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9일 목요일

생활의 천지개벽, 일대 혁신을 이루라ㅡ초자연계를 인식함으로써



성경을 첨단 과학 신서(新書)요 총서(叢書)라고 했지만 현존하는 우주의 제반 법칙을 다루는 것이 과학이라 할 때에만 그렇다는 뜻인데 실제 우리가 아는 과학이라는 학문은 '자연계'만을 관찰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자연과학이므로 그 점에서는 성경은 과학이 될 수가 없다. 이유는 초자연계까지 성경은 총망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자연과학서일 수가 없다는 뜻이다. 또 "첨단"이라 한 것은 처음부터 있어 온 기존 사실이지만 이제 겨우 알게 될 경우 최최근(最最近) 지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이 때 쓰이는 말이기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야말로 우리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지식의 보고로서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얼마나 많은 지식이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겠는가. 3운법칙(인간 생애를 관장하는 인간과 직접 관계되는 법칙)이나 3위1체의 원리가 그 훌륭한 사례가 된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작동, 작용하고 있었던 우주와 인간 세계의 철칙인 것이다. 그런데도(아는 것은 겨우 쥐꼬리만한데) 전부를 통달해 있는 듯이 기고만장 오만해지기가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인생들이니 우리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괴지심(自愧之心)부터 앞선다.

그러므로 이제는 일대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일상생활에서의 천지개벽이 요구되는 때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도록 오늘날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다. 사탄이 지금까지 이 세상의 초자연계적 요소를 감추기 위해 애쓰고 자연계뿐인 것처럼 속여 온 것은 바로 이 때의 오늘을 위한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즉 창조주로서 스스로 가장하여 나타나기 위해서다(살후 2:3-12).

초자연계의 실존이 밝혀질 경우에는 성경의 에덴낙원이 초자연계임이 의당히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러면 사탄이 계시록에 밝혀진 대로 그 "옛 뱀"(계 12:9/20:2/창 3:1-15)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현재의 인간 세계를 지배 관장하는 존재임이 확인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신적 구원주(神的 救援主)로 나타나기가 불가능해지는 까닭이다. 왜 이제까지 성경의 이런 기본적 사실(에덴낙원이 초자연계였고 아담이 초자연계의 육체로 범죄 전에 있었다는 것 등)이 철통 같이 감추어져 왔는가,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는데 대한 의문이 이로써 풀려지는 순간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성경적 사실의 기본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 받는데 필요한 기본 사실과는 별개다. "구원 얻는 (기본)지식"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말씀이 성경으로서 기록된 것과 성경에 밝혀진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지키고 행하고 복종하면 곧바로 그것이 구원으로 통하고 천국에의 직행, 바로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다(요 5:39). 이 마지막 아담에 의한 재출생, 신창조가 없는 한 그런 말씀 복종만으로 구원된 역사가 없다. 아브라함, 모세 등 앞선 믿음의 선배들도 그리스도 오신 후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실상을 이루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런 기본적 사실을 외면해 온 그 어떤 교리도 인위적인 것이니 미련 없이 버리고 성경을 통해 얻은 정확한 지식을 통하여 각자의 믿음을 구축해 나갈 일이다. 기존의 전통과 인습과 인식에 매여 전전긍긍할 일이 아니다. 앞서의 설명대로 그런 기존의 것은 사탄에게 물들어버린 하잘것없는 오히려 백해무익인 것임이 입증되었으니 과감히 탈피할 일이다. 실상을 알았으니 더 이상 종속되어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수천 년의 해묵은 고정 관념을 뒤엎어 버려라. 이것은 거창하고 어마어마하거나 끔찍한 일이 아니다. 속아 왔으니 그 속임수에서 시가 급하게 발을 빼면 되는 것이다.

속아 온 기간이 매우 길었다는 것뿐이다. 백년도 채 못하는 하루살이 같은 인생에게는 수천 년의 세월이 그렇게 길다는 것으로 느껴질 것뿐이다. 단지 이 세상에 "이 세상의 신(神)"(고후 4:4)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따름이다. 오히려 이것이 어찌 보면 "엄청난 진실"일 수 있다. 사랑이시라는 창조자 하나님도 인정하기에 지극히 인색했었는데, 코 앞에 이 세상 신이 존재하여 철통 같이 지배하고 있다니 어안이 벙벙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질 일이 아닌가.

온갖 귀신, 수 없이 많은 악령들이 공중에나 땅 위에나 집안 구석구석에까지 꽉 차 있고 바로 내 눈 앞에도 눈을 부라리고 있음을 우리가 의식하며 생활한다고 생각해보라. 몸서리 날 일이고 소름 돋을 일이 아닌가. 상상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그들은 자연계의 물질적 육체를 지닌 우리들처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자연계에 속한 생물들처럼 그 어떤 속박도 제약도 받지 않으니 일정한 서식처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서나 번개처럼 활동한다. 

우리 인간들이야 현재 목숨이 붙어 있어 살아 있는 동안에만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생각해보라, 네피림과 같은 경우, 당시 그 네피림이 생성되던 때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네피림 족(族)이 죽고 나고 했으니 그 숫자야말로 온 지구를 능히 덮고도  남을 것이 아닌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있는 여러 행성으로 달려가 별의별 짓을 다해 놓을 수 있다. 거룩한 천사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하늘에서 영구적으로 쫓겨났지만(계 12:9) 그 "하늘"은 그들의 출생지 격인 에덴낙원을 말하는 것이지 현재의 우주 천체는 자연계이므로 어디든 번개처럼 쫓아가 그 어떤 구조물도 순식간에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자연계의 초능력자들이라 한다. 그래서 신(神, god)들이라 하는 것이다.

youtube에 어지럽게 나도는 여러 영상물을 보면 오직 그 장소 그 때에만 악령들이 나타나듯이 착각되나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코 앞에 바짝 다가와 그렇게 활동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바로 이 실상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를 판이지만, 그러나 전혀 눈 앞에 보이지를 않으니 마치 우리 인간끼리의 세상인 양 모든 것이 <보여져> 나타나므로, 보이지 않는 속성의 그들 앞에서는 무조건 "속수무책"이라는 말밖에 나올 것이 없다. 

인간은 보지 못하고 의식 못하는 사이 온갖 짓을 자행해도 제지 당하는 법이 없다. 물론 그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그 뜻에 어긋나게 인생들을 좌우지하지는 못한다. 그들이나 우리나 최중요 현안 과제는 우리 각자가 영원히 사느냐 그 여부에 있는 까닭에(우리 인생은 영원히 사는 삶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고 악령들은 한사코 이것을 방지하는 데에 있으므로) 그런 차원에서 우리에게 원수가 되어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차이, 자연계와 초자연계와의 격차가 이렇게 엄청나다. 인생들이여, 때 늦게 전에 각성하라. 시간은 그대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눈은 멀쩡하나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청맹과니)처럼 더 이상 되어 있지 말라는 것이다. 보여 주어도 못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 하고 들려 주어도 듣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그런 청맹과니보다 더 비극적 존재들이다. 그런 무서운 함정에서 시급히 탈출할 일이다.

초자연계의 실존을 강조하는 것은 악령들의 실체를 인식하고 의식하라는 것만 아니다. 자연계와는 대칭이기는 하나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초자연계의 삶(생명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의 행복)과 죽음(멸망으로서의 저주와 고통, 고난, 환난) 즉 본격적인 생사가 가려져 영구적으로 확정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탄의 속임수에 완전히 꺼둘려 이 세상에서의 자연계적 삶과 죽음에만 매몰되어 왔다.

자연계가 초자연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듯이 현재의 생사는 장차 다가올 본격적인 생과 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지금은 본격적으로 사는 것도 아닐뿐더러 본격적으로 당하는 죽음의 고통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마지막 아담 곧 에수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당하신 죽음의 고통 그 하나만 제외하고는. 그러므로 지금의 생(生)과 사(死)라는 것은 단지 맛보기일 뿐이다. 앞으로 정착되어 본격적으로 닥칠 생명의 낙과 멸망의 고난 고통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선 맛보기로 미리 알게 하는 의미 외에는 없다.

그런데도 이런 데에다 온통 코를 박고 지내왔으니 이 세상 신 사탄의 속임수 계략에 어리석게 넘어간 탓이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그리고 그 만드신 만물로써(롬 1:20) 모든 진상을 밝히셨고 따라서 현재의 세상이 거대한 속임수 속에 갇혀 있음을 알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믿고 의존하는(에덴 낙원에서 아담 부부가 그러했고 악령들도 그러했던 것처럼) '양자 택일'에서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이렇게 된 것인즉, 누구를 탓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에 더 어리석음을 보태는 것이요 오직 우리 자신 회개하는 것만이 시급하다.

이 세상 삶을 더 이상으로는 욕심내지 말라. 지금까지만 해도 족하다. 이 욕심이 세상 사랑이다(요일 2:15).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욕심내지 말라. 맛보기로 보여주시는 것뿐인데 이런 그림자적인 것을 붙드느라 정작 실체를 놓치는 결과가 되면 얼마나 미련한 짓이랴. 자아중심을 버려라. 하나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이 되라. 머리 중심이 되라.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기 때문이다. 몸 중심은 머리의 역할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머리가 아니지 않은가. 자아중심은 머리가 되려는 무작정, 무대책(無對策)의 오만함이다. 자기 본분을 알아야지 악령들처럼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음으로(자기 본분을 망각함을 일컬음-유 1:6) 파멸을 자초하지 말라는 것이다. 각자 자기 본분을 지키는 데에 조화가 있고 통일이 있고 생명의 무한량의 낙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과 꿈을 헌신짝처럼 미련 없이 버릴 일이다. 그림자를 붙들려는 어리석음이다. 그림자가 나타내고 있는 실체를 정작 붙들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처럼 사탄은 오늘날까지 인생들을 모두 바보로 만든 것이다. 이 바보로서의 결과는 곧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때 가서 영원한 수치와 고난 고통을 뒤집어쓰지 말고 오늘 기회가 있을 때 삶의 방향을 급선회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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