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4일 목요일

고난 받는 북한 교회와 내가 한 몸이 아니면 머리되시는 분과도 한 몸이 아닌 것 (2)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우신 그리스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흘리시던 눈물의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 한두 때만 우신 것이 아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항상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셨다고 하는데 과장된 말일 수가 없음을 바울 사도의 눈물로도 입증된다 할 것이다. 말씀을 전할 때도 두렵고 떠는 정도가 아니라 눈물로써 교회에 경고한 것이다(행 20:19,31/고후 2:4/빌 3:18). 바로 이 이유 때문에도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으니 장차 웃을 것"(눅 6:21)이라 하신 것이다. 눈물이 실종되어 있는 세대다. 이는 능력의 실종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실종된 교회를 말한다. 눈물의 설교가 없다. 오래 전 대구의 어떤 연로한 "전도 할아버지"는 전도지를 주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소리로 "예수님 믿으시오" 했던 것처럼 그런 눈물의 전도, 눈물의 중보 기도,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롬 12:1)로 하는 제사장의 기도를 보기가 무척 힘들다. 새벽 기도를 나가도 줄곧 내 자신, 내 문제, 내 가족 위주다. 물론 다 좋다. 겸하여 반드시 이웃을 위한 해산의 기도라야 그 기도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자아중심이 되어 죄인의 기도가 되니 죄인은 그 기도가 가납(嘉納)되지 않는다. 


이 자연계 세상에서의 육체의 고난이나 죽음도 불쌍해서 눈물이 나오는 판인데 하물며 영원 죽음과 고난을 앞두고도 전혀 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저러고들 있으니 생각 있는 이들이여, 어찌 대성통곡 중의 탄원의 기도가 없겠는가. 나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롬 9:3) 듯한 고통의 호소가 없으리요. 나 역시 심성(心性)이 마비되어 있지 않는 한에는 어찌 그 비통스러움을 감지하지 못하리요. 이 세상은 고해(苦海)라기보다 사해(死海)요 누해(淚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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