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9일 토요일

인간은 모름지기 현재의 자기 좌표를 정확히 파악해야




"상식은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지식, 판단력을 말하나 사회에 따라서 상식이 다르다"(위키 백과) 했는데 너무 안일한 정의다. 인류 공통의 상식은 하나뿐이니 양심과도 결부되어 있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불변인데 이를 생략해버린 것이다. 예컨대 도덕, 인륜 등으로 표현됨이 그것이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상식이 없다"고 할 때는, 특정 부면에 관한 한 논리의 빈약성 내지 마비를 말한다. 즉 아래와 같다.

만일 우리 복음(福音, glad tidings, 좋은 소식, 희소식, 복된 소식, 반가운 소식)이 가려졌으면(to be hid, veiled) 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진 것이니, 그들 중 이 세상 신(神)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to blind)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고후 4:3,4)

세계 최고 지성이라 하는 이들도 무신론자가 많은데 그러면 그들 모두가 비논리적이냐 반문하겠지만, 물론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이성과 지성이 타의, 타력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을 때다. 그 때는 아무리 천재라 날고 뛰는 재주가 출중해도 속수무책이다. 자기보다 막강한 힘에 의해 속박되는 것은 당연하다. 신체적이든 지성적으로든 힘의 대소에서 차이가 현저할 때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 인간 세계가 이 막강한 초능력의 초자연계 존재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 성경적 사실을 믿고 안믿고는 자유다. 아무리 설명해도 수용하지 않으면 억지로 납득시킬 수는 없으니 그 때는 간단히 말해 "버려두는" 수밖에 없다.

단지 그 윤곽을 잡을 수 있을 만한 기틀을 잡아주는 것이 성경을 근거로 하는 3위1체의 원리이다. 자연계가 있으니 초자연계가 있게 마련이고 그 세계의 존재들이 있을 것은 필연적이고 그리고 그 대립(대칭) 국면에서 악인이 있고 선인(의인)이 있듯이 악령과 선한 영물(초자연적 존재)이 있게 됨도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악령들이 현재의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등이 성경과 더불어 밝혀주고 있는 내용이다. 

이런 상황은 성경 외에는 아무데도 말해 주는 데가 없다. 오죽하면 신을 부정하는 종교인 불교가 지금까지도 문전성시를 이루겠는가. 그만큼 잘 나간다는 의미다. 창조신을 부정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밝히는 이 3위1체의 원리가 못미더우면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을 자세히 들여다보라는 권고다. 그것을 열심히 연구할 필요는 없다. 너무 간결해서 단지 시간만 할애하면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 3운법칙(인간 生涯의 법칙)만 해도 3위1체 원리를 검증하는 역할만 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 성경의 진실성,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위치 등을 그대로 드러내어주고 있다.

이외의 왈가왈부 갑론을박은 시간 낭비다. 성경은 애 터지게 믿으라 사람들에게 권하거나 회유하지 않는다. 자유 의지를 일단 주셨으니 온전히 각자 몫이다.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다. 영원한 운명은 각자의 손아귀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순수하게 각자에게 달렸다. 성경은 믿으라고 강압하지도 않는다. 역사상 기독교란 간판을 내걸고 세상의 군왕들 위에 군림하여 있는 종교는 있으나 성경은 그런 집단을 사이비라 규정한다. 왜냐면 세상의 지배자가 악령이라고 성경은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이 어떻게 모순될 수 있는가. 

이런 가짜가 진짜보다 득세하여 흥왕하고 있는 것도 이 세상이 위에 지적한 강압되고 있음의 증거 중 하나다. 어째서 진짜보다 가짜가 더 강할 수 있는가. 위와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모순되다고 믿으면 그 역시 그 믿는 대로 버려둘 수밖에 없다. 억지로 애잔하게 끌려고 하지 않는다. 강압하는 것치고 진리는 없다. 진리는 사랑에 있기 때문이고 사랑은 자유 의지가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직접 읽어보지도 않고 모순이니 어쩌니 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가 된다. 비판을 하고 싶거든 누구보다 열심히 성경을 읽을 일이다. 무작정 비판하기는 쉬우나 정확하게 일침을 가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니 내버려 둔다고 해서 방관하는 일은 없다. 하나님 앞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이 일을 소홀히 할 때 소위 "믿는" 자들의 생명은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의심해볼 만하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했다. 나 혼자만 구원받으면 됐다고 하는 것부터가 구원 받지 못한 증거다. 말씀을 전할 때도 설득시키려고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 논쟁에 휘말리는 것도 금물이다. 능력은 말에 있지 않고, 말에 앞서 기도에 있는 것이다. 기도는 보통의 기도가 아니라 산고, 산통(産痛), 해산의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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