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30일 목요일

일할 준비, 싸울 준비, 죽을 준비


"내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신 말씀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는 대목에서 보듯이 소위 "휴거"라는 것은 인위적인 교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휴거"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하늘로 들려져 올라간다는 뜻일 수밖에 없는데, 다시 말해 구원 받게 되어 있는 자는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데 반해,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고 했으므로 아직 교회가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스스로의 힘으로 적 그리스도에게 넘어가지 않을 자란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거니와 주님의 강림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살전 4:15)라 했으므로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교회를 말하고 따라서 "휴거"(적 그리스도 때의 환난을 받지 않고 에녹이나 엘리야 같이 산 채로 즉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는)의 교리는 인간이 꿰어 놓은 망상일 뿐입니다.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도 믿어 구원 얻는 자가 아직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그런 상황에서는 교회가 아직도 얼마든지 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극소수의 남은 자가 (절대 다수가 적 그리스도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맥없이 그저 죽기만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전투 중에 죽는 것이니, 전사(戰死)는 영예입니다. 기도와 말씀 전달과 "사랑 가운데 끝까지 견디는"(마 24:12,13) 속에서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하는 것이 영예롭게 죽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처참한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약함"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약함 가운데에서의 강함"(고후 12:10)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성령과 함께 일하는(벧전 1:12) 막강한 자로서 최후 일각까지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적 그리스도에 의해 죽을 때에는(계 13:15)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고삐를 늦추지 않고 하나님의 사업에 총 매진해야 하는 것이며, 이 세상 삶(근심 걱정, 재리의 유혹, 기타 세상 쾌락-막 4:19)에 붙잡혀 조금이라도 한눈파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눅 9:62).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베어버림을 당합니다(눅 13:7).


일단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회개하여 죄 용서하심을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것이 바로 열매 맺지 못함의 상황입니다.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닌데 열매가 없습니다. 세상 염려, 돈의 유혹(잘 살겠다는 욕심), 일시적이라도 또 비록 건전하다 하더라도 쾌락에 젖어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열매 맺지 못함의 온상(溫床)이 됩니다(마 13:18). 휴거의 교리는 왜 그렇게 "휴거"가 되어야 하느냐 그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한다는 차원이라면 그럼 적 그리스도의 손에 무참하게 죽는 이들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자아중심에서 우러나는 비겁한 도피 행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바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때는 이미 적 그리스도가 패망하고 천년 통치 기간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있고 못하는 자기 있어 전자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나타나실 때 공중으로 들려가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간 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적 "휴거"라면 "휴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는 오직 주님께 대한 사랑뿐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롬 8:35-39) 함과 같이 우리는 백 가지 면으로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게 되어 있음이 명백합니다. 왜냐,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겨루어 이길 용사가 없고 장사가 없습니다. 일방적인 싸움으로 싱겁게 끝날 일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약한 자가 되어 그 위치에서 이기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인 공정 공평한 싸움이 됩니다.


앞에서 말한 "약한 자로서의 강한 자"라는 것은 세상에서 비록 만신창이, 천덕꾸러기가 되어도 자기 지조와 신념을 버리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즉 "인내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히 10:36/12:1/롬 15:4)는 것은 인내로서 싸움에 이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이다"(눅 21:17-19) 하신 그대로입니다. 인내와 안위(comfort)의 하나님이십니다(롬 15:5).


싸우는 두 진영의 깃발과 그 색깔이 분명하게 갈라져 있습니다. 하나는 자아중심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 부인입니다. 또 전자는 힘(권력이든 금력이든 학력이든 인력이든)으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특징을 삼고 후자는 약하고 고난 받는 것으로서 그 색채가 뚜렷합니다. 혼동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함과 같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됩니다. 적을 안다는 것은 적의 전술 전략을 꿰뚫는다는 것이니 사탄의 전략은 어찌 하든지 나로 하여금 자아중심에 빠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그저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돌로써 떡을 만들어 먹으려 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고려의 대상이 안된다는 식으로 나가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시험의 첫째입니다. 무조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갑은 을을 위해서만 살고 을은 갑을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100% 멸망입니다.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확신을 우리는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공고히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 뜻을 행함으로써 사는 것이지(이것이 을이 갑을 위함인 것) 내가 나를 위해 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이치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義, 올바름, 진리)를 추구하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긴가민가 식으로 확신이 서지 않았다면 지금은 만유의 법칙(3위1체의 원리)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질 때입니다. 개미가 한 번 입에 물면 그 몸이 두 동강이 나도 절대로 놓지 않고 그냥 물고 있듯이 그런 자세와 결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런 일에서는 얼마든지 맹목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됩니다. 오히려 영광이 됩니다.

바울이 선언한 것처럼 우리가 약할 때 강한 것이요 지는 듯해도 이기는 것이므로 이기는 자로서 우리 입술에서는 찬송이 흘러 넘치고(엡 5:19/히 13:15) 승리자로서의 환희가 넘쳐납니다. 진정 이기고 들어가는 것이냐 여부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두렵고 떨라"(빌 2:12) 한 것은 지당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을 모시고 있기에 "항상 이김을 주시는"(고전 15:57)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넘치고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같은 편지에서 "두렵고 떨라" 하고 "항상 기뻐하라"(빌 4:4)는 것이니 이 의미가 큽니다. 결단코 어느 한 쪽으로든 치우치면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일사부재리와 원리원칙에 철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리고 성령의 위로라는(행 9:31) 양면성과 동시성으로 초대교회는 진행되어 모든 시대의 각 교회에 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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