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일 수요일

졸지에 한 순간에 세상이 바뀌면 때는 늦다


악령들과 귀신이 세상에 꽉 차 있어 이집트의 노예로 400년간을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살이를 시키던 무자비한 이집트인들처럼 인간에게 상전(上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 점잖게, 표현하는 이들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으니 그만 둡시다" 하고 그렇지 않으면 "당신 정신이 좀 어찌 된 것이 아니오?"라는 막말이 여과 없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진실은 진실이고 불이 났는데 불이야 고함치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으란 말인가. 바울 사도가 다메섹 노상에서 초자연계의 존재로서 나타나신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목도한 일을 사실 그대로 증언하자 로마총독이 "그대가 완전히 미쳤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공통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양상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인류 역사상 사람이 초자연계 존재로 나타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엘리야가 초능력의 존재로 변화하여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한 것이라든지 예수님 생전에 모세와 함께 변화산 상에 나타난 것이라든지 명백히 초능력의 초자연계 존재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나, 어디까지나 마지막 아담의 초자연계적 존재로서의 부활을 근거로 하는 것이기에 우리 역시 장차에는 그러할 터인즉 별도로 언급할 것은 못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연계에 속해 있던 사람으로서 죽으신 다음 초자연계 몸으로 다시 살아나시어 영원히 그 초자연계 몸으로 존재하심의 의의가 중요하므로 지적하는 것이다. 육중한 무덤 돌 문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치울 필요도 없이 그대로 무덤 밖으로 나오셨다. 이미 그 전에 수의(shroud)를 벗을 필요도 없이 그냥 몸 그대로 빠져 나오셨다. "머리를 싼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요 20:7)고 한 표현이 그것이다. 직접 목도했던 요한의 증언이다.

베드로만이 유일하게 함께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던 두 제자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또한 떠나실 때는 갑자가 사라지셨다. 그리고 문을 안으로 잠가놓은 상태에서 그 문을 그대로 통과하시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 승천하실 때에는 말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오르셨다. 역시 구름을 타고 내리시면서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500여 관중들 옆에서 천사는 증언했다. 다시 오실 때에는 번개가 서에서 동으로 번쩍 함과 같이 나타나실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이런 모든 현상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금까지 잘못 성경을 해석해 온 것이다. 매번 친히 "인자"(人子)라고 증언하셨듯이 한 인간이심을 강조하셨고 이 사실은 죽으실 때나 부활하실 때나 시종 일관하는 기조(基調)였음을 알아야 하는데 이 엄청난 진실을 간과한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전 모습을 다시 되찾으신 초자연계 몸이셨던 것이다.

하나님 아들로서의 모습은 우리 각 사람에게 성령으로 오시는 즉 아버지와 하나되신 모습으로 오시는 그것밖에 없다고 해도 좋다. 이 하나되심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일단 죽으셨는데 스스로 살아나시는 법은 절대로 없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되심으로써 아들을 살리실 때에는 이미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하나되심을 인하여 아들께서 받으신 모든 죽음의 고통을 똑같이 당하셨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아들 홀로 당하신 죽음이 고통이 아닌 것이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됨에서 마찬가지이니 북한교회에서 목도하는 바와 같은 처참한 고통 중에 주님 친히 함께 하시어 당하시는 것과 같다. 이 한 몸 곧 하나됨으로서의 고통 중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런 고통 중에 있으면서 세상에서 고통 없이 살려고 나댄다는 것은 역시 둘 중 하나의 의미이니 이 경우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만 될 뿐이라는 것이다. 달리 더 의미는 있을 수 없다. 

3위1체 법칙의 대칭성 원리에서 첫 사람 아담이 있으면 오직 마지막 아담만 있을 뿐이다. 제2, 제3의 아담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하나요 그리고 이 한 번뿐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답게 만물을 다스리며 영생하기로 되어 있던 인간(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즉 생명의 법칙을 지키지 않음으로 다시 말해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몸된 우리 인생 각자의 도리로서 영원한 행복의 삶을 보장 받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오늘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죽음의 비극을 맞이한 것이니 모든 인생들은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해야 하고 새로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애초 창조된 대로 영생하는 초능력의 육체로 회복되어 비로소 인간(자연계 동식물이 아닌)으로서의 삶, 지고(至高) 행복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악령들이 오늘날 가장하여 인간을 속이고 있는 그런 초능력이 우리 인간의 본시 영역이었던 것이니 그런 상태로 완전 복구됨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다. 육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인 흙으로 된 것이고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온 것으로서 차이가 분명하다. 이러한 영혼을 주심으로써 이로 인하여 육체도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이 되었던 그런 순서다. 

고로 새 창조 즉 다시 출생하는 것도 이 순서를 따라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 이러한 이중 구조이기 때문에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이 가능한 것이다. 처음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고 그 다음은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의 순서로 되어 있는 구조다. 때문에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음으로 처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속한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받음으로써 되는 재출생, 새 창조다. 전자를 육으로 나는 것, 후자를 가리켜 영(성령)으로 나는 것이라 하셨다(요 3:6).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다. 다른 이, 다른 이름으로는 인간이 영생에 들어가지 못한다 즉 구원되지 못한다고 성경이 명시함이 이 때문이다(행 4:12). "마지막 아담"은 성경에 단 한 군데 나와 있는 지적이다. 단 한 번만 언급되었다고 덜 중요하고 자주 등장한다고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 사도가 교회에서 자주 말하고 강조한 부분은 그 편지에서는 덜 강조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면대해서 너무나 자주 강조했으므로 편지문에서는 편지에서 주제로 삼은 현안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으로써 대개 그치기 때문이다.

마지막 아담이시라는 뜻은 아담의 위치를 회복한 위치에 현재 계신다는 뜻이다. 아담의 위치는 모든 피조물(그룹과 스랍을 제외하고) 위에 군림하여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이전과 같이 그런 새벽 별들(스랍과 그룹)의 보좌까지도 받으시는 위치이시다. 우리가 현재 사람의 아들로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때문에 아래와 같은 말씀이 적용된다. 

"만물로 그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으신 이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님을 뵈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들의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히 2:8-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8,9).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을 머리로 모신 몸으로서의 각자 위치를 인식하고 아담의 모든 권세로 임할 수 있게 된 우리들이다. 단지 지금은 그리스도의 약하심과 같이 그 약하심에 동참하는 것으로서, 이 의미 또한 크다. 때문에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어 있는 지금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대로서 이 의미는 막중한 것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다. 입을 티끌에 댈 일이다. 혹시 소망이 있을 것이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욕을 듣는 것으로써 배 불릴 일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다(애 3:26-33).

뿌리 곧 우리의 근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근본은 영생하는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막강한 신분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초능력으로 인생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youtube를 통해 주로 접하게 되는데 초라하고 애잔한 이 자연계 몸에 갇혀 있는 우리로서는 초능력이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악령들과 같은 영물들 위에 첫 사람 아담은 군림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이 지상의 짐승들과는 달리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 당시 초자연계 몸에서 발산되는 광채로 옷 입었다는 증거 또는 그 흔적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솔로몬 왕 즉 인간의 극한 사치로도 그 입은 것이 들판의 백합화만도 못하다 하시지 않았던가(눅 12:27).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니까 당연히 그 어떤 동식물보다 뛰어나야 당연한데 그렇지 못한 이유를 밝히신 것이다.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그 굴이 있되 인자 곧 사람은 머리 둘 데도 없는 것"(9:58)이 인간에게는 비극적인 이 세상의 실상인 것.

얼마나 우리의 몰골이 처참하기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박테리아 병원균의 습격을 받아도 목숨을 잃기까지 하겠는가. 길 가다가도 무엇이 갑자기 떨어질 때 여기에 받치기라도 하는 양이면 그 날로부터 목숨은 없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같은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하는 사람의 몸뚱이에 부딪쳐 둘이 즉사했고 이 광경을 뒤따라오던 죽은 이의 만삭된 아내가 지켜보아야만 했으니 인생이여 그대의 현주소가 여기니라.

그런데도 철부지하게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살려고 하다니! 지나가는 차에 받혀도 금방 불구가 아니 되면 목숨이 끊어진다. 우리 인간의 근본과 뿌리를 말하는 것은 이런 초라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는 자연계 목숨의 삶에다 코를 박고 지내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 둘 데도 없고 들의 꽃이나 짐승들보다도 못한데 무슨 맛으로 살려고 한단 말인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과거의 화려한 날의 부귀영화(아담이 범죄 전에 누렸던)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인즉 이제는 알고 그런 허망한 생각들(이런 구차한 삶을 기를 쓰고 이어가겠다며 덤벙대는)을 버리고 그 옛 영광으로 회복되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련해 주셨으니 오직 그것을 찾아 누릴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잃고 미워하는 자가 영생하도록 보존한다고 경고하셨다(요 12:25). 이 세상은 인간을 이와 같은 비극 속으로 함몰시킨 악령 사탄이 지배하여 왕 노릇하는 곳이니 그래서 미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 인간들만은 미워할 수 없으니 같은 불행 속에서 허덕이는 똑같은 피해자(가해자 악령들 앞에서)이기 때문이다. 몰라서 악을 행하기도 하는 것이니 나 자신 절대로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실 것은 저들이 모르고 하는 일들인 것입니다"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본을 받아 스데반도 숨이 끊어질 때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시지 마십시오" 부탁 드렸다. 인생의 3대 명제라고 하는, "내가 누구인가? 내 정체가 무엇인가? 왜 이런 상태로 현재 존재하고 있는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성경만이 해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나의 위치는 비극이다. 과거의 영화를 상실한 비참함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음이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림이다"(애 3:39-41,50).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시 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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