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31일 목요일

창조자가 어디 있느냐ㅡ볼 수 없으니 없는 것이 아니냐


필자가 3위1체 원리를 강론할 때에는 과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과학은 분명히 지적해 두거니와 "자연과학"이다. 필자는 자연계가 아닌 그와 대칭형을 이루고 있는 초자연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 과학은 당연히 아는 것이 없다. 필자는 처음부터 자연과학자연(然)하지 않았다. 자연 과학자도 아니거니와 자연 과학을 공부할 필요도 느끼지 않고 의사도 없다. 자연계와 대립되는 초자연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주워 들은 것을 짜 집기 해서 아는 체한다"고 하는데, 필자가 아는 것, 필자의 분야만을 정확히 지금 말하고 있다. 자연 과학자들도 자기가 아는 것만 말해야 하는 것이지 자기 분야가 아닌 것은 집적거릴 필요가 없다. 그동안 과학자들의 공로와 공적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 자연과학에 의해 실험 관찰한 결과를 공유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결과만은, 그것을 궁구해 낸 자연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두의 것이다.

본인이 강조하는 것은 그런 자연과학의 분야가 아니고, 본인이 알고 있는 척도로써 자연과학의 시시비비를 가려 내는 것뿐이다. 예컨대 아인슈타인과 보어와의 논쟁에서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그 파동성이냐 입자성이냐 하는 것, 양자 역학의 실험에서 "양자 얽힘"을 무슨 유령의 미립자처럼 여기는 그런 미망(초자연계와 자연계의 양립성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니까 "미망"일 수밖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진화론의 취지는 인간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3위1체 법칙의 인과율에 비추어 재조명하게 되어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필자는 창조론에 가세하는 데에 흥미도 없다. 그들은 그들나름의 소견대로 진행할 것이다. 오직 필자의 전문 분야(필자의 전문 영역은 초자연계와 관련된 것이다)로서의 관점에서 자연계 현상은 양면 중의 단지 일면에 불과함을 지적하는데, 자연과학자들은 자연법칙뿐이라고 고집하는 데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충돌이다.

필자의 의도는 이 초자연계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요 여기에 주목하라는 데에 있다. 수용하고 않고는 각자 자기 몫이다. 여기에 아무 이해 관계는 없다.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유관성과 밀접성은 보어의 상보성 논리로써 그리고 최근의 "양자 얽힘"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으므로 이를 지적함이다. 

진정으로 학문을 하고 진리 탐구에 열중해 있는 대가들은 이런 소리에도 무슨 근거가 있나 하여 진지한 자체로 경청하는데 반해,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자만해 하는 피래미들은 그런 학구열은 없이 얄팍한 지식에만 항상 도취해 있으므로 함부로 논단하고 비평가로 자처하는데, 이는 분명 꼴불견이다. 대꾸할 가치도 느끼지 않음을 명심해주기 바란다. 시각 차이가 현저하기 때문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중국의 음양이원론을 찾아 닐스 보어가 중국에까지 갔던 것을 보라. 

세계가 자연계와 초자연계로 양립되어 있으니 당연히 그 연구 분야도 양면으로 나누어져 있어야 마땅하나 속성상 자연과학이 초(또는 반)자연계를 구명해 내기에는 한계가 있고 역부족의 운명을 지닌다. 그러나 초자연계가 엄연히 존립한다는 그 자체만의 지식으로도 중요한 것이니, 왜냐면 초자연계의 존재들이 자연계에 국한된 제한된 역량의 인간을 위협하고 있는 실상이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를 역설함도 바로 이에 대한 대처, 대비책에 말함에 있는 것이다.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도 시인하고 있는 소위 "외계인"이다. 이런 박학다식한 천재도 그들의 기만 행위에 속절없이 속아 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경고가 3위1체 원리의 선포이다.

고로 이런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 해결 비법은 학문적 지식으로 접근하는 데에 있지 않고 상식에 의존하라는 것이 시의적절한 충고가 된다. 그런 지식으로 맞선다는 것은 초능력의 존재 앞에서는 한 마디로 불가항력임을 명심할 일이다.


"건전한 판단"이란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 존재를 믿느냐" 하는데, 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경우, 이를 건전한 판단 혹은 논리라 한다.

"우주를 볼 수 있느냐, 없다. 그러면 우주를 만드신 이라면 우주보다 클 것인데, 우주도 보지 못하면서 어찌 그 창조자를 볼 수 있다고 그러느냐. 만약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존재라면 그 크기를 말할 때 이 너른 우주에 비하면 먼지 중의 먼지만도 못할 것인데, 저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어찌 우주를 만들었겠느냐 하고 더 믿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볼 수 있어도 못믿겠다,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못믿겠다 하니 범의 장단에 춤추기도 어렵다. 그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이 외에 나열하게 되는 여러 가지의 이유들은 순수하게 그 개인적인 것으로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낱낱이 열거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의 빈약성이 단번에 드러나게 된다. 말 장난에 불과하거나 사사로운 편견이나 선입관에 좌우됨이 여지 없이 폭로된다. 예를 들면, 창조자가 정의로운 존재라면 왜 세상이 이렇게 부정 불법으로 득실대느냐 하는데, 성경이 그 해답을 명백히 밝히고 있건마는 성경을 굳이 읽으려고 아니하는 데에서  그런 무신론의 어쭙잖은 변명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데 왜 세상에 이러한 끔찍한 불행이 있느냐 하는 질문도 스스로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천재 과학자로서의 무신론보다 일개 평범한 상인이나 회사원의 유신론이 "상식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절대 다수라고 해서 그 주장이 상식적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극소수라의 견해라고 해서 비상식이라 단정할 수도 없게 된다. 콜럼버스나 갈릴레오나 자기 세대에서 극소수에 속했던 인물인 것이다. 또 유신론자나 종교인(여기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상식적이라고 일괄적으로 분류하지 못한다. 왜냐면 창조신의 존재를 시인하는 데에서만은 상식적이나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서는 몰상식함을 드러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안 별로 다루어 그 상식과 비상식을 논하여 가리게 되어 있다. 여기서의 주제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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