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1일 화요일

"천국을 위해 독신으로 지내라"는 격려 말이 들리지 않는 교회는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실에 갇혀 있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이와 같이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각자의 체험이라고 하는 황당함입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린도전서 7장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가리켜 "동정(童貞, virginity)을 지킨다"고 말하는데, (우리말 번역도 그렇지만) 부모가 자기 "딸"(또는 "처녀")을 결혼시키지도 않을 수 있다는 해괴한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고전 7:38).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다니! 불신자들이 얼마나 이상한 눈초리로 보겠습니까! 성경을 무슨 사이비 종교쯤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번역이 가능합니까.

이런 당치도 않는 성경 해석은, 오늘날 그 어떤 교회에서든 바울이 경고한 대로 혼자 지내는 것을 권면하지 않는 것과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되는 것"(마 19:12)을 일절 말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천국을 위하여!"ㅡ얼마나 좋은 뜻입니까. 주님께서도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소위 "기독교" 교회는 이런 시의적절한 요긴한 말씀을 완전히 아주 깡그리 무시해 왔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쯤 되어서는 믿는 사람으로서 독신이 되어 있어 오직 하나님의 사업에만 골몰하고 있는 이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교역자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교회"(그들 나름의) 사목 일을 보려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강제 규정입니다. 이것은 억지이고 따라서 성경에 위배됩니다. 로마 카톨릭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마리아를 빼놓고서는 그들의 교리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이미 확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혹 그런 예를 들지나 않을까 해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소위 "교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완전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의 로마서 7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린도전서 7장의 내용은 위의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강조하고 있는 바로서 로마서 7장과 반대가 됩니다. 후자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인데 전자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사람은 짝을 이루어 살지 않으면 고독한 생활을 하는데 그런 데에서 삶의 낙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입니다.

혼자 지내는 것만 아니라,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왔으면
  그 후 자유인이 될 수 있어도 차라리 그 종의 신분으로 있는 것을 이용하라 했으니 더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세상 물건을 샀으면 그 물건을 소유하지 않은 것과 같이 하고 세상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라 했고, 뿐만 아닙니다. 아내 있는 자, 남편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이 하라 했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바, "이 세상은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는 것을 철저히 배격한 것입니다.

이런 경고 그리고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로마서 7장을 난데없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체험에다 갖다 붙이게 됩니다. 로마서 7장은 전후 문맥만을 살펴보아도 그리스도께 나오기 위한 전단계 과정임을 쉽사리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자기의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다 아전인수 격으로 억지로 합리화시키려 하니까 이런 결과가 됩니다. 이런 간단한 예만 보아도 오늘날까지의 소위 "교회"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주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고전 7: 32) 하는 여기에만 삶의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뜻을 행함이니 그 뜻이 무엇인가. 사람들을 구원함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일심으로 기도에 힘쓰고 말씀 전달하기에 힘쓰고 거기에 따른 핍박이 있으면 그것을 감수하고, 또한 삶의 본을 보여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 않는다"(살후 3:10)는 원칙을 지키되 그 목적이 세상 사람들처럼 잘 살고자 함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엡 4:28) 하는 것ㅡ이런 단순한 삶의 무한 동력(無限動力)입니다. 단순하되 사랑이 그 원동력이므로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지칠 줄 모르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오름과 같은(사 40:31) 그런 역동적 삶입니다.

사랑이 그런 힘("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대로 행할 수 있는 선행은 그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즉 악에서 돌이켜 "선을 행하게"(롬 2:7-10) 하는 다시 말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게 하고 새로 창조를 받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른 모든 선행은 이 차원에서 행해집니다(고전 10:33). 이런 적극성, 능동성, 주체성이 없다는 것은 남에게 봉사할 줄은 모르고 자아중심의 영생만 탐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구원하신다면 모든 인생들을 다 구원하시지 나만 구원하실 리 없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각인해 두어야 합니다.   

이런 내용에 대해
 만일 지금 마음 한 켠에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다면 구원(영생)은 아예 꿈꾸지도 말아야 합니다. 내 자신 죽음에서 생명 가운데로 다급하게 구출되었으면 다른 사람도 구출되도록 힘쓰는 것이 당연하고 정상이지,  나 혼자 구원된 것으로만 만족하고 나는 구원되었으니 편안하게 이 세상 살고 가겠다는 그런 탐심(영생에 대한)의 자아중심은 하나님께서 결코 용인하시지 않습니다.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지금 시급하게 사람들 구원하는 것이 최우선시되어야 할 시기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산 자가 되었으면 산 자로서의  특징이 바로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온 몸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역시 그러합니다. 산 자로서의 삶의 특성입니다. 

이런 특징이 없다면 그 자신 구원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면 다른 이들도 너와 똑같이 소중하기에 구원되어야 마땅하거늘 너는 어찌하여 '나의 마음'을 모르고 이 시급한 '나의 일'에 함께 하지 않느냐" ㅡ이 하나님의 뜻은, 복음(구원의 희소식) 전파가 이 세상에서 완료되면 지체 없이 "세상이 끝난다"(마 24:14)고 하신 말씀에서 충분히 확인되고도 남습니다. 삶(생활)을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집중력이 생기고 힘이 분산되지 않습니다. 이런 단순화, 간결화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초석이요 반석인데 이 토대는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로 힘입는 바 크다고 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랑하다가(살다가) 가리라, 하나님 부르시면 나의 영원한 안식(安息, 쉼)에 들어가리라(히 4:11,10,5,3,1/3:18,11/시 95:11)"는 자세로 시종일관하는 것입니다. 치사하게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깨끗하게 남을 위한 삶ㅡ이 세상만이 줄 수 있는 여한이 없는 생의 의미일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힘이)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 것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임이다"[약 1:5-8].

성경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자만에서 벗어날 일입니다. 모든 지식은 성령의 가르치심(계시)에서 오는 것인즉 우리 스스로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진정 알아야 하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고전 8:2). 항상 성경을 열어놓고 수시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간절히 앙망해야 마땅합니다. 아무리 전체적인 지식이 있다고 해도 그 날 그 시간의 필요한 영적 양식은 하나님 친히 주시지 않고는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고후 6:1). 

깊음은 얕음을 동시에 떠올리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가 안되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무서운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사실을 함께 염두에 두고 뇌리에 각인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양면성의 동시성, 동시성의 양면성입니다. 나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새로이 창조해주심과 동시에 내 스스로 나의 거룩함을 이루지 않으면 안되는 양면의 조화가 반드시 필요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지만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빌 2:12). 

지금부터 모든 교회는 이 성경의 경고를 그대로 수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본의 아니게 속여 온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필자의 성경 해석이 옳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요 3운법칙입니다. 사도들이 생존하던 초대교회 당시에는 각종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심으로써 자기 은혜의 말씀에 대한 증거가 되게 하셨지만(행 14:3), 오늘날은 3위1체의 원리와 이를 훌륭히 검증하는 3운법칙으로써 당신의 말씀을 증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존해 있는 사도'의 권위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그 역할을 훌륭하게 대리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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