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16일 수요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안에서 생명수 강이 흘러내리리"

"From within him sha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요 7:38)
우리말 번역과 흠정영역은 "배에서"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영역은 "안에서"라고도 되어 있어 후자를 좇았다. 
실상 우리 배의 단전(丹田)에는 인간의 모든 기력이 집중되어 힘의 원천이라고도 함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고 그래서 너는 나를 생각하여 위하고 나는 너를 생각하여 위하고, 너는 나를 의식하고 나는 너를 의식하고 너의 삶을 내가 살고 너는 나의 삶을 살고ㅡ이것이 "자기 부인"임을 설명했거니와, 주님과 나 사이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아버지 품속의 아들들 즉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 믿음의 형제 사이 역시 그러함은 모두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이다.                                                                                                                
뿐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내가 상대하는 형제 안에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계시니까 여전히 기본 기조는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다. 그대로 유지된다. 그래서 그 형제는 나를 위하기를 주님 위하듯 하고 나도 그를 위하기를 주님을 섬기듯이 하는 것(엡 6:5-7/골 3:24). 그러니 천국 곧 우리의 이상향에서는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어도 그 안에 똑같이 주님께서 그 영혼 격으로 그리고 머리 격으로 계시므로 모든 사람이 나를 차별없이 마치 머리이신 주님을 위하듯이 위하니 여기에 참된 평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은 자는 자기의 높아진 것을 자랑하게"(약 1:9,10) 되는 것. "부한 형제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것은 교만하여 높아진 채하는 것은 멸망의 지름길인데 이제는 낮은 마음이 되어 겸손하니 그 멸망에서 벗어났으므로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하시고 그와 같이 지극히 작고 낮다고 형제를 업신여겨 섬기지 않는 것 하나로 "멸망에 들어간다"(마 25:45)고 하셨다. 그 한 가지 때문이 아니라 그 한 가지로써도 자아중심이라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몸 구조에서는 모두가 공인(公人)이고 사인(私人)이 없다. 즉 공공(公共)을 위해 살고 사적(私的)인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그러니 죄와 악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보내신 이의 영광을 위하는 자는 진실되어 그 속에 불의가 없다"(요 7:18)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보내심을 받았으니 자기 사욕을 따르지 않고 공공의 유익만을 위하니 보내신 이께서 머리로서 본시부터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그 몸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분부하시는 까닭. 

이것이 이상향적 삶이다. 유일하다. 이 외에는 없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보내심을 받는"(요 20:21,22) 것이니 곧 이러한 삶이 시작이 되는 것. 머리 자신부터가 몸을 위하시니 그 몸의 모든 지체가 하나도 예외 없이 머리를 위하고 그 머리의 지시를 따라 상호간 상대를 위함이다. 이런 자기 부인의 바탕 즉 머리께서 솔선 수범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사람, 사람으로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라는 굳건한 토대 위에서만 가능해지는 삶인 것을, 무신론자들이 성경에 있는 이상향적 삶의 형태만 모방하여 시행하려 하니 본말전도라 성공할 리 없고 도리어 이를 미끼 또는 기화로 사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들의 먹이만 되어준 꼴이 되어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산 독재의 행태(行態)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히 '공인'이지 '사인'이 아니다. 공직에 있는 자가 사사로운 욕심을 내거나 업무 수행 중에 사적인 용무를 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것 바로 그대로다. 자아중심에 사로잡힌 눈먼 이들의 눈에는 이야말로 속박 구금된 생활이라 하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이것이야말로 모두가 똑같이 평균되게 행복을 누리는 문자 그대로의 공산(共産)사회인 것이다. 영어 communism이 community 즉 공동체 다시 말해 공동체의식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인데,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아아지 자아중심이라는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담자니 감당을 못해 찢어져 죽도 밥도 아닌 것.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는 자기 부인의 새 자루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나를 보시고 나만을 위하시고 나는 주님을 보며 주님을 의식하는 매일의 기쁘고 즐거운 생활이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는 것이요 이를 다시 강조하여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 한 것이다. 거듭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할까"(3:18) 하여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의 구원을 이루는"(2:12) 마당이니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우리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상이 바로 그러하여 기쁨과 평안이 넘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의식의 삶(Christ-conscious life)이다. 이렇게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영광스러움은 아는 자만이 아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자아중심에만 죽어라 하고 매달려 있는 사람은 이런 자유인으로서의 삶의 행복을 알 수도 없거니와 영원 세월이 흘러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고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를 위하고 나만을 의식하던 삶(실은 삶이 아니라 죽음 바로 그것이지만)에서부터 그리스도를 의식하여 위하는 삶으로의 180도 전환을 말하는 것.

즉 첫 사람 아담과 그 육체를 물려받은 모든 인류가 3위1체 원리에서의 갑과 을을 형성하고 있음과 같이(자연 물질계에 속한 육체 면으로), 이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우리 각자는 그런 갑과 을의 구조를 이룸이니 그리스도와 나라는 이중 구조, 곧 머리와 몸의 양쟈 관계, 육체와 영혼의 이중 구조의 형성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제1차적 관계를 이루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를 가리켜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 주님 밖에 나의 사모할 사람 없습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내 몫(portion)이 되어 계십니다"(시 73:25, 26) 하고 노래한 것이니 우리도 이 사랑의 노래를 끊임없이 흥얼거림은 당연하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것이니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이다"(히 13:15). 이 사랑의 노래가 원동력이 되어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며 각자의 구원을 이루게"(빌 2:12) 되는 것이다. 이런 양면성과 동시성의 조화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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