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14일 화요일

(2) <함께 사는 것>이 아닌 <구원과 관련해서만 인식하는 그리스도> 정도면 구원은 없다







1년 365일 24시간 나와 함께 사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다. '아담'의 의미가 원래 그러하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육체를 물려받아 나의 육체가 바로 아담의 형상(형태)인 것이다. 이 '사람의 형태'를 떠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동물의 형태를 띠겠는가. 한평생 나는 아담의 육체와 더불어 일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영원히 그러하다.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아담을 지으신 것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 위해 "마지막 아담"이 되시고자 함이다. '첫 사람' 아담이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아담'의 의미 또는 성격이 똑같은 닮은꼴의 생산에 있다. 첫 사람 아담의 육체가 우리 각자 개개인에게 물려져 모두 아담의 육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아담께서는 인간의 이 이중 구조 즉 '육체와 영혼'이라는 대칭성에서 '육체'(이는 첫 사람 아담의 몫)와 대립되는 '영혼'의 측면으로 첫 사람 아담처럼 그 몫을 하심이니 이는 당연하며 결코 이상한 일일 수가 없다.

처음부터 마지막 아담을 세우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이 범죄로써 죽은 자가 됨으로 인하여 그가(남녀 모두) 받은 저주와 더불어 그 아래 만물 역시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함께 고통 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롬 8:22)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결과다. 때문에 이렇게 생명 아닌 죽음에 갇힌 인생들을 다시 처음 창조 때와 같은 산 자로서 새로이 만드시고자 함이다. 그래서 이렇게 된 인간과 더불어 만유를 애초의 창조 당시와 같은 정상 상태로 회복하시는 과정에 현재 있는 것이다. 

인간만 회복하면 되시지 왜 만물까지 덩달아 회복하셔야 하는가 하면, 인간이 만물의 머리로서 자기 아래 있는 만물과 '머리와 몸'의 체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 몸 구조에서는 머리 따로 몸 따로가 없으므로 머리의 저주는 몸의 저주로 미치기 때문에 아담이 받은 저주는 땅에게까지 파급된 것(창 3:17). 고로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시기까지 하는 "마지막 아담"이 되실 리가 만무하다.

사람이 되시지 않아도 피조물에게 임하시는 사랑은 어제나 한결같으신 것이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에 국한된다. 인간이 비정상적인(범죄로 인해) 상태 곧 자연계적 존재가 됨을 인해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는다는 등의 불편한 점과 기타 여러 여건이 부정적이어서 그렇지, 처음과 같은 초자연계 몸으로 있는 경우라면 하나님을 인지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었다(비록 보이시지는 않는다 해도-딤전 6:16).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범죄한 것이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시지 않아서가 아닌 것이다.

얼마든지 하나님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초자연계 몸의 특징 중 하나다. 또한 이렇게 사람이 되신 것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가시적으로 우리 시야에 들어오시기 위해(인간이 현재 자연계에 속하여 비정상 상태에 있으므로) 일부러 사람이 되신 것도 물론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이므로 우리와 함께 죽으심으로써 하나가 되신 바탕을 토대로 나와 함께 살아나심을 인해 나를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게 하려 하시는 것으로서, 인간 피조물에 대한 사랑, 오직 변함없이 이 하나 때문이신 것.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개개인과 1년 365일 하루 24시간 함께 사신다고 해서 우리를 간섭하시거나 억지로 통제하시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전에 우리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모른 채 혼자 능히 살 수 있는 듯이 살아 왔던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늘 끝만큼도 강제하시는 일이 없다. 우리만을 위하시고 우리의 뜻과 상관 없이 그 무엇이든 일절 하시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여차하여 자아중심으로 흘러 급기야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ㅡ세상에 오심으로 십자가 죽으심도 내게 관한 한 나의 죄가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죽으시게 만든 것이었으므로) 판이 나더라도 그냥 그대로 잠자코 십자가에 못박히신다고(히 6:6) 함으로써 이 점을 성경은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정도이시다. 즉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의미는, 자기를 위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심에 있다.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순간 당장 내게 어떤 조처를 취하신다는 그 어떠한 표현도 성경은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리스도를 그렇게 해서 "죽였으니" 내게 관한 한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뜻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요일 5:12) 세상 사람 즉 일반 불신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으로만 결론 내려진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실 때 나만 위하시니 일방적으로 즉 내가 주님을 위함이 없어도 나를 위하시는가 하면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면 내가 성령을 받기 전 회개할 때 오로지 주님 위해서만 살겠노라고 결의하고 약속을 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만을 위하시는데 나는 나만을 위했으니 이를 뉘우치고 나도 이제는 하나님만을 위하겠다는 의지 표명은 당연하다. 이런 것 없이 세례 받고 신앙 고백한다고 성령께서 절대로 임하시지 않는다. 임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누차 지금까지 설명해오는 대로, 이 위하심은 내가 주님을 위함으로 비로소 표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니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르는 사랑의 삶이다. 갑과 을이 동시에 양면성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사랑이 가능할진대, 범죄한 아담이나 불복종하는 영물(그래서 이들을 악령이라 하는 것)이나 이들을 모두 일방적으로 사랑하심으로써 죄의 대가를 얼마든지 면제해 주셨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죄는 죄대로 물으셨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질서가 확립되지를 않는다. 법과 질서가 없으면 행복한 삶도 물론 없게 된다. 그냥 물에 물 탄 듯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가해자가 되어 고통의 천하가 되어버린다. 결국 하나님이 손을 대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조물 스스로가 공멸(共滅)을 초래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하실 리 없다.

함께 사는 것이 악(惡, 나쁜 것)이고 선(善, 좋은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왜 남녀로 짝을 지어 사는가. 그것이 피차간의 간섭과 강제로 그친다면 누가 결혼할 마음을 품겠는가. 자식 생산이 목적이라면 자식을 낳자마자 헤어질 것이 아닌가. 아담(남자)에게서 아담의 닮은꼴(여자)이 났기 때문에, 둘로 현재 되어 있지만 원래 아담 혼자(하나)였던 상태를 유지하려고, 다시 하나로 합치려고 그런 피차간의 욕구가 생기는 것이니 일종의 귀소본능이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도 만물이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남녀 성별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런 욕구도 없어진다. 그 대신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마지막 아담)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즉 그리스도의 영을 모두 받아 모시고 있는 관계로 새로운(육체적이 아닌 영적인) "귀소본능"이 영구히 자리잡게 된다.

고로 남녀 한 몸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아감에 아주 지장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함께 함이 없으면 살 맛이 나지 않는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육체로 한 몸됨의 경우다(창 2:24). 성경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우리 각자는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이 그와 같다.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하기에 그것부터가 그렇다. 생모가 없으면 젖어미의 젖을 먹든지 하다못해 소의 젖(우유)을 먹든지 그렇지 않고는 필연코 죽음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런 관계를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제7장에서도 명백히 해놓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하나됨 즉 "한 영"됨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한 몸"됨보다 더 우선시되고 일차적인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아내 남편이 함께 살면 마땅히 아내/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꼬 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마련이다. 이것이 신혼 초기 또는 금슬 좋은 부부 사이다. 그런데 나와 주님과의 관계는 이보다 더 앞서는 것임을 바울은 밝힌 것이다. 아내/남편끼리의 관계도 사랑하는 사이라면 당연히 그러한데 하물며 나와 마지막 아담(사람)과의 관계야 일러 무삼하리요.

"마지막 아담"께서는 다시 강조하지만 사람이시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시라면 "마지막 아담"이 되실 수가 없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시다. 왜 이 점을 강조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인 듯이 상상하고, 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구원에만 한정시키고, 함께 사는 것을 마치 동화 속 이야기나 하는 듯이 이상하게 여기는 경향이 거의 전부데 해당되기 때문이다.

오직 구원을 얘기할 때에만 그리고 교회에 가서나 예수님을 들먹일 뿐 일상 생활에 함께 하시고 함께 일하시는데 대해서는 금시초문인 듯 벌레 씹는 듯한 시늉이 되고 있다. 진실대로 말하면 우리가 구원(영생) 한 가지만 욕심 낼 뿐 주님과 함께 일함으로써 주님을 위하는 일에는 너무 생소하게 지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주님과 하나되어 있다는 것 즉 구원 받았다(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즉 성령 받음의 의미를 밝히시면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는 너희를 보낸다"(요 20:22,23) 하신 대로, 우리가 주님을 섬겨 주님을 위한다는 것을 의미함이다.

이것이 바로 둘이 하나됨의 삶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다. 영원히 이러하다. 삶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며 살아 왔기 때문에 이 대목에 와서 의아해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머리와 몸의 체제에서 무조건 그리고 영원히 하나되어 있는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이요 그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상대는 나의 삶을 살아주는 체제다. 내가 나를 위하는 여기에서 범죄가 형성되고 이것이 자아중심(selfishness)이며 아담이나 악령들이 이 때문에 범죄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와 같이 살지 않았다는 것은 살 줄을 몰랐다는 의미밖에 더 되지 않는다. 그렇게 자아중심으로 살아도 살아지니까 '사는' 것으로 오해한 것뿐이다. 이제는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으로 살지 않으면 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사랑은 항상 능동적으로 적극성을 띠며 주인 의식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의미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만 그리스도만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의 삶의 정위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요일 3:16)과 똑같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다. 한 몸으로 살면 머리를 위시해서 몸의 각 지체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되고 내가 내 것으로 누림이 되니 머리를 위시한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이 된다. 이것은 서로가 사랑으로 종 노릇하여 섬기는 터이므로 자연적으로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는 경우 내 것은 내 것밖에 없고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해치는 등의 악(범죄)만 무성하게 되고 그렇다고 요행히 운수 좋은 자만 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모두가 함께 결국 망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신 것도 아담이 초자연계 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아담으로서의 죄 값을 다 치르신 다음이므로 계속해서 자연계 몸에 속박되어 있을 일체의 이유가 없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 전 초자연계 몸이었던 것과 같이 초자연계 몸이 되셨기 때문에 하늘에도 오르실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다.

또 한 사람으로서 죽음에서 살아나셨으면 의당히 그 살아나신 몸으로 이 세상에 계속 살으셔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자연계 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자연계 몸이시기 때문에 하늘에 지금 계시고 이렇게 하늘에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게 계시는 것은 자연계 몸으로 계시는 것과 똑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시는 것은 목적이 있어서이고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된 다음에는 반드시 이 자연계 인간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시게 되어 있음이 필연이다. 방금 설명한 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니까 그 부활하신 그대로 세상에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다시 오시는 이유 중의 하나다.

마지막 아담께서 그 성령으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은 육체를 가진 한 개인이(그가 내 남편이든 아내든 그 누구든 간에) 나와 함께 사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단지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에 보이시지 않고 우리 육감으로 인지할 수 없다는 그 차이뿐이다. 이런 사실들은 심오하거나 오묘한 것도 아니고 상식 차원에서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일인데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영생한다는 이 자아중심의 이기주의 욕심을 믿음이라 착각하도록 만든 사탄의 인위적 교리로 인해 마치 큰 일이나 되는 듯이 이런 설명에 낯설어하는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정상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라면 이런 설명이 있기도 전에 벌써 그 인도하심(가르치심)을 따라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을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마지막 아담께서는 내게 남편이나 아내가 있어 그 아내와 남편을 대하는 것과 같은 똑같은 사람이신 것이요 보통 사람과 하나도 차이가 없으시니, 그래서 여자의 태를 통해 세상에 오시지 않았는가. 고난 받으시기 전에도 항상 당신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 the Son of man)라고 하시면서 사람이심을 강조하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이신 점에서 우리와의 차이는 명백하다. 하나님이셔야만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셔야 즉 성령으로 계셔야 모든 믿는 각 사람과 상대하시어 그와 함께 하나되시고 사시고 일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그리고 그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이 바로 나의 승천, 하나님 우편에 함께 앉아 있음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의 육체로는 절대로 우리 각자 앞앞이 오셔서 함께 하나가 되실 수가 없다. 우리의 영혼처럼 되어 계시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이 불가분인 것처럼 함께 사시는데 이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인가. 재인식,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인류사상 성경 외에 인간을 완전 해부한 것은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밖에는 없다
이런 중대한 사실이 오늘에서야 알려진 것은
오늘 이 시대가 그만큼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 삶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고
이로써 ① 하나님의 실존(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과
② 인류가 구제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인 마지막 아담과
③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는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함에서는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 이상 가는 것은
이제까지 나타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가 모두 성경에서 나왔음이다.
성경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 세상 창조의 사실을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유일한 하나님의 방책임을 밝히는데
이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가 이러한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학문이나 지식이라는 것은
피상적인 것으로서 겉과 주변만 맴도는 것이거나
한 쪽 면 즉 자연계 외곬으로만 파들어가는 것이었으니
이는 오직 적 그리스도의 초능력 과시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의 모든 것을 조종하기에.
고로 근본적인 것에는 접근치 못하도록 사력을 다해 차단시켜 놓은 것.

그러나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에 대해서는
그러한 악령의 간섭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마지막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 좋은 소식) 전파를 위해
천사들이 막강한 능력으로 세상에서 활동하는 시발점이기 때문.

악령들 자신만으로 보아도 이런 진리를 굳이 차단시키기 위해
이전처럼 사력을 다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자신 창조신으로 가장하여 활동하는 데에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 거의 방관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인간의 삶, 그 생애 자체를 이같이 낱낱이 해부할 수 있었던가.
3운법칙에 의해 인간은 '역사'라는 무대에서 한낱 '꼭두각시'요 배우'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던 인생들을
하나의 벌레처럼 자기를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사 41:14).
오직 마지막 아담과 연합해야만 진정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당당한 제 자리를 회복하게 된다.

영원히 사느냐 아니면 죽지 못해 존재하는 고난 고통의 연속이냐 하는
두 가지 노선을 놓고 각자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일인가ㅡ오직 그 양자 택일만을 위해
오늘날의 당신의 목숨,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가도 나중에 이를 번복하는 일도 "많다"ㅡ
성경은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경고하고 있다.

지금 올바른 결정을 했다고 대수가 아니고 전부가 아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히 2:3)ㅡ이 등한히 여김으로 인해
애당초 믿지 않음과 같이 되는 비극적 결말이 됨을 성경은 간단없이 경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고를 소위 "교회"는 발해 본 적이 없다.
복음 자체를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머리가 없어서도 아니고 인격적 결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찾고 구하고 두드림이 없기 때문이다. 현상 만족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웃는 자, 부유한 자가 화가 있다, 재앙이 있다 하신 것이다.
현재 상황에 안주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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