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4일 토요일

확대 로마서 (2)ㅡ끝







확대로마서 (2)ㅡ끝
[The Epistle to the Romans, Enlarged, Combined and Classified]





분쟁

(고전 1:11) 내 형제들, 글로에의 집 편으로 여러분에게 대한 말이 들리니 여러분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고전 1:12) 다름아니라 여러분이 제각기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세례를 받았느냐?

(고전 1:14)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여러분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니 (고전 1:15) 이는 아무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고전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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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세례 주는 것 자체에 어떤 권위를 두어 특정인만이 세례를 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 친히 세례를 베푸신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므로 따라서 누구를 통해 세례를 베푸시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세례를 주는 중대한 일[에티오피아 전국의 복음 전도에 도화선이 되는]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통하시지 않고 집사 빌립을 시키셨던 것이다. 바울이 전도를 했으니 바울 자신이 세례를 베풀만 한데도 다른 사람에게 세례 주는 것을 맡긴 것도 그런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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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3:1) 형제들,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 (고전 3:2) 내가 여러분을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했으니 이는 여러분이 [밥으로 먹는 것을] 감당치 못했기 때문이거니와 지금도 못할 것이다. (고전 3:3) 여러분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이들이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세상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4)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 편이라" 하니 여러분이 [세상]사람처럼 하는 것이 아니냐. (고전 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님께서 각각 주신 [은사]대로 여러분들로 하여금 믿게 한 일꾼[使役者]들이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자라나게 하셨다.

연로한 자

(딤전 5:1) 연로한 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부친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딤전 5:2) 늙은 여자를 모친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딛 2:2) 늙은 남자로는 절제, 경건, 자제심, 믿음, 사랑, 인내에 온전케 하고 (딛 2: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여 [남을] 흉보지 말며 술 취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이들이 되고 (딛 2:4)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딛 2:5) 자제할 줄 알며 순결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다. (딛 2:6)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도 권고하여 자제하게 하라.

과부

(딤전 5:3) 참 과부인 과부를 돌보라. (딤전 5: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이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딤전 5:6) 놀기를 즐기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다. (딤전 5: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딤전 5: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사람은 나이 60이 덜되지 않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이로서 (딤전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거룩한 형제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따른 자라야 할 것이다.

(딤전 5: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딤전 5: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는다. (딤전 5:13) 또 그들이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험담하며 남의 일에 참견하며 마땅히 않을 말을 하니 (딤전 5: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림으로 대적자(對敵者, 사단)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한다. (딤전 5: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이들도 있다.

(딤전 5: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로 짐 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다.

상전과 종의 관계

(골 3:22) 종들이여, 모든 일에 [(엡 6:5)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신[육체]의 상전(上典)들에게 순종하되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두려워하여 [(엡 6:6)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엡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님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註-골로새서와 똑같은 내용이 에베소서에도 나오므로 여기 한데 합친 것].

(골 3:24) 이는 주님 주실 상속(相續) 분(分)을 그 상[reward]으로서 받을 줄을 앎이니, 여러분은 주님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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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을 섬기든 그것이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므로 사람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기(고후 5:15)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상(賞, reward) 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빌 3:8)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9) 결과를 스스로 이루는 것임을 마땅히 명심할 일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께 잡힌 바가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빌 3:12]고 한 대로, 우리의 구원은 내가 구원 받음으로써 "나의 구원을 쉴 새 없이 이루어가는" 것을(2:12) 말하는 양면(兩面) 동시성(同時性)이 그 특징인 것이다. 왜냐면 갑과 을의 하나됨에서 갑은 쉴 새 없이 을을 위하고 을 역시 쉴 새 없이 갑을 위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라고 그 위함을 그치거나 멈추면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인즉 그 둘의 하나됨 역시 그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생명)이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말할진대 이 둘이 하나됨이 그쳐지면 자동적으로 나의 구원은 와해되는 그런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인즉 나는 이미 구원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 구원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 핵심으로서 사랑은 쌍방이 동시에 움직이는 양면성의 특질을 지니므로 나 역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필수이고 필연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원리, 삶의 이치가 바로 그런 한 몸 구조에서 머리를 몸은 위하고 몸을 머리가 위함으로써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은 나를 위하시는 그리스도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으로써 항상 붙잡고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구원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게 생명(영생)을 주시는 것으로써 착각하는 이들이 오늘날 거의 전부인데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아도 영생에 들어간다고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데, 그래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 성경이요 그 중의 몇 구절이 바로 위에서 말하는 바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섬김"(골 3:24)이라 하는 것이요, 그래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 하는 것이다. 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곧 우리를 다시 출생하게 하신(요 3:3) 하나님의 새 창조[고후 5:17/엡 2:10/갈 6:15]의 의도이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는 만큼 그리스도 역시 나를 위하실 수밖에 없으므로 열매를 맫는 것도 차등이 생겨 "30배, 60배, 100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치대로 하면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도 아무리 나를 위하시고 싶어도 위하실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제약하는 것"(to limit the Holy One-시 78:41[흠정영역])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믿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예수님도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낼 수 없었던 것이다(막 6:5,6).

이것이 바로 "나를 시인하면 나도 그를 시인할 것이요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부인할 것"[눅 12:8,9/마 10:32/딤후 2:12]이라 하신 엄중 경고의 근거인 것이다. 그러니 "항상 복종함"(빌 2:12)으로써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의 이치로써 "두렵고 떨림으로"(:12) 즉 이 세상은 시험의 무대요 이 세상 지배자요 신(神)인 사단이 시험하는 자로서 눈에 불을 켜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므로(벧전 5:8) 각자의 구원 즉 "너희 구원을 이루라"(:12)는 것이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경고한 바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여 멸망하고 있다"(빌 3:18,19)는 것도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원수"라 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을 부인하고 신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고후 5:14,15)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새 생명으로 다시 출생하여 새로이 창조된 것이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된 구조로 된 것 즉 한 몸의 체제에서 머리든 몸이든 자기 부인이 핵심이요 생명으로 철두철미 상대(몸이든 머리이든)를 위하는 것임을 부인하고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15).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 것이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요 8:28] 하심과 같으니, 이는 다름아니라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이 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을 본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대해 어떤 자세로 임하셨는지 아는 것은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께 마땅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을 근거로 하여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떠나시지 않는 것이다. 즉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하심 즉 둘이 하나되는 근거는, 아들께서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본을 보이신 그대로 행하심에 있고[요 5:1914:10]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말씀만을 말씀하심에 있는 것이다[요 8:28/8:38/12:48/14:24].

이런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아들께서 아버지로서 나오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심에 비롯된 것이니 곧 아버지 친히 아들에게 본을 보이신 결과인 것이다(요 5:19).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며 을은 갑이 자기를 위하는 줄을 알기 때문에 전적으로 갑을 위하는 그런 명확한 구도(構圖)인 것이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렇게 위하시는 줄 믿었으므로(갈 2:20) 즉 그리스도 친히 내게 본을 보이신 그대로 나도 그리스도를 그렇게 위하는 것이다(고후 5:15).

그러므로 나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으므로(요 20:21) 즉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렇게 되었으므로(:22) 그래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으로써 구원이 되었으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 나의 먹을 양식"(4:34) 곧 생명선(生命線)인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양식"을 먹어야 하고 먹지 않으면 그 존재는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즉 그 모든 계명을 지키고 그 뜻을 지켜 행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다.

두렵고 떤다는 것은 아담과 같은 "미친 마음"(전 9:3)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이 세상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고 있는 동안은 품을 수 있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일방적으로 지켜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다. '양변 동시성'의 원리를 따라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즐거이 그 뜻을 행하고 그 모든 계명을 지켜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고후 5:9-11/고전 7:32-34/히 12:28/롬 12:2) 것이 있을 때에 한해서 그 지켜 보호하시는 능력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이다.

즉 내가 내 스스로 나의 구원을 이룬다고 내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한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철저히 그리스도의 능력이시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하다. 즉 "나를 붙잡아 주시는"(빌 3:12) 그 능력으로 내가 그렇게 이룰 수 있고 달려갈 수 있음이니, 이전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또는 오늘날 세상 종교처럼 자신의 구원을 이루려는 것과는 180도 차이가 있다. 그들은 입으로는 아무리 이룰 수 있다고 해도 가상에 불과하고 꿈으로 그치지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어 우리에게 "권능"(행 1:8)이 되어 계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능히 이룰 수 있는 그런 차이도 물론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 하고 우리는 능히 그리스도 안에서 이를 수 있는 일을 이루어 가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는 나의 생명 자체가 그리스도이신데(골 3:4) 모든 행함과 믿음과 노력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지 않는 것이 없어 신종일관해서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지 나란 것, 나에게 속한 것은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다음의 결실 곧 다시 출생함이요 새로이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뿐이다. 이것이 사랑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즉 자유 의지다. 완벽한 자유를 주심은 이 사랑이 생명의 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 즉 전체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구원이지만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 즉 머리로서의 하나님 지시를 따라 움직이려 하는 마음이 없을 때는 그 구원은 그림의 떡인 것이다. 생명 자체가 한 몸의 원리로 말미암은 것인데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몸(의 각 지체가)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런 말되 안되는 행동을 여전히 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는 절대로 구원이 임할 수 없고 그런 이들에만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구원도 예외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 사랑하는 자를 위한 구원이라(고전 2:9/약 2:5/1:12/행 5:32/히 5:8) 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한" 구원이라 하여 자기중심의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하시다고 착각하지 말 것이다. 사랑의 원리 즉 한 몸 체제에서의 자기 부인이니 자기중심과는 정반대 개념임을 명심할 일이다. 즉 죄인과 악인의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우러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부인 즉 일체 당신 자신을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하는 사랑에서 (바로 그 때문에) 상대 역시 자기를 사랑하도록 하심인 것이다. 이것이 머리와 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사랑하지 않는 몸이 어디 있고 몸을 사랑하지 않는 머리가 어디 있는가, 자기 분신 곧 자기 자신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렇게 하나님을 머리로서 사랑하는 자에 한해서 적응되는 구원이라고 성경은 처음부터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처음에는 믿어 순종을 결의해 살고자 해도 중도에 마음이 변하는 경우(자유는 최대한으로 보장되어 있으므로) 역시 마찬가지니, 자연스럽게 그 한 몸 구조에서 탈락 또는 이탈될 수밖에 없음이다].

여전히 악령 사단의 뒤를 따르고 아담의 전철을 밟는 것을 "두려워하고 떨지" 않으니 사단의 자업자득에 의한 멸망과 아담의 죽음의 결말과 동일한 운명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이 둘의 하나되는 이치는 바로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구조와 체제로서 만일 어느 쪽이든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한 몸'에서 격리되고 스스로 이탈하는 것이니 생명과 대립되는 죽음밖에 있을 것이 없다.

사단 등 악령들이 이런 이치를 알면서도 범죄하고 결국 멸망에 이르는 운명에 처해진 것이 아니다. 알기는 알아도 믿지는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한 몸의 이치로 나가지 않아도 그래서 자기 욕심대로 나가 자기중심이 되어도 무슨 묘한 수가 생길 수도 있다는 환상에 빠진 것이다. 명령에 거역하고 기존 질서를 무시하는 등의 일체의 행위들이 바로 이런 엉뚱한 데에 자신감을 나타내는 교만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을 멸망의 앞잡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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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니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님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아는 것이다.

(딤전 6: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다. (딤전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다.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딛 2:9)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역하여 말하지 말며 (딛 2:10)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다.

(벧전 2:18) 사환(使喚, 피고용인)들이여,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고용주]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벧전 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엡 6:9) 상전들이여, 여러분도 종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골 4:1)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 것이니 여러분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과 여러분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차별하시는 일이 없는 줄 여러분이 앎이다.

아내와 남편 관계

(골 3:18)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님 안에서 마땅하다.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 하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다. (엡 5:24) 그러니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 것이다.

(골 3:19)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엡 5:25)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해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 것이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엡 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니 (엡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肢體)임이다.

(엡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엡 5:32) 이 비밀이 크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 (엡 5:33) 그러나 여러분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두려워하라].
(벧전 3:1) 아내된 이들이여,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順服)하라. 이는 혹 도(道, 말씀)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 3:2) [아내된] 여러분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다.

(벧전 3:3) 여러분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벧전 3: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의 온유함과 안정된[조용한, 정숙한, 얌전한, 말수가 없는, 온화한, 평온한, 수수한, 은근한] 심령[gentle and quiet spirit]의 썩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다.

(벧전 3: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했으니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主, 주인)"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여러분이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동요하지 아니함으로써 그의 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벧전 3:7) 남편된 여러분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여러분의 아내와 동거하고 그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함이다.

부모 자식 관계

(골 3:20) 자녀들이여, 모든 일에 부모에게 [(엡 6:1) 주님 안에서] 순종하라. 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다[이것이 옳다]. 자녀들이여,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여러분의 부모를 순종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엡 6:3)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할 것이다" 했다.

(엡 6:4) 또 아비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골 3:21)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다] 오직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딤전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

음행하는 자를 내어 쫓으라[교회 내의 문제]

(고전 5:9) 내가 여러분에게 쓰면서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했거니와 (고전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 탐하는 자들, 착취하는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고전 5:11) 내가 여러분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이가 음행하거나 탐욕스럽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욕설을 하거나 술 취하거나 착취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이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다.

(고전 5:12) 외부 사람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여러분 내부의 사람들이야 여러분이 판단치 않을 것이랴. (고전 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여러분 중에서 내어 쫓으라.

교회 치리(治理)

(고후 12:20) 내가 갈 때에, 내가 보기를 원하는 바대로 여러분을 보지 못하고 나 또한 여러분이 원치 않는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보여질까 염려함이니, 여러분 중에 다툼,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중상(中傷)함, 수군수군 하는 것,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염려하고, (고후 12:21) 내가 다시 갈 때에 또한 내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서 나를 낮추실까 염려하고[註-교회의 "육신" 상태를 보고 바울이 지나치게 엄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 결과 바울 자신이 죄를 짓거나 혹은 죄 짓는 일로 나아감이 있을까 하여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조처하심으로 바울의 나약한 모습이 교회 앞에 드러나지도록 하신다면, 이 일이 결코 교회 앞에 덕이 될 일은 아니기에], 또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 음란함, 호색 함을 회개치 않음을 인하여 내가 근심하게 될까 염려한다.

(고후 13:1) 내가 이제 세 번째 여러분에게 갈 터이니 "두 세 증인의 입으로 사건은 정리될 것이다". [註-구약 신명기 19:15의 인용구로서 교회 치리(治理)의 의지를 밝힘]. (고후 13:2) 두번째 대면 했을 때 이미 말한 바 있듯이, 전에 죄 지은 사람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내가 지금 떠나 있지만 미리 말해 두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고후 13:3)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여러분이 찾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약하시지 않고 도리어 여러분 안에서 강하시다.

믿는 형제들끼리 법정 다툼을 해서야

(고전 6:1) 여러분 중에 누가 다른 이와 관계된 사건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소하고 거룩한 형제들 앞에서 하지 않느냐? (고전 6:2) 거룩한 형제들이 세상을 판단할[to judge] 것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여러분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to judge] 것을 여러분이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4) 그런즉 여러분이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세우느냐? (고전 6:5) 내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니 여러분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 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전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고소할 뿐더러 믿지 않은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 6:7) 여러분이 피차 고소함으로 여러분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으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않으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냐. (고전 6:8) 여러분은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여러분의 형제다.

순종치 않거든 그와 사귀지 말고

(살후 3: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살후 3: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치 말고 형제 같이 권하라.
(고전 4:21) 여러분이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전 5:1) 여러분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다. 누가 그 부친의 아내 [즉 의모(義母, a stepmother, a foster mother)를 취했다 한다.

(고전 5:2) 그리하고도 여러분이 오히려 교만해져서 어찌하여 통탄하지 않고 그 일 행한 자를 여러분 중에서 물리치지 않았느냐? (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이를 이미 판단했다[judged]. (고전 5:4)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전 5:5) 이런 사람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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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이 일의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방인 가운데서도 없는" 그런 정도의 일은 역시 하나님의 교회로서도 용납 못한다는 사실로서 그것을 절대로 묵과하지 않고 그 육신은 반드시 멸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갈 5:13)는 경고가 생각이 나는 대목이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합법적이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전 6:12)는 대목도 생각나게 한다. 이것을 '내가' 해도 좋으냐 하는 데에 초점이 있지 않고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그리고 '내 이웃'에게 사랑으로 종 노릇 함이냐 그 여부에만 있음을 가르친다.

여기 이 바울의 편지에서는 그것이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어 있는지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역시 분명한 사실은 그 육체는 멸해도 영혼은 구원될 수 있는 경우이니, 그 범죄의 성격이 알면서도 지은 즉 고의적인 범죄(히 10:26/요일 5:16) 유형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불가피하게 어쩌다가 그런 결과가 되었고 그 당사자의 개인적인 욕심에서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기에 그런 것인지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여기서 명백해지는 또 하나의 사실은, 비록 개인적인 구원에는 지장이 없을지라도 그 어떤 형태든지 (세상에서도 불합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죄라는 것은 절대로 용납되지 못한다는 하나님 교회의 엄정한 성경의 기준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시는 사도적인 권위와 능력과 징계가 확립되어 있어 그런 종류의 범죄자들을 "사단에게 내어 줄" 정도로까지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나,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렇게 가시적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도로 교회가 한 치 양보 없는 성결(聖潔, holiness and purity)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이와 같이 밝혀진 이상 우리가 이 표준에 따르느냐 여부로 가려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밝히고 있는 바울 사도의 표현으로 판단하건대 이 범죄자는 이렇게 육신이 멸해짐으로써 그 영이 구원된다는(이는 그 어떤 경우에서든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질서 확립 차원에서) 뉘앙스를 풍기고 있으므로, 오늘날 그런 사도적인 권위를 볼 수 없는 처지에서는 (그 이유가 사도라는 직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전반적인 교회 타락에 있다고 보지만) 오직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각자 스스로가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바로 이런 점에 있으니 세상은 변하고 사람의 인식은 변해도 즉 진화하지 않고 갈수록 퇴화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으로써 그 영원한 기준을 정하셨으니 항상 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따르기로 작정하고 충실히 이행하면 하나님의 의중(意中)에서 벗어날 일이 없음을 이로써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만한 마음은 절대로 금물이고 시종 일관되게 "겸손으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벧전 5:5,6/1:3) 매사 임할 일이다. 우리의 본이 되기로 노심초사한 바울의 특징은 "모든 겸손과 눈물"(행 20:19/)이었음을 항상 상기할 필요가 있다(골 3:12/빌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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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5:6) 여러분의 자랑이 옳지 않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5:7) 여러분은 누룩 없는 이들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릴 일이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다. (고전 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유월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원한이나 악독의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註-그 때 첫 유월절 당시나 그 후로 계속해서 유월절에 모든 이스라엘은 누룩 없는 떡을 먹었던 것]으로 하자.

이간 붙이는 자들이 언제나 생겨

(갈 4:12) 형제들,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은즉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한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내게 해가 된 일이 없다. (갈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병고(病苦)]을 인하여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여러분이 아는 바로서 (갈 4:14) 여러분을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나 이것을 여러분이 업신여기지도 않으며 버리지도 않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같이 영접했다.

(갈 4:15) 여러분의 그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여러분에게 증언하지만 여러분이 할 수만 있었더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을 것이다[註-당시 바울이 안질을 앓고 있었던 듯]. (갈 4:16) 그런즉 내가 여러분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 4:17) 그들이 여러분을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여러분을 이간 붙여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들을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다. (갈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여러분을 대했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요삼 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않으니 (요삼 1: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게 폄훼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않고 접대하고자 하는 이들을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고 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 교회

(딤전 3: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註-처소를 말함이 아니라 전체 믿음의 식구, 가족을 의미]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고 이 편지를 네게 쓰는 것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교회 구성원

(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 (고전 1:26) 형제들, 여러분을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이가 많지 않으며 능한 이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이가 많지 않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니

오직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고전 1:30)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기록된 대로 "자랑하는 이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게" 하려 함이다.

모이기를 더욱 힘쓰라

[히 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중복] [히 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중복][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물이 없고[중복] [히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중복]

날을 중히 여겨도 주님 위해 중히 여기고

(롬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사람은 채소를 먹는다[중복]. (롬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일이다. (롬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이도 주님을 위해 중히 여기고 먹는 이도 주님을 위해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이도 주님을 위해 먹지 않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 함이 좋다

(고전 7:1) 여러분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 함이 좋으나 (고전 7: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고전 7: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 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 것이다. (고전 7: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니 (고전 7:5) 서로 방[거처하는]을 나누지[별거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여러분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여러분을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註-초대 교회 믿음의 식구들이 얼마나 기도에 힘썼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 증거라 하겠다].

(고전 7: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고요 명령은 아니다. (고전 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註-바울 자신처럼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선물)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 (고전 7:8) 내가 결혼하지 않은 이들과 과부들에게 말한다면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고전 7: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불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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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정욕이 불 같이 탄다"는 말은 원문에는 없고 그냥 "타는 것(to burn)"으로만 되어 있다. 이는 앞 구절대로 "절제할 수 없어" 범죄함으로 인하여 심판의 대상이 되면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갈 것이므로 그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났다는 그 뜻으로 수용함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남녀 정욕을 마치 불타는 것처럼 불가항력인 것처럼 과장해서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고 독신으로 지내는 자기 자신[바울]처럼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도 천국을 위해 고자되는 자도 있다고 하시고 누구든지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신 것이다. 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처음부터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한 제자들의 질문에 이를 시인하신 것이다. 다만 사람마다 이를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인정하신 것이다(마 19:10). 지금은 그리스도의 시대요 '천국에 들어가는' 또 '천국을 전파하는' 시대다. 천국을 위해 홀로 지내는 일이 바울 사도의 지적처럼 "더 복된"(고전 7:40) 것이고 누구나 이를 받을 만하면 받도록 적극 권장하는 시대다.

이 "받을 만하다" 또는 "못하다"는 것은 개인의 육체적 여건이 아니라 각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의지에 달렸다고 해서 구원과 연관된 문제는 아니니, 같은 열매를 맺어도 혹자는 30배, 혹자는 60, 100배의 차이가 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다른 의지(意志)가 아니라 사랑의 의지다. 사랑함에는 일반인 것이니 구원의 요건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갈 5:6). 고로 열매 맺음의 차이가 구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과 같음이다.

그리고 또한 천부적인 의지력이라기보다 그런 사랑의 열심에서 우러나는 각자의 선택일진대,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드러내는 능력은 우리 각자 개인의 것이 아니라 주님 친히 베풀어 주시는 능력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천부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가 상대하는 이는 이러한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기만 하고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그 결단에 걸맞게 얼마든지 능력을 베푸시는 것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주님 말씀에 음행의 연고 외에는 사람이 그 짝이 된 남녀와 피차 나누어질 수 없다 하실 때 갈라설 수는 있으나 재혼할 수 있다는 말씀이 없으신 점에 유의할 일이다. 재혼은 상대(남편이나 아내)가 사별했을 때에만 한하고 그것도 반드시 "주님 안에서 한다"(고전 7:39)는 단서가 붙게 되어 있다. 왜냐면 주님의 뜻을 따라 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고후 5:15] 때문이다.

혹자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롬 7:1,4)이라 하였다.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왜 여전히 사는 것처럼 율법에 얽매여야 하느냐?". 그 정확한 의미를 말하면 바로 이렇다.

즉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고 오직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롬 3:20)뿐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21]라 했다. 이 설명만 들으면 마치 율법이 우리 생명에 관한 한 무용지물처럼 착각될 수도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선언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718) 하신 것이다.

이에 따라 바울 역시 강조하기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냐? 그럴 수 없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 3:31] 하였다. 따라서 성경의 설명을 잘못 이해한 탓이니 즉 그리스도 없이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는 것이 무익하고 무의미하다는 뜻이지(왜냐면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여 오직 죽어 있는 자 곧 죄인임을 깨닫는 데에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어 먼저 의롭다 여기심 받은 연후에야 지켜야 하고 또 능히 지킬 수 있는 율법이기에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고전 9:21]란 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원래의 하나님의 율법(계명) 다시 말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의 의미를 자기 부인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원래의 뜻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더 엄중하게(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 지키게 되어 있는 그러한 '실체'에 대한 단지 '그림자'의 형태로서 모세가 말한 이른바 '모세 율법'은 "의문(儀文)에 속한 것"(엡 2:15) "의문의 묵은 것"(롬 7:6)이었으니, '실체'로서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대신에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고 할례를 받는 등으로 조목 별로 명시한 내용을 준수함으로써 대용(代用)해 온 것이었다.

모세 당시는 계명 자체를 지킨다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모세를 통해 그림자로서의 의미로 내리신]에 순종하는 순종에 역점을 둔 것이다. 이 믿음[하나님을 믿는]에 의한 순종이라는 본질에서는 그림자로서의 모세 율법이나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에서나 의미는 똑같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런 믿음으로 이미 그리스도 오시기 전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구원됨을 상징하고 있었던 사실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모세의 율법을 표현하여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다"(롬 7:1),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5,6]라고 한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할례 받고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갈 4:10) 등의 일을 말한 것이다.

바울 당시(초대교회 혹은 사도들 당시)는 모세 율법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시대로 갓 넘어온 터라 혼동과 마찰이 없잖아 있어,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 중에 "그리스도만 아니라 할례도 받고 기타 모세 시대에 지켜 오던 것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 교회를 혼란케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를 위시해서 바울 서신들을 보면 이 점에 대해 유달리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오늘날 우리와는 일면 전혀 상관이 없는) 사정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는 이와 같이 모세 율법까지 지켜야 구원된다고 말한 것은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갈 6:12] 한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자기중심의 발로였고, 오늘날은 거꾸로 "하나님의 계명을 부득이 지키지 않아도 구원은 된다" 식으로 주장하니 자기중심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욕심대로 살고 이 세상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니 자연 그런 주장이 안나올 수 없음이다.

자기와 짝을 이루었던 상대가 아무리 현재는 갈려졌다 해도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에 재혼해서는 안되는 것과 "결혼을 금하는 것"(딤전 4:3)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다"(막 10:9)는 것은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 무조건 그리 되는 것으로서 창녀와 관계를 가져도 한 몸이 되는 까닭이다(고전 6:16). 결혼이라는 것을 아담의 범죄 이전과 이후를 따져 볼 때 현재 상태는 저주의 하나임을 기억할 일이다.

저주 받아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게 되고 여자는 남자를 넘보고 주관, 주장하려는(창 3:16-여자가 남자를 "사모한다"는 우리말 번역은 잘못된 것이니 이 대목은 "죄의 소원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리라"[창 4:7] 하신 대목과 똑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죄가 너를 덮치려 노리고 있으니 너는 죄를 부득불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그 어느 인간도 죄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죄가 너를 사모한다"는 의미는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상태가 결코 복된 관계일 수가 없다.

고로 결혼을 해도 불행하고 아니해도 불행하다는 말도 있듯이, "하나님이 복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심은 아담의 경우 범죄하기 전에 주신 말씀이시고, 노아의 경우(9:1)는 이미 범죄로 저주 받아 세상이 망한 다음이라 인간이 희귀했기 때문이다. 복이 아니라 저주만이라면 그런 생육과 번성마저도 있을 수 없다. 생육과 번성은 하되 결혼생활의 행복과는 별개인 것이다. 생물적 욕구 충족과 행복한 생활이 병행하지 않으니 저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이들이야 그런 생물적 욕구 충족을 행복의 한 도구로 삼을지는 모르나, 그리스도 사람들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권능"(행 1:8)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 보내신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요 4:34) 그 자체이고 최대 목적이므로 바로 그 목표를 위해 바울처럼 혼자 지낸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 주심이다. 오직 믿음에 따름이니 믿지 못하면 아무 능력도 받을 수 없으니(약 1:6/4:2,3) 능력이 자동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속성이 "무엇이든 그 자체적으로 속된(unclean) 것이 없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된"(롬 14:14) 것이 되어 버리는 그런 놀라운 측면이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 정신적 결의와 목표에 육체는 자연 따라오게 마련이다. "먹는 것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는 것도 그런 일면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인간으로서 식욕보다 더 큰 것은 없으나 이 모두 이와 같이 조정, 조절될 수 있음이다.

때문에 천국을 위해 고자된 자도 있으니 받을 만한 즉 받을 수 있는 자는 받으라 하신 것이요(마 19:12) 바울 역시 사람이 홀로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 한 것이다(고전 7:40).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한 세상 번듯하게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을 멸망으로부터 건져내고자 하는 그런 일념으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한 것이다.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위하고(롬 14:7-9)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으므로(고후 5:15)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이 무너지게 하지 않는다"(롬 14:20)는 일편단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 대목과 같은 것이니 여기서는 "음행의 연고로" 하는 것조차도 없이 무조건 갈리지 말라는 것뿐이요 갈리면 그냥 지내라는 것뿐이요 아니면 다시 화합하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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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7:10) 결혼한 이들에게 내가 명하니 {명하는 이는 내가 아니요 주님이시다}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고전 7: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동정(童貞)을 지키는 일

(고전 7:25) 동정에 대하여는 내가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으나 주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는 바 (고전 7: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고전 7:27)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고전 7:28)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니 나는 여러분을 아낀다.

(고전 7:29) 형제들, 내가 이 말을 하니 때가 단축해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0) 우는 이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다.

(고전 7:32) 여러분이 염려 없기를 원한다. 장가가지 않은 이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고전 7:33) 장가간 이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어지며 (고전 7:34) 시집가지 않은 이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이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 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

(고전 7: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여러분의 유익을 위함이요 여러분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심적 갈등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다.

(고전 7:36) 누가 자기의 동정(virgin)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하고 혼기도 지났고 그 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결혼하라. (고전 7:37)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 자기 동정을 지키기로 마음에 작정해도 잘하는 것이다. (고전 7:38) 그러므로 동정을 버리고 결혼하는 자도 잘 하거니와 동정을 지키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다.

(고전 7:39)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님 안에서만 할 것이다. (고전 7: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을 것이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

(딛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 멀리 하라. (딛 3:11) 이런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해져 스스로 정죄(定罪-단죄)된 자로서 죄를 짓는다.
(롬 16:17) 형제들, 내가 여러분을 권하니 여러분의 교훈을 거역하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롬 16: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다만 자기의 배(腹)만 섬기니 교묘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이들의 마음을 미혹한다.

(딛 1:10)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파(派) 가운데 심하니 (딛 1: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다.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뜨리고 있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딤전 4:1) 그러나 성령께서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 하셨으니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火印-불로 지짐) 맞아서 거짓말하는 위선자들이다. (딤전 4:3) 결혼을 금하고 어떤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할 터이나 음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이들과 진리를 아는 이들은 감사함으로 받을 일이다.

영들

(요일 4:1) 사랑하는 여러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다. (요일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 것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3)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은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다. 올 것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들었으나 이제 벌써 세상에 있다.

(요일 4:4) 자녀들이여[Children], 여러분은 하나님께 속했고 또 그들을 이겼으니 이는 여러분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다.

(요일 4:5)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니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는다. (요일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으므로 하나님을 아는 이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이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안다.

미혹하는 자

(요이 1: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 (요이 1:8) 여러분은 스스로 주의하여 우리가 일해놓은 것을 잃어 버리지 말고 오직 온전한 결실을 거두도록 하라.
(요이 1:10)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여러분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요이 1:11)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사람이다.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않으면 (딤전 6: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딤전 6:5)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난다.

(딤전 6:6) 그러나 경건 중에 분수를 지켜 족한 줄로 알면 이것이 큰 이익이 된다.

(딛 3:9)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다.

(약 5:19) 내 형제들, 여러분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약 5:20) 여러분이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딤후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印) 침이 있어 이르기를,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마다 불의에서 떠나라" 했다. (딤후 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으니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니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딤후 3:15와 연결되나 특별한 의미는 없음-註].

거짓 선생들

(유 1:3)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일반적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거룩한 형제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道)를 위해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여러분을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으니 (유 1: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다.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않아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色慾)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主宰)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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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하나이신 하나님"으로 표현되었으니 한 분밖에 없는 것처럼 들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뜻이요 하나님은 하나로서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면 아버지와 아들 둘이시지만 표현되기는 언제나 "하나"로서 나타내어지심이니 실제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영역으로 "only"라고 되어 있으나 "one"이라 함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하나"라 할 때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아들의 모습이시고 아들의 모습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신 것이다.

그러나 '둘이 하나되심'이므로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이 엄연하다. '모습' 또는 '표현'이 하나이신 까닭이다. 다시 말해 형체와 실체는 양립되어 있으나 형체는 실체를 나타냄이요 실체는 형체를 통해서 나타나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와 같으니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혹은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라는 것이 같은 의미로서 그래서 내 안의 성령께서는 나 자신을 '육체'로 칠 때 그 '영혼'으로 계시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바로 이런 형식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으로 통하는 것이니, 이는 아담이 처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된 후 다음 단계로 그 영혼이 조성된(하나님 친히 그 입김[呼氣, 生氣, the breath of life]을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심으로써] 것과 같은 궤적을 나타내는 새 창조인 것이다. 즉 처음 창조(아담)와 같은 모양새를 취함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서 한 모습을 취함과 같이 나 역시 그리스도와 그러하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영락없는 바로 나의 죽음이요 그 부활은 나의 새 생명 가운데에서의 다시 출생함이요 성령으로 남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히 1:9] 당연히 나도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니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고후 5:15) 때문이다.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진실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요 7:18) 하신 대로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 것"(요일 2:29)이라 한 것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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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1: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한다. (유 1: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한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한다. (유 1:11) 이 사람들에게 화 있을 것이다. 가인의 길을 따라 행하고 있으며 대가(代價-세상에서 얻는 부귀 또는 영화)를 바라고 발람[구약 인물]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가며 고라[구약 인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는다.

(유 1:12) 그들은 기탄없이 여러분과 함께 먹으니 여러분의 애찬(愛餐: love feasts, 성찬식을 의미)의 암초(暗礁-물 속에 숨어 있어 뱃길에 방해가 되는 바위)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牧者)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없는 구름[비가 귀한 유대 땅에서 구름이 나타나면 무엇보다 반가우나 비 없이 그냥 바람에 밀려 훌쩍 떠나 버려 환멸을 느끼게 하는]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유 1: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암흑에 돌아갈 떠도는 별들이다.

(유 1:14) 아담의 7세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라! 주님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이들과 함께 임하셨으니 (유 1: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셔서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님께 거역하여 한 모든 강팍한 말을 인하여 그들을 단죄하려 하심이다" 했다.

(유 1: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이니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욕(利慾)을 위해 아첨한다. (유 1:17)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유 1:18) 그들이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mockers]들이 있을 것이다" 했으니 (유 1: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sensual, to follow mere natural instincts, to be controlled by their natural desires]며 성령은 없는 자이다.

(벧후 2:1)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으니 이와 같이 여러분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을 것이다[행 20:30]. 그들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님을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다.

(벧후 2:2) 여럿이 그들의 호색(好色)하는 것을 따를 것이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the way of truth]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벧후 2:3) 그들이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여러분으로 이욕(利慾) 거리를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않으며 그들의 멸망은 자지 않는다.

(벧후 2:5) 옛 세상을 용서치 않으시고 오직 의(義, 올바른 것)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않은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벧후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ash]가 되게 하셔서 후세에 경건치 않을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벧후 2:8)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그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었다.}

(벧후 2:9) 주님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 2: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하나님]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안다.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이를 훼방하거니와 (벧후 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님 앞에서 그들을 거역하여 훼방하는 고소를 하지 않는 것이다. (유 1: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하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한다" 했거늘

(벧후 2: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해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벧후 2:13) 불의의 대가로써 도로 불의를 당하며 낮의 연락(宴樂)을 즐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다. 여러분과 함께 연회(宴會, 성찬식)할 때에 그들의 간사한 가운데 즐거워하며 (벧후 2:14) 음심(淫心)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않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길들여진 마음의 소유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다.

(벧후 2: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구약 인물]의 길을 따른다. 그는 불의의 대가(代價)를 좋아하다가 (벧후 2: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을 때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제지했었다.

(벧후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로서 그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으니 (벧후 2:18) 그들이 허황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벧후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무엇에든 사로잡혀 있으면 그 사로잡힌 자는 종인 것이다.

'네피림'을 생성시킨 악령들에 대한 처벌

(벧후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않으시고 지옥[헬라어로, 'Tartarus']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분수]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黑暗)에 가두셨으며 (유 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色)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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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범죄한 천사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넣어 심판 때까지 지키신다 했는데, 이들은 네피림을 만들어낸 주역(主役)들이다(창 6:4). 계시록에 보니 적 그리스도 즉 "짐승"이 "무저갱(無底坑: 밑바닥이 없는 구덩이-bottomless pit)"으로부터 올라온다 했다(계 11:7). 창세기에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가 원수가 된다고 하셨다(창 3:15). 사단의 후손은 누구인가. 여자의 후손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도 역시 인간이어야 서로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네피림"(6:1-4)을 말한다. 즉 사단이 그렇게 해서 나은 "자식"이다.

네피림은 악령들과 인간 사이에 난 인간 종족이니 그러므로 이런 짓들을 감행한 악령들은 무저갱에 들어간 것이다. 사단 역시 그들 중의 하나인데 사단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 세상 지배자가 되어 있는 고로 무저갱에 들어가는 대신 즉 그 아비 대신으로 그 자식[seed]이 무저갱에 들어간 것일까. 악령들의 두령인 만큼 사단은 그 자식으로서 여럿은 두지 않고 단 하나만 낳았던 것일까. 아니면 여럿 중에서도 출중한 맏아들 같은 위치였을까. 어쨌든 그 아비를 대신하여 들어갔다고 보아야 옳다.

귀신들도 쫓겨날 때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했다"(눅 8:31)고 했으니 네피림도 여차하면 들어갈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 짐승을 가리켜 "전에 있었고 지금은 없고 장차 나타날 자"(계 17:8)라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세상에 있다가 지금은 없다고 했으니 죽었다가 다시 세상에 나오는데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고 했으니, 네피림은 죽으면 귀신이 되어 남는 것으로서 이 지상에서나 유리 방황하는 것이지 무저갱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데도 들어가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무저갱은 말하자면 사단이나 악령들이 낳은 네피림이 들어가는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나가기까지의 유폐된 유치장[임시로 가두어 두는 곳] 같은 데라 할 것이다.

이상 사실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해 주는 대목이 바로 유다서 6-7절이다. 베드로 후서와 유사한 내용으로서 역시 범죄한 천사들에 대해 말한 다음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色)을 따라 갔다" 했기 때문이다. 우리말 번역 "다른[strange/unnatural] 색"은 성적 부도덕과 문란을 뜻한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모양"이라 했는데 "그들"이란 6절에서 지적한 범죄한 영물들인 것이다.

그러면 그 범죄한 영물들이 인간들처럼 성적인 부도덕성과 문란을 범했다는 것이 되는데 영물들이므로 원래부터 인간들처럼 성적인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행위를 했다고 확언한 것이다. 성적 문란과 부도덕성은 정상적인 성적 관계가 아닌 것 일체를 지칭함이다. 즉 소돔 고모라인들은 여자끼리 또 남자끼리 성행위를 한 것이다. 따라서 "같은 모양"이라면 영물들이 인간들과 성행위를 한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악령들이 아무리 인간 세계가 사단의 세력권에 놓여 사단이 이 세상 신(神)으로 군림해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인간과 더불어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한 것을 하나님께서 묵과하실 리 없다. 그들의 그러한 방자한 짓거리로 네피림이 생기게 된 것은 효과적으로 인간 세계를 장악하고 지배하기 위한 술책의 하나라고도 이해될 수 있으나 성경 기록에 의하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질렀다 했으니 그런 행위에 대한 개별적인 욕심이 작동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악령들의 전부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아니고 개중에 간 큰 자가 몇 있어 그런 범죄 행위를 한 것이다. 왜냐면 사단과 그 사자(使者)들이 천사장 미가엘과 그 사자들과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계 12:7). 무저갱에 갇힌 자가 그 전쟁에 참여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이로 보아서도 무저갱에 들어간 자는 그 중의 일부였음이 분명하다. 귀신으로 떠돌던 네피림의 죽은 영이 이따금 그들나름의 순서를 따라 인간 육체를 입게 되는 모양인데(사단의 자식 적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게 되는 것처럼) 이를 근거로 사단은 환생이니, 윤회니, 전생이니 하는 것들의 증거를 삼아 인류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대로 아담의 후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네피림은 그냥 멸망뿐이다. 아담의 후손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있는 것과 대조적이니, 왜냐면 네피림 혹은 귀신들(그 죽은 넋)은 악령들의 분신(分身)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주님께서 "마귀"(a devil)라 하셨으니 네피림인 듯하다. 이들 귀신들은 마치 아담의 후손인 양 속일 수도 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으니 사무엘 선지자의 혼백으로 가장한 것이 그 예다(삼상 28:13). 사무엘이 네피림일 리는 없는 것이다. 또한 "사무엘의 신"이라 하면서 무당은 "신들이 올라온다"고 복수로 말한 것이다. 우리말 번역은 그냥 "신"이라고만 되어 있다. 사람의 죽은 넋이 복수일 리는 없는 것이다.

이 네피림에 대해서는 사실 관계만 성경이 확인해 줄 뿐이지 어느 누가 네피림이고 그 식별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구별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 전파도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모든 피조물(영역으로, "every creature"-마 16:15/골 1:23)이 그 상대다. 피조물이라고 해서 모든 동식물은 아니니 사람에 한함은 물론이다. 사람이지만 네피림도 포함된다는 그 뜻이다.

그렇다고 네피림이 구원된다는 것이 아니고 이는 다만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의를 사랑하느냐"[히 1:9] "불의를 좋아하느냐"[살후 2:12] 하는 것에 좌우됨을 말하는 것이다. 네피림은 그 성향이 그 아비들의 성향과 같아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불의, 불법, 죄, 악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을 말함이요 자기 부인이 없는 상태를 가리킴이다. 즉 한 몸의 원리로 사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중심으로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는 습성이니 이는 자기 의지가 그런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 얻는 믿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부인이 사랑을 확인함에서 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나를 위하시므로(자기 자신을 모두 나를 위해 선물로 주셨으니) 나도 이에 호응하여 전적으로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려 나의 소유주 곧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말함이다. 죄를 지으면 그것은 당연히 자기 자신을 자기 것으로 여김이니 그리스도의 것이 아닌 것이다[롬 14:7-9].

이 둘이 하나됨의 이치를 따라 남녀 역시 한 몸이 되는데 육체로 하나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남자의 육체는 여자의 것이요 여자의 몸은 남자의 것이 된다[고전 7:4]. 우리 즉 그리스도와 나는 한 영이므로 삶이 그렇게 나는 주님의 것, 주님은 나의 소유가 되어 전적으로 주님은 나를 위해 사시는 것이 되고(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미 이 사실은 만천하에 확증된 사실이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된다(고후 5:15).

그러므로 이렇게 삶을 엇바꾸어 사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이자 요체이므로 세상 따라 자기중심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자기 욕심대로 움직이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함을 성경은 강조하여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고후 5:10) 되어 있어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11)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9) 함이다.

사랑과 생명의 원리에서 갑 격이신 하나님께서 을인 나를 위하시는 것을 입증해 보이셨고 본으로 나타내 주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시므로 나도 을로서의 당연한 본분을 다하여 갑이 지시하시는 것(그 지시 자체가 전적으로 나를 위하심이다)은 그 무엇이든지 기꺼이 열과 성의를 다하여 순종함이니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으로 나를 사랑하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이다(롬 5:8). 그러므로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면 그것이 믿음이고 이 자세를 시종일관 흐트러뜨리지 않으면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도 바로 이 의미인 것이다. 두렵고 떤다는 것은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아담과 같은 실질적인 사례가 엄존해 있기 때문이다. 사단 등 악령들의 범죄도 같은 의미다. 그들 모두 처음에는 그 스스로 범죄하여 멸망 또는 죽음에 이르리라고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두렵고 떨리는 일인 것이다. 물론 이런 때는 이 세상 한 때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세상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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