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3일 수요일

고난 받는 북한 교회와 내가 한 몸이 아니면 머리되시는 분과도 한 몸이 아닌 것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형상만 아니라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신(神-고후 4:4)이라고 한 영물(靈物)들도 영혼이 조성됨으로 말미암아 초자연계(에덴 낙원)에 들어가 초자연계 육체가 된 인간(아담)을 위해서 즉 그를 보좌하기(to help)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순수한 영이고 그래서 인간으로 치면 영혼이 바로 그 육체 격으로 되어 있는데 아담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아울러 다스리는 위치에서 양 세계에 동시에 속해 있는 의미에서 이중 구조이다. 그러나 범죄로 인해 초자연계 육체로 있던 육체가 도로 자연계 몸이 되어버림으로써 이전 아담이 자연계 육체로만(영혼이 생성되기 이전) 되어 있던 상태로 전락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인류의 비극이다.


그러므로 영물들이 영이기 때문에 자주 독립성이 부여되어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오늘날까지 둘로 분류되어 "거룩한 천사"와 악령으로서의 영구적인 운명으로 양립되어 있는 상태에 있음과 같이, 비록 육체는 이러한 비극적 결말에 처해 있어도 영만은 영물과 같은 속성이므로 자주 독립성에 의한 자기 선택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인생들이다. 따라서 영원 멸망에 처해지면 사탄을 비롯한 모든 악령들과 함께 들어가는 불 못이므로 사탄과 악령들이 그 운명을 면할 수 없음과 같이 인간도 절대로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인간이 그런 처형에서 풀려 나는 길이 있다면 사탄도 역시 풀려 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니 풀려 날 수 있을까. 없다면 인간도 없다. 

한평생 죽으라고 뼈빠지게 일하고 모으고 해서 그래서 놀러도 가지 않고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해서 회사도 차리고 운영하다가 갑자기 암에 걸려 모두가 허사가 될 지경에 이르자 의사에게 매달려 내 재산 절반이라고 주겠으니 이 병만은 고쳐주시오 하고 울부짖다가 죽으니 아내는 그 재산 가지고 남자를 정해서 가버렸다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것이 속임이요 거짓인 것이다. 성경에도 부자가 여러 가지로 잘 지내보려고 창고를 짓는 등의 궁리를 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유명을 달리한다고 경고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면 나는 이제부터 제대로 놀러도 가고 세상 낙을 조금씩 누려가면서 돈을 벌겠다고 하려는가. 그런 부자보다 더 어리석다 할 것이다.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성경의 경고는 이 세상 자체가 그런 속임수요 거짓이라는 뜻으로서 영원한 것이라야 그런 거짓이 없다는 그 뜻이다. 오늘 안죽고 몇 십년 더 산다고 한들 그것이 영원 세상에 비하면 몇 푼어치 가치가 있겠는가. 영원 세상에서 온갖 호강을 누리며 사는 기회를 놓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반대 현상인 온갖 것 즉 3위1체 원리가 가리키는 대로 생명과는 정반대되는 것("엎 스핀"이면 "다운 스핀")만을 부둥켜 안고 몸부림쳐야 하니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 둘째 사망이요 멸망인 것이다.  


아담 하와가 범죄하여 이 자연계 육체로 환원되어 이 지경이 되어 있는 것은 그런 영원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본격적인 "영혼의 죽음"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육체에 한하는 이 세상 고생이나 죽음은 죽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실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 역시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상식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패멸을 당하게 된다. 


원래는 아담 부부가 에덴낙원에 초자연계(신령한) 몸으로 있으면서 자식들을 생산하여 나중에 "선악간에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 심판 받게 되어 있는 것으로, 영물들과 함께 영생 아니면 멸망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아담 내외부터 범죄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는 것(불신자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들은 후 믿고 안믿고의 양단간의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죽음과 생명의 양자 택일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과 똑같은 과정을 겪음인 것이다.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우리는 이 자연계 세상에서 그 과정을 치르는 것으로서 무대만 서로 다를 뿐이다. 


첫 사람 아담이 영물과 인간을 한데 아울러 심판하게 되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마지막 아담께서 마지막 심판의 심판주(재판장)가 되어 계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의미이나, 첫 사람 아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심판을 하게 되어 있었음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사탄을 위시해 악령들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도 영원 형벌에 악인들과 함께 들어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런즉 이런 사뭇 엄숙하고도 떨리는 현실 앞에서 어찌 "미친 마음"(전 9:3)이 되어 또는 이 세상 신 사탄에게 사로잡혀("사로잡혀" 있음의 일방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생 스스로 회개 않는 악함으로 인한 둘의 결합 또는 합작) 눈이 어두워(인간 스스로 악을 선호함에 따라 사탄이 눈을 어둡게 함으로 인한) 보지 못하는 그래서 이러한 엄청난 실상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한 상태를 알면서도 이 세상 삶에 연연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 그래서 이러한 마비된 감각의 태무심과 무관심은 본인이야 아무리 하나님 믿고 구원 받았다 하더라도 한 마디로 단정하면 "믿지 않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엄정한 자가 진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의 이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여기에만 버둥거리면서 일우일희하면서 지내던 일체의 것을 청산하고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일에 나머지 생애의 모든 정력과 기력을 다해야 하는 것. 오직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어야 하는 필연성에서 운영되는 세상사임이 드러난다. 그 동안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왜냐면 회개를 하지 않는 한 악에 사로잡혀 살인자 가인처럼 될 것이 뻔하기에)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이 철저히 운영되고 인간에게 적용되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인간 지배는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이는 하나님의 통제의 영역이므로) 앞서 지적한 대로의 새 창조, 재 출생을 막기 위한 일체의 방해 공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욥과 같은 경우처럼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때문에 "이 세상의 임금"(prince)이라 하신 것. 이상향 세계에서의 삶이 핵심이지 이렇게 강제로 규격화되어 있는 현재의 이 세상 삶은 인간으로서는 삶이 아닌 것은 명약관화.

자연계에 속한 인생의 삶을 이와 같이 세 가지로 한해 철저히 마름질해 간다는 것만 알아 그래서 자연계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결과만 우리가 아는 것뿐이지, 우리의 자유 의지와 실제 삶(이 세상에서의)이 어떻게 엮어지고 꾸려지고 상관성을 이루어 나타나는지는, 자연계에 속한 우리로서는 그런 초자연계에 속한 영역의 일을 규명해내는 것은 한계 밖의 일이다. 또 알아서 덕되는 것도 없다. 


발 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것 즉 범죄로 야기된 죽음의 이 자연계 몸을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의 과제이니까. 이 역시 상식에 속한다. 나 자신 먼저 여기서 벗어났으면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일하게 구제되도록 힘쓰느라 다른 것에 한눈팔 여유도 없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행위를 하는 자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경고하신 것이다(눅 9:62).





위의 그림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모습. 이렇게 일하고 있는데 뒤를 돌아볼 수 있는가. 그럼에도 뒤를 돌아보는 억지, 무리(無理)가 바로 이 세상 사랑이요,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것 등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세상 걱정 근심, 세상 쾌락, 부자되어 살아보겠다는(막 4:19) 마음이 모두 그러하고, 이 경우 열매 없는 자가 되어 생명에서 모두 탈락된다. 핍박이 나서 믿음을 버리는 경우와 똑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막 4:19). 재리(riches)의 "유혹"이라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역(英譯)은 deceitfulness다. 즉 속임수, 거짓이다. 왜냐면 오늘 밤이라도 영혼 떠나면 나와는 그 모든 부(富)가 완전히 남남이 되기 때문. 


한평생 죽으라고 뼈빠지게 일하고 모으고 해서 그래서 놀러 가지도 않고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무진 애쓴 결과 회사도 차리고 운영하던 도중 갑자기 암에 걸려 모두가 허사가 될 지경에 이르자 의사에게 매달려 내 재산 절반이라고 주겠으니 이 병만은 고쳐주시오 하고 울부짖다가 죽으니 아내는 그 재산 가지고 남자를 정해서 가버렸다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것이 방금 말한 속임이요 거짓인 것이다. 성경에도 부자가 여러 가지로 잘 지내보려고 딴에는 창고를 짓는 등의 한창 궁리를 하고 있던 바로 그 밤중 즉 하룻밤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경고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면 나는 이제부터 제대로 놀러 가기도 하고 세상 낙도 조금씩 누려가면서 돈을 벌겠다고 하려는가. 그런 부자보다 더 어리석다 할 것이다. 이런 경고를 받고서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성경의 경고는 이 세상 자체가 그런 속임수요 거짓이라는 뜻으로서, 영원한 것이라야 그런 속임수, 거짓이 없다는 그 뜻이다. 오늘 안죽고 몇 십년 더 산다고 한들 그것이 영원 세상에 비하면 몇 푼어치 가치가 있으랴. 


영원 세상에서 온갖 호강을 누리며 사는 기회를 놓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대로 그 반대 현상인 온갖 것 즉 3위1체 원리가 가리키는 바 생명과는 정반대되는 것("엎 스핀"이면 반드시 "다운 스핀"이듯)만을 부둥켜 안고 영영세세 몸부림쳐야 할 것이니 어찌 아니 두렵고 떨리요. 성경에서 말하는 바 "둘째 사망"이요 "멸망"이니 이를 안 다음 어찌 태평이리요.  

아담 하와가 범죄하여 이 자연계 육체로 환원되어버려 이 지경이 되어 있는 것은 그런 영원성 비극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본격적인 "
영혼의 죽음"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니 그에 비하면 육체에 한하는 이 세상 고생도 죽음도 죽음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실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마음에 두지 않는 것 역시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상식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패멸을 당하게 된다. 

원래는 아담 부부가 에덴낙원에 초자연계(신령한) 몸으로 있으면서 자식들을 생산하여 나중에 "선악간에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 심판 받게 되어 있는 것으로서, 영물들과 함께 영생 아니면 멸망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아담 내외부터 범죄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는 것(불신자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들은 후 믿고 안믿고의 양단간의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죽음과 생명의 양자 택일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과 똑같은 의미요 똑같은 과정을 겪음인 것이다.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우리는 이 자연계 세상에서 그 과정을 치르는 무대만 서로 다를 뿐이다. 


첫 사람 아담이 영물과 인간을 한데 아울러 심판하게 되어 있었던 것처럼, 당연히 지금도 마지막 아담께서 마지막 심판의 심판주(재판장)가 되어 계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의미이다. 첫 사람 아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심판을 하게 되어 있었음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사탄을 위시해 악령들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도 영원 형벌에 악인들과 함께 들어가기 위한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죽음(고생, 고통 중에 처해짐)과 그와는 순수하게 180도로 내용이 다른 생명 세계에서의 판가름을 스스로 하게 되어 있는 양자 택일의 순간을 이어가는 우리가, 과연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대해야 하는지 상식적으로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황금덩이보다 더 값비싼 아니, 값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시간들이 지금도 계속 무자비하게 흘러간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우리 위해 기도하시는데 머리가 어떠한즉 몸도 그러하니 그래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유 1:20/엡 6:18)는 명령인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산고(産苦), 해산의 고통의 신음(우리말 번역 "탄식"은 아주 동떨어진 의미의 잘못된 번역이다) 속에 기도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눈물"(히 5:7)이 아니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영원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이 뻔한데 어찌 눈물이 아니 나올 수 있으리요. 내가 목석인가. 육체의 고통과 불행을 보아도 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영원 멸망이리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눈물의 사도였다. 다른 사도 역시 편지에 그렇게 쓰지를 않아서 그렇지 똑같은 심정으로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시면 제 이름이 생명 책에서 지워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모세의 기도를 드리는 하나님 앞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내 자신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것이 내 골육의 구원"(롬 9:3)이라 한 바울 사도의 기도가 바로 그런 그리스도의 기도를 닮음인 것이다. 나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이니 어찌 해산(birth pangs)의 기도가 아니리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신음(이 "탄식" 역시 오역)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롬 8:22) 역시 이 "해산의 수고"인 것이다(창 3:16). 이 해산이 수고 차원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고"(빌 1:2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움"(골 1:24)인 것이다. 

우리가 모진 핍박을 받음도 이 숭고한 '해산의 수고'의 차원인 것이다. 79세의 북한교회 장로(감독)가 65명의 교회 식구들을 이끌고 찬송 한 번 실컷 불러 보려고 기껏 탈북했다가 자유 대한으로 탈출할 절호의 기회를 만났어도 스스로 이 주님의 해산의 고통 중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전원 순종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모두 남김 없이 순절(殉節)한 것이다. 나는 그들과 한 몸이 아닌가. 그들과의 한 몸 정도가 아니라 머리되시는 주님과의 한 몸이 아니라는 증거인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