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1일 수요일

통합 복음 (1)




통관복음서(通觀福音書)

ㅡ메시아 예수님ㅡ




4복음서의 내용을 일괄해서 읽는 의미

한 권의 책에다 예수님 일대기를 기록해두면 될 것인데 왜 네 가지씩으로 기록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가 하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자체 증명으로서 성령의 감동에 의해 그렇게 되어졌음을, 이 통관복음을 읽으시는 중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 읽고 저 책 읽고 그것도 같은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 하는 등으로 시간도 제법 걸리고 그러다 보면 신약성경 복음서를 읽을 흥미를 잃는 수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럴 것 없이 4복음서 전부를 한 책으로 정리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내리 읽는 통독(通讀) 형식이 되도록 엮고, 이를 '통합복음서' 또는 '통관복음서'라 명명했다. 4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을 제외한 3복음서를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 하므로 이런 이름도 무난하리라 여겨서다.

4복음서 자체로서의 가치는 방금 지적했듯이 막중하다. 그런 점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인식하는 한편, 주님의 생애 전체에 대한 명확한 윤곽을 우리가 머리에 담아 두기 위해서는 부득불 이 같이 통독해서 읽을 수 있도록 편집된 것이 있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통합 복음서'만 읽으면 사복음서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근시안적 식견이다. '통합 복음서'는 전체 줄거리를 정확히 파악하자는 것이 목적이고, 사복음서는 제각각의 기술자(記述者)의 안내를 따라 그 특징을 강조한 대로 하나씩 음미해보는 가치가 있음이다.

내용이 중복되는 것은 생략하고 다른 것은 한데 취합(聚合)하여 조화 일치를 기했지만, 각 복음서 장절만은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남겨 두었으므로 그 장절을 따라 각 복음서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성경의 각 구절은 말하자면 흩어져 널려 있는 구슬들이다. 이 하나하나의 구슬들로써는 전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을 제대로 제 위치에 꿰어 놓아야 하는데 이 작업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계시로 말미암지 않고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하셨다(마 11:27/요 14:26). 그러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 둠으로써 우리 편에서의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열심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두드리는 자에게만 문이 열려진다.

용어는 쉬운 현대어로

내용 중에 약간 고친 내용 몇 가지를 말하면 아래와 같다. 가장 먼저, 일반적으로 현재 쓰이는 쉬운 말로 고치는 것 외에도(예를 들어 '옥'은 감옥으로 바꾸는 따위), 자주 나오는 단어 중 "서기관"은 '성경학자', "세리"는 '세관원', 바리새인은 '바리새파' 사람, 사두개인은 '사두개'파 사람, 율법사는 '율법학자' 등으로 고쳐 보았다. 복음서에만 220회 이상 나오는 "가라사대"다. 이래 가지고 어찌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야 된다고 애독하라고 권할 것인가. 벌써 오래 전에 간단히 손 보아 고칠 만한 일도 방치해두고 교회당 건물 크게 짓는 일에만 신경을 쓰는 대체적인 한국 교회야말로 세상 종교의 하나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라는 증거가 아닌가.

사건의 순서보다 내용 중심으로

4복음서를 읽어보면 주님께서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심으로써 강조하여 가르치신 일도 물론 있으나, 내용상 특별히 전후 사정을 살필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한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해서 그 표현의 차이만 표시해두는 것으로 정했다. 즉 말씀하신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각 복음서에서 먼저 기술되고 나중 기술되는 순서 같은 것에는 구애받지 않기로 하였다.
말씀하신 순서를 반드시 밝힐 필요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즉 명확하게 사건 배열이 그 순서가 드러나지는 경우 외에는 말씀하신 때나 사건을 무리하게 차례를 따라 배치할 필요는 없다고 보아, 시간대 별로 나누지 않고 장절(章節) 상의 순서 배열도 무시하고 다만 그 내용을 중심으로 분류 편집하되, 중복되는 일 없이 한 자리에서 그 대목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했다. 4복음서 중 누가복음을 골격으로 하여 그 대체적인 순서를 따랐다.

"예수님" 호칭

"예수"는 무조건 "예수님"이라고 바꾸었다. 성경 번역에는 어쩔 수 없이 번역자 자신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원문이라도 사본에 따라서는 어떤 구절이 빠져있기도 하고 혹 보태져 있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성경에 대한 자기의 이해가 원숙하지 못하면 어떤 구절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한계는 인식 못하고 도리어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닐까 지레짐작해서 마음대로 그것을 고치는 것은 옳은 도리가 아니다.

자기가 이해 못하는 것은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말이나 영어를 막론하고 현대어로 고쳐 쓴 성경이라고 하는 데에서 그런 사례를 더러 본다. 이렇게 되면 '성경'이 아니라 성경 해설서 또는 개인적인 견해와 주장을 펴는 사적인 논설밖에 되지 않는다.그런데도 현대어 성경이라 표제를 달았으니 이득커녕 해독이 더 클 우려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한다 해서 심각한 의미상의 오류가 있다고도 보지 않는 것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주장(主掌)하심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주장하시면 왜 정확무오하게 번역하도록 강제하시지 않느냐 하겠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아 하늘이 땅보다 높음과 같은 것.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든지 적절하고 합당할 수도 있는 일이므로, 그렇게 믿고 오직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일에만 우리의 최선을 다함이 옳은 줄 안다.

우리나라 말은 존대어가 발달하여 그 존대어 하나로 그 말이 담은 의미가 아주 달라지는 그러한 어군(語群)에 속한다. 우리말 번역에 "예수"라고 한 것은 그런 존대어가 분명하지 않은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무조건 아무 식견 없이 무지무식하게 따른 결과다.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인한 것이다. 즉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존대해드리고 예수님은 그냥 단순한 사람으로 알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이나 다 같은 하나님이시나 예수님의 경우 사람이심을 강조하시니까 그냥 보통 사람으로 대접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의 헷갈림에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주님(주인 곧 소유주이니 상전(上典)의 의미다)으로서 현재 내가 모시고 있으면서 그럴 수 없다. 우리를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이시다. 아버지께서는 그래서 아들로 말미암아 만물을 지으셨다고 성경에 밝히고 있다. '말미암아'라는 말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아드님 친히 창조를 담당하신 것이고 아버지께서는 그 안에 계셔서 함께 창조의 일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사람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신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번역자의 미숙한 성경 지식이 계속 우리말 성경에서 이렇게 방치되어 있는 것은 한국교회의 수치다. 웬만한 지위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이 직접 현재 내 앞에 있으면 내가 얼마든지 하대(下待)할 수 있거나 평교(平交)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존대어를 쓰도록 되어 있다. 하물며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께 관해서랴. 여기서 "예수님"이라는 호칭으로 통일시킨 것도 그런 자연스러운 맥락에서다.

예수님은 그 성령으로 지금 현재 내 안에, 내 앞에. 우리 앞에 계신다. 다음 말을 들어보라.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이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고후 4:10-11). 우리 위해 죽으셔서 현재 우리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마치 아이 이름 부르듯 한다.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칭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칭호에는 "님" 자를 붙여도 붙이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고 본다. 그리스도와의 직접 대화가 아니고 그리스도께 관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존함이다. 자기 아버지의 함자(銜字)를 함부로 말하는 이는 없다. 그래서 비록 성경 내용에 대한 설명을 하더라도 이 때는 반드시 "예수님"으로 일관성 있게 표현하는 것이다.

불교 신도들은 그들의 현재 실존하지 않는(왜냐면 죽고 지금은 살지 않으니까) 가상적 교주임에도 불구하고 깎듯이 예를 차려 "부처님"이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부처님"이라 불러 준다. "부처님 오신 날"이 그런 예다. 그러나 소위 기독교인들은 "예수, 예수"  하니 낯 부끄러운 일이다. 심지어는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 운운" 하는 정도다. 기독교인들마저 이런 자기 비하(卑下)를 일삼는다.

성령께 대해서는 우리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다. 이유는 어감상(語感上)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시고 게다가 성령이시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존재가 따로 계시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상적으로 "주님"이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또는 아버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부러 "성령님"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기도할 때 "아버지" 또는 "주님" 하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읽을 때 성경을 처음 대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가 이해가 될 수 있도록 편자(編者)의 견해를 (주[註])로서 곳곳에 삽입해놓았으므로 참작하시면 될 것이다. 이 글은 제1부 탄생, 제2부 가르치심, 제3부 나의 죽음, 제4부 부활一새 피조물의 탄생, 새 삶의 시작, 제5부 마지막 아담ㅡ'또 하나의 나 자신(My Another Self)', 제6부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구약 성경의 의미), 제7부 제5복음서(logia iesu). 제8부 복음서가 아닌 사도들의 서신에 나타난 메시아 죽으심의 의미, 제9부 다른 시각에서 4복음서를 일괄해서 보기, 이렇게 8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제6부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예고하던 구약성경이 4복음서 기록에서 인용되고 있는 이유를 근본적으로 그러나 간략하게 초보 지식 정도로 설명했다. 따라서 필요하시면 이 부분을 먼저 읽어두시는 것도 바람직하다 하겠다.

"여호와"

우리말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를 "주(主) 하나님"으로 고쳤다. 신약에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절 그 이름으로 하나님을 지칭한 예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일면 '보이시는 하나님'으로 정착하시고 그렇게 사람으로 나타나신 이름이 메시아 "예수"이시니 이 이름으로 족하고 충분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부름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시대다. 율법 시대에는 이방인들이 음란하게 자기네가 위하는 신들을 섬기고 그 이름들을 정해서 불렀기 때문에 그에 대처해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내신 이름이 "여호와"시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성경을 필사(筆寫)할 때 하나님의 이 이름이 나오면 나오는 족족 반드시 손을 몇 번씩이나 씻고 난 다음 필(筆)을 잡았다고 한다.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도 발음하지 않고 번번이 "주(主)"라고 대신 불렀었다.

그런 유래인지는 모르나 흠정영역(欽定英譯)에서도 이 이름 대신에 대문자화하여 "the LORD"으로 차별화하여 대용(代用)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흠정역(KJV)은 1611년 영국 제임스 1세의 명으로 47명의 학자가 영어로 번역한 성경으로서 간결한 표현과 장엄한 문장의 리듬 및 아름다운 어구법(語句法)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개역(改譯) 성경이 많이 나왔으나 아직도 상당수가 이 장중한 고어체(古語體)의 성경을 애용하고 있는 이유다. 여기서도 반드시 그런 뜻은 아니지만 새삼스럽게 그 이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신약성경에서도 구약을 인용하는 경우 외에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므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경우 "주 하나님"으로 통일하고 있으니 양해하시기 바란다.

영국의 헛슨 테일러가 중국 선교를 위해 순수하게 믿음으로만 운영하는(선교 기금을 먼저 마련하고 혹은 후원회를 구성하여 그 뒷받침으로 진행하는 사업이 아니라 무일푼으로 오직 기도와 믿음과 그리고 때마다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운영해 가는) 중국 내지 선교회가 한참 활동하던 당시 중국에 장래가 촉망되던 한 30대 초반의 유학자가 회개하여 다대한 복음 활동을 했는데 그가 처음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성경을 읽음으로 된 것이었다.

바로 중국의 석자직(席子直-구미인들에게는 "Pastor Hsi(Xi)"로 널리 알려져 있음) 목사이다. 그는 전도지도 두어 편 썼고 그가 지은 찬송가도 60편 가량 중국교회에서 애창되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으로 또한 널리 알려져 그의 본명보다는 별명 겸 존칭으로 "귀신 쫓아내는 사람" 즉 "석승마(席勝魔-중국말로 '시셩모')" 목사로 중국인들 간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아편 중독자들을 주님께 인도해내는 큰 사업을 20여년간 지속한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믿기 전 그 자신 인생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색으로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지인의 잘못된 권유로 그 자신이 중독자의 처지에 한 때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중국 교회의 거물이 성경을 직접 읽음으로써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처음 나온 사실에 자극을 받아 누구나 부담없이 성경을 읽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통관복음서를 집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길잡이가 될 뿐 아니라 이미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므로(딤후 3:15) 성경을 애독하도록 널리 권유할 필요가 있다.

이하 본문 중에 나오는 ()와 []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로 된 것은 성경 구절상으로 4복음서의 각기 다른 표현을 나타낸 반면, []는 편집자 자신의 설명임을 가리킨다. 편집자의 설명으로는 (註)로도 나타냈는데 여기서는 문장이 길므로 괄호 내 괄호 구별은 본문과 같이 했다. 편집자의 글이라도 영문자가 들어가는 괄호는 모두 ()로 처리했다. 또 괄호 표기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 안에서의 괄호는 []로, [] 안에서의 괄호는 ()로 각기 달리 했으니 이것과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성경의 장절 표시는 모두 ()로 통일시켰다. {}는 성경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괄호다.

고유명사로서의 인명, 지명 등은 ''로 표시했다. 예: '마리아', '갈릴리'. 단 예수 또는 그리스도는 예외로 했다. 그리고 흔히 알려져 있는 외국 이름의 경우 역시 제외시켰다. 예: 영국 왕 제임스. 그리고 영문 표기에서 ""로 표시한 것은 해당 성경 대목의 영역이 그렇게 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 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밤낮 묵상하는 이는 복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강가에 심은 나무가 계절을 따라 실과를 맺으며 그 잎이 마르지 않음 같으니 그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할 것이다"(시 1:1-3). "나는 생각을  미워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시편 119:113의 원 의미ㅡ"I hate 
vain thoughts: but thy law do I love"-흠정영역).

고어체(古語體) 그대로 방치된 우리말 성경을 현대어로 새로 번역하고자 하는 시도는 많다. 독자의 기호에 따라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을수록 좋다. 앞으로 보다 많이 좋은 번역이 나오게 되기를 바란다.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되고 말씀의 일군이 된 이들이 전해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는 집필자가 많은 터에 (눅 1:3) 이 모든 일을 시초부터 상세히 살펴본 나도 귀하(데오빌루스ㅡ"you, most noble(or, excellent) Theophilus")께 차례대로 써 보냄이 좋은 줄 앎은 (눅 1:4) 귀하로 그 배운 바가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복음의 시작은 이렇다.

'세례 요한'에 대한 천사의 예고

(눅 1:5) '유대' 왕 '헤롯'(Herod) 때 '아비야' 계열('바벨론' 포로 귀환 때 돌아온 4개 제사장 계열 중 하나)에 이름이 '사가랴'인 제사장(祭司長)이 있는데 그 아내는 '아론'의 후예인 '엘리사벳'이었다. (눅 1:6) 두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規例)대로 흠 없이 행했으나, (눅 1:7) 수태(受胎)를 못하므로 무자(無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았다.

(눅 1:8) 때마침 '사가랴'가 그 계열의 차례를 따라 제사장 직무를 하나님 앞에 수행할 때 (눅 1:9) 제사장의 전례(前例)를 따라 제비 뽑아 주님의 성소(聖所)에 들어가 분향(焚香)하고 (눅 1:10) 모든 국민은 그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는데 (눅 1:11) 주님의 사자(使者)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香壇) 우편에 섰다.


(눅 1: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눅 1:13) 천사가 말하기를,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을 들으셨으므로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할 것이니 (눅 1:15) 그가 주님 앞에 큰 사람이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모태(母胎)로부터 성령 충만을 받아 (눅 1:16) '이스라엘' 자손을 주님 곧 그들의 하나님께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다. (눅 1:17) 또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님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이를 의인의 슬기로 돌아오게 하고 주님을 위해 세워진 한 백성을 준비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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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註-"보라! 주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않도록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그가 돌이키게 할 것이다"(말 4:5,6).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coming of the great and terrible day of the Lord: And he shall turn the heart of the fathers to the children, and the heart of the children to their fathers, lest I come and smite the earth with a curse".

"만군(萬軍-the hosts)의 주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낼 것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열(to prepare)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主)가 홀연히 그 전(殿)에 임하실 것이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言約)의 사자(使者)가 임하실 것이다"(말 3:1). "Behold, I will send my messenger, and he shall prepare the way before me: and the Lord, whom ye seek, shall suddenly come to his temple, even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whom ye delight in: behold, he shall come, saith the Lord of hosts".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기를, '너희는 주(인) 하나님의 길을 열라.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사막을 질러가는 평탄한 대로(大)를 열라'"(사 40:3)."The voice of him that crieth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

우리말 번역은,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기를, '너희는 광야에서 주 하나님의 길을 열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출현으로써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정확한 번역(흠정영역[KJV]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음)이라고 할 수 있고 '세례 요한' 자신도 다음에 나오지만 그런 식으로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왜냐면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 국민에게 나타나기 전에는 줄곧 인적 드문 황야에서 생활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원도 생명도 없는 이 세상을 황야, 그리고 사막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고로 이 경우 틀리고 맞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상의 경우를 보면 둘 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번역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흠정영역을 대표적으로 함께 소개하는 것이니 좀더 연구를 요하는 경우, 인터넷을 통해 각 번역을 대조해서 참작해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황야에 거처하였고 "황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자처하였는지 그 이유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이 세상을 사람이 살 수 없는 황야와 사막에다 하나님께서 비유하신데 따른 것이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다음 말씀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즉 '이사야'의 예언에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무엇이라 외칠까요?', 이렇게 외치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주(主) 하나님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다. 이 백성(인생들)은 실로 풀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다'"(사 40:6-8)라 한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상징하여 '세례 요한'은 황야에서 거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본 틀은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나타나시기까지는 변함이 없으니 곧 이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빈 들 곧 인적 없는 삭막한 사막과 같은 곳임을 성경은 일관되게 밝히고 있다. "천국"이 바로 사람 사는 곳이다. 다시 말해 자연법칙에 예속되지 않는 세계라야 영혼을 갖춘 인간의 진정한 보금자리인 것. 자연법칙에 얽매인 육체가 필경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현재의 상태는 인간 본령(本領)이 아니니 첫 사람 아담이 범죄행위로써 스스로 벌어들인 참상이요 비극이라는 사실을 이 "황야, 사막" 개념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곧 인간으로서의 탄생은 이런 사막의 황야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시작됨을 나타냄이니 그래서 "황야와 사막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길을 열라, 굽은 데가 곧아지고 높은 데가 낮아지고 낮은 데 즉 골짜기가 돋우어져 땅이 평평하게 되어져서 생명의 주님께서 오시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게 하라"고 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회개하라는 뜻이니, 회개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또한 "'세례 요한'"이라 한 것이다. 회개함으로써 세례 받음이 다름아닌 인간의 현재의 상황 곧 죽음과 죄와 멸망에 처해 있는 현실을 타개하는 유일한 생명 길이요 새 창조의 길인 것이다. 모세 율법이 가리키고 안내하던 바였다.

곧 죄 덩어리, 죄투성이로서의 인간이므로 생명의 법질서에서 벗어난 지금까지의 일체의 행위를 뉘우침이 선결 문제요, 지금까지의 인간 삶이란 것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므로 이 죽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죽음에 하나되어 함께 하심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곧 세례 받음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와 함께 죽으심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음은 물 속에 완전히 침몰함이니 곧 죽음에 완전히 빠져들어가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죽어 장사 지내지는 것을 상징한다.

이렇게 죽음 안으로 완전히 침잠(沈潛)됨으로써 과거의 나 다시 말해 이제까지 산다고 살아 왔던 나 자신이라는 것이 완전히 말살되는 바탕 위에서만 비로소 새 생명으로 다시 출생하고 그리하여 생명의 법질서를 정상적으로 준수할 수 있게 되는 것. 과거는 청산되고 새로운 미래가 설정되어 현재 전개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새 출생 곧 새 창조의 삶이니 세례로 시작되고 상징되는바 인간 개벽(천지 개벽이 아닌)의 상황이다. 이 획기적인 변화는 그리스도 친히 그 육체로써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셔서 완전히 죽음 가운데 침몰하셨다가 아버지와 하나되신 그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시어 내 속에 영원히 계시게 됨으로써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래서 이를 가리켜 성령으로 난다(出生)고 하는 것.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것은 그 때문이다. 즉 나와 하나되심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나의 죽음에 동참하시어 나와 함께 죽으심을 통해 나와 하나 되시고, 이 하나 되신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내가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과정을 나를 위해 완벽하게 치르신 의미를 나타냄이다. 이렇게 "새 생명"의 법질서 가운데에서의 삶을 가리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무릇 그리스도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다"(롬 6:3-6) 한 것이다.

성경은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결코 되지는 않으니 하나님께서는 애매 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8에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자 하나님"이라 했는데, NIV에서는 이를 "God the One and Only, who is at the Father's side"라 하고 있다. 그 난하주(欄下註)에서만, "어떤 사본에는 the only(or only begotten) Son"이라 하고 있다는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 가지 원어로 표기된 것을 번역자의 소견을 따라 그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하는 의미로 나타낼 수는 있어도 그러나 정작 그렇게 표현한 원저자는 딱 한 가지 의미만을 나타내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 곁에 있는 아들"과 "아버지 품 안에 있는 아들"이라는 묘사는 의미뿐만 아니라 어감 자체부터 다르다. 원저자인 요한 자신은 분명하게 그 구절로써 아버지께서 여러 아들이 아닌 한 아들만을 낳으셨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NIV 번역은 "유일하게 홀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강조하고 명칭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시라는 식의 의미를 넌지시 비치는 그야말로 요령부득으로 번역하고 있다.

낳는다는 개념을 우리는 성별로 따져 모친에게만 해당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으나, 성경은 인생의 씨가 그 아버지의 계통임을 밝혀 아버지가 "낳는" 것으로서 밝히고 있으니(마 1:2), 때문에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지 하와의 후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아들을 가리켜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시는 것으로서 표현함은 서로  연결이 되고 자연스러운 것.

자연계에서는 태에서 나고 자라고 그것이 장성해서는 늙어가고 죽어 썩는 것이지만 자연계를 초월한 경우 (만일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내처 '에덴'낙원에서 자식들을 낳았다면) 낳자마자 아담처럼 완벽한 성인으로서의 인간으로 출현하는 것처럼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태초부터 영으로 계시는 영원하신 아버지이시고 영원하신 아들이시니 아들께서는 아무리 조물주이시지만(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앞에서는 영원히 "품 속의 아들"이신 것이다.

"품 속에 계신다"고 해서 자연계에서 태어난 갓난 것이 제대로 활동할 수 없어 그 모체(母體)에 의존해 있는 의미로만 한정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님은 이를 가리켜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시다" 하심으로써 분명히 하셨고 이 "크다"는 것은 "만물보다 크시다"는 말씀으로서 또한 명백히 하셨다. 그리고 성별(性別)은 영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천사들이 바로 그러하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에만 해당된다.

비록 자연계의 육체로 창조된 아담이지만 그 속에 영혼이 조성된 후로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고, 연이어 여자가 창조되는 대신 곧장 '에덴'낙원으로('에덴'낙원도 아담을 위해 창설된  것) 들어갔고 거기서도 여자는 창조되지 않는다.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다음에도 여자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동물들"을 지으신 것이고 그 연후에 여자를 지으신 사실에 유의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묘사되시는 것은 인간의 근본인 아담을 따라 된 표현이니 아담이 나중에 여자가 생김으로써 비로소 남자로 분류된 되었으므로 이 근본을 따라 남성으로 받아 그렇게 나타내어지시는 것이다. 인간은 남자 아니면 여자인데 어버이 자식 관계를 표현할 때 인간의 언어대로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생각해보면 자명해진다. 모친으로 나타내면 반드시 아버지를 연상하게 될 것인즉 양자 택일을 해야 하는 판에서는 부득불 대표성을 띠는 아담을 따르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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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랴'가 일시 벙어리되어

(눅 1:18) "제가 이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습니다" 하고 '사가랴'가 천사에게 말하니 (눅 1:19) 대답하기를,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라고 네게 보내심을 받았다. (눅 1:20) 보라! 일이 이루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되어 말을 못할 것이니 네가 내 말을 믿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오면 내 말이 이룰 것이다" 하였다.

(눅 1:21) '사가랴'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성소(聖所) 안에서 그가 지체함을 보고 이상히 여기다가 (눅 1:22) 나오기는 하였으나 말을 못하므로 성소 안에서 환상을 본 줄로 알았다. 형용으로 의사 표시를 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다가 (눅 1:23) 직무가 다하자 귀가했다.

(눅 1:24) 이 후에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5개월간 숨어 있으며 말하기를, (눅 1:25) "주님께서 나를 돌아 보시는 날 인간의 내 수치를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신다" 하였다.

그리스도(메시아) 탄생에 대한 천사의 예고

(눅 1:26) 그 후 6개월이 지나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다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가서 (눅 1: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이와 정혼(定婚)한 처녀에게 오니 이름이 '마리아'였다. (눅 1:28) 천사가 들어가 말하기를,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함이 있으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하였다.

(눅 1:29) 처녀가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웬 일인고" 생각하는데 (눅 1:30) 천사가 말했다. "'마리아'야,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그가 큰 사람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러지게 되실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실 것이니 (눅 1:33) 영원히 '야곱'의 가문(家門)에서 왕이 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다." ["다윗의 왕위", "야곱의 가문" 등 마치 유대 민족에 한정된 것 같은 인상을 주나, 사실은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모든 믿는 이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눅 1:34) '마리아'가 말하기를, "저는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이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눅 1:35) 천사가 대답하기를,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실 것이니 이러므로 나실 거룩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러지게 되실 것이다. (눅 1:36) 보라! 네 친족(親族)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다. 본래 수태(受胎)하지 못한다 하는 이가 이미 6개월이 되었으니 (눅 1:37) 무릇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하므로 (눅 1:38) '마리아'가 "주님의 여(女)종이니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니 천사가 떠났다.

'마리아'가 급히 달려 '엘리사벳'에게로

(눅 1:39) 이 때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산중(山中)의 한 '유대' 동네로 달려가 (눅 1: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서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눅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듣자 아이가 배 안에서 뛰놀았다. 이에 '엘리사벳'이 성령 충만을 받아 (눅 1:42)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고 네 태중(胎中)의 열매도 그러하시다. (눅 1:43) 내 주님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게 웬 일인가. (눅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아이가 배 안에서 기뻐 뛰노는구나. (눅 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에게 반드시 이룰 것이다".

(눅 1:46) 이에 '마리아'가 말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救主)를 기뻐함은 (눅 1:48) 그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니,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만대(萬代)에 저를 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눅 1:49) 전능하신 이께서 크신 일을 제게 이루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긍휼하심이 그를 두려워하는 이에게 대대(代代)로 이르십니다. (눅 1:51) 그 팔로 능력을 나타내시어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리치시고 비천한 이들을 높이시고 (눅 1:53) 굶주리는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며 부자를 빈 손으로 보내십니다. (눅 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기억하셔서 (눅 1: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을 '아브라함'과 그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이루실 것입니다". (눅 1:56) '마리아'가 3개월 정도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세례 요한'의 출생

(눅 1:57) '엘리사벳'이 해산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눅 1:58) 이웃과 친족이 주님께서 그를 크게 불쌍히 여기심을 듣고[자녀 생산을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여 당시 큰 수치로 여겼으므로] 함께 즐거워했다. (눅 1:59) 8일째가 되니 아이를 할례(割禮ㅡ남자 아이 생식기의 끝 즉 포피(包皮)를 자르는 '유대'인 의식)하러 온 이들이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아이 이름을 '사가랴'라 하고자 하는데 (눅 1:60) 그 모친이 "아닙니다. '요한'이라 할 것입니다" 하므로 (눅 1:61) "그대의 친족 중에 이런 이름으로 작명한 예가 없다" 하고 (눅 1:62) 그 부친에게 "무엇으로 이름하려는가?"  형용으로 물으니 (눅 1:63) 글 쓰는 서판(書板)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니 다 이상히 여겼다.

(눅 1:64) 그러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을 하니 (눅 1:65) 인근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하고 온 '유대' 산중에 이 모든 말이 두루 퍼졌다. (눅 1:66) 듣는 이마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되려나?" 하니 주님의 손이 아이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 충만을 받아 이에 예언하여 말하기를, (눅 1:68) "주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 백성을 돌아보시어 속량(贖良, 구속[救贖], to redeem)하시고 (눅 1:69) 저들을 위해 구원의 뿔(뿔은 능력과 권세의 상징)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눅 1:70) 이는 주님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아 (눅 1: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십니다.

(눅 1:72) "우리 조상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 거룩하신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눅 1: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로서 (눅 1:74)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눅 1:75) 종신토록 주님 앞에서 성결(聖潔)과 의(義)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할 것이라' 하신 대로입니다.

(눅 1:76) "이 아이야,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불려지고 주님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눅 1:77) 주님의 백성에게 그 죄 용서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할 것이니 (눅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인함이다.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이에게 비취고 우리의 발을 평안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눅 1:80) 아이가 자라면서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荒野)에 거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의 나심

그 나심은 이러하다.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定婚)하고 동거(同居)하기도 전에 이미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마 1:19) 이 일이 성령으로 된 것을 모르는 남편될 사람 '요셉'은 [본시] 의로운 사람이라 파혼(破婚)은 하되(신 24:1) 이를 폭로하는 대신 비밀리에 해 주려는 (마 1:20)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주님의 사자(使者)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꺼려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되신 이는 성령으로 되신 것이다. (마 1:21)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 되심이다".

(마 1:22)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 곧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되신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마 1: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 주님의 사자(使者, 천사)가 분부한 대로 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마 1:25) 아들을 낳기까지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하더니 낳을 때 이름을 '예수'(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의 '히브리'어)라 하였다.

'베들레헴'

(눅 2:1) 이 때에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saer Augustus-로마제국 초대 황제)'가 영(令)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戶籍)하라 하였으니 (눅 2:2) 이런 호적은 '구레뇨(Cyrenius)'가 '수리아(Syria)' 총독되었을 때에 처음 한 바 있었다. (눅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니 (눅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를 향하여 (눅 2: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는데 '마리아'가 이미 출산 날짜가 가까웠던 터라 (눅 2:6) 거기서 해산하였다. (눅 2:7) 이에 그 맏아들을 낳아 포대기로 싸서 여물통(manger)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이 차서 빈 방이 없었음이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

(마 2:1)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은 '헤롯' 왕 때였다. 당시 동방(東方)으로부터 박사(wise men)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느냐? 우리가 동방(東方)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 하니 (마 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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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註-하늘의 별들은 모두 이 지상의 인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하늘 위의 별들은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分定)하신 것"(the stars, {even} all the host of heaven...which the Lord thy God hath divided unto all nations under the whole heavenㅡ흠정영역)(신 4:19)이라 함과 같다. 그래서 점성술과 같은 것이 예로부터 성행하고 있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처럼 이런 것들을 위하거나 이런 것을 믿고 따르는 일체의 점술 행위를 금하시고 죄로 정하시는 것이니(신 18:10,14/사 47:13-15)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위하고 의뢰하는 행위(롬 1:25)일 뿐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그리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데도 이 외의 달리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는 것은 도리에서 벗어나는 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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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 왕이 모든 대제사장(大祭司長)과 율법(律法) 학자들을 모아 "그리스도(메시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마 2:5) "'유대' 지방 '베들레헴'입니다.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되었으니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도시 중 가장 작지 아니하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이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牧者, 양떼의 앞장을 서므로 곧 통치자를 가리킴)가 될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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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註-이상 예언의 전거(典據)는 구약 미가서 5장 2절이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네게서 나와 내게로 올 것이니 그의 근본은 상고(上古)에서부터이고 태초(太初)로부터서다"인데, 흠정영역은 "But thou, Bethlehem Ephratah, {though} thou be little among the thousands of Judah, {yet} out of thee shall he come forth unto me {that is} to be ruler in Israel; whose goings forth {have been} from of old, from everlasting"이다. 이를 인용한 위의 마태복음 구절의 흠정영역으로는 "And thou Bethlehem, in the land of Juda, art not the least among the princes of Juda: for out of thee shall come a Governor, that shall rule my people Israel"로 되어 있다.

이렇게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나타내는 대목이 많은데, 구약 예언과는 약간 다르게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바 이는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고 단지 손으로 필사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누구나 그 전거를 찾아 확인하는 것이 실상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예언 성취만은 정확하며 또 확실하게 기술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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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 이에 '헤롯'이 비밀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마 2: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알려 주어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시오" 하였다. (마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때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므로 (마 2:10) 그들이  별을 보고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가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계심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예물을 드렸으니 황금과 유향(乳香, 동아프리카·아라비아산 감람의 일종; '이스라엘' 민족이 제례에 쓰던 고급 향료)과 몰약(沒藥,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 분포하는 감람과 교목으로 고대로부터 방향 및 방부제로 쓰고 즙액은 향수·의료품· 구강 소독 및 통경제·건위제 등에 썼음)이었다. (마 2:12)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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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註-흔히 보는 그림에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고 하여 세 사람만 낙타를 타고 가는 광경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멀리서 왔고 또 언어가 서로 다른데 통역인도 없이 올 리가 없다. 그러므로 "박사" 3인을 위시해서 다소간의 인원(하인들을 포함하여)이 동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대충 그 줄거리만 뽑아 소개하고 있으므로, 그 장면들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상상력을 동원함이 좋다.

그리고 박사들이 보니 동방에서 보았던 그 별이 움직여 그리스도께서 갓 태어나셔서 뉘이신 그 곳에 멈추었다고 했다. 성경은 그 별의 정체를 말하지 않았다. 정체를 정확히 지적해 주지 않았으니 우리도 그만큼 해석의 자유 또는 여유가 있다 할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에서 밝히는 사실은, 박사들이 "보았다" 하고 "그 별"이라고 증언하는 그것만을 '인용하는 것'에 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 자체로써 그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천문학적 지식 즉 우리의 상식대로 말하면 별이라는 것은 박사들이 증언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시 천문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그들이 "움직이는 별"에 의아해하지 않을 리가 없다. 박사들이 처음 본 것은 "그의 별"이었으니 다른 별과 구별되는 별이다. 그리고 "나타났다" 했으니 이전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새로 생긴 별이다. 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은 이전에도 한 나라에 특출한 왕이 일어나게 되면 "그의 별"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런 근거가 과거의 그와 같은 기록에 의존하는 것이든 실제로 그런 사실을 직접 경험한 것이든 어쨌든 그 이론에 대한 확신이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이런 별은 우리의 상식대로 말하는 천체(天體)와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 정체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천하 인생들을 위해 분정(分定)하신 별들"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이들이 천문에 해박한 지식이 있다 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든지 또는 지동설, 천동설이 그 뒤로부터 한참 세월이 지나서야 확정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지식이라는 것은 고작 점성(占星)을 치는 것과 관련되고 거기 한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별"을 보고 왔다는 것은 그런 점성과 관련되어 있음은 명백하다. 전에 없던 별이 "나타났는데" 그 별이 "움직여" 박사들을 안내했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왜냐면 이들  "박사"들이 본 "별" 이야기는 당시 이를 들었던 마리아(모든 일들을 마음에 두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으므로)의 전언에 의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것인즉, "이상하게 생각하였다"면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것인데도  그런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추려야 할 몇 가지가 있다. ①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늘의 별들이 인간들의 활동과 관계 있는 것으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 ②영물(靈物)들-여기서는 사단을 위시한 악령들을 의미하지만-이 현재의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라는 것, ③따라서 고대로부터(현대에는 어떨지 모르나) "네피림"(창 6:4)이 세상을 주름 잡아 대체적으로 군왕(君王)들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 ④그렇다면 이들에게 소위 "하늘이 점지했다"는 식의 신적(神的)인 권위를 부여해 줄 목적으로 처음부터 악령들이 적극적으로 이런 일에 관여한 것이 점성이라는 것, ⑤그래서  악령들은 그들의 능력(지식을 포함해)으로 적절한 때 별로서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 등이다.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천체로서의 발광체임과 같이 영물들은 그 스스로 빛을 뿜어대는 존재들로서 그들이 비상한 능력으로 적당한 거리에서 광채를 발산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별"인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이런 영물들에 대해서는 지식이 전무(全無)하고 천체 자체에 대해서도 오늘날의 지식보다야 훨씬 미치지 못하니 그런 영물을 "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악령들 스스로가 이상 지적한 바와 같은 목적으로 그런 "별"로서 인생들을 속이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특별한 영걸이 태어날 때에는 이는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네피림과 관련될 가능성이 농후하고, 또 사단이 이 세상의 지배자이므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기법(技法)의 하나로 해당 지역 상공에 나타나 있는(점성에 관련된 천체들의 분류법을 따른 ) 성군(星群)들의 위치에 편승하여 이를 적당히 활용(악용)하여 스스로를 별로서 나타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대한 지배자의 출생을 예고할 때는 그런 식으로 악령들이 해당 지역 인생들의 눈에 띄도록 의도적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것도 그리 황당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하늘 위의 별들을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分定)하신 것"과는 관계가 없으면서도, 바로 그렇게 천하 만국을 위해 별들의 분포가 일정한 규칙성을 따라 분할되어 있는 것을 악령들이 활용(악용)할 수는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특별한 제왕(네피림의 출생 또는 환생 등의 소행으로서)이 출현할 때 악령들이 그와 같이 "그들의 별"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런 악령들의 활동과는 전연 무관하지만 그러나 악령들의 지배하에 있는 이 세상에 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이상, 일정량 그런 것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니, 천사가 이 경우 그런 악령의 역할을 대행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악령이 지금까지 해오던 관행을 따라 역시 그렇게 행동했을까 어느 쪽일까  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우리의 관심의 대상일 수도 없다. 그저 그런 정도로만 이해하면 될 뿐이다. 또 이런 일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라고 해서(천하에 되어지는 일이 하나님의 직간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이루어지는 일은 없으므로) 점성술을 이미 지적한 대로 정당시하는 것은 아니니 혼동하지 말 일이다.

이상 설명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하늘의 별들을 그냥 물체로만 보지 않고 반(半) 물질 반(半) 영물(靈物)과 같은 신비한 것으로 인식함으로 인해 미신에 젖은 고대인들이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고 그 앞에 경배한(신 17:3/왕하 17:16/21:3/21:5/습 1:5) 것이 아닐까. 별들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니 해와 달은 "움직일" 뿐 아니라 별보다는 비교도 안되리만큼 광채를 발하므로 거기 압도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이 이런 악령들의 활동을 정당시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로써 그리스도의 탄생을 증명하려는 그런 시도라고 해서도 안될 일이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다는 것을 그냥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기술해두고 있을 뿐이다. 헤롯이 이 때문에 베들레헴 출생의 소아小兒)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등 끔찍한 사건을 일으켰고 더군다나 성경이 이에 대한 예언을 해두고 있으므로, 그 성취 차원에서도 기록할 만한 것이다(마 2:17).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대사건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한국 및 중국 등지에서 하늘의 무슨 무슨 별(星)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장군도 되고 제왕도 되었다는 등의 설화가 있는 것도 이런 사실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미신(그러나 네피림과 결부시키면 부분적으로 진실일 수도 있다)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인간의 천문 지식이 발달하는 등의 변화로 더 이상 악령들의 속임수로  활용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신선(神仙) 사상도 악령 및 네피림과 관련된 것이다. 오늘날 과학 시대에서는 난데없이 소위 "외계인(UFO)"으로 둔갑해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할 것은 이 별의 "움직임"을 천사가 아닌 악령들의 활동이라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데에서 상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네피림의 소위 "환생"

네피림의 환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좁쌀이나 그보다 더 작다 할 수 있는 하얀(태양에 의한 반사광인 듯 때로는 청색, 적색, 황색 등으로 변함) 색깔의 형체가 허공에 어떤 때는 빠른 속도로 어떤 때는 느리게 경우에 따라서는 허공에 가만히 붙어 흡사 박아놓은 듯이 고정되어 꼼짝도 않을 수 있는(폭풍이 불어와도 미동도 않을 수 있는) 그렇게 떠도는 형체가 네피림의 죽은 혼백인데 이것들이 여자의 태 속으로 들어가면 나름대로 작용하여 그런 연후 일단 태 밖으로 나오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몇 번이라도 이렇게 해서 인간의 육체를 입기만 하면 한 인간으로 출생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물론 처음으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고 이미 존재하던 것이 단지 여자의 태를 빌려 인간의 육체만 새로 입고 나오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런 네피림의 망령들을 NSO(Nephilim Soul Orb)라 부른다. 이들은 일반 인생들의 영혼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일정 형태를 지니는 영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형태라 해보아야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앞서 지적한 대로 좁쌀 만한 크기이다. 그러나 외국 사례 즉 유튜브(youtube) 동영상에 나타난 대로 하면 상당한 부피의 것도 있는 듯하다. mysterious orb, strange orb 등의 검색어로 치고 들어가면 각종 참고할 만한 영상들을 만나볼 수 있다. 요즘은 그것도 희귀한 것이라 하여 촬영자가 거두어 들이고 있는 듯 전보다 흔히는 볼 수 없는 것같다. 그러나 우연히 찍혀 그 정체를 몰라 당황해하는 이들은 지체 없이 공개하는 수가 있는데 바로 그런 영상들은 언제든 관찰이 가능하다. 필자의 경우도 우연히 촬영된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네피림의 망령 즉 죽은 넋을 가리켜 성경은 "귀신"이라 하는데 이들은 육체는 비록 죽어 썩어 없어져도 아비들인 영물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사진에 보면 영롱한 반사광을 2중, 3중 때로는 9중(重)까지로도 아름답게 나타낸다. 따라서 얼마든 형태를 변형시켜 (필자의 슬로 비디오에 의한 관찰에 따르면 26분의 1초마다) 변화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영물의 초자연계 육체 그대로이므로(비록 인간의 영혼이라는 특수 상황에 있기는 해도)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의 그 초자연계 몸으로 굳게 닫힌 문도 무사통과로 지내신 것과 같이 말 그대로 자연법칙을 초월한다.

고로 그런 식으로 해서 여자의 몸을 어느 부분으로든 투과(透過)하여 여자의 태 속에 안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식은 죽 먹기로 "환생"할 수 있다는 논리다. 혹 이 글을 읽은 분들 중에 이런 사전 지식을 통해 의심스러운 점이 상당하여 낙태시켰다고 가정하자(물론 이것은 절대로 권장하는 바는 아니나). 그러면  살생인가? 이 환생의 경우만은 아니다. 육체는 파괴되더라도 NSO는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환생"이 아닐 경우 살인임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손대는 일은 금물이다.

어쨌든 그런 자식은 본의 아니게 생산되게 마련이니 인간이 조처한다고 막을 일은 아니고 저들 악령들의 능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인즉 그냥 두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고 누가 네피림이고 아니고 하는 판단은 인생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는 실상을 말하는 것뿐이다. 고로 절대로 다른 것으로는 다 판단해도 "네피림"이라는 세 글자로는 판단하지 말 것이다. 요즘 세계 동영상에 사람의 얼굴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광고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악령들의 속임수로 일단 취급하고 현혹될 필요가 없다.

이 이상 상세한 것은 별도로 기회가 있을 때 밝히기로 하고 결론은 이런 네피림의 예에서도 확인되듯이 인간은 모친을 통해서는 인간 육체만이 전수(傳授)된다는 사실이다. 그 실질에 해당되는 영혼과 관련된 것은 부친으로부터 나는 것으로서 때문에 대대로 이어지는 이른바 "씨"는 남자로 인함이지 여자 계통으로 나는 것은 아니므로 예로부터 바로 그런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가 발전하기커녕 오히려 퇴보 일로를 치달아 물질 문명과는 반비례로 정신문화가 황폐해짐을 따라 호적제도까지 손질되고 난도질당하고 있는 실태다. 남자(아담)로부터 여자가 났으니 무릇 인간은 남자의 씨이지 여자의 씨일 수는 없다는 것이야 상식으로도 통하는 기본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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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
(눅 2:8) 밤중에 그 지방의 목자들이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다가 (눅 2:9) 주님의 한 사자(使者, 천사)가 곁에 서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취는 것을 보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눅 2:10) 천사가 말하기를,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국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救主, savior)님께서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메시아) 주님이시다. (눅 2:12) 너희가 가면 포대기에 싸여 여물통에 뉘인 아기를 뵐 것이니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하는데, (눅 2:13) 홀연히 그 천사 주변에 천상(天上)의 허다한 무리(host)들이 나타나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그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다"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눅 2: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가 서로 말하기를, "지금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눅 2:16) 급히 달려가 '마리아'와 '요셉'과 여물통에 뉘이신 아기를 찾아 (눅 2:17) 보고 이 아기에 대하여 천사가 말한 모든 것을 알리니 (눅 2:18) 듣는 이가 다 목자들의 말을 이상히 여기나 (눅 2: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재어두고 생각하였다. (눅 2:20) 자기들에게 알려준 바와 같음을 듣고 본 목자들은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다.

'이집트'로 피신

(마 2:13) 동방 박사들이 떠나자 주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꿈 속에 나타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일러 주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니, (마 2:14) 요셉이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집트'로 떠나가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님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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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註-"'이스라엘'의 어렸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호11:1)는 대목을 가리킨다. 이는 '이스라엘'의 첫 유월절 사건이 우리의 구속(救贖)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를 입어 하나님의 아들됨을 가리키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사실로도 통하는 복합 의미인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서도 그런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이 같은 유아 때 사건의 예언으로도 연결됨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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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의 무차별 영아 학살
(마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역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게 하니 (마 2: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렘 31:15)로 말씀하신 바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없어진 그 자식들을 인한 '라헬'의 애곡(哀哭)이니 어떤 위로도 효험이 없다" 함이 이루어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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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註-'헤롯'왕의 사망이 기원 전 4년이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도 그 무렵이고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위해 이집트에 피신했다가 돌아온 것도 극히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불과 8킬로 거리이므로 당일로 박사들이 돌아올 줄 알고 기다린 '헤롯'왕이었기에, 그 다음날쯤 아동 학살극을 벌였을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요셉'과 '마리아'는 이집트로 떠났을 것이며 결국 며칠 안되어 '헤롯'은 급사(急死)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모든 것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는 '베들레헴'에 있을 때 즉 거기서 8일을 유하면서 영아이신 예수님을 안고 '마리아'와 그 남편 '요셉'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이렇게 여러 날이 지체되도록 의심 많은 '헤롯'이 그냥 있었을 리 없다.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다시 "이집트로부터 내 아들을 불러 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했으나, 반드시 그것이 이집트에서 체류했다는 뜻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이집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다시 '요셉'의 꿈에 천사가 '헤롯'의 죽은 사실을 알려 주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요셉' 일행이 이집트로 가는 길에 이미 '베들레헴' 인근의 아이들은 죽음을 맞는 비극이 연출되었을 수 있다.

'헤롯'은 자기 왕위를 보전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아들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로마의 '어거스터스' 황제는 '헤롯'의 두 아들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차라리 '헤롯'의 돼지 중 한 마리가 될 일이지 그 왕자 중 하나가 될 일은 못되는군" 했을 정도다. '헤롯'이 죽기 닷새 전에도 이미 그 다른 아들을 죽인 터였다. 때문에 그가 죽을 때까지 '헤롯'왕의 목숨을 노리는 시도가 빈번했다.

초대교회 당시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 얼마 후 그 역시 천사의 손에 죽은 '헤롯'은 '아그립바'라고 하는 그 손자다. 그 조부 '헤롯'도 그 한량없이 흘린 피-'베들레헴' 유아 학살을 포함하여-의 대가로 천사에 의해 급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헤롯'(손자)을 그렇게 천사의 손으로 죽이실진대 그 조부 '헤롯'도 그같이 데려가실 수 있음에도 왜 그렇게 아니 하셨느냐,  그렇게 하셨다면 죄없는 영아들이 죽임을 면할 것이 아닌가 혹 생각한다면, 세상의 모든 살인행위를 사전 예방하실 수 있는데도 왜 방치하시느냐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 된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이집트로 피신하게 할 것 없이 '헤롯'의 목숨을 끊어놓으면 될 일이 아니냐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 된다. 그렇게 방치하시는 것은 악을 조장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된다. 아예 그럴 바에야 세상의 살인행위는 하나도 없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과도 같다. 아예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죄는 종국적으로 살인행위니까 죄를 짓지 않도록 막으시면 될 일이 아닌가 하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헤롯'의 손자를 처치하신 것은 그 죽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조부 '헤롯'도 마찬가지다. 죄든 의(義)든 자유의지를 따라 행해짐이다. 죽을 때에 죽었는데 그럼 왜 성경은 천사가 그를 쳤기 때문이라 하는가? 이 대목(행 12:23)에서는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다시 말해 죽음의 근본 원인, 죄의 성격을 성경이 밝힘이다.

즉 남보다 "억울하게" 또는 "죄 지은 것도 없이 까닭도 없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여 사람들이 '빌라도'의 만행을 주님께 알리자 주님은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있어 그렇게 죽은 줄 아느냐?" 반문하시고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 하심과 같다. 즉 죽을 때가 되어 죽든 어떻게 죽든 무릇 인생의 죽음은 "회개치 않음을 인한 멸망"이라는데 있다.

천사가 '헤롯'을 쳤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다시 말해 모름지기 인생의 죽음은 그가 지은 죄 때문에 맞는 결과 곧 형벌인 것. '헤롯'만 아니라 누구든 믿지 않는 이는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음 즉 자아중심이라는 점에서 똑 같기 때문이다. 인생의 죽음은 자연계에 속한 똑 같은 육체이지만 그런 동물과는 다른 것이니, 비슷한 죽음이지만 동물들의 죽음은 죄 때문이 아닌데 유독 인간만은 죄의 결과다.

첫 사람 아담의 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죄의 결과다(롬 5:12). 이는 범죄하기 전의 인간 즉 첫 사람 아담이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기 전에는 영생하고 죽지 않는 몸이었다는 바로 그 뜻으로 연결된다. 죽지 않는 즉 썩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몸이었기 때문에 "네가 여차여차하면 죽으리라"는 경고가 가능한 것이다. 이는 아담의 몸이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일 수 없고 신령한(초자연적인) 몸이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단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간의 모든 죄의 실상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아중심이 되어 자기가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일체의 것이 악이요 죄, 불의 불법이다. 그러나 같은 인간의 죽음이라도 주님의 고난 받으심은 일반 인생의 일반적인 죽음과는 전혀 별개이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죽음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죽음으로서 그 의미가 무한대로 격상(格上)되어  있다.

아직도 구원 얻을 사람이 있는 동안은 교회를 통한 이런 주님의 남으신 고난은 지속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죽음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 세상 삶 자체가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영위하시던 삶 즉 보내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던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헤롯'으로 대표되는 그런 죄의 삶과 대칭이 된다. 즉 자아중심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다. 왜냐면 죽어도 주님 위해 살아도 주님을 위함이니(롬 14:7) 그렇지 않고는 보내심을 받았다고(요 20:21/17:18) 할 수 없는 까닭이다.

혹자는, "예수님의 한 생명 보전하기 위해 그 숱한 죄 없는 아이들이 학살 당해야 했던가?" 할 것이다. 그러나, "죄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시편에 "내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시 51:5) 했다. 그런 말보다는 차라리, "'헤롯'이라는 인간을 그런 명령을 내리기 전에 왜 그 목숨 끊어놓지 않으셨는가?" 해야 보다 이성적인 질문이 된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전쟁에서 수백만 인간이 죽는데 "왜 하나님께서 전쟁이란 것을 애초부터 없애시지 않는가?"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당시 '베들레헴' 인구가 얼마였는지 모르고 그 중에서 2살 아래의 아이들이니 그 숫자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다. 1,2천명 정도였다 하기도 하고 그래서 죽은 아이들도 2,30명  선이었으리라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전염병이 한번 돌아도 어른 아이 할 것없이 그만한 숫자 또는 그 이상도 죽게 마련이다. 그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인간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직접적인 원인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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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부터 다시 돌아오다

(마 2:19) '헤롯'이 죽은 후 주님의 사자가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꿈으로 나타나 (마 2: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다" 하니 (마 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마 2:22) 그러나 '아켈라오(Archelaus)'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 왕이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는데 꿈에 지시를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마 2:23) '나사렛'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하게 될 것이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다.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으심

(눅 2:21) 할례할 8일이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대로였다. (눅 2:22) '모세'의 법대로 결례(潔禮ㅡ'유대'인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33일, 여아를 낳으면 66일 후에야 그 산혈(産血)이 정결케 되므로 이 기한이 차면 결례 예물을 드리는데 산비둘기, 집비둘기 종류는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것이었음)의 날이 다가오므로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레12:2, 레12:3, 레12:4) (눅 2:23) 이는 주님의 율법에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님 앞에 바쳐 거룩하게 하라" 하신 대로 아기를 주님께 드리고(출13:2) (눅 2:24) 또 주님의 율법대로 산비둘기(호도애, turtledove) 한 쌍이나 혹 어린 비둘기 둘로 제물로 바치려" 함이었다(레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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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註-여기서 잠시 우리말 "유월절"에 대해 말하면, "유월(逾越)"은 오늘날은 통용되지 않는 말로서 국어 사전에는 "한도를 넘는다"는 의미로 되어 있으나 유월절의 유월은 그런 뜻이 아니고 유(踰, 逾)도 "넘는다"는 뜻이요 월(越)도 넘는다는 뜻으로서 영역의 "to pass over"에 해당된다. 실상 한중일 3국 성경 공통으로 쓰이는 용어다. 속죄 양으로서의 주님을 상징하여 우리의 구원 즉 새 창조의 예표(豫表)가 되어 있는 유월절의 의미다.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는 즉 그들의 모든 기력(氣力)의 원천을 끊어놓는 천사는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예정된 무자비한 심판을 상징하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공포의 심판에 대하여 그야말로 무사 통과의 은혜를 입는 것이다. 복(福)은 누구나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터이지만 화(禍)는 찾아 주기를 바라기커녕 제발 그냥 지나가 주기를, 즉 통과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그 날 밤 죽음을 내리는 재앙의 천사는 '이스라엘' 집에는 이미 어린양의 피가 그 문설주에 발려져 있기 때문에 희생 양으로서의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고 절대로 들어오지 않고 고맙게도 그냥 통과해 버린 것이다.

들어오거나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 버린다는 의미가 얼른 머리에 들어오는 단어가 우리말로는 적당한 것이 없어 한문 "유월"로 대신한 것이다. 그런 절기를 '이스라엘'로 하여금 지키도록 명령하신 이유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오신 하나님의 뜻을 음미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 때 죽음을 면한 '이스라엘' 장자(長子-당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들은 죽음의 천사에게 비명횡사했기 때문)들은 그래서 하나님께 바쳐졌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고 한 것.

이는 우리가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을 면한 그 은혜로 영원히 주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고 섬기는 하나님의 소유물됨을 상징하는 바로서 이 바로 우리 구원의 의미이다. 왜냐면 죽어 없어져 버릴 것이 그 죽음을 면했으니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맏아들들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말하자면 그 날의 천사는 모든 생명체(인간이든 가축이든)의 기력(氣力)의 시작 곧 장자(長子)의 명줄을 끊어놓는 사자였던 것이다.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는 즉 그들의 모든 기력의 원천을 끊어놓는 천사는 이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예정된 무자비한 심판을 상징하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공포의 심판에 대하여 그야말로 사면(赦免), 면죄(免罪), 면사(免死)되는 은혜를 입음이다. 그냥 "넘어간다"고만 하면 국경을 넘어가는 것도 넘어가는 것이고 어떤 경계선을 지나가는 것도 다 '넘어간다'로 표현되는데, 들어오거나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 버린다는 의미로서 얼른 머리에 들어오는 단어가 없어 현재로는 "유월절" 외에 대안이 없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예로서의 '요셉'의 양자(養子)되신 위치이시니 당연히 맏아들로서 하나님께 바쳐져 '마리아'의 품에 안기신 채 이 때 성전에 오신 것이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과 관련된 것이나 첫 태에 난 사내 아이 곧 맏아들을 반드시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미리 앞당겨 유월절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맏아들"(롬 8:29)이시요 우리는 그 맏아들을 필두로 하는 나머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왜 하필이면 "어린 양"인가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했다(요 1:15). 첫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았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어린 양인가. 인간과는 불가분의 동물이니 그래서 인간의 한 식구처럼 되어 있는 것이 양이기 때문이다. 이 양이란 동물은 인간이 인도해 주지 않고는 물 가로 제대로 찾아가 마시지도 못하고 푸른 초장으로 스스로 나아가 뜯어 먹지도 못하는 유일한 짐승이다. 말하자면 목자 없이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인간 의존의 가축이다.

그래서 주님 비유에서도 심판 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실 때 한 쪽에는 양, 다른 쪽에는 염소로 갈라 놓으신다고 하셨다. 염소는 다른 동물처럼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 말하면 양과 같은 생김새이지만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삶을 상징하고, 양은 그 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순종을 상징함 즉 자기 스스로 자기를 위할 줄 모르는 자기 부인을 말함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동물로서 상징하는 바는 절대적인 의존이지만 우리 인간으로 말하면 의존이 아니라 순종이다. 자의적으로 즉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하는 이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구약)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사랑의 원리에서 나를 위하시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요 나의 사랑의 상대가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용어다. 즉 나는 열 손 놓고 하나님만 기댄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나를 위하시는 이는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그 의미이다. 실상 내가 나 자신을 위함보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더 잘 나를 위하심은 불문가지다.

그리고 희생 제물로서의 양이 어린 양인 것은(출 12:2) 말할 필요도 없이 어리니까 장래가 만리 같다는 뜻이니 즉 죽을 나이도 아닌 한창 살 나이로서 생명을 구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타(他)를 위해 희생 당한다는 뜻이 강조되어 어린 양으로 택해진 것이다. 즉 희생 당하는 사실이 강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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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이가 있으니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로 성령께서 그 위에 계셨다. (눅 2:26) 그가 주님(하나님)의 그리스도(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는데 (눅 2:27) 이 때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니 마침 아기 예수님을 안은 그 부모가 율법의 전례(典禮)를 따르고자 하여 들어오고 있었다.

(눅 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눅 2:29) "주재(主宰)시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십니다. (눅 2:30)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뵈었으니 (눅 2:31) 이는 만민 앞에서 준비하신 것이요 (눅 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십니다" 하니 (눅 2:33) 그 부모가 아기에 대한 그 말들을 기이하게 여겼다.


(눅 2:34) '시므온'이 부모에게 축복한 후 그 모친 '마리아'에게, "보시오,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해 세우심을 입으셨소. (눅 2:35) 또 칼이 그대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오" 하였다.

(눅 2:36) 또 '아셀'('야곱'의 12아들 중의 하나)' 지파(支派)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는 나이 매우 늙었다. 출가한 후 7년간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 2:37) 과부된 지 84년으로  이 사람이 성전(聖殿)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금식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눅 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하였다.

(눅 2:39) 주님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고향 동네 '나사렛'에 이르렀다. (눅 2:40) 아기가 자라시며 강건해지시고 지혜가 충족해지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계셨다.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의 세계(世系, 世譜)

(마 1:1)(마 1:6)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의 세계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 '헤스론'은 '람', '람'은 '아미나답', '아미나답'은 '나손', '나손'은 '살몬',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마 1:7)(마 1:11)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르호보암'은 '아비야', '아비야'는 '아사', '아사'는 '호사밧', '호사밧'은 '요람', '요람'은 '웃시야', '웃시야'는 '요담', '요담'은 '아하스', '아하스'는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므낫세', '므낫세'는 '아몬', '아몬'은 '요시야', '바벨론'으로 이주할 때에 '요시야'는 '고냐'와 그 형제를  낳았다.

(마 1:12)(마 1:18) '바벨론'으로 이주한 후에 '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 '스룹바벨'은 '아비훗', '아비훗'은 '엘리아김', '엘리아김'은 '아소르', '아소르'는 '사독', '사독'은 '아킴', '아킴'은 '엘리웃', '엘리웃'은 '엘르아살', '엘르아살'은 '맛단', '맛단'은 '야곱',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칭호의 예수님이 나셨다. 그러므로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주할 때까지 14대요 '바벨론'으로 이주한 후부터 그리스도()메시아)까지 14대이다.

(눅 3:23)(눅 3:38) 그리스도(메시아)께서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시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 그 이상은 '레위', '멜기', '얀나', '요셉', '맛다디아', '아모스', '나훔', '에슬리', '낙개', '마앗', '맛다디아', '서머인', '요섹', '요다', '요아난', '레사', '스룹바벨', '스알디엘', '네리', '멜기', '앗디', '고삼', '엘마담', '에르', '예수', '엘리'에서, '요림', '맛닷', '레위', '시므온', '유다', '요셉', '요남', '엘리아김', '멜레아', '멘나', '맛다다',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었다.

그 이상은 '이새', '오벳', '보아스', '살몬', '나손', '아미나답', '아니', '헤스론',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다.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 '스룩', '르우', '벨렉', '헤버', '살라', '가이난',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 그 이상은 '레멕', 그 이상은 '므두셀라', 그 이상은 '에녹', 그 이상은 '야렛', '마할랄렐', '가이난',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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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註-'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했다. 다른 여자들 즉 '다말', '라합', '룻'은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경우 단지 "'우리야'의 아내"라고만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간통에 의해, 정확히 말해 '다윗'의 범죄행위로 낳은 '솔로몬'이므로 성경은 일부러 그 사실을 밝히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은 말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솔로몬'의 친모의 이름이 나오지만 이 족보에서는 그 이름을 말하지 않고 단지 "'우리야'의 아내"라 하여 임자가 있는 여자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 '솔로몬'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면 '솔로몬'의 자손이라는 것이니, 이 정도로 사심(私心) 없이 편파적이지 않게 철저히 진실만을 기록한 것이 역사서(歷史書)로서의 성경의 철두철미함이다. 다시 말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것이 실로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진실 그대로 아무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그 점이다. 다시 말해 거룩하신 그리스도께서 범죄 행위에 의해 낳은 아들의 자손이시라는 의미이다.

성경이 꾸미고 손질한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기록이라면 과연 이럴 수 있을까? 이왕 거짓말할 바에야 하나님의 아들의 인간적 측면의 혈통(비록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양자[養子, 친자가 아닌]이시기는 하나)을 말하는 것이니 그 말을 빼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진실성은 구약을 기록한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기록이 인간적인 거짓과 꾸밈이 곁들여졌다면 당연히 '다윗'의 그런 불미한 사건은 과감히 생략해 버렸을 것인데도 곧이곧대로 기록해두고 있는 것이다.

메시아께서 그 '다윗'의 자손이시라 확신하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의 하나임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이런 족보를 '누가'나 '마태'가 기록한 것은 아니다. 아래 사실 즉 '다윗'의 자손이심을 알리기 위함이다.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의 계보를 주목하면 '마태'가 기록한 것과 '누가'가 기록한 것이 약간 다르다. 더 살필 것도 없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 바로 위에서부터 그 상이점이 드러난다. 즉 '마태'는 '요셉'이 '야곱'의 아들이라 하고 누가는 '헬리'라 했다. 이는 '요셉'이 양자라는 뜻이다. 두 기술(記述) 방법을 따라 생부가 '야곱'이고 양부(養父)가 '헬리'이다. 몇 대 올라가면서 이 두 갈래는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진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라 할 때 '요셉'의 양자 격이라는 그 의미를 강조함이 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양자라는 사실을 역설함이 된다. 그러나 양자나 생자나 '아들'임에는 차이가 없다. '요셉'이 비록 양자이기는 하나 '다윗'의 혈통임에는 분명하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양자이시기는 하나 다윗의 혈통임에는 변함이 없으시다. 관점(觀點)의 핵심이 이 "양자(養子)됨"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4복음서 기록이 제각기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기록이 상이하니 그에 대한 적절한 해설이 필요한데도 전혀 없다. 이는 각 복음서나 서신이나 그 때 당시의 필요에 따라 독자적으로 기술되었을 따름이고 횡적으로나 종적(縱的)으로나 상호 긴밀한 연관성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연관성이 없이 기술한 것이 내용면에서 일치한다는 것은 그 사실의 가감없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寫實性)과 진실성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거짓말에는 이런 것이 도저히 있을래야 있을 수 없다. 거짓말 자체가 비합리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그 합리적이지 못함을 합리성을 띤 것으로 호도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설명이 가해지게 된다. 거짓말 자체가 바로 그런 합리성으로 위장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설명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정반대다. 전혀 설명이라고는 없다. 복음서나 사도들의 서신 간의 차이 또는 상이점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령 한 복음서 내에서도 특정 사실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그 한가지 예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의 그 육체의 특질이니 곧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말함인데(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이 있을 것) 다시 말해 문을 닫아도 거침없이 들어오실 수 있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변화인데도 이에 대해 당연히 단 한 줄의 글이라도 마땅한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전연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다시 역설하지만 성경의 진실성, 그 모든 기록에서 일체의 거짓이 없고 속임수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자체 증명이다. '자체 증명', 이 이상 가는 증거는 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면 즉 부활 자체가 거짓말이라면 이렇게 될 수가 없다. 편자는 지금 부활에 대해 논급(論及)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일체의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그 절대적 진실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그냥 우리 육체와 같은 것으로 살아났다고 하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특이하게 마치 유령처럼 되어 있는 몸으로 다시 살아났다 할 작정이라면 반드시 거기에는 왜 그런지 이유를 달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상식이다.

상식을 무시하고서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 법이다. 상식에 가장 밀접하고 근접하게 하는 것일수록 그것이 가장 쓸모 있는 효과를 내는 것이 모든 거짓말의 속성인 까닭이다. 그래서 거짓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 들통이 날 것을 왜 하겠는가. 고로 상당히 영리하고 또 지적 수준도 월등히 높아야 할 수 있는 것이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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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때의 예수님

(눅 2: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눅 2:42) 예수님께서 12살 되실 때에도 이 절기의 전례를 따라 가족이 모두 올라갔다가 (눅 2:43) 그 모든 날을 마치고 돌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무셨으나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했다. (눅 2:44) 동행 중에 있는 줄 생각하고 [워낙 인파에 휩쓸리다시피 하여 갔으므로] 하룻길을 간 후에야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으나 (눅 2:45) 만나지 못하여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6) 사흘만에 성전에서 만나니 예수님께서 선생[모세 율법에 관한]들 중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는데 (눅 2:47) 듣는 이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하게 여기고 있었다.

(눅 2:48) 부모가 보고 놀라 그 모친이 말하기를, "얘야,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근심하여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 하니, (눅 2:4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혹은, "내 아버지 일에 관계해야 할 줄") 알지 못하셨습니까?" 하시나, (눅 2:50) 부모가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눅 2:51) 예수님께서 함께 내려가셔서 나사렛에 이르러 [양친에게] 순종하며 받드셨다.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두었다. (눅 2:52) 예수님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시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

'세례(洗禮) 요한'

(눅 3:1) '디베료 가이사'(Tiberius Caesar-로마 제2대 황제)의 재위 15년 곧 '폰디우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유대'의 총독,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分封王), 그 동생 '빌립'(Philip)이 '이두래'(Ituraea)와 '드라고닛'(Trachonitis) 지방의 분봉왕, '루사니아'(Lysanias)가 '아빌레네'(Abilene)의 분봉왕으로, (눅 3:2) 그리고 '안나스'(Annas)와 '가야바'(Caiaphas)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황야)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셨다.

(마 3:1)(막 1:4) 이 때 '유대' 황야(광야)에 나타난 '세례 요한'은[처음으로 세례를 주었으므로 이런 명칭으로 불려진다] (눅 3:3)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가 용서되는 회개(悔改)의 세례[행 2:38]를 전파하여 말하기를, (마 3:2)(마 3:3) "회개하라, 천국(天國, the kingdom of heaven)이 가까웠다" 하였으니, (눅 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막 1:2)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네 앞에 보내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막 1:3) 황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기를, '너희는 주님이 가시는 길을 준비하라. 그가 곧바로 나아가시도록 땅을 평평케 하라. (눅 3: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질 것이니 (눅 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것이다' 하였다' 하신 대로였다[사 52:10].

(마 3:4)(막 1:6) 이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石淸ㅡ산속의 나무나 돌 사이에 석벌(石蜂)이 모아 놓은 꿀]이었다. (마 3:5) 이 때에 '예루살렘'과 (막 1:5) 온 '유대' 지방과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마 3:6) 자기들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눅 3:7) 그 세례 받으러 나오는 군중에게 말했다. "독사의 후예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마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치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 (마 3:10)(눅 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다".

(눅 3:10) 군중이 묻기를,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눅 3:11) 대답하기를, "옷 두 벌 있는 이는 옷 없는 이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이도 그렇게 할 것이다".
(눅 3:12) 세리(稅吏-징세원 또는 세관원)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눅 3:13) 말하기를, "정한 세금 외에는 부과치 말라".
(눅 3:14) 군인들도 묻기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말하기를, "사람에게 포악하지 말며 무고(誣告)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였다.
(눅 3:18)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눅 3: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헤롯이 강제로 자기 아내로 삼은 까닭에]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눅 3: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나중에 '요한'을 옥에 가두게 된다.

그리스도(메시아)를 증언하기 위해 온 '세례 요한'

(요 1:1)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으로서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였다["말씀", "빛"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킴].

(요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곧 '세례 요한'이었다. (요 1: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이 빛을 믿게 하려 함이었다. (요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이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계시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요 1:12) 영접하는 (to receive)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권세ㅡpower)을 주셨으니 (요 1:13)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정(肉情)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사람들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獨生子ㅡ외아들)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하신 데에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다.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외아들)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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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관복음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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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관복음서 (13)ㅡ주님의 부활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
https://iesou.blogspot.com/2018/02/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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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logia iesou)에 대해서는 아래 "도마의 복음서" 참고:
도마 복음
https://meschurch.blogspot.com/2018/08/blog-post_50.html
도마 복음서
https://meschurch.blogspot.com/2018/08/blog-post_92.html
소위 "도마 복음"의 유일한 가치 (1)
https://meschurch.blogspot.com/2018/08/blog-post_14.html
소위 "도마 복음"의 유일한 가치 (2)
https://meschurch.blogspot.com/2018/08/2_15.html
도마 복음서의 정의
https://meschurch.blogspot.com/2018/08/blog-post_30.html
도마 복음서에서 일부 제외한 모두가 횡설수설
https://meschurch.blogspot.com/2018/08/blog-post_99.html
아담의 범죄에서 죽음이 왔으니
https://meschurch.blogspot.com/2018/08/blog-post_0.html

통관복음서 (끝)
https://iesou.blogspot.com/2018/02/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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