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6일 일요일

21세기에 대처하는 정확한 정보ㅡ세상 살고자 하는 망상을 끊어야 하는 이유 15가지



정보가 정확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부하들에게 외친 것은 "정확한 정보를 달라, 정확한 정보!"이었습니다. 전쟁만 아니라 모든 사업에서 첫째로 정보가 정확해야 합니다.

아담이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생하도록 창조되어 초능력을 구사하는 초자연계 존재였는데 사탄의 꾐에 넘어가 범죄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이런 자연계 육체로 환원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오늘날 적그리스도 및 그의 등장을 위한 정지(整地) 작업으로 youtube 등을 통해 요란스럽게 전주곡(前奏曲)을 울려대고 있는 각종 초능력 현상(소위 "ufo"를 위시해서)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되며, 또한 이에 완벽하게 대비하는 대책이 됩니다. 성경을 이와 같이 바르게 아는 것이 오늘날 아주 중요합니다. "정확한 정보" 차원에서 인식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인류 역사가  불행의 비극적 사건으로부터 시작한 것을 아는 것이 오늘의 각종 현상을 푸는 열쇠입니다. 인간이 애당초 이런 자연계 육체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은 그 당시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속이던 똑같은 거짓말, 속임수에  대한 굴복이 됩니다.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에서 시작된 범죄로 인한 저주와 죽음으로 이 세상이 열려진 것이니 그 증거가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살인극, 타생명 파괴 행위의 무고한 피로 물들여지는 인간사(人間史)의 서막 제1막 제1장입니다.

그 내용도 의인이 악인을 징계하는 의미가 아니라 도리어 악인이 의인을 이유 없이 오직 자기 눈에 거슬린다고 참살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벌어진 것이요 오늘날까지 이는 변함없는 현실 그대로입니다. 성경에도 악인이 이 세상에서는 흥왕하고 창성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치을 미리 받는 사전(事前) 대비 차원에서 세우심을 입
은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사회를 꿈꿀 수 있는 것이었으나 이 역시 끊임없이 저질러지는 인간 범죄에 의해 무색해지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도 이러했으니 나머지 각 나라 각 족속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악이 지배하는 인간 사회, 이것은 인류 역사가 비정상적으로 범죄와 그에 대한 저주로 얼룩져 내려오기 시작한 대로 이런 비극을 조장한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왕, 지배자)이 되어 있다는(고후 4:4/요 14:29) 그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죄인 인간이 자기 죄로 받는 형벌이요 저주라는 차원에서 인식되어야 하므로 각종 악으로 야기되는 인간 비극을 걷어내실 수도 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악이 무작정 방치될 일도 아닙니다. 고로 이런 경우 인간고(人間苦)는 고통 그대로 두면서 또 악인의 폭압을 어느 선까지(이를 규제 규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3운법칙) 허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힘찬 맥박으로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다름아닌 '의인의 고난'입니다.

"의인의 고난"은, 악인은 그 자행되는 악한 행위를 따라 그대로 걸러 내어져 심판에 처해지게 하고 의인은 골라 내어 그 희구하고 염원하는 대로 영생과 영원한 복락으로 포상되도록 함에(롬 2:7-10) 주목적이 있어 그야말로 사필귀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악인은 악인대로 악을 행하고(세상이 보기에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는 탄식을 자아낼 정도로), 의인은 의인대로 선한 목적을 위해 고난을 받는(세상이 보기에는 억울하고 부당한 처사를 당하는 것으로 비쳐지나) 일견 부조리로 인식되어지는 세상사 인간사지만 그 합리성과 타당성은 확고한 것입니다. 비정상인 것 같지만 정상이요, 불의가 판치는 것 같으나 정의는 확립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대로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삶의 지조가 없는)하지만 그와 같이 한 치도 빈 틈이 없어 허수하게 돌아가지 않고 엄정, 엄밀하게 운행되고 있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3운법칙입니다.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 인간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주인이 못된 종을 만나 종이 주인 위에 걸터앉아 주인장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런 거꾸로 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무질서가 아니라 방금 설명한 대로 전화위복(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써)의 무대 설정이 되어 차질 없이 전개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간 비극(그러나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사업에서는 절대적이고도 핵심이 되는 의미)을 무시하고 들어가거나 인정한다고 해도 아주 과소평가해 버리는 대대적인 속임수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을 인정하는 겻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역사는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초자연계 존재로 영생의 행복 가운데에서 살게 되어 있는 인간이 범죄의 대가로 자초한 죽음과 저주로 인해 현재의 인간 불행의 도탄 속에 빠져 구원만을 열망하는 상태에 있음을 반드시 모든 인생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 필수 지식(정보)을 전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행 1:8)으로서의 마땅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의 전도 내용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새 창조와 다시 출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신들이랍시고 초능력으로 날뛰는 악령들의 발호가 극으로 치닫고 있어 그들의 정체를 설명하여 밝히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 오늘의 이 "마지막 때"(단 12:4) 우리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니까 암흑이요 이 암흑을 눈치 채지 못하고 밝은 대낮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함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으니까 이는 사탄의 손아귀에 장악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행 26:18).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숙명적으로 악령 사탄과의 전쟁 상태로 돌입합니다. 몰라서 그렇지 실상이 그러합니다. 고로 마지막 아담과 연합함으로써 사탄을 자기 발 아래 짓밟을 수 있게 되고 이 세상에 대한 승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생사를 건 일전(一戰)에서 도리어 악령에게 지고 들어가 그와 함께 영원 불행에 갇히고 만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 끼칠 일입니다. 그런 이들이 절대 다수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경고를 해도 듣지 않으면 옛 아담처럼 죽음의 운명을 스스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이런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 정보 없이는 필패(必敗)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하나이시다"라는 의미를 "한 분"으로 오해하지 않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하신 그 하나(One)의 의미임을 알아 "3위1체 하나님"의 의미를 바로 깨치고, 이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와 아들로서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 모습을 따라 만유가 창조되어 자연계와 초자연계로 대립된 만물을 규명해내는 데에까지 진전하게 된 "21세기의 성경 해석"으로 수세기 동안 풀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 "21세기 신학"이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해석한다(풀이한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도 인정했습니다(벧후 3:16).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는 "과학"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이 말하는 "과학"은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연과학"일 뿐입니다. 3위1체 원리는 초자연계의 실존을 입증하여 자연계는 물론 초자연계까지 망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초과학"이라 하면 더더욱 애매 모호합니다. 왜냐면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는 엄연한 법칙인 것입니다. "신학"이라는 카테고리를 정함은, 철학의 한 분류인 것처럼 기만(欺瞞)하여 계시(啓示)가 아닌 학문처럼 여기도록 만든 사탄의 음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분야가 아닌 <전체>, <전부>입니다. 삶 자체입니다. 삶의 필수, 필연입니다. 삶의 기본 바탕입니다.

생존 자체에 관한 것인데도 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사탄이 그와 같이 의미를 왜곡시켜 종교 철학 중 하나 즉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 중의 일부로서 격하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니 즉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성경의 기본 지식부터도 습득 불가능하게 만들고 자연계의 한 동산처럼 인식하게 한 것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이라는 개념조차도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해야 마땅하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사탄이 이 세상 신 곧 지배자로서 세상 문화가 그러한즉) 것뿐입니다.

"자연과학"이라 해서 "초자연과학"이란 것이 또한 자리잡을 수도 없습니다. 초자연계는 자연계에 속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한계 밖이기 때문입니다. 인식은 해도 연구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3위1체의 법칙을 따라 그 실존이 증명되었다는 것뿐이지 그 실상을 규명한다는 것은 자연계 존재인 우리로서는 실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자연계에 속한 것이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므로 이 이상(異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제일차적 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비정상 상태에 있으면서 설혹 초자연계를 구명해본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지식이 인간을 정상 상태로 회복시켜 영생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류의 유일한 현안 과제는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것, 이 외에는 일절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모든 인류는 눈을 떠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지배신 사탄에게 꼼짝없이 매여 있다는 자기 실상의 비극적 실상에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이상으로 다른 아무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 놓고 보아야 합니다. 사탄의 이 세상 지배력은 정작 이 긴박한 실상에 대해서는 눈 뜨지 못하게 하고 엉뚱한 데에다 관심을 집중하도록 휘몰아, 구원 받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지도록 허락된 천만금 가치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송 세월하도록 만들어 스스로 멸망에 빠져들게 하는 흉악한 음모에 있습니다.

고로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역할은 모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정확한 정보를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에 이를 가리켜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여 나와 고아가 어버이의 품으로 돌아가듯 하나님께 돌이키는"(요 14:18/행 26:18) 것이라고 명백히 묘사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우리 구원을 그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4백년 간의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유월절(逾越節, Passover)"로써 성경은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모든 인류 역사의 축소판으로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를 요약해 놓은 것이므로 결단코 유대인만의 국소적(局小的) 사건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유대인들이 거의 2천년간의 나라 잃은 서러움을 극복하고 세계의 정상 아닌 정상에 우뚝 서 있어 하나님의 인간 주재(主宰)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국가 흥망사에서 기적 중의 기적이 바로 이 유대인들의 행적(行跡)이 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탄은 인간이 단지 영생 얻는 데에만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처럼 속여 왔습니다. 죽은 자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천하무적 막강한 권세와 권위(첫 사람 아담이 상실했던 그 고유의 권한)의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 일하고,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아버지 일을 대행(代行)함이 구원 얻게 하신 목적임을 뇌리에서 깡그리 말살시켜 왔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이렇게 되면 구원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미래의 영역이 아니라 현재의 살아 움직이는(산 자가 되어) 삶 자체를 말함이기에 그렇습니다(고후 5:15). 따라서 올바른 생활("참고 선을 행함"ㅡ롬 2:7-10)을 강조함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구원과는 거리가 먼데:
도 마치 구원 얻은 것인 양 착각하도록 이 세상 신 사탄은 속여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즉 합하여 한 영이 되는 것은(고전 6:17)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니 모신다는 것은 주인으로서 받든다는 뜻입니다(갈 2:20). 사랑은 서로 간에 종 노릇함입니다(5:13). 아내 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까 하는 것보다 주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 하는 것이 앞서야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는 증거입니다(고린도전서 7장). 아내 남편을 그와 같이 사랑하는 것은 아내 남편을 항상 생각한다는 뜻이니 사랑은 생각함, 생각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그와 같이 주님을 생각하는 것을 "그리스도 의식(意識)"이라 합니다. 이는 3위1체의 원리를 따른 사랑의 법칙이니, 곧 갑은 을을 위해 살고(을의 삶이 되어주고) 을 역시 갑을 상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해주시는 것이 (해변의) 모래보다 많으시다고 한 그대로입니다(시 139:17,18). 이 구절에서 우리말을 비롯해 대개의 번역이 "주님의 생각이 내게 얼마나 보배로우신가"로 되어 있으나 "내게 대한 주님의 생각(나를 생각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보배로우신가"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옳은 해석입니다. Biblegateway의 54 번역본 중에 아래 6가지만 그렇게 번역하고 있으나, 이 번역이 맞다는 것은 "그 생각이 모래(알)보다 많다"고 되어 있어 숫자를 강조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모든 것이라면 그렇게 "많다, 적다"로 특정화되지 않는 법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이 그렇게 나와 있어도 그것은 본의 아닌 문장 구성의 잘못이라 보아야 합니다. 원어에만 너무 집착해도 옳지 않습니다. 대개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어긋나는 일은 없습니다.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about me, O God. NLT(New Living Translation)

God, your thoughts about me are priceless. NIRV(New International Reader's Version)

How difficult it is for me to fathom your thoughts about me. NET(New English Translation)

How precious it is, Lord, to realize that you are thinking about me constantly! TLB(Living  Bible)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concerning me, O El ! NOG(Names of God Bible)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concerning me, O God! GW(GOD’S WORD Translation)


정작 삶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대로 우리는 따라 하게 되어 있는 것이 3위1체 원리에 의한 삶의 철칙입니다. 주(主, 主人)께서 당신 자신을 몽땅 선물로 주셨으니 나도 나 자신을 몽땅 주님께 선물로 바쳐 드림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후의 일체의 모든 삶입니다. "헌신"과 "성결"이 그 다음 단계에 별도로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꺼번에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속성입니다. 흘리신 피(血)의 값으로 나를 사셨다(행 20:28/계 5:9) 했는데 나를 강제로 사신 것이 아닙니다. 내 동의 없이 사신 것이 아닙니다(몬 1:8,9). 다시 말해 나로서는 내 스스로 자진해서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3위1체 원리를 따른 동시성과 양면성입니다.

쌍방이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의 체제이므로 응당 그러합니다.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하리라" 하심에서도 명백해지듯 이 동시성으로서의 양면성은 멸망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자유를 박탈하시고 나를 강제로 파멸로 처넣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스스로가 불의를 좋아하여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파멸을 선택한 것인데 이를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측면에서 보면 집행이요 처벌이고, 내 편에서 보면 자유 선택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질의 하나로서의 규합이 3위1체 원리에서의 갑(a)과 을(b)의 대칭성에 의한 병(c)의 조화(調和) 즉 "둘의 하나됨"을 이룸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지만(이는 하나님의 은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이 "은혜"를 기반으로 하여) 이 "구원"이라는 "둘의 하나됨"은 갑과 을이 동시에 양면성으로 움직여야 유지 존속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움직임 즉 짝사랑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철저히 나를 위하시니 나 역시 하나님을 위해야 한 몸(머리와 몸)으로서의 기능(機能, 技能)이 정상화됩니다. 한 몸으로 기능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삶이 가능합니다.

이 세상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부정하니 이러한 완전한 실체로서의 삶이 아니라 그림자로서의 단지 찰나적 목숨일 뿐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교회에서만 이러한 삶이 기본 틀로서는 갖추어져 가능하므로 성경이 "형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은" 것으로 당연히 간주되어 멸망에 이르는(마 25:45) 것이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연계와 이를 초월하는 세계 곧 초자연계가 병립되어 있음을 3위1체의 원리로 알고 있는 이상,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이 있으면서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은 실로 흉한 몰골입니다. 이런 영혼이 없다면 차라리 영생이나 동경하지 않고 사모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영원성의 초자연계의 특성상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자연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비애를 느낌이 엄청납니다. 이렇게 불행한 존재로서의 모순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절대로 만드실 리 없습니다. 

범죄한 대가로서의 죽음의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이 기본적 사실에 대해 완전히 눈을 감고 사탄이 속이는 대로 속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성경을 푸는 열쇠만 될 뿐 아니라 모든 자연 및 초자연적 현상들을 풀어 나가는 관건이 되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임을 알았으니 이 만유의 법칙에 입각하여 모든 문제를 규명해가야 합니다. 이 원리에 의하면 이 영원하지 못한 한시적인 세상은 절대로 살 만한 곳이 아니고 때도 아닙니다.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의 현재 실상입니다.

살 만한 세상인데도 일부러 우리를 시험해보시고자 세상 삶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도무지 살 수가 없는데도 사탄의 꾐과 속임수에 넘어가 혹은 진리 및 실상을 알지 못해서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제 눈을 뜬 이상에는 과거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즉 살고자 함으로써 모든 것은 무너지고 모든 것은 상실됩니다. 세상 사랑은 구원 얻는 믿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관점에서 말하면 물 위에 나무를 심는 격이 됩니다. 땅에 심는 나무입니다. 

사탄은 어찌 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도록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의 광야 시험에서 확인되듯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마지막 아담께서 당하신 것처럼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는 파멸뿐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처형되시는 것으로써 그 모든 세상 활동의 마지막을 장식하셨으니까.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던 하늘을 찌를 듯하던 인기도 한 때의 물거품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구름 떼처럼 몰려 다니던 환영의 인파도 한 순간에 쥐 죽은 듯 정적에 잠들어 버린 것입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오직 극소수 5백 명 정도만이 끝까지 따랐을 뿐이기에 승천하시는 주님을 뵐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 하고 종과 주인(요 15:20), 스승과 제자(마 10:25) 관계로서 말씀하신 것은 다시 머리와 몸의 관계로 직결되는 의미입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지 않고 영욕(榮辱)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26). 이 사실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골 1:24)는 것으로써 표현합니다. 이 머리께서 당하신 고난은 장차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될 우리 각자 곧 나의 구원으로 나타났고, 따라서 그 "남은 고난"은 그 몸된 교회가 나누어 겪게 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또한 유효한 것으로서 그 막중한 가치야 이루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환락은 죽음(멸망)으로 통하고 그 대신 고난 받음(마지막 아담 안에서의)은 생명으로 통하는 것이니, 이렇게 빈 틈 없는 조화로 비록 죽음의 이 세상이지만 엄정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 즉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이마다 멸망할 것이요 그리스도와 그 복음 전함을 인하여 고난 받음으로써  자기 목숨 미워하는 자는 영생 가운데에서 그 생명이 영구 보존될 것입니다(요 12:25). 바울이 그토록 많은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한 덕분입니다.

①사탄이 이 세상의 신(神)으로서 왕이 되어 사탄의 나라가 되어 있으니 사탄과 원수인 하나님의 의인들을 곱게 놓아 둘 리 없어 못살게 구는 것이 뻔하고 그래서 "나그네"(히 11:13)라 한 것이며,
②따라서 자아중심의 나라인데 세상과 더불어 살자면 부득불 자아중심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따돌림을 받게 되어 있고, 그렇다고 나도 자아중심으로 나갈 것입니까ㅡ그러면 필연적으로 자멸을 초래하게 됩니다. 
③초자연계가 분명히 존재하여 과거 아담이 초자연계 몸으로 있었음을 알진대, 정작 살려면 초자연계 몸으로 환원되어 살아야 비로소 사는 것인즉 이와 같이 자연계 몸으로 남아 있어 무슨 삶의 낙을 제대로 누릴 것입니까. 


사람들은 대개 대소변 보는 것을 예로부터 더럽다, 창피하다고 하며 부끄러워합니다. 지금은 스승을 알기를 무엇 같이 여기지만 과거에는 사도(師道)를 중시하여 사람되라고 가르쳤기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을 우러러 보았으므로 선생님은 대소변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본성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도 한 편으로는 짐승 같다고 여기기에 예로부터 그런 일을 방사(房事)라고 했습니다. 다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은밀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모순이 됩니다. 창조하실 때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도록 만드셨느냐 이 뜻입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방귀를 뀌는 것마저 그 소리가 나오는 배설구를 연상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가능하면 그 소리 내는 것을 참는 정도입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이 참을 수 없어 방귀를 뀌니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방귀 뀐 임자의 무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각하, 시워하시겠습니다" 한 것을 두고 아첨의 본보기라 해서 널리 회자되었지만 이 또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간의 편협한 시각입니다. 아첨이라기보다 염치없이 나와버린 현장에서의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어른의 당혹스러운 감정을 역지사지로 어는 정도 완화시켜 준 재치 있는 응수라고 긍정적으로 보아주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천사들(靈物)은 대소변을 보지 않습니다.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기보다는 순수한 식도락을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육체가 완전히 투명해지기도 하는 판에 먹고 마신 찌꺼기가 배설되느라 걸리는 시간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짝짓는 일도 없습니다. 아담 역시 초자연계 몸으로 있어 짝 짓기 위해 남녀로 분할된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할 짝을 이루기 위해 대칭성 원리에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따름이어서 "홀로 지내는 것(獨處)이 좋지 않다" 하셨습니다. 여자가 없었다면 아담(여자도 남자도 아닌 남녀 본질을 하나로 조화시켜 있으므로)이 초능력으로 자식 생산을 했을 것이나 여자가 있음으로 해서 여자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요 (자연계의) 동물적인 교접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초자연계 몸으로서의 광채가 벗겨져 나간 자연계 몸의 벌거숭이가 되어 있음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 몸이 되면서 자연계 동물과 같은 방식으로 자식을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남녀간의 애정 교환은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이기 때문에  자연계 육체처럼 굳이 육체적으로 접속을 해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기만 해도 그 눈빛만으로도 육체적인 교접이 가히 미치지 못할 최상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동물 같은 모양에다 동물 같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을 이제 자연계에 속한 인간으로서 부끄러워하게 되는 연유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을 만드시지 않았고 인간이 범죄하여 이런 부끄러움을 스스로 불러들였으니 슬픈 현실입니다. 

자연계 몸이 되면서 "대소변", "남녀 잠자리" 등이 수반된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 실상은 모르고 인간도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하고 심지어 벌거벗고 지내는 나체족이 되는 것도 불사하니 악령 사탄, 이 세상 신에게 완전히 휘둘려서 그런 볼썽 사나운 짓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일반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하고 이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한 때 인간이 초자연계 몸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함이 됩니다. 그렇게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여 말할 줄 안다는 그것입니다. 인간이 애당초 초자연계 몸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이런 사실도 지적합니다. 

사탄은 이런 비극적 결말을 침소봉대하여 오늘날 온갖 음풍(淫風)을 온 세계에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한낱 고깃덩이인 동물에 불과한 존재로서 인간을 부각시켜 영혼을 고사(枯死)시키려는 술책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한 사람의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족했지만 지금은 구원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마다 개개인 모두가 다 세례 요한의 몫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세상이 이러고도 잘도 굴러간다고 착각할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 추스려 간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그 강제력의 하나가 3운법칙입니다. 이렇게 무리하게 억지로 끌고가는 것이므로 임시변통인 것이며 목적이 있기 때문이고 이 목적이 끝나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세상은 막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복음)이 온 세상 에 전파되는"(마 24:14) 일입니다. 지금은 그 전파의 정리 기간으로서, 잘못 전파된 것은 바로잡아 주는 일을 겸해서 전파된 구원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불의를 좋아하는 이들"(살후 2:12)을 적 그리스도를 통해 도태시키는 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한 사람의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족했지만 지금은 구원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마다 개개인 모두가 다 세례 요한의 몫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이상의 말씀(마 24:14)으로서 이 세상이 왜 존속해 오고 있는지 왜 인생들이 지구상에 사는지 그 목적이 명백해진 것입니다.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도록 창조하신 인생인데 현재 이 자연계 몸이 되어 이 고생을 하고 있으므로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고 이것이 유일의 의미요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연계 몸으로 전락해 있는 이유가 범죄함에 있는 것이니 누구든지 영생하고자(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되고자) 하는 이는 오늘날 그 범죄의 대가를 누구나 명약관화로 보고 있는 만큼 절대로 범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되고 범죄하지 않는 방법, 즉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요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게 되므로 우주 천하에 방법은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모든 성경적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앞앞이 개인적 선물로 주시는 성령(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로 존재하시는 모습)으로 받아 모시면 됩니다. 이 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회개를 해야 하고 그런 뜻으로서 세례를 받음으로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됨으로써 성령을 받습니다. 이것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었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다른 모든 사람도 그렇게 되도록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이 일을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목적입니다. 또한 이 때문에 이 세상이 존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세상도 인간도 존립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 창조되지 않았으면 한시바삐 새로이 창조되라고 기회를 주시는 목적에서 그리고 새 창조를 받았으면 다른 사람도 새 창조를 받도록 일하라고 즉 사람 살리시는 이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목적에서 이 세상이 있는 것이요 이 지상에 인생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달리 아무 목적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새로 창조되지 못한 즉 다시 출생하지 못한 다시 말해 구원되지 않은 증거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뜻(마 24:14)을 무시하는 것은 당시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백해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된 것과 똑같아 "죽은 자"(마 8:22)입니다. 그 증거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산 자"(고후 5:15)입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이면서도 스스로 "산 자"로 착각하는 이가 오늘날 거의 전부를 차지하기 때문에 일부러 이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④그러므로 주변의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일을 하라고(요 20:21,22/행 1:8) 우리를 구원하셨으면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산다는 생각을 아예 접어놓고 시작해야 하며,
⑤이 구원의 사업을 사탄 일당이 한사코 방해하고 저지하는 터에 이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지라 그래서 핍박과 환난이 연이어지는데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것부터가 언어도단입니다.

⑥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기 위해 끊임없는 사탄의 적대시하는 집적임이 가해지는 판인데 이렇게 원수로 대하는 세상을 상대로 사이 좋게 지내는 세상 사랑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⑦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천대, 무시를 당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셨으니 그 몸된 우리도 역시 같은 처지가 됨이 당연하므로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하리라"고 미리 말씀하셨는데 이 사실이 변할 리 없고,
⑧이와 같이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이 상대와 하나됨을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지므로 상대가 죄인으로서 죽음의 저주 아래 있으니 거기 나도 동참해야만 그래서 함께 형벌의 저주를 나누어 짊어지고 죄인의 위치에 서야만 되므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는데 사형수의 위치에 있으면서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고,
⑨3위1체 원리의 대칭성에서 이 세상에서 잘 지내고 위로를 받아 부유하게 살면 오는 세상에서는 "위로 받을 것이 없다"(눅 6:24) 하신 대로 반드시 이 세상과 반대되는 것만이 내 몫에 태일 것이 분명한즉 일부러 사서라도 고난을 받아야 할 처지이기에 역시 그렇고,
⑩본질적으로 악인은 의인에게 가증스러움(미움)이 되고 의인은 악인에게 가증한 것(증오의 표적)이 되는데(잠 29:27) 의인으로서 어찌 악인들 틈에 끼어 더군다나 악한 자가 왕 노릇하는 데에서 형통하며 살기를 바랄 것이며, 형통하지 않고서 어찌 삶의 낙을 기대하겠습니까. 

⑪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로 되어 있는 만물 곧 하나님의 창조물들이므로 그 수장(首長)이 되는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니 같은 저주를 나머지 모든 피조물이 받는(창 3:17)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다 이제까지 고통을 받습니다(롬 8:22). 고통도 보통 고통이 아니라 인간 고통 중에 손가락으로 꼽히는 것이 치통(齒痛)과 산통(産痛)이라는데 바로 이 해산(解産)의 극통(極痛, birth-pang)인 것입니다(:22). 그런데도 정작 장본인이요 주인공인 인간이 이 고통을 면하려 하고 이 세상에서 삶의 쾌락을 즐기려 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⑫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하나님의 의인들은 극심한 고통을 받아 왔고 지금도 북한 등지에서는 명백히 그러하여 이는 기정 사실화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는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나의 현재 위치일진대 고통을 받아도 영광을 받아도 모두 함께 받는다는 '한 몸'의 이치를 따라(고전 12:26) 나 역시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하고 절대로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온갖 악형(히 11:35)을 받을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 세상 지내야 하는 것이라면 그 때까지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고 할 때, 그러면 핍박을 당하는 그 순간 모든 재산은 깡그리 사라지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 끌려가 여생을 마치게 된다면 그 소위 "부귀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삶의 낙을 누리려면 사는 것 같이 살려면 그런 핍박 받는 것도 없고 여하한 불행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고로 소위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교리는, 성경도 모르는 아이들 사탕 발림에 불과한 아주 유치한 도저히 "어른답지" 못한 망상인 것을 이 한 가지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울에도 그런 소위 "교회"(이름만이 교회일 때 ""표를 붙여)가 수십만 등록 교인을 자랑하는데 악의 바벨 탑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마치 "성공한" 목회인 양 본으로 삼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독수리에 나꿔채이는 토끼'가 됩니다. 무엇이든 세상에서 과시(자랑)할 때 그것이 바로 적 그리스도 사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속임수에 끌려 가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런 소위 "교회"를 한국의 소위 최대 교단이 이의없이 수용할 정도로까지 성경에 대한 무지 속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실정입니다.

⑬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상 사실을 명백히 하셨으니, 어떤 사람이 세상 사랑을 염두에 두고 즉 능력을 행하시는 이 분을 따르면 세상에서 흥청망청 살 수 있으리라는 욕심으로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자청해 왔을 때 딱 부러지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되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곧 모든 인간의 대표로서의 자신을 가리키심)는 머리 둘 곳도 없다"(눅 9:58) 하신 것입니다. 새나 여우는 자기 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인간은 초자연계와 자연계에 아울러 속해 있어 초자연계 삶이 기본이므로 이렇게 자연계에만 처음부터 소속되어 있는 그런 새나 여우와 달라 비정상이어서, 본격적으로 삶을 살 수 없는 상태 곧 "죽은 자"(:60)임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화로도 그 입은 것이 이 백합화만도 못하다"(마 6:29)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십니다. 자기 세상에서 정상으로 자기를 단장한 백합화이기에, 비정상으로 인간이 아무리 호화찬란하게 몸을 치장해도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이러한 동식물만도 못합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데 그 아래 존재들보다 못해서야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못하다" 하셨으니, 정상이 아니고 범죄의 결과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⑭아라비아에서 3년간이나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은 바울 사도 역시 교회에 가르치기를(고린도전서 7장) 세상 물건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라 했고 아내 남편이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이 하라 했습니다. 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한 줄 알라고 했습니다(딤전 6:8).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인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히 13:5) 했습니다. 더 이상 욕심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살려면 잘 살아야 하고 잘 살려면 돈이 풍성해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 말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자 하는 헛된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⑮성경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고 3:3). 생명이 감추어져 있으니 생명과 반대되는 것은 죽음, 그래서 "죽은 자"(:3)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자로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눅 9:23) 영문(營門, the camp) 밖으로 나가는(히 13:13)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영문 밖이라는 것은 세상 밖이니 세상을 산 자의 세계라 한다면 그 밖이라 하면 죽은 자인 것입니다.

사탄과 그 아래의 것들과 천사장 미가엘과 그 휘하 "거룩한 천사"들이 대판으로 싸워 사탄 일당의 완패로 끝나 "하늘에서 더 있을 곳을 얻지 못해 쫓겨났다"(계 12:8)는 것은 초자연계로부터서의 추방입니다. 즉 에덴낙원에는 영구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연계인 이 우주 천체를 상대해서는 얼마든지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화성 같은 데에다 조형물을 만들 수도 있고 달 같은 데에다 로봇 생체 인간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은 인간의 시신을 갖다 놓을 수도 있고 별의별 짓을 다 해 놓을 수도 있어 창조자 신(神)임을 과시할 수 있으니 절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를 좋아하는 악인(회개하지 않으므로)이 걸려들게 하는 함정이요 울무들이고 덫입니다(살후 2:11,12). 하나님의 인지 아래 되어지는 일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히 10:31)입니다. 이 역시 정확한 정보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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