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2일 수요일

<성경의 자체 증명>이라는 태양을 이길 <거짓과 속임수>의 어두움은 존재 않는다






그러면 아무도 믿지 않을 내용인데 성경은 어쩌자고 그런 내용을 담아 두고 있을까ㅡ답은 간단합니다, 진실이므로 사실 그대로 밝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성이 있는 지성적 인간인지라 생각하는 여유만 있으면 이렇게 고난 고통을 미리 일러주는 것은 거짓말이 아닌 진실이라는 증거가 됨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영물들 중에 악령이 생겨났듯이 인간도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이 있어 그 욕심이 세상 사랑으로 몰아가기 때문에(사탄은 인간이 이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선동하고 이에 따라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 이런 생각을 할 기회마저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성마저 마비되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각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로서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사리 판단을 3위1체의 원리대로 하면 됩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이와 대칭성을 이룬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증명이 될 수밖에 없고, 오는 세상이 본격적으로 삶을 향유하는 때라면 이 짧은 세상은 그 반대인 고난, 고통이 정상이지 결코 이상한 일,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 있고 그리고 그 성질은 서로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본격적인 삶을 향락하자면 이 세상에서는 고난 고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무리하게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안락함을 추구하면 오는 영원 세상에서는 죽음과 저주의 멸망밖에 없다는 증명이 됩니다(눅 6:24,25). 이 세상에서도 축복 받아 잘 살고 오는 세상에서도 축복 받아 형통한 삶을 누리는 법은 없으니 이 점 명심할 일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평생 죄에게 종 노릇하였지만(히 2:15) 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죽음과 생명의 대칭(상칭, 대립)이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고로 영원한 생명의 낙을 누릴 좋은 날을 바라는 자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인내로써 참고 견딤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며" 사람 구원하는 일에만 전념할 것입니다. 물론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 구원을 스스로 이룬다(빌 2:12)"는 뜻을 잘못 이해하여 자기 구원을 의식한다면 구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을 모르는데 구원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감격하여 사랑의 순종을 하고 그 사랑의 마음이 끝까지 변치 않음을 말하고, 그런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여 자아중심이 되어버리면 그 결국이 파멸임(악령들처럼)에 비추어 볼 때 결과론적으로 말해 "내가 구원을 이룬"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이 후자를 가리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 멸망"(빌 3:18,19)이라고도 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목숨 끊어져 육체가 썩기 시작한다는 단순히 그런 것만 의미함이 아니고 모든 고통, 고난, 불행 등이 죽음에 속합니다. 본격적인 생명(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던 당초의 초자연계의 육체로 된)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하에 한 순간이라도 끝나버릴 이 자연계 목숨이 인간에게 생명일 리 만무합니다. 왜냐면 육체가 연약하다보니 각종 고통과 고난의 대상으로서 그 뿌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미경으로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병원균에 의해서도 한 목숨 끊어지기는 예사입니다. 고로 인간에게는 이 자연계가 죽음이지 생명이 아닙니다. 개체적으로는 한시적 생명이지만 생육 번성함으로써 그 종(種)이 지금까지도 유지 존속되고 있는 자연계 동식물은 이런 인간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그들은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이 없는 반면 인간은 있는지라 따라서 필연적으로 육체도 초자연계적 요소를 지녀 초자연계에서 초자연계 존재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써 이런 자연계 육체의 죽음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되자 자연계 동식물과 동일한 생태계에 속해버려 동물들의 목숨 끊어짐도 인간을 따라 "죽음"이라 호칭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그들에게는 죽음이 아닌 '신진대사'쯤으로 인식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계의 동식물과 대칭되는 초자연계의 동식물이 바로 에덴낙원의 "짐승들"(아담을 위해 창조된)이요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또는 생명 나무 등 영적(靈的) 식물인데, 인간은 이들과 달라 그 대칭성의 요소가 자기 자신 안에 겸비되어 있음이니 즉 육체는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영혼은 초자연계의 것으로 즉 하나님 친히 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심으로써 조성되었은즉, 이는 아담(인간)이 하나님의 "6일 창조"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대리자'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초자연계의 영물들 다시 말해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을 다스리는 신분이었으므로 양 세계에 함께 속해 있어야 함이 필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적 진실은 소위 "외계인"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둥, 인간 앞서 그들이 존재했다는 둥 갖가지 거짓말과 속임수를 무위로 돌릴 수 있는 막강한 파괴력을 지닙니다(물론 저들의 거짓말에 넘어가 불행히도 그런 것을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이나). 소위 "외계인", "외계 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과거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악령들의 초능력에 의한 속임수임이 이로써 또한 폭로되고 있습니다.

악령들의 초능력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거룩한 천사들의 초능력과 충분히 맞먹는 것으로서 거짓된 것까지 합치면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비쳐지게(나타나게) 되어 있고 이를 기화로 저들은 성경의 하나님보다 또는 초능력보다 월등하니 그런 고로 성경보다 권위 있는 초월자임을 입증함이 아니냐 하고 윽박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결단코 초능력이나 기타 다른 무엇으로 잣대를 삼을 것이 아니라,  위의 그림에서 명시되고 있듯이 오직 자아중심이 혐오하는 '타인과 함께 하나되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이치로서의 고난 고통을 현세에서 받는 것이 진리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그가 진실로 "악한 자"임을 간파해버릴 수 있는 혜안(慧眼)과 안목을 갖게 됩니다. 왜냐면 이 악한 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의 인간 범죄로 인한 현재의 죽음의 불행과 고통을 부인하려들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단지 현재 상태대로의 인간 고통에서 구원되는 것만을 강조하고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법으로 자기의 출현을 부각시켜 당장 고난 없는 영원 행복의 삶을 약속하는 것으로써 속이려 들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반드시
 고난을 통과한 다음의 영원 행복으로서 나타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하심과 같습니다. 마지막 아담의 말씀이시므로 그 몸된 우리 역시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함을 명시하신 것입니다. 과거의 2천년 교회 역사로써 필요한 고난은 이미 닦아 놓아졌으니 이제는 영광의 마지막 아담의 재림, 재출현만을 남겨두고 있는 때로서, 더 이상 그 어떤 현란한 속임수와 거짓으로 "악한 자"가 임해도 모두 필요 없는 군더더기 즉 '속임수'임을 단정지을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의 것은 전혀 무의미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위를 가리는 유일한 척도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초능력' 여하, 여부가 아니라 저주 아래 있는 죄인 즉 '약한 자와 함께 된 약자로서의 고난'(고후 13:4) 유무입니다. 적 그리스도의 자아중심은 무조건의 강함만을 보이고 이를 강조함이 특징입니다. 바로 이 점을 예언하시어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수용하리라"(요 5:43)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위의(威儀)와 영광으로 나타나 주기를 바랐던 것이나 마지막 아담께서는 그 정반대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하고 영원히 살게 해주시고 세상의 강대국으로부터 압제 받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국민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쯤으로 잘못 인식한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의 '본질과 실상'을 밝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치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신다"(골
  3:1-6).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들이 나를 결국 멸망하게 만듭니다.  다시는 멸망하지 않게 되는 보증쯤으로 "구원"을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죄의 대가가 죽음"(롬 6:23)이라는 것이 변개될 수 없는 철칙임은 나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영원히 확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산 자가 됨은, "다시는 '죽은'(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도록"(고후 5:15) 되어 있어, 이전의 것과는("이전 것은 지나갔음"-고후 5:17) 완전히 다른 새 창조물됨을 말함입니다.

만일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산다면 내가 아직 새 피조물이 아니라는 다시 말해 구원되지 않았다는 자체 증명만 될 따름입니다. "구원 받음"은 옛 창조가 망가졌으니까 새롭게 창조하시는 의미이고, 그 방법이 "영(성령)으로 나게" 하시는 것이므로(현재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은 나이므로 "육으로 나" 있는 것을 토대로) "다시 출생(重生ㅡ거듭 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창조에서 먼저 자연계 육체를 만드시고 다음 순서로 그 코에 하나님 친히 숨을 내쉬심으로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영)을 주입하심(생성시키심)과 똑같은 순서입니다.

그래야 6일 창조의 '연속'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별개의 창조가 되어버려 현재의 나를 토대로 "새 사람"을 만드신다는 것은 불가능이 됩니다. '연속'이 되어야만 '처음 창조의 결과물'인 나의 육체를 그 성전(聖殿)으로 삼아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나는 마지막 아담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성령은 아버지와 "하나"(요 10:30/갈 3:28)가 되어 계시는 아들 곧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영혼이 조성되던 순간의 아담이 죄 없는 몸으로서의 "거룩한" 상태였던 것처럼,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는 내 몸도 세례로 말미암아(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롬 6:3,4) 나 자신 죽음의 대가를 치름으로 인해 죄 용서가 되었으므로 "거룩한" 상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죽은 자이므로 나의 죽음에 동참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나 위한)이지만, 이 죽음은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이기에 형벌로서의 죽음인즉 이 경우 나는 그리스도의 그 형벌의 <고통>의 죽으심에 은혜로(왜냐면 나 자신은 그 고통을 당하지 않았기에) 동참함이 됩니다. 

나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의 죽음이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과 같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형벌의 죽음,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 창조 당시부터 정해진 것이 아닌 즉 정상이 아닌 비정상 상태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이)범죄하지 않았다면 결코 죽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엄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셨다는(사 53:8,11) 의미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으셨다는 의미는 맞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죽음의 실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고로 '죽음'과 그 죽음의 '형벌적 측면으로서의 고통'을 별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아기를 안은 엄마가 강을 건너는데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엄마가 강을 건너느라 겪는 온갖 고통을 모른다고 할 수 있으나 "강을 건너 갔다"는 사실만은 아기나 엄마나 동일합니다. "엄마가 아기를 대신해서 건넜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둘이 함께 건넌 것입니다. 만일 마지막 아담께서 사형수(死刑囚)로서의 십자가 죽으심이 아닌 자연사를 하셨다면, 그 죽으심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죽음이 죽음 자체로써 끝나면 죄의 대가로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로만 그치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와 하나되심으로 즉 우리와 함께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니까(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구원되고 영생하는 자로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함이 있기에), "죄 씻음과 용서"(우리 위해 흘리신 피로써ㅡ생명이 피에 있으므로[레위기 17:11] 그렇고 우리 위해 생명을 바치심 즉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몽땅 주심이니까 그 주신 생명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 및 "거룩해짐"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죽음'은 "하나님"으로서 가장(假裝)은 하지만 적 그리스도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속임수로써 "그리스도"로 자처하며 나올지는 모르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의 자아중심의 속성만은 숨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양의 탈은 썼지만 뒤에 삐죽이 나와 있는 이리의 꼬리만큼은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중심으로는,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의 형벌에 처해짐으로써 현재 겪고 있는 이런 고난 가운데에서 한 몸으로 함께 하는 동참의 이치를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마지막 아담께서 홀로 이런 고통을 받으시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몸된 교회로서의 모든 사람 각자 역시 이 머리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되어 있어, 때문에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 지금까지 각 시대를 통해 교회는 일관되게 수난(受難)의 때를 보냈고 현재도 그러합니다. 이것을 적 그리스도는 모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각 나타나 즉시 영생 또는 행복한 삶에 들어가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고, 장기간에 걸쳐 인내로써 고난을 견디도록 하는 이 필수적이고도 귀중한 측면은 흉내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이리의 꼬리"입니다.

고로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와 악한 자 곧 적 그리스도와의 명백한 차이입니다. 자아중심은 사랑(하나됨) 가운데에서 고난 고통도 함께 나누는 그런 일을 못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 본색을 적 그리스도는 그대로 노정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빼놓을 수 없는 '함께 하는 고난'의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지금까지의 장구한 세월을 참아 오신 것입니다. 또 교회에게 인내를 가르쳐 오신 것입니다.

앞서의 설명대로 인간의 이 죽음(영생 못하고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인)이 정상이 아니고 범죄로 인한 저주로서의 비정상이기 때문에 이런 저주 속에 놓인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한 몸의 이치로 구원함이므로 반드시 그 구원 대상자의 저주의 고난과 함께 해주어야 하는 것이 필연인데 이 함께 하는 고난을 자아중심은 도무지 흉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의 우리 위하신 죽음이 참혹한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사실이 이런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저주의 형벌을 받는 것임을 명확히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친히 우리와 하나되시어 같은 고난 고통을 우리와 함께 당하시는 사랑의 모습인데 적 그리스도는 이를 모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죽는 척하는 무슨 시늉은 해 보일지 모르나(계 13:14?) 단순한 겉치레 흉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당하신 죄의 죽음으로서의 형벌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의 위치에서 당하시는 것이므로 모든 인류가 당하는 의미이고 머리로서 그렇게 하신 것이며 그 몸된 교회가 그 머리의 고난 받으심에 함께 하여 동참함은 당연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했으므로 교회의 이 고난 받음이 인생들의 구원(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차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에서 고난 받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랑으로 한 몸(하나)되는 이치에서 죽음의 저주 아래 놓인 인생들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이며, 한 몸되는 체제에서는 한 지체가 고통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 당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 수준의 3위1체의 원리를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 몸으로서의 하나됨은 가장 행복한 이상적인 삶을 누리는 유일무이의 방법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아담)이 자연계 육체로 지내다가 범죄하였다면 절대로 이런 고난받음을 강조할 리가 없습니다.

죽음과 고난이라는 것을 모르는 초자연계 몸으로 살다가 범죄함으로 이런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결과로 인해서 그 저주로 이런 지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죽은 사람 살리고자 하는 이의 편에서 그 상대의 죽음에 같이 함으로써 하나가 되지 않고는 그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는 마지막 아담의 본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 죽음의 고난 받음을 적 그리스도가 모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범죄함으로써 인간이 이 자연계 존재가 되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인즉 적 그리스도의 정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으로 하나됨에서 오는 필연적으로 함께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3위1체의 원리에서도 맞는 것이니 양면이 대칭성을 띤다는 점에서 영원 세계와 대칭되는 이 세계가 고난의 질서 아래 있다는 것은 이의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세상이 만일 고난이 없는 세계로서 살 만한 곳이라면 오는 영원 세계는 시종일관 고난이라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육체적으로 삶과 죽음이 갈라져 있는 것처럼 오는 세상도 생명과 죽음(멸망)으로 가름되어져 나타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대칭성이라는 것은 사면팔방으로 좌우 상하로 갈라져 나타납니다.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자가 적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심판을 자초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같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음"(:10)의 근본 원인이 자아중심의 이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고난을 기피, 외면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난만 끼어들지 않으면야 기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 받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사랑의 고난'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진해서 받는 고통, 주인 의식으로서의 고난 받음입니다. 당당한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서의 보람찬 일임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고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삶의 이치가 사랑에 있고 사랑은 하나됨에 있어 달든지 쓰든지 모두 함께 함인데, 단 것만 욕심 내고 쓴 것은 뱉는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순종하는 척하다가 귀에 쏙 들어오는 바 그런 자아중심을 따지며 가리지 않고 즉 고난받음을 요구함이 없이 영생으로 즉각 인도한다니까 적 그리스도에게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때 이는 자아중심으로서 단지 영생만 욕심낸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인즉 구원이 결코 될 수 없고 멸먕만 자기 몫으로 태이는 것이니 스스로 "믿음에 있는가 자기를 시험해보며"(고후 13:5) 항상 성찰할 일입니다.

언제나 유의할 것은, 이 '둘의 하나됨'은 일방적인 것이 아닌 쌍방 교류(교제, "사귐"-요일 1:3,6,7)의 양면성과 동시성의 구조라는 것입니다. 갑의 생명은 을에게 와 있고 을의 생명은  갑에게 가 있는 그런 체제입니다. 이것을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실천해 보이신 것이니 곧 자신의 생명, 자신의 전부를 나('머리'에 대한 '몸')에게 선물로 안겨 주셨으므로 나도 그 본을 따라 나의 생명, 나의 전부를 다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ㅡ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골격입니다.

그리고 인과, 주종 관계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종 관계라 함은 큰 자(머리)는 작은 자(몸)가 반드시 따라 하도록 본을 보인다는 것이고, 때문에 이는 다시 인과 관계로 직결되는 바, 큰 자 곧 머리가 보인 본이 '원인'이 되어 작은 자 곧 그 몸이 이를 본받아 따름의 '결과'를 낳게 마련이요, 또 이 작은 자의 머리의 본을 따름이 '원인'이 되어 작은 자를 위함이라는 '결과'를 큰 자가 다시 낳는다는 이치가 '양면성의 동시성'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ㅡ"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마 13:37)이라 하신 대로, 이상과 같이 "바요나 시몬"이라는 이름에다 내 이름을 대입시키면 됩니다. 오늘날은 과거의 사도들의 모든 교훈이 성경으로 잔달되어져 있으므로 그 어떤 사람도 사도직(職)을 갖지 못하는 대신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목자(牧者)이고 동시에 양 떼(양 무리, flock)가 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 21:16)는 명령은 모두에게 해당됩되는 명령입니다. 

<기도>로써 그렇게 할 일입니다. <말씀>으로 하는 것은, 먼저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자기의 전도를 받고 처음으로 믿음에 들어온 이들을 상대로 할 것이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성경을 각자가 입수할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교과서의 저자(著者, author)이시니, 각자가 성경을 읽으며 성령의 친히 가르쳐 주심을 사모할 일이고, 그 중에서 선택된 목자(牧者)는 그러한 삶의 본(보기)으로서 자신의 겪은 과정에서 얻은 비결(know-how)을 일일이 때마다 전달해주는 것이 "말씀을 가르침"이 됩니다. 

고로 말씀으로써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상대가 처음으로 믿어 성경(말씀)에 대해 전연 백지 상태에 있을 때의 경우이고 어느 정도 기본 지식(구원 얻는데 필요한 "지식"은 워낙 간단 명료하니까)이 있을 때는 본인(당자) 스스로가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여 친히 말씀 가르쳐 주심을 받기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읽음으로써 "구하고(기도하고) 찾고 두드리는(성경 읽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고 남의 덕에 배우겠다는 마음에는 절대로 진리의 문은 "열려지지"(마 7:8) 않습니다. 이렇게 성령께 배운 것을 "교회로서 모일 때"(고전 11:18-"as a church") 서로가 서로를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특정한 날 특정 시간에 모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초대 교회가 한 대로(행 2:46/히 3:12,13/10:24-31) <날마다> 믿음의 형제들끼리 그와 같이 모여 상호간 가르치며 합심 기도에 힘쓸 일입니다. 주인 의식으로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은, 천국은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마 11:12/눅 16:16)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핵심이므로 사랑은 항상 적극 능동적으로 나가는 주인 의식이 특징이라는 그 뜻입니다.

사람이시지만 초자연계 몸이 되시어 하늘에도 계실 수 있는 마지막 아담께서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나타나시기로 되어 있지만,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으로서 성령으로 또한 우리 각자와 함께 사시고 일하고 계심으로써, 그 몸된 교회의 주인이시고 그 실질적인 운영자, 관리자, 각지 각 교회의 설립자이시니, 성령께로부터 난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한 그 어떤 인위적인 것에도 피동적으로 맹종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인도자, 동역자(함께 일하는 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직접 그 명령을 받들어 주체 의식으로 매사 임해야 하는 때입니다. 


오늘날의 소위 "종교 개혁"은 과거처럼 <일개인>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각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자가 그 원동력이 됨으로써 온 누리에 확산되어 나가는 때입니다. 이런 것이 결코 중구난방일 수 없는 것은, 한 성령 안에 있으므로 그 인도하심이 제각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로서 일사불란하게 기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사랑의 자유의지로 정착되기까지 우여곡절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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