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4일 화요일

"완전주의"를 표방함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하는 것



혹자는 완전주의자(perfectionist)라 비방할지 모르나, 그런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은, "사랑에 완전주의 혹은 불완전주의가 있는가? 그런 것을 따지는가?" 하는 것이다. "사랑"을 말한 것이지 "완전한지" 여부를 말한 적이 없다. 사랑에는 물론 차이가 있다. 모두가 다 똑같지는 않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 열매의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셨다. 이런 것은 순수히 개인 문제다. 그런 것까지 간섭하지는 않는다. 오직 사랑하라, 자기를 위하지 말라는 기본만을 성경이 가르치며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열매를 맺고도 그 모든 열매를 무위로 돌릴 수도 있다. 능력으로 귀신까지 쫓아낸 사람이 영원 멸망에 들어갈 수 있다 하셨으니(마 7:21)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왜냐면 사랑은 언제나 현재를 말함이니 과거나 미래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항상 중요하다. 사랑은 자유인만의 특전이요 특권이다. 자유인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 예속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께도 예속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자유 의지를 주신 이유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받들어 모심이지 억지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사랑이 아닌 자아중심의 발로이기 때문. 여로보암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고 유다에서 벧엘로 온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찢겨 죽은 것이 그 때문이다(왕상 13:1-33). 우리 스스로 단 마음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일을 아니할 때 그 일은 내게 아무 실효도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할 일이다. 


우리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구원하신 것은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굴종하지 말고 그래서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살지 말고 당당한 주인 의식으로 적극, 능동적으로 매사 임하여 내가 스스로 좋아해서 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아니하는 것이 자유인의 삶인즉 그렇게 살라 하심이다. 환락도 자기 싫으면 아니하는 것이고 고난 고통도 자기가 원하고 필요한 것이면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자아중심은 사랑일 수 없다. 그 반대인 자기 부인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사랑의 상대방을 위함이니 즉 둘이 하나되어 있는 그 상대를 생각하고 그 뜻을 위하는 것. 자아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 그리고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한 몸된 이웃 중심의 삶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함과 같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1,42) 하신 대로 생활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생활이라기보다 사고방식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 같은(마 18:3) 단순성, 간결성 이런 데에 능력(power)이 있음을 재삼 강조하는 것이다. 거짓이 많고 속임수가 횡행하는 때일수록 이는 필수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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