에게 뛰어가 알린 것이다. 이상이 '요한'의 기록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뵙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한 그 여자들은 그 길로 즉시 제자들에게 달려가지만, 그들보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가 와서 (그 여자들은 만나지 못한 채) 무덤이 비어 있는 사실만 알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 없는 동안에 남아 있는 다른 제자들에게 그 여자들이 그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었으나 반신반의했다고 한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가 그렇게 빈 무덤의 사실을 확인하고 자기네 숙소로 돌아갔더니 그 남은 제자들이 그 여자들의 보고 들은 바를 전해 들었다고 알려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정확히 꼭 그렇다는 얘기는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확정 지을 수도 없지 않은가. 또는 기타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모든 세부적인 사항은 성경이 과감히 생략해 버리고 부활의 사실만을 증언한 여자들의 일만 알려주므로 우리 역시 그대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훨씬 후에 이를 기록할 때의 증언자들의 말이 당시 '막달라 '마리아'도 함께 간 사실만 알고 그 후 '막달라 '마리아'가 뒤처졌는지 어떤지는 챙겨서 굳이 알아볼 경황이 아니었으므로 그냥 '막달라 '마리아'도 함께 갔다고 했을 수 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따른 기록 내용을 한데 조합해서 편집하지 않고 제각기 별도의 내용 그대로를 이하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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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의 기록

(마 28:1) 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未明)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마 28:2) 큰 지진이 나며 주님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마 28: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니 (마 28:4) 지키던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마 28: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너희가 찾는 줄을 안다. (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 와서 그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너희가 뵐 것이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다".

(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급히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때 (마 28:9)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말씀하시기를 "평안하느냐?" 하시니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데 (마 28: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라. 거기서 나를 볼 것이다" 하셨다.

(마 28:11) 여자들이 갈 때 파수꾼 중 몇이 시내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마 28: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마 28:13) 말하기를,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도둑질해 갔다'고 하라. (마 28: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잘 말해 너희로 근심이 되지 않게 할 것이다" 하니 (마 28: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했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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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註-'마리아'가 먼저 달려갔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다른 여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쁨 속에서 갔을 것이니 비록 빨리 이 희소식을 알리려는 발걸음이라 하나,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그와는 아주 반대로 주님의 시신이 도둑질 당했다는 너무 황당함에서 지체하지 않고 필사적이게 허겁지겁 달려간 걸음이니 어느 쪽이 잽싸게 뛰어 먼저 제자들에게 당도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모두 그만그만한 비슷한 시간에 경각간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두 제자들을 따라 역시 뒤쳐져 달려온 것이다. 고로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향해 달려가느라고 이미 자리를 뜬 다음에 그 앞서 간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알린 것이다. 혹은 '막달라 '마리아'가 이 여자들과는 다른 곳에 따로 유숙했을 수도 있다. 그럼 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매번 나타나고 있는가?ㅡ이 설명은 다음 대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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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기록

(요 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요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므로 (요 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갔다.

(요 20:4) 둘이 같이 달려가다가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 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않는데 (요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요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었다.

(요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었다. (요 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 (요 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유숙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요한' 자신을 말한다. 아직 앳된 나이에 두려움을 타기 때문에 멈칫거린 것이다-註).

(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요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요 20:13) 천사들이 말하기를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므로, "사람들이 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해서입니다".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다.

(요 20:1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말했다. "주님(Sir),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다 두었는지 말해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가져갈 것입니다". (요 20: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시니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뜻, 즉 '랍비'} (요 20:1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더라고 말하라". (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뵈었다" 하고 또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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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註-이 먼저 온 여자들의 다음으로 무덤에 달려온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다음 누가복음의 기록이다. 제자들이 유숙하던 곳으로 이들이 달려갔을 때는 이미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간 뒤의 일이었다. 여기서 누가는 '베드로'가 이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한' 자신의 증언으로 '요한'이 분명 동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단독으로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누가는 단지 증인들의 증언들을 모아 기록하였으므로 '베드로'가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간 사실만을 알리기 위해 그 말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해두다보니 그런 것이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그 여자들의 무리 속에 빠짐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즉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단독으로 주님을 뵙기도 하고 그래서 두 번씩이나 그 때 사도들에게 달려간 사실에서 주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린 여자들 중 '대표적 인물'로 당시 믿는 이들 가운데 널리 유포되어 있었으므로 사실과는 관계없이 그렇게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간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이다.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가 빠짐없이 나타남도(마태의 기록에서는 실제로 거명되지는 않고 있다)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요안나", "살로메" 같은 새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 무덤을 찾은 여자들이 상당수였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가리켜,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이라고 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들 이름대로 그 여자들이 함께 있었나 없었나 하는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때 일을 기록할 때 정작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거명하여 그런 "여자"들이 직접 그런 사실들을 목도한 "증인들"이었다는 데에만 역점을 둔 것임이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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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기록

(눅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눅 24: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눅 24:3) 들어가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눅 24: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으므로 (눅 24: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산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눅 24:7)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이다' 하셨다".

(눅 24:8)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 24: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알리니 (눅 24: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였다.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렸다.

(눅 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황한 듯이 보여 믿지 아니하나 (눅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므로 그 된 일을 기이하게 여기며 집(유숙해 있던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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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註-또 다른 무리의 여자들이 있었다. 앞선 다른 무리의 여자들과는 약간 늦게 출발한 듯하다. 이들은 여기서 이 놀라운 일을 당하여 너무 충격을 받아 두려움을 탔기 때문에 비록 천사의 지시를 받았으나 그냥 도망치듯 아무 말도 못하고 숙소로 뛰어갔음이 분명하다. 천사들이 나타나도 천사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을 리도 없고 형체가 천사처럼 특이하여 천사로 인식되었을 리도 없고 그냥 평범한 (젊은) 사람들로 나타났으니 천사인 줄로 여자들이 인식했을지도 의문이다.

4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서로 입을 맞추지 않았음은 이로써도 드러난다. 서로 짜고 내용을 일치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이런 부활의 예에서도 보듯이 확실한 증인이 있었고 그런 증언들을 기록한 이상, 부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첨가할 내용도 수정할 것도 없다고 각자가 판단하여 확신하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만일 오늘날처럼 내용이 상호간 너무 상이하다고 여겼으면 그것이 왜 그렇게 틀리는지 그 자세한 당시의 정황들을 살피기 위해 노력했을 터이지만 당시는 그런 확신만으로 대 만족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설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도 이런 서로의 상이점을 보고서도 있는 진실 그대로의 것을 중히 여긴 나머지 누구 하나 그것을 계획적으로 일치시켜 가필할 생각은 엄두도 못낸 채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일치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그냥 두는 것이 그 자체로써 성경의 진실성을 웅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지혜라기보다 성령께서 시종일관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셨다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그 어떤 증거보다 가장 강력한 그리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되어 있음이다. 이 외에 달리 그 어떤 증거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고 여기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

그러나 마가는 주님께서 살아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히 놀라 떨며 무덤에서 나와 무서움으로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쳐 버린" 것으로 되어 있는 그 "여자들" 가운데 분명 '막달라 '마리아'가 있는데도, 같은 마가의 기록에 주님께서 살아나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자 '마리아'는 이에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막 16:8)로만 끝난 것을 나중에 새로 듣고 (막 16:9)에서 (막 16:20) 까지를 새로 갖다 붙인 것일까. 그래서인지 다른 사본에는 이상의 12구절들은 없다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다는 것은 '요한'이 기록한 것과 같은 '마리아'의 증언을 소개한 것일까. 그러나 이 대목에서 마태는 다른 여자들도 '마리아'와 함께 주님을 뵌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 등이 지금 여기서 필자가 설명하고 있는 대로의 상황 전개 과정의 풀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고 보는 것이다.

마가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이 먼저 나타나셨다고 한 것은 다른 여자들이 함께 주님을 뵌 사실을 듣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만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왜냐면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만을 나중에 기록에 남기고자 회고한 것일 뿐 그 자료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애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가나 누가나 "돌이 벌써 옮겨져 있는" 사실만 전하고 있다. 이미 지적했지만 '막달라 '마리아'나 또 그와 함께 행동하고 있던 다른 여자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한꺼번에 갔다고는 볼 수 없다. 여러 패로 나뉘어져 각자 행동을 했다고 볼 때 그래서 애초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가기로 했던 즉 맨처음 무덤으로 달려간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만 빼고는 천사가 돌을 굴려내는 현장에 때 맞춰 갔으므로 (오히려 천사가 여자가 오는 그 시점에 맞추어 행동을 개시하였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것을 목도했을 뿐 '막달라 '마리아'나 다른 여자들은 그 나중에야 왔기 때문에 그렇게 돌이 옮겨져 있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을 뵙고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도로 돌아와 급히 이 사실을 알려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누가의 기록에, "그들이 돌아오니 제자들이 과연 주님께서 살아나셔서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했다"(눅 24:34)는 것과 상반된다. 고로 개중에는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하여 마가는 그 믿지 않은 대다수를 가리켜 말한 것이리라.

이렇게 상당 시간이 경과한 후의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이 기록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불일치가 '주님의 부활'이라는 주제만은 진실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입증하는 대목이 되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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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기록

(막 16:1) 안식일이 지나니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 16:3)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막 16: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컸다. (막 16:5) 무덤에 들어가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니 (막 16:6) 청년이 말하기를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님을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으므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다. (막 16:7) 가서 그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알리기를 '예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뵐 것이다' 하라" 하므로 (막 16: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막 16:9)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므로 (막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님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니 (막 16:11)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막 16장의 9~20절까지는 다른 어떤 사본에는 빠져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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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註-이상 네 사람의 기록 가운데서 당시를 직접 증언할 수 있는 이는 '요한'과 마태이다. 만일 '베드로'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기로 했다면 '요한'이 기록한 것과 같은 상황으로 말했을 것이다. 왜냐면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심각한 문제 즉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그렇게 헐레벌떡하고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을 보인 사람은 오직 '요한'과 '베드로' 둘뿐이었으므로 (실상 다른 제자들은 그런 여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고 이상 기록은 밝히고 있는 것) 그렇게 주님 살아나신 것을 확인하고 그 기쁜 소식을 다시 제자들에게 전달했을 때도, 반신반의하는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과 '베드로'를 상대로 말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태는 그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급히 달려간 후에 처음 여자들로부터 그 놀라운 사실을 전달 받았으므로, 그가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더 극적인 것 즉 지진이 나고 천사가 번개 같이 강림하여 나타나 지키던 군인들이 죽은 자 같이 되는 그런 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어 그것만 기록으로 남기는 것으로도 아주 만족했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실도 누가, 혹은 마가가 기록한 바와 같은 내용으로 역시 들었을 것이지만 자기로서는 자기가 직접 기술한 그 내용 이상으로는 더 알아 볼 마음이 없었을 수 있다. 비록 '막달라 '마리아'가 그 여자들과 함께 있었다고는 해도 그 시간대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너무 근접했던 탓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어느 경우에 나타나 알렸는지는 그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복음서를 작성하며 기억을 되살리는 터였기에 정확성을 기하려는 필요성마저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마가나 누가가 각기 다른 내용으로 여자들의 무덤을 찾아간 사실을 기술할 때는 당시 사도들과 함께 있지 않고 직접 여자들의 증언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한'이나 마태가 이미 기록한 내용을 참작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증언들을 찾아 '요한'이나 마태가 기록하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소개할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그들 네 사람 모두가 무슨 역사가도 아니고 따라서 체계 있게 전후 사정을 따져 그 사실들을 종합해서 기록에 남길 의사도 없었고 오직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만이 중요하고 그 처음 확인하였던 여자들의 증언 중 단 하나라도 기록에 남기면 족하다고 했을 것이므로 이상과 같은 각기 상이한 부활의 내력이 성경에 담겨져 온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시는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그리고 그 부활이란 연속적으로 일어난 충격 때문에 거의 어림짐작으로 누가 누구와 함께 갔다는 식으로 알고 있을 따름으로 그런 자세한 자초지종은 오랜 후에야 살펴보고 밝히려고 했겠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 당시만큼은 그 기억이나 증언들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시 그들이 받은 충격은 그 모든 엄청난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있던 터라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 슬퍼서 혹은 너무 기뻐서 정신이 거의 다 나갔을 정도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몹시 창황한 때였다. 그리고 그 당시 상황은 역시 아직 어두컴컴한 새벽이라 사람 식별이 그리 분명치 않을 수도 있다.

이런 기록상의 상이점

이런 갖가지 사실을 종합해보면 이런 기록상의 상이점이 주님의 부활 사실을 더 한층 확실하게 증언해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오히려 그런 차이점이 있음으로써 그 증인들의 증언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백 번 강조해도 좋다고 생각된다.

만일 지어낸 이야기라고 가정해보라. 이런 갖가지 차이점이 있겠는가. 일사불란하게 공통점만 꾸며대고 꿰어 맞추려 했을 것이 아닌가. "공통점"이라 하는 것도 이 경우 어폐가 있다. 서로 다른 증언이라는 것 자체가 진실된 사실임을 이미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칠 거짓 증언을 구할 때도 그 증언들이 서로 맞지 않은 것 역시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그런 성전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서 자체 증명하고 있음과 같은 이치다.

또는 이렇게 각자가 통일성 없이 기록하도록 버려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계획적으로 꾸미는 거짓이기 때문에 구수회의를 거쳐 단일 기록을 남기려면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복음서 기록을 중구난방으로 네 사람이나 기록했다는 것 자체가 이 기록들이 진실의 사실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는 것임은 이미 강조했다. 이는 분명 성령의 지혜로 난 것이고 하나님의 경륜이자 섭리에 의함임을 거듭 역설하고 싶다.

단일 복음서가 아니라는 이 사실이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과 같다. 제각기 표현은 다르지만 그 표현 하나하나는 일리가 있고 이로써 그들 모두가 다른 물체가 아닌 바로 '코끼리'를 만졌다는 사실에서만은 일치하고 그 증언의 진실성을 입증함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 장님들의 증언이 일치하고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면 서로 입을 맞추어 꾸며댔다고 말하지 누가 그들 모두가 코끼리 있는 현장에서 제각기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믿겠는가. 거짓은 그래서 당장 드러날 것이 아닌가. 주님의 부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확실한 방법을 통해 온 인류에게 증명하시건마는 이 세상 신(神) 사단에게 완전히 예속된 인생들은 그 훌륭한 지능을 가지고도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같은 사람이나 이렇게 전후를 따라 자초지종을 꿰어 맞추어 보려고 하지 누가 이런 일을 하겠는가. 왜냐면 부활을 믿기 때문이니 이렇게 믿는 마당에서는 이런 저런 갖가지로 구질구질하게 꿰어 맞추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네 가지 기록의 복음서는 고스란히 그대로 지금까지 가감없이 보존되어 온 것이다. 서로 상치되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건재해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실일 수밖에 없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있다. 이 글의 말미(Ⅸ.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에 밝혀놓고자 한다.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성경 자체가 모든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사실 그대로만 진술하는 것으로만 철저히 일관하는 것이고 설명은 성령께서 친히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선생은 하나뿐이라" 하심과 같다(마 23:8).

그러므로 원래부터 신학자가 성경 진리를 신학으로 가르치는 법이 아니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대중들에게 비유로가 아니면 달리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풀어 설명하시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학문이 아니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 친히 그 합당하다고 여기시는 사람에게만 가르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진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학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진리 아닌 오류로 빠져들 개연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들어가는 것이고 그 위험성을 안고 가는 것이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

성경이 이것저것 설명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주님의 역사적 부활의 영광스러운 사실을 웅변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재삼 강조한다. 거꾸로 생각해서 주님의 부활이 실제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라 하자. 이렇게 허술하고 엉성하게 이야기를 꾸며놓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듬고 손질하고 해서 모쪼록 듣는 사람이 속아 넘어가도록 빈틈없이 해놓는 것이 거짓말의 속성이고 또 인간 상식이다. 절대로 이런 식으로 기록해두지 않는 법이다.

이 사실을 기록한 네 사람 각각이 서로 손발이 맞지 않게 기록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아무 설명도 없이 '요한'의 "6시", 마가의 "3시",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제각기 기록에 남기도록 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 사람이 기록하게 할 리도 없다. 한 사람, 그것도 꾀가 있어 그럴 듯하게 속이기 위해 여럿이 기록하게 한다면 서로 꽉 차게 들어맞도록 짜임새가 있게 쓰도록 해놓지 이 사람 이 말하고 저 사람 저 말해서 서로 틀리게 해놓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 같은 특징이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점에서 약점 아닌 큰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이런 부인 못할 진실성 앞에서, "성경 기록이 이렇게 그 내용상 상치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니 어떻게 그것을 사실로서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 스스로가 진지하게 알아볼 생각도 없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사람들의 습관성과 외고집의 당돌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직접 관련은 없는 내용이지만, 성경은 단 한 구절이라도 특이한 말씀이 있으면 그 대목을 응시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전체 의미를 망가뜨릴 수 있는 그 정도로 엉성하게 되어 있고 결코 체계 있고 치밀하게 씌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세밀하게 세련되게 쓰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정도로 진실이 뚝뚝 듣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적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진실만을 증언하는 모든 진술들의 특성이자 당당함이다.

거짓말일수록 번지르르 하게 해놓는 법이다. 글로 기록하거나 말을 해도, 광산에서 광석 그대로를 채취한 것처럼 다듬지 않은 울퉁불퉁 생 돌 그대로 가져오는 법이 없다. 그러나 진실 그대로 사실 그대로일 경우에는 그런 다듬고 손보는 일이 없다. 그냥 그대로 진실만 전달하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 대목이라도 필요 없다 싶으면 당장 가지 치기를 하는 다듬은 말이나 글을 세상에 발표하는 일이 거의 없다. 왜냐면 듣는 사람이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까 하는 그런 신경쓸 일이 거짓말쟁이가 아닌 이상 거의 혹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삼위 일체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소홀히 함으로써 빚어내는 사례 중의 하나로, 삼위 일체 하나님께 대한 대립적인 견해가 있다. 소위 양자(養子)론과 양태(兩態)론인데, 양자론은 성부(聖父)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성자(聖子) 예수님은 원래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는데 후에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강림하신 성령을 통해 비로소 양자(養子)가 되는 신적(神的) 요소가 부여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말씀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있어 왔다", 또는 각종 사도 서신에서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말씀 등으로 그리스도를 주물주로서 밝히고 있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단으로 단죄되어 마땅하다.

양태론은 성부와 성자를 같은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상황에 따라 양 형태(아버지의 형태 및 아들의 형태)로 나타나신다는 주장이니 마치 한 남자가 자녀에게는 아버지로, 양친에게는 아들로,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는 성부로, 어떤 때에는 아들로, 어떤 경우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설이므로 "삼위(位)"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성자가 되셨다는 것인 바 이들은 주님의 말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 그리고 바울 서신 중 "아들 안에 있는 자기 영으로써 아버지 친히 아들을 살리셨다"라는 설명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로 오신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그려놓는 결과가 된다. 그런 착각을 하기 때문에 성부께서 태양이라면 성자는 그 비취는 광선이고 성령은 태양에서 나오는 열과 같다는 황당한 말도 나오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사람(인자(人子))되심을 부인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다시 살아나실 죽음을 죽으신 것이 되어 고통만 당하고 죽음과는 무관하다는 의미가 됨으로써 역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낙인 찍는 것이고 우리의 구원과도 무관하다. 서기 261년의 교회 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된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이 중요하고 한 대목 한 대목이 중요한데, 어찌 감히 그런 서로 어긋나는 기록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부활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런 거짓말을 꾸며내는 자들로서) 감히 남기려 하겠는가. 이런 허술한 기록 자체가 부활의 확실한 증명이 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즉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셔서 당신과 같은 존재를 만드시니 곧 당신의 형상과 모양이시라 곧 아들이시고, 이 아들로 말미암아 즉 아들 안에 계셔서 만물을 지으시니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항상 하나로 계심을 가리켜 성령이라 하는 것으로서, 어렵다고 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는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다.

단지 둘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개념만은 우리 인간의 주변에서는 남녀가 육체적으로 한 몸이 된다는 것 외에는 따로 비유할 사항이 없으므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겠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이 바로 그런 것이므로 이는 우리가 성령 안에서 배워감을 따라 능히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하나로 계시다가 둘이 되어 계시니 비록 둘이시지만 애초의 그 하나로 계시던 상태를 계속 유지 존속코자 하는 모습이 바로 '둘이 하나됨'이요 이를 가리켜 "아버지"라고도 또는 "아들"이라고도 못하므로 두루 통하는 '이름'(마 28:19) 즉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시기도 하는 것이다.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의 절묘한 배치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사이에 두 종류의 안식일이 끼이는데 하나는 '유월절 안식일' 그리고 '일반적인 안식일'로서, 처음 안식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새 피조물로 만드시기 위한 "일하심" 즉 '새 창조'를 "다 이루시고"(요 19:30) 이전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제7일"째 쉬신 것처럼 쉬신 것을 의미함이다. 이 사실은 이미 '안식일(安息日ㅡSabbath)에 대해'라는 항목에서 설명한 바 있다.

말하자면 안식일 개념에서 그 첫째의 것 즉 하나님의 애초의 "6일" 창조 후 안식하심과 같은 의미의 '창조 작업 후 그 완성에 따른 쉼 즉 안식'에 해당됨이다. 이전 창조나 새 창조나 창조임에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안식일의 두번째 의미 즉 하나님께서 쉬시니 우리도 쉬는 것 다시 말해 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됨으로써 편히 안식하는 것, 곧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으므로 너의 하나님이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다"(신 5:15)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첫번째 의미는 말할 것도 없이 천지창조에서 "6일" 창조를 마치시고 "7일"째에 쉬신 것을 가리킴이다. 그래서 새 창조의 완결을 고하는 유월절 안식일이 목요일이고 그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을 격(隔)하는 경계가 되는 금요일은 첫 안식일 즉 "6일" 창조의 완료가 인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미완성이 아닌 미완성이 되어 버려 하나님께서 부득불 새로 창조의 일을 하실 수밖에 없는 저간의 사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새로 일하실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을 가리킴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이미 천명되어진 바다. 그러나 이제 새 창조가 완료되었으므로 이제 진정한 의미의 "6일" 창조가 완료되었다는 점에서 토요일의 일반 안식이 중복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반적인 안식일은 이와 같이 안식일 그 자체에도 의미가 분명하지만 그 안식일 이후 첫날이 되는 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 비로소 산 자가 되어 산 자로서 "일하게" 되는 첫날을 의미함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6일 창조의 그 첫날부터 창조의 일을 시작하신 것처럼 주님은 교회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머리로 하여 주님을 모시고 사람 구원하는 일에 새롭게 뛰어드는 계기를 처음으로 맞는 의미가 됨이다. 이제 이렇게 "일하는" 날들의 안식은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마치는 그 날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 하는 그 날 들어가게 될 것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이를 가리켜 "저 안식에 들어간다"(히 4:3) 한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말씀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주제를 삼고 주님을 공박하여 물고 늘어질 때에, "너희는 하나님이 창조를 다 마치시고 이제 안식하시므로 그런 의미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느라 그렇게 고집하지만 실제는 하나님이 쉬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범죄로 인하여 지금도 일하시는 과정이시고 나도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니 너희가 고집하는 그 주장은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것이다" 하시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인간 구원의 종료가 아직 끝나지 않아 여전히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해낼 막중한 책임을 그 교회로서 지고 있고 일하고 있는 와중에 있으므로 구태여 당시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특정일로 정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안식하셨으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명백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언급에서도 나타나듯이 "한 날을 더 중히 여기지 않고 모든 날을 똑 같이 여기는"(롬 14:5) 경우가 그런 뜻이다.

성경에 "주님의 날"이라고 특별히 표현된 것은 있으나 이는 '유대'인 안식일의 대안(代案)으로 삼으라는 의미도 아니고 또 그런 것은 위의 설명처럼 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단지 주님의 날로서 기념하면 가하나 그것을 다른 날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안식일이나 십일조 바치는 것이나,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무조건 내게 속한 것이니 모두 내 것이라는 자아중심 일변도의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 또는 해방되어,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가르치실 진리 즉 우리의 전부, 우리 존재 자체가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것임(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이니, 이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을 부분적으로나마 미리 일깨우는 한가지 방편으로 그렇게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이 되어 있다. 7일 중의 하루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7일의 7일, 일년 365일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고 내 것은 없는 것이다. 나의 소유의 1/10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100프로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게 주신 선물로서 주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전히 9/10는 내 것이다 또는 7일 중 6일만은 내 것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 진리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이가 없고 죽는 이도 없다"(롬 14:7)가 된다. 이 언급에 다 함축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고 아주 못 박아 버리지 않았는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내 것이 어디 있으며 나의 9/10가 어디 있고 나의 6일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런 것을 미련스럽게 아직도 인정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1/10, 하나님의 안식일(7일 중의 1일) 등을 고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루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다. 안식일로 치면 하루만 아니라 7일 모두가 안식일로서 오직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날이지 내 일을 하는 날은 더 다시는 존재하지를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나의 영과 육체가 다 주님의 것이다.

혹자 이를 두고 "그렇다면 내 것과 하나님의 것과의 경계가 불분명해지지 않는가. 주님의 날(이전의 안식일 개념)도 지킬 것 없고 십일조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 것이 대관절 어디 있는가? 아직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을 믿지 않고 어떻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논하는가?" 하는 반문이 그 답변이 될 것이다.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다. 즉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주님을 위하고 섬기는 차원이 아니면 나는 한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새 피조물"됨이다. 나를 위하는 몫은 주님 친히 담당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게 영원한 선물로서 성령을 주신 의미이다. 곧 그리스도 자신께서 내게 영원한 선물이 되어 계시고 생명이 되어 계심이다.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적인 소유 즉 하나님 주신 개인적인 선물로 모시고 있음이다.

이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생명과 사랑의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나를 위하심은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갈 2:20) 사실로써 충분히 입증되어 더 이상 증거를 요하지 않는다. 창조(새 창조)의 차원에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나를 위하시는 사실은 영원무궁 변하심이 없다. 고로 이런 의미에서도 '유월절 안식일'과 '일반 안식일'에 걸쳐 또는 두 의미가 동시에 두루 겹쳐지는 "사흘 밤 사흘 낮"에 의한 그리스도의 수요일 수난(受難)은 정확한 것이다. 왜냐면 이는 첫 창조와 새 창조의 관계 및 이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자세를 명확히 마치 그림을 그려 주듯 나타내고 있는 까닭이다. 새 창조를 떠나서는 첫 창조가 완결될 수 없고 첫 창조를 무시하고서 새 창조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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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는 길에

(눅 24:13) 그 날에 제자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라는 촌으로 가면서 (눅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눅 24:17)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 (우리말은 공대말, 예삿말이 구분되어 있으나 '유대'인의 언어를 비롯한 세계 거의 모든 나라 말이 이런 엄격한 구별이 되어 있지 않다-註).

(눅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이가 대답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거처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는가?".(눅 24:19) 이에 말씀하셨다. "무슨 일인가?". 그가 말했다. "'나사렛' 예수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인데 (눅 24: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료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 (눅 24:21) 우리는 이 분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사람이라고 바랐었다.

이뿐 아니다.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눅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했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 24:23) 시신은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알려온 것이다. (눅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이들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과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님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눅 24:25) 이에 말씀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들아, (눅 24:26) 그리스도(메시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눅 24:28) 그들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는데 예수님은 더 가시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눅 24:29) 그들이 강권하여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유하십시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습니다" 하므로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셨다. (여기까지도 그들은 예수님이신 줄 깨닫지 못했다-註).

(눅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셔서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 (눅 24:34) 말하기를 "주님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니(요 20:19) 이 날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였다.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했다.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렸으나 역시 믿지 않았다).(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이야기는 이와 같이 마가도 취급하고 있으나 내용이 약간 다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역시 두 사람이 엠마오가 아닌 다른 촌으로 가다가 역시 같은 모양으로 주님을 뵈었을까. 누구도 이를 가부간(可否間)에 단언할 수는 없다-註).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눅 24:36) 이 말을 할 때에(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註) (요 20:19)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음에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눅 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혼령(魂靈)으로 생각하므로 (눅 24:3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다".

(요 20:20)(눅 24: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눅 24:41) 너무 기뻐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하게 여길 때 이에 말씀하셨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눅 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 24:43) 받으셔서 그 앞에서 잡수셨다.

(눅 24:44)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한 말이 이것이다" 하시고 (눅 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또 말씀하셨다.

"이같이 그리스도(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눅 24:49) 보라!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에 머물러라".

(요 20:21)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 (요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용서하면 용서가 될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

(요 20: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하여,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 하니 '도마'가 말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

(요 20:26) 8일이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요 20:27)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이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말했다.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요 20: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이 사실에 대하여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註).((막 16: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나신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었다).

(요 20:30) 예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기적도 제자들 앞에서 많이 행하셨으나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여러분들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

'디베랴' 바다에서 다시

(요 21:1) 그 후에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다. (요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다가 (요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하므로 나머지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밤이 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요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므로 (요 21:5)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Children),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요 21:6)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하시므로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다.

(요 21:7)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다. (요 21: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50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어 왔다. (요 21: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다.

(요 21: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므로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 찬 큰 고기가 153 마리였다.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요 21:1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와서 아침(朝飯)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이가 없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3) 예수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다. (요 21:14)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요 21:15) 그들이 아침밥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그러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 21:16) 또 두번째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그러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에 말씀하셨다. "내 양을 치라".

(요 21:17) 세 번째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말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정,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릴 것이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이가 누구입니까?" 하고 묻던 이였다. (요 21: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여쭙기를,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 21:2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요 21: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퍼져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다. (요 21:24)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바로 이 사람(요한 복음서를 쓰고 있는 요한-註)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진실인 줄 안다.

하늘로 올려지시니

(마 28: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마 28:17) 예수님을 뵙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마 28:18)(막 16:15) 예수님께서 나아와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새 혀(언어)로 말하며"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斷罪)될 것이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기적)이 따를 것이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혀(언어)로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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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註-위에서(막 16:17) 우리말 번역은 "새 방언을 말하며"("to speak with new tongues")로 되어 있으나, '방언'이라 하면 한 지역 또는 계층(階層)에 한해서 행해지는 언어의 체계나 지방 사투리를 의미한다. 예컨대 "스코틀랜드 방언"이라 하면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 말씨를 뜻한다. 영역으로 "tongue"은 문자 그대로 혀를 말하지만 단수 또는 복수 취급이 되어 있을 때는(성경에서처럼) 그 혀를 굴리어 나타낸 "말"인 것이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특수 용어와 같은 인상을 주는 우리말 번역 "방언"(올바르지도 않은 의역)은 버리고 제대로 직역하는 쪽을 택해 "새 혀(new tongues)"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이 지적한 것 역시 "방언"이라 하지 않고 "이방언(異邦言)이라고 함으로써 뜻을 분명히 했다. 즉 외국 언어(바울 당시 현지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기준할 때)인 것이다. 국어 사전에도 나오는 바, "신약 시대에 성령을 받은 신자가 하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이라는 정의(定義)는 당치도 않은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새 혀(new tongues)"는 새 언어, 새 말이란 뜻이다. 오늘날 이상한 풍조가 잠입하여 성행하는 소위 "방언 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마귀는 마지막 때 마지막 발악으로 교회 내의 혼돈을 시도하여 이 "새 방언"이라는 "새롭다"라는 의미를 악용함으로써 성경적인 "이방언"이 아닌 악령을 받게 하는 속임수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바울이 말한 이방언(異邦言: 우리말 번역은 "방언")과도 차이가 있다.

거기서는 이 "새 방언"이란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전혀 없다. 그냥 "tongues" 즉 "언어" 또는 "방언"이다. 이는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사도들을 비롯하여 그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들을 하기 시작하는데 자기 자신은 알지 못하는 각국 말을 구사했으므로 여기서 유래된다. 당시 주변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다가 제각기 자기 고장의 말을 듣게 되자 신기하게 여겨 "새 술에 취했다"고 분별도 없이 조롱했던 것이다.

오순절은 맥추절 곧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출 23:16) 날로도 불려지는 만큼, 유월절로부터 시작하여 50일째 되는 날 즉 승천하신 지 10일만으로(행 1:3) 따라서 이 날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수고에 의해 결실된 것을 추수하는 일을 교회와 더불어 주님 친히 참예하시는 의미를 지닌다(벧전 1:12). 따라서 7주(週)를 다시 7번을 채운 첫 날이므로, 창조는 모두 끝나고 오직 그 모든 수고가 종료된 이후의 결실에 뛰어드는 새로운 국면의 작업이 시작되었음을 이 날은 상징하고, 바로 이 날에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임하여 오시는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새 언어" 혹은 "새 혀"라는 것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마 10:20/눅 12:12/21"15)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전도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강조하심이다. 물론 그렇게 외국에 나가 전도를 하다보면 외국어를 유창하게 쓰지 못할 때 성령의 감동으로 그 나라 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말하는 자의 자기 의지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이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겠다는 의지야 물론 불가결이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표현력 또는 그 방식을 두고 하는 얘기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임하여 오신 후 제자들이 "이방언"을 한 것과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말한 그런 "이방언"들 즉 당시의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같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행 2:4) 바로 그 사실을 강조함이 핵심이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모든 나라 각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함을 이 때 명확히 나타내신 것이다.

주님께 대하여 '세례 요한'이 말한 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의 "불"이란 표현을 역시 악용하여 악령을 성령으로 착각하여 받게 하는 혼란스러움과 맥을 같이 한다. 이 "불"이란 것은 반드시 그 다음에 오는 대목 즉 "꺼지지 않는 불"과 연관되어 심판하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임에도, 이렇게 이 세상 신(神) 사단은 "말씀의 혼잡"(고후 2:17)을 꾀하여 유도하고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 혀를 통하여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것이야 "표적"이 되고도 남지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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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50)(막 16:19) 주(主)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셔서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눅 24: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들려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눅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때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셔서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입증하셨다. 아멘. (요 21:25)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

'누가'의 추가 증언一사도행전

(행 1:3)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셔서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셔서 그들에게 분부하여 말씀하시기를,"'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하셨다.

(행 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 여쭙기를, "주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하니 (행 1:7) 말씀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8) 오직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하셨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서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였다.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의 곁에 서서 (행 1:11)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시는 이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하였다.

(행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었다. (행 1: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사람(Zelotes)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행 1:14) 여자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행 1:15) 모인 군중들의 수가 한 120 명이 되었다.

'바울'의 추가 증언

(고전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메시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고전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12 제자에게와 (가룟 '유다'로 인한 결원(缺員)을 '맛디아'가 채우게 되는데 '맛디아' 등 다른 여러 형제들이 11 사도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나타나신 사실을 말함-즉 다음 구절에서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다는 사실과 같다)(고전 15:6) 그 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

현재 부활해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영으로써가 아니라 친히 몸으로-비록 그 영광의 광채 때문에 빛 외에는 주님의 형상을 직접 뵙지는 못했으나-유일하게 나타나신 예가 바울의 경우이므로 아래 그 내용을 수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註). (행 9:3) '바울'(당시는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가는데 (행 26:13) 때가 (행 22:6) 오정쯤 되어 길에서 보니 홀연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큰 빛이 그와 그 동행들을 둘러 비추므로 (행 26:14) 일행이 다 땅에 엎드러져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다" 하셨다.

(행 26:15) '바울'이 대답하기를, "주님, 누구이십니까?". (행 9:4)(행 9:5)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행 22:8) '나사렛' 예수다" 하셨다. (행 22:9) '바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바울'더러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해 말을 못하고 섰었다).

(행 22:10) '바울'이 말하기를, "주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주님,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으니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행 26:16) 네 발로 서라.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행 9:6) 네가 하기로 작정된 모든 일을 거기서 누가 일러 줄 것이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종一심부름꾼)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행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용서 받고 나를 믿어 거룩케 된 사람들 가운데 있어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상속 받도록 하게 할 것이다" 하셨다.

(행 9:8) 바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행 22:11) 그 빛의 광채를 인해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행 9: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행 9:10) 그 때에 '다메섹'에 (행 22:12) 율법(모세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는데 주님께서 환상 중에 불러 말씀하시기를, "'아나니아'야" 하시므로, 대답하기를,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니 (행 9:11)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 직가(直街-"straight street")라 하는 거리로 가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행 9:12) 그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 하시므로, (행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기를, "주님, 이 사람에 대하여 제가 여러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聖徒)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사람이라 합니다. (행 9:14) 여기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 받고 있습니다" 하니, (행 9:15)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다.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될지 내가 그에게 나타낼 것이다" 하셨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 '바울'에게 안수하며 (행 22:13) 곁에 서서 말하기를, "형제 '사울'아, 주님 곧 그대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어 그대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니 (행 9:18) 즉시 '사울'('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즉시 그를 쳐다보게 되므로 (행 22:14) 그가 또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그대를 택하여 그대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義人-그리스도를 지칭)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 22:15) 그대가 그대의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위해 증인이 될 것이다. (행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는가? 일어나 주님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그대의 죄를 씻으라" 하였다. (이에 '사울'이)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9) 음식을 먹으니 강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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